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유의 송원이사안서

2013. 10. 18. 05:46

 

 

 

 

 

      

한시감상 - 왕유의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   |  다음 카페  박샘의 글

 

 

 

소금창고 | 조회 83 |추천 0 | 2013.02.13. 22:03

    당나라 시대의 시인 왕유(王維)의 이별시를 한 편 감상해 보고자 한다.

왕유는 흔히 성당(盛唐)시대라고 불리는 당나라 융성기에 태어나 이백 두보와 거의 동시대를 살아간 시인이다.

소위 삼당시인이라 하여 이백 두보 백거이를 들고 있어 상대적으로 지명도가 낮은 편이지만

그는 시뿐만 아니라 서화(書畵)에도 뛰어난 자질을 보여 흔히 문인화(文人畵)라도도 불리는

소위 남종화(南宗畵)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왕유는 당대에 태어나서 자랐다.

당시 당의 수도 장안(長安)은 부와 안정을 동시에 누린 국제적 도시였다.

왕유는 21세 때 진사(進士)시험에 급제했다.

9세 때부터 이미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고 하지만, 진사 급제는 특히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는 고위 관직에 올랐지만, 이내 강등되어 산둥성(山東省)의 하찮은 직책에 임용되었다가,

734년에 수도로 소환되어 상서우승(尙書右丞)의 자리에 올랐다.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켜 756년에 수도 장안을 점령했을 때,

반란군에 사로잡혀 반란군의 수도인 뤄양(洛陽)으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왕유는 억지 벼슬을 받았다.

758년 관군이 장안과 뤄양을 탈환했을 때,

왕유는 반란군에게 사로잡혀 있을 때 황제에 대한 충성을 표현한 시를 썼고,

또 고위 관리인 형이 힘을 써준 덕분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말년에 그는 속세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아내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더욱 슬픔에 빠진 그는 장안 중난산(終南山)의 망천(輞川) 옆에 있는시골 집에 틀어박혀 불교 연구에 몰두했다.


    왕유가 지은 시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히는 것들은 대부분 시골 풍경에서 영감을 받은 것들이다.

왕유의 예술은 당시의 기록과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그의 그림 사본을 바탕으로 하여 이론적으로 복원할 수밖에 없다. 그가 여러 가지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다양한 표현양식을 채택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나,

산수화를 발달시킨 최초의 사람 중의 하나로 특히 유명하다.

그는 생존시에 설경산수화로 유명했으며, 가장 유명한 작품은 〈망천도 輞川圖〉라는 화권(畵卷)이다.

이 그림은 없어진 지 오래되었으나, 후에 제작된 많은 모사품으로 대강의 구도는 보존되었다.

기록상 그의 작품에서 발묵(潑墨)기법이 최초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들은 과거의 전통과 새로운 것을 함께 받아들였다.

그러나 후세에 성인에 버금가는 지위까지 올라간 것은 그가 화가인 동시에 위대한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중국 명시 선집에 그의 작품은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는 이백(李白 : 701~762)·두보(杜甫 : 712~770) 등의 유명한 당대 시인들과 함께 서정시 형식을 

완성한 시인으로 손꼽힌다.

 

 

   이 글에서 소개할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라는 시는 요즘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고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이미자 혹은 조용필의 노래만큼이나 익숙했을 작품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별은 슬픈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나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의 작별은 물론 사랑하는 친구와의 작별도 서럽고 슬프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시는 시인 왕유가 자신이 사랑했던 베스트 프렌드인 ‘원이’라는 친구를 ‘안서’지방에 보내면서 쓴 시이다.

남자들만이 가지는 선 굵은 이별의 내밀한 아픔이 잘 드러나 있는 시로 함께 읽어 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소개해 본다.


   이 시는 <악부 시집>에 "위성곡(渭城曲)" 또는 "양관곡(陽關曲)" 이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당나라 때 송별(送別)의 노래로 널리 애창되었고,

세 번 되풀이하여 부르기 때문에 '양관 삼첩(陽關三疊)'이라고도 했다.

