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1. 18:52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당의 백제지역 지배와 웅진도독부
출 처: 百濟文化史大系硏究叢書 제6권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 중 발췌
일반적으로 660년 이후 백제는 멸망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 근거로 당시 당이 백제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했던 5도독부의 존재를 들고 있다. 그러나, 당의 관부가 설치되었다는 것이 곧 백제의 지배의 실현이라고 볼 수 있을까? 관부가 설치되더라도 그 지배의 형식이 어떠했는가에 따라 국가의 멸망과 직결시킬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역대 중국왕조의 대외정책 양상을 살펴보면 이민족 국가를 점령한 것이 곧 그 국가를 병합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대왕조들은 국외의 나라들을 점령한 후 그곳의 구세력들을 인정하여 책봉하고 이들에게 점령전과 같이 자치를 허용하여 그 댓가로 조공을 받는 것으로 양국 간의 외교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국외의 영토를 점령한 후 그곳의 자치를 허용하던 대외정책을 '기미정책'이라고 부른다. 기미정책의 당대적 표현인 ‘기미부주체제’ 역시 그 지역의 주권을인정하는 가운데 당의 체제 내로 편입되는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다.
당의 도독부가 설치되었다고 해서 백제고토가 당의 영토로 간주되었다고 볼 수 없다면, 백제지역에서의 주권은 아직 백제인들에게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백제고토에 설치된 도독부는 초기부터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는 줄곧 사료 상에 나타난 도독부의 설치 자체에만 주목하여 도독부의 지배가 어느 정도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또한 백제 멸망 직후에 관한 몇몇 사료는 도독부 이외의 관부가 설치되었음을 알려주는 사료도 있어서 도독부체제가 유일한 당의 지배체제였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어떤 형태로든 당이 백제를 지배하였다면 그 기간은 660년부터 신라가 백제를 병합한 673년까지 13년간일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백제에 대한 당의 지배는 어떠하였는가. 백제에서는 왕조의 멸망과 함께 체계적인 역사의 기록도 사라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후 백제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세한 기록을 볼 수 없다. 대신 660년 이후 백제에 대한 기록은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채 여러 역사서에 흩어져 있다. 이 글에서는 당시를 알려주는 여러 사료들을 검토하여 왕조의 멸망 후 백제지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복원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당이 백제고토에서 실시하려고 했던 지배의 방식이 어떠하였는가를 알아보고, 이를 통하여 당시 백제 사회의 면모를 엿보려고 한다.
1. 당의 백제지역 지배정책의 성격
1) 당의 대외정책의 성격
7세기 중반 唐왕조는 황제의 이상과 권위가 전 세계에 확장되는 구조적 질서를 관철하고자 했다. 즉, 魏晋南北朝이래로 분열되었던 중국을 재통일하고, 帝國을 완성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 것이다. 세계제국 건설의 욕망은 비단 당대에 형성되었던 것이 아니다. 황제는 이념상 천하의 모든 인민과 영토에 대한 지배를 구현하는 주권자였다. 이 개념은 漢代이후 유교의 영향 하에 더욱 발전하여 천하를 교화의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이로써 ‘황제의 일원적 지배가 실현되는 세계’라는 이상적 세계관이 형성된 것이다. 이 세계관은 분열시기 등의 혼란기를 제외하고는 전통시대 내내 중국 대외정책의 기본적 이념으로 제시되었다.
그 정책들은 형식상으로는 책봉조공체제로, 내용상으로는 기미정책으로 나타난다. 이 외교정책의 주요 명분은 有德君主의 덕을 이민족 지역에 전파하려는 것이었다. 이 명분을 시행하기 위한 것이라면 전쟁이라도 유덕군주의 덕을 해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신념으로 인하여 대외적 전쟁 혹은 몰인정한 점령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당의 대외정책의 기본원칙은 점령지의 주민을 제국의 일원으로 편입하는 것이었다. 점령지에 설치된 기미부주체제는 이러한 원칙에 따른 것이다. 그렇다고 당의 기미부주의 주민들이 당의 내국인과 마찬가지로 황제의 지배체제에 귀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점령지에서는 여전히 그 지역출신 군장의 정치적 독립이 보장되었고, 이전체제에 적용되던 법률이나 세제도 여전히 유효하였다. 당의 모든 점령지에 대한 지배체제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당의 기미부주체제는 설치지역의 규모나 상황에 따라, 혹은 당조와의 관계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변이되어 설치되었다. 역대 중국왕조들의 대외정책은 치밀하게 확립된 정치적 전략에 기반한 것이었다.
7세기 당시 한반도에 적용된 지배체제 역시 기미부주체제이다. 당이 백제지역에 대해 설정 해 두었던 기미주부체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을까. 당이 구상하였던 지배체제의 성격을 통해 당시의 백제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 백제지역의 전략적 중요성
당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기왕의 서북지역에 대한 점령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隋제국에서부터 추진되던 한반도 공략도 지속하고 있었다. 한반도에 대한 공격의 시발은 고구려공략이었다. 당 제국이 한반도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이렇다 할 설명이 없다. 그러나 당 제국이 구상하고 있던 세계제국의 범주 속에서 한반도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십 수 년에 걸쳐 고구려에 원정을 지속하였던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고구려의 완강한 대응을 수차례 경험 한 후에는 한반도에 대한 대응전략을 변경하였다. 변경된 전략은 한반도의 중심부를 먼저 점령하여 그곳을 거점으로 남북으로 진출하려는 것이었다. 즉 백제를 먼저 점령하여 한반도의 허리를 차지하고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고구려를 공격하려 하였다. 당연히 당의 공격대상은 고구려에서 백제로 변경되었고, 백제는 졸지에 당의 엄청난 군사적 공격을 막아내야만 했다.
