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진의 차맥<21> 한국차의 신화학 다시쓰기 (9) 화랑의 차, 한국 차 문화 원형/세계일보 기사

2013. 10. 18. 05:13차 이야기

 

 

[박정진의 차맥] 〈21〉 한국차 신화학 다시쓰기 - ⑨ 화랑의 차, 한국 차 문화의 원형

화랑의 四仙 그들도 차 문화 즐기며 심신단련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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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의 차는 한국 차문화의 원류이다. 화랑의 차문화가 가장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은 강릉의 사선(四仙)이다. 신라 진흥왕이 화랑을 설치하고, 다시 그 우두머리를 풍월주라고 하였다. 그래서 화랑도는 풍월도라 하기도 한다. 화랑제도와 관련하여 가장 오래된 기록인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紀)’에 따르면 제1대 국선(國仙)이었던 설원랑의 비석을 강릉에 세웠다고 한다. 또 효소왕(692∼702) 때는 동해안의 삼일포와 경포대, 총석정, 한송정에 머문 사선의 비석이 있었다고 한다.

사선이 남겼다는 석조를 복원한 모습.
사선의 이름은 영랑(永郞), 술랑(述郞), 안상(安詳), 남랑(南郞)이었다. 김대문은 진골 귀족의 입장에서 당나라로부터 전래된 문화에 맞설 수 있는 신라의 전통을 찾고자 했던 인물이다. 신라 문화의 장점은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종래의 전통을 없애지 않고, 그 바탕 위에 새 문화를 융합하는 힘에 있다. 이것은 종종 촌스럽게 보이면서도 도리어 문화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신라는 비록 당대의 선진문화인 불교문화를 삼국 가운데서 가장 늦게 받아들이면서 비록 이차돈의 순교와 같은 갈등과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가장 주체적으로 융합한 까닭에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삼국통일의 정신적 지주 노릇을 한 사람들이 당대의 최고 지식인이었던 기라성 같은 승려들이었다. 그 승려들의 꽃이 원효(元曉)이다. 원효의 화쟁(和諍)사상은 통일철학이었다. 다시 말하면 화쟁사상이 있었기에 통일도 이룰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선의 기록은 신라사회가 선불(仙佛) 융합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를 오늘에도 전해주는 유적이다. 고려의 김극기(金克己·1148∼1209)는 ‘한송정’이란 시를 남겨서 차와 사선에 관한 기록을 잇게 했다.

“여기가 사선이 유람하던 곳/ 지금도 남은 자취 참으로 기이하다/ 주대(酒臺)는 쓰러져 풀 속에 묻히고/ 다조에는 내당굴 이끼 끼었구나.”

익제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묘련사석지조기’는 가장 상세하게 차 유적과 유물을 전하고 있다.

“삼장순암(三藏順庵) 법사가 천지의 조서를 받들어 풍악(楓岳) 절간에 불공 드리고서 그 길로 한송정을 유람하였다. 그 위에 석지조가 있으므로 주민에게 물으니, 대개 옛날 사람들이 차 끓여 마시던 것인데 어느 시대에 만든 것인지는 모른다고 하였다. 법사가 혼자서 생각하기를 어릴 때에 일찍이 묘련사에서 두 돌그릇이 물속에 있는 것을 보았으며, 그 형상됨을 생각하면 이 물건이 아니었던가 하였다. 그리고 돌아와서 찾아보니 과연 있었는데, 그 한쪽은 네모 나게 갈라서 말 같이 하고 그 가운데를 둥글게 하여 절구 같으니 샘물을 담는 곳이요, 그 아래에는 구멍이 있어 입 벌린 것 같으니 흐리고 막힌 것을 뽑아 맑은 물을 고이게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두 곳이 움푹하고 둥근 데가 있는데 이것은 불을 때는 곳이요, 그릇을 씻는 곳이다. 또 구멍을 좀 크게 하여 움푹하고 둥근데 통하게 하였으니 바람이 들어오게 한 것으로서 합하여 이름하면 석지조라는 것이었다.”

