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영랑호 제영시의 서정성 고찰 / 속초문화원 <속초문화>

2013. 10. 18. 06:38茶詩

 

 

 

 

      

속초 영랑호 제영시의 서정성 고찰


강릉원주대국문과교수 장정룡




1. 머리말
속초시에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혔던 청초호와 신라 영랑의 순유처였던 영랑호라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석호(潟湖)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이중환이 택리지에서 큰 못에 구슬을 감추어 둔 것과 같다는 신라 화랑들의 도량(道場)으로 영랑고사(永郞故事)가 서린 영랑호와 그림 경대의 거울을 연 것과 같다는 청초호가 산과 바다의 교량적 조화를 이룬 이상적인 곳이다.”1)라는 평가가 지극히 온당하다. 석호인 영랑호는 육지가 후빙기 때 얼음이 녹으면서 해면 상승작용으로 바다로 변하고, 그 전면에 해류, 조류 하천 등의 작용에 따라 사주(砂洲), 사취(砂嘴)가 발달, 바다와 격리되어 생긴 것인데, 이곳에는 여러 전설이 담겨서 전한다.

속초시 서북쪽 장사동, 영랑동, 동명동, 금호동에 둘러싸인 영랑호는 둘레 8㎞, 넓이 120만㎡ 약 36만평에 달하는 거대한 자연호수로‘영산도지’(映山倒地:호수에 설악산이 거꾸로 비치는 승지)’또는‘설악천봉도경중’(雪岳千峰倒鏡中:설악의 천봉이 거꾸로 거울 속에 잠긴 것 같다)이라 읊은 명경지수(明鏡止水)의 절승이다. 영랑호는 옛 기록에 둘레가 2~30리라 했는데, 호수의 정취는 창해귀범(滄海歸帆:큰 바다로 나갔던 돛단배가 돌아오는 것), 호면낙조(湖面落照:호수 면에 비치는 저녁노을), 보광사모종(普光寺暮鐘:보광사에서 치는 저녁 종소리), 울산부감(蔚山俯瞰:울산바위에서 굽어보는 호수경치) 등이다.2)

이 영랑호를 읊은 제영시(題詠詩)는 특정한 경물에 제목을 붙여 읊은 것으로 자연경관이나 작가의 서정성이 특히 강조된다. 본고에서는 영랑화랑 기록과 유적을 살피고, 영랑호 제영시나 영랑호를 소재한 시문의 정서를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시인들이 영랑호를 제목으로 쓴 한시에서 작가의 관점과 감성이 뚜렷하게 투영되었으며, 아름다운 전설도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왔다.

영랑호 인근에는 옛 시문에 등장하는 영랑정이 복원되었으며, 2004년에는 화랑도 체험장이 영랑호변 15.576㎡의 부지에 건립되었다.

이곳에는 공연장, 보조승마장, 체험장, 관람장, 한민족전통마상무예협회, 격구협회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2005년부터 2008년까지 화랑영랑축제를 매년 개최했었다. 영랑호는 신라 화랑의 숨결이 깃들고 삼국통일의 기상이 서린 명소다. 그러므로 환경오염을 막고, 문학과 설화적 스토리텔링으로 친환경적, 문화유적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해야 하겠다.

청초호와 영랑호는 속초의 허파와 같은 존재다. 호수가 숨쉴 수 없다면 인간의 마찬가지일것이다. 자연환경뿐 아니라 인간환경도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호수로서 문화와 생태가 조화를 이루도록 조심스런 개발이 필요하다. 사실상 석호(潟湖) 영랑호의 가치는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다.

개발이익보다는 보존과 보호를 통해서 지속가능한 문화적 가치를 제고해나가는 지혜로움과 현명함이 필요할 것이다.

옛 시문을 보면 영랑호에는 비단결 같다는 청정 순채(蓴菜)가 자랐으며, 유리 같은 수면에는 농어가 뛰놀았다. 어디선가 화랑의 피리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고즈넉한 저녁노을이 깃든 그림같은 시정화의(詩情畵意)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마치 구슬을 담고 있는 듯이 빛나고, 울산암과 달마봉 그림자가 물속에 거꾸로 비친 신선의 경치다. 옛 사람들이 그림배 띄워놓고 뱃놀이 할 때에 말이 필요치 않았다는 유리거울같이 맑고 깨끗한 영랑호를 소재로 쓴 옛 한시는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2. 속초 영랑호와 유적 기록
영랑호 기록은 오래전으로 소급되는데, 명소로서 널리 알려져 역사기록적 측면, 설화형상화 계획 등 몇 편의 글이 나온바 있다.3) ‘영랑’이 누구인지, 그리고 언제부터 이 호수를‘영랑호’또는‘영랑포’라 불렸는가를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영랑’이 신라 화랑의 이름이라는 것은 문헌고증 상 가능하며, 고려 말의 문헌에 처음‘영랑호’가 등장하고 있다.

고려시대 승려 일연(1206~1289)이 지은『삼국유사(三國遺事)』권3에는‘준영랑’이 등장하며 그의 이름을‘영랑’이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세상에서 안상(安常)을 준영랑의 무리라한 것은 살펴보지 못했다. 영랑의 무리에는 오직 진재(眞才)·번완(繁完) 등이 알려진 사람이며, 모두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들이다.”(世謂安常爲俊永郞徒不之審也永郞之徒唯眞才繁完等知名皆亦不測人也)4)하였다. 이에 따르면 화랑 가운데 영랑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고려시대 안축(安軸, 1282~1348)의 시문에도 영랑호, 영랑포가 등장하고 있다.

1349년에 작성한 이곡(李穀, 1298~1351)의『동유기(東遊記)』에 보면“초8일에 영랑호에 배를 띄웠다. 해가 저물어 상류까지 거슬러가지 못하였다.”(初八日泛舟永郞湖日晩不得窮源)고 하였으며, 「영랑포(永郞浦)」라는 시에서는 사선중의 한 명인‘안상(安詳)’을 거론하였다. 위의 기록상‘안상(安常, 安詳, 安祥)’은 한자로 여러 가지 나타나지만 동일 인물로서 영랑을 중심으로 한 사선 가운데 한 명이다.