당이 백제를 공격하였던 또 하나의 원인은 백제가 취했던 대외정책에 있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와 결탁하여 신라를 공략하면서 한편으로는 왜국과의 통교를 통하여 한반도 밖에서도 지원군을 확보하려 하였다. 백제가 고구려나 왜국과 결탁하려는 이러한 움직임이 당에게는 매우 위험스럽게 보였다. 당 왕조는 한반도의 세력균형이 깨져 이들 중 어떤 국가라도 성장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주변지역에 거대국가가 출현하지 않도록 관리하였는데, 그것이 소국가체제의 주변국들을 그대로 기미부주체제로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개개의 소국가는 각기 당조와 책봉조공체제를 맺을 뿐 그들 간의 연합은 미연에 방지되었다. 그런데 백제가 결탁하였던 국가가 당과의 대결에서 굽히지 않았던 고구려였으므로 당의 백제공격은 시급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
당은 백제·고구려 공략의 협조자로 신라와 결탁하였다.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660년에 백제가, 그리고 668년에는 고구려가 각기 멸망하였다. 당시를 기록해 둔 중국정사의 사료에 의거해서 살펴보면 당은 백제 고토에 熊津都督府를 두고, 고구려고토에 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각각의 지역을 통치한 것으로 알려진다. 따라서 660년에서 668년에 이르는 기간에 백제고토에 있어서 최고의 통치 기관은 웅진도독부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리고 백제고토에 있어서의 당의 지배방식에 대한 연구는 都督府및 州縣의 위치에 대한 역사지리적 고증과 1도독부 7주 51현제의 시행에 관하여 진행되어 왔다. 또는 주로 당이 백제고토에 설치했다고 알려진 웅진도독부의 조직과 기능에 대한 연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일찍이 大原利武(1928,「 百濟故地における唐の州縣考」,『 朝鮮』159호, 조선총독부)는 백제에 대한 지배체제는 당초 熊津都督府를 대표로 하는 5都督府體制로 계획되었으나 백제점령 직후 일어난 부흥군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백제고토 전 지역을 대상으로 고안되었던 5도독부제의 시행은 탁상공론에 그쳤다고 보았다. 末松保和(1935,「 百濟의 故地における唐の州縣について」,『 靑丘學叢』19, 청구학회)도 대체로 이 견해에 동의하고 있는 가운데 唐은 5도독부제를 포기하고 新羅와 半分하게된 百濟故土의 서남부 지역에 熊津都督府를 중심으로 하는 1都督府制를 시행하였다고 보았다. 다른 기존의 연구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도학도 5도독부제의 시행이 불가능하였음을 지적하고 있으며, 1도독부제의 시행을 주장하였다. 그 시행 시기는 664년 부여융이 웅진도독으로 임명된 후로 잡아 664년 이전시기의 당의 지배에 대하여는 적절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백제고토에 대한 사료 중에서 ‘都護’(도호)라든가 ‘百濟府’(백제부)라는 등의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사료들은 그 동안 별 다른 설명도 없이 무시되어 왔다. 만일 지금 이러한 사료들을 충분히 분석해 본다면 ‘도호’라는 관직과 ‘백제부’라는 관부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 ‘도호’의 존재는 기존의 도독부체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글에서는 이 기록들에 주목하여 백제지역에 파견된 도호의 임명과 도호부의 설치의 가능성을 검토하고자 한다. 백제고토에도 도호부체제가 시행되어 어느 정도 존속하였는가의 문제는 있을지언정 기왕의 사료를 무시하고 그 설치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아직 백제고토에 대한 당의 지배체제가 도독부체제였다는 설이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당이 점령지역에 어느 정도의 관부를 설치했는가 하는 문제는 당의 정책수립자들이 그 지역에 대해 갖는 정책적 중요성을 드러내주는 중요한 표지이다. 당시 백제지역에 도독부체제가 아니라 도호부체제가 시행되었다고 본다면 당의 대이민족정책 중에서 백제지역이 갖는 정책적 위치도 새로이 설명되어질 수 있다. 초기에 설치된 도호부는 그 뒤 어느 시기에 이르러 도독부체제로 전환된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이것은 당의 백제고토에 대한 정책의 변화를 의미할 것이다. 당이 백제를 점령한 후 도호부체제를 구상하여 시행하다가 어느 시기에 이르러 도독부체제로 전환하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한반도의 삼국 중 백제는 점령하고 고구려에 대해서는 공략을 서두르면서 우방 신라의 원조를 얻어 내야했던 당으로서는 한반도 지역에서의 대외적 전략에 매우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백제고토에서 부흥군의 활동으로 인해 당은 한반도에서 계획대로 작전을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신라의 원조를 얻어 내는 것도 순탄치 않았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섬멸하는 데까지는 의기투합하였으나 점령지 백제에 대한 처리문제는 또 다른 갈등을 낳았다. 백제지역에서 나당간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처리되는가에 따라서 고구려 원정의 승패가 좌우될 형편이었다.
당과 고구려·백제·신라·일본으로 구성된 동아시아 세계에서 한반도 삼국의 세력균형이 얼마만큼 중요한 관심사였는지는 현재 동아시아의 정세를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당시 당조는 북방의 돌궐세력의 팽창으로 인해 북방의 위협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만이라도 세력의 균형이 깨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삼국은 상호 결합과 이반을 거듭하며 자국의 성장을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여기에 7세기 이후 왜국으로 성장한 일본의 세력이 가세하면서 동아시아의 정세는 한층 복잡한 구도를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한반도는 당이 그동안 상대해 왔던 서역도시국가들에 대한 지배나 북방유목민족들의 지배와는 또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한반도의 삼국은 건국의 초기부터 나제동맹이나 삼국 말기 백제와 고구려의 유착관계에서 볼 수 있듯이 나름대로의 삼국간의 대립과 연합을 반복하면서 경쟁적으로 발전해 왔던 국가들이다. 당은 이들을 상대로 혹은 적국으로 혹은 우방으로서 작전을 수행해야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삼국 중 백제를 제일 먼저 공략하여 점령하였다고는 하지만 결과는 오히려 복잡한 삼국간의 쟁투에 관여한 꼴이 되었다.
고구려의 강건한 저항과 신라의 야망을 적절히 조절하며 당은 백제에 대한 점령을 공고히 할 계책과 고구려를 섬멸시킬 작전을 구상하여야만 했다. 또 신라를 달래어 고구려 원정에 동원하고 한반도에 대한 당초의 계획을 수행하려 하였다. 따라서 백제가 점령된 뒤 백제고토에 대한 지배체제의 구축은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백제지역은 당의 한반도 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교두보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기미부주는 중국의 전통적인 대외정책의 기조인 ‘羈糜而已 不絶通御’라는 어귀에서 말하고 있는 그대로 다만 지배의 틀에 포함될 뿐 엄연히 정치적·경제적·문화적 독립체로 존립한다는 원칙이 관철되고 있는 지역이다. 따라서 당의 관부가 설치되었다는 사실이 백제의 멸망이라고 볼 수는 없다. 백제는 그 이후에도 당의 기미부주에 속하며 존속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제점령 초기 웅진도독에 왕문도가 파견되었던 것은 오히려 파격적인 인사이다. 보통 도호에는 중국인이 임명되지만 기미부주의 도독에는 현지인이 임명되었던 것이 관례였다면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당시 백제 왕통의 형편상 도독에 임명될 자가 선명히 떠오르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당으로서는 중국인을 도독으로 임명한 후 다시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백제지역으로 보내고 있다. 이때가 되어서야 백제지역에서의 기미부주체제가 정상적인 형태를 갖추고 운영되기 시작했을 것이다.웅진도독부 이외에 다른 도독부에 어떤 이들이 임명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사료의 부족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웅진·사비 등지에 겨우 2~3명의 중국 장군들이 파견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여타 지역에 중국인이 파견되지 않았음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렇다면 이 지역의 도독 역시 현지인들을 임명하였을 것인데 이들에 대한 기록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당이 백제고토에 설치한 관부가 도호부이든, 도독부이든지 간에 이것은 당의 대외정책의 기조인 기미부주의 형식을 한반도에 적용한 것이라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그렇다면 백제에 설치된 당의 관부를 백제지역 만의 특수성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당의 대외정책 속에서 발견되는 기미부주체제의 보편성을 확인하고, 그 의미를 도출함과 동시에 백제지역에서 발견되는 기미부주체제의 특수성을 아울러 확인하여 그 의미를 추적하여야 할 것이다.
2. 백제도호부 체제의 성립
1) ‘도호’ 유인원에 관한 기록
백제지역이 나당 연합군에 의해서 점령되던 시기에 관한 역사적 기록 중 가장 자세한 것은 삼국사기와 중국의 역사서인『新唐書』·『舊唐書』의 기록이다. 지금까지 주장되어 온 도독부체제의 근거 또한 이들 사서의 기록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러나 이 문헌 사료들 간에도 몇몇 군데는 상이하게 기록되어 있는 부분이 있어 재검토가 필요하다. 또한 금석문에서도 백제지역에 대한 지배체제의 성격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지금까지 백제지역에 대한 당의 지배체제는 웅진을 비롯한 5도독부의 설치로 시작된 도독부체제임이 지적되어 왔다. 그러나 사료들 중에는 도독부 이외에 도호부의 존재를 암시하는 사료가 있다. 이 가능성을 지지하는 가 장 중요한 근거는『삼국사기』와 `劉仁願 紀功碑'에서 발견된다. 『삼국사기』와 `유인원기공비'의 기록에는 백제멸망시 당에서 파견한 인물인 유인원을 '도호’로 기록하고 있다.