 

 

送元二使安西

 

 

渭城朝雨浥輕塵  /  客舍靑靑柳色新  /  勸君更進一杯酒  / 西出陽關無故人

 

거칠게 변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원이를 안서땅으로 보내며 


  위성의 아침 비에 잔 먼지들을 적시고 / 여관 앞 버들잎은 더욱 산뜻하구나.

그대에게 또 다시 한 잔 술을 권하노니 / 서쪽 양관에 나가면 친구도 없을 터이니.

 

 

   7언의 절귀 형식으로 되어있는 이 시는 서역(西域)으로 가는

마지막 통로였던 양관으로 가는 친구 원이를 위해 쓴 시이다.

‘원이’란 당시 풍습대로라면 ‘원(元)’씨 성을 가진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을 것이며

본명은 잘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일설에 의하면 중국인들은 집안의 사촌형제들끼리 태어난 순서대로

자기 성을 붙여 1,2,3,4의 순서를 매겨 불렀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흔해 빠진 평범한 사람들이란 의미로 갑남을녀(甲男乙女)라

혹은 장삼이사(張三李四)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 말은 중국에서 가장 흔한 성씨인 장씨 집 셋째, 이씨집 넷째를 가리키는 말이니

뭐 특별하거나 두드러질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을 말할 것이다.

 

   그 원이란 친구가 ‘안서’ 요즘 우리 식으로 번역하면 ‘전방’ 혹은 변방 근무를 나가니

사랑하는 친구를 죽어서 돌아올지도 모르는 최전방으로 내보내니 걱정은 얼마나 많고 슬픔도 꽤 컸을 것이다.

중국지리에 서툴긴 하지만 대충 짚어보면 수도인 장안(현재의 서안)에서 불쪽으로 올라가

돈황이니 위성이니 하는 작은 도시들이 있었을 것이고

거기를 벗어나면 망망의 모래사막이 펼쳐지는 죽음의 땅이니

비록 관리로서 명령에 따라 가긴 했으나,

왜 하필 거기냐, 혹은 빽이 없다보니 오지로 발령나지 않았느냐 등의

벼라벨 생각이 다 났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 쪽 지방은 원래 오랑캐의 땅이었으나

한나라 무제(武帝)가 장건이란 관리를 파견하여 정보도 수집하고

특히 부국강병을 위한 필수품이었던 천리마(千里馬)를 구하기 위해

서역으로 파견한 뒤 어찌어찌하여 중국의 영역에 들어온 미개발지역이었으니

이별의 슬픔이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장건이 선사(仙槎)라는 신선이 타고 다니는 뗏목

(알리딘의 융단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는 뗏목)을 타고 서역에 다녀왔다는 전설까지 생겨났겠는가.

양관(陽關)은 당시 동쪽의 산해관과 함께 중국 북쪽 국경의 양끝을 담당하는 국경초소로서

국가안보상 매우 중요한 곳이었을 것이고 실크로드를 드나드는 각양각색의 내외국인들을 검문하고 

감시감독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근무환경은 진흙으로 연장된 토성의 끝자락에 모래사막 속에 둥그렇게 지어진 막사 

몇 채만 있는 열악한 곳이었을 것이다.

영화 용문객잔에서 묘사된 그런 환경이었을 것이고 거기 사람들도 용문객잔에 등장하는 인물들 

만큼이나 식도 법도 없는 갖가지 인간들이 모여 들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곳으로 내일이면 떠나는 베스트 프렌드를 보내는 절절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는 말이다.

 

 

이제 구절 하나하나를 음미해 보자.

 

 

渭 城 朝 雨 浥 輕 塵   (위성조우읍경진 ) 

 

위성은 위수 가에 있었던 소도시였을 것이고 그곳은 양관으로 가는 사람을 전송하는 마지막 지역이었을 것이다.

우리로 말하면 조선시대의 의주처럼 국경의 마지막 도시였을 것이다.

