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지역의 차문화에 대한 연구 / 식품위생신문 기사

2013. 10. 18. 04:57차 이야기

 

 

 

 

      

김해金海지역의 차문화茶文化에 대한 연구
가야차伽倻茶의 전래傳來를 중심으로...
2008년 10월 06일 (월) 16:11:49 식품위생신문 webmaster@fooddesk.com

 

                        김해金海지역의 차茶문화에 대한 연구

-가야차伽倻茶의 전래傳來를 중심으로

 이형석

 1. 취지 및 필요성

 고대 중국의 전설적인 황제 삼황중 염제(炎帝) 신농(神農)씨가 초목의 식용과 약용을 알아내기 위하여 하루에 100가지의 풀잎, 나뭇잎을 씹어보다가 독초를 맛보고 중독이 되자 차 잎을 씹었더니 그 독이 풀어져 그때부터 차를 마셨다고 한다.

   
 
  ▲ 이형석 박사  
 

우리나라 최고의 정사로 손꼽히고 있는 <삼국사기>흥덕왕 3년조(828)에 ‘대렴이 차씨를 가져오니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여왕 때(재위 632-686)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성행되었다’고 기록, 지리산을 신라차의 시배지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음을 같은 책에서 인정하고 있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나라에서 자란 차와 외국에서 가져온 차 제품이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중국의 문헌기록에, 신라 성덕왕 19년(720년. 24세-개원 8년) 지장왕보살 김교각(金僑覺)스님은 신라차 종자를 휴대(携帶)하고 당나라에 건너가 구화산에 심었으므로 신라에는 이미 차나무가 있었음을 방증(傍證)할 수 있다.

<삼국사기>와 함께 우리나라 역사서의 쌍벽을 이루는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수로왕의 17대손 갱세급간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매년 명절이면 술, 떡, 밥, 차(茶), 과일 등을 갖추어 제사를 지냈는데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년(199)부터 구형왕 말년에 이르는 3백30년 동안 변함이 없었다’고 기록, 서기 199년에도 차가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조선조말 역사ㆍ민속학자인 이능화(李能和. 1869-1943)가 지은 <조선불교통사>에 ‘김해의 백월산(白月山)에는 죽로차(竹露茶)가 있다. 세상에서는 수로왕비인 허씨(許氏)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라고 전한다.’(自印度持來之茶種)고 기록되어 있다.

또 중국에서 부처님께 차를 달여 공양하는 종파로서 신라에서 전래된 연대(天台宗 540-575, 律宗-602, 密宗-635, 華嚴宗-671, 禪宗-826년경) 등에 의하여 신라 때 차씨가 전래된 828년 이전에도 차(나무)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가락국의 역사를 기록한 책인 <가락국기>는 고려 제11대 문종30년(1076) 금관주지사(金官州知事)가 편찬하였다고 하는데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다. 이는 고려 인종 23년(1145)때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보다 69년 전에 지은 책으로 완전한 내용은 전하지 않으며 <삼국유사>에 간략하게 초록(抄錄)되어 전하는데 여기에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의 건국설화를 비롯해 허황후(許皇后)와의 혼인설화, 신라에 합병된 이후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김해지방의 연혁, 제2대 거등왕부터 마지막 구형왕까지의 왕력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일본에 천태종을 창건한 ‘신라인 전교대사 최징(傳敎大師 最澄, 767-822)과 영충(永忠)화상이 중국에서 차모종을 가져가 이식하였다’고 하였다. 또 백제출신의 행기(行基, 668∼749)스님이 ‘일본에 차나무를 심었다’는 내용이 <동대사요록>(東大寺要錄)에 기록되어 있다. 본 연구에서는 828년 대렴이 당나라에서 가져 온 이전의 우리나라 차문화와 허황옥의 가락차의 전래 및 그 시배지에 대하여 문헌 및 자료와 현지조사의 결과를 통하여 구명(究明)하고자 한다.  

2. 우리나라 차 관련 역사 고찰

 (1) 우리나라 고대(828년 이전) 차유적지

① 고구려와 백제의 차문화

고구려와 백제의 차생활은 전해지는 문헌이 없다. 그러나 고구려의 옛 무덤에서는 고급 단차(團茶)로 여겨지는 전차(錢茶)가 발견되었는데 중국의 오대(五代)시절 모문석(毛文錫)이 지은 <다보>(茶譜)의 역주에서 '나는 고구려의 옛무덤에서 출토된 모양이 작고 얇은 조각의 떡차를 표본으로 간직하고 있는데 지름 4cm 남짓의 엽전 모양으로서 무게는 닷푼 가량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4-5세기에 그려진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차(茶)가 등장한다. 고구려 고분(古墳)의 하나인 무용총은 만주 길림성(吉林省) 집안현(輯安縣) 통구(通溝)에 위치고 있다. 벽화의 내용은 인물풍속화이며 그 중에서도 널방 벽화가 이 고분을 대표한다. 널방 벽화에는 고구려 회화에서도 손꼽히는 수렵도(狩獵圖)를 비롯하여 고분의 이름을 정하게 한 무용도(舞踊圖), 주방과 묘주인의 실내생활장면, 수목도(樹木圖)가 그려져 있다. 무덤주인의 실내 생활장면은 2명의 손님을 접대하며 환담하는 모습인데 두 손님의 복장이나 갈색 얼굴로 보아 이국인(異國人) 승려인 듯하여 당시의 활발했던 문화 교류도 엿볼 수 있다.

한편,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에 있는 고구려의 벽화고분 각저총(角抵塚)의 주인 실내생활도 차기(茶器)로 추정되는 그릇에 그려져 있다.

전남 순천시의 금둔사(金芚寺)는 백제 위덕왕(威德王) 30년(583) 담혜화상(曇惠和尙)이 창건하였으며, 신라 때 의상대사를 거쳐 구산선문 가운데 사자산문(獅子山門)의 철감국사(澈鑒禪師)와 그의 제자 징효대사(澄曉大師)가 주석하여 종지를 펴던 선종가람이다. 경내에는 9세기 보물 제945호 금둔사지 삼층석탑(三層石塔)이 있다. 삼층석탑 남쪽의 문수보살은 정면으로 모셔져 있는 석불비상(보물 제946호)을 향하여 왼쪽 무릎을 꿇고 오른쪽 무릎은 세운 자세로 앉아 차를 올리는 모습이다. 이러한 차공양보살상은 그 유례가 없다.

   
 
 

▲ 집안 통구에 위치한 무용총 접객도, 주안과 손님은 크게, 차를 접대하는 사람은 작게 그렸다

 

일본 동대사지(東大寺誌)에 ‘백제승려 행기보살(行基菩薩: 668-749)이 동대사에 말세의 중생들을 위하여 차종자를 심었다’고 하였다. 행기보살이 일본 동대사에 건너갈 무렵은 50세(718)경에서 60세(728)경으로 추정된다. 이 자료는 718-728년경에 백제에 차나무가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또 기후나 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백제도 이미 7세기 이전에 차를 마셨을 것으로 추정된다.

② 화랑들이 차를 끓여 마셨던 한송정(寒松亭)
한송정은 강릉 부근에 있는 정자로 신라 효소왕(?-702) 때 화랑들이 몸과 마음을 수련하기 위하여 차를 다렸다는 기록이 있는 차의 유적지이다.
고려 때의 시인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에 보면 한송정에는 사선비(四仙碑)가 있고 근방에는 화랑들이 차를 끓였던 석구(石臼), 석조(石竈)가 남아있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 유적이 남아있다. 이곡의 ‘한송정’이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마음은 오롯 승경(勝景)에 있어 일찍 성문에 나서니/ 선인은 없는 한송정엔 차 끓이는 돌솥만 있네/ 인정(人情)은 고금에 있지만 삼라만상은 그래로이다./ 만일 내 여기 오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를 들었을까.’이라했고 고려 때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처음으로 전했던 안유도, ‘사선(四仙)은 일찍 여기 모여 맹상군의 집을 방불케 한다./ 신선 구름속에 자취가 없고 차가마엔 불이 꺼졌다./ 진실로 취밀(翠密)을 찾으면 황혼에서 옛을 생각하니/ 오직 차 끓이는 우물과 석근(石根)만이 의연히 있을 뿐이다.’

고려 때의 이규보 역시 <동인시화>(東人詩話)에 한송정과 차에 얽힌 시를 남겼으며 <동국여지승람>에도 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② 감천설화(甘泉說話)로 유명한 변산의 원효방(元曉房)
고려조의 학자 이규보가 쓴 <이상국집>(李相國集)의 남행일월기(南行日月記)와 <동국여지승람>에 전북 부안군 변산 울금바위 중턱에 있는 원효방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원효스님(617-686)과 함께 수행했던 사포(蛇包) 스님이 차를 다리려 하였으나 주위에는 물이 없었다. 그가 걱정하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틈에서 물이 흘러나와 그는 그 물로 차를 다렸다.’고 하는 감천설화가 바로 그것이다.
그 샘을 다천(茶泉)이라고 하며 현재 이 원효방 부근에는 차나무가 야생하고 있다.