생육신(生六臣)으로 영동지역을 거쳐 금강산을 다녀온 추강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유금강산기」에는“삼일포란 신라 때 화랑인 안상, 영랑의 무리가 이곳에 와서 삼 일간 놀고 이에 파했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하였으며“영랑은 신라 사선 중의 한 분”이라고도 언급하였다.5)

신라의 네 화랑을 따르던 낭도는 무려 3천명이라 했는데 고려중엽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파한집(破閑集)』에 보면, “금란경계에 한송정이 있는데 옛날 사선이 노던 곳이다. 그 무리 삼천 명이 각각(소나무) 한 그루씩 심었으니 지금도 울창하여 구름에 닿을 듯하고 밑에는 샘우물이 있다.”라고 했다.6)

1215년에 나온『해동고승전』에서 200여명의 화랑가운데 사선이 가장 어질었다고 언급한7)사선(四仙)의 이름은 영랑, 술랑(述郞), 남랑(南郞이외에 南石, 南石郞, 南石行등이 있다), 안상 등으로 파악된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수광(李日卒光, 1563~1628)의『지봉유설(芝峯類說)』에도 국선(國仙)으로 사선 즉 술랑, 남랑, 영랑, 안상을 언급하고 이들이 국선이었으므로 사선이라 불렀으며 진짜 신선은 아니라 하였다.8) 1530년에 나온『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영랑호에 대하여“호수주위가 30여리로 물가가 굽이쳐 돌아오고 암석이 기괴하다. 호수동쪽 작은 봉우리가 절반쯤 호수 가운데로 들어갔는데, 옛 정자터가 있으니 이것이 영랑 신선 무리가 놀며 구경하던 곳이라 한다.”9)고 했으며 1631~1632년 사이에 간성군수를 역임한 택당 이식(李植,1584~1647)은 영랑호 이름이 지어진 유래를 설명하였다.

영랑호, 군 남쪽 오십오 리에 있고 주위는 이십 리다. 산골짜기로 들어가 보니 끝이 보이지 않는데 물가에 굽이 쳐서 돌아오고 굽은 바위는 높은 언덕에 아름답게 놓였다. 또한 물속에도 돌이 외롭게 별처럼 널려 있다. 동쪽 산기슭 한 언덕이 호수 속으로 들어오는데주위가 소나무 숲이 우거져서 햇볕도 새어나가지 못한다. 이곳에는 백여명 사람들이 둘러 앉을 수 있다. 옛날에는 정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세상이 전하기를 영랑이 놀면서 감상하였던 곳이기에 영랑호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10)

홍만종(1643~1725)의『해동이적(海東異蹟)』에는 사선의 이름에 대한 언급과 함께 영랑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신라 때의 사선 곧 술랑(述郞), 남랑(南郞), 영랑(永郞), 안상(安詳)은 모두 영남사람 또는 영동사람이라고 한다. 그들이 함께 고성에서 노닐면서 3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그곳의 지명을 삼일포라 하였다. 삼일포 남쪽에는 작은 산봉우리가 있는데, 그 봉우리 위에돌로 만든 감실(龕室)이 있다. 봉우리 북쪽 산비탈에 있는 바위 표면에 붉은 글씨로‘영랑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이란 여섯 글자가 쓰여 있다. 이른바 남석행이란 아마도 남랑이 아닌가 한다. 작은 섬에 옛날에는 정자가 없었는데 존무사 박공이 그 위에 정자를 지으니 이것이 곧 사선정이다. 또 군 남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 단혈(丹穴)이 있다. 또 통천에 사선봉이 있는데, 이 모두 사선이 노닐던 곳이다. 또 간성에 선유담과 영랑호가 있고, 금강산에 영랑봉이 있다. 영랑 등 선도가 일찍이 그곳에서 놀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게된 것이다.11)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택리지(擇里志)』에서“영랑호는 큰 못에 구슬을 감춘 것과 같고 양양의 청초호는 그림 경대의 거울을 연 것과 같다.”하여12) 구슬처럼 빛나는 경관을 지적하였는데, 영랑호는 고려 말 안축의 경기체가「관동별곡」에서 조선시대 송강 정철의 가사「관동별곡」으로 이어질 정도로 시대를 초월한 관동지역의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영랑호의 유래를『국립공원 설악산』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영랑호는 속초시의 북쪽에 위치한 매우 아담하고 조용한 호수이다. 주위 사방의 둘레가 약 12킬로나 되고 넓이는 1.241㎢ 이나 되는 호수이므로 사람들은 이곳에서 봄, 여름 동안 놀이를 자주 연다. 이 영랑호의 이름이 붙게된 까닭은 신라시대에 화랑이었던 영랑이 동료인 술랑·안상·남석 등이 금강산에서 수련하고 돌아오는 길에 고성 삼일포에서 3일 동안 놀고 난 후 각각 헤어져 신라 서울 금성을 향하였다. 그러나 유독 영랑만은 이 호수에 와서 뱃놀이 즐기고 고기를 낚고 풍류의 멋을 다 하였다. 그런 후 사람들이 영랑호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때 놀던 내금강, 즉 회양군에 있는 한 봉우리를 지금도 영랑봉(1601m)이라 한다. 그러므로 영랑호의 설화는 신빙성이 있는 구비(口碑)에서 전해진 설화이다. 넓고 넓은 호숫가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어디에서 보아도 끝을 볼 수 없는 것이 이 호수의 특징이다) 호수면을 바라보면 무아지경(無我之境)에 이른다. 호수 주위는 낮은 솔숲과 바위들이 있어 영랑호의 풍경을 한층 빛내고 있다. 각종 어족들이 풍부하여 낚시터로 유명하다. 요즘 낚시의 레져를 즐기는 태공들이 호반을 메 우고 있다. 이 영랑호에는 고기자원이 풍부하여 대어급 잉어가 수시로 출몰하고 있다. 더욱 특수한 미각을 가지고 있는 감성돔도 새우를 미끼로 하면 잘 낚을 수가 있다. 피서를 즐기고 대어 낚을 꿈을 키우는 영랑호의 석양노을은 한결 이름이 높다.13)

영랑호는“자그마한 산들로 둘러막힌 호수로서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영랑이라는 신선이 여기서 놀았으므로 영랑호라고 부른다고 한다. 호수의 둘레는 십리쯤 되는데 기슭에는 흰 모래가 깔려 정갈한 호숫물과 잘 어울리며 이것이 또한 이채를 띤다.”14)고도 소개하였다.