A. 도호 유인원은 멀리서 고립된 성에 주둔하였다가 사면에 모두 적을 맞아 늘 백제(부흥군)의 공격으로 포위되어 있었는데, 항상 신라가 포위를 풀어 구출되었다.(三國史記 卷7 新羅本紀7 文武王11年 7月26日`答薛仁貴書')
B. 그(유인원)로 하여금 도호 겸 知留鎭으로 삼고, 신라왕 김춘추 역시 小子金太를 보내 함께 성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唐劉仁願紀功碑)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여기의 도호라는 기록을 무시하여 온 듯하다. 그래서 ‘都護劉仁願’이라는 기록을 도독으로 파악한 것이 일반적인 태도였다. 이러한 태도의 이면에는 백제고토에서의 도독부만이 유일한 체제인 것으로 보고자 하는 입장이 전제되어 있다. 도호유인원이라는 표현은 위에서와 같이 두개의 서로 다른 사료에서 보이고 있다.
사료에 나타난 ‘도호’의 의미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번째는 기존의 학설대로 유인원을 도독으로 보고 여기에 기록된 도호를 도독의 오기이거나, 아니면 존칭으로 보는 경우다. 두 번째 경우는 유인원의 당시 관직이 정말 도호였을 경우이다. 첫 번째 경우를 받아들이면 기존의 설과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 그러나 만일 두 번째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지금까지 백제지역에 설치되었던 최고관부를 웅진도독부로 보았던 기존의 설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경우가 더 타당할 것인지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
사료 A는 671년 신라의 문무왕이 당시 안동도호부의 도호였던 薛仁貴에게 보낸 서신 중 일부다. 여기서 문무왕은 지난 662년 백제 부흥군과의 전투상황을 표현하는 가운데 유인원을 도호로 지칭하였다. 문무왕이 안동도호인 설인귀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도호가 아닌 유인원을 도호로 지칭하였을까? 한편 사료 B는 `유인원기공비'의 기록으로 이곳에서도 유인원을 도호로 표현하였다. 유인원 기공비는 663년에 제작된 것으로 비교적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담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개 후대에 편찬되는 역사서보다 금석문과 같은 고고학적 자료는 그 당대인에 의해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 신빙성을 더 인정하고 있다. 물론 `유인원기공비'의 성격이 유인원을 기리기 위한 기공비인 만큼 그를 높여서 그를 도호라고 불렀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도호라는 관직이 實職이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그러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더욱이 도호는 당의 이민족 점령지에 중국인만으로 임명되는 관직으로써 그저 존칭으로 쓸 수 있는 관직은 아니었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사료로『삼국사기』나『구당서』·『신당서』에서는 유인원의 관직을 留鎭郞將(유진랑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때 소정방이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다. 유진랑장 유인원은 백제부성에서 주둔하여 지켰고, 또 좌위중랑장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삼아 그 나머지 무리들을 진무하도록 하였다.(舊唐書 84 列傳34 劉仁軌傳)
여기에서 유인원의 관직으로 기록되어 있는 郞將은 유인원이 백제로 파견되기 이전의 관직이다. 이는 王文度가 左衛中郞將(중랑장이 랑장을 거느리는 상급관)이었다가 백제지역으로 파견될 때 웅진도독으로 임명되었던 것과 같이 유인원이 백제 도호로 임명되기 이전의 관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즉 위의『구당서』의 기록처럼 낭장이었던 유인원은 백제부성에서 진수하는 임무를 맡았고, 좌위중랑장이었던 왕문도는 웅진도독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유인원은 낭장의 신분으로 백제지역에 파견되었다가 도호에 임명되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는데 이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낭장과 도호는 관품 상 많은 차이가 있다. 유인원이 낭장의 신분으로서 백제에 파견되었다가 도호가 되었다면 단번에 몇 품을 뛰어 넘어 승진을 하였다는 얘기가 된다. 당시가 전시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파격적인 승진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신당서』백관지에 정리되어 있는 당대의 관직품계를 보면 中郞將은 正4品下이고, 左右郞將은 正5品上이다. 또『신당서』에 大都護府는 安西와 單于都護府뿐이라 하였으므로 백제에 있었다고 여겨지는 도호부는 적어도 대도호부는 아니다. 그렇다면 백제의 도호부는 上都護府이하의 도호부였고, 도호유인원의 품계는 상도호부의 도호인 正三品이거나 그 이하로 보아야 한다. 낭장으로서 유인원의 품계는 正五品上이었지만 도호가 되면서 正三品으로 격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번에 3품을 뛰어 넘는 인사였지만 이러한 상황은 당시 웅진도독이 되었던 왕문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신당서』의 규정에서 보이는 도독에는 上都督(從2品)·中都督(正3品)·下都督(從3品)이 있는데, 초대 웅진도독이었던 왕문도의 전력이 낭장(正5品) 또는 중랑장(從4品)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역시 적어도 3품 이상을 뛰어 넘어 승진되었던 것이다. 왕문도의 경우는 그가 백제지역에 도착하자마자 사망하여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백제점령에 아무런 공도 세우지 않았던 인물을 백제지역에 보내면서 초계의 관직을 제수하였다면 백제점령에 지대한 공을 세우고 백제부성에 진을 치고 백제에 대한 통치의 거점을 확보하였던 유인원의 이러한 승진이 이상할 것도 없다. 당시의 상황이 전시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당시 백제지역에 파견된 당의 군사중 將軍 蘇定方을 제외한다면 유인원은 관직품계 상 백제점령군중 제2인자의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또한 소정방은 백제점령 직후 당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소정방이 당으로 소환된 이후부터는 유인원이 백제지역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점령에 功이 있고 당시 그 지역의 최고 책임자인 유인원을 超階의 관직인 도호로 임명하였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렇다면 사료 A·B에 보이는 도호유인원이라는 기록을 잘못된 기록으로 보거나 단순히 존칭이라고 간과할 근거는 없어지게 된다. 오히려 도호가 당시 유인원의 실제관직이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기왕의 사료A·B에서 보이는 도호 유인원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백제고토에서의 당의 지배체제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百濟府城’의 위치와 성격
유인원이 백제에 파견된 도호였음이 분명하다면 백제지역에 도호부가 설치되었다고 보아야 함은 물론이다. 이제 백제에 도호부가 설치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검토해 보자. 백제고토에 도호부가 설치되었던 근거는 아래와
같은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C. 이때 소정방이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다. 유진랑장 유인원은 백제부성에서 주둔하여 지켰고, 또 좌위중랑장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삼아 그 나머지 무리들을 진무하도록 하였다. (왕)문도가 바다를 건너다 병으로 죽었다. 백제의 승 도침과 옛 장수 복신이 무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옛 왕자 부여풍을 내세워 왕으로 세우고 병사들을 이끌고 부성에 있던 (유)인원을 포위하였다. (당의 황제는)조를 내려 (유)인궤를 검교대방주자사 삼아 왕문도를 대신하여 무리를 통어하게 하였으며, 지름길로 신라병을 오게 하여, 합세하여 유인원을 구원하게 하였다.(舊唐書 84 列傳 34 劉仁軌傳)
D. 처음 소정방이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을 때 유진랑장 유인원은 백제부성에서 진을 치고 수비하였다. 또 좌위중랑장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삼아 그 나머지 무리들을 지휘하게 하였다. 왕문도는 바다를 건넜으나 죽었다. 백제의 승 도침과 옛 장수 복신은 무리들을 모아 주유성에 웅거하며 옛 왕자 풍을 왜국으로부터 맞이하여 왕으로 세웠다. 병사들을 이끌고 부성에서 인원을 포위하였다. 당의 황제는 조를 내려 검교대방주사자 유인궤에게 왕문도의 무리를 거느리게 하였고, 신라 병사를 지름길로 발하여 인원을 구원하였다.(資治通鑑 200 唐紀16 高宗龍朔 元年(661) 春正月)
E. 이때 낭장 유인원은 백제부성에서 남아 진을 치고 있었다. 도침 등이 병사를 이끌고 그를 포위하였다. 대방주사자 유인궤가 왕문도를 대신하여 왕문도의 무리를 이끌게 하고, 신라병사를 지름길로 발하여 세를 합하여 유인원을 구원하기 위해 싸웠다.… 도침 등이 이에 유인원에 대한 포위를 풀고 퇴각하여 임존성을 지켰다.(舊唐書 199 列傳14 百濟傳 龍朔元年(661))
우선 사료 C·D·E에서는 유인원이 백제부성에 진을 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백제부성’은 그 위치가 어디고, 府의 성격은 어떤 것일까. 사료 F와 사료 G는 백제부성의 위치를 추측하게 한다.
