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9. 21:38ㆍ들꽃다회
무학자초대사 부도탑 전경
무학대사 부도탑의 장식무늬
무학자초대사 부도탑비, 석등, 부도탑.....
정면 소나무 사이로 멀리 보이는 양주시 신도시 개발구역
무학자초대사 부도탑
지공선현선사 부도탑과 무학대사 부도탑 중간에 있는 능선부 마당에서 본 회암사 요사채
지공선현선사 적조탑비 원비의 귀부의 머리 부분
- 앞니와 어금니가 사람의 치아를 닮았다.
용의 맏아들이라고 하는 귀부도 공부가 깊어서 입에
도태의 상징인 여의주를 물고 있다.
비유하여 천주교의 교황과 동격의 권위를 가지시는 가섭존자의
전법 법손이신 지공선현의 적조탑비를 지고 있을려면, 목은 선생의
글의 무게도 대단할 텐데, 그 정도는 되어야지..........
지공선현선사 적조탑비 원비의 이수와 귀부
지공선현선사 적조탑비 원비의 이수와 귀부
- 원비의 탑비는 사족(士族)의 투장(偸葬 : 몰래 산소를 쓰는 일)으로 훼손됨.
지공선현선사는 인도 동북부의 마가다국에서 유서깊은 석가족의
왕자로 태어나 8세에 나란다사에 출가하여 스승인 율현(律賢)으로부터
교학(敎學)과 율법(律法)을 배우고 익혔다. 그는 율현의 권유로 랑카국에서
참선하여,보명(普明)으로부터 전법을 받아 득도하고 계정혜(戒定慧)의
삼학을 갖추었다. 그는 나란타에서 랑카(현 스리랑카)에 이르는 북동부~남동부에
걸친 구법여행 동안 여러 소국에서 불교를 비롯하여 다양한 종교들과 전통을
접촉하여 안목을 크게 넓혔고, 가섭존자의 108대 법손으로 인정을 받은 후에는
교화를 위하여 랑카를 떠나 인도의 서부와 북부를 거쳐서 네팔과 부탄 사이에
있는 시킴을 거쳐 히말리아 산맥을 넘어 다시 일년 후에 티베트 등지로 유력(遊歷)
하였다.
이 천축으로 통하는 통로는 당대(唐代)부터 개통이 되었고, 인도의 신비사상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후기 밀교사상이 이곳을 통하여 전파되었다. 지공은 이곳을 거쳐
토로번(吐魯番)을 통과하여 원나라의 수도인 연도(燕都 : 현 북경)에 도착하였으나,
티베트 서부와 하성(蝦城 현 놉놀)을 거쳐 사천과 운남의 각지에서 5년을 보내고
다시 연도를 거쳐서 고려에 도착한 시기는1326년 3월이였다.
고려에서 지공은 무생계(無生戒)를 통하여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백성들을
교화하고,금강산의 법기도량(法起道場)을 참배하고, 이곳에서 원 황제를 위한
불교의식을 주관하였다. 또한 현 인천지방을 여행하였고, 장단의 화장사(華藏寺),
그리고 사불산(四佛山),양산 통도사, 영산현 보림사(寶林寺) 등지를 순행(巡行)
하였다. 그가 석가왕실의 후예로서 달마조사와 다른 선종의 계보를 계승한
두 가지 특징이 있으며, 인도불교를 직접 전수하였으므로 고려백성들은
그를 석가모니불과 달마조사가 환생하여 다시 오신 듯이 그를 환대하였고
그에게서 많은 감화를 받았다.
그는 빠르게는 1328년 9월에 원 황제의 독촉으로 연도로 돌아갔다.
새로이 보위에 오른 태정제를 보좌하고 있는 원의 불교계는 육식과
희생제를 비판하는 지공을 비난하고 그를 고난과 박해의 질곡 속으로
몰아 넣었다. 다만 그곳에 살고 있던 고려인 출신 신도들이 그를
후원하였으므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는 고려인이 마련한
법원사(法源寺)에 머물면서 예전의 명성과 명예를 회복하였고
만년을 순탄하게 보낼 수 있었다. 특히 고려에서 그를 따라갔던 추종자들과
고려에서 유학한 유학승인 고승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
당시 연도에 있던 지공을 찾았던 고려국의 승려 중에서 나옹(懶翁),경한(景閑),
무학(無學),지천(智泉) 등이 여말~선초의 두드러진 고승들이였다.
