[스크랩] 정토불교의 세계 / 제9장 중국의 정토사상 - 2. 혜원의 염불결사와 정토사상

2013. 8. 27. 16:10경전 이야기

 

 2. 혜원의 염불결사와 정토사상

 

 

                                                                        장휘옥 著/불교시대사

 

생애와 염불결사

 

정토교 흥륭 초기에 결사를 만들어 염불삼매법을 널리 퍼뜨린 사람은 여산의 혜원(慧遠, 334~417)이다.

 

혜원은 동진시대 안문루번(雁門樓煩, 山西省) 출신으로 21세 때 동생 혜지(慧持)와 함께 도안(道安312~385)의 문하로 들어갔다.

 

<반야경>강의를 듣고 대승불교가 뛰어남을 알고 부지런히 공부하여 반야공관(般若空觀)의 깊은 뜻에 통했으므로 도안은 동국(東國)에 도를 널리 전할 사람은 혜원이라고 칭찬했다 한다.

 

전진의 건원 15년(379)에 전진왕 부견(符堅)이 군대를 보내어 양양(襄陽)을 공략해서 동을 장안으로 끌고 갔으므로 혜원은 스승 도안과 헤어져 제자 수십 명과 함께 형주(荊州, 호북성)로 갔다.

 

그 후 384년경에는 강남의 여산(廬山, 江西省)으로 들어갔다. 그때 동문인 혜영(慧永)이 이 산의 서림사(西林寺)에서 혜원의 입산을 환영했으며, 자사 환이(桓伊)에게 청하여 혜원을 위해 동립사(東林寺)를 건립하여 머물게 했다.

 

혜원은 여기에 선실을 건립하여 선법을 일으킴과 동시에 사찰에 무량수불상을 모셔 놓고 서방왕생을 열렬히 구했다.

 

402년에는 유유민(劉遺民) 등 승려와 속인 123명이 모여 무량수불상 앞에서 서약을 하고 염불왕생의 법을 닦았다. 이것이 백련사(白蓮社)라는 염불결사의 창립이다.

 

혜원은 진(晋)의 의희 13년(417)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여년 간 여산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승가제바(僧伽提婆) 등에게 경전번역을 요청하거나 스스로 경론에 서(序)를 붙이기도 했다.

 

그의 학식은 당시 학자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많은 승속을 교화하여 여산교단을 강남 제일의 불교세력으로 만들었다.

 

교단이 융성해지자 이것을 왕권하에 예속하려던 권력자 환현에게 혜원은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저술하여 세속의 권력에 굴하지 않는 출가자의 입장을 명확히 표명하여 이후 예경(禮敬) 문제에 관한 출가자의 귀감이 되었다.

 

 

 

혜원의 정토사상

 

혜원의 염불은 부처님의 상호를 관하는 관상(觀想) 염불이 주된 것이었지만, 부처님의 형상(形像)을 관하고 명호를 외우며 여념없이 계속해서 자신의 불성을 개현하려는 관상(觀想) 염불도 함께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혜원의 이러한 염불사상의 근저에는 <아미타경> 등 수많은 대승경론을 번역한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23)의 영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장안의 구마라집이 용수의 공관(空觀) 불교를 소개하자 도생(道生)과 혜관(慧觀)을 라집에게 사사시켰으며, 자신도 편지를 통해 문답을 주고받으면서(후에 <大乘大義章>으로 정리됨) 새로 들어온 불교 섭취에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두 사람 사이에서는 구마라집의 사상을 혜원이 실천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있다.

 

구마라집은 반주삼매라는 아미타불의 관상(觀想)이 필경공(畢竟空)을 관하는, 소위 대승공관(空觀)의 실천이라 하여 눈앞에 보이는 부처님도 실은 여러 가지 조건(緣)에 의해 생긴 것으로서 존재성(自性)이 없는 꿈이나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사상에 근거하여 혜원은 '견불(見佛)'을 통해 소위 '본다'고하는 작용의 허망함을 버리고 진실로 올바른 부처님을 보는 반주 삼매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양자를 결합하는 관계가 <반주삼매경>의 사상이었다고 하는 것은, 정토교로서는 아직 과도기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었음을 말해 준다.

 

혜원의 백련사의 염불결사는 그 후 남지(南地)에 영향을 미쳤다.

 

송의 담홍(曇弘, ?~595)과 제(齊)의 법림(法林, ?~495)은 <무량수경>과 <관무량수경>을 독송하여 극락을 기원하였다. 또한 북지(北地)에서도 북위시대에 무제가 폐불을 단행했을 무렵(444~446)에 혜통(慧通, 415~477?)은 항상 극락을 기원했으며, 혜광(慧光, 468~537)과 도빙(道憑, 488~559)도 지성을 다하여 극락에 왕생하기를 원했다 한다.

 

그러나 정토사상의 대성은 남북조시대의 담란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출처 : 미주현대불교
글쓴이 : 파초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