3. 영랑호 제영시 작가와 서정성

1) 고려시대 영랑호 제영시 양상

(1) 안축(安軸, 1282~1348)

영랑포범주(永郞浦泛舟:영랑호에 배띄우고)

잔잔한 호수는 거울 같이 맑은데
平湖鏡面澄

푸른 물결은 엉기어 흐르지 않네
滄波凝不流

아름다운 배 가는대로 놓아두니
蘭舟縱所如

넘실넘실 가볍게 갈매기 따라오네
泛泛隨輕鷗

가슴 후련하게 맑은 정취 일어나서
浩然發淸興

거슬러 올라가니 깊고도 그윽해라
溯回入深幽

붉은 벼랑은 푸른 돌을 안고 있고
丹崖抱蒼石

옥 같은 골이 아름다운 섬을 품었네
玉洞藏瓊洲

산을 돌아 소나무 아래 배를 대니
循山泊松下

푸른 초목 서늘한 가을 기운 도네
空翠凉生秋
연잎 정갈하다 물에다가 씻었는가
荷葉淨如洗

풀빛 짙은 순체나물 연하고 보드랍네
蓴絲滑且柔

저물녘 뱃머리 돌려 돌아가려하니
向晩欲廻棹

눈앞 펼친 경치 천고의 시름인 듯
風烟千古愁

옛날 그 신선들을 만날 수 있다면
古仙若可作

여기서 그들 따라 싫도록 놀고가리
於此從之遊15)


북행범영랑호

(北行泛永郞湖:북행하다가 영랑호에 배띄우고)

저문 구름 반 걷히니 산은 한 폭 그림이고
暮雲半卷山如畵

가을비 새로 개이니 물결 절로 일렁이네
秋雨新晴水自波

이곳에 다시 오기를 약속하기는 어려우니
此地重來難可必

배 띄워놓고 한 곡조 노래를 다시 듣노라
更聞虹上一聲歌

안축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금주사록, 사헌규정, 단양부주부를 거쳐, 1324년(충숙왕 11) 원나라 제과에 급제하여 요양로개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고려로 돌아와서 성균악정, 우사의대부를 거쳐 충혜왕 때 강릉도안렴사로 파견되어 이때「관동와주(關東瓦注)」를 지었고, 양양에 학교를 세우고「양양신학기(襄陽新學記)」를 남겼으며 문집으로『근재집』이 있다. 충숙왕 17년(1330) 관동팔경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경기체가「관동별곡」은 송강 정철의 것보다 250년이나 앞섰다. 안축의 가사 제5장이영랑호를 노래한 것으로“선유담, 영랑호, 정신 맑아지는 골짜기에, 푸른 연 잎사귀 물 위에 뛰어놓은 듯 한 아름다운 작은 섬, 푸른 옥돌 괴어 만든 병풍같이 길게 연한 산, 아름다운 풍경 십리에 뻗쳐, 향기 은은히, 안개 부슬부슬, 유리 같은 수면, 아 배 띄우고 노는 광경 그 어떠합니까, 순채국 농어회, 은실 같은 나물, 눈 같은 고기, 아, 양젖은 어떻게 말씀하리까”(仙遊潭永郞湖神淸洞裏綠荷洲靑瑤山章風烟十里香苒翠雨非琉璃水面爲泛舟景幾何如蓴羹魚盧膾銀絲雪樓爲羊酪豈勿參爲里古)라고하였다. 안축은 충렬·충선·충숙 3조의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마음가짐이 공정무사하고 근검으로써 집을 다스렸다고 한다.16) 안축의 문집『근재선생문집』제1권에 수록된「영랑포범주」는 영랑호를 읊은 시 가운데 최초이자 단연 백미라 하겠다. 속초시 영랑호변 공원에는 지난 1999년 7월 10일 속초시, 속초지역 문화 연구회 풀묶음이 주도하고 순흥안씨 종친회가 합심하여 안축 선생 시 가운데「영랑포범주」를 검은 옥돌에 새겨서 세웠다. 근재 선생의 영랑호관련 시문은 근재사상연구회, 안상윤, 최재도 등에 의해 몇 가지 번역본이 나왔다.17)

거울같이 맑은 호수에 꽃배타고 갈매기 따라가니, 호수는 깊고 그윽하다. 물새 따라 솔숲에 배를 대고 맑은 하늘을 본다. 그리고 영랑에 배를 대고 맑은 하늘을 본다. 그리고 영랑이 떨어졌을 때 양양 태평루, 관란정(觀瀾亭에 올라 시를 지었으며, 영랑호에 들려서 옛 네 명의 신선 중 한 명이었던 안상을 거론하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였다.

