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성립 /세종의 업적/ 단종의 양위와 세조의 업적/ 돈마니 님의 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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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의 성립/세종대왕의 업적/단종의 양위와 세조의 업적 한국사 민족사

2009/05/11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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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의 성립


   
고려말의 국내외 정세는 참으로 복잡 미묘했다. 중국 대륙에서는 원이 명에 의해 옛 몽골 땅으로 쫓겨나 국호를 북원이라 바꾸어 겨우 국가의 명맥을 유지했고, 양자강 남쪽에서 일어난 한족의 부흥국인 명나라가 북진하여 북경에 도읍을 정하고 중국 대륙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명나라는 만주와 한반도 쪽으로 세력을 뻗쳐 철령위 사건을 일으켰다. 일본에서는 통일 왕조적 기능을 상실한 가마쿠라 막부의 무능과 부패로 도처에서 도적이 창궐했고, 그 가운데 하나인 왜구가 해안 지대를 침략하여 고려 정부를 괴롭혔다.


    이렇듯 중국 대륙에서의 동요와 홍건적, 왜구의 침입 등으로 국제 질서는 무너지고 고려의 국력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또한 당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던 불교계가 타락하여 지식인과 국민에게 신망을 잃음으로써 불교를 배척하는 신흥 사대부의 기운이 점차 확산되어 갔다. 뿐만 아니라 권문세가들이 불법적으로 국가와 개인의 토지를 강점하여 고려말의 개혁가 조준이 상소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나라의 공전은 바늘 하나 꽂을 땅도 남지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가의 수입은 격감하고, 자영 농민은 대부분 소작인이나 노비로 전락하여 국가와 백성이 함께 망할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신흥 사대부들은 충선왕과 공민왕 시대의 개혁 정치가 실패한 것을 교훈으로 삼아 이성계 일파 등 신흥 무장 세력과 굳게 결합하여, 권문세가를 타도하고 새로운 정치 . 경제적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도전, 조준, 남은 등 강경파 사대부들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정치 . 군사적 실권을 잡고, 우왕의 아들 창왕마저 신돈의 씨라 하여 쫓아내고 공양왕을 세웠다.

 


    이들은 먼저 권문세가들의 경제력을 빼앗기 위해 사전혁파를 서둘러 단행했다. 사전혁파란 귀족이 가지고 있던 토지에 대한 개인의 소유권을 무효화한 것으로, 공양왕 2년에 모든 공사의 토지 문서를 거두어 태산같이 쌓아 놓고 모두 불살라 버렸다. 이어 이듬해에는 새로운 토지 제도인 과전법을 공포했다. 극결과 전국 토지의 대부분이 공전으로 편입되어 권문세가들은 하루아침에 모든 토지를 빼앗기게 되었다. 반면 이성계, 정도전, 조준등 새로운 정치 세력들은 많은 토지를 국가로부터 받음으로써 권문세가들의 세력은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다. 사실 이것은 권문세가의 몰락뿐만 아니라 고려 왕조 자체의 몰락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 이성계가 고려를 대신하는 새 왕조를 건설하는 데 남은 것은 오직 절차뿐이었으나, 이 절차를 수행하는 데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름난 유학자이면서 충성심이 대단해 백성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던 정몽주와 같은 유력한 반대자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방원의 사주로 조영규가 선죽교 다리 위에서 정몽주를 철퇴로 쳐죽임으로써 고려 왕조를 힘겹게 붙들고 있던 마지막 충신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마침내 1392년(공양왕 4년) 이성계 일파는 고양왕에게 왕위를 이성계에게 양위할 것을 강요하고 도평의사사의 결의를 거쳐 이를 추진했으니, 고려 왕조는 건국한 지 474년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성계는 고려말에 등장한 신흥 무장 세력으로 명문 집안 출신은 아니었다. 오늘날 전주 이씨들은 한때 왕족이었던 명문 집안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성계의 조상은 고향인 전주에서부터 전전하다가 함흥에 정착해 여진족과 섞여 살던 유이민이었다. 그의 조상들은 여진족 사이에서 세력을 얻어 그 지방의 유력한 호족으로 등장했고,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정벌할 때 원을 배반하고 내통해 세운 공으로 동북면 병마사에 임명되었다. 그의 둘째 아들인 이성계가 고려 조정에 처음 나타났을때는 몽고 머리처럼 앞머리는 깎고 뒷머리는 땋아 내린 체두변발을 한 오랑캐와 같은 모습의 시골 젊은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 후 이성계는 여러 번 전쟁에서 공을 세움으로써 출세의 길을 닦아 나갔다. 그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격퇴했고, 몽골에 빼앗겼던 자비령 이북의 땅을 되찾는 데 공이 컸다. 이러한 전공으로 인해 최영과 더불어 명장으로서 고려 사회에 이름을 날렸던 것이다. 그러던 주에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최영을 축출하고 신진 사대부의 영수로서 정치적 실권을 잡았고, 드디어 사대부 출신 관료들의 추대를 받아 새로운 왕조 건설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수도를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옮겨 새 왕조의 변모를 보였으며, 한양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정치 . 경제 . 문화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사실 한양은 풍수지리설에 비춰 보거나 오늘날 도시 환경적 차원에서 살펴보더라도 명당임은 분명하다. 도시 한복판으로 수량이 풍부한 한강이 흐르고, 북한산과 남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으면서도 교통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멀지 않은 거리에 서해와 통할 수 있는 인천이 있어 가히 교통 . 군사 . 산업의 요충지라 할 만하다.

