悲歌十首 (비가 십수)
비가 십수 1수
머리말 해석 ; [양순필, '이정환의 비가연구' 박사과정논문]
사무친 꿈의 노래다. 꿈은 상사의 응결로써 못내 연연해 하는 내적 충동의 표현이 꿈으로 化한다. 곧 생시의 의식이 꿈으로 나타난 것이겠다. 그리던 두 왕자를 밤중에 꿈속에서 친히 본다는 작가의 심정에서 승화된 시적 감흥을 느끼게 된다. 꿈으로 통하여 노래한 송암은 이어 다음 2수에서와 같이 연군의 정을 노래하고 있다.
[해 설] 한밤중에 홀로 일어나 스스로에게 물어보노라, 이내 꿈아 만리나 먼 이국 땅인 심양을 어느 새 다녀 왔는고 반갑도다, 두 왕자님들을 친히 뵌 듯 하도다
*소혼(消魂): 몹시 근심하여 넋이 빠짐 *요양(遼陽):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간 곳, 여기에서는 심양을 의미 청나라 수도 이전 과정: 흥경(1616년) -> 요양(1621년) -> 심양(1625년) -> 북경(1644년) *편시(片時): 잠시동안 *학가(鶴駕): 왕세자가 대궐밖에 나가는 일, 또는 그때 타던 수레 *선용(仙容): 여기에서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의미
비가십수 2수
풍설이 분분한 엄동설한에 북쪽에서 남으로 찾아든 겨울 철새에게 이역에서의 옥고를 겪고 있는 두 왕자의 안부를 안타까이 물어보는 지성은 비단 상대의 유훈에서만은 아니다. 신자의 도리를 다한 함축에 송암의 정한이 서려 있다. 그것을 표백함에 있어 겨울 철새를 북래사자로 의화한 곳에 한결 시적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그리고 이역에 두 왕자를 볼모로 보낸 불충을 눈물 겨워한 것은 죽지 않고 살고 있는 스스로 민망해서였다.
[해 설] 눈보라가 뒤섞여 휘몰아치던 날에 물어보노라, 심양에서 온 사신들이여 볼모로 잡혀가 계신 왕자님들의 모습이 얼마나 추워 보이시는고 고국에 남아 차마 죽지 못하고 있는 이 외로운 신하는 눈물 겨워하노라
*풍설교분일(風雪交粉日): 눈보라가 뒤섞여 휘몰아치던 날, 즉 병자호란 후 참담한 시대 상황 *소해(小海): 중국에 대해 조선을 일컫는 말이나 여기서는 두 왕세자를 의미 *고신(孤臣): 작가 자신(송암 이정환)을 가리킴
비가십수 3수
이는 송암이 현실적 의미로서는 중국고사를 인거하여 읊은 것이지만 잠세적 의미로서는 심양에 잡혀간 두 왕자를 되돌려 오지 못하는 신하로서의 불충스러운 자신의 미미를 개탄한 노래다. 곧, 표면적으로는 후생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유방의 사신으로 항우에게 가서 유방의 부친을 돌려주고 천하 중분의 약속을 했건만, 후생의 사후에는 항왕을 누가 달랠 것인가. 초군과 싸운 3년간에 고생도 그지 없거니와 그 언제면 한나라의 태양이 밝아 태공을 오게 할 것인가라고 질서를 파괴한 침략자에의 저주가 보석처럼 빛났다.
[해 설] 후생이 죽은 후에 항우를 누가 달랠 것인고 초나라 군사 된지 삼년에 고생도 한량없도다 어느 때 한나라 세상이 밝아 태공을 돌아오게 하리오
*후생(候生): 유방의 사신. 항우를 달래어 항우에게 볼모로 잡혀 있던 유방의 아버지 태공(太公)을 귀환시키고 한초중분(漢楚中分)으로 나누도록 약속하게 한 사람 *항왕(項王): 초(楚)나라 항우 *간고(艱苦): 고생 *태공(太公): 한(漢)나라 유방의 아버지(항우에게 인질되었다가 후생에 의해 풀려남)
비가십수 4수
잡혀간 두 왕자를 되돌려 오지 못한 신하로서의 불충스러운 자신의 처지를 거듭 개탄하였다. 곧 옛날 신라 눌지왕 때에 박제상의 충성심을 아쉬워 한 것이다. 왕의 아우 두 사람 가운데에서 복호(보해)는 고구려에, 미사흔(미해)은 왜국(일본)에 각각 인질로 잡혀 갔다. 박제상은 고구려에 가서 볼모로 잡혀 있는 왕제 복호를 환래케 하고, 이어 왜국에 건너가서 왕제 미사흔을 피환케 하고 자기는 불환의 몸이 되었다. 그러한 만고의 충신 박제상과 같은 자기가 되지 못함을 목메이고 있다. 인조의 시름을 풀어 드릴 수 있고 이역의 춘궁을 모셔 올 수 있을 터인데 그렇지 못한 불충을 심히 부끄러이 자책하며 노래한 것이다. 한편 제상이 왜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불귀의 객이 되므로 그 아내가 슬피 연모하여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통곡하면서 왜국을 바라보다 죽었는데 나중에 치술신모가 되었으니 그 영에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죽은 혼을 생각할 때 무한히 슬퍼진다는 것이다. 송암이 이처럼 박제상을 인거한 것은 시에 있어서 보편성을, 곧 '충'을 강조하면서도'충'의 보편적 개념을 시화한 비유법이다.
[해 설]
박제상이 죽은 후에 더 이상 왕가의 근심을 걱정하는 사람이 없구나 머나먼 심양에 계신 두분의 왕자님들을 누가 감히 모셔오리오 이제야 치술령의 맺힌 전설을 내내 슬퍼하노라
*제상(堤上): 신라 눌지왕 때 충신 *이역(異域): 중국의 심양 *춘궁(春宮): 왕세자(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수모(誰某): 누구 또는 아무개 *치술령 설화: 치술령(지금의 울산과 경주 경계의 고개), 신라 눌지왕 때 박제상(朴堤上)이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는 왕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하여 귀국시켰으나, 자신은 일본왕에게 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이에 박제상 부인이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남편을 기다리다 슬픔에 겨워 통곡하다가 죽어 치술령 망부석이 됨.
비가십수 5수
곧, 명(明)나라를 위(衛)나라로 비유하였다. 북적인의 침공에 위나라 사람이 무력했던 것을 청나라의 침공에 명나라가 무력했던 것으로 우의하였다. 명나라와 선린관계의 유대를 맺고 있던 조선도 청의 침공을 당하여 끝내는 국치의 굴욕을 당했음을 개탄하고 있다. 곧, 명과의 혈성사대가 무너진다는 것은 당시의 사정으로선 혈육의 정이 단절된 것 같은 장단의 한이었다. 그리하여 거듭된 전쟁의 앙화로 자신의 갖옷을 기워줄 사람이 없음을 통분하고 있다.
[해 설] 모구를 돌아보니 위나라 사람 알리 없도다 세월이 빠르게 흐르니 칡넝쿨이 길어졌도다 이 몸의 해어진 갖옷을 꼬매줄 사람이 없도다
*모구(旄丘): 앞이 높고 뒤가 낮은 것(시경(詩經)의 패풍 모구장(旄丘章)인용함) 旄丘之葛兮 (모구지갈혜) 모구(旄丘)의 칡이 何誕之節兮 (하탄지절혜) 어쩌면 이리도 마디가 긴고 叔兮伯兮 (숙혜백혜) 叔이여 伯이여 (叔, 伯 : 위나라의 신하들) 何多日也 (하다일야) 어찌 이리도 여러 날이 걸리는고 여(黎)나라의 신하가 스스로 말하기를, 오랫동안 위(衛)나라에 붙어 살아, 時物이 변하였다. 그러므로 모구(旄丘)의 위에 올라가 그 칡이 장대하여 마디가 성글고 넓은 것을 보고, 인하여 이에 가탁하여 기흥(起興)하기를, "모구(旄丘)의 칡이여, 어찌 그리도 마디가 넓은가. 위나라의 여러 신하들은 어찌하여 그리도 여러날이 지났는데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라고 한 것이다. 이 시는 본래 위나라의 군주를 꾸짖은 것인데 다만 그 신하만을 지척(指斥)하였으니, 우유(優柔)하여 박절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호구(狐裘): 여우 털가죽옷.(시경(詩經)의 패풍 모구장(旄丘章) 인용함) 대부(大夫)는 여우의 창색(蒼色: 하늘색) 갖옷(짐승 가죽옷)을 입는다.
비가십수 6 수
조소하는 처지이지만서도 조정을 바라보니 무력한 무신이 너무 많음을 한탄하고 있다. 초장에 이어 중장은 설의법으로서 그 속엔 국치를 안은 화친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고 물으면서 충분히 송암의 척화적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종장은 조구리를 빌어 척화를 상징한 비약이다. 조구리라는 이름으로 척화의 충성을 기리며 그들의 희생을 슬퍼했고 그런 충신들이 이미 죽자 참승할 자가 없다고 통탄하고 있다. 한편 자신이 그런 충신이 못된 처지를 깊이 자탄한 통음이다.
[해 설]
조정을 바라보니 무신들이 많기도 하도다 어렵고 치욕스러운 화친은 누구를 위해 한 것인고 슬프도다 충신들은 이미 죽었으니 임금님을 모셔 호위할 사람이 없도다
*대조(大朝): 조정 *신고(辛苦): 고통 *화친(和親): 국가간의 좋은 교분 *구리(廐吏): 마구간 관리를 담당하던 벼슬, 여기에선 길잡이가 될 만한 충신을 의미 *참승(參乘): 참승(驂乘)으로 판단. 왕을 모시는 배승을 의미. 참승(驂乘)은 말 세마리가 끄는 마차에서 말을 모는 자가 가운데에 타고, 임금이 왼쪽, 호위하는 사람이 오른쪽에 타서 마차가 기울지 않도록 했음
비가십수 7수
휘영청 달 밝은 밤이면 구중 높은 궁궐에 계신 인조께서도 지난날의 수모를 돌이켜 생각하면서 마련에 마련을 더하기에 여가가 없을 것이다. 한 편 성하의 맹으로 인하여 볼모로 잡혀간 두 왕자의 생각에 혈누를 뿌리는가 하면 이역에서의 곤욕을 몽매간에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이역에서의 소현세자가 뿌리는 망향의 혈누와 두 왕자를 그리는 부왕으로서의 진념, 인조의 넓고 높은 진념은 억만창생에까지 은총이 베풀어지고 있음을 모두 깨달아 은총에 감사해야 하고 증은을 다짐해야 함을 그 내용으로 감싸고 있다 할 것이니, 그 시의 저류엔 복수의 시전이 붉게 타고 있다.
[해 설] 궁궐의 달 밝은 밤에 임금님께서 얼마나 근심이 깊겠는고 고통을 겪고 있을 왕자님들의 생각인들 어찌 잊으리오 이 밖에 온 백성들의 근심까지도 걱정 하시는도다
*구중(九重): 대궐, 궁궐 *성려(聖慮): 임금의 근심 *미황(未遑): 미처 겨를이 없다 *억만창생(億萬蒼生): 온 백성
비가십수 8수
차라리 봄비에 절로 자라고 있는 저 장초처럼 나에게도 그 무서운 역사적 치욕을 외면 할 수 있는 무지를 지녔더라면 그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우리는 너만 못하여 시름에 겨워 "짓느니 한숨이요 디드니 눈물이라"(사미인곡)의 되풀이다. 역사적 현실에 무심할 수 있는 자연보다 한 시대의 비극에 무심치 못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역사를 의식하고 있고, 시대를 의식하고 있기에 그것을 의식하면할 수록 시름을 이기지 못한다는 병자국치를 겪은 송암의 자탄이요, 작가 의식의 표백이라 할 수 있다. 이 비가 8수에서의 '시름'은 병자국치의 비분과 자탄을 승화시키고 있는 '시름'이라 할 수 있다.