F. 낭장 유인원은 병사 일 만인을 거느리고 사비성에 머물며 진을 쳤다. 왕자 김인태와 사찬 일원, 급찬 길나는 병사 칠천을 거느리고 그를 도왔다.(三國史記 권5 新羅本紀5 太宗武烈王7年 9月3日)
24)“)
G. 이에 웅진·마한·동명·금련·덕안에 5도독부를 나누어 설치하였고, 그곳의 우두머리들을 선발하여 임명하고, 낭장 유인원에게는 백제성을 수비하도록 명하였으며, 좌위랑장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삼았다. … 문도가 바다를 건넌 후 죽자 유인궤에게 (웅진도독을) 대신하도록 하였다.(新唐書 220 列傳145 百濟傳 顯慶 5年)
H. 백제의 옛 장수 복신과 부도 도침은 왕자 부여풍을 맞이하고 그를 왕으로 세우고 유진랑장 유인원을 웅진성에서 포위하였다. 당의 황제가 유인궤검교대방주사자에게 조를 내려 전 도독 왕문도의 무리와 우리의 병사를 통어하도록 하고 백제 군영으로 향하게 하였다. 번번이 싸울 때마다 적진을 함락시켜 가는 곳에 앞을 가로 막을 자가 없었다. 복신 등이 유인원의 포위를 풀고 물러가 임존성을 지켰다.(三國史記 卷6 新羅本紀6 文武王 3年 5月)
사료 F에서 말하는 ‘사비성’과 사료 G의 ‘백제성’, 사료 C·D·E에 나타난 ‘백제부성’은 같은 시기에 유인원이 백제부흥군에게 포위되어 있던 성을 기록한 것이다. 이 자료는 당시의 사비성이 백제성 혹은 백제부성으로도 불리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물론 사료 H에서는 유진랑장 유인원을 웅진성에서 포위하였다고 하였는데, 후일 유인원이 웅진성에서 백제 부흥군에게 포위되었던 적도 있었으므로 이 기사에서는 이를 혼동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유인원이 포위되었던 城의 위치에 대하여 사료 H에서는 웅진성이라고 하였으니, 웅진도독이었던 왕문도의 무리를 유인궤가 통솔하여 그를 구원하러 오는 것으로 보아, 사비성의 오기로 여겨진다. 사료 G에서 확인된 바로는 660년 나당연합군 일만 칠천이 주둔한 곳도 사비성이고, 661년 도침 등 부흥군의 공격을 받는 곳도 그 주둔군이 머무르고 있던 사비성인 것이다. 당은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를 점령한 후 그 사비성에 나당의 점령군 일만 칠천을 주둔시켜 백제부흥군과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은 사비성을 점령하고 그 지역을 국호를 붙여 백제부라고 지칭하였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웅진의 도독부만을 중시하여 사비에 있었던 백제부에 대하여는 거의 언급된 바가 없다. 그러나 위의 기록들을 통하여 보면 당은 백제점령 직후 웅진의 도독부 외에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에도 당의 진영을 설치하였음이 분명히 드러났다. 그렇다면 사비성에 설치된 당의 관부는 어떤 성격이었을까? 기왕의 5도독부가 설치된 웅진·마한·동명·금련·덕안에는 사비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이것이 도독부일리는 없다. 사비성에 두어졌던 진영은 도독부가 아닌 또 다른 당의 점령 기구였을 것이다.
그리고 백제에는 도독부체제만이 유일하고 유인원이 왕문도 후임의 웅진도독이라면 왕문도의 군대는 유인원이 거느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당에서는 사료 F·G·H에서 알 수 있듯이 당은 새삼 유인궤를 檢校帶方州刺史로 파견하여 왕문도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있다.(660년 백제점령 직후 劉仁願은 百濟城을 지키고 있었다. 이 때 王文度가 熊津都督에 임명되어 당으로부터 파견되어오므로 百濟城의 위치는 熊津이 아닌 泗沘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백제성을 웅진으로 본다면 왕문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유인원을 구원하기 위하여 왔던 劉仁軌는 熊津에서 출발하여 劉仁願에게로 오는 것이므로 熊津에서 熊津으로 劉仁願을 구원하기 위하여 왔다는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 유인원은 사비성에 백제부를 설치하고 진수하고 있었고, 바로 이곳에서 백제부흥군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백제의 옛 수도인 사비에 백제부가 두어졌음을 확실해졌다. 그렇다면 백제부의 성격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앞에서 이것이 도호부일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그러므로 이를 도호부로 보아도 좋은지가 먼저 검토되어야 할 줄 안다. ‘백제부성’을 百濟府의 城으로 볼 때 그 의미는 백제고토를 총괄하는 부의 성이라는 뜻이 된다. 이와 달리 百濟의 府城으로 볼 때에는 백제고토에 설치된 하나의 부성이라는 의미가 된다. ‘백제부성’을 고유명사로 보아 백제도호부로 보든 보통명사로 보아 백제지역의 한 부성으로 보든 그곳의 위치가 사비임이 드러났으므로 사비에 어떤 “부”가 존재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비는 도성이라는 점에서 중심적 위치임이 분명하게 있지만 5도독부인 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 중 어디에도 사비의 명칭은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사비의 부를 도독부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미 확인한 바로는 당시 유인원의 관직은 도호였다. 그렇다면 도호인 유인원이 관장하고 있었던 백제부는 도호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백제부를 도호부로 본다면 그 정식 명칭은 百濟都護府가 될 것이나 安東都護府의 경우도 사료에는 安東府로 기록된 예가 있으므로 百濟府를 百濟都護府의 약칭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그 부의 성격이 도독부이거나 도호부이거나 이는 5도독부제의 시행을 확인시켜 준다. 백제부가 도독부라면 이는 웅진도독부 외의 도독부의 존재를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기 때문에 1도독부체제는 성립될 수 없다. 또한 도호부라고 한다면 1도호부 하의 1도독부체제를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이 백제부의 존재는 적어도 이 시기에 있어서는 당의 5도독부제가 시행되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도호유인원의 존재와 도호부인 백제부의 설치 및 5도독부의 시행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매우 시사적인 기록을『구당서』蘇定方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소정방의 열전에는 백제를 점령한 일과 관련하여 백제의 고토가 점령 직후 6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백제를 모두 평정하고 그 땅을 나누어 6주를 만들었고, 의자(왕)과 급·태 등과 바다를 건너 동도(낙양)에서 헌상했다.(舊唐書 83 列傳 33 蘇定方傳)
“分其地爲六州”라고 하여 소정방이 백제를 다 평정한 후 그 지역을 6주로 나누었다는 기록인데 여기에서의 6주는 당의 기미부주가 설치되는 지역을 말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백제에 5주가 아니라 6주가 설치되었다는 점이다. 당이 백제지역을 점령한 후 5도독부를 설치하였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백제지역을 6개 주로 나누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6개의 지역 중 5주를 5도독부의 설치지역이라고 한다면 나머지 1주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바로 이 1주가 유진랑장 유인원이 머물렀던 사비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올바른 판단일 것이다. 이 지역에 당이 어떤 관부를 설치하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있는 사료는 없지만 이 지역에 유인원이 머물었고, 그를 도호라고 지칭했다면 그 지역에 설치된 관부는 도호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본래 당의 기미부주체제에서는 도호부와 도독부의 설치는 점령지 전체를 도독부체제에 넣고, 그 중 중요한 거점에 도호부를 설치하여 군사적 전진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6개의 주는 바로 1도호부가 설치된 주와 5도독부가 설치된 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당은 옛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에 도호부를 두고 그 성을 백제부성이라 하여 백제고토에 대한 지배 기구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道琛·福信등이 이끌었던 백제부흥군이 웅진성을 공격하지 않고 사비성을 공격했던 이유도 분명해 진다. 사비성 바로 그 곳에 백제고토의 최고관부인 도호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3. 백제도호부체제에서 웅진도독부체제로의 전환