이제현과 비슷한 시기의 이곡(李穀·1298∼1351)의 ‘동유기(東遊記)’에 따르면 이들 사선은 차를 즐겼는데 석조(돌부엌)와 더불어 석정(石井)이 있었다고 전한다.

“옛날에 비(碑)가 석벽 위에 있었다 하나 지금은 유적이 보이지 않는다. 또 동봉(東峯)에는 옛 비갈(碑碣)이 있는데, 비면(碑面)이 떨어지고 닳아져 한 자(字)도 알 수 없으니, 어느 대에 세운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신라 때 영랑, 술랑 등 네 선동(仙童)이 그의 무리 삼천 명과 더불어 해상에서 놀았다’고 하니 그 무리가 세운 것일까.”

고려의 김극기가 읊은 ‘한송정’ 시를 새긴 시비.
강릉의 한송정(寒松亭)은 그 옛날 풍성했던 화랑의 차문화를 오늘도 전해주고 있다. 고종 때의 강릉부사 윤종의(尹宗儀·1805∼1886)가 남긴 글에 따르면 옛 한송정은 강릉의 동쪽 15리로 동으로 큰 바다에 다다랐고 푸른 솔들이 울연히 우거졌다. 정반(亭畔)에 다천(茶泉)과 돌부엌, 돌절구(石臼)가 있으며 화랑선도(花郞仙徒)들이 놀던 곳이라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전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강릉 지방의 한송정 옆에는 문수암이 있는데 한송정은 그에 딸린 정자라고 전한다.

윤종의는 옛 화랑이 놀던 곳이라는 말을 듣자 그 자리에서 ‘한송정신라선인영랑연단석구(寒松亭新羅仙人永郞鍊丹石臼)’라는 글자를 돌에 새겼다. 그러나 이 돌은 비석의 받침돌 모양이다. 석구라고 하기에는 석연치가 않다. 그래서 이제현의 묘련사 석조기를 참고하여 석조연단 석구를 복원하기도 했다. 지금은 하사동의 한송정이 있는 약 2km 근방이며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다.

강릉의 한송정 이외에도 화랑과 관련되는 차 유적과 기록은 적지 않다. 5∼6세기 초부터 신라의 화랑과 승려, 귀족들은 차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잘 알려진 삼국유사의 ‘월명사의 도솔가’조와 ‘경덕왕 충담사’조를 보면 야외용 차도구를 가지고 가면서 차생활과 차공양을 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원효(元曉·617∼686)와 사포성인(蛇包聖人)에 얽힌 원효방의 기록, 지장보살로 일컬어지는 중국 안휘성 구화산의 김교각의 기록, 신문왕(68∼1692)의 두 아들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태자가 오대산 문수보살에게 헌다한 기록, 향가의 대표적인 작가인 충담사(忠談師)가 경덕왕(742∼765)에게 차를 올리고 향가를 지어 바친 기록은 차 생활은 물론 차 도구의 다양성에 대한 사실도 전해준다. 또 당(唐)에서 이름을 날렸던 최치원(崔致遠)의 차에 관한 기록 등을 볼 때 차는 적어도 신라 상류사회의 음료였던 것 같다.

신문왕 때 원효의 아들인 설총(薛聰·660∼730)이 왕에게 지어 바친 화왕계(花王戒)에는 ‘차와 술로서 정신을 맑게 해야 합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차는 선덕여왕(632∼647) 때를 전후로 왕실과 귀족사회의 음료가 되었던 것 같다. 경주 남산의 칠불암마애석물(국보 312호)의 관세음보살이 들고 있던 정병(淨甁)은 차생활이 보편화되었음을 전한다.

서기 8세기 무렵 신라의 무상선사와 김지장 보살이 입당하기 전에 이미 신라의 차문화는 상류사회에 보편화되었다. 화랑의 상징이고, 삼국통일을 완수한 김유신이 수련을 했다는 단석산(斷石山)의 ‘화랑헌다공양상(花郞獻茶供養像)’은 불교가 융성하기 이전에 이미 왕가는 물론 귀족과 승려 사회에 보편화되었음을 알려준다. ‘화랑헌다공양상’이라는 명칭을 붙인 최정간씨는 “이미 서기 6세기경에 한민족 고유의 풍류도 정신이 깃든 음다문화를 꽃피웠다”고 한다.

