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정토불교의 세계 / 제12 장 정토교학의 중심사상 - 2. 십념왕생

2013. 9. 24. 21:58경전 이야기

 2. 십념왕생 
                                                    장휘옥 著/불교시대사 

아미타불의 48원을 통해 그 서원의 힘에 착안하여 타력설(他力說)을 주장한 사람은 담란(曇鸞)이다. 그는 <왕생론주(往生論註)>하권에서 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은 '아미타불의 본원력(本願力)'이라 규정하고 증거로 세 개의 원(願)을 들었다.
첫번째 제 18원을 들어 "부처님의 원력에 의하기 때문에 십념(十念)의 염불로 곧바로 태어날 수 있으며, 태어날 수 있기 때문에 미망의 세계인 삼계(三界) 윤회를 면하고, 윤회하지 않기 때문에 재빨리 깨달음을 얻는다." 하였다.
두번째로는 제11원을 들어 "부처님의 원력에 의하기 때문에 다시 퇴전하지 않는 경지인 정정취(正定聚)에 머물고, 정정취에 머물기 때문에 반드시 깨달음(滅度)에 이르러, 다시는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마지막 세번째 증거로는 제22원을 들어 "부처님의 원력에 의하기 때문에 점차 수행해서 오르는 십지(十地)의 보살행을 초월해서 곧바로 보현보살의 공덕을 닦는다."고 하였다.
이 가운데 제18원을 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 증거, 나머지 두 원은 다시는 퇴전함이 없는 경지에 머물러, 부처님의 깨음을 얻을 수 있는 증거로 삼았다.
부처님의 원력에 주목한 담란의 타력설은 도작(道綽)에게로 이어졌다. 도작은 <안락집> 상권에서 "부처님을 믿는 인연으로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고 마음을 일으키며 공덕을 닦고 갖가지 수행을 행할 때, 부처님의 원력으로 즉시로 정토에 태어나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곧바로 대승의, 퇴전함이 없는 경지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도작의 타력설은 말법사상과 부처님의 서원의 결합하여 더욱 강조되었다.
이러한 본원의 강조는 다시 선도의 <관무량수경소>에 명확히 나타난다. 그는 현의분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의 위제희부인의 청을 받아들여 널리 정토의 요문(要門)을 설하여 아미타불(安樂의 能人)은 별의(別意)의 홍원(弘願)을 현창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홍원이란 "<무량수경>에서 설하는 것으로서, 정토에 태어나는 자는 어떠한 선악의 어리석은 자라도, 모두 아미타불의 대원(大願)의 작용으로 부처님의 가피(增上緣)를 입지 않는 자가 없다."고 설하였다.
이것은 타력의 본원을 단적으로 잘 말해 준다. 그는 다시 정영사 혜원 등이 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 사람을 9종류로 나누고, 어느 것이나 성자(聖者)라 한 설을 들어 하나하나 비판해서, "지금 하나하나의 경문을 들어 그 증거를 밝힌 것은, 현재 선악의 어리석은 자들로 하여금 마찬가지로 9부류(九品)의 혜택을 얻게 하고 싶어서다. 믿음을 내어 의심이 없을 때는, 부처님의 원력으로 모두 태어날 수 있다."고도 하였다.
담란에서 도작으로 이어진 부처님의 본원력, 즉 타력은 분명히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선도의 비판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아미타불의 원(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
선도가 문제 삼았던 정영사 혜원의 주장은 <관무량수경의소>에서, 정토에 태어나기 위한 방법은 설하지만, 그것을 부처님의 원력의 구제라고는 설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오직 수행자의 자력(自力)이 문제였을 뿐이다. 따라서 정토에 태어나는 사람의 9품(品)을 설명할 때도 상품의 셋은 대승의 사람, 중품의 셋은 소승의 사람, 하품의 셋은 대승 시학(始學)의 사람이라 할 뿐, 부처님 본원의 힘을 어느 정도 빌리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러한 경향은 혜원 이후에도 거의 일반적이다. 그래서 담란이나 선도 의 특이성이 더욱 부각된다고 할 수 있다왕생문제를 취급할 때 담란이 특히 주목하고, 이후로도 많은 사람들의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무량수경>의 제 18원이다.