위수(渭水)라면 일찍이 강태공이 낚시질하며 때를 기다린 곳으로

아마 황토지대에서 흘러나온 물로 색깔이 황토빛의 물줄기였을 것이다.

이 흐린 물인 위수(渭水)와 맑은 물인 경수(涇水)가 황하 본류에 합류한 뒤에도

한참이나 서로 합쳐지지 않아 경위(涇渭)라는 단어가 생겼다는 것을 보면 위수(渭水)는 흐린 물이었고

위수가 흐리다는 것은 그 상류가 황토고원 지대로 사람살기가 만만하지 않았던 곳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때마침 아침에 가볍게 비가 한번 내리니 펄펄 날리던 먼지들도 다 가라앉았다는 

묘사가 가능했을 것이다. 읍(浥)은 그저 젖었다 혹은 축축해졌다 정도의 강우량을 나타낸 것으로

비가 더 왔더라면 아마 먼지가 전부 씻겨 내려가거나 했을 텐데 그 정도의 비는 아닌 가벼운 소나기 

정도였을 것이다.

 

 

客 舍 靑 靑 柳 色 新   (객사청청유색신)   

 

  객사란 여관이니 아마도 그냥 여관이라기보다는 관청에서 운영하는 여관이었을 것이다.

강릉에 최근 복원한 임영관이라는 건물도 그 현판에 객사문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고,

그 시설이 동헌 혹은 부사의 거처 옆에 위치한 일종의 시립여관 혹은 영빈관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아무 곳에나 객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신이 자주 드나드는 국경 근처 도시나 명승고적이나 좋은 풍광을 가져

관리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에만 위치했을 것이다.

강릉에도 객사가 있었던 것은 자연 풍광이 좋았던 풍류의 본향이라 불렸던

경포대나 한송정 등이 입지해 있었고 영동지방의 관문이자 중심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죽 관리들이 와서 각종 횡포를 부렸으면 ‘저 놈의 한송정은 호랑이가 물어 가지도 않나’라고 푸념했고,

마침 정자가 없어진 뒤로 다시는 복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고급관리들이 일가친척 다 몰고 내려와 

강릉고을의 관리들이나 백성들을 등쳐 먹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요즘도 서울 본사에서 여름철만 되면 강릉지점에 연락해 누가 내려 갈테니 호텔 좀 잡아 달라,

부킹 좀 해 놓아라, 돈은 줄테니 민폐 안 끼칠 것이니 염려 마라 어쩌구 하지만

갑을관계의 약자인 처지에서 어찌 돈을 받을 수 있겠는가.

콘도예약에서부터 부킹까지 제 돈으로 하고 게다가 경포해변에서 사돈의 팔촌까지 몰고 온

본사 직원 일행에게 회도 한 번 사고 배오징어나 정동미역이라도 한 보따리 사서 올려 보내야 뒷탈이 없을 것이다.

관리인 원이와 역시 관리인 왕유도 그 객사에서 마지막으로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회포를 풀었을 것이고

드디어 이별의 아침을 맞이했을 것이다.


   회수라는 강물이 흘렀다면 그 강가에는 버드나무가 많았을 것이고

객사 주변에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버드나무가 아침비에 촉촉이 젖어 가지를 늘어뜨리고

게다가 늘 먼지에 뿌옇게 절어 있던 평소와는 달리 싱싱한 푸른 빛을 띤 것이

시인의 눈에 포착되어 버들잎이 새롭게 푸르고 푸르다고 묘사했을 것이다.

요즘은 육상교통 중심이지만 옛날에는 강이 바로 고속도로였고

그런 점에서 대부분의 슬픈 이별은 강가에서 이루어졌다.

그 강가에는 토사방지용이나 홍수방지용으로 버드나무를 주욱 심어 놓았던 것이 일반적이고

그러다보니 그 나무가 이별의 상징처럼 되어 버렸다.

옛 여인들은 사랑하는 남정네가 강가에서 배를 타고 떠나는 광경을

멀리 버드나무 뒤에서 장옷을 뒤집어쓴 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지켜 보았을 것이고,

그 이별의 아픔에 죄없는 버드나무 가지만 쥐어 뜯었을 것이다.