사선의 유적지에서 차회를 열고 있는 차인들.
“지금까지 우리나라 미술사학계에서는 경주 단석산 인물상이 들고 있는 기물을 손잡이가 달린 향로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고 말하는 최정간씨는 “손잡이가 달린 향로는 동아시아 고고학에서 8세기경에 등장하는데, 단석산의 모습은 석리총에서 출토된 손잡이가 달린 작두형의 다기에 가깝다”고 말한다.

신라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신라의 화랑들은 ‘미륵하생경’을 신앙하였고, 미륵세존에게 차를 공양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최근 대두되고 있다. 이는 차 문화의 복원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단석산의 신선사에 위치하고 있는 평면부조상은 두 화랑의 모습이고, 한 사람은 버드나무 가지를 흔드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는 신목(神木) 신앙으로 볼 수 있다. 한 사람은 차를 바치고 한 사람은 주술을 하는, 좌우에서 의례를 거행하는 형국이다.

신선사 동쪽 암벽에는 높이 5.3m의 보살상이 물병을 들고 서 있고, 남쪽 암벽에는 4.1m의 보살상이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서 있다. 북쪽 암벽의 미륵대불은 주불로서 동남쪽 보살상을 협시로 거느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삼존불이다.

신선사의 남쪽 암벽에는 380자의 명문이 있다. 명문에는 미륵삼존불과 신선사라는 명칭이 나온다. 내용인즉 이렇다.

“신선사의 신선은 미륵선화를 칭하며 미륵선화가 신라화랑의 화신이므로 이곳 신선사가 삼국통일 이전 신라 화랑들의 삼국통일 염원이 서린 호국사찰이다.”

신선사에 미륵의 등장은 바로 불교 이전의 토착신앙인 샤머니즘과 불교의 무불(巫佛) 습합(褶合)을 의미하는데, 신라는 불교를 완전히 토착화함으로써 삼국통일을 달성하는 사상적 원동력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불교가 외래종교가 아니라 이 땅의 산천과 더불어 하나가 되는 ‘불국토 사상’으로 승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풍류(風流)의 개념을 종합하면 결국 풍(風)에서는 형이상학적 ‘하늘’의 개념, 인간의 삶의 목표를, 류(流)에서는 형이하학적 ‘땅’의 개념, 땅에서의 인간 종의 번영과 재생산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하늘’에 복을 빌고 땅에서 자손 번창하는 것을 비는 것이 풍류의 핵심이다. 이를 위해서 더욱 세련된 문화를 건설해나가는 것이 풍류도이다. 풍(風)은 천(天)이다. 물론 천(天)은 천지(天地)를 말한다. 그 풍(風)과 천(天)에 도달하고자 인간이 노력하는 것이 선(仙, 僊, 天)이다.

이것을 오늘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 불교도 결국 천(天)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의 한 변형이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풍토 위에서, 불교는 힌두교의 풍토 위에서 건설된 종교적 혁명인 것이다. 이것을 다시 한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와 불교는 오늘의 풍류도’인 셈이다. 모든 종교는 풍류도인 것이다. 그래서 풍류도를 오늘에 되살리려면 기독교와 불교의 바탕 위에서 풍류도를 재건하여야 한다. 흔히 기독교와 불교와 대척점에 서서 풍류도, 선도를 재건하고자 하면 문화적으로도 퇴행적일 뿐만 아니라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문화는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의 프로그램적 속성은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차공양 의식은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유행하였고, 통일 이후에도 삼화령에서 충담사가 미륵세존에게 차를 공양하는 헌다의식으로 이어졌던 셈이다. 비록 유적은 적지만 불교와 차는 신라통일기에 이미 하나가 되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불교가 토착화를 달성하였으니 차도 일찍이 다선일미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차생활은 불교가 융성하면서 더욱더 발전하였지만, 그 이전에 이미 풍류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차도와 차례의 형식이 갖추어 졌음을 알 수 있다. 풍류도의 차정신은 불교로 이어진다. 

                                           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