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7. 03:44ㆍ들꽃다회
조선조 초기의 최대 왕실사찰인 회암사
그 절의 시작은 화재로 사기(寺記)들이 재가 되어 알 수 없다.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아들에게 쫓겨간
아비는 정청(政廳)을 만들어 준 아들을
화살로 쏘아 버리기도 한 곳이다.
절을 품고 있는 천보산
가까이에 있는 칠봉산 왕방산에는
아비가 왕좌에 있을 때부터
군사훈련을 겸한 사냥-강무(講武)가
자주 열려 산짐승들을 놀라게 하곤 하였다.
인도에서 고려와 원으로 오신
인도의 등불 지공선사(指空)선사는
법명 그대로 허공을 손가락으로 집으며
몽고의 하급문화부터 먼저 받아들여서 나타난
라마교와 밀교의 일부 갈래에서 유래된 희생제를 보고 탄식하였다.
금강산의 법기도량에서부터 양산 통도사까지 순행하면서
무생계경(無生戒經)으로 최상승의 문수보살의 법사리를 전하였다.
이로서 고려말 잠시 혼탁하였던 불교계가 정화되었고
지공의 상좌인 나옹선사는 스승의 법통에 힘입어
선교(禪敎) 양종의 화합을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당신이 공부한 인도 나라난타대학을 품고 있는
양강삼산(兩江三山)의 지세(地勢)를 닮은 회암사에 들려
나옹에게 크게 중창하기을 부탁한다.
방화로 소실된 회암사지 한편 길섭에서는
하이얀 꽃의 선씀바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더이다.
역사적인 해몽가로 이름을 날린
배우지 못한 사람이란 뜻의 자기를 낮춘
법명을 가진 무학(無學)대사는
원의 대도(大都)로 진종황제의
부름을 받아 되돌아간 사조(師祖) 지공을 찾아 다녔다.
송광사에 들린 지공선사는 송광사의 터가
불법이 융성해질 길지라는 것을 보고나서
그 터잡기 원류를 쫓아 무등산 규봉암 근처에
수도 석실을 마련하고 찾아온 불자들에게 너덜에서 설법(說法)하다..
지공너덜갱에서 그의 법문은 유명하여 오늘날에도 지명으로 남았다.
열아홉의 어린 나이로 스리랑카의 가섭존자의 107대손인
보명존자(普明尊子)에게 불법을 배워
스물한살 때에 가섭존자의 108대 법손으로 의발을 전수받는다.
무역풍과 인도차이나 반도와 해상 제국의 정변으로 해상무역로가
봉쇄되자 다시 인도로 되돌아 간다.
육로로 인도북부를 지나 티벳고원을 거쳐
운남에서 대리국을 거치며 몇해를 머물다가
귀주성을 거쳐 원의 수도인 대도에 도착하자
부처님의 현신이라고
원 황실의 적극적인 환영을 받는다.
당시로는 형제국들이 연합한 세계제국을
경영하던 원 황실로는 한족에게 뻐기기 위해서라도
불법의 정통성과 육지와 바다로 각지를 만행하고
남조국의 옛터와 대리국을 거쳐 대도로 온
인도의 등불에 대한 최고의 예우가 뒤따랐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원나라로 구법유학 갔던 나옹이 은사로 모시기에
너무 휼륭하신 큰 스님이였기에
개경으로 귀국길에 은사님을 모시고 함께 오다.
무신정권의 휴유증을 앓고 있던 여말은
잦은 외침과 내분으로 무척 혼란을 겪던 시절이었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아무리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하는 말이 있다고 해도
가섭존자의 불법을 이엇다고 아무나 스스로 나설 수는 없다.
경전번역에도 힘썼지만, 선풍 진작에 남달리 공력을 드렸다.
설법에도 뛰어난 역량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나옹을 통하여 무학을 가르쳤으나
여주 남한강변의 신륵사에서 나옹이 먼저 열반에 들자
무학은 지공에게 기댈 수 밖에는 없게 되었다.