[해 설]
구렁에 돋아나 있는 풀이 봄비에 저절로 자랐도다 풀은 애통함을 알리 없으니 얼마나 좋겠는고 우리는 너희만 못하여 근심을 견딜 수가 없는도다
*우우(憂虞): 근심하고 걱정함
비가십수 9수
두문불출하게 된 이 보잘 것 없는 자신이 임금님의 은총밖에 멀어지니 오색 구름이 찬란히 떠도는 저 깊은 곳에 자리한다는 왕도가 그리운들 소용이 없음을 모르지 않는 송암이다. 인조의 은총밖인 하늘 밖에 멀리 떨어진 우졸의 몸이 되어 왕도가 있는 서울을 바라보니 모두가 일진광풍이다. 생각해도 하염없고 소용이 없는 현실이다. 이상의 갈림길에서 송암의 붓은 망설여지기만 했다. 두보의 '애강두' 난구에 "황혼호기진만성 욕왕성남지남북" 그대로였다. 임 계신 북두성은 바라다 볼수록 눈은 흐려지기만 했다. "바람이야 물결이야 어둥졍 핀져이고"가 문제 아니였다. 차라리 눈을 감고 붓을 놓아야 했던 송암 이였다.
[해 설]
조그만 이 한몸이 먼 곳에 떨어지니 오색 구름 깊은 곳에 어느 곳이 서울인고 바람따라 굴러다니는 검불처럼 갈 길 몰라 하노라
*묘연(渺然): 아득하다 *천애(天涯): 하늘의 끝, 아득히 멀리 떨어진 타향 *오운(五雲): 오색 구름 *장안(長安): 중국 한(漢), 당(唐)나라의 수도, 여기에서는 왕도가 있는 서울을 의미 *전봉(轉蓬): 가을에 뿌리가 뽑히어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쑥. 여기에서는 임금과 왕세자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힘없이 이리저리 떠다니는 검불에 작가 자신의 처지를 비유
비가십수 10수
병자국치의 비운에 대해서 잔말하는 어리석은 것들을 노나라의 우환을 걱정한 여인으로 비유한 것이다. 그러한 비가를 누가 귀담아 듣고 슬퍼하겠는가. 어느 누구도 슬퍼할 사람이 없는 비가를 부르느니 차라리 한잔의 탁주로 시름을 풀어 보자는 것이다. 단 한잔의 탁주라 해도 그 농도는 자연의 풍류를 즐기거나 이백의 시처럼 인생무상과 늙는 것이 서러워서 장취하도록 마시는 술이 아니라, 병자호란 비극이 안겨다 준 고한 을 씻기 위해서 마시려는 술인 것이다. 파수의 술이요, 망한의 술인 것이다. 차라리 '청산별곡'에 견주는 송암의 결론이다. 정상의 심사로는 견디기 어렵고 원억의 자존으로는 전혀 안정을 가져올 수 없었던 것이다.
[해 설] 이것아 어린것아 부질없는 말하지 말려무나 칠실의 슬픈 노래를 누가 귀담아 듣고 슬퍼하랴 어디서 탁주 한 잔에 이 시름을 풀어볼까 하노라
*기어(奇語): 말하여 부탁함 또는 말을 기별하여 보냄 *치해(癡孩): 어린 아이 *칠실(漆室): 제 신분에 넘치는 일을 근심함을 의미, '칠실지우'라는 고사에서 인용. 중국 노나라의 칠실의 한 여자가 나라의 일을 근심하던 끝에 목매어 자살한 고사에서 나온 말. (칠실은 아주 깜깜하고 어두운 방이라는 설도 있고, 중국 노나라의 작은 고을의 지명이라는 설도 있고, 왕실을 말한다는 설도 있음)
제가 감회
[해 설]
제가감회 (비가십수를 지은 감회)
십수를 불러 바치나 누가 죽지 못한 신(臣)을 가엾게 여기겠는가 스스로 읊고 스스로 화답하니 수건에 눈물 젖음을 깨닫지 못하노라
참고문헌 1. 이정환(李廷煥),『송암유고(松巖遺稿)』. ('비가십수'의 출전인 '송암유고'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원본을 소장하고 계신분이 있다면, 소중한 가치를 위해서라도 널리 공개해야 할 것이다) 2. 양순필,「이정환의 비가연구(悲歌硏究)」,건국대학교대학원 박사과정논문,1976. 3. 이은상,「병란과 시조: '비가' 소개를 기회로」,『동아일보』,1931년 5월 16일. 4. 양희철,「<방진산군수가>식 대칭표현형 연시조들의 해석」,인문과학논집 제42집,청주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2011년 2월,p.119-125. 5.『전주이씨족보』. 6.『효행등제등록(孝行等第謄錄), 효자정문질(孝子旌門秩)』,예조,1655년(효종6)~1788년(정조12). 7.『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韓國精神文化硏究院)』. 8. 남구만(南九萬 1629~1711),『약천집(藥泉集)』제21권,한국고전번역원. 9. 이세구(李世龜 1646~1700),『양와집(養窩集)』책10,家狀(上),한국고전번역원. 이세구(李世龜 1646~1700),『양와집(養窩集)』책10,家狀(上). 해설(성하주 역) 10.『사마방목(司馬榜目)』,한국학중앙연구원. 11.『공주읍지』.
한국 고전번역원의 행장 기록
家狀[上] 有明朝鮮國故成均生員李公行狀
公諱廷煥字輝遠姓李氏。完山人也。遠祖良厚公伯由佐我太祖。爲開國功臣。兵曹典書封完城君。世有簪纓。傳五代止諱穆能文章。有忠孝大節。以太學生杖女巫之承東朝旨祈禱碧松亭者。名動一時。又請烹權臣尹弼商。竟爲其所搆。與金濯纓馹孫同歿於戊午史禍。官至永安南道評事贈吏曹參判。儒林俎豆之。評事生諱世璋江原道觀察使。以淸白孝友世其家。是公高王考也。曾王考諱鑾贈戶曹參議。王考諱久洵金山郡守贈議政府右贊成。考諱格長興庫奉事。階通訓大夫。娶高靈申氏贈戶曹參判諱潑女。以萬曆甲辰七月日生公。公少長自知力學。有聲塲屋間。 崇禎癸酉中生員試入太學。見者期以遠到。州閭貢其行。銓曹屢擬齋郞而竟靳天點老草莾。辛亥四月二十三日。卒于公州堂洞之舍。壽六十八。是年十月。葬于里南滿子洞坤坐原。公氣質溫粹。志尙端潔。而誠孝根於天賦。事親能養志。甘旨之奉。必手自供之。不肯任婢使。專心溫凊。愉愉怡怡。奉事公晩有篤疾。委身床席。公藥必先嘗。衣不解帶。憂惶焦惱。左右扶將。兩眼眵昬幾失明。製布囊 盛小豆柱額。坐而達曉。如是者三四載。里閈亦罕面焉。嘗糞禱辰。靡極不用。疾旣病。刲股以進得少延。人皆歎其至誠。丙子遭喪。値北虜入冦。擧國奔竄。公背奉木主。 手扶偏母。艱關草棘。雖顚沛之際。亦不廢饋奠。亂定又遭內艱。六年持喪。未嘗脫衰絰。欒欒深墨。幾至滅性。朝夕必省墓。手鋤塋草。每頓踊啼號。哀動傍人。吊者皆悽咽。退而嘖舌曰孝哉李某也。服闋之後。唯盡心享祀。以追養繼孝。每當諱日。必前期一月不出入。專精齊宿。致其誠愨。 其具物也稱家之有無。不苟求其多品而務爲潔凈。其祭也內外執事。必使梳洗澣濯。 毋敢慢褻。堂室之事。僾然肅然。如聞如見。先世祭祀則家法本輪行於諸房。故不得自由。隨力所及。曲致誠意。嘗家有痘疫。俗忌祭享。而公行之如禮。俄而庶子痘死。鄕里譁然以爲行祭之咎。公不爲動。孝敬之實。推而爲敦睦之行。事諸父如事先公。待姊妹甚篤。先妣服御之物。盡散而與之曰手澤尙存。何忍自私也。每日躬候諸父。姊氏居一日程。亦月一拜焉。雖有疾必替人往候。不以寒暑風雨少怠。若得滋味。雖微細必先進諸父。次及姊氏。不敢輒嘗焉。嘗侍仲父病。躬執藥餌。夜以繼晝。疾已復常 從父弟爲人所誣將抵罪。官吏盛怒。公親進公庭泣白寃。請與同罪。官吏感其誠。皆改容咨嗟。遂得免於辜。族大而衆。人品不齊。接之難得其宜。公一心誠謹。務爲含忍。而尊卑踈戚。各有分限。簡正而有恩義。鄕人或爭是非質於公。事有不合義者。公未嘗辨。但嘿然。鄕黨宗族皆敬憚之。無一人敢爲彼此言者。交際之間。亦未嘗呼字笑謔。久而愈敬。當食聞人之喪則雖踈賤必却肉。又於是日吊則不肉曰惻隱所發。自不得不尒也。我從祖寺正公於人少許可。嘗與諸長老評之曰李某玉刻心膓。人所不及。公平居姁姁。待人欵曲。不見畦畛。雖臧穫專掩其細過。未嘗加聲氣詬怒。然操履敦確。遇事剛果。言論正直。無所回互。尤齋宋相國同春宋尙書年輩相近。居在隣邑。尤齋則又是同榜上舍。皆素相敬重而亦不曾數數。同春嘗欲卜葬於廢校舊址。詢一鄕章甫。皆同聲以許。公獨難之曰儒生祗可守校。至於廢址則自有官吏主之。非儒林所可許。春翁初未曉其意。及相對語。釋然稱可。尤齋聞而語人曰吾素知其行高。亦不識其所守之確至於如此也。盖公之柔而能剛。見於行事者多此類。亦可以槩其餘也。家素淸貧。麁糲屢空。而處之晏如。無所營爲。雅性蕭灑有出塵之想。而不喜飮酒。好種嘉卉。園池水樹。整凈潔芳。婆娑自樂。哦咏其間。優哉游哉。聊以卒歲。顯廟丙午幸溫泉。詢訪忠孝。道臣以公孝行聞。特命賜米褒嘉。今上辛酉。因御史書啓。又命追㫌其閭。盖自丁丑以後。北虜僭竊。天壤易處。公絶意世事。不復應擧。杜門不出者殆四十年。有悲歌十首。以寓感慨之意。然未嘗自標致。常語家庭曰吾連喪怙恃。禍重創巨。乃覆載間一罪人。是以無意於進取也。鄕里稱之曰公孝子也。祿不及養。故自附毛生不應徵辟之義。號爲知賞者則曰夫夫也。素048_365d性恬澹。雅有高致。蒔花灌木。樂而忘老。公旣鏟光晦彩。無求於世。世亦不知公。只以孝行名。公歿之後十五年。公之仲子郡守公手錄公事行生卒月日。泣而語其內弟月城李世龜曰。吾先子有至行潛德。而生不顯於世。歿宜求銘於當世有言之君子。章揭墓道。以詔後昆。而尙未有考行之狀。遺孤不肖無以爲役。子其圖之。辭不獲。謹追狀其行最而論之曰。公蘊出人之行而未嘗自有。抱高世之義而人莫能識。世皆逐逐。我獨閒閒。雍容自珍。歿而無悔。眞所謂篤行節孝君子也。斯可以優於高士傳矣。世龜少時嘗拜公。言語簡重。擧止端莊。一見可知如玉其人。質而不華者也。公娶我仲姑。實慶州李氏鐵原府使贈鰲興君兵曹參判諱星男之女。領議政鰲城府院君贈謚文忠公白沙先生諱恒福之孫也。克配賢德。母有多子。先公三十五年丙子十月二十九日卒。祔于公同墳異穴。子男四人女一人。長曰基慶娶進士蔡弘俊女生三男三女。男景卨,景禹,景說。次曰基定武科郡守。卽乞狀者。娶士人洪頤道女生三男。景尹,景泌武科,景廸。次曰基昌娶士人南大勳女生四男六女。男景璿,景禹,景瓛餘幼。季曰基亨娶同知洪時挺女生二男三女。男景晟武科宣傳官,景亮。女閔致重妻。生二男一女。男鎭嵩縣監,鎭喬。側室有五男一女。基業,基績,基宇,基德,基寧。女爲武科黃嵓妻。內外孫曾揔數十人。不能盡錄。
비가십수 작자 ; 이 정 환 (李廷煥 1604년 7월 1일 ~ 1671년 4월 23일)
父 - 挌 (봉사공)
祖 父 - 久洵(찬성공)
曾祖父 - 鑾(참의공)
高祖父 - 世璋(청백리,암행어사, 감사공) 부친 정간공의 절의와 정간의 정신으로 초지일관 일관하여 평생을 청백리로 살았다. 강원도 도민이 감사의 선물로 목도질 하여 선물한 '괴석'은 청백리의 삶을 증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공주 선생 묘 아래 소재,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 경사동) 투선나루, 물래고개의 전설도 청백리의 삶을 나타내는 설화이다. 玄祖父 - 穆 (호; 한재, 행; 영안남도병마평사,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대제학, 시호; 정간공) 문집; 이평사집<천도책, 등용인재책, 다부, 허실생백부 등이 실림> 무오오현의 한분으로 정간지사로 유명하고 한국최초로 차에 관한 장시 '다부'를 지어 차의 아버지(다부) , 다선으로 추앙됨, 한재당(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 충현서원(공주시, 공암리) 황강서원(전주시, 양후공 선형 묘원)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 삼효정려(三孝旌閭)
▲ 만자동(滿子洞) 마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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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8. 21:29ㆍ茶詩
공주시우성면내산리 경사동(서울 선비마을 소재 괴석)
副提學李公墓庭怪石銘 幷序
昔在明宗朝 副提學李公世璋 按關東節 淸簡爲政 上親書 淸白二字 以褒之. 遞歸吏民遮道 峕値署月 有獻一扇者 峕 - 時의 古字 公投之于江 因稱投扇江. 夫人以樔綿機隨之 公曰 一扇尙投 況此乎 亦使棄之.