③ 찻잔을 올리는 석굴암 문수보살상

   
 
 

▲ 찻잔 든 석굴암 문수보살상

 
 
경주 토함산 석굴암의 문수보살상을 보면 화엄사 효대(孝臺)와 비슷한 형태로 부처님에게 조그마한 찻잔을 올리는 모습이 보인다.
석굴암은 경닥왕 때(751) 김대성(金大成)이 그 전세(前世) 부모님을 위해 조성하였으니 이때라면 충담사(忠談師)가 남산 삼화령의 미륵님께 차를 올리고 오다가 경덕왕에게 차를 대접한 일이 있고 역시 월명사(月明師)는 경덕왕의 청에 의하여 도솔가를 불러 일괴(日怪)를 없애고 수정염주와 차일봉(茶一封)을 하사받은 일이 있는 의 전성시기라 할만한 때여서 당시의 차생활의 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 오대산 월정사와 적멸보궁에 얽힌 문수보살과 자장율사의 설화가 있는데 현재 국보 제 48호로 지정된 월정사 8각 9층탑 앞에 탑을 향하여 찻잔을 올리는 모습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형식의 공양(塔前) 보살(供養)보살상은 강능시 내곡동에 있는 신복사지(神福寺址)에도 남아있다.

④ 통도사 금강계단과 동을산 다소(茶所)
통도사는 자장율사가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창건하고 금강계단을 쌓았다. <삼국유사>에 자장은 ‘문인(門人) 52인이 지식수(知識樹)를 심었다’ 고 기록되었는데 그 나무가 차나무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 까닭은 <삼국사기>에 ‘선덕여왕 때부터 차가 있었다’는 기록과 최근까지 금강계단 내에는 오래된 고차수(古茶樹)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통도사가사사리사적약록>  에 “북쪽 동을산 다촌은 차를 만들어 절에 바치는 소이다. 절에 바치던 차 부뚜막과 차샘이 지금도 아직 남아 없어지지 않고 있다(北冬乙山茶村 乃造茶貢寺之所也. 貢寺茶烟茶泉 至今猶存不漏; 坪郊茶村)”라고 했다. 여기서 차 부뚜막은 제다용 솥을 거는 곳이거나 배로(焙爐)이다. 차샘을 중시한 것은 차를 끓여서 절에 바치기도 했음을 방증하므로 민간마을인 다소촌(茶所村)과 통도사는 지척 간임을 추측할 수 있다. 사적이 확실한 울산의 평교다촌(坪郊茶村)은 일부나마 복원되어야 한다.

⑤ 지리산 화엄사의 연기조사의 효대(孝臺)
구례 화엄사는 인도승 연기조사가 개산(開山)하여 이룬 절이다.
현재 각황전 뒤 등성에 국보 35호로 지정된 부처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四獅子 3층 석탑)이 있고 그 앞에 찻잔을 들고 있는 석상이 있는데 이를 효대라 부른다.
이것은 연기조사가 그의 어머니 명복을 빌기 위하여 찻잔을 들고 있는 것으로 연기조사가 떠난 지 약 100년 뒤에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1979년에 신라 경덕왕대에 작성된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이라는 화엄경사경(華嚴經寫經)이 발견되면서 화엄사 창건과 중건에 대한 모든 의문이 확연하게 풀리게 되었다.

이 사경의 발문에 의하면 연기(緣起=煙氣)는 서라벌에 있는 황룡사(皇龍寺)의 승려이며, 경덕왕 13년(754년) 8월 1일부터 화엄경사경을 시작하여 이듬해 (755년) 2월 14일에 완성시켰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연기가 실존인물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화엄사 창건년대가 진흥왕 때가 아니라 경덕왕 때이며, 자장율사가 중축하고 의상대사가 장육전을 건립하였다는 것이 사실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 왼손에 찻잔을 든 효대 공양상

 
화엄사는 창건시 부터 차를 올리는 습속이 있는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2) 우리나라 고대(828년 이전) 차인(茶人)

우리나라 차의 역사는 차나무를 중국에서 전래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차생활에 얽힌 설화는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신라에 대한 기록일 뿐 고구려나 백제의 차에 대한 기록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우선 신라시대부터 시대 순에 따라 역사에 나타난 우리나라 차인들의 행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① 원효대사와 변산의 원효방

‘산을 연(沿)한 위험한 사다리를 건너/ 발을 겹쳐 샛길을 걸어가니
위로 백길의 높은 곳에/ 원효사(元曉師)가 일찍 암자를 지었다네
스님의 영적(靈跡)은 어디 가고/ 유영(遺影)만 영정(影幀)으로 남아 있고
다천(茶泉)에는 찬 물이 가득하여/ 한 사발 퍼 마시니 흡사 젖맛 같이 다네.
이곳 옛날에는 물이 없어/ 불자(佛子)가 머물러 살기 어려웠는데
원효사 한번 와 머무른 다음/ 감청수(甘淸水)가 바위틈에서 솟아올랐다네.
나의 스승이 이 높은 자취를 이어/ 짧은 갈의(褐衣)로 이곳에 머물러
여덟 자 방을 돌아보니/ 신발 한 켤레만이 놓여 있네.
역시 시자도 없이 혼자 조석으로 남아 있으니
소성(小姓)거사가 다시 나타남인가/ 감히 몸을 굽혀 언사를 못하겠네.’


고려 때의 대학자인 이규보(李奎報)가 변산 울금바위 중턱에 있는 원효방을 답사하고 남긴 시이다. 원효대사(617-686)는 다인(茶人)으로서 직접적인 문헌 기록은 없지만 간접적인 증거는 충분하다.

② 설총과 화왕계(花王戒)
설총은 신문왕(재위681-691)에게 ‘고량진미로 배를 부르게 하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한다(膏粱以充腸 茶酒以淸神)’는 말을 전해 준 것으로 보아 차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열전에 보면 어느 날 신문왕이 설총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했을 때, 설총은 우화적인 <화왕계>(花王戒)를 들려주었는데 여기에 ‘화왕(花王)은 목단화요, 백발의 장부는 할미꽃으로 왕이 비록 그렇게 잘 먹고 잘 지키지만 차(茶)와 약으로 정신을 맑게 하고 기운을 내어 간신들을 물리치고 좋은 정치를 해 달라’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설총이 차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③ 충담사(忠談師)와 안민가(安民歌)
신라 경덕왕 24년(756년)삼월 삼짇날 봄볕이 따사롭게 내려 쬐이는 귀정문(歸正門) 문누상에 경덕왕은 측근의 신하들을 대동하고 올랐다. 몇 해 전부터 나라 안팎에 심상치 않게 불길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더니 엊그제 또다시 오악 삼산신(五岳三山神)이 궁전 뜰에 현신한 것이다. 경덕왕은 오늘의 괴변을 막고 정사를 잘 다스리기 위해 깊이 생각에 잠겼다. 문득 한 고승을 모시고 그 덕화(德化)로 괴변을 막아 보고자 하여 주변의 신하들에게 고승을 모셔오라고 명하였다.

이때 마침 차림새가 깨끗하고 품위가 있어 보이는 승려가 있어 모셔왔다. 왕은 이를 보더니 “내가 말하는 스님이 아니다”라고 돌려보내고 다시 모셔올 것을 명하였다. 이때 마침 남쪽에서부터 걸어오고 있는 한 스님이 보였다. 옷은 다 떨어진 누더기를 입고 등에는 걸망(櫻筒)을 짊어지고 있었다. 왕은 이 스님을 보디니 기뻐하며 누상으로 맞아 들였다. 그 걸망 속을 보니 차를 끓이는 다구(茶具)가 들어 있었다.

“스님은 누구신가요?” “소승은 충담이라고 합니다.”
“어디에서 오십니까?” “소승은 삼월 삼짇날과 구월 구일에는 으례히 차를 달여서 남산 삼화령에 계시는 미륵세존께서 공양을 올리는데 지금도 차공양을 올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왕이 듣고서 그러면, “나에게도 그 차를 한잔 나누어 줄 수 있는가요?”
하니 스님은 이내 차도구를 꺼내서 차를 달이기 시작했다. 정성껏 차를 달여 경덕왕께 드리니, 차맛이 특이하며 찻잔 속에서도 기이한 향기가 풍기는 것이었다. 왕과 신하들께 골고루 차를 나누어 드려 마시게 하였다.

④ 중국 구화산에 신라차를 꽃피운 김교각스님
중국 안휘성 구화산은 김교각의 지장성지로, 중국 불교 4대성산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김교각은 자신이 지은 시에서는 신라의 왕자(王子)라 하였고 기록에는 왕족(王族; 近屬)이라 기록되었다. 성명은 ‘교각’이나 ‘지장’이라 호칭하고 있으나 이는 보통 명사이지 고유명사가 아니며 중국 사수전(謝樹田)교수는 ‘수충’(守忠)이라 하였으나 확정된 이름이 아니다. 또 보천(寶川, 보질도)태자설과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아들 ‘문주’로 추측하는 설도 있다.