도호부는 본래 당의 대외정벌 시 전진기지와도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관부이다. 그러나 백제 도호부에서는 전혀 그런 기능을 기대할 수 없었다. 처음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 진을 치고 도호부체제를 갖추었던 당군은 도호부가 제 기능을 시작도 하기 전에 도호부체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원인은 부흥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도호부 자체가 유지될 수 없을 만큼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당은 백제의 옛 왕과 지역의 수령들을 도독으로 임명하여 자치를 허용하는 도독부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1) 백제도호부 체제의 와해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660년 도호 유인원은 나·당군 1만 7천과 함께 사비성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점령 초기부터 백제부흥군의 저항이 거세 당군이 진수하고 있던 사비는 부흥군의 주 공격대상이 되었다. 사료 C·D·G에는 661년 유인원이 백제부흥군에게 포위되었던 상황을 말하여 주고 있다. 같은『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료 H와 같은 기사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낭장 유인원에게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 또 좌위랑장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삼아 …(중략)…복신 등은 도성의 포위를 풀고 임존성으로 퇴각하여 지키고 신라인은 식량이 떨어져 돌아왔다. 이때가 용삭 원년(661) 3월이었다.(三國史記 卷28 百濟本紀 6 義慈王 20年 3月)
즉 백제본기에는 유인원이 머물고 있다가 복신 등에게 포위된 곳을 도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지적된 도성이 백제의 옛 수도인 사비성이라는 점은 사료 E에서도 명시된 바이다. 또한 그 시기에 대하여 사료 H에는 663년의 기사로 되어 있으나 사료 D·G와 위의 백제본기에는 모두 661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사료로 도호 유인원은 사비성인 백제부성에 머무르며 백제부흥군과 대치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661년 3월 백제부흥군이 일단 임존성으로 후퇴한 후 당군이 머물고 있던 사비의 백제도호부도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사실들을 알려주는 기사들을 시기에 따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I-1. 유진랑장 유인원에게 도성을 지키게 명하고 또 좌위랑장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삼았다. …유인궤에게 조를 내려 검교대방주자사로 삼고, 왕문도의 무리를 이끌게 하였고, 지름길로 신라병을 발하여 유인원을 구하게 하였다. …복신 등이 도성의 포위를 풀고 임존성으로 퇴각하여 지켰다. 신라인은 식량이 떨어져 귀환하였다. 이때가 용삭 원년 3월이었다.
I-2. 인궤의 무리는 작아 인원과 합군하게 하여 사졸을 휴식하게 하고 표를 올려 신라와 함께 도모할 것을 청하였다.
I-3. 복신 등은 인원 등이 고성에서 원군도 없이 있는 것을 알고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三國史記 卷28 百濟本紀6 義慈王 20年 3月)
J-1. 웅진도독 유인원 대방주자사 유인궤 등 … 웅진성에 주둔하였다.(資治通鑑 200 唐紀16 龍朔 2年(662))
J-2. 인원·인궤 등은 복신의 나머지 무리들을 웅진의 동쪽에서 대파하였다.(三國史記 卷28 百濟本紀6 義慈王20年 7月)
유인원이 사비의 백제부성에서 위기에 놓이게 되자 당은 661년 유인궤를 검교대방주자사로 임명, 백제로 파견하여 유인원을 구하게 하고 있다
(사료 I-1). 그리하여 661년 3월 백제부흥군은 任存城으로 퇴각하였다(사료 I-1). 그리고 사료 I-3에서는 이후 유인원은 662년 7월 이전까지 여전히 孤城(사비성)에 머무르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사료 J-1·2에서 662년 7월 이후 유인원은 웅진성으로 이동한다. 이 같은 상황들은 백제부성이 부흥군의 주 공격대상이였으므로 당의 도호부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을 보이는 것이다. 때문에 곧 유인원은 그 주둔지를 옮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였고, 이러한 이유로 늦어도 662년 7월까지는 사비성에서 웅진성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 바로『資治通鑑』의 기사인 사료 J이다. 당시 유인원이 사비에서 웅진으로의 이동한 것은 단순한 주둔지의 이동이라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사비에 설치되었던 도호부체제의 와해 를 의미하였을 것이다. 즉 이후 웅진으로 옮겨진 유인원의 관직은 통감의 기사에 나와 있듯이 웅진도독으로 바뀐다. 사료 J에서는 웅진도독 유인원과 대방주자사 유인궤가 웅진성에 주둔하였다고 하는데, 유인원이 그 이전부터 웅진도독이었다면 이러한 표현이 새삼스럽게 나올 필요가 없을 것이다. 즉 유인원은 사비성에 있다가 유인궤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난 뒤 그와 함께 웅진성으로 거점을 옮기게 되었고, 이때 당으로서는 사비의 도호부를 잃은 상황을 맞아 도호부체제를 포기하고 도독부로의 체제전환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이 백제를 공략하려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백제를 발판으로 삼아 고구려를 정벌하고 나아가 한반도에서 당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원대한 계획에 백제는 한반도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백제에 도호부가 설치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흥군의 저항은 예상외로 커서 백제지역에서 병력의 징발이나 군수물자의 조달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도호부의 본래 기능을 상실한 채 도호부는 사비를 떠나 보다 안정적인 웅진지역으로 옮겨 당의 본진을 다시 설치한 것이다. 웅진으로 옮겨진 후 당은 이 지역에 다시 도호부를 설치할 수는없었다. 웅진에는 이미 웅진도독부가 설치되어 있었던 데다가 웅진지역 역시 부흥군의 공격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도호부를 설치한다 하더라도 사비에서와 마찬가지로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도호부의 기능을 담당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2) 웅진도독부체제로의 전환
백제고토에서 당의 지배체제가 도호부체제에서 도독부체제로 전환하게 된 시기는 662년 7월 이전으로 보아야 한다. 662년 7월 이후에 유인원은 사비성에서 철수하여 유인궤와 함께 웅진성에 머무르며 부흥군과 여전히 대치하였으며 이때 유인원의 관직은 웅진도독이었다(J-1). 또 이후에 백제부흥군의 저항도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백제부흥군의 저항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당 조정에서는 유인원과 손인사를 당으로 소환하였다.
