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선비차인 / 행촌과 이색 / 박정진의 차맥 //세계일보 기사

2013. 11. 2. 00:53차 이야기

 

 

 

 

 

      

[박정진의 차맥] <40> 고려의 선비 차인들 ②행촌과 이색

  
 

 

 

전통문화 반영 풍류차의 진면목 ‘선가적 다풍’ 주도
이암 청평산에 은거하면서 한국차사에 큰 족적
이색 성리학 수용은 고려전통 선불사상에 기반

    무신정권의 몰락과 함께 원(元)의 부마국이 된 고려는 후기에 접어들면서 과거를 통해 신흥 사대부들이 대거 등장하게 된다. 또 정치의 세속화에 물든 불교는 사치와 타락의 길을 재촉하고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한다. 이때 중국의 새로운 학문인 성리학이 수용되면서 선비들은 성리학에 몰두하게 된다.

    성리학을 최초로 국내에 소개한 안향(安珦)을 비롯하여 백이정(白頤正)·이제현(李齊賢)·안축(安軸)·박충좌(朴忠佐)·이곡(李穀)·이색(李穡)이 등장한다. 이색은 그러한 인맥 중의 중봉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색의 문하에서 이숭인(李崇仁)·길재(吉再)·권근(權近)·변계량(卞季良)·정몽주(鄭夢周)가 나온다. 이들은 모두 차인이었다. 

목은 이색의 영정(경남 하동 금남사 소장).
   목은(牧隱) 이색(1328∼1396)은 익재(益齋) 이제현(1287∼1367)의 제자인 동시에 행촌(杏村) 이암(李嵒·1297∼1364)의 문인이었다. 이암은 현재 차계에서 전혀 부각되지 않았지만 그는 이색에게 선가(仙家)의 차를 전수한 인물이다. 선가의 차야말로 한국문화의 저류와 기층을 이루는 풍류차의 참모습이라 할 수 있다.

    외래종교인 불교는 이 땅에 들어와서 중심에 설 때, 선가의 상징인 단군을 산신각에 모시면서 비록 뒷방 늙은이 취급을 했지만 전통과 새로움의 조화와 소통을 이루었다. 그러나 조선의 주자학은 샤머니즘화된 불교를 척불숭유 정책으로 거의 도륙을 내다시피 하였다. 불교 국가인 고려에서 유교 국가인 조선으로 넘어오는 과도기인 여말선초는 고려의 차 전통을 없애는 것 같았다. 차보다는 술을 더 좋아했다. 그러나 전통을 보존하는 훌륭한 선비는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흔히 이색이나 포은(圃隱) 정몽주(1337∼1392)를 정통 성리학자로 단정한다. 특히 정몽주는 영남사림 도통의 종조로 여기고, 그들에게서 선가적 풍모를 애써 보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이 영남사림의 도통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선산에 낙향하여 훌륭한 제자들을 기른 야은(冶隱) 길재(1353∼1419)의 역할에 크게 힘을 입었다.

    야은에 의해, 야은의 문하에서 영남사림이 형성될 정도로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기 전에는 주자학을 통치이데올로기로 택한 조선이라 할지라도 선가적 풍모가 존속하고 있었다. 영남사림의 도통이 형성된 것은 실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이다. 고려 말과 조선 전기에는 선가적 다풍(茶風)이 만연했다.

    특히 두문동(杜門洞) 선비들 사이에는 선가적 다풍이 지배적이었고, 두문동을 이끈 정신적 지주가 바로 이암이다. 두문동의 차 전통은 후대에도 이어져 우리 역사상 권력에서 배제되어 소외되거나 귀양살이를 하게 되면 으레 선가적 삶의 태도를 가지는 게 다반사였다.

    이색이나 정몽주에게도 선가적 면모가 있었다. 특히 목은 이색은 바로 선가와 유가의 길목에 있었다. 이색에게 선가적 기풍을 전해준 인물은 고려 말 공민왕 때 벼슬을 한 이암이다. 이암은 초명은 군해(君?), 자는 익지(翼之)였으나 특히 57세 이후 경기도 청평산으로 은거한 뒤 이름은 암(?), 자를 고운(孤雲)이라고 하였다. 이는 최치원이 그의 멘토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암이 청평산(淸平山)에 은거한 것은 한국 차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이에 앞서 이자현(李資玄)은 청평산에 은거하면서 선가차(仙家茶)가 고려의 차 정신의 중심임을 몸소 실천하였다. 청평은 후에 청평사의 건립과 함께 선불습합(仙佛褶合)의 대표적인 장소가 된다. 한국의 중세와 근대차사는 막연하게 관념적으로 단절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자료의 발굴과 노력에 따라서는 그 연속성을 찾을 수 있다.

   이색은 공민왕 때 개혁의 중심에 선 인물이며, 성균관 대사성으로 정몽주·이숭인 등을 길러냈다. 역성혁명 방식을 반대하여 정도전과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세력들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결국 정치권에서 멀어지게 되고, 조선 개국 후 유배되었다가 사망한다. 고려 말의 대표적인 선비였던 익제(益齋) 이제현(1287∼1367)의 제자였던 이색의 성리학 수용은 고려의 전통인 선불(仙佛) 사상에 기반한 측면이 있다.