제 18원은 "내가 부처될 적에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신심과 환희심을 내어 내 이름(아미타불)을 내지 열 번(乃至十念) 불러 내 나라에 태어날 수 없으면 정각을 얻지 않겠습니다. 다만 오역의 죄를 범한 자나 정법을 비방한 자는 제외한다."고 한다.
여기서 열 번만이라도 염불하면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고 설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담란은 이것을 보통 한 찰나의 60분의 1을 일념(一念)이라 하지만 염은 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의 모습을 억념하여 다른 생각을 섞지 않고 계속적으로 열 번 생각하는 것을 십념이라 하고, 칭명의 경우도 이와 같다'고 하며, 십이라는 숫자에 구애될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십념으로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十念業成)고 한 것은 초인적인 능력을 갖춘 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 사람은 오직 억념의 마음을 쌓아올려 계속적으로 다른 생각을 섞지 않으면, 그것으로 좋다고 하였다. 따라서 여기서는 칭명까지도 포함해서, 열 번이라는 숫자는 의미가 없다.
도작은 이 설을 이어받아 수행이 진행된 사람은 이렇게 십념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아직 초심(初心)인 사람은 수를 세어도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칭명염불에 마음을 의지하여, 소두염불(小豆念佛)이라는 숫자를 세기 위한 특수한 방법을 사용하여 하루에 아미타불의 명호를 7만 편 불렀다고 한다.
도작의 뒤를 이은 선도는, 염(念)을 칭(稱)으로 해석하여 염불을 곧바로 칭명이라 단정해 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내지 십념'의 십념은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열 번 외우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러한 십념의 해석에 대해 다시 주목해야 할 것은, 십념을 <미륵소문경(彌勒所問經)>에서 설하는 십념과의 관계에서 이해하려고 한 것이다. 그 예로 신라 원효의 견해를 보면, 원효는 십념에는 은밀(隱密)의 십념과 현료(顯了)의 십념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현료의 십념은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으로, 다만 소리 내어 나무아미타불을 지성껏 계속해서 외우는 것이고, 은밀의 십념은 <미륵소문경>에서 설하는 십념으로서, 보살의 십지 가운데 초지(初地)인 환희지 이상의 보살이 아니면 도저히 실천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미륵소문경>에서 설하는 십념은 ①일체 중생에게 항상 자심(慈心)을 베풀고, ②일체 중생에게 깊은 비심(悲心)을 일으키고, ③호법심(護法心)을 발해서 신명을 아끼지 않고, ④인욕 속에서 결정심(決定心)을 내고, ⑤마음이 청정하여 영리에 물들지 않고, ⑥일체종(一切種)의 마음을 발하고, ⑦일체 중생에게 존경심을 일으키고, ⑧세간의 대회에 미착심(味着心)을 내지 않고, ⑨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가까이하여 여러 가지 깊은 선근의 인연을 일으켜 산란한 마음을 멀리하고, ⑩정념(正念)으로 부처를 관하여 갖가지 근(根)을 제거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원효는 <관무량수경>의 십념은 구칭(口稱_의 현료(顯了) 십념이고, <무량수경>의 심념은 <미륵소문경>과 <관무량수경> 두 경에서 설하는 십념, 즉 은밀과 현료 두 가지 뜻을 구족한 십념이라 주장하였다. 원효는 이와 같이 십념을 은밀과 현료 두 가지 뜻으로 회통하여 <무량수경>의 십념과 <관무량수경>의 십념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입장에서, 보살에서 오역십악(五逆十惡)의 법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미타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하였다.

 

 

출처 : 미주현대불교
글쓴이 : 파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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