K. 임존성을 공격하여 빼앗자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도망갔다. 조칙으로 유인궤에게 백제의 병진을 거느리게 하고 손인사와 유인원을 귀환하도록 하였다. …(유)인원이 경사에 이르자 황제가 물었다.(資治通鑑 201 唐紀17 龍朔 3年/663)
L. (유)인원은 군사를 통어하여 귀환하도록 하고, (유)인궤가 남아 대신 수비하게 하였다.(新唐書 220 列傳145 百濟傳)
M. 백제의 여러 성이 모두 다시 귀순하였다. 손인사와 유인원 등은 군사를 정리하여 귀환하고 인궤에게 조를 내려 인원을 대신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진수하게 하였다.(舊唐書 199 上列傳 149 上百濟傳)
N. 검교웅진도독 유인궤가 상언하였다. “신이 남아서 수비하는 병사들을 엿보니 피로로 지친자들이 많고, 용감하고 건강한 자는 적습니다. 의복은 허술하고 낡아 오직 서쪽으로 귀환할 것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資治通鑑201 唐紀17 高宗麟德 元年/664).
이상의 사료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662년 이후에는 유인궤가 유인원의 직을 대행하고 있고(사료 L·M), 이 때 유인궤의 관직은 검교웅진도독으로(사료 N) 웅진도독 유인원(사료 J①)을 대행한 것이었다(사료 M). 당시 유인원은 孫仁師와 함께 당으로 돌아갔을 시기로(사료 K) 이제 백제고토에서의 당의 지배체제는 웅진도독부를 중심으로 하는 1도독부 체제로의 전환되었던 것이다.
유인원 이후로는 도호로 임명된 자가 보이지 않는다. 즉 이후에는 웅진도독만이 임명되고 있다. 백제부흥군에 의하여 공격을 받은 당군이 사비성에서 웅진성으로 진영을 옮긴 이후 당은 지금까지의 도호부체제를 포기하고 웅진의 도독부를 중심으로 하는 지배체제로 전환하였다. 그 과정에는 당이 당초의 계획대로 백제 전 지역을 지배할 수 없었고, 백제지역을 신라와 반분하여 지배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다. 그러므로 당초의 지배체제의 구상은 크게 축소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백제도호부체제는 백제에 도독부를 설치하는 것으로 축소되었던 것이다.
당은 당초 한반도 전체를 그들의 기미지배 하에 두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백제에 도호부를 두었던 이유도 그곳을 전진기지로 삼아 고구려와 신라를 기미체제하에 편입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당은 백제지역에 대한 지배조차 완전히 이룰 수 없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백제부흥군의 강력한 저항때문이었다. 663년 이후 백제부흥군의 세력을 어느 정도 잠재웠지만 그 후에도 여전히 신라와 백제고토를 양분해야했던 상황에서 백제지역에서는 당의 전진기지로서의 역할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라도 끝까지 백제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당이 이시기에 이르러 백제에 대한 지배체제를 축소하였던 이유는 신라와의 역학관계와 관련하여 설명되어야 한다. 당은 백제에서 도독부체제로의 전환 후 신라에 대하여도 도독부체제를 적용시켰다.
3년 여름 4월에 당은 우리(신라)에 계림대도독부를 두었고, 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삼았다.(三國史記 卷6 新羅本紀6 文武王)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은 일은 매우 상징적인 것이었으나 현실적인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당은 백제에 도독부를 둠과 동시에 신라에도 도독부를 두어 한반도 내에 두개의 도독부를 설치하였다. 이는 형식적이긴 하지만 한반도의 남쪽 전체가 당의 지배하에 놓이는 형태이다. 당은 백제고토에 대한 지배력이 축소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고, 또 신라와 그 지역을 반분하였지만 다시 신라에 당의 도독부를 둠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지배 책략을 늦추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당은 백제에 대한 미온적인 지배를 그대로 놔두고 고구려를 공격하고 있다. 당은 백제를 멸망시킨 후 곧 소정방 등으로 하여금 고구려원정에 나아가도록 하였다.
임오년에 좌효위대장군 계필하력을 패강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좌효위장군 유백영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포주자사 정명진을 누방도총관으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청주자사유인궤는 해운 선박이 전복된 일에 연좌되어 백의종군할 것을 스스로 청하였다.(資治通鑑 卷200 唐紀16)
즉 당이 백제를 멸망시킨 것이 현경 5년(660) 8月의 일이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고구려원정에 나서고 있다. 본래 당이 한반도를 점령하려 한 것은 한반도 지역을 직접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당이 백제점령 직후에 설치한 4개의 도독부에 백제의 수령들을 도독으로 임명한 것은 전형적인 기미지배의 형식을 보여준다. 백제도호부에 유인원을 임명한 것도 전형적인 기미지배의 형식이라 할 것이다. 본래 도호는 당인을 임명하여 그 지역 출신 도독들을 지휘하고 동태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겼다. 백제의 도호부 역시 본래 그러한 기능을 담당했다. 660년 8월 백제에 도호부를 설치한 후 곧 바로 이곳을 거점으로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백제에 대한 지배가 아직 공고하지도 않았던 상황에서 서둘러 고구려원정에 나서는 것을 보아도 백제도호부의 역할이 백제지역의 지배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한다.
백제지역에 대한 지배는 5도독부에게 일임하였고, 도호부를 중심으로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도록 한 것이다. 본래 도호는 지배지역의 인민과 물자를 동원하여 전쟁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하지만 백제도호부의 경우는 당초부터 백제부흥군의 저항이 심하여 인민이나 물자의 동원이 불가능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당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신라군과의 합군이었다. 고구려가 점령되기 전까지 백제는 한반도에서 당의 전진기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었다. 비록 초기 백제도호부체제는 계속 유지할 수 없었지만 이후에는 도독부체제를 유지하면서 고구려 원정에 당군의 교두보로서 백제지역에 대한 지배를 고수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당이 고구려를 점령한 후 그 지역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것은 백제도호부의 실패를 만회하고 재차 전 한반도에 대한 지배정책을 펴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백제도호부를 설치하여 한반도의 북쪽으로 진출하려던 당초의 계획은 이때에 고구려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한반도의 남쪽을 석권하고 나아가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려는 지배전략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보아진다.
4. 당의 이민족 지배체제와 백제도호부
백제고토에서의 당의 지배체제로 도호부가 설치되었을 가능성을 타진하는 과정에서 유인원이 도호로 존재하였고, 도호부가 ‘백제부’로 불리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 관부를 백제도호부체제로 규정하였다. 또한 당의 도호부체제는 백제부흥군의 저항에 부딪히고 신라와의 점령지 타협과정을 거치면서 그 지배영역이 크게 축소됨으로 인해 도독부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살펴보았다.