路傍關民 無以報公淸德 乃以公所愛之怪石 運致公第 公沒 再運墓庭云 根培炳璇 謂余爲公外裔使銘之
銘曰;
惟此怪石 勿毁勿穢 匪石之美 明府所愛. 民自運之于公墓側. 聞風百世 永昭淸德. 石可泐也 公名不沫. 泐돌갈라질 륵 凡厥有位 是程是式.
外裔昌山成九鏞讚 韓山李世燦書 癸巳 四月立
옛날 명종조에 부제학 이세장이 관동(강원도)관찰사가 되어 淸簡하게 다스리니 임금께서 친히‘淸白’두 글자를 써서 표창하였다.
퇴임하는데 관민이 길을 막았다. 때는 여름날이라 부채하나를 바치는 사람이 있었는데 공은 강에 던져버렸고 그런 까닭에 ‘투선강’이라 불렸다. 부인이 물레를 가지고 따랐는데, 공이 이르기를 ‘부채 하나도 버렸는데 하물며 이것은’ 하고는 또한 버리게 하였다. <물레고개 전설> 길가의 관민이 공의 淸德을 갚을 길이 없어 공이 사랑하던 괴석을 공의 집에 운반했다. 공이 돌아가신 후 묘정에 옮겨 놓았다.
내가 공의 外裔가 된다고 하며 명(銘)을 하라고 하니,
銘하기를 ;
오직 이 괴석을 훼손하지도 더럽히지도 마라. 돌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공이 사랑해서 이니라. 백성이 스스로 공의 묘소 곁에 운반했노라. 풍도는 백세에 들릴 것이요, 淸德은 영원히 빛나리라! 돌이야 부서질 수 있으나, 공의 이름은 다함이 없으리라! 무릇 관직에 있는 사람들아! 이를 본받고 법으로 받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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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寒圖 跋文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畊文編寄來. 此皆非世之常有.購之千萬里之遠 .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趨爲之 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稿之人 如世之趨權利者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以交踈.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 太史公之言非耶. 公子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 松柏是毌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柏也. 歲寒以後一松柏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由前而無可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 君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 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邳榜門 .迫切之極矣悲夫. 阮堂老人書
세한도 발문 지난해에 晩學 大雲 두 책을 부쳐오고 금년에는 또 藕畊文編이라는 글을 부쳐오니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 아니요 천만리 먼 곳에서 구입한 것으로 여러해 걸려서 얻은 것이라 일시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또한 세상의 도도함이 오직 권세와 이익을 추향해 일삼는데 마음을 쓰고 힘을 씀이 이 같이 하고 권리로 돌아가지 않고 이에 바다 밖의 한 초췌히 매마른 사람에게 돌아옴이 세상의 권리를 추향하는 자 같다.
태사공이 이르기를 권리로 합한 자는 권리가 다하면 사귐이 성글어 진다했는데 君도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의 하나로 그 초연히 도도한 권리밖에 스스로 뽑아나니 권리로 나를 보지 않음인가 태사공의 말이 틀린 것인가?
공자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진 연후에 솔과 잣의 나중에 시듬을 안다 하였으니 송백은 사계절을 통하여 시들지 않는 것으로 세한 이전에도 한결 같은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한결 같은 송백인데 성인은 특히 세한 이후를 일컫고(칭찬) 지금 君의 나에 대함이 전부터도 더한 것이 없었고 이후로 말미암아도 덜한 것이 없다
그러니 이전부터 말미암던 君을 일컬을 것이 없어도 이후로 말미암는 君은 또한 성인이 말한 것에 가히 일컬을 수 있을 것인가 성인이 특히 일컬은 것은 단지 나중에 시드는 貞操와 굳센 절개됨만 아니라 또한 歲寒의 때에 느껴 말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호! 서한의 순박한 두터운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의 어짐으로도 賓客이 더불어 盛하고 衰하고 하비 방문 같은 것은 박절한 것의 극이로다. 슬프다. 완당 (추사 김정희) 노인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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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廟朝 致祭文 幷附
嘉靖四十一年壬戌 四月 甲寅朔七日庚申 國王遣臣 禮曹佐郞黃廷彧 賜祭于 護軍李世璋之靈曰;
星辰聚精 山岳降神 廉潔稟性 朴素持身 小事詩書 晩通桂籍 始仕于朝 歷敭淸秩
翰苑秉筆 董狐之直 薇垣殫論 周舍之諤逮 侍經幄輔養君 德秉直柏 府克振朝綱
再入銀臺 夙夜靡遑 惟允出納 克迪贊襄 按節關東 宣化一方 咨詢原隰遣愛甘棠 惟內惟外 靡不盡職 于始于終 祗守淸白 令聞不替
期升宰列 何意微蛘* 遽爾不淑 *(蛘+心) 予懷之慟 曷其有極 聊奠菲薄 庶幾歆格
명종대왕이 제사를 올리는 글
가정사십일년 명종 십칠년 서기 천육배오백육십이년 임술 사월갑인 삭 칠일 경신에 국왕이 신하인 예조좌랑 황정욱을 보내어 호군 이세장의 영전에 제사하여가로되;
하늘의 별이 정기를 모으고 땅이 모든 산악에 신을 내린지라 청렴결백한 품성을 받았고 질박하고 검소하게 몸을 갖으시고 젊어서는 시전 서전을 일삼고 늦게는 벼슬하는 기록에 이름을 통하니 처음 조정에 벼슬해서 청렴으로 벼슬로 드날렸도다. 한원(한림원)에붓을 잡으니 동호의 직필과 같고 미훤(정서성)에서 의논할 것을 모두 의논하니 주사의 곧은 말과 같더라. 경연에서 임금을 모심에는 임금의 덕을 도와서 기르게 하시고 백부(사헌부)에 곧음을 잡아 능히 조정기강을 떨쳐 진작하였다.
재차 승정원 벼슬을 하심에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여가가없으시고 오직 임금의 명령을 살피셔 임금을 도와 백성 다스림을 편안하게 하였다. 관동의 감사가 되심에 한지방의 덕화를 베풀고 방방곡곡의 민심을 살펴 감당나무에 사랑함을 지키시고 선한 소문이 조금도 폐하지 아니하였다.
재상의 반열에 오를까 기약했더니 어찌 조그마한 질병이 문득 선치못함을 뜻했으랴, 나의 생각에 애통함이여! 어찌 다 함이 있으리오. 부족하나마 제물을 드리오니 흠향하소서!.