2) 조선시대 영랑호 제영시 양상


(1) 홍유손(洪裕孫, 1431~1529)

단군 나신 무진년보다 먼저 태어나
生先檀帝戊辰歲

기왕이 마한이라 부르던 것 보았네
眼及箕王號馬韓

일찍이 영랑과 물가에서 노닐었는데
曾與永郞遊水府

또 봄술에 끌려 인간 세상에 머문다
又牽春酒滯人間

이 시는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의『해동이적(海東異蹟)』에 실린 것으로 그 유래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소총(篠叢) 홍유손은 세조때 사람으로 은둔군자였다. 세상일을 가볍게 보고 고답하면서 영리를 꾀하지 아니하였다. 남추강(南孝溫:秋江의 그의 호)은 늘 이렇게 칭찬하였다. ‘글은 칠원(漆園:莊子)과 같고 시는 산곡(山谷:중국 송나라 시인 황정견의 호)을 두루 섭렵하였다.’…그는 김시습과 함께 산수 간을 방랑하였는데 일찍이 추강이 금강산을 유람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보다 먼저 금강산에 놀러가서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 절벽위에다 시를썼다. 시를 다 쓴 다음에 그가 올라갔던 나무를 베어버리고 그 뿌리까지 뽑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추강이 뒤에 도착하여 그 시를 발견하였으나, 쳐다보기만 하였지 기어 올라갈수 없었다. 추강은 매우 이상히 여기면서 비선(飛仙)이 쓴 시라고 여기었다.19)

김풍기는 이 시를 평가하기를“영랑은 신라시대 사선(四仙) 중 한 사람이다. 이들은 금강산에서 노닐었으며, 삼일포에서 하루 머물려고 갔다가 너무 아름다워서 사흘이나 머물렀다는 설화를 만든 주인공들이다. 이들의 족적이 설악산에도 남아 있다는 것을 전제로 위의 작품이 지어졌다. 그렇게 영랑과 노닐었다는 말 속에는 자신이 신선의 신분이라는 것을 은근히 드러낸다. 오랜 세월 신선과 노닐다가, 이즈막에 봄 술에 끌려 인간 세상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머무는 곳이 어디인가. 바로 설악산이다.”라고 하였다.

홍유손은 방외인적, 도선적(道仙的) 기질을 지녀 겉으로 미친 사람 행세를 하지만 속으로는 불교의 허무사상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로20) 재주는 제갈공명같고, 행동은 만천(曼人靑:동방삭)과 같다고 남효온은『사우명행록(師友明行錄)』에서 언급했다. 홍유손은 설악산 바위에이 시를 써놓고 남효온을 기다렸는데 마치 신선이 된 것처럼 세상을 관조하였다. 1556년부터 1557년 사이 임보신(任輔臣)이 지은『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추강 남효온의 금강산에 노닌 기록에 이르기를“설악령 위 돌 사이에, 팔 분으로 쓴 절구 한 수가 전하네, 단군나신 무진년보다 먼저 태어나, 기왕(箕王)이 마한이라 부르던 것을 보았네. 일찍이 영랑과 물가에서 노닐었는데, 또 봄 술에 끌려 인간 세상에 머물렀구나”하였다. 먹 자국이 아직 새로운 걸 보니 반드시 쓴 지 오래되지 않은 것이리라. 세상에 선인(仙人)이 없으니, 이 어찌 일을 꾸미기 좋아하는 사람의 거짓 시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정자(程子)는 국운이 영명(永名)하기를 하늘에 빌고, 평범한 사람이 성인에 이르는 것을 수련에 따라 장수하는 것에 비유했으니 깊은 산, 큰 못 속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 시를 읊으니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세속을 벗어난 느낌을 가지게 한다. 공의 친구 여경 홍유손은 추강이 영동에 놀러 온다는 말을 듣고 미리 이 시를 써놓고 그를 기다렸으니 홍여경도 세속을 벗어난 선비로 일찍이 청한자(淸寒子, 김시습의 호)를 따라 놀았고 시문을 짓되 옛 사람에 따르지 않았다.

이 내용은 권별(權鼈)이 1670년경에 지은『해동잡록(海東雜錄)』에도「설악영상석간유팔분서일절(雪岳嶺上石間有八分書一節):설악산 돌 사이에 팔분 서체의 시」이라는 내용으로 수록되어 있다. 홍유손은 조선전기의 학자로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길에 나가기를 포기하고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본관은 남양, 자는 여경(餘慶), 호는 소총(篠叢), 광진자(狂眞子)이다. 남효온, 이총, 이정은, 조자지, 김시습, 김수온 등과 죽림칠현을 자처하였으며 이들을 청담파(淸談派)라고도 부른다.

(2) 이몽규(李夢奎, 1510~1563)

영랑호제영(永郞湖題詠:영랑호를 읊다)

무연히 펼친 호수 거울같이 새맑은데
平湖淨色明如鏡

구름걷힌 봉우리들 병풍처럼 둘러있네
雪岳晴峰擁作屛

신선들의 피리소리 천년토록 소식없어
笙鶴千年消息斷

조각달은 부질없이 푸른 바다 비춰주네
空留片月照滄溟

이몽규는 조선전기의 시인으로 본관은 경주, 자는 창서(昌瑞), 호는 노재(魯齋) 천휴당(天休堂), 청천당(聽天堂) 등이다. 조부는 이조참판에 추증된 이성무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에 추증된 통훈대부 이인신이다. 어머니는 광주빈씨로 절도사 반희의 딸이다. 1540년 경자식년 사마시에 생원 3등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곧 나와서 처가 별장이 있는 보령으로 이주하였다. 그곳 서실을 천휴(天休)라 명하고 전원에 묻혀 독서와 시작에 전념하였다. 조선시대 은사(隱士)로서 영랑호를 찾아한 편의 시를 남겼다. 이 시는 거울같이 맑은 영랑호와 병풍처럼 둘러싼 봉우리, 그리고 옛 영랑 화랑의 피리소리가 천년동안 들리지 않는 초저녁 하늘에 걸린 조각달이 호수와 이어진 푸른바다를 비추는 고요한 침잠의 서정을 영출하였다.