정경희 박사(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는 이렇게 말한다.

    “이색을 한국 선도로 연결시켜 볼 수 있는 고리는 이암이다. 이색은 성리학자 이제현의 문인이었을 뿐 아니라 선가 이암의 문인이기도 하였는데 ‘나는 일찍이 행촌 시중공(侍中公)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그의 아들 및 조카들과 함께 놀았다’라고 하였고, 강화도 선원사를 지날 때 스승 이암의 수행처인 해운당(海雲堂)을 기리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또 이암의 막내아들인 이강(李岡)은 이곡(李穀)의 문생이자 이색과 친밀한 벗으로 이색은 ‘공(公·이암)을 아버지 같이 섬겼다’고 하였다. 이러하므로 이색은 이암·이강 부자 양인의 묘지명을 찬술하기도 하였다.”

   이색은 친구 이강의 부친인 이암을 아버지처럼 섬겼다고 한다. 양촌(陽村) 권근(1352∼1409)은 또한 이암의 막내아들 이강의 사위이다. 이는 이암을 둘러싸고 당대의 기라성 같은 문사들이 포진해 있었음을 말한다. 이곡과 이암의 집안은 서로 자녀를 교차하여 공부를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이색의 선가적 성리학은 고려의 멸망을 한탄하면서 은둔한 ‘두문동 72현’에게 그대로 전수된다. 정 박사는 “두문동 학사의 중심 인물은 정몽주와 이색이다. 이들은 당대 최고의 학자·정치가로서 수많은 문생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특히 두문동 학사들로 이에 해당하였다”고 말한다.

행촌 이암 선생의 자화상.
    흔히 정몽주나 이색이라고 하면 유학(주자학)의 정통파라고 선입견을 갖기 쉽다. 그러나 실은 여말선초의 유학은 실은 성리학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선가적인 유학의 모습이 강했다고 여겨진다. 이는 이(理)의 심화라기보다는 원시유교적 경향이나 고래(古來)의 유불선의 전통에서 오는 삼묘지도(三妙之道), 즉 현묘(玄妙)의 성격이 강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두문동 72현과 이들 사이에서 유독 이름이 높았던 육은(六隱), 즉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陶隱) 이숭인, 야은 길재, 수은(樹隱) 김충한(金沖漢) 등은 은(隱)자를 돌림자로 쓰는 호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은일(隱逸)한 정신이 강하여 선가적 풍모가 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행촌은 안타깝게도 차시를 남기지 않아서 그의 차 생활을 엿보기는 힘들지만, 그의 제자인 목은 이색의 많은 차시들에서 드러나는 선가적 풍모는 행촌에게서 물려받았음이 분명하다.

    목은은 스승인 행촌에게 여러 편의 시를 올렸다. 그중에서 ‘동정이 소장한 행촌(杏村)의 묵죽(墨竹)에 제하다’(題東亭所藏杏村墨竹)에 나오는 시 2수는 행촌에 대한 그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다음은 ‘풍죽’(風竹)의 구절이다.

   “행촌의 마음은 텅 빈 대나무 속과 같다 할까(杏村心似竹心虛)/ 소쇄하고 단장한 양면 모두가 넉넉하고 말고(蕭灑端莊兩有餘)/ 청창을 향해 완연히 상대하듯 그린 묵죽(寫向晴窓宛相對)/ 만고 청풍을 이처럼 묘사하기도 어려우리(淸風萬古畵難如).”

   다음은 노죽(露竹)의 구절이다.

   “아침마다 여린 추위 보내 주는 안개와 이슬(霧露朝朝送薄寒)/ 하늘이 푸른 대나무 깨끗이 씻어 주려나봐(天敎淨洗碧琅?)/ 분명코 행촌과 서로 닮은 이 대나무여(分明與杏村相似)/ 곧은 절조를 속인의 눈으로 볼 수 있으랴(直節寧容俗眼看).”

    목은의 차시 가운데 가장 선가풍의 시는 ‘봉산 십이영(鳳山 十二詠)’이다.

“학이 쪼아서 맑은 샘물이 나오니/ 서늘한 기운이 폐부(肺腑)까지 와 닿고/ 마시면 신선의 뼈로 바뀌는 듯/ 사람에게 현포(玄圃·중국 곤륜산에 있다는 선경)를 상상케 하네./ 어찌 오직 시(詩)의 비장(脾臟)만 씻으랴./ 죽을병도 물리칠 수 있으리./ 평생에 청정한 일을 좋아하노니/ 다보(茶譜)에 속편을 내고 싶네./ 내 의당 차 끓일 돌솥 갖고 가서/소나무 끝에 비 뿌리는 걸 보리라.”(‘목은 시고’ 권3)

     목은 이색은 두말할 것 없이 이규보 이후에 가장 풍성한 차시 52수를 남김으로써 차생활의 모습을 전해주는 선가의 차인이다. 그는 무려 6000여 수의 시를 쓴 대시인, 대문장가였다.