<이 제문은 명종대왕이 청백리에 녹선되시고, 암행어사 이시고, 교리를 3번이나 역임하신 청백리 이 세장 선조가 모친(예안김씨)의 사후 시묘 과정에 얻은 병으로 돌아가시자 충신에 대한 예로 제문을 내린 것이다. 불굴의 정신과 정직의 대명사이며 정언으로 이름을 날리고 무오사화에 요절하신 정간공 寒齋 李 穆의 2세 이기도 하였거니와 조선 중기 이후의 대표적인 청백리로서 청백리와 얽힌 투선나루의 전설이나. 강원도 도민이 보내준 괴석이야기, 물래고개 전설 등은 유명하다. 모부인 예안김씨의 상을 당하여 장례를 치르기위해 지인이 문상하니, 너무나 청빈하게 산 나머지 집에는 방 네 귀퉁이밖에 없어서 '부의'를 하여 장례를 치렀다. 이때부터 관원들이 賻儀를 하는 관습이 청백리 李世璋부터 시작되었다고 청음 김상헌 선생이 찬한 이세장 의 아들 도승지공 鐵의 갈찬에 씌여있다. 선생은 스스로 낙향하여 지금은 세종시로 변한 공주시 장기면 당암리 인근의 독새부리에서 낚시를 즐기며 아호를 錦江漁叟(금강가에 고기잡는 늙은이)로 하고 부친이 귀양살던 금강가에 안착하였다. 그 이후로 이세장의 후손이 공주 일대에 많이 세거하는데 데데로 청백리 집안이라 그런지 몰라도 모두 빈한하게 살고, 장 차관을 하는 사람이라 하여도 겨우 집 한채 덩그런 정도이다. 몇 십억을 공금을 횡령하고, 툭하면 재료를 빼돌려 부실공사를 하고, 이권에 개입하는 정치가나 관리들에게 이 세장 선조는 500년 전에 '무릇 관리는 이런 것'이라는 표본을 보여주셨다. 아 슬프다. 세상이 변해도 사람의 마음이 변하지않는 것은 역사의 인물에서만 찾아야 하는가? 오늘, 이 땅에 이 세장 선조같은 분은 정녕 없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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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번의 주인이 바뀌는 운명적 국보세한도에 관한 시 모음
세한도 첫 번째 주인 우선 이상적(藕船李尙迪)
홍성남 시인
세한도 받아든 우선의 눈물 스승에 대한 그리움인가 부패한 조정 향한 분노인가 빗물 되어 저절이 흘렀다
추사 칭찬 어쩔 줄 몰라 권세와 이익 따르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세파(世波)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초연함 성찰의 고백으로 말했다
만하집 대운산방집 황청경세문편 스승 계신 제주도로 보낸 일 구구한 작은 마음에서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어 마음 따라 그리했다 말했다
선비의 몸 같은 서책(書冊) 어지러운 권세 맞지 않기에 저절로 맑고 깨끗한 곳 찾아 제자리로 돌아간 것 뿐 다른 뜻이 없다 말했다
조정 미움과 권력에 밀려 유리안치 된 스승 돕는 일 후안 두려워 엄두 못 낼 때 변치 않는 의리의 고마움 갈필의 세한도 그리게 했다
발문에 속마음 드러낸 추사 잘 살다 못살아 보면 주위 인심 알 수 있는데 예전 처세 칭찬할게 없으나 지금 처신은 어느 성인도 칭찬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한도 두 번째 주인 매은 김병선(梅隱 金秉善)
믿고 따르던 스승 우선 이상적 떠난 자리 메울 길 없던 허전함 세한도 맡아 길이 전하란 유업 충실히 받든 제자 매은 김병선
생전 역관 인연의 스승과 제자 우선이 추사에게 했던 것처럼 매은도 우선에게 오롯했기에 믿고 맡기며 떠 날 수 있었다
세한도 두 번째 소장자 매은 스승이 지키려던 추사의 뜻 시(詩)서(書)화(畵) 몸짓으로 아들 소매 김준학에게 물렸다
추사 삼천 제자 중 우선이 최고 우선의 제자 중에는 매은이 으뜸 추운 시절의 사의(寫意) 세한도 최고의 제자에게 물림 되었다
세한도 네 번째 주인 하정 민영휘(荷汀 閔泳徽)
세한도 네 번째 소장자 민영휘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 모르나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자격 없는 이 만나 떠도는 기구한 운명 시작 되었다
친일 행적 세한도와 떼어 보려해도 소장 과정 알 수 없고 대접도 푸대접 하나를 보면 열 안다는 말 그르지 않다 친일파와 민씨척족세력가 탐욕에는 나라 보물의 가치 보이지 않았다
물려받은 친일 아들 민규식 세한도 모르는 건 아비 닮아 베이징의 골동상에 내놓았던 후지츠카 치카시에게 팔았던 소장 자격 없는 이들 이었다
세한도 다섯 번째 주인 민규식(閔奎植)
길고도 긴 친일 역사 대물림 한 친일 정신 민영휘 막내로 태어나 세한도 물려받았지만 세한 정신 알 수 없었다
삼청동 한옥 구들에 누워 친일단체 중추원 참의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여 조선임전보국단 기금 제공 대를 이은 친일은 찬란했다
친일재산 환수 온몸 저항 독립운동가 일제 온몸 저항 온몸 저항 같지만 몰염치와 구국으로 갈렸다
친일파 자손 3대 부귀영화 독립운동가 자손 3대 고통 이제는 잘못된 역사의 고리 세한 정신으로 끊을 때다
세한도 여섯 번째 주인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
경성제국대학 교수 후지츠카 치카시 청조(淸朝) 경학(經學) 접한 후 고거학(考據學)으로 경의(經義) 재평가 청나라 학자 경해(經解) 원간본 만권 한묵수찰(翰墨手札) 다수 수집 세한도 여섯 번째 소장 그리 되었다
추사와 완원과 옹방강 학연 쫒아 청조 경학 동전(東傳) 양상 고증 한중일 문화 교류 밝힌 경학 선비 청조 학인들 박제가 높은 평가 영향 박제가 김정희로 이어진 학연 연구 추사와 세한도 인연 그리 맺었다
떠날 때 손재형 간청 뿌리쳤지만 현해탄 너머 온 진정 받아 들였다 전쟁 생활고에 수집 자료 내 놓아
일부 먼 길 돌아 한국에 왔음에도 세한도 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추사 연구의 첫 정 오롯이 지켜냈다
후지츠카 치카시 추사 향한 연모 대를 이어 한 송이 꽃으로 피었다 후지츠카 아키나오 부친 뜻 이어 추사 친필과 자료 2700여점 기부 추사연구 기금으로 200만엔 기탁 과천 추사박물관 건립 동인되었다
선비의 고집과 자존심 전형 보여 준 후지츠카 치카시와 아들 후지츠카 아키나오 세한도와 맺어진 후지츠카 부자의 인연 승천으로 만날 수 없어 그들 향기 따라 추사박물관 후지츠카 기증실 관람하며 북한산 바라본다는 고결한 선비의 당호 망한려(望漢廬) 뜻 새겨 기리며 장무상망
세한도 일곱 번째 주인 소전 손재형(素筌孫在馨) 세한도 일곱 번째 소장자 손재형 서예가이자 최고의 서화수집가 나라 보물 일본으로 갔다는 탄식 세한도 찾겠다는 일념 현해탄 건너 폭탄비 내리는 동경 거리 걸었다
병석의 후지츠카 조석으로 문안 세한도 넘겨 달라 간청 했다 냉담하던 후지츠카 3개월 졸라 내 죽은 후 주겠다는 말 받고 추사 연모의 눈물 한없이 쏟았다
후지츠카 다시 조른 손재형 이왕 줄 것이면 지금 주세요 죽음도 불사한 정성과 간청 마침내 후지츠카 닫힌 맘 열고 세한도 간직할 자격 있다 했다
노환의 추사 연구 학자 후지츠카 선비는 아끼던 것 값으로 따질 수 없어 어떤 보상도 받지 않겠으니 보존만 잘해 달라 부탁 했다 추사 후지츠카 손재형 그리 통했다
손재형 초례 전날 밤의 열뜸으로 나라 보물 보고 또 보며 날 밝혔다 세한도 귀국 석 달 후 후지츠카 서재 폭격 책 서화 방대한 자료 한줌 잿더미 기적처럼 운명처럼 살아남은 세한도
주인 만나 평안한 안식 취하는 듯 했지만 손재형 국회의원 출마로 다시 떠도는 운명 금전 초월한 선비와의 약속 저버리고 선거자금 쪼들리자 사채업자에 저당 국회의원 낙선 세한도 찾을 수 없었다
민족대표 33인 위창 오세창 대한민국 초대부통령 이시영 독립운동가 국학자 위당 정인보 발문 받은 뒤 여백 남겨 또 다른 발문인 기다렸지만 보지 못하고 발문 이어지는 전통 끊겼다
진정성으로 찾아 온 세한도 애정과 염원 세인(世人)의 정치 욕망보다 적었던 것일까 저당 잡힌 발상과 명분 인간적인 실수 살아생전 내리친 가슴에 벌겋게 든 피멍 추사 우선 후지츠카 모두 용서 할 겁니다
세한도 여덟 번째 주인 이근태
골동품 저당 잡고 돈 빌려주는 사채업자 잠시 맡아 둔 세한도 여덟 번째 소장자
귀한 보물인 줄 알고 적잖은 돈 빌려 주었지만 세한도 정신과 가치 모른 아둔한 사람
세상 보는 잣대 돈 이었기에 다행 이었다 문재(文才) 있어 그 가치 알았다면 세한도 운명 달라졌을 것이다
만나야 할 사람 만나듯 세한도 그대 금고 벗어나 서화수집가 손세기에게 갔기에 대한의 후손들이 볼 수 있었다
세한도 아홉 번째 주인 석포 손세기(孫世基)
이재(理財)와 문재(文才) 밝았던 개성 거상(巨商) 석포 손세기 고미술품 수집하다 만난 세한도 아홉 번째 소장자 되었다
남의 돈으로 장사하지 말고 업종 정했으면 한 눈 팔지 말고 목숨 잃더라도 신용 잃지 말고 능력 없는 자식에게 대 물리지 말고 잘사는 나라 만드는데 협력하는 개성상인 5계명 터득한 석포
석포의 근면과 투철한 상혼 민족자본 형성 외국자본 대항 최순우 전해종과 문리(文理) 인연 조선시대 고서화 209점 기증 서강대학교 박물관 만들었다
세한도 누구에게 전해 보존 할까 문리(文理) 깨친 아들에게 물렸다 부친의 뜻 절절이 받은 손창근 세한도 국보 제180호로 만들어 모두의 품에 온전히 안겨 주었다
세한도 열 번째 주인 손창근
석포 손세기 아들로 태어나 이재(理財)와 문재(文才) 갖춰 문리(文理)까지 터득한 손창근 세한도 국민의 품에 안겨줬다
문화재급 예술품 300여점 소장 세한도 받은 후 문화재 열정 한국 서화 연구 공부에 몰두 국립중앙박물관에 연구기금 1억원 조선시대 명화 80여점 위탁보관 손세기 손창근 기부 DNA 대물림
서울 남산 면적의 2배 산림 1천억원대 임야 국가에 기증 손창근 기부 철학 두 가지 언론에 절대 공개하지 마라 온전히 보호하고 관리 하라
조건과 단서 없이 내주는 비움 모습 드러내지 않는 기부 몸짓 부강 보다 가장 아름다운 나라 문화의 힘이 한없이 높은 나라 그가 원하고 만들려는 나라이다.