현존하는 구화산 역사 문헌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는 당나라 원화(元和) 8년(813)에 저술된 <구화산 화성사기>(化城寺記)에 교각스님이 입적한 때는 794년(정원 10), 99세라고 기록, 이를 기준으로 출생 년대를 산출 결과, 출생 년대는 696년(신라 효소왕 5년)이다. 그러나 988년에 저술된 <송고승전>에는 입적 년도를 803년으로 기록, 앞책의 기록보다 9년 늦게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나라 동국역경원에서 편찬(1961)한 <불교사전>에도 입적 년대를 <송고승전>의 기록대로 803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차(茶)와 관련된 기록 중 ‘김교각이 지었다’는 ‘송동자하산’이란 유명한 차시(茶詩)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동자를 보내며(送童子下山)
절간이 쓸쓸하여 네가 집 생각하더니 (空門寂寬汝思家)
절방을 하직하고 구화산을 떠나는구나 (禮別雲房下九華)
대난간의 죽마타기를 즐겨 묻더니 (愛問竹欄騎竹馬)
불문에서 수행하기 게을렀지 (於金地聚金沙)
돌샘물 길으며 달보기도 이제 그만 (添甁澗底休招月)
차 달이며 꽃 희롱하기도 이제는 그만 (烹茗中罷弄花)
잘 가거라 부디 눈물 흘리지 말고 (好去不須頻下淚)
노승은 안개와 노늘을 벗하리라 (老僧相伴有煙霞)

위의 시는 청나라 성조의 강희 42년(1703), 황제의 칙명으로 팽정구(彭定求)가 저작한 <전당서>(全唐書)에 수록된 글로, 뒷부분과 같이 내용이 다른 문헌도 있다. 위시의 ‘금지’(金地)를 ‘금 같은 불도의 땅’이라 해석하고 나머지 부분을 ‘너를 붙잡지 못하는구나’하고 결론지었으나 연구자는 ‘금지(金地)’는 ‘금지차’를, ‘금사’(金沙)란 유명한 샘물인 ‘금사천’(金沙泉)을 지칭한다고 판단된다. 1669년경 유원장이 지은 <계옹다사>(介翁茶史) ‘공경차’(空梗茶)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구화산에는 공경차가 있는데(九華山有空梗茶) 이는 김지장이 심은 바이다(是金地藏所植). 대체로 보건대 구름 안개 중에 기후가 항상 온습하여 이 땅에 심은 바, 맛이 자연 것과 같지 않았다. 구화산은 지주 청양현으로 원명은 구자산이다. 이태백이 아홉 봉우리가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고쳐 구화산으로 하였다. 김지장은 신라의 스님으로 당나라 지덕연간(756-758) 바다를 건너 구화산에 거처하며 이 차를 심었다(渡海居九華乃植此茶). 나이 99세에 함중에 앉아 임종하였는데 3년 뒤에 열어보니 얼굴빛이 살아 있는 듯 했으며 뼈마디가 모두 움직이더라.’

또 중화민국 67년, 영인본으로 초판 발행된 <구화산지>(九華山誌)에 ‘금지차’(金地茶)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금지차는 나무줄기가 속이 비어 작은 대나무와 같다고 전하는데 김지장이 (신라로부터) 가져온 차씨라고 한다(相傳金地藏 携來種). 이지세(李之世)의 시에 ’벽옥같은 차싹이 무럭무럭 자라고 채다에서 풍겨지는 차향은 수행자의 공(空)을 깨우쳐 주네. 누가 서역(신라)에서 전해 온 선맛(禪味)이 틀리다고 하나 설산 중에서 차에 찻물을 가득 채우네.’

위 글에서 ‘김교각이 가져 온 차씨’라는 ‘휴래종’(携來種)의 기록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즉 구화산 지역에서 나는 차씨가 아니라 김지장의 고향인 신라에서 가져온 차 종자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하여 김지장이 가져 온 차란 뜻으로 ‘금지차’ 또는 ‘김지장차’란 이름을 얻게 되었고 그 차나무의 특징으로 ‘나무줄기가 속이 비어 작은 대나무와 같다’하여 공편차라 부르기도 한다고 하였다.

또 <구화지남>(九華地南)이란 책에도 ‘김지장이 차종자를 휴대하고 와서 구화산에 심었다’고 밝히고 있으며 <청양현지>에도 ‘금지차란 서역으로부터 가져온 것이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서역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신라를 가리킨다. 이외에 <속다경>(續茶經) 등이 있는데 <구화산지>와 <구화산록>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구화기승>에는 ‘구화산에는 선인장차가 나는데 ... 김지장은 전다봉(煎茶峰)에서 좌선하고 장기간 차를 마셨기 때문에 99세까지 살았다. 지장보살은 승려들을 봉우리 앞에 모아 놓고 샘물을 퍼서 차를 끓임으로써 차를 혼자서 마시지 않고 여러 도우(道友)들과 같이 마시면서 경(經)을 읽었다.’하였다.

   
 

 

▲ 구화산 김교각보살상

 
 

1993년 10월, 동국대 불교대학원과 신라문화연구회 주최로 서울과 경주에서 개최된 ‘신라 고승 김교각과 중국 구화산 신앙 강연회’에서 중국 안경(安慶)사범학원 사수전교수는 다음과 같이 김지장 차에 대하여 발표한 바 있다.

‘김교각스님이 신라에서 휴대하고 온 신라 차의 종자는 구화산에서 꽃을 피워 열매를 맺었으니 이것 또한 중국 인민의 문화교류에 있어 불후의 공을 세웠다’고 하였으며 안휘 농업대학 왕지항 교수는 ‘구화차와 벼는 중국으로부터 조선으로 전파되어 개량된 후 다시 김지장에 의해 구화산에 재수입 재배되었다. ... 차나무의 크기는 135cm이고 이파리는 뒤로 말리었고 앞면은 불룩하여 가엔 톱날형이 뚜렷하다. 잎의 모양은 중엽종류의 형태로 토란형의 잎모양으로써 독특한 품격을 갖고 있다. 월신전의 85세 되는 노승온념 스님의 말에 의하면 ‘차나무는 높이가 2-3m였고 의자를 놓고서야 찻잎을 딸 수 있었는데 두 세그루 따면 한 바구니 가득 찼다’고 한다. 이는 승려들이 아끼는 공차(貢茶)가 되었다’

구화산에는 모봉차(毛峰茶), 운무차(雲霧茶) 등의 명차를 생산하는 중국의 주요 차산지의 한 곳인데 이 차의 뿌리는 다름 아닌 김지장이 심은 금지차(金地茶)이다.
모봉차는 1915년 파나마 만국박람회에 출품하여 금상을 수상하기도 한 특1급 차로 그뿌리는 바로 우리나라(신라)이다. 현재 구화산에는 3천여 평의 크기의 차밭이 1천 2백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푸르름과 명성을 더하고 있었다.

1999년 6월, 중국 무이산시에서 개최된 ‘한중차문화학술발표회’에서 ‘김교각스님과 차’에 대한 학술발표 및 토론 후, 구화산에 차시비 건립할 것을 성부주지스님께 제의, 사단법인 한국차문화협회가 중심이 되어 성금을 모아 2002년 4월 20일. 구화산 육신보전 경내에 ‘김교각차시비와 차정자’를 건립한바 있다.

구화산 금지차는 김교각이 가져온 차씨라고 하며 ‘금지차’(金地茶)란 차이름 또한 ‘김지장스님이 가져 온 차’를 의미한다. 당시 비문은 현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이 찬하였으며 2009년 9월 9일 9시에 높이 99m의 김교각스님의 청동불상을 건립(九華山에 155.1m 높이의 세계최대로 조성, 연화대를 뺀 불신만 99m), 점안식을 거행할 예정이라 한다.

⑤ 한명(漢茗)과 진감국사(眞鑑國師)
쌍계사 진감국사의 비명(碑銘)에 보면 다음과 같은 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누가 한명(漢茗)를 공급해 오는 자가 있으면 돌 가마솥에 넣어 섭으로 삶아 가루를 만들지 않고 달였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이것이 무슨 맛인지 모른다. 그저 배가 느긋할 뿐이다’했다”

기타 신라시대의 차인으로는 경덕왕에게 차일습(茶一襲)을 받은 월명(月明)스님이나 헌안왕에게 차약(茶藥)을 받은 보조(普照)선사, 그리고 최치원 찬의 무염국사비명(無染國師碑銘)에도 있는 것처럼 역시 헌안왕에게서 매월 차향(茶香)을 받은 무염(無染)국사, 그리고 최치원 자신도 그의 <계원필경>(桂苑筆耕)에 보면 차약(茶藥)을 당나라에서 무역해와 마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라시대에는 <삼국유사>에 전차(煎茶), <남행일월기>(南行日月記)에 점다(點茶)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엽차(葉茶)와 말차(抹茶)를 함께 음용하였던 것 같다.