(3) 구사맹(具思孟, 1531~1604)

영랑호제영(永郞湖題詠:영랑호를 읊다)

백경이나 맑은 호수 거울처럼 고요한데
百頃淸湖鏡平面

조각배에 흥취 싣고서 달밤 뱃놀이 하네
扁舟載興泛空明

당시 놀았던 그런 자취 사라지고 없건만
當時只擬遊踪秘

어찌 구구히 영랑호라고 이름을 지었는가
饒舌何人强揭名

구사맹의 자는 경시(景時) 호는 팔곡(八谷)시호는 문의(文懿) 본관은 능성이다. 부친은 영의정 순(淳)이며 셋째 딸이 인헌왕후이다.

유희춘, 이황의 문인(門人)으로 명종 13년(1558) 식년문과에 급제 승문원정자, 정언 등을 거쳐 1563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조좌랑, 황해도관찰사, 동부승지, 첨지 중추부사가 되었으며 동지사로 다시 명나라에 갔다. 임진왜란에 왕자를 호종하여 의주로 갔고, 정유재란 때는 성천으로 피난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능안부원군에 추봉되었다. 문집으로『팔곡집』이 있다. 이 시는 넓고 고요한 영랑호에서 달밤 뱃놀이를 하는 정경이 그려진다.

신라 영랑의 자취는 사라지고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


(4) 허균(許筠, 1569~1618)

유증무산장옥랑
(留贈巫山張玉娘:무산의 장옥랑과 작별하며짓다)

천후산 앞에는 풀이 정히 꽃다운데
天吼山前草正芳

영랑호 호숫가에 지는 꽃 향기롭네
永郞湖畔落花香

그림배에 봄 가득 싣고서 돌아가니
畵舡載得春歸去

옥퉁소 드높아 제향을 향하는구나
吹徹鸞簫向帝鄕

허균은 너무도 유명한 조선중기 작가이자 정치가이다. 아버지는 경상감사를 역임한 초당 허엽이며 어머니는 예조참판을 역임한 애일당 김광철의 딸이다. 강릉에서 태어났으며,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짓기도 하는 등 탁월한 문학적 재능과 외교력을 보였다.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성옹(惺翁), 촉재주인 등이 있으며 본관은 양천이다. 21세에 생원시에 합격한 이래 26세에 정시을과, 29세에 중시 장원하고 30세에 벼슬길에 올라 병조좌랑을 거쳐 황해도사가 되었다. 삼척부사, 수안군수, 공주목사, 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불교, 도교, 천주학 등에 심취하여 반대파의 공격과 중상 등으로 여섯 차례 파직, 세 차례 유배를 갔으며 역적으로 몰려 죽었으나 뛰어난 문장력을 인정받아 중국에 여러 차례 다녀왔다. 만권 책을 중국에서 들여와 호서장서각을 지었으며, 또한 많은 문집을 엮었는데 누이『난설헌집』, 형인 허봉의『하곡집』등을 냈으며, 문집으로『성소부부고』가 있다. 『조선시선』등 여러 시문집을 편찬하여 중국에도 널리 알려졌다.

이 시는 허균의『교산억기시(蛟山臆記詩)』11번째로 들어 있는데21) 천후산인 울산바위와 영랑호가 시의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영랑호 호숫가에 봄꽃은 지나,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한 화강(畵舡또는 畵舫이라 함)에 봄한 가득 싣고 퉁소소리 들으면서, 신선세계를 영적 세계로 그리고 있다. 옛 선비들은 강릉 경포호에‘경포화방’(鏡浦畵舫)이라 하여 그림배를 띄우고 신선처럼 놀았는데,22) 속초의 영랑호에도‘영랑화강’(永郞畵舡)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5) 이상질(李尙質, 1597~1635)

관영랑호(觀永郞湖:영랑호를 구경하며)

구름어린 하늘가에 신선 옷 부탁하고
羽衣初絲官白雲邊

필마로 달려오니 생각이 아득도 해라
匹馬東來意渺然

백사장 해가 저무니 호수물 아득한데
日落沙明湖水闊

나 몰라라 신선소식 어디에 물어볼까
不知何處問神仙

이상질은 조선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전주, 자는 자문(子文), 호는 가주(家洲)다. 아버지는 이조판서에 증직된 이진이며 어머니는 함안이씨로 생원 이성의 딸이다. 권필의 문인으로 광해군 8년(1616) 진사시에 합격하고 광해군의 실정에 세상을 버리고 강원도에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성균관에 입학하고 1629년 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조좌랑이 되었고, 이듬해 정언, 병조좌랑을 거처 옥당에 들어가 부수찬겸지제교를 역임하였다. 1632년 홍문관부교리, 이듬해에 헌납, 성균관직강을 역임하고 암행어사로 북관에 갔으며 1634년 종성에 유배되고 돌아오다가 회양에서 사망했다. 문집으로『가주집』5권이 있다. 이 시는 영랑화랑의 이야기를 빗대어 영출하였다. 해질무렵 흰구름은 신선의 옷과 같이 아름다운데 홀로 당도하니 생각이 묘연하다고 노래했다.


(6) 이세구(李世龜, 1646~1700)

영랑호제영(永郞湖題詠:영랑호를 읊다)