세한도 운명1 홍성남
세한도 운명
너의 운명은 무엇이었느냐 누구나 자기 운명 만드는데 태어 날 때 곤고하더니 초년고생 벗는 듯 했다 누가 내일의 운명을 알겠느냐 네 번째 주인 민영휘 벽장에 갇혀 세한 정신 죽으매 그리 울더니 모두 함께 행복한 운명이란 없듯 후지츠카 치카시 갖음에 웃고 나라 보물 잃음에 손재형 울었다
첫 번째 주인 우선 이상적 세한도 스승으로부터 받아 청나라 여러 학자로부터 제문(題文)과 발문 받아 두루마리 표구로 만들어 스승에게 전해 의무 다했다
두 번째 주인 매은 김병선 스승 이상적에게서 물려받아 우선이 추사 뜻 잘 받들었듯 스승 우선의 마음 잘 새겨 아들 소매 김준학에게 물렸다 운명은 알기도 전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세한도 운명 풍찬노숙 유랑 시작 되었다
세 번째 주인 소매 김준학 잘 보관하겠다는 선친과의 약속 지키지 못한 불민한 아들 되었다 세한도 끄트머리에 감상기 적는 경솔함 보이더니 일 그르쳤다 추사와 우선과 매은의 정신 잇지 못한 이유도 남기지 못했다
세한도 운명2 네 번째 주인 하정 민영휘 세한도 친일 집에 가던 날 새장에 갇힌 새처럼 벽장에 갇혀 내내 울었다 소매 떠나 올 때 감지한 운명 참고 견디리라 마음 굳혔다 친일의 권력으로 훑은 재산 오늘날 재벌도 울고 갈 축재 세한의 정신 모르는 친일파에게 세한도는 그저 골동 이었다
다섯 번째 주인 삼청장의 민규식 세한도 부친이 주니 그냥 받았다 세한의 정신 모르기는 마찬가지 벽장에 가둬 놓기 불편 했던지 꺼내 아무데나 휙 던져 버렸다 여섯 번째 주인에게 가기까지 세한도는 눈물로 그리 뒹굴었다
여섯 번째 주인 후지츠카 치카시 민규식으로부터 고가에 샀던 베이징 골동상에서 구입했던 세한도 갖은 후지즈카 행복했다 세한의 심려 알아 본 추사 연구가 애지중지 아끼며 잘 보관했다 전시 노환으로 자리보전 중에도 세한도 보존으로 노심초사 했다 죽음 무릅쓴 소제 손재형 간청 보전만 잘해 달라는 후지츠카 무상 증여로 비움 경지 보였다
세한도 운명4 일곱 번째 주인 소전 손재형 나라 보물 찾으려는 일념 거금 들고 전시 현해탄 건넜다 세한도 가져 온 기쁨 벅차 오세창 이시영 정인보에게 보여주며 글을 받아 붙였다 극진한 대접에 즐겁던 세한도 자기 운명에 만족하며 웃었다 후지즈카와 약속 지키겠다던 손재형 세한도에 불경 저질렀다 국회의원 선거 자금 마련 위해 사채업자에게 덜컥 저당 잡힐 때 새한도 서러움에 그리 울었다
여덟 번째 주인 사채업자 이근태 운명은 스스로 개선하지 않으면 아무도 개선시켜 주지 않는데 한치 앞도 알 수 없던 세한도 추사의 조그마한 한 점의 그림
미술수집가 손세기 200원에 구입 국보 제180호로 지정될 줄 몰랐다 당시 2천만원 오늘날 20억원 문리(文理) 몰라 가슴 친 이근태
아홉 번째 주인 된 석포 손세기 미술소장가로서 세한도 가진 기쁨 아들 손창근에게 대물림 했다 일찍이 미술품 소장 의미 알고 조선시대 고서화 209점 기증하여 서강대학교 박물관 만들었다 아들 손창근에게 세한도 물리며 문리(文理)의 이치 깨닫게 했다 돈 잘 쓰는 품성이 무엇인지 보여준 인물로 후세에 남았다
세한도 열 번째 주인 손창근 국립중앙박물관에 세한도 기탁 국민의 품에 돌려준 가풍 품격 물려받은 고가의 수많은 미술품 한국 서화 연구에 몰두한 열정 비움 경지 맞으며 하나 둘 기부 기부문화 선도하는 아버지와 아들 평생 가꾼 1천억원대 산림도 기부 모습 드러내지 않는 실천의 철학 세한도의 세한 정신과 가치 아는 주인 품에서 평안한 휴식 취하며 가끔씩 국민에게 안부 전한다
장무상망(長毋相忘)
창문하나 그려진 조그만 집하나 고목 가지 듬성듬성 잎 매달고 비스듬히 기대 선 소나무와 잣나무 보기에도 쓸쓸하고 초라한 그림 기운 두 소나무 추사와 우선인가
추사 갈필로 우선시상이라 쓰고 숨 죽여 인장(印章) 하나 찍었다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는 장무상망 그대 마음 오래도록 잊지 않겠네 그대 또한 날 영원히 잊지 말게나
중국 섬서성 순화에서 출토 된 한조 와당에 전서로 쓰인 글귀 추사 울게 한 우선의 의리와 절개 지식인의 사귐과 몸짓의 표상 그들은 무얼 잊지 말자 했을까
<참고자료 > 추사와 우선 ■우선 이상적(李尙迪 1803~1865) 이상적은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중인 출신인 그는 스승 추사의 영향을 받아 금석과 고증학에 조예가 깊었다. 정조와 순조 등의 국조보감(國朝寶鑑)을 교정 간행할 정도이었다. 그의 문집 은송당집은 출신의 차별의식 때문에 국내에서 발간하지 못했다. 청나라의 오찬이 주선하여 연경에서 발간했다. 12회나 사행으로 다녀오고 비서성에 재직했다. 철종 때는 온양군수로 부임하기도 했다. 그의 문집 24권 안에는 750여편의 글이 전하는데 차에 관한 것은 30여편이 넘는다. 전출(前出)한 박경로(朴景路)에게 사례하는 백산다가(白山茶歌)는 백산차에 관한 좋은 자료가 된다.
백산다가,사박경로(白山茶歌,謝朴景路) 我曾九泊燕河槎 내 일찍이 아홉 차례 연경 행차 참예하여 嘗盡天下有名茶 천하의 이름난 차 죄다 모두 맛보았지. 十二街頭茶博士 열 두 거리 길가에는 茶博士들 넘쳐나서 賣茶多於賣漿家 음료 파는 가게보다 차 가게가 더 많다네. 歸臥敝廬談龍肉 돌아와 집에 누워 龍肉을 얘기하다 手把茶經空咨嗟 손에 茶經 들고서 공연히 탄식한다. 湖僧竹露出新製 호남 스님 竹露茶 새 제품을 내 놓으니 時人往往如嗜痂 부스럼 딱지 먹듯 지금 사람 좋아하네. 秪應所貴吾鄕物 귀하게 여겨짐은 우리 것임 때문이니 終始香味澁齒牙 애당초 맛과 향은 이빨 사이 떫기만 해. 不咸一網感君惠 불함산의 一綱茶를 그대 줌에 감사하니 天寒肺病當三椏 찬 날씨 폐병에는 인삼만큼 효과 있네.
誰知此士乃有此 이 땅에도 이런 것이 있을 줄 뉘라 알리 譬如人才出荒遐 비유컨대 인재가 먼 시골서 나옴인양. 但恨難得中泠水 안타깝다 중령수를 얻기야 어렵지만 無勞遠購武夷芽 굳이 멀리 武夷茶를 사올 필요 전혀 없네. 君不見 그대 보지 못했나 江南御茶不入貢 강남 땅의 어차를 공물로 못 바치자 旗槍埋沒隨蟲沙 창기가 매몰되어 쓸모없이 되었음을. 又不見 또 보지 못했나 泊汋年年通百貨 남쪽 배가 해마다 온갖 물품 교역해도 今秋無箇水仙花 올 가을엔 수선화가 하나도 없는 것을. 茶話故人散如雨 다화도(茶話圖) 그린 벗은 비처럼 흩어지고 烽烟已入天津涯 봉화 연기 어느새 천진 물가 이르렀네. 何幸吾生享多福 내 인생에 많은 복을 누림 정녕 다행이니 煎茶覓句送年華 차 달이고 시 지으며 세월을 보내리라. 출전:은송당집 속집 권1
백산차에 관한 기록 ◆응송(1892-1991)<東茶正統考> 한국 차문화의 발달 백산차 P.9
우리나라 차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해야 한다. 그 하나는 재래차인 白山茶와 외지로부터 전래된 綠茶다.그 중 백산차는 석남과에 속하는 철쭉 종류로써 장백산(백두산)을 중심으로 자생한다. 단군시대부터 마시던 것으로 靑朝 乾隆에는 이 백산차를 공납하라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일본에서도 삼한 정벌론을 주장했던 <武內縮禎>에도 백산차에 대한 기록이 있다.
◆정상구<韓國茶文化學>우리나라 茶史 신라이전 차 P.145
신라 이전의 茶에 관해서는 백산차가 있었다. 백산차가 있었다는 것은 청에 건륭제 때 백산차를 貢茶했다는 기록이 있다. 石南茶라는 이름으로 일본 중국 등에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吉林外記>에는 안춘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장백산에서 생산 되었기에 백산차라고 하고, 바위의 깨끗한 곳에 자랐기 때문에 석남차라고도 한다. 높이가 일장(一丈)이나 되며 잎은 버들잎 같고 제사에 쓰였다.
◆이능화(1869-1943)<조선불교통사> 하권 智異山唐茶
조선의 장백산에서 차가 나는데 이름을 백산차라고 한다. 청 건륭 때에 청나라 사람이 차를 따서 바쳐 궁궐에서 어용차로 쓰도록 하였다. (朝鮮之長白山山茶名曰白山茶 乾隆時淸入採貢 宮庭爲御用之茶)
◆석용운<韓國茶藝> 동양식 대용차 보림사P.24-28
조선의 장백산이란 백두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줄여서 <백산>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나는 석남과나 철쭉과의 나뭇잎을 따서 차를 만들어 마신다. 이것을 백산차라고 하는데 향기롭고 맛이 있어 일찍부터 제사에 사용하였던 것 같다. 제강존(諸岡存)씨가 쓴<조선의 茶와 禪>에 '백산차라 칭하여 장백산의 석남과 식물의 잎을 따서 말려서 차의 대용으로 쓰던 기록이 이곳 저곳에 있다.'
◆김대성<설록차> 1999년9/10월호 우리차그 뿌리를 찾아서 P.4-5
海東繹史에 차가 수입되기 전부터 차의 대용으로 백산차가 있었다'는 기록은 백산차에 믿음성을 주는 자료다. 백산차는 늘 푸른 관목. 진달래科 백산차屬. 꽃은 흰색이고 잎은 보통 나뭇잎과 같은 초록이다. 지금과 같은 차(작설차)가 이 땅에 심어지기 전인, 오랜 옛날부터 백두산록 일대에서 자생해 왔던 토산 식물, 백두산 근처 만주 땅에서 사는 우리 민족들이 어린잎을 따서 말려 차 대용으로 우려 마셔온 토종차로제사상에도 올랐다. '청조 건륭간에 백산차를 공납....’건륭기간이라면 1736-1795년으로 조선 영조 정조 시대까지 백산차가 생산되었다는 말이 된다. 또 청에서 발행 된 것이 1918년이니 그 무렵까지는 있었던 것이 분명한 모양이나 일제 수난 이후 백산차에 대한 발굴은 커녕 기초 조사도 어려웠던 시기였던 만큼은 틀림없다.
백산차에 관한 詩
백산차 / 홍성남
가느다란 잎새 틔우고 처절하도록 곱디고운 꽃 피우는 신선 세계의 요초 백산차
내 너를 처음 만난 날 불끈 쥔 주먹은 돌려 감기고 핏발 선 눈에선 광채가 돌아 터지려던 가슴 이내 잦아들었다
중화의 옹졸함을 꾸짖을 힘이 네게 있었기 때문 이었다
네 앞에 서면 풀 죽은 비단 이었다 너의 진한 솔향과 박하향의 고귀함은 한민족 천제의 제단에서 하늘을 부르고 땅을 다졌다
내게 맑은 영혼을 영접시켜 준 성수(聖水)이며 정한수 이었다.