3, 김해지역 차에 관한 기록와 유적고찰

(1) <삼국유사>의 기록과 유적

① 가락의 역사와 제사에 차를 올린 ‘가락국기’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 즉위 7년, 왕이 인도 아유타국(Ayodhya)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한 사실들과 매년 명절이면 조상의 제사에 차(茶)를 비롯한 제물을 올린 기록이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다음과 같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서기 48년 7월 27일에 아홉 명의 중신들이 궁(宮)으로 들어가서 수로왕을 뵙고 아뢰었다. "대왕께서는 아직 아름다운 배필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의 규수 가운데서 가장 좋은 낭자를 가려서 궁에 들이고자 하오니 왕후로 삼아 주옵소서" 하니, 왕은 "내가 이 땅에 내린 것은 하늘의 뜻이니라. 그대들의 염려할 바가 아니라"하면서 유천간(留天干)에게 영을 내려 망산도(望山島)에서 기다리게 했다. 그때 갑자기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 깃발을 펄럭이며 북쪽으로 오는 배가 있었다. 유천간 등이 망산섬에서 그것을 보고 엉겁결에 횃불을 올리니 배에 탔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뭍으로 내려와 뛰어왔다.

신귀간(神鬼干)이 급히 궁으로 달려가서 이 사연을 수로왕에게 아뢰니 왕은 매우 기뻐하였다. 뒤미처 왕은 아홉 중신들을 마중 보내며 궁에 모셔들이도록 하였으나 배에 타고 있던 왕후는 이에 따르지 않고 “나와 그대들은 익히 아는 처지가 아니니 어찌 함부로 따를 수가 있겠는가”고 하자 다급한 유천간 등이 왕에 이 사연을 아뢰니 왕은 뒤늦게 시종들을 거느리고 궁의 서남쪽 산기슭으로 나가서 휘장을 두르고 그 속에 기다렸다.

이윽고 산자락 끝 별포(別浦)에 배를 대고 왕후는 뭍으로 올라 높직한 언덕마루에서 한숨 돌리면서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그것을 폐백(幣帛)으로 삼아 산신에게 바쳤다. 또 시중해 온 잉신(媵臣) 두 사람과 노비를 합쳐 모두 20명이었으며 가지고 온 금수(錦繡), 능라(綾羅)의 옷과 필단(疋緞), 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만든 패물 등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이 많았다.

 얼마후 왕후가 왕이 기다리던 자리로 가까이 다가오자 왕은 몸소 왕후를 휘장 속으로 맞아들이고 따르던 일행은 댓돌 아래서 절하고 곧 물러났다. 그런데 왕과 더불어 침전에 든 왕후는 “저는 본디 인도에 있는 아유타국(阿踰阤國)의 공주인데 성은 허(許)씨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 16세입니다.

 지난 5월 본국에 있을 때 부왕과 모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젯밤 꿈에 하늘의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께서 ‘가락국의 수로왕은 하늘이 내려 왕의 자리에 앉게 된 성스러운 분으로 새로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나 아직 배필을 얻지 못하고 있으니 공주를 보내 배필이 되게 하라’고 하시어 저를 그곳으로 가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사연으로 저는 바다를 건너서 이곳에 와서 이렇게 용안(龍顔)을 뵙게 된 것이옵니다”라고 말했다.

   
 

▲ 횃불을 올린 망산도-진해시 용원동 소재. 2008, 8, 7일 촬영

 

왕은 이에 답하기를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신성하여 공주가 올 것을 이미 알았으므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이제 현숙한 공주께서 이렇게 스스로 오셨으니 이 사람에게는 참으로 다행이오” 하였다. 드디어 혼인하고 두 밤을 지내고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왔던 배를 돌려보냈는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었다. 이들에게 각각 쌀 10석씩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윽고 8월 1일, 왕과 왕후는 한 연을 타고 중국에서 나는 갖가지 물품도 모두 수레에 싣고 대궐로 들어오니 시간은 정오에 가까웠다.

왕후를 맞은 수로왕이 그로부터 나라의 옛 제도를 새롭게 고치고 나라 안을 잘 다스릴 뿐만 아니라 백성 사랑하기를 아들처럼 하여 그 교화가 엄하지 않았으면서도 위엄이 따르고 그 다스림은 너그러우면서도 잘 이루어졌다 한다. 왕과 왕후의 금실은 흡사 하늘이 땅을 해가 달을 그리고 밝음이 어두움을 짝짓듯 했다고 전한다. 허왕후는 아들 10형제와 공주 자매를 두고 189년 3월 1일에 이승을 떠난다.

백성은 땅이 꺼진 듯한 크나큰 슬픔 속에 구지봉 동북 언덕에 장사 지내고 그녀가 백성을 사랑했던 은혜를 저 버리지 않고자 처음 배에서 내린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으로, 비단바지를 벗었던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으로, 그리고 붉은 깃발을 휘날렸던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으로 고쳐 불렀다.
홀로된 왕은 밤마다 베개에 몸을 기대고 깊은 시름에 빠져 있다가 10년 후인 199년 3월 23일에 승하했다. 백성들은 어버이를 잃은 듯 슬퍼함이 왕후가 돌아갔을 때보다 더했다.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웠는데 높이가 한길이며 둘레가 300보였다.

그곳에 장사 지내고 수릉왕묘(首陵王廟)라 했다. 그의 아들 거등왕(居登王)으로부터 9대 손인 구형왕(仇衡王)까지 신위를 여기서 모시고 해마다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에는 풍성하고 정결한 제전(祭典)으로 제사 지냈는데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다. 수로왕의 17대손 갱세급간(賡世級干)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매년 명절이면 술과 단술을 만들고 떡과 밥, 차(茶), 과일 등 여러 가지 갖추어 제사를 지냈으며 한해도 거르지 않았다. 그 제삿날은 거등왕이 정한 년중 5일을 변동하지 않고 기묘년(AD 199)에 편방(便房)을 설치한 후부터 구형왕 말년에 이르는 3백30년 동안 묘에 지내는 제사는 길이 변함이 없었다. 그후 신라 문무왕은 끊겨졌던 제사를 다시 지내게 하였다.
 


② 파사석탑에 관한 기록
<삼국유사>의 ‘금관성 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조에 의하면, 금관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은 허황후가 배를 타고 서역 아유타국에서 올 때 배에 싣고 온 것이다. 공주는 처음에 부모의 명으로 바다 건너 동쪽으로 가려 했는데, 수신(水神)의 노여움으로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에 부왕이 이 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하였다 한다.

김해시 구산동에 위치한 가야시대의 석탑인 파사석탑은 1996년 3월 11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27호로 지정되었으며 김해 허씨 종중 에서 소유하고 관리하고 있다.
파도나 물을 제압하는 신(神)을 바사신(婆娑神)이라고 하며 이 석탑을 ‘진풍탑’(鎭風塔)이라고도 한다. 구전(口傳)에는 허왕후가 ‘돌배’를 타고 왔다고 하였는데 이는 돌(石塔)을 실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원래 호계사(虎溪寺)에 있었는데 폐사된 뒤 부사 정현석(鄭顯奭)이 1876년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탑의 부재(部材) 5층만 남아 있는데 조각이 기이하고 돌에 붉은 빛도는 희미한 무늬 같은 것이 남아 있다. 신농본초(神農本草)에 ‘닭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는 것이 바로 이 탑이어서 신비를 더하고 있다.

③ 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사적 제74호) 김해시 구산동 120번지
왕릉에 비해서는 시설이 소박한 편이고 수로왕비릉이라고 오래전부터 전해져 왔으므로 수로왕릉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본다면 내부의 구조는 널무덤(土壙墓) 또는 돌덧널무덤(石槨墓)일 가능성이 높다.

구지봉(龜旨峯) 동북쪽에 있는, 이 능은 가락국시조 수로왕의 비릉(妃陵)이라고 전하여 오는 고분으로 김해에서 마산으로 나가는 국도 건너편에 있다. 구산동 고분군으로부터는 서쪽으로 100m 거리이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의하면 허왕후는 옛 아유타국의 공주로 16세 때에 배를 타고 와서 수로왕 7년에 왕비가 되었으며, 189년 3월 1일에 수로왕보다 10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고 하며, 수로왕은 두 아들을 허씨의 성을 따르게 하여 지금도 그 후손이 이어져 오고 있다.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봉분의 주위에는 아무런 시설이 되어 있지 않다. 능의 전면은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았으며 중앙에는 상석과 능비가 세워져 있고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지능'(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之陵)이라고 두 줄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실려 있다. 세종 28년(1446년)에 수로왕릉과 함께 보호구역이 넓혀졌으며 <김해읍지>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에 도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조 25년(1641년)에 다시 수축하면서 현재의 능비와 상석 등을 설치하였고, 1972년과 1981년에 건물과 능묘 주변을 보수 정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허왕후와 아유타국 연계성연구

① 가락과 허왕후의 선행연구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의 자출에 대한 것은 이종기(李種琦)  의 연구로 그는 김수로왕릉 납릉 정문에 있는 물고기문장이 인도의 아요디아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초선대의 인물상은 가야의 2대왕인 거등왕의 초상으로 그 형태가 인도의 모헨조다로에서 출토된 인물상 및 드라비다족과 비슷하다고 보았는데 그 앞에는 불족적이 있다. 명월사지에서 발견된 탑신에 새겨진 조각은 삼매에 잠긴 불타를 한마리의 거대한 뱀이 감고 있는 형상으로 뱀의 목덜미에는 동그란 무늬가 있어 이것이 인도에 사는 코브라임을 알 수 있었고 이것은 소승불교에서 나타나는 조각임을 알수 있다. 그리고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탑을 말하였다.