길그친 솔숲 빠져나가니 동편 모래기슭
行盡長松沙岸東

맑고 시원하면서도 바람조차 잔잔해라
澄淸瀟灑更無風

한 구비 맑은 호수 한 폭의 그림인가
明湖一曲眞如畵

설악의 천봉이 거울 속 잠긴 것 같아라
雪岳千峰倒鏡中

금강산 만이천봉 두루두루 돌아보고
歷遍金剛萬二岫

해당화 핀 십리길 흰 모래 밟았노라
海棠十里踏鳴沙

영랑호의 호숫가에 눈길을 돌리고서
永郞湖畔初開眼

손가락 술동이 치며 호호가 노래하네
手拍瓊壺浩浩歌

이세구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 자는 수옹(壽翁) 호는 양와(養窩)이다. 이항복의 증손자이며 목사 이시현의 아들이다. 1673년 식년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며, 숙종11년(1685) 음보(蔭補)로 경양도 찰방을 지냈으나 사직하였다. 그 뒤 예산현감, 서연관, 상의원첨정, 홍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경학, 예설, 역사 등에 두루 통하고 가례를 독자적으로 주석하였다. 역사에 밝아 한사군과 삼한의 위치를 논증하였으며, 박세채, 윤증, 남구만, 최석정 등 소론에 속한 학자들과 학문적 교류가 있었다. 아들 광좌(光佐)의 공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홍주 혜학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는『양화집』13책이 있다. 영랑호를 읊은 이 시를 보면 첫째 수는 영랑호 옆 동쪽 솔밭길을 걸으면서 느끼는 시원한 바람이 새롭다. 호수는 한 폭 그림 같은데 설악이 물속 그림자로 담겨있다. 둘째 수는 금강산을 돌아보고 동해안 명사십리를 밟고 영랑호에 당도하니 마음도 편하다. 벗들과 술동이를 치면서 노래하고 술마시는 정경이 여유롭다.


(7) 김창흡(金昌翕, 1653~1722)

영랑호제영(永郞湖題詠:영랑호를 읊다)

병풍산 둘러싸여도 바닷길은 열렸으니
屛張萬岫海開門

모래언덕 누대에는 묘한 이치가 있네
沙阜成臺衆妙存

한나라 장수 돌아갈 때 사흘 울었다는
漢將廻時三日哭

지금도 전하는 기록이 오히려 남았네
至今猶記契玄言

김창흡은 조선 중기 유학자로 본관은 안동,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시호는 문강 (文康)이다. 속초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인물로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자이며 영의정 수항(壽恒)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안정나씨로 나성두의 딸이다. 형들은 영의정을 지낸창집(昌集)과 예조판서 등을 지낸 창협(昌協)이 있다. 15세에 이단상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1671년 천태부를 읽다가 갑자기 산수의 흥취가 일어 금강산의 모든 경관을 두르 관람하고 돌아오기도 했다.23) 현종 14년(1673)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멀리하고 주로 설악산 등 산수에 노닐었다. 1681년 김석주의 천거로장악원주보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689년 기사환국때 부친이 사사되자 영평에 은거하였다. 장자와 사마천의 사기를 좋아하고, 불전을 탐독하였으며 주자의 글을 읽고 유학에 전심하였다. 1696년에 서연관에 뽑히고 1721년 집의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영조가 세제(世弟)로 책봉되자 세제시강원으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임하고 나가지 않았다. 신임사화로 절도에 유배된 형 김창집이 사사되자 지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형 김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인품을 성인, 대현, 군자, 선인, 속인, 소인 등으로 나누기도 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강릉 호해정 영당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삼연집』『, 심양일기』등이 있다. 이 시에서 삼연은 영랑호가 주변 산에 둘러싸였지만 바다와 통하고 누대에 오르니 묘한 이치를 느끼게 한다고 소회를 읊었다.


(8) 채제공(蔡濟恭, 1720~1799)

영랑호(永郞湖)

바다낀 구름병풍 굽이굽이 기묘한데
幷海雲屛曲曲奇

저녁노을 비쳐들면 비단필 번뜩이네
練痕番羽動夕陽時

신선수레 아득한데 올 날은 언제런가
仙輧漠漠來何日

안개어린 봄 물결 곳곳에서 의심하네
烟雨春波到處疑

채제공은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영조대의 남인이다. 특히 청남 계열의 지도자로 사도세자의 신원 등 자기 주장을 하고,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 인물이다. 본관은 평강,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번옹(樊翁),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중추부지사 응일의 아들이며 오광운, 강박 등에게 글을 배웠다.

1735년 15세 때 향시에 급제한 후 1743년 문과정시를 통해 승문원에 들어갔다. 1748년 영조의 특명으로 탕평책의 제도적 장치인 한림회권에 뽑혀 예문관 사관이 되었으며, 삼척에 유배되기도 했다. 1753년 충청도 암행어사, 이후 부승지, 이천부사, 대사관 등을 역임하고 1758년 도승지가 되었다. 대사헌, 예문관, 홍문관제학 등 언론과 학문의 관직을 수행하고, 경기감사, 계성유수, 안악군수, 함경감사, 한성판윤 등 지역행정직과 병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 등 중앙정치와 행정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771년 동지사로 중국을 다녀왔으며 1788년 정조의 특명으로 우의정, 2년후 좌의정으로 승진하여 3년간 정승을 맡아 국정을 운영하고 1793년 영의정에 임명되었고, 그 후로는 수원화성 축성을 담당하였다. 문집으로『번암집』이 있다. 이 시는 바다와 연결된 호수에는 영랑의 전설이 전해옴을 말하고, 봄날 호수물결 일어나니 신선수레가 언제 올지 알 수 없다는 감회를 노래했다.


(9) 오윤환(吳潤煥, 1872~1946)

유영랑호(遊永郞湖:영랑호에서 노닐다)

영랑도 있고 호수도 그렇게 있으니
有是永郞有是湖

좋은 경치 지도에 실림이 마땅하네
宜將勝載輿圖

푸른파도 마음고요 능형 거울열리고
綠波心靜開菱鏡

흰 달빛 빛나서 술병을 비추는구나
晧月光生暎玉壺

나그네 시 지어 화답할 수 있으니
能令遊子詩相和

언제나 좋은시절 술마시며 즐기네
每到良辰酒以娛

바위아래 차끓는 연기 맑음 다하고
巖下茶煙淸欲歇

유연히 앉아서 뱃노래를 듣고 있네
悠然坐聽櫂歌呼


유영랑호운

(遊永郞湖韻:영랑호에서 노닐며 시를 쓰다)