어떤 시에는 버드나무 가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는 내용도 보이는 것으로 보면

그 곳에서 아마 대규모 이별이나 출병(出兵)등의 행사가 있는 뒤의 후유증이었을 것이다.

이 왕유의 시와 함께 옛 선비들이 이별시의 백미(白眉)로 꼽는

고려시대 정지상의 대동강의 이별시도 비슷한 상황이다.

버드나무 가지를 둥그렇게 말아 놓은 것을 "환(環)"이라하여 다시 돌아올 '환'으로 새겼다는 얘기도 있다.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비 개인 긴 언덕에는 풀빛이 푸른데,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니 슬픈 노래 절로 울리네.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하시진고)   대동강 물은 그 언제 마르리,.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할 것을.

 

 

勸 君 更 進 一 杯 酒   (권군갱진일배주) 

 

   그대에게 다시 한 잔의 술을 권한다는 것은 이미 전주가 있는데 마지막으로 더 권한다는 내용이다.

자 자, 한잔 더 하라고 하며 친구에게 마지막 잔을 권하는 그 심정은

아마 이 술잔이 자네와 내가 나누는 마지막 술잔이 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이 나타나 있다.

무슨 말이 필요하며, 사나이 대장부가 꼭 말로 해야 할 것인가.

묵묵히 한 잔 술을 더 권하는 이 손길 속에 이미 수많은 감정들이 녹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인이라면 손목도 부여 잡고 얼굴도 만져 보고 별짓을 다하며 눈물을 콩죽같이 흘렸겠지만

남정네의 이별이란 이렇듯 담백하게 그러나 깊은 울림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西 出 陽 關 無 故 人   (서출양관무고인)   

 

    한 잔 술을 묵묵히 더 권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이제 그대가 서쪽으로 더 나아가 양관으로 가면 무고인 즉 친구는 커녕 아는 사람 하나도 없을 것이니,

그 때 누가 잔 잡아 권하며 그대에게 살갑게 대해 주겠는가 

러니 암만 말고 한 잔 더하게 하는 우정 어린 권고가 이 구절과 함께 살아나는 것이다.  

무식한 돌궐족 등 오랑캐들과 코 큰 놈, 얼굴 붉은 놈, 머리에 터번 쓴 놈 등등

당시 중원에 근거를 둔 중국인들로서는 감당하기 만만찮은 사람들과 부대껴야 하는 양관이

그만큼의 벽지이자 오지였던 것이다.

고선지장군(실제로 두보는 ‘고도호총마행’이란 장시를 통해 고선지장군과 그의 말을 찬양하고 있다) 정도나 되어야

그 곳이 두렵지 않지 연약한 문관들인 원이나 왕유에게 그 곳은 두려움의 땅이었던 것이다.

 

   이왕 왕유 얘기가 나왔으니 부록으로 그의 시 한 편을 더 보자.

이 시는 세상과 불화(不和)하고(사실 세상이라기보다는 교사는 승진에 목매고 학생은 대입에만 

목매는 교육현실과의 불화일 뿐이었다) 사표를 내고 나와 그래도 먹고 살기 위해 논술학원을 차리고

아이들에게 논술과 웃음을 팔고 있다며 자괴감에 젖어 있던 시절 내가 즐겨 암송했던 시이기도 하다.

 

 

송별(送別)

 

下 馬 飮 君 酒 (하마음군주)

問 君 何 所 之 (문군하소지)

君 言 不 得 意 (군언부득의)

歸 臥 南 山 陲 (귀와남산수)

但 去 莫 復 問 (단거막복문)

白 雲 無 盡 時 (백운무진시)

 

말에 내려 술잔 든 그대

묻노니 그래 어디로 가시는가.

그대 대답하네. 장부의 큰 뜻 얻지 못하여

저 남산 기슭에 묻혀 살려네.

다만 가노니 이제 그만 묻게나. 

그곳엔 흰구름만 겹겹 쌓일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