명나라의 득세로 수도를 북쪽의 스텝지대인 상도(上都)로 옮긴 원나라는
힘빠진 틈을 타 요동과 요서를 회복하려는 고려왕실을 미워하였다.
원 황실은 지공과 무학과 고려장군과의 관계를 활용하여
혼인동맹국인 고려무장(武將)에게 압록수의 위화도에서
말머리를 돌려 개경으로 향하게 원격조정하였다.
장군은 조선을 개국하였으나 항명의 업은 그대로 남아
아들이 아비에게 반기를 드는 되갚음을 당하였다.
반면에 회암사는 이러한 연유로 쫓겨난 아비를
잘 모셔야한다는 유교적인 윤리에 힘입어
사세를 크게 확장하였으나 ,
그후 시간이 흘러 왕실후원자인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사후에
보우대사는 탐라로 귀양가 사사되고, 절은 유생들의 방화로 소실된다.
회암사지 상단부와 부도탑
사지 내 최상단 흙담으로 둘러쌓인 곳이 태조 이성계가 머물던 정청(政廳) 터
정청터 바로 아래에 있는 석계단 위가 보광전(普光殿) 터
정청터와 보광전 터, 그리고 부도탑
석계단 소맷돌의 운문(雲紋), 안상(眼象) 그리고 양태극무늬의 석고(石鼓)형 계단소매장식
보광전 터 앞의 화사석(火捨石) - 관솔불이나 유로(油爐)를 올려 놓아 야간에
조명을 밝히고, 또한 왕실 호위무사(雲劍)나 승병의 보온용 화로 겸용 목적임.
귀화종 미국쑥부장이와 은점표범나비
미국쑥부장이와 작은주홍부전나비
사진 오른쪽 중간 끝부분에 있는 건물이 회암사지 박물관
회암사지 바로 인근의 동북부 축대 위에 있는 부도탑
양주시 신시가지 개발구역
구절초
구절초
구절초
붉은서나물 종실섬유
이고들빼기
미역취
국수나무와 구절초
산박하
생태계교란 환경유해식물인 외래종 단풍잎돼지풀
- 꽃가루나 잎과 줄기의 잔털이 호흡기에 알레르기를 일으킴.
특히 어린이나 노약자들은 알레르기 현상이 심함.
회암사지 삼대화상 부도탑이 있는 사지 뒷편 산등성이 바로 근처 서쪽에
새로 지은 조그만 사찰 회암사 요사채.
삼대화상 - 지공선현선사,혜근 나옹선사, 자초 무학대사
큰별꽃아재비
이고들빼기
개여뀌
요사채
새로 지은 요사채
지공선사적조탑비 앞에서 들꽃다회
탑비의 비문은 고려말의 대문장가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짓고,
비문은 <목은문고(牧隱文藁)>에 수록되어 있다.
회암사 지공부도비문(指空浮屠碑文)의 정확한 이름은
< 서천제납박타존자부도명(西天提納薄陀尊子浮屠銘)>이다.
지공선사는 인도 동북부 갠지스강 유역에 있었던 마가타(摩竭陀)국의
의 셋째 왕자로 태어났으며, 그가 출생한 12세기 말에는 이에 앞서서
11세기부터 인도대륙은 서북부 지방부터 이슬람 세력의 끊임없는 외침을
받아 왔으며, 뒤이어 등장한 원의 몽골세력이 이슬람세력을 약화시키고
있을 때에 해당된다.
세속에서 불린 그의 아명(兒名)은 루항라다파(婁恒羅 口+多 婆)였고,
출가 후 이름은 제납박타(提納薄陀)이며, 이의 뜻을 한자로 풀이하면
선현(善賢)이다. 이 법명은 그의 사승(師僧)인 스리랑카의 보명(普明)
존자(가섭존자 107대 法孫)가 지어준 법호인 소나적사야(Sunyadiya
蘇那的沙野)의 한자식 표현이다. 흔히 부르는 지공은 법호(法號)이다.
지공은 1361년 11월 29일 원나라의 천수사(天壽寺) 귀화방장(貴化方丈0에서
입적하셨고,그의 육신은 소상(塑像)으로 보존되어 오다가, 후에 명 태조가 된
주원장(朱元璋)의 군사가 대도(大都 : 현 북경)에 가까이 이른 시기에 다비되었다.