좋은 경치 구경함이 어찌 높은 누각이랴
探勝何必上高樓

바다에 놀며 구경해도 흥취 다하지 않네
近海游觀興不收

산 빛은 붉게 물들고 저녁연기 오르나니
山光凝紫烟其暮

호수빛 맑은달 품어 또한 가을의 경치네
湖色含淸月亦秋

팔경을 더함은 동국여지도 아름다움이니
八景應添輿誌美

네 명 신선이 나타남은 도가의 사람이라
四仙已著道家流

취한 후에 선방에서 시 짓기가 끝났는데
醉後禪房詩寫訖

다시 한가롭게 나막신 끌고 방주 향하네
更閒向芳洲

오윤환 선생은 조선조 후기 속초출신의 한학자로 본관은 해주, 호는 매곡(梅谷), 자는 성빈(聖嬪)이다. 평생을 효행을 실천하고 교육자, 항일운동가로 지냈으며 율곡 이이의 사상을 계승하였다. 1891년부터 1946년까지 55년 동안 매일같이 일기를 썼으며 매율(梅律), 해주 오씨 선조 중 훌륭한 분들의 위인전기인『수양가전(首陽家傳)』이외에도『건연침비(巾衍枕秘)』『, 학정산고(鶴亭散稿)』『, 도문수록(道門蒐錄)』등을 남겼다. 또한 유학자로서 직접『율곡전서』27권을 필사하고 서당을 열어 후학들을 지성으로 훈도하며 영동지역 문사(文士)들을 만나는 등 학문적 연찬과 가르침을 계속하였다. 1934년 마을 앞 계곡에 학무정을 직접짓고 학자들과 교류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24)

속초시에서는 매곡선생 고택 서당을 복원하여 문화재로 등록하고 학무정을 수리하였으며, 매곡선생의 유품들을 속초시립박물관 특별전 시실에 전시하고 지역인물을 선양하고 있다.


3. 맺음말

이상에서 영랑호의 문헌기록과 제영시문들을 살폈다. 7백여년 전 안축이 읊은 영랑호 제영시 부터 무려 천여 년 동안 그 아름다움을 칭송함이 그치지 않았다. 이처럼 속초의 아름다운 풍광을 구성하는 영랑호는 산, 바다와 함께 석호가 가지는 자연생태환경 뿐 아니라 역사문화 자원 또한 매우 풍부하다.

이른바 천지수(天地水) 삼원(三元)과 오행의 미학적 평가를 거부할 수 없는 팔경(八景:元景,始景, 玄景, 靈景, 眞景, 明景, 洞景, 淸景 등 八采之景色)의 영랑호는 거울같이 맑음에 있어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설악과 함께 더욱 그 명성을 높였다. 그처럼 영랑 그 호수 속에는 설악이 그 깊은 신령스런 그림자를 드리우고, 신선 화랑 영랑의 체취가 전해오기에 절승 가운데 절경이다.

호수의 깊은 물속에는 신선다운 신령스러운기운이 맴돌고 향기로운 꽃들이 호수변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동해의 아침 햇살과 서산 낙조와 달빛이 호수를 붉게 물들이면 환상에 가까운 경치로 채색되는 영랑호는 사시사철 색다른 옷으로 갈아입는다. 영랑정 누대에 오르니 묘한 정치가 느껴진다는 옛 시인들의 입을 빌리지 않더라도 언제나 영랑호는 고요의 미학과 평정의 감수성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한 서정성은 쉽게 다룰 수 없는 비경의 자태로 숨어있기에 옛 시 한 수 한 수가 차라리 조심스럽다.

영랑호 제영시는 고려시대에 안축, 이곡이 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더욱 많은 문인들에 의해 절창되었다. 즉 홍유손, 이몽규, 구사맹, 허균, 이상질, 이세구, 김창흡, 채제공, 오윤환 등 은사(隱士)부터 재상(宰相)에 이르기까지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시를 쓰지 않고 배기지 못했다. 이외에도 전하는 많은 시문이 있으나 잘 알려진 9명의 제영시만 살펴보았다.

주지하듯이 영랑호는 신라 때 사선 중의 한 명인 영랑의 유적지로 그 이름이 지속적으로 전승되어 왔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인들이 이곳을 노래하여, 명경지수(明鏡止水)의 영롱한 서정성과 청초한 정서적 감흥은 여전히 많은 시문으로 전하고 있다. 따라서 영랑호는 시문의 고향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설악을 품고 있는 영랑호는 산과 바다를 잇는 소통의 공간이자 산과 바다가 쉬어가는 휴식처와 같기에 이곳에 온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안식처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산과 바다, 그리고 호수의 세 가지를 고루 갖춘 고장 속초시는 이 세 가지를 어디에서나 자랑스럽게 선택할 수 있는‘초이스-에이스-속초(Choice-Ace-Sokcho)’다. “우월한 선택”이 가능한‘초이스 속초’는 영랑호가 있기에 더 아름답다.