백산차 그리고 막걸리 / 홍성남
추상(秋想)은 여럿 마음은 하나 막걸리 한 병 나누는 오찬에서 지인은 나직이 눈을 감고 나는 그윽이 그를 바라본다
가로수 단풍 한 잎 한 잎 내리 밀며 삶의 관조로 날 이끌어 가을 서정에 푹 밀어 넣으니 멍하디 멍한 멍상에 빠진다
님의 입술 같은 홍단풍에 명상 낚여 탁배기 울리는 막걸리에 깨고 찻잔 입술 훔치는 백산차에 화들짝 놀라 가을비 소리 듣는다. |
茶詩에 관한 小考 홍성남<시인, 정치인,언론인>
東茶頌으로 본 3國의 茶詩 ▲ 초의선사가 52세 때 해남현감 변지화(卞持和)에게서 해거도인 홍현주가 차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고 지어 보낸 약 500여자 되는 책
▲ 육우의 다경으로부터 10여개의 중국 다서나 차인들의 글이고, 일부는 이덕리의 기다의 내용이며 끝으로 초의 자신의 생각을 썼다. 동다송에 대한 후인들의 평가는 상반 되었다. 윤치영은 동다송을 육우 다경에 비유하여 칭송 했지만 한웅빈과 김상현은 한국의 다경운운은 지나친 평가라고 했다. 초의 자신의 다시는 20여편에 불과하다. 水鐘寺次石屋和尙韻 -초의선사- 수종사차석옥화상운
夢回誰進仰山茶 懶把殘經洗眼花 몽회수진앙산차 라파잔경세안화 賴有和音山下在 隨綠來住白雲家 뢰유화음산하재 수록래주백운가
꿈 깨니 누가 양산차 주어 마시고, 읽던 경전 들어보니 흐린 눈 맑아지네. 그대 이 산자락에 있으매, 인연 따라 백운가에 머무른다네.
삼국의 다성 육우·초의·리큐 ■육우(陸羽 733-804) 당나라 문인으로서 최초의 차 전문서 다경을 남겼다. 차의 성인을 넘어 차의 신선인 다선(茶仙)으로 추앙 받는다. 차라는 용어와 차의 유래, 마시는 방법, 필요한 도구들과 차의 정신 등 모든 것을 집약 했다. 그리고 새로운 차 문화 이론까지 전개했다. 동양 3국의 음다풍속과 차 문화가 다경에 시원을 두고 있는 것에서 보듯이 차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경은 육우가 48세 때 10년에 걸쳐 정리하여 탈고 했다. 38년 동안 중국 천하를 섭렵하며 체득한 차에 관한 모든 지식과 이론이 담겨 있다. 전문 7,000자로 당대(唐代)와 이전의 차에 관한 과학적 지식과 실천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중국차 문화의 기초를 확립했다. 육우는 20세 때 경릉으로 좌천 된 예부시랑 최국보와 의형제를 맺은 이후 그와 함께 시서화와 더불어 차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졌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차 여행을 떠나 당대 시인이자 차승이었던 저산 묘화사의 교연스님과 친구가 되었다. 육우는 27세 때 모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악동, 감북, 환남, 환북과 강소의 승주, 윤주, 상주 등 차구(茶區)를 유람했다. 강소 유람에서 육우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 안진경과 황보중 등 훗날 자신을 든든하게 지탱해준 지인들을 만났다. 안진경은 후일 육우를 위해 삼계정을 지어 줄 뿐만 아니라 조자겸, 황희지 등 당대 최고의 문사들과 교류도 소개했다. 육우는 단순한 차인이 아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 이었다. 저산기, 오흥도경등 많은 노작들이 이를 확인해 준다.
센노 리큐(千利休 1522-1591) 리큐는 일본 차 문화에서 다성으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차 선생이고 평화주의자로서 조선 침략을 반대했다. 단순한 차 선생을 넘어 정치와 문화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함께 했다.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71세에 할복 했다. 리큐는 이전의 화려화고 형식적인 차 문화를 일소했다. 미와 예술을 숭상하고 정신적 도의 경지를 추구하는 일본의 독특한 다도이론을 정립하고 새로운 다풍을 정립했다. 남방록이란 책을 통해 차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리큐는 일본식 다법인 초암다법(草庵茶法)을 완성하여 일본 다도를 세계적 수준으로 견인했다.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자본을 소유한 상공인 이었다. 리큐의 초암차실은차실의 역할을 떠나 통치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담론의 장 소 이었다. 통치 행위의 기반이 약한 막부의 통치 이데올로기의 공백을 메워 주었다. 무사들은 차실에서 자유롭게 정치적 담론을 형성 할 수 있었다. 초암차실은 문화 아카데미의 역할을 한 장소로서 정치와 자연 그리고 차와의 절묘한 배합을 이뤄 냈다.
■ 초의(草衣 1786-1866) 초의는 선을 수행하는 스님으로 시인이었다. 수행의 최고봉인 선과 교를 두루 섭렵하여 대흥사 13대 강맥을 이었다. 탁월한 금어(金魚-불화를 최고의 경지에서 그리는 스님)이자 선필(仙筆) 이었다. 추사 김정희와 겨룰 정도로 예서체에서 뛰어 났다. 다산 정약용, 자하 신위, 해거도인 홍현주 등과 유불선에 대한 담론을 주고 받을 정도로 학문적 성취도 이루었다. 초의가 활동하던 조선 후기는 조선의 건국과 함께 쇠퇴 일로에 있던 우리 차 문화가 다시 중흥의 길로 들어서던 시기와 일치하고 중흥의 물길을 튼 사람이다. 당대 선비들과 차 문화를 일으켜 세우고 동다송과 다신전을 지었다. 그런 측면에서 초의는 우리 차의 중흥조이자 다성으로 평가 된다. 초의 이후 우리차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일제강점기의 일본 차에 그 자리를 내 주었다.
◆ 육우·리큐·초의의 공통점은 모두 명리와 부귀를 초월한 삶 이었고 사상적 뿌리는 동양적 사유 이었다. 육우의 차에 담긴 검덕정행(檢德精行)의 수행자의 삶, 리큐의 차에 담긴 와비의 초암정신, 초의의 차에 담긴 무착바라밀(無着般若密)의 집착 없는 삶은 서로 다른 듯 같아도 부귀를 초월한 공통점이 있다.
초의와 추사(1) ■추사 김정희(1786∼1856) 추사는 서도(書道)에서 옹방강(翁方綱), 왕사진(王士禛)으로부터 주이존(朱彛尊), 원호문(元好問)을 거슬러 소식과 황정견(黃庭堅)에 이르러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을 귀하게 여기는 문인화풍을 중시했다. 추사의 사상은 禪 즉 불학과 茶로 이어졌고, 詩와 그림(畵)이 더해져 독특한 그의 세계가 열렸다. 추사는 선승들과 교유 했다. 연담, 묵암 등의 대덕들, 특히 백파긍선과는 선리(禪理)를 주고 받았다. 초의와는 동갑으로 여러 차례 만나게 되었다. 그는 다경을 비롯하여 문헌통고(文獻通考), 태평광기(太平廣記), 사문류취(事文類聚),유양잡조(酉陽雜俎) 등의 서적과 차인들의 문집을 읽어 차에 대한 식견이 넓었다. 추사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차를 젊은 시절부터 마셨다. 중국을 다녀 오면서부터는 본격적인 차 생활을 시작했다. 자신의 글씨와 차를 바꾸기도 했다. 주로초의가 차를 많이 보냈고, 만허 스님도 보냈다. 그런 사연들이 편지글에서 비교적 명확히 전해지고 있다.
초의와 추사(2)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草衣全集)
초의(1786∼1866)에게 보낸 10여 편의 차에 관한 편지를 보면 주로 차를 빨리 보내라는 재촉과 받고 난 후의 즐거움을 말했다.
吾則不欲見師 亦不欲見師書 唯於茶綠 不忍斷除 오즉불욕견사 역부욕견사서 유어다록 부인단제 不能破壤 又茶促茶進不必 只以兩年積逋幷輸 불능파양 우다촉다진불필 지이양년적포병수 無更遲悟可也 不然馬祖喝德山棒可承當 무갱지오가야 불연마조갈덕산봉가승당 此一喝此一棒 百千劫 無人避躱耳 都留不式 차일갈차일봉 백천겁 무인피타이 도유불식
나는 그대를 보고 싶지고 않고, 또 보낸 편지도 보고 싶지 않으나 다만 차의 인연만은 차마 끊어 버리지 못하여 차를 재촉하니, 편지도 보낼 필요도 없고 두해 동안 쌓인 빚을 함께 챙겨 보내되 또 지체하거나 빗나감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게요. 그렇지 않으면 마조의 할과 덕산의 봉을 받을 것이니 이 한 번의 할과 봉은 백천겁이 지나도 피할 길이 없을 것이오. 다음으로 미루고 이만.
초의와 추사(3) ■ 벽해타운(碧海朶雲-푸른 바다 건너 온 편지) 서간집 벽해타운에는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 20통이 실려 있다. 대부분 제주도 유배지(1840년~1849)에서 보낸 편지라서 벽해타운이란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서간집인 주상운타(注箱雲朶-상자 속에서 꺼낸 편지)는 초의가 추사에게서 보내 온 편지를 상자 속에 담아 두었다가 추사 사후인 1862년에 서간집으로 만들었다. 추사 편지9통과 초의의 발문 1점이 들어 있다.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는 지금까지 50여통이 확인됐다. 추사가 초의의 차를 구해 마시기 시작한 1838년부터 제주 유배 시절 직후인 1850년 사이에 썼고 이 두 서간첩에29통의 원본이 수록되어 있다.