백제고토에서의 당의 지배형태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당시 당의 이민족 지배형태의 일반성을 고찰함으로서 분명해질 수 있다. 앞서도 밝혔듯이 당의 이민족 지배정책은 도호부나 도독부체제를 통한 기미정책이었다. 당은 점령지의 규모나 지배 집단의 정치적 성격 혹은 그 규모에 따라 도호부나 도독부 등을 적절히 설치하여 통치하였다. 이민족 점령지 중의 하나인 백제지역에 있어서의 지배형태가 어떠하였는가는 당이 당시의 백제라는 세력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기존연구에서는 당이 고구려를 점령한 후 그 지역에는 도호부를 설치하였고 백제점령 후에는 도독부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백제에 비해 강대국이었던 고구려에 상급의 관부인 도호부를 설치하고, 백제지역에는 도독부를 둔 것으로 보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도호부를 설치할 것인가 혹은 도독부를 설치할 것인가의 문제는 점령된 지역의 국력이 크고 작음에 따라서 결정되었던 것이 아니다. 도호부와 도독부는 기본적으로 그 기능이 다르다. 때문에 점령지에서 추진하고자하는 전략적 목표를 무엇에 두느냐에 따라서 달리 설치되었다. 기존의 논의에서처럼 고구려와 백제, 이 두 지역에 각기 다른 지배체제를 두었다면 그 이유는 당이 두 지역을 다르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전략적 목표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인지가 밝혀져야 한다. 그렇다면 그 이유를 규명하기 위해서 당시 백제에서의 당의 지배체제의 실상이 명확히 밝혀져야 함은 물론이다.
당은 백제나 고구려에 대한 지배 이전에 이미 많은 주변국들을 점령하고 그곳에 대한 지배형태의 틀을 갖추어 왔고, 이후 당의 점령지마다 기왕의 체제를 이식하는 방법으로 지배의 영역을 확대하여 왔다. 백제나 고구려와 같은 한반도 국가에 대한 지배도 이러한 당의 대외정책의 일환이었다. 당의 이민족지배체제 속에서 백제도호부와 같은 형태가 존립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면 백제도호부체제가 백제고토의 지배체제였음이 더욱 분명해 질 것이다. 또한 백제도호부가 도독부로 변화될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보다 명확히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1) 당의 이민족 지배체제와 도호부의 설치
당은 건국 이후 국내의 정세가 안정되었고 때마침 동돌궐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변방의 이민족들이 귀부해오자, 이들에 대하여 內徙와 置州의 조치를 취하였다. 이와 같은 당의 대외정책의 기본 틀은 당 太宗 정관 4년(630)에 조신들의 논의에서 결정되었다.(舊唐書 下卷194 上列傳 144 上突厥 上) 돌궐지역에 설치된 당의 관부는 도독부였다. 구당서·신당서 직관지에 기록된 도독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경조·하남·태원목과 도독·자사는 각 지방을 잘 다스리고 관리의 고핵을 담당하며, 덕으로써 교화를 널리 피며, 사람들을 위무하여 화합하게 하고, 농상을 권장하며, 오교를 돈독히 하는 일을 맡는다.(舊唐書 44 職官志3)
도독은 제주의 병마와 갑옷과 무기·성황·진수·군량창고를 관리하고 관부의 모든 일을 판결한다.(新唐書 49 下百官志4 下)
즉 도독은 주자사와 동일한 민정기능을 수행함과 동시에 통활 지역의 최고 군사령관으로서 군사적 기능을 가진 관직으로 당조의 지방관의 임무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변경에 설치된 도독부의 경우, 변방이민족들은 당 중앙정부와는 원거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민족에 대한 당조의 영향력 증가에 따라 이들을 제어하기 위한 어떤 제도적 장치가 요구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요구에 따라 곧 도호부설치가 나타난다.
도호의 직은 제번을 위무하고, 바깥의 도적들을 무사편안하게 지키고, 간사한 무리들을 감시하고, 적을 정토한다.(舊唐書 44 職官志3)
도호는 제번을 통어하는 일과 위무 정토 공의 서열을 가리는 일, 과오를 벌주는 일, 관부의모든 일의 판결을 맡는다.(新唐書 49 下百官志4 下)
도호의 임무를 도독의 임무와 비교하여보면 도독부와 도호부의 기능상의 차이가 명확히 구분됨을 알 수 있다. 도독부가 정복지뿐만 아니라 중국의 내지에도 설치된 지방행정기관인데 비해 도호부는 정복지에만 설치되는 특수기구였다. 도호는 도독과 마찬가지로 민정기능을 수행함 동시에 그 설치지역이 이민족 거주지였던 것과 관련하여 자신의 군대를 점령지에 주둔시키며, 이민족을 慰撫, 감시하고 주변지역을 征土하는 군사적 기능을 함께 수행하였다. 기미부주에 속한 도독은 그 지역의 수령에게 주어지며 세습되는 것인데 비해, 도호에는 반드시 중국인이 파견되어 도호부 주변의 여러 羈靡府州를 통령하였다. 당이 이시기에 이르러 기왕의 도독부체제가 아니라 특별히 도호부체제를 통하여 이민족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였던 것은 도호부라는 특정기구를 통하여 이민족에 대한 지배를 확대하기 위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도호의 임무가 도독과 크게 다른 점은 위의 직관지 사료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주변지역에 대한 정토의 임무일 것이다. 당조가 도호부체제를 채택한 것도 바로 도호의 정토기능 때문일 것임은 분명하다. 즉 당은 도호의 주둔지를 거점으로 하여 끊임없이 주변지역을 정복함으로써 당의 지배영역을 확장하여 갔으며, 도호부는 당의 세계지배를 위한 유효한 기구로 역할 하였다.
2) 당의 도호부체제와 백제도호부
당 왕조의 주변국에 대한 지배영역의 확장과정은 수 개의 도호부의 설치와 그 발전과정을 통하여 설명되어질 수 있다. 당은 태종 정관14년(640) 서역의 高昌國을 멸하고 安西都護府를 최초로 설치한 이래 수차례의 정복사업을 통하여 도호부를 증치하였다. 또 이미 도호부가 설치된 지역에서는 도호부를 기점으로 한 영토적 진출이 아울러 이루어졌다. 당의 대표적인 도호부로는 6도호부가 꼽히는데, 그 설치지역과 연혁을 간단히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도호부의 설치지역은 정치적 중심지이며,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안서의 龜玆, 안북의 金山, 안동의 平壤 등은 전략요충지이며 정치의 중심지이다. 또한 交州를 개편한 안남도호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변방의 이민족을 정토한 결과로 설치되었다는 점이다. 또 642년 안서도호 겸 서주자사로 파견된 郭孝烙과 같은 인물은 도호부의 치소인 高昌을 전진기지로 하여 구자 정벌에 나섰고, 그 결과로 정관 22년(648)에는 도호부의 치소를 구자로 이전하는 등 영토적 확대를 이룩하였다.
각 도호부들이 관할하고 있는 도독부나 주의 숫자를 보더라도 도호의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 것이었는가 짐작할 수 있다. 안서도호부의 경우 22개의 도독부와 118개의 주를 관할하고 있고, 안북도호부는 5도독부와 10주를 관할하고, 선우도호부는 3도독부와 12주를, 안동도호부는 9도독부와 14주를 관할한다. 또 안남도호부는 41개의 주를 관할하고 북정도호부의 경우 25개의 도독부를 관할한다. 이상의 6도호부는 그 자체가 그 지역의 중앙정부와도 같은 구심점의 역할을 수행할 정도로 거대구역을 관할했다.