    그가 남긴 차시 가운데 생활차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시로 ‘차를 마신 뒤 짤막하게 읊다’가 있다.

“작은 병에 샘물 길어다가/ 깨진 솥에 노아차(露芽茶)를 끓이노라니/ 귓속은 갑자가 말끔해지고/ 코끝엔 붉은 놀이 통하여라./ 잠깐 사이에 눈병이 사라져서/ 눈앞에 조그만 티도 보이질 않네./ 혀로 맛 분변하여 목으로 삼키니/ 살과 뼈는 정히 평온해지네./ 방촌(方寸)의 밝은 마음 깨끗해져/ 생각에 조금의 사특함도 없으니./ 어느 겨를에 천하를 언급하랴./ 군자는 의당 집부터 바루어야지.”(‘목은 시고’ 권8 ‘한국의 차 문화 천년’3 인용)

   목은 이색의 차 생활은 아버지 이곡(1298∼1351)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이다. 이곡은 특히 ‘동유기(東遊記)’라는 산문을 남겨 신라 때부터 강릉 경포 일원이 화랑이 차를 마시던 유적지이며, 그 후에도 그러한 전통이 이어졌음을 증거하고 있다. 또 야외 차 생활이 어떤가를 보여주어 차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12일 강릉존무사인 성산(星山) 이군(李君)이 경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배를 나란히 하고 강 복판에서 가무를 즐기다가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기 전에 경포대에 올랐다. 경포대에는 예전에는 건물이 없었는데, 근래에 풍류를 좋아하는 자가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또 옛날 신선의 유적이라는 석조(石竈·돌 부뚜막)가 있는데 아마도 차를 달일 때 썼던 도구일 것이다. 경포의 경치는 삼일포와 비교해서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지만, 분명하게 멀리까지 보이는 점에서는 삼일포보다 나았다. 비 때문에 하루를 머물다가 강성(江城)으로 나가 문수당(文殊堂)을 관람하였는데,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두 석상이 여기 땅 속에서 위로 솟아나왔다고 한다. 그 동쪽에 사선(四仙)의 비석이 있었으나, 호종단(胡宗旦·원래 중국 사람으로 고려 예종 때 귀화함)에 의해 물속에 가라앉았고 오직 귀부(龜趺)만 남아 있었다. 한송정에서 전별주를 마셨다. 이 정자 역시 사선이 노닐던 곳인데, 유람객이 많이 찾아오는 것을 고을 사람들이 싫어하여 건물을 철거하였으며, 소나무도 들불에 연소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오직 석조와 석지(石池)와 두 개의 석정(石井)이 그 옆에 남아 있는데, 이것 역시 사선이 차를 달일 때 썼던 것들이라고 전해진다. 정자에서 남쪽으로 가니 안인역이 있었다.”

   목은과 이곡의 2대에 걸친 스승인 익재 이제현도 ‘묘련사석지조기’(妙蓮寺石池竈記)로 유명하다. 묘련사는 경기도 개성 삼현리에 있던 절이다. 내용은 강릉 경포의 예와 비슷하게 야외 차생활의 풍경을 전하고 있다.

    목은 이색 다음으로 훌륭한 차생활을 한 선비로는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1330∼?)을 들 수 있다. 그는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이다. 그는 고려 말에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개탄하고,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살았다. 그는 일찍이 후에 태종이 되는 방원(芳遠)을 왕자 시절에 가르친 적이 있어 여러 차례 출세의 길이 열렸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태종이 그의 집을 찾아갔을 때 미리 소문을 듣고는 산속으로 숨어버렸다고 한다.

    그는 ‘작설차(雀舌茶)’라는 이름을 시에 처음 사용한 차인으로 유명하다. 그는 모두 13편의 차시를 남겼다. 다음은 ‘아우 이선차 사백의 차 선물에 사례함’이다.

    “아련한 서울소식 숲속 집에 이르렀는데/ 가는 풀로 새로 봉한 작설차라네./ 식사 뒤의 한 사발은 언제나 맛있고/ 취한 뒤의 세 사발은 그저 그만이네./ 마른 창자 적신 곳에 앙금도 없고/ 앓는 눈 열릴 때에 현기증도 없어지네./ 이 물신(物神)의 공덕 시험하여 측량하기 어렵고/ 시마(詩魔)가 다가오니 무마(睡魔)가 멀어지네.”

    여말선초에 형성된 ‘두문동 72현’과 ‘청담학파’는 역성혁명과 계유정난이라는 혼란과 곤경을 거치면서 더욱더 튼튼하게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바로 선가적 성리학자의 권력을 추구하지 않는 정신이 도리어 후대에 사림의 뿌리를 더욱더 튼튼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두고 청류(淸流)·청담(淸淡)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시기는 차의 전통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말차(抹茶)에서 잎차로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기 위한 숨고르기의 시기였다. 

                                                        

 

                  

                                                                                 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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