서간집 벽해타운에 수록된 편지 “다만 스님과 함께 죽로의 옛 인연을 다시 잇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소. 포장을 문득 꺼내니 병든 위장이 감동하고 감동하였소. 차 시절은 아직 이른가요. 아니면 이미 따기 시작 하였소. 몹시 기다리고 있다오. 일로향실(一爐香室)의 편액은 마땅히 적절한 인편을 찿아서 보내겠소. 금년에는 차를 만들면 무더울 때 보내지 말고 반드시 가을을 기다려 서늘해지면 보내주는 것이 좋겠소. 항아리에 싸서 보낼 때는 단단히 싸서 보내도록 하시구려.늘 볶는 법이 살짝 도를 넘어 정기가 녹아날 것 같은 생각이 되니, 만약 다시 만들 경우에는 곧 화후(火侯)를 경계하는 것이 어떻겠소. 차 봉지는 절대로 습기가 많을 때 갑작스레 부치지 않는 것이 어떻겠소.”(碧海朶雲벽해타운)
“새 차는 어찌하여 돌샘과 솔바람 사이에서 혼자만 마시면서 애당초 먼 데 있는 사람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게요. 몽둥이 삼십방을 아프게 맞아야겠구려”(완당전집)
초의와 추사(4) ■두 서간첩을 통해 본 초의와 추사 茶情 두 서간첩은 초의 차에 대한 추사의 애정과 욕심 그리고 질투에 이르기까지 추사의 내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흥미롭고 귀한 편지다. 다른 글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추사의 인간적인 면모를 담고 있다. 추사는 초의에게 때로는 응석을 부린다. 더러 협박조로 말하기도 한다. 초의 차에 빠진 추사가 안달하는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일로향실 글씨를 선물로 보내니 빨리 차 보내달라는 내용은 추사가 차와 글씨를 바꾼 사실을 알려준다. 또 다른 서간집인 나가묵연(那迦墨緣-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보면 “거친 추아 차는 부처님 앞에 올리고 내게는 좋은 것만 골라 달라”고 스님인 초의에게 다소 무례하고 얄미운 부탁을 하기도 했다. 두 서간집은 2011년 9월 경매에 나왔다. 두 서간집에 대한 존재는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실물공개는 당시 경매를 통해 처음 이었다. 추사의 편지글은 제주도 유배 시절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초의의 편지와 차로 달랬던 추사의 심경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歲寒圖 추사 김정희 세한도(歲寒圖) / 홍성남 시인 1. 송백(松柏)의 지조 말하는 세한도 초라한 집 한 채 고목 몇 그루 한 겨울 추위에 떨고 있네 그림과 글씨와 글의 삼위일체 서화일치 추사 예술의 극치
제주 유배지 못살포 인고의 세월 절친한 벗 김유근 간 후 아내마저 떠나고 날로 기승부리던 반대파 핍박에 한양 벗들 모두 흩날려 멀어져 갈 때 고도(孤島)에서 의지 할 벗은 서책 뿐 이었다
스승의 처지 알고 뜻 받든 추사의 제자 우선 1843년 만학집(晩學集)과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문庫) 이듬해 하장령 편찬의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 북경(北京)에서 가져와 제주로 보내 추사 감동케 했네
우선의 청징한 연모에 놀란 추사 신새벽 마른기침 초의 산차(山茶)로 달래며 세한도 그려 발문(跋文) 적어갔다 날 차가워 다른 나무들 시든 뒤 소나무 푸르다는 걸 안다 했는데 한결 같았던 그대와 나의 관계 전(前)이라고 더 한 것도 아니요 후(後)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
2. 어렵게 구한 서책 그 정성 그 연모 따르던 3천 제자 중 으뜸 이었다 권세에 주었다면 출세 보장 되었을 텐데 아무 힘없던 제주 유배객에게 준 초연함 송백(松柏)의 우선에게 해줄 게 없던 추사 송나라 소동파 언송도(偃松圖) 떠 올려 깊은 가슴 뭉클한 감정의 눈물 쏟았다
칼칼한 해서체 20행 295자 편지글 우선(藕船)은 보아라 작년에 만하집(晩學集)과 대운산방집(大雲山房集) 올해는 황청경세문편(皇淸經世文編) 보내 주었다 모두 쉽게 구할 수 있는 책 아니고 천리만리 먼 곳에서 구한 것이며 여러 해를 거듭하여 구한 것이니 세상의 도도한 인심은 오로지 권세와 이익만을 찾는 것인데 이들 책을 구하려고 온 마음과 힘 들였거늘 이것들을 그들에게 갖다 주지 않고 도리어 바다 건너 외딴 섬에서 초췌하게 귀양살이 하는 나에게 갖다 주었다
사마천(司馬遷)이 이르기를 권세나 이익 때문에 사귄 사이는 권세나 이익이 바닥나면 그 관계가 멀어지는 법이라 했다 그대 역시 세상의 그런 풍조 속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인데 어찌 그 속에서 초연히 벗어나 권세를 잣대로 나를 대하지 않는가 사마천의 말이 틀렸는가
3. 공자(孔子)께서 일 년 중 가장 추운 시절이 된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셨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을 통하여 세한(歲寒)이 되기 이전과 이후에도 푸르지만 특히 날 추워진 이후의 푸르름을 칭송하셨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내가 곤경하기 전이나 곤경에 처한 후에나 변함없이 잘 대해주거늘 나의 곤경 이전에 그대는 칭찬할만한 것이 없겠지만 나의 곤경 이후의 그대는 역시 성인으로부터 칭찬 들을 만하지 않겠는가 성인(聖人)께서 유달리 칭찬하신 것은 단지 추운 시절을 겪고도 꿋꿋이 푸르름 지키는 송백(松柏)의 굳은 절조(節操)만이 아니다 세한(歲寒)을 겪은 때와 같은 인간의 어떤 역경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서이다 오호라!
한(漢)나라 시경(詩經)에 후덕하고 인심이 있을 때 급암과 정당시 같은 사람도 그들을 찾는 빈객들과 더불어 흥(興)하고 쇠(衰)하였으니 하비의 적공이 방을 써 붙인 것은 세상인심이 때에 따라 박절하게 변함을 탓하는 것이다 슬프도다
4. 양반과 중인의 계급 초월한 선비의 연모 인류의 공존과 행복 가로막는 제도와 관습 수직적 사고 털어버린 수평적 디지털 소통 공자와 자로 같던 추사와 우선의 애틋함 갈톳한 우리 삶에 툭 던지는 한마디 스승의 선물에 감읍한 제자의 아릿한 말
세한도 한 폭(幅)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그 감개 또한 그토록 진실하고 절실 했습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와 이익을 따르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세파(世波) 속에서 초연히 빠져 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에서 스스로 하지 않으려 해도 그리할 수 없었을 따름 입니다 하물며 이러한 서책(書冊)은 비유컨대 몸을 깨끗이 지니는 선비와 같습니다
어지러운 권세는 걸맞지 않기에 저절로 맑고 시원한 곳을 찾아 돌아간 것 뿐 입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이번 사행(使行)길에 이 그림 가지고 연경(燕京)에 들어가 표구(表具)를 하여 옛 지기(知己)들에게 두루 보이고 시문(詩文) 청할까 합니다
<추사의 세한도 발문> 지난해 <만학>과 <대운> 두 문집을 보내주더니 올해에는 우경의 <문편>을 보내왔도다.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것도 아니고 천만리 먼 곳으로부터 사와야 하며 그것도 여러 해가 걸려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쉽게 단번에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세상은 흐르는 물살처럼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만 수없이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도다. 태사공이 이르기를 ‘권력으로 합한 자는 권력이 떨어지면 교분이 성글어 진다’고 하였는데, 군(君)은 그러지 않으니 태사공의 말이 잘못된 것인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져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고 했는데, 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前)이라고 더한 것도 아니요, 후(後)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 아! 쓸쓸한 이 마음이여! 완당노인이 쓰다.
5 다만 두려운 것은 이 그림 보는 사람들이 제가 참으로 속세를 벗어나고 세상의 권세와 이익을 초월한 것처럼 여길 것입니다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과분하신 말씀입니다
국보 180호 10미터 한축의 두루마리 청(淸)나라 문인(文人) 열여섯 추사와 우선의 고고한 연모의 인연 위해 즐거이 송시(頌詩)와 찬문(讚文) 썼다
훗날 우선은 스승 추사의 승천 듣고 한 편의 시(詩)로 텅빈 가슴 달랬다 평생에 나를 알아준 것은 수묵화이었네 흰 꽃심의 난꽃과 추운 시절의 소나무 스승 추사와 제자 우선의 장무상망 권세와 이익에서 초연히 몸을 뺀 연모 어려울 때는 바로 옆에 있는 이가 진정한 벗 지금 당신의 옆에는 그런 벗이 있는가 당신은 누구에게 그러한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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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차인연대표(大韓茶人年代表)한국의 유구한 차문화 역사를 재조명하기 위하여 일천오백여년에 이르는 한국차인의 행적과 활동내용을 간추려서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차인연대표(大韓茶人年代表) (차생활문화대전, 2012.7.10, 홍익재) |
◈ 저자소개 Tina Pennington – 건강 서적의 베스트셀러 작가 티나 페닝튼은 아마존 건강 서적 베스트셀러 작가로 건강, 야외활동, 등 다른 흥미로운 이슈에 대한 저술을 하고 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차의 시음을 언제 어디서고 계속하며 차에 대한 연구를 그치지 않고 있다. ◈ 원페이지북 1. 녹차의 역사와 소개 녹차는 고대로부터 동양에서 건강의 묘약으로 알려졌다. 녹차는 4000년 전부터 존재했었고 중국인에게는 건강의 묘약이자 비밀의 재료로서 알려져 왔다. 중국인, 일본인, 그 밖의 동양인들은 오래전부터 녹차를 여러 가지 질병을 고칠 수 있는 기적의 약으로 믿어왔고 현재도 녹차를 허브약재, 흥분제, 혈관수축제, 이뇨제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차는 차나무 (Camellia Sinesis)의 잎을 재료로 특수 제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차의 비밀은 차나무의 매우 강력한 항산화제인 폴리페놀 에피갈로카테킨갈레트 (EGCE)에 있다. (항산화제란 화학작용으로 다른 분자들의 산화를 막는 물질로 세포의 파괴를 막고 항암효과, 두뇌활성, 질병예방, 노화방지에 좋다) 이 특별한 항산화제는 암을 예방할 뿐 아니라 암세포를 죽일 때 그 주변의 건강한 세포에는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다. 녹차는 건강에 유익한 폴리카테킨, 비타민 C, E, A, 그 밖에 항암물질, 신경보호물질, 심장보호물질, 항균성물질을 포함한다. 차나무의 재배에 필요한 복잡한 환경조건, 태고로부터의 수확 법, 저장법, 차 우리기는 모두 매우 흥미롭다. 차나무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녹차의 향과 맛은 그 재배와 처리에 기초하고 있다. 녹차 한 컵에는 20-70mg의 카페인이 포함되어있다. 