연구자 허명철(許明徹)도 파사석탑이 1978년 인도학자들의 현지조사에 의해 인도산임을 확인하였다고 하였으며 닭의 피에는 녹아서 없어지는 특이한 돌임을 입증하였다. 파사(婆裟)라는 명칭도 "바사"라는 범어에서 나온 것임을 입증하였다. 그리고 인도 갠지스강 하구의 탐록에서 출발하여 니코발군도를 거쳐 쟈바, 수마트라를 거쳐 중국의 광주에서 가야로 왔는데 총 90일이 걸렸을 것으로 보았다.

‘가락국기’에 출발일이 5월 도착일이 7월 27일로 약 3개월에 걸친 것으로 인도에서 남행하려면 4-6월에 부는 계절풍을 이용했으리라고 보아 출발일시가 5월이였음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창원공단 개발시에 중국 호남지방과 교역한 흔적이 있는 부족국가취락지가 발견되었고 인도의 쿠샨왕조가 중국의 항구에 진출하여 비단을 싣고 갔다는 것은 이러한 인도에서 가야까지의 뱃길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허황후의 시호인 보주(普州)란 ‘넓다, 위대하다, 훌륭하다’라는 뜻으로 보았다. 그리고 허왕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의 존재로 고구려 소소림왕 때에 대승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가야에는 이미 인도의 소승불교가 들어왔음을 밝혔다.

한양대학의 김병모(金秉模)는 허황후 일족이 인도의 아요디아에서 중국 사천성 안악으로 이동하였는데 그곳은 허황후능비에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 한 보주(普州)지역으로 허황후가 나타날 당시 쌍어문이 나타나는 사천성은 촉(蜀)이라 불렀는데 <후한서>(後漢西)에는 47년에 촉지방에서 신전에 쌍어를 모시는 소수민족신앙집단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여 무창으로 강으로 강제이주 당하는데 그 반란의 주동자가 허성(許聖)이였다.

이러한 허황후 일행은 양자강을 따라 배를 타고 동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가락국으로 왔다는 것이다. 그는 쌍어문(雙魚文)이 인도의 아요디아, 중국의 사천성 안악, 무창, 한국의 김해에 나타나며 특히 김해의 다호리 가야고분에서 중국 한나라 때의 구리거울과 사천성의 대표적 사물인 칠기가 다량으로 나타나 허황후일족이 인도의 아요디아⇨중국의 보주⇨양자강⇨황해⇨김해로 이동해왔다고 보았다.

②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陀國, Ayodhia)과 가락국
갠지스강의 중류인 사라유(Saryu)강 왼쪽 언덕에 있었던 베다(Veda)기(期)의 태양왕조로서 지금의 아요디아시(市)가 왕도(王都)였으며 ‘아요디아’란 ‘싸움으로 정복되지 않는다’는 산스크리트어이다. 그리고 또 인도 남동부 해안의 최대주인 우따르 프리데시주의 아요디야 쿠빰(Ayodhya Kuppam)이라는 주장도 있다.

현재 허왕후릉에 남아 있는 ‘파사석탑’의 돌(石)은 우리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돌로 인도나 중국의 동부 바닷가에서 발견되는 돌이라 한다. 김수로왕릉 정문과 인도 북부의 아요디야 힌두교사원에 있는 쌍어문양(雙魚文樣)을 비롯, 해바라기문양. 활모양, 얼굴 모양 등 김해시의 허왕후 관련 유적과 인도 아요디아시의 유물과의 유연성과 연계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요디아(인도)

김해(가락)

해바라기문양/ 태양왕조인 아유타국을 상징하는 깃발.

쌍어문양(雙魚文樣)/ 아요디아시의 건물입구마다 장식된 전승(戰勝)의 신어상(神魚像)으로 아요디아시는 물고기모양으로 건설되었다.

활문양/ 태양신의 화신(化身)으로 숭앙 받는 라아마왕의 상징임.

/ 남전 불교의 경전에 해탈한 부처님을 보호하는 뱀의왕.

시바 링가/ 힌두교 사원에서 시바에게 우유공양하는 시바 링가.

얼굴모양/ 모헨다로에서 출토된 돌로 만들어진 남자의 얼굴.

►가락국 태조왕릉 중수기념비의 머리에 새겨진 문양.

►마주보는 두 마리 물고기 문양.

►좌우에 있는 두 개의 활모양-물고기와 활의 모양은 수로왕릉의 남릉 정문의 장식판에도 그려져 있다.

►뱀 여덟마리의 머리가 해바라기처럼 배열된 문양-명월사터에 남은 뱀에 감긴 불상의 돌조각.

►부은암(父恩庵)에서 발견된 뚜껑없는 맷돌모양의 석조물

►초선대(招仙臺)의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을 닮은 인물상

인도에 아유타국이 존재하였던 시기는 어느 때인가? 인도에는 기원전 70년 박트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대월지국(大月氏國-쿠산왕조)이 갠지스강유역을 점령하였고 숭가왕조는 패망하였으며 이 때 아요디아 사회도 붕괴되었다. 쿠산은 평등주의불교로 단결되어 있었고 아요디아는 그때까지도 브라만을 정점으로 하는 계급사회였기에 취약한 구조였다. 이민족에게 침략당한 아요디아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 어디론가 이주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인도를 떠난 허황옥의 선조들이 중국 보주지방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아닐까. 보주에서 몇 대를 살아가면서도 자기네들은 ‘아유타국사람’으로 브라만(許; 職業 巫師)계층의 신앙생활을 했을 것이다. 부라만식 신전을 세우고 신어상을 조각해서 붙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4세기경이 되면 마우리야 왕조에 의해 거대한 인도 땅에 최초로 통일국가가 탄생한다. 마우리야 왕조는 마가다 왕국의 아쟈타샤트루 이후 150여 년간을 지속한 난다 왕조의 뒤를 이어 찬드라굽타가 세운 왕조이다. 그는 알렉산더가 기원전 327년 서북인도를 침입한 뒤 돌아가면서 남겨둔 그리스인들이 세운 박트리아 왕국의 침입을 물리치면서 북쪽의 경계를 튼튼하게 만들었다. 이후 아쇼카 왕은 마우리야 왕조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칼링가 왕국을 정복함으로써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웠다.

한편 아쇼카 왕은 이 전쟁의 참혹함을 목격하고 불교에 귀의한 뒤 아시아와 멀리 유럽까지 포교에 힘써 불교가 인도를 넘어 세계종교가 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아쇼카의 죽음 이후 마우리야 왕조는 급속히 무너지면서 내부적으로는 수많은 왕국들이 생겨나고 외부적으로는 서북 인도 지역에 이민족들이 침입하기 시작한다.

기원전 2세기경이 되면 인도는 동부, 중앙, 데칸 지역으로 나뉘어 각기 푸샤미트라의 슝가 왕조, 칸바 왕조, 그리고 샤타바하나 왕조가 건립되어 제각기 세력다툼을 벌인다.
쿠샨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은 기원후 50년경 힌두쿠쉬 산맥을 넘어 카불과 카시미르 지역을 차지했던 쿠즐라 카드피세스이다. 이후 128년경 카니슈카 왕은 비록 반초의 중국군과 전쟁을 벌여 패하기는 했지만 쿠샨 왕조 가운데 가장 번성한 시기를 이룩했다.

(3) 허왕후의 유적과 이동경로

   
 
 

▲ 허황옥일가의 이동경로

 
 

가락국 수로왕비릉의 비문에 ‘가락국왕비 보주태후(普州太后)허씨릉’ 이라고 한자로 기록되어있다. 여기에서 보주란 어느 곳을 지칭하는 지명인가? 김병모는 ‘보주’는 다음과 같이 중국의 지명이라고 한다. ‘보주’라는 지명은 중국 사천성(四川省) 안악(安岳)의 옛지명으로 또 이지역의 허씨집성촌이 있고 뒷산 기슭에는 ‘신정’이라는 우물 암벽에 허황옥에 대한 기록이 있는 금석문과 쌍어문이 발견되었다. 이곳은 중국 사천성 안악현 서운향(瑞雲鄕)으로 허씨 종산과 사당(祠堂)이 있으며 사당 대문에는 쌍어가 새겨져 있다. 현재 안악현 내에는 14개의 보주 허씨 집성촌이 있으며 그 인구는 15만 명이라고 한다.

중국 <후한서>(後漢書)에 허황옥이 가락국에 도착하기 1년전인 서기 47년, 현재 사천성일대(南郡) 토착민이 일으킨 반란 사건과 이주시킨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建武二十三年 春三月 南郡蠻叛 遺武威將軍 劉尙討之 徒其鍾人於江夏/ 건무23년 (서기 47년)남군 만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무위장군 유상을 파견하여 토벌했다. 강하로 이주시켰다.