지공선현선사 적조탑비와 차공양
- 계사년 금년 들어서 지공 부도탑에 세번째의 헌다례 ,
겨울 동지 경에 한차례 더 올릴 예정.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 안내판
지공선현선사 적조탑, 석등, 석상(石床) 배경은 새로 지은 회암사 당우
지공선사가 수학하던 14세기 초 인도의 불교계는 동북지방 나란다(那蘭陀)의
교학(敎學)과 남부 능가국(현 스리랑카)의 선사상이 특징있게 발달하고 있었으나,
지공은 이를 모두 공부하고 차이점을 극복하였다.(佛祖通記 권5)
인도에서는 교학과 선사상이 대립적인 관계로 존재하지 않았고, 지공도
이러한 선교일체사상을 동아시아로 전법(傳法)하였다. 그는 특히 인도의
계율사상에 투철하여 무생계(無生戒)를 토대로 삼는 무생계경과 무생계법
(無生戒法)에 의하여 실천적인 수계사(授戒師: 계를 주는 스승)로서
출가자는 물론 세속의 신도에 이르기까지 깊은 감화를 주었다.
그의 계율과 교학 그리고 선사상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면서
계정혜(戒定慧)의 삼학관(三學觀)을 나타내고 있음이 특징적이다.
그의 사상을 결집시킨 <禪要錄>에 의하면 법신사상(法身思想)에서
기원한 무생계법과 이를 무심(無心), 무생(無生), 무소래(無所來)의
무행(無行)에 의하여 스스로 존재하는 상태를 참다운 선정(禪定)이라
하였고,이는 당시 동아시아에 유행하던 간화선(看話禪)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의 교학은 반야사상에 의거하여 진공무상(眞空無相)을
지표로 삼아 사상적인 대립을 극복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삼학관(三學觀)은 당시 동아시아 불교계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당시 원 지배층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몽고족이 신봉하는
라마교나 그들 유목민 출신의 육식생활과 지공선현의 무생계사상은 대립을
피할 수 없었고, 반면에 농경사회를 이루고 있던 고려에서는 불교의 혼탁함을
제거하고 경건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무생계사상의 영향은 심지어 토속제의
(土俗祭儀)의 육제(肉祭: 제물로 고기를 쓰는 제사)에 까지 영향을 주어
성리학자들과 음사(淫祀 : 성생활을 다산의 상징과 열반의 다른 형태로 보아
제사의식에 쓰는 민속신앙 또는 우도밀교 한갈래의 淫風)를 약화시키면서
공동의 보조를 취하고 있었으나, 아이러니칼하게도 성리학 신봉자들의
제의(祭儀)에 사용하는 육류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그는 법신사상(法身思想)과 계율을 강조함으로써 조선시대의 종파통합에서
화엄종과 율종의 해인사와 통도사를 조계종으로 흡수하는 과정에 결정적인
이론적 그리고 문중 종파적 기반을 구축하였다. 그의 사상을 계승한 나옹과
그의 뒤를 잇는 무학과 상청(尙聽)을 이은 송광사(조계산 修禪社)를 주축으로
삼보사찰(三寶寺刹)을 조계종으로 확보하여, 단일한 종파로 만드는 배경에도
그의 사상과 역활은 결코 적다고 말할 수 없다.
그의 사상은 육조단경에서 나타난 혜능(慧能)의 사상과 상통하는 점이 있다.
육조단경의 기원은 본래 무생계(無生戒)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柳田聖山,
"어록의 역사 - 禪문헌의 성립사적 연구" 동방학보,57,1985 참조) 이는
무생계를 바탕한 그의 사상과 유사성이 있다. 혜능과 그를 계승한 神會에
이르기 까지 계정혜의 불가분성을 강조하였고, 반야경과 이를 초록(抄綠)한
금강경에 바탕을 둔 반야사상이 강하였다. 초기 선종의 우두선(牛頭禪)에서도
무심(無心)을 내세운 반야사상을 볼 수 있다.( 忽骨曲快天 "선학사상사" 玄黃社,
1923,368~373쪽 참조) 이들의 활동은 해로로 교역이 활발하였던 시기와 지역이
일치하며 무역과 더불어 관련된 지역의 남전불교(南傳佛敎)도 직수입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지공은 비록 해로로 오지 않았지만, 동아시아의 불교사에서 달마와 혜능에
비견될 수 있는 원형에 가까운 인도불교를 마지막으로 동아시아로 옮겼다고 할
수 있다. 오직 고려에서만 그의 사상을 수용하고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토대야 말로 한국 불교의 포용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실이라고 하겠다.