당이 많은 도독부와 주를 설치했던 것은 변방 이민족들이 통합되지 못하도록 이민족 지역을 잘게 부수어 놓았기 때문이다. 도호부가 설치된 지역의 특성에 따라 도독부가 많이 설치되는 지역이 있고, 안남의 경우처럼 도독부가 설치되지 않고, 州만 설치된 곳도 있다. 이러한 차이는 설치지역의 지역규모나 사회의 규모, 국가 혹은 정권의 존립 상태에 따라 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6도호부외에도 소규모의 도호부로서 고종 현경 2년(657)에 안서도호부의 관할 하에 기미부주의 성격을 띤 蒙池(몽지)와 崑陵(곤릉) 2개의 소도호부가 설치되었다. 당에서는 6도호부외에도 각지에 소규모의 도호부가 설치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이 각지의 도호부들을 정비하고 동서남북의 도호부체제를 갖추고자 하였던 시기는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었던 668년 이후의 일로 생각된다. 668년 고구려 멸망 후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이래, 669년 막북지역을 안북도호부로 개칭하고 있다. 이는 최초의 도호부인 안서 도호부와 함께 당의 세계지배 이념의 구체적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679년 교주도독부 마저 안남도호부로 개편함으로써 당의 이민족 지배는 동서남북의 도호부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때 사방의 도호부를 안서·안동·안남·안북으로 개칭한 것은 그 상징적 의미도 크다고 하겠다. 즉 중원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제국의 구조를 상징하는 것이며, 도호부의 성격에서 알 수 있듯이 동서남북으로의 영토적 확장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이후 8세기 중반까지 당의 영토팽창은 계속 시도되었다.
蒙池나 崑陵과 같은 소규모 도호부의 존재는 당의 도호부가 반드시 거대영역에만 설치되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안북도호부의 경우 처음 설치시의 명칭은 燕然都護府로서 그 지역 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백제와 같은 소규모의 도호부가 설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또한 당이 백제도호부를 설치한 것은 그곳을 한반도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기 위함이었다. 도호부의 전진기지로서의 의미는 그 지역에서 정토에 필요한 식량·물자는 물론 병력을 동원하는데 있다. 백제도호부의 경우는 이러한 도호부로서의 역할 수행이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이는 곧 도호부로서의 고유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백제도호부의 존재는 더 이상 의미 없는 것이 되었고 도독부로 전환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한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백제의 경우와 같이 도호부체제가 도독부로 전환되는 예는 안동도호부의 경우에서도 발견된다. 성력 원년 6월 안동도독부로 개편하였다. 신용 원년 다시 안동도호부로 되었다.(舊唐書 卷39 地理志2) 『구당서』의 안동도호부조에는 안동도호부가 한때 도독부로 개편되었던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기구의 축소나 확대는 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된다.
5. 웅진도독부체제의 의의
백제고토에 있어서 당의 지배체제가 처음부터 도독부체제로 운영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그리고 사료에서 보이는 ‘도호’라는 기록과 ‘백제부성’이라는 기록을 연결하여 백제고토에서의 도호부 설치의 가능성에 대하여 검토하여 보았다. 당시의 기록은 중국의 정사인『구당서』·『신당서』와 송대 사마광이 쓴『자치통감』, 그리고 우리의 역사서인『삼국사기』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역사서에는 당시의 일이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 이를 보완해 줄 수 있는 것이 고고학적인 자료들이다. 다행히 현재 남아 있는 `유인원기공비'를 통하여 사료들 상의 차이점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사료 상에 보이는 도호유인원의 존재를 이 기공비를 통하여 확인하였고, 사료들을 비교하여 백제도호부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이로써 당의 점령 초기에는 도호부를 중심으로 하는 5도독부제의 시행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 도호부체제는 부흥군의 저항으로 지속될 수 없었다. 당은 백제점령 초기부터 끊임없이 백제부흥군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어 백제 전역에 대한 완전한 점령에 실패하였다. 당이 점령하였던 지역은 백제의 백제도호부가 있었던 사비지역과 웅진도독부가 설치된 지역에 불과했다. 그나마 이 지역들도 부흥군에게 포위되어 있었으므로 당의 점령은 사실상 몇 개의 성을 점령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태에서 백제도호부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백제에 도호부를 설치했던 본래 목적은 이 지역의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여 고구려 원정에 투입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계속 도호부체제를 고수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도호부의 존속기간은 660년부터 662년 7월 이전까지로 짧은 기간이다. 662년 7월 이후에는 도호부체제는 무너지고 웅진도독부체제로 바뀌었다. 또 백제부흥군의 세력이 소멸되었던 663년경 이후에는 신라와 백제지역을 반분함으로써 여전히 백제에 대한 완전한 지배를 이룰 수 없었다.
결국 당은 백제부흥군의 완강한 저항과 신라의 강경한 태도로 인하여 백제에 대한 완전한 지배를 이룰 수 없었다. 66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나 이 또한 고구려 부흥군의 공격을 받아 곧 요동으로 이전하게 된다. 더욱이 676년 신라의 통일로 당은 한반도의 북부 일부만을 차지하는 선에서 만족 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당의 세계제국 건설 계획은 수정이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백제부흥군과 고구려부흥군의 저항은 신라의 통일로 연결되었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한반도의 역사에서 신라의 통일이 갖는 의미만큼이나 커다란 의의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지역에 있어서 당의 지배체제가 백제도호부체제에서 웅진도독부체제로 전환된 것은 또한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앞서 살펴보았지만 당의 기미부주체제에서 도호부와 도독부는 그 성격상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도호부에는 唐人이 임명되지만 도독부에는 그 지역의 지도자를 임명함으로써 도독부가 설치된 지역은 정치적인 자립 정권이 수립된다. 만일 백제도호부가 계속 유지되었다면 백제지역은 도호의 관할 하에 5도독부가 종속되는 구조에 놓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부흥운동으로 도호부가 폐지됨으로써 백제는 웅진도독부체제가 시행되었다. 따라서 웅진도독부로 의 전환은 당의 직접적 지배를 간접적 지배로 전환시킨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또한 백제도호부체제가 계속되었다면 백제의 유민들은 당의 처음 계획대로 고구려원정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본래 도호는 변경의 최전방에 설치된다. 그리고 그 곳을 출발점으로 더 넓은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정벌전쟁을 수행하는 관직이다. 정벌 시에는 중앙으로부터 군사와 물자를 보급 받지 않고, 대개 그 관할 하의 도독부에서 군사와 물자를 조달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백제도호부체제가 와해됨으로써 백제유민들을 고구려원정에 동원하는 일이 순조로울 수 없었다. 때문에 당은 이미 점령한 백제지역을 놔 둔 채, 신라로부터 병력과 군량을 수송하느라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이와 같이 백제지역에 대한 당의 지배체제는 초기의 백제도호부체제에서 웅진도독부체제로 전환되었고, 그 배경에는 백제유민들의 치열한 부흥운동이 있었다. 백제지역이 당의 완전한 지배에 들어가지 않음으로써 한반도에서 당의 지배력을 그 만큼 축소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네이버 블로그 <백제문화제 사랑> 백제문화제 사랑님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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