위에서 강하지역은 양자강의 중류인 현 호북성 무한(武漢)지방이다. 이때 촉 땅 보주에 살고 있었던 보주 허씨들도 이 봉기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것은 같은 책에서 다음 기록에서 이를 입증할 수 있다. 즉, 서기 101년 ‘허성(許聖)의 무리가 세금 차별에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을 또다시 강하로 이주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① 아유타국과 김해를 잇는 경로
고대 인도 아유타국과 김해를 잇는 허황옥과 관련되는 경로는 두 길이 있을 수 있다.
첫째, 인도 갠지스강 하류, 탐록을 출발하여 슈마트라를 거치고 중국 광주를 지나서 가야에 도착하였다는 허명철의 설과 인도를 출발, 차마고도(茶馬古道)를 지나 중국 안악의 보주를 통해 육로와 뱃길을 이용하여 김해에 도착하였다는 김병모(金秉模)설이 있다.

고고학자인 김병모는 허 왕후의 뿌리를 찾아내어 그곳에 허 왕후 고향비를 세우기에 이르렀는데, 한국유전체학회에서 서울대 의대교수진이 허 왕후의 후손 유골의 유전물질(DNA)을 분석, 북방계가 아닌 남방계임을 확인함으로써 그 역사적 궤적을 입증한 바 있다.

인도 고지도에 나와 있는 아요디아의 옛 지명 아유타국에서는 1세기에 북방 월지족(月氏族)의 남침으로 지배층이 쫓겨나 중국 서남 고원지대를 거쳐 사천지방인 촉(蜀)나라에 정착했다. 허 왕후의 능비에 ‘보주태후(普州太后) 허씨릉’이라 쓰인 데서 허 왕후가 보주(普州)란 곳과 연관이 있다고 보고 사천성 안악현(安岳縣)의 옛 지명인 것을 알아냈다.

그곳에서 서기 48년, 전 해에 반란이 일어나 허 왕후는 양자강(長江)에 배를 띄워 다시 피란길에 오른다. 인도 소녀인 왕후는 오빠와 더불어 삼협(三峽)을 거쳐 황해로 나와 김해 앞바다에 이른 것으로 추정했다. 언어학자로부터 가락이라는 말이 인도 고대어에서 물고기를 뜻한다는 것도 알아내어 허 왕후의 궤적을 언어학적으로도 입증했다.

② 허왕후의 관련 유적
쌍어(雙魚); 허 왕후의 이동 지역을 연결하는 문화의 공통분모로 김 교수는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 바라보고 있는 쌍어신앙을 들었다. 아요디아의 사원이나 풍물에 쌍어가 흔하고 보주에서도 확인됐으며 김수로왕릉의 정문에도 이 천축문화인 쌍어가 새겨져있다.

   
 
 

▲ 납릉(首露王陵)의 쌍어

 
 

   
 
 

▲ 아요디아의 쌍어(雙魚). 인도 갠지스 강변의 옛 왕국 아요디아 수백 개의 힌두교 사원 정문 위에 빠짐없이 쌍어문이 있다(김병모 교수 제공). 이 쌍어문이 가락국 국장(國章)의 원형이다

 
 

   
 
 

▲ 쌍어유적-유라시아 대륙에서 신어사상을 믿는 사람들의 이동루트

 
 

허왕후의 오라버니인 장유화상(長遊和尙)이 세웠다는 은하사(銀河寺)에도 두 쌍의 쌍어를 찾아볼 수 있다.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신어사상이 비롯되었으며 다음 그림은 쌍어사상을 믿는 사람들의 이동루트로 한국과 일본도 신어사상의 문화권에 포함된다.

보주(普州)의 신정(神井)과 신정기(神井記)
중국 사천성 안악현 서운향(瑞雲鄕) 허씨집성촌의 뒷산 기슭에는 ‘신정’이라는 우물이 있고 우물 옆 암벽에 ‘허황옥’의 이름과 그 가족에 대한 내용이 있는 금석문이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허씨 종산과 사당(祠堂)이 있으며 사당 대문에는 쌍어가 새겨져 있다.
신정기의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神井記/ 신정기
普州東里 鐘地靈之奇氣 振人傑之英聲 許族早居于斯, 長傳佳話 其宅後山如獅 前原似錦 崖下井水淸冽旋汲旋盈 大旱不竭/ 보주의 동쪽 마을 동리는 지령의 기기를 모아 인걸이 영성을 떨쳤다 허씨족이 여기에 거주하니 길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한다 그 집의 뒷산은 사자 같고 앞의 들은 비단과 같았다. 바위아래 우물이 있어 맑은 물이 맑고 차서 긷는 즉시 가득하고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東漢初 許女黃玉 姿容秀麗 智勇過人 兒時喜聆先輩逸事 嘗聞祖云/ 동한의 초에 허(녀)황옥이라는 소녀가 있어 용모가 수려하고 지혜와 용기가 남을 넘었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기 좋아하였다. 일찍이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丁卯饑饉 人多逃荒 適母臨□ 遂絶流離之念 賴父行乞度日 余呱呱墜地 無哺乳爾 曾祖虔禱于井 冀獲天賜 移時 中有魚躍 折枝垂釣 日得二尾 烹爲羹作乳汁 如是經年 汝祖因以存活 家人感其靈異 尊爲神井 而許氏亦由此繁衍昌盛 成望族焉 "/ "정묘년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게 되었을 때, 마침 어머니(증조모)가 산기가 있어 떠나는 사람들과 헤어져 남게 되었다. 아버지(증조부)가 구걸을 해서 살게 되었다. 그 때 내(조부)가 이 땅에 태어났으나 먹일 젖이 없었다. 증조부가 우물에 경건히 하늘의 도움을 빌자, 이윽고 우물 속에서 고기가 뛰어 올랐다. 나뭇가지를 꺾어 낚시를 드리워 하루 두 마리씩 낚았다. (물기기)를 삶아 죽을 만들고 유즙을 만들어 해를 지나 너의 할아비가 살아남았다. 후손들 그 우물의 신령스러움에 감복하여 ‘신정’이라 높여 불렀다. 그래서 허씨족이 오늘날과 같이 번창하고 위대한 씨족이 되었다"
乙酉春三月上浣 穀旦立/ 을유년 봄 삼월달의 첫 열흘중 길일에 세움

허황옥의 할아버지는 정묘년에 태어났다. 허황옥은 가락국에 시집 올 때인 서기 48년에 16세였으므로 역산하면 서기 32년생이고 그 할아버지가 태어난 정묘년은 60갑주에서 기원전 64년에 해당한다. 그때 중국은 서한(西漢) 곧 전한(前漢) 선제(宣帝)때이다. 따라서 허황옥은 이곳 보주 태생임을 확인할 수 있다.

►파형동기(巴型銅器); 1989년 일본 사가현 간자키(神崎)군 요시노가리 주거지에서 동기(銅器)를 발굴, 그 문양이 마치 ‘태극이 회전할 때 발생하는 음양의 빛줄기꼬리 형상과 같다’하여 한자 ‘巴’(파)와 비슷하여 ‘파형동기’란 말을 만들었으며 ‘일본 고유의 문화’라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그 원류를 구명한 결과, 그 파형문양은 가락국 김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이 인도의 아유다국에서 가야로 시집 올 때, 가지고 왔으며 그후 김수로왕릉 문양으로 약간 변형되어 쓰여져 전해 온다. 파형동기는 꼬리 수와 회전방향에 따라 호칭이 약간 다르다. 가령 꼬리가 우측으로 다섯줄기로 굽어져 있는 것은 ‘우5파형=CCW’이고 좌측으로 여섯줄기이면 ‘좌6파형=CW’이라 한다. 인도 아유다국의 파형문양은 우8파형, 김해 김수로왕릉에 있는 것은 좌9파형, 대성동 고분에서 출토된 것은 좌4파형, 일본의 요시노가리 것은 좌7파형이다.

   
 
 

▲ ‘중국청동기도전’에 소개된 상(商)대의 삼파형 문양

 
 


② 허왕후선조가 보주로 이동했을 차마고도(茶馬古道 Tea-Road)

   
 
 

▲ 차마고도 약도-아래 고도표 삭제

 
 

인도와 중국을 있는 고대 교통로는 차마고도이다. 중국의 차(茶)와 티베트의 말(馬)을 교환하기 위해 개통된 교역로로 중국과 티베트, 네팔, 인도를 잇는 육상 무역로이다.

이 길은 실크로드보다 200여 년이나 앞선 기원전 2세기 이전부터 존재한 고대의 무역로로 알려져 있다. 해발 4,000m가 넘는 험준한 길과 눈 덮인 5,000m 이상의 설산과 아찔한 협곡을 잇는 이 길을 통해 차와 말 외에도 소금, 약재, 곡식 등의 다양한 물품의 교역이 이루어졌으며 물품교역 외에도 여러 이민족의 문화와 종교와 지식이 교류되었다.
인도의 아요디아(아유타국)과 한(漢)나라를 연결하는 최단거리의 꼭짓점은 운남성괴 미얀마의 국경선으로 옛날의 마방로(馬幇路-五尺路)이다.