그의 유골은 문도들이 나누어 갖고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절반 가량이 2년 후인
1370년 1월에 개경(현 개성)으로 봉운(捧運)되었다.
허흥식 교수, <고려로 옮긴 인도의 등불 - 지공선현>에서 발췌, (1997,삼신문화사)
헌다례 준비
회암사 삼대화상 - 지공선사, 나옹선사, 무학대사와 함께하는 들꽃다회.
야외에서 하는 들차회는 팽주(烹主)와 찻손님(茶客) 만으로도
휼륭한 찻자리가 될 수 있으나, 찻자리 근처에 마애불이나 부도탑비,
큰 바위나, 고목, 흘러가는 구름, 도도히 흘러가는 큰강,밝은 달
등이 있으면, 이들을 위하여 여분의 찻잔을 놓아 찻손님으로
초대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찻자리는 더욱 운치를 더하고,
찻자리에 경건함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얻을 수 있어서 더욱 좋다.
마애불이나 부도탑비 앞에서 찻자리를 가질 때에는 반드시 다객들에게
차를 권하기 전에 마애불이나 부도탑에 차를 먼저 올려드리고
정성껏 예를 표하여야 한다.이를 차공양 또는 헌다례(獻茶禮)라고 하며,
찻자리에 불보살이나 고승님들을 초대하는 영광을 참석한 일행들과 함께
나누는 소중한 다회가 되어 찻자리의 품격을 더욱 높히고, 더욱 경건한
찻자리가 될 수 있슴이다.
야외에서 하는 들차회에서는 실내에서 보다 물이 빨리 식는 경향이 크므로
찻주전자(茶罐 다관) 보다 약간 큰 찻주발(茶碗 다완)을 이용하여
찻주전자 외부에 뜨거운 물을 부어 주므로서 찻주전자 내의 찻물의 온도를 일정하게
해줄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여야 차의 정수가 우러나와 최적의 차의 풍미를
느낄 수 있다.
특히 금속재료로 만든 찻주전자는 찻물이 빨리 식으므로 조금 귀찮더라도
반드시 이 중탕과 비슷한 원리를 활용하면 좋다.
산야에서 하는 야외다회를 홀로 또는 일행들과 해온지 어연 삼십년이 조금 넘는
성상(星上) 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서, 첫번째 다관 부은 뜨거운 물은
차를 씻고난 후에 그냥 버리지 말고 찻주발 등에 다관을 안치한 다음, 두번째 뜨거운
물을 다관 안에 부은 다음 찻주전자의 뚜껑을 닫은 후에 다관 외부에 천천히 흘러 부으면 된다.
찻주전자 외부에 있는 찻주발 등에 담겨 있는 물이 식으면 버리고 나서 다시 뜨거운 물을
보충하면 된다.
지공선사적조탑비와 부도탑
- 지공선사의 육신은 1368년 다비된 다음, 절반 가량이 고려로 옮겨져
세곳의 부도(浮屠)에 봉안되었다. 그중의 하나가 아래 사진의 회암사 부도이고,
비와 함께 순조 때에 유생(儒生)들에 의해 1821년에 파괴되었으므로
현지에 있는 탑과 부도는 원형이 아니다.
다른 하나는 묘향산 안심사(安心寺)에 제자인 나옹과 함께 부도탑과 비가 건립되었으나,
현재 남북분단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또 다른 하나는 장단의 화장사에 석종형(石鐘型)으로
보존되어 있으나 탑비는 없으며,여기에는 조선조 후기까지 지공의 소상(塑像)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휴전선 근처여서 확인하기 어렵다.
자초(自超) 무학대사 부도탑
자초 무학대사는 태조 이성계가 아들인 태종 이방원에 의하여
폐위된 다음 고향인 함흥에 머물다가 회암사로 거처를 옮긴 다음
태상왕(太上王)인 이성계와 함께 지내면서 그의 지친 영혼을 위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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