카페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나 녹차는 다른 차 보다 카페인을 덜 가지고 항산화제를 많이 가지며, 밤일을 하는 사람에게 좋다. 녹차에 함유된 비타민, 기름, 타닌은 카페인에 완충작용을 하여 안전하고, 혈압이나 심장박동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아 녹차의 카페인은 커피의 카페인보다 몸에 이롭다. 녹차를 뜨겁게 마시거나, 우리는 시간을 단축하거나, 적당한 녹차를 고름으로써 카페인의 양을 조절할 수 있다. 녹차의 카페인은 블랙 티의 절반, 커피의 사분지 일이다. 2. 녹차의 종류 녹차는 그 제조방법, 음용 법에 따라 여러 종류로 분류된다. 지차 (Hoji-cha)는 커다란 차 잎을 높은 온도에서 구워 제조되며 이 때 아주 특별한 냄새가 멀리까지 퍼진다. 잎은 짙은 밤색으로 우려낸 후 차는 흑맥주같이 보인다. 호지차는 커다란 토기주전자에 잎을 많이 넣고 우려내야만 한다. 이것은 음식과 곁들이거나 추운 날에 마시면 좋다. 코나차 (Konacha)는 아가리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가루차로 녹차 중 가장 섬세하며 맛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코나차는 쪄지고 말려지고 구워진 후 분말로 갈아진다. 가격도 싸 누구나 이 놀라운 맛과 유혹적인 향을 즐길 수 있다. 코나차는 스시와 함께 먹으며 일본의 스시바나 식당에서 매우 인기가 높다. 헝겊, 티백, 혹은 거름망에 코나차를 넣고 끓인 물을 빨리 주전자에 붓는다. 산차 (Sancha) 는 수확 후 먼저 찌고 손으로 비벼 나중에 말린다. 산차는 일본 녹차의 80%를 차지할 정도로 대중적이다. 산차의 잎은 가늘고 아름다우며 빛나는 초록색이다. 특이한 노란색을 띄는 산차의 진미는 비비는데서 오며, 신선하고 가벼운 맛을 지니며, 쓴맛과 단맛이 교묘하게 조화된다. 야나기 (Yanagi)차는 산차 제조 시 떨어진 잎으로 만들어진다. 비벼진 후에 강버들과 같이 길게 보여 강버들로 불리며 산차 보다 순하다. 교쿠로 (Gyokuro) 는 진주 발톱을 의미하며 산차와 마찬가지로 초봄에 수확된다. 새잎이 돋자마자 전체 차밭이 볏짚으로 덮인다. 이것은 경작자가 비타민의 양을 최대화하기 위해 햇빛의 양을 조절하기 위해서다. 교쿠로는 아미노산을 많이 포함하며 떫지 않으며 진하고 세련된 맛이 난다. 마차 (Macha)도 교쿠로의 그늘에서 수확된 것이다. 그러나 이 차는 비벼지지 않은 채 말려지고 쪄진다. 잎이 두터워 써 보이지만 사실은 약간의 쓴 맛만 있고 부드러운 단 맛을 가진다. 마차 가루는 신체가 요구하는 모든 비타민과 영양소를 포함한다. 마차가루는 여러 가지 요리에 쓰인다. 3. 녹차의 효능 녹차는 거의 모든 암, 성인병 및 수많은 질병을 예방 치유한다. 중국 고대인들은 녹차의 의학적 성질과 효능에 대해 연구했었다. 녹차는 단순 두통에서 우울증까지 많은 증세에 쓰였으며 현대에는 당뇨, 암, 다발성경화증, 노화, 비만 예방에 쓰인다. 녹차는 류머티즘, 고혈압, 고콜레스테롤을 치유하며, 신진대사와 면역성을 높여주고, 파킨슨병과 알츠하이머를 예방한다. 녹차는 심장발작과 뇌졸중의 요인인 혈전을 감소시킨다. 하루에 녹차를 여러 번 마시는 것은 심장병을 예방한다. 모든 차는 차나무(Camellia Sinesis)로부터 제조되지만 녹차는 쪄지고 말려지는 과정에서 다른 발효차들과 달리 산화를 거치지 않아 10배나 더 큰 치료적 효능을 가진다. 녹차를 마시는 사람이나 국가는 그렇지 않은 사람, 국가보다 훨씬 더 낮은 암발생률을 보인다. 녹차의 폴리페놀 성분이 암과 싸우는 것으로 알려졌다. 녹차는 건강한 세포를 해침 없이 대장, 췌장, 직장, 방광, 기도, 위, 피부, 식도, 난소, 이자, 전립선의 암의 성장을 방해한다. 녹차의 에피갈로카테킨갈레트 (EGCE)는 에이즈바이러스 (HIV)를 약화하며 치료한다. 하루 4-5잔의 녹차를 마시는 것으로 에이즈의 완치가 가능해진다. 에피갈로카테킨갈레드는 심장병을 낮추는 것으로 알려진 레저바톨 보다 두 배 강력한 항산화제이다. 녹차는 자유라디칼, 피로, 스트레스, 박테리아 및 바이러스 감염을 줄이고 심혈관 질환과 싸운다. 녹차는 카페인보다도 더 효과적인 체중 감소제이다. 녹차는 식중독, 충치, 구취를 예방할 수 있으며 미용 건강 제품에 많이 사용된다. 녹차를 마셔 건강한 신체는 강한 면역력과 생식력을 가진다. 녹차에 들어있는 카페인은 몸에서 과다 칼로리를 태운다. 산화작용이 길수록 카페인을 낮춘다는 보고가 있다. 의학적인 목적으로 카페인을 제거한 녹차는 맛도 좋고 강한 항산화작용, 콜라겐 합성, 암, 고콜레스테롤, 중성지방, 동맥경화에 좋고 녹차의 좋지 않는 성분을 감소시킨다. 서양에서는 동양인들이 나이를 먹어도 건강하고, 능력 있으며 젊게 보인다는 견해가 있다. 동양의 식사는 건강, 날씬함, 장수와 연관되어 보인다. 녹차는 신체의 신진대사율과 에너지를 높이기 때문에 피곤 경감, 체중감량에 효과적이다. 패스트푸드나 과자 대신 녹차를 마시면 그에 대한 식욕이 떨어지며 식전에 마시면 포만감을 주어 과식을 예방할 수 있다. 녹차는 신진대사를 증가시켜 섭취 탄수화물로부터의 에너지를 잘 사용하게 해준다. 4. 녹차의 음용법 건강의 묘약 녹차도 올바른 음용법,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시행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녹차는 영양가와 풍미가 낮고 카페인이 많이 우러나는 티백보다 잎을 우려서 섭취하는 것이 더 낫다. 녹차를 우리는 것은 비타민, 영양소를 파괴하지 않고, 카페인의 수준을 낮추는 카테킨과 테아닌을 활성화하고, 폴리페놀을 더 쉽게 방출하며, 더 매력적인 풍미를 가져온다. 수돗물 보다는 생수를 사용하는 것이 더 좋으나 유럽산 경수는 좋지 않다. 한두 시간 정도 물을 놔두어 수돗물의 염소를 없앤다. 물을 3분 동안 끓인 후, 녹차를 3-5분간 우린다. 더 오래 놔두면 너무 많은 카페인이 우려지며, 카페인이 더 많아질수록 폴리페놀은 적어진다. 더 어린 녹차 잎이 우리기가 쉽다. 하루에 4잔 이상의 녹차는 몸에 부정적인 결과, 두통, 불안 등을 가져온다. 녹차 한 잔에는 20-70mg의 카페인이 들어있어 하루 종일 지속적으로 당신을 깨어있게 할 수 있다 (카페인의 하루 적정량은 300mg). 카페인이 부담스럽다면 처음에는 소량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녹차는 강력한 항산화제들과 테아닌을 함유하며 신선하고 달콤한 카테킨은 카페인 수준을 낮춘다. 높은 온도에서 차를 우리면 카테킨, 테아닌이 카페인과 결합하여 카페인의 효과를 낮춘다. 그러나 차를 식힐수록 카페인이 더 풀려나온다. 카페인 함량이 다른 여러 종류의 녹차가 있다. 교쿠로는 랍상수총 같은 어두운 색의 녹차보다 높은 함량의 카페인을 가진다. 차를 우릴 때 보통의 두 스푼 대신 한 스푼의 녹차 잎을 우리면 카페인 양을 줄일 수 있다. 차를 마시지 않는 사람들은 녹차 캡슐이나 녹차 추출물을 복용한다. 녹차의 폴리페놀은 피임약과 상충하므로 여성들은 의사와 상담해야 하며, 임산부는 녹차를 삼간다. 녹차는 임신 중 필요한 엽산흡수를 방해하고 유산을 야기한다고 판명된 카페인을 함유한다. 과량의 폴리페놀은 콩팥과 간을 해친다. 녹차나 녹차 구강청결제는 충치를 예방한다. 녹차올리브오일믹스는 습진과 여드름에 일반 수렴제와 같은 효과를 가진다. 인터넷에는 다이어트 프로그램들이 범람하지만 상업적 다이어트 프로그램은 가급적 피한다. 대부분의 서구 다이어트 프로그램들은 잦은 음식섭취, 체중관리 소흘, 요요현상이 문제이다. 그러므로 눈을 돌려 다른 문화권에서는 어떤 다이어트법을 쓰는 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녹차 다이어트에서는 녹차를 규칙적으로 음용해야한다. 녹차프로그램은 하루에 녹차를 6잔 규칙적으로 마시는 효과적인 다이어트이다. 녹차를 어떤 시간대에 먹는 가도 중요하다. 아침에 일어나 두 컵의 물을 끓여 10g의 녹차를 3분 이내로 우린다. 차가 적당히 식자마자 빨리 마신다. 그 후 60분, 90분후 차례대로 녹차를 마신다. 늦은 오후 4시쯤 마시고 퇴근 전 앞에 와 같이 60분, 90분 후 마신다. 설탕이나 우유는 녹차의 효력을 떨어뜨리므로 삼간다. 프로그램에 하루 권장량인 2000칼로리 보다 약간 적은 1750-1800 cal의 열량, 일주일에 총 5km 씩 걷는 규칙적인 운동이 겸비돼야 효과적이다. ◈ 서평 녹차 다이어트로 건강과 미모 두 마리 토끼 잡기 매일 식사 때 곁들이는 습관화된 녹차 다이어트는 쉽고도 효과적이며 전반적 건강을 향상시킨다. 녹차 다이어트는 따라 하기 쉽고 다른 다이어트 프로그램과 병행할 수 있다. 녹차는 식사 때 곁들여 먹으면 된다. 녹차는 다이어트 음료와 같은 효능을 지닐 뿐 만 아니라 다른 많은 의학적 이점도 가져온다. 녹차를 다이어트로 매일 마시면 체중을 잃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면역체계가 강화되고, 심장병, 충치 등 많은 질병을 개선할 수 있다. (http://health.ninemsn.com/dietandnutrition/azofdiets/695331/green-tea-diet) 위의 기사도 지적했듯이 녹차는 항산화제, 각종 비타민 미네랄 등이 많아 상용시 전반적으로 건강을 향상시킨다. 그러나 그런 녹차 음용이나 녹차 다이어트에도 주의할 점이 있다. 아무리 여러 가지로 건강에 유익한 녹차도 지나치게 마시면 독이 된다. 저자도 지적했듯이 하루 6잔 이상의 녹차는 몽이 느낄 정도의 부작용, 두통, 불안, 속 쓰림 등을 초래한다. 역시 아무리 좋은 것도 남용하면 안 된다. 녹차 다이어트는 다른 다이어트 프로그램처럼 단시간에 극적인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녹차의 맛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럴 때는 녹차 캡슐을 먹어야 한다. 어떤 민감한 사람들은 녹차의 카페인 때문에 수면 장애가 올 수 있으니 저녁에는 녹차를 마시는 것을 삼간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대체의학에 매우 관심이 많다보니 이 책을 읽고 녹차의 유익한 점을 많이 비교적 소상히 알게 되어 매우 기뻤다. 항산화물질, 비타민, 미네랄 등이 많은 녹차가 다이어트에도 효과적이라니 바로 이런 것을 두고 금상첨화라고 하나 보다. 얼른 장에 가서 녹차 가루 병을 샀다. 녹차는 가루로 먹는 것이 녹차의 모든 영양소를 섭취하는 데 더 이롭다고 한다. 녹차를 우리면 수용성 비타민은 우려 나오지만 어떤 지용성 비타민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녹차는 미래의 건강에 대한 소박하지만 야물 찬 투자라고 생각되어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녹차의 놀라운 효능에 대해 알고 보다 더 건강해지길 바란다. |
옛 사람들은 남의 청렴 결백함을 칭찬할 때 옥(玉)과 눈[雪]에 견주었는데, 내가 들은 바로는 고(故) 관찰사(觀察使) 이공(李公)이 마치 옥과 눈 같은 사람이다. 공은 휘(諱)가 세장(世璋)이고, 자(字)는 도성(道盛)이다. 성(姓)은 이씨(李氏)로서 관적(貫籍)은 완산(完山)이며 조선조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인 완성군(完城君) 이백유(李伯由)의 6세손(世孫)이다. 통정 대부(通政大夫) 행 고성 군수(行高城郡守)를 지낸 이손약(李孫若)과, 정략 장군(定略將軍) 충좌위 부사과(忠佐衛副司果)로서 통정 대부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追贈)된 이윤생(李閏生)이 곧 공의 증조(曾祖)와 조(祖)이다. 공의 선고(先考)는 이목(李穆)이고 진용 교위(進勇校尉) 영안남도 평사(永安南道評事)를 지내고 가선 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 겸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동지춘추관(同知春秋館) 성균관사(成均館事)에 추증되었는데, 양대(兩代)의 추영(追榮)은 공의 신분이 귀해진 까닭이었다. 관련이미지 (4)위 이미지에 대한 권리는 출처사이트 게시자에게 있으며, 이를 무단 사용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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