중국에서는 차를 최초로 발견하고 맛 본 사람을 신농씨로 보고 있다. ‘신농이 하루는 백가지 풀을 맛보며 일흔 두가지 독초를 발견하였는데 차로써 그것을 모두 해독했다’고 하였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본초서인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의 저자·저작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전한 말기로 짐작된다. 서문에는 약의 성질과 용법이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어 한방이 한(漢)나라 때 이미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는 차(茶)라는 글자가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므로 옥편에도 없는 ‘차초’(○艸)라고 기록되어있으며 다음 사진과 같다.

   
 
 

▲ 전한 말기의 <신농본초경>에 기록된 차(○초)글자

 
 

차마고도의 고장 사천성과 운남성은 차의 고장으로 치열한 원조 경쟁을 벌리고 있는 지역이다. 2,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사천성 몽정차(蒙頂茶)는 당나라 때부터 청나라까지 천년이상 중국 황실에 바쳐온 명차의 고장이다. 몽정차를 ‘감로’(甘露)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처음 오리지(오리진)이 차를 심었을 때의 년호가 감로(기원전 53-50)라서 이를 기념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한편 운남성 쓰마오 란창성의 방웨이촌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차나무로 기네스북에 2001년, 등재된 고차수(千家寨 1號 古茶王樹)가 있다. 이 나무의 높이는 약26m, 직경 2m, 수령은 약2,700년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정부는 이를 기념하여 우표까지 발행했다.

차마고도에서 판매되었던 차는 사천성의 전차(磚茶) 또는 장차(藏茶)로 대엽차를 찌어 벽돌처럼 만들어 대나무로 포장한 값싼 차이다.

   
 

 

▲ 四川省雅安茶廠有限公司藏茶(박용구060502)

 
 
   
 
 

▲ 사천성아안다창유한공사 장차(박용구060502)

 
 

 

 

 

 

 

 

③ 쿠르시오(黑潮)해류와 한중 사단항로(斜斷航路)
허황옥이 양자강을 따라 그 하류에 이르고 다시 배를 타고 김해로 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 노를 저어 인력으로 항해하는 방법과 계절풍, 해류에 의하여 이동하였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여기에서 가장 확실하고 현재까지도 변하지 않는 방법은 크루시오(黑潮) 해류를 활용하는 것이다. 즉 인력에 의하지 않고 자연의 힘에 의하여 항해하는 방법이다.
우리 선조들은 예부터 이 해류를 이용하여 동남아지역과 중국지역으로 교역하였으며 양자강 하구(明州-녕파) 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항로를 한중 사단항로라 부르고 있다.

신라 무역상과 승려들이 많이 드나들었던 명주(녕파) 앞바다에는 ‘신라초’가 있고 보타도에는 신라, 일본역사와 관련 있는 관음사(불긍거관음암)가 위치하고 있다.
허황옥은 국제항이었던 양자강 하구 명주에서 이 한중 사단항로의 해류를 이용, 흑산도와 제주도인근을 지나 김해 별진포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김해지역의 차관련 기록과 지명

① <삼국유사>와 <동국여지승람>의 기록

1206년에 발간된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신라 30대 문무왕(法敏王, 661-681)이 신유(661)년 가락국 수로왕은 내 15대조가 되므로 비록 나라는 망했어도 사당은 남았으니 제전을 행하도록 명을 내렸다. 수로왕의 17대손 경세급간(賡世級干)에게 거등왕 당시와 같이 술과 단술을 만들고 떡과 밥과 차와 과자 따위의 제수로 제전을 거르지 말고 행하도록 했다. 제삿날은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년(199년)부터 구형왕 말기에 이르기까지 330년 동안 묘의 제사는 변함이 없었다.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후 용삭 원년(661년)에 이르기까지 60년 사이에는 묘의 제사를 간혹 빠뜨리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1486년에 발간된 <동국여지승람> ‘금강사’(金剛社)조, 하륜(河崙)의 기에 ‘금강사에 산다수(山茶樹)가 있어 온 뜰을 덮었으니 전조 충렬왕(1274-1308)이 수레를 멈추고 장군(將軍)이라 칭호를 내려 주었다’(社有山茶樹 蔭于一庭 前朝忠烈王駐輦于此 賜號將軍 父老相傳以爲美談)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산다화가 활짝 피어 있었다. 다만 마루가 낮고 작으므로 나뭇가지와 잎이 서로 가리워서 멀리 내다보기가 어려웠다’고 하였다. 같은 책, 서거정(徐居正)시에 ‘장군나무 늙었는데 풀은 무성하다. 가야 옛 물건 거문고 아직도 남아 있으니’(將軍樹老草 伽倻古物琴猶在)고 기록, 차나무가 사람 키보다 크고 오래되었으며 가락국까지 연결되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여기에서 산다수가 차나무란 사실은 서거정의 시 ‘작설차(謝岑上人惠雀舌茶, 山茶茁茁新芽成 排珠散玉黃金團) 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② <조선불교통사>와 구전(口傳)의 기록
조선후기의 역사, 민속학자인 이능화는 ‘김해 백월산(白月山)에는 죽로차(竹露茶)가 있다. 세상에서는 수로왕비 허씨(許氏)가 인도에서 가져 온 차씨라고 전한다’(金海白月山有竹露茶 世傳首露王妃許氏 自印度持來之茶種)고 그가 지은 <조선불교통사>에 기록하고 있다.
조선 말엽, 일제초기의 신문학자(新文學者), 이능화(李能和, 1869-1943)는 최병헌(崔炳憲, 1858-1927)과 함께 한국종교사학(宗敎史學)의 비조(鼻祖)로 꼽히고 있다.

이능화의 대표적인 한국불교사 연구서로는 <조선불교통사>를 들 수 있으며 그 자신 불교인이었던 까닭에 스스로의 종교의 역사를 먼저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하였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하겠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는 다까하시(高橋亨)의 <이조불교>에 거의 그대로 인용, 뒷날 불교방면 연구에 초석이 되었으며 문헌학적으로 개척의 공이 크다. 그의 방대한 유고는 6. 25사변 때 행방불명되었다.

그리고 김해시와 김해군 녹산면에 구전(口傳)되는 것을 보면 ‘허왕후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야에 시집올 때, 옥합(玉盒)에 차종자를 넣어 와서 명월산(明月山)에 심게 했으며 이어 명월사를 건립하여 차 재배 전담스님을 두고 차를 만들었으며 이 차를 궁중에 바쳤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는 물론 왜까지 알려져 왜가 차씨를 구해 갔다’고 전한다. 특히 묘견 공주인 비미호(卑彌呼)가 야마대(邪馬臺)에 건너갈 때, 불교와 함께 차의 씨앗과 부채 및 가락의 가마인 가교(駕轎)도 함께 건너간 것으로 전한다.

③ 김해 주변의 차관계 지명
김해를 비롯한 주변지역의 차관련 땅이름과 차나무 야생지와 관련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백월산 남동쪽의 다호리(茶戶里)를 비롯, 김해시 진례면의 찻골(茶洞; 茶谷)이 있고 상동면에는 여다리(余茶里), 다시곡(茶蒔谷), 다곡(茶谷)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그리고 김해의 동쪽 계곡인 금강지(金崗趾)는 옛 지명이 다전리(茶田里)였는데 지금도 오래된 차나무가 많다.

특히 다호리 고분(古墳)에서는 2천년 된 다기(茶器) 등이 발굴되어 찬란했던 가야문화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 동면 다호리 유적은 1988년 이후 1992년까지 7차에 걸쳐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된 유물은 토기, 청동기, 철기, 칠기 등 다양하게 검출되었다. 부장품으로는 오수전(五銖錢)과 지석(砥石), 석제 대팻날 등도 출토되었다.

 특히 다호리 유적에서는 한(漢)나라 때 화폐인 오수전이 발굴되어 화재를 모으기도 했다. 오수전은 <사기>에 처음 주조된 연대를 한나라 무제의 원수 4년(元狩四年: BC 119)으로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를 거쳐 수대(隋代)의 약 900년에 걸쳐 단속적으로 발행 ·사용되었는데, 한나라의 묘 ·성지 등에서는 수십개 ·수백개가 일괄적으로 출토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해 백월산 다호리를 비롯, 여천군 거문도, 삼천포 늑도유적, 제주도 산지항(山地港)에서는 왕망전(王莽錢)과 함께 오수전이 발견되었고 창원의 성산(成山) 조개더미에서도 김해식 토기와 함께 출토되었다. 당시 한나라 수도는 장안성으로 양자강 하류에서 운하를 통하여 이를 수 있다. 이러한 한대의 오수전은 가야-신라시대 한중교류의 중요한 유물로, 이 시기의 연대결정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1981년 김해읍이 시(市)로 발전하면서 그 동(洞)의 일부를 다전로(茶田路)라 하였으며 이곳에 도요지가 동광초등학교에 남아 있다.

④ 김해지역 출토 가야의 찻잔들
수로왕(首露王)이 돌아가자 그의 아들 거등왕(居登王)이 매년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과 8월 5일 등 일년에 다섯 차례 제전(祭奠)을 거행하였다. 이 제전은 9대 구형왕(仇衝王)에 이르기까지 330년간 시행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30대 문무왕(文武王)이 즉위하던 해인 661년 제전을 부활시켰으며 김수로왕의 17대 후손인 갱세급간이 거등왕이 지낸 바와 같이 연중 다섯 차례 술과 병(餠, 떡), 반(飯, 밥), 차(茶), 과(菓, 과자) 등 제물로 차례(茶禮)를 지냈다.