그는 인도불교의 특성을 고집스럽게 지속 강조함으로써 나중에는 원의 불교계로부터
박해를 받았으나, 이를 수용한 고려인들은 그의 사상을 계승하여 동아시아 선종계의
변질 또는 변형된 모습을 극복하고 성리학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존속할 수 있는 지표로 삼았다고 하겠다.
허흥식 교수,<고려로 옮긴 인도의 등불 - 指空善賢> 131~134쪽에서 발췌
오늘날 동남아 각국이나 인도를 여행한 선승들의 경험담으로 동남아 각국의
불교선원에서 가장 경전에 가까운 원형질 좌선을 하는 스님들은 한국선승들 밖에 없어
각국 불교계에서 존경을 받는다고 한다. 이 또한 불교의 변형 또는 변질에서 오는
혼탁함을 제거하고 정법불교를 전법하신 지공선현의 역활이 결코 적지 않았음을
의미하고 있다.
실새풀
실새풀
나옹 헤근선사 부도탑과 석등
통일신라말 남종선을 계승하고 귀국한 유학승들은 고신라의 변두리에
여러 산문을 개창하였고, 고려초 부터 선종(禪宗) 또는 조계종(曹溪宗)으로
불리워졌다. 선종은 고려 光宗때 부터 차츰 화엄종(華嚴宗)이 대두되면서
종세(宗勢)가 약화되었으나, 중기에 이르러 혜조국사 담진(慧照國師 曇眞),
원응국사 학일(圓應國師 學一), 대감국사 탄연(大鑑國師 坦然),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등을 배출하였고, 후기에는 사대종파 가운데 확고한
종세(宗勢)를 확립하였다.
나옹화상 혜근(懶翁和尙 慧勤)은 고려말의 두드러진 선승일 뿐만 아니라
지공선사의 대표적인 계승자이고 그의 문도가 조선초 불교계에서 주도적인
역활을 하였다.
불교계에서는 태고보우(太古普愚)의 선종 법통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통상 불교계는 道安의 <佛祖宗派之圖>, 采永의 <海東佛祖源流>를 따름),
지공화상에 대하여 근래에 깊이 연구하신 허흥식 교수님은 나옹의 계승자들이
오늘날까지도 불교계 주류의 법통을 이어오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옛 이름은 원혜(元慧), 법명은 혜근(慧勤), 법호는 나옹(懶翁)이고,
왕사로서 보제존자(普濟存者)라는 존칭도 쓰였고, 입적시 머물렸던 여주
신륵사의 강월헌(江月軒)이라는 당우의 이름이 그를 가리키기도 하였다.
통상적으로 법호인 나옹이 그를 가르키는 일반명사 처럼 통용된다.
그의 모(母)는 금색의 송골매가 그녀의 머리를 쪼으면서 떨어뜨린
황금알을 품은 꿈을 꾸고 그를 임신하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출생은
승려의 환생으로 미화되지는 않았으나, 한민족 전래의 토템설화와
한편 상통하며, 금란(金卵)은 비범한 인물이란 의미를 지닌 사회의
전승으로 받아드릴 수 있다. 특히 송골매는 당시 원과의 관계면에서
본다면 사냥매의 중요성이 고려사회에 깊은 영향을 준 증거라고도
볼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위서의 논란은 없지 않지만 박제상의
<부도지(附都誌)>에서 말한 예맥족의 동류과정 중에서 유추할 수
있는 사냥매의 중요성과 샤먼적인 사람과 하늘을 잇는 천조(天鳥)의
개념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 온 것은 아닌가 하고 여겨지기도 한다.
나옹은 28세가 되던 1347년 11월에 자신의 깨달음을 확인하고 좀더
진전의 계기가 될 득도사(得度師)를 찾아보기 위하여 원으로 유학하였다.
이듬해 3월 13일 대도(大都)의 법원사(法源寺)에 도착하여 그곳에 주석하던
지공선사 문하에서 2년간 수도한다. 지공은 이보다 20년전 고려에 2년 7개월간
머물면서 승속의 추앙을 받았고, 그가 8세였던 나옹에게 수계(授戒)하였던
계첩이 현존하고 있지만 행장에는 이 사실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가 지공을 찾았을 때는 회걸인(回 言+乞 人) 찰한첩목아(察罕 山+占 木兒)의
부인으로 고려출신이였던 김(金)씨가 마련한 법원사(法源寺)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牧隱文藁 참조) 나옹이 이곳에서 2년간 공부한 까닭도 어렸을 때의 수계를
통한 연결과 고려인 단월(檀越)이 마련한 법원사의 기원과도 연관이 큰 것으로 보인다.