옛 시문에 전하듯이‘영랑화강’(永郞畵舡, 영랑호의 그림배)을 띄워놓고 시문을 읊던 영랑호는 영롱한 구슬을 품고 있는 듯하며, 사계(四季) 경색지(景色地)인 울산암과 달마봉, 범바위가 물속에 거꾸로 비친‘영산도지’(映山倒地)의 선경(仙景)임을 제영시들이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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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張正龍『, 束草의 民俗』束草文化院, 1987, 10쪽
2) 崔承洵『, 太白의 山河』강원일보사, 1973, 95쪽“永郞湖의 情趣로서 滄海의 歸帆, 湖面의 落照, 普光寺의 暮鐘들도 다 뺄 수 없지마는 영랑호의 또 하나의 정취는 울산바위에서 俯瞰하는 맛이다. 背景은 參差한 설악의 峻峰들이 하늘에 솟구쳐 있고 앞은 萬頃蒼波다. 그 어중간에 고요하게 펼쳐져 있는 호수가 울산바위에 올라서면 발 밑에 다가있다. 風致나 觀光은 자연자원인 山水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기 사람의 손길이 따라야 하고 사람의 마음이 늘 서려있어야 하는 法이다.”
3「文獻에 나타난 永郞湖「映山倒地永郞湖」『束草文化』제4호, 속초문화원, 1988, 14~24쪽
주상훈「, 花郞과 永郞湖『束草文化』제6호, 속초문화원, 1990, 12~35쪽
최용문「, 속초 영랑호반에 세워진 근재선생의 시비『束草文化』제15호, 속초문화원, 1999, 76~78쪽
장정룡 외『, 속초 영랑호 설화의 형상화 계획』속초시, 2000
4) 一然著, 權相老譯解『, 三國遺事』卷三栢栗寺, 東西文化社, 1977, 260쪽
5) 南孝溫『, 秋江先生文集』卷五, 遊金剛山記, 1471년“三日浦者新羅時有花郞安祥永郞之徒遊三日乃罷故名焉…永郞者新羅四仙之一”여기에는 영동지역 산신제 기록도 들어 있다. “영동민속에는 매년 3,4,5월중에 날을 가려 무당과 함께 바다와 육지에서 나는 음식을 아주 잘 장만하여 산신제를 지낸다. 부자는 말 바리에 음식을 싣고 가고 가난한 사람은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가서 신의 제단에 제물을 진설한다. 피리불고 북을 치며 비파를 뜯으며 연 삼일을 즐겁게 취하고 배불리 먹은 후 집으로 돌아와 비로소 매매를 시작한다.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조그만 물건도 얻을 수도 없고 주지도 않는다.”
6) 李仁老『, 破閑集』卷中,“ 金蘭境有寒松亭昔四仙所遊其徒三千各種一株至今蒼蒼然拂雲下有茶井”
7『) 海東高僧傳』卷第一法雲傳“二百餘人其中四仙最賢”
8) 李●光『, 芝峯類說』卷十八“新羅時四仙卽述郞南郞永郞安詳…蓋其時謂郞徒爲國仙故云非其仙也”
9『 新增東國輿地勝覽』卷四十五, 杆城郡永郞湖條,
10) 李植『澤堂先生別稿刊餘』十七杆城志,“ 在郡南五十五里周回二十里漫入山谷不見端倪汀回渚曲岩石錯峙中水又有孤石如點星東麓一丘近湖中松林周匝 日光不漏可列坐百餘人古有亭今廢世傳永郞遊賞之地故以爲名焉”
11) 洪萬宗『海東異蹟“』四僊, 新羅時四僊卽述郞南郞永郞安詳皆嶺南人或稱嶺東人同遊高城三日不返故名其地曰三日浦浦南有小峯峯上有石龕峯之北崖石面有丹書六字曰永郞徒南石行所謂南石行疑卽南郞也小島古無亭存撫使朴公構之其上卽四僊亭也又有穴在郡南一十里又通川有四僊峯皆四僊所遊處又杆城有僊遊潭永郞湖金剛有永郞峯以永郞僊徒嘗遊於其地故得名”
12) 李重煥『擇里志』卷四, 山水, 山水勝地“永郞湖如珠藏大澤襄陽靑草湖如鏡開畵”
13) 黃●根『國立公園雪嶽山』通文館, 1973, 177~178쪽
14) 리용준·오희복 역『금강산 한시집』문예출판사, 1989, 300쪽
15) 安吉濬編輯『謹齋全集』(上下卷), 謹齋思想硏究會, 1994, 89~90쪽 참조
鄭愚相外飜譯『謹齋先生文集』(全), 順興安氏三派大宗會, 2004, 80~81쪽 참조
최재도「영랑포범주를 번역하며『」영랑호와 근재안축』문화연구회 풀묶음, 1999, 40~51쪽“잔잔한 호수는 거울같이 맑고, 푸른 물결은 엉기어 흐르지 않네. 놀잇배를 가는 대로 놓아두니 갈매기도 배를 따라 둥실 떠 날아오네. 마음 가득 맑은 흥취 일어나기에, 물결 거슬러 깊은 골로 들어서네. 붉은 벼랑이 푸른 바위를 안고 있어, 아름다운 골이 고운 섬을 품은 것 같네. 산을 돌아 소나무 아래 배를 대니, 울창한 숲 그늘이 가을인양 서늘하네. 연잎은 씻은 듯 깨끗하고, 순채줄기는 매끄럽고도 부드럽네. 해 저물어 뱃머리 돌리려 하니, 흐릿한 기운 오랜 시름 자아내네. 그 옛날 신선 다시 올 수 있다면, 그를 따라 여기서 놀련마는.”이 시를 번역한 속초출신 최재도 극작가의 큰 도움으로 당시 번역한 자료를 볼 수 있게 되었기에 차제에 감사를 표하며 여기에 그 내용을 소개한다
16) 李民樹編譯『高麗人物列傳』瑞文堂, 1976, 143쪽
17) 최용문「속초 영랑호반에 세워진 근재선생의 시비『」속초문화』제15호, 속초문화원, 1999, 76~78쪽
최재도『영랑호와 근재 안축 -영랑포 범주를 번역하며』문화연구회 풀묶음 회보, 1999, 7. 10, 40~51쪽
『순흥안씨 제3파 종보』제18호, 1999
18) 李民樹編譯『高麗人物列傳』瑞文堂, 1976, 132쪽
19) 洪萬宗著, 李錫浩譯『, 海東異蹟』乙酉文化社, 1982, 98~100쪽
20) 南孝溫著, 李錫浩譯『, 秋江冷話』三省美術文化財團, 1981, 15쪽
21) 장정룡『허씨오문장가 한시국역집 -허균의 생애와 한시』강릉시, 2000, 498쪽
22) 장정룡「강릉경포호 전설『」경포대와 경포호의 문화산책』새미, 2009, 16쪽
23) 金道允『雪嶽山永矢菴과 三淵金昌翕先生』永嘉文化社, 2005, 52쪽
24) 장정룡『속초시 매곡 오윤환 선생 선양사업 기본계획』속초시,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