이때에 사용된 잔은 잔잔대(盞盞臺)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모양이었을 것을 추정할 수 있는데 이 잔잔대의 형태는 가락 신라에서 거의 유사한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근세에 이르기까지 약간 변모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잔잔대 형태는 신라 이전에도 제작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것은 연질토기잔잔대(軟質土器盞盞臺)와 홍토기잔잔대(紅土器盞盞臺)를 예거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잔의 존재는 청동기시대의 한국인들이 차를 마셨거나, 차를 의례용으로 사용한 가능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⑤ 김해지역야생 차나무
김해시 금강사지(지금의 김해향교)바로 위에 백운산 또는 백운대(송악단(松嶽壇). 서재골)주변, 만장대 서쪽 옥류동계곡(차밭골), 장유초등학교 앞산, 녹산면 지사리 등과 인근지역인 명월사지(부산시에서 과학단지), 창원, 마산, 밀양 물금일대에도 야생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현재까지 창원 백월산에서는 자생하는 차나무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인근 약 7.2km 떨어진 창원시 신라 구산선문 중의 하나인 봉림사지(鳳林寺祉)에서 18cm의 대엽종 차나무가 발견되었으며 백월산 줄기아래 주남저수지 변에 위치한 다호리(茶戶里)에서는 ‘차’(茶)자 지명과 찻잔이 발굴된바 있다.

   
 
 

▲ 가락시대의 잔잔대

 
 

   
 
   
 


 

 

 

 

 

4. 결 론

金首露王妃 許皇玉의 先祖는 印度 아유타국에서 茶馬古道를 通하여 中國 四川省 寶州(安岳)地域으로 移動하였으며 허황옥은 보주에서 出生하였고 亂離를 避하여 長江과 쿠로시오 海流를 利用하여 바다를 건너서 가락국 別浦에 到着한 것으로 推定된다. 世界에서 가장 오래된 茶나무를 가진 云南省과 世界에서 가장 좋은 茶를 갖고 있다고 自負하는 四川省이, 許皇玉이 태어나고 자란 故鄕이라 할 수 있다.

이 地域에는 ‘茶에 소금이 없으면 물과 같고 사람이 돈이 없으면 鬼神과 같다’는 장족의 俗談이 있고 ‘食糧이 없으면 사흘을 견딜 수 있지만 茶가 없으면 하루를 버티지 못한다’는 티베트인들의 生活風俗과 生活에 茶가 必需品임을 알고 있는 허황옥은 먼 나라로 떠나면서 어찌 차씨를 준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본 硏究內容을 綜合하여 간략히 定理하고 提言하면 다음과 같다.

① 우리나라 역사의 정사(正史)로 評價되고 있는 <삼국사기>에는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6) 때에도 차가 있었고(茶自善德王時有之) 흥덕왕 3년(828년) 사신 대렴(大廉)이 중국에서 차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때 차가 있었다는 것은 ‘차나무가 있었다’와 ‘차를 마시는 풍속이나 제품이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전자(前者)라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즉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통도사 금강계단을 조성하였고 지식수(知識樹)라는 나무를 심은 사실(元寧寺)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또 ‘차를 만드는 다촌(茶村)인 평교다소가 있다’는 사실이 <통도사가사사적약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최근까지 통도사 금강계단 내에 고차수가 있었다. 이는 ‘선덕여왕 때의 차는 차나무’라는 사실을 실증할 수 있는 근가가 된다. 한편 선덕여왕시대 ‘차가 있었다거나 차를 마셨다’는 다른 문헌이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②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수로왕의 17대손 갱세급간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매년 명절이면 술, 떡, 밥, 차(茶), 과일 등을 갖추어 제사를 지냈는데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년(199)부터 구형왕 말년(562)에 이르는 3백30년 동안 변함이 없었다’고 기록, 이 때 올린 차는 외국에서 수입한 차제품이라는 기록이 없다. 즉 제사를 지낸 인근의 산야에 차나무를 심어 놓고 그 차 잎을 따서 차를 만들어 매년 제수에 충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③ 조선 인조(1623-1649)때 의 <김해지>는 ‘차밭골의 골짜기를 금강곡이라 하는데 고려 충렬왕이 금강골의 차나무를 보고는 수레를 멈추고 장군차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고 기록되었다. 따라서 이 당시 제사를 지냈던 인근의 계곡인 금강곡에 커다란 차나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커다란 차나무의 크기는 알 수 없으나 만일 나무 밑둥의 직경이 18cm로 가정하고 양명학회의 기준에 따른다면 약1200년의 고차수가 되므로 199년 가락국제사에 사용한 차나무가 있었고 서기 48년 허왕옥이 차씨를 가져와 심었다고 추정할 수가 있다.

④ 이능화가 지은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김해의 백월산에는 죽로차(竹露茶)가 있다. 세상에서는 수로(水路)왕비인 허씨(許黃玉)가 인도에서 가져 온 차씨라고 전한다’고 기록되었다. 현재의 창원지역에 속한 백월산은 가락국 초기에는 가락국 경내에 있었고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백월산의 유명세에 편승하여 ‘이러한 설화’가 전해 내려온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한편 금강곡에 차나무를 심어놓고 이곳 백월산 지역에도 차나무를 심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 ‘수로왕비 허황옥 공주가 인도에서 올 때 옥으로 만든 함에 차씨를 담아 와 첫 밤을 새운 명월산에 심도록 했다. 명월산 명월사에는 차를 담당하는 스님이 있었으며 철에 맞춰 차를 궁에 바쳤다. 이 차는 그 이름이 이웃 왜에까지 알려져 왜가 사람을 보내 차를 구해 갔다’고 기록, 구전 야사가 전해오고 있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⑤ 인도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원전 70년 박트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대월지국(大月氏國-쿠산왕조)이 갠지스강유역을 점령하였고 숭가왕조는 패망하였으며 이 때 아요디아 사회도 붕괴되었다. 이때 인도를 떠난 허황옥의 선조들이 중국 보주지방에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보주에서 몇 대를 살아가면서도 자기네들은 ‘아유타국사람’으로 부라만식 신전을 세우고 신어상을 조각해서 브라만(許; 職業 巫師)계층의 신앙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 된다.

⑥ 허황옥은 가락국에 시집 올 때인 서기 48년에 16세였으므로 역산하면 서기 32년생이고 그 할아버지가 태어난 정묘년은 60갑주에서 기원전 64년에 해당한다. 그때 중국은 서한(西漢) 곧 전한(前漢) 선제(宣帝)때이다. 따라서 허황옥은 인도 아유타국 태생이 아니고 이곳 보주 태생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안악현 서운향(瑞雲鄕) 허씨집성촌의 뒷산 기슭에는 ‘신정’이라는 우물이 있고 그 옆 암벽에 ‘허황옥’ 이름이 기록된 것은 중요한 증거자료로 평가된다. 단지 그녀의 선조가 아유타국 출신으로 추정된다.

⑦ 김해시 금강곡의 찻골(茶田里-茶田路)을 비롯, 백월산 남동쪽의 다호리(茶戶里), 김해시 진례면의 찻골(茶洞; 茶谷)이 있고 상동면에는 여다리(余茶里), 다시곡(茶蒔谷), 다곡(茶谷)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특히 다호리 고분(古墳)에서는 2천년 된 다기(茶器) 등이 발굴되었고 한(漢)나라 때 화폐인 오수전이 발굴되었다.

오수전은 여천군 거문도, 삼천포 늑도, 제주도 산지항(山地港)에서는 왕망전(王莽錢)과 함께 오수전이 발견되었고 창원의 성산(成山)패총에서도 김해식 토기와 함께 출토되었다. 당시 한나라 수도는 장안성으로 양자강 하류에서 운하를 통하여 이를 수 있다. 이러한 한대의 오수전은 가야-신라시대 한중교류의 중요한 유물로, 이 시기의 연대결정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리고 김해의 동쪽 계곡인 금강지(金崗趾)는 지금도 오래된 차나무가 많다.

본 연구결과와 같이 ‘가락국 수로왕비 허황옥이 중국 사천성에서 가져왔다’는 사실과 가능성이 객관적으로 확인됨에 따라 ‘가야차시배지(또는 가야차발원지)’는 김해지역으로 기록되어야 하겠다. 그리고 이 지역의 우리나라 차의 뿌리이며 남상(濫觴)이라 할 수 있다. 그 위치는 역사기록과 야생차나무의 자생지, 지명, 유물유적 등을 근거로 김해시 금강곡지역 일대(금강사지)로 추정된다.

차나무의 집단유전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자들은 앞으로 중국 사천 보주 지방의 차나무 집단과 김해지방의 차나무에 대한 유전적분석연구가 김해차의 근원을 밝혀내는데 중요한 연구대상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차문화 및 차산업 발전을 위해 차나무연구의 학문적이고 객관적인 조사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2008. 9.27 가야차문화제에서 이형석 박사의 강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