지공선사는 나옹을 판수(板首)로 삼아 10년간 머물도록 하였으나, 3년째 되던
1350년 3월 지공선사 문하를 떠나 양자강 이남의 임제선종(臨濟)문하의 선승들과
선문답을 하면서 견문을 넓힌다. 그 후 꼭 삼년이 지난 다음인 1353년 3월 다시
법원사로 돌아 온다. 그가 3년간 유력(遊歷) 중에 만났던 임제종의 고승들은
평산처림(平山處林)을 비롯한 수많은 걸승(傑僧)들 이였으며, 고려에서 닦은
조계종의 토대 위에 지공을 만나서 꽃피운 지혜를 남송(南宋) 이래의 임제선종의
전통과 마주치는 치열한 시험장과도 같았다.
법원사로 다시 돌아와 스승 지공선사를 뵙자, 스승은 그 동안 임제종의 여러
고승들과의 교류에 대하여 이미 만족하고 계셨다. 산중 소식은 세속의 소식보다
그 전달이 빠른 까닭이다. 지공선현 선사는 그를 자신의 정안방장(正安方丈)으로
맞아드리고, 차를 권하면서 법의(法衣) 한벌(一領), 불자(拂子) 한자루(一枝),
그리고 범자초서(梵字草書)로 쓴 신서(信書) 한장(一紙)를 주었고, " 나를 대신하여
교화하도록 천검(千劍)을 준다."라고 부탁하셨다. 나옹은 거절치 못하고 이를 감사히
받아들였으며, 이로써 지공이 나옹을 자신을 대신할 계승자로 정식 인정하는 불교 선종의
의례를 끝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의발(傳衣鉢)은 홍인(弘忍)으로부터 육조 혜능(惠能)에게 전해진 법통 계승상의
상징적 신물(信物)이며,불자(拂子)나 장자(杖子) 등을 전수한 예도 자주 있었다.
다만 범어신서(梵語信書)는 인도 교학(敎學)에 남다른 자부심과 소신이 있었던
지공다운 특색이 있는 전법신물(傳法信物)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후에 화장사(華藏寺)에 보존되다가 일제 초에 도난당하여 동경대학에서
보관하고 있는 반야경일 가능성이 크다. 이 세가지 전법신물에 대하여 의발(衣鉢)을
정(定)으로, 불자(拂子)를 계(戒)로, 신서(信書)를 혜(慧)로 대비하여 볼 수 있고,
이는 곧 계정혜의 3가지를 불교의 필수불가분의 요소로 여겼던 지공의 불교관
전부를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 세가지 전법신물중 계를 상징하는 불자(拂子)는 동화사 주지를 맡았던
서운(瑞雲)스님의 상좌가 회암사 주지를 맡고 있을 적에 벽을 수리하다가
벽 내부의 공간에 비장되어 있던 불자가 하나 있어서 이를 자세히 살펴보자,
지공선사가 나옹에게 주고, 또한 나옹선사가 무학에게 전법신물로 주었다는
묵서명(墨書銘)이 있는 병서(倂書)가 함께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知人 스님에게서
들었으나, 서운스님의 상좌들이 이를 보여주지 않아서 아직 실물을 확인한 스님이나
학자들이 많지 않다.
무릇 사람이나 물건이나 제자리가 있는 법........
당국이나 총무원의 사전 승인이 없이 무단 반출된 것이라면 회암사로 돌려주어
회암사 복원 중창불사를 위한 밑거름이 될 전법신물(傳法信物)로서의 소임을 다하여야
마땅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크게 어리석은 일인가??
이 불자(拂子)는 카톨릭 교황의 상징인 지팡이(法杖) 이상으로 소중하고 귀중한
문화재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동경대에 보관되어 있는 범어반야경도 도난품이 확인된다면
문화재환수운동을 통하여 환수가 가능할 것으로 보여지니, 이에 대한
환수 준비작업이 시급할 것으로 판단된다.
나옹 혜근선사 부도탑과 석등
지공선현선사 적조탑비, 적조탑 ,그리고 적조탑비 왼쪽이 원비(原碑)의 이수와 귀부
억새
달맞이꽃(月見草) 열매 꼬투리 - 외래 귀화종
선포아풀
지공선현선사 부도탑비 , 석등, 석상(石床), 그리고 부도(적조탑) , 사진 왼쪽이 무학자초대사 부도탑
지공선현선사적조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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