 

 

 

세종대왕의 업적


   
태종에게는 두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이 12명이나 있었다. 태종은 이 많은 아들 중에서 제일 총명하고 인품이 뛰어난 셋째아들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지만, 아무런 명분도 없이 큰아들인 양녕대군을 물리치고 셋째를 택할 수가 없어 고민했다.
    양녕도 누구 못지 않게 총명하고 비범한 용기를 가진 왕자로 특히 할아버지 태조를 닮아서 성격이 호방하고 홀을 잘 쏘았는데, 태종은 큰아들의 이런 점이 싫었다. 이제는 나라의 기틀이 어느 정도 굳어지고 기초도 튼튼해졌기 때문에 무인의 기질을 가진 호방한 임금보다는, 지혜롭고 너그러우며 부드러운 인품을 가진 임금이 나와 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아버지의 고민을 진작부터 눈치챈 양녕대군은 스스로 세자의 자리를 충녕에게 양보할 결심으로 덕을 닦는 대신 일부러 밤에 몰래 궁궐 담을 뛰어넘어 시정 잡배와 어울렸다. 처음에는 태종도 크게 꾸짖고 말렸으나 도무지 듣지 않으므로 결국 신하들의 중의를 받아들여 세자를 폐하고 대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충녕대군, 그가 바로 저선 5백 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나고 영특한 임금인 세종대왕이다. 스물두 살의 청년인 임금 세종은 와위에 오르자마자 우선 인재를 기르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무엇보다도 후륭한 인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능한 학자로 하여금 마음놓고 학문을 연구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집현전이란 학문 연구소를 대궐 안에 설치했다. 그리고는 학식이 뛰어나고 행실이 바른 선비들을 뽑아 학문과 제도 연구에 열중하도록 하는 한편, 그 연구 성과를 토대로 국가의 정치 체제를 정비하려고 했다.
집현전에서 학문 연구에 참여한 전임 학사의 정원은 모두 20명뿐이었지만, 그외에 수시로 각 도에ᅢ 명령을 내려 뛰어난 인재를 추천하게 하고 그 인재를 시험하여 추우언했다. 그 결과 정인지,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집현전에 구름같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세종이 온 정성을 기울여 뒷바라지를 한 덕분에 집현전 학사들을 통해 얻은 큰 연구 성과는 수많은 책으로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이중에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을 가르치는 <효행록>, 예의범절의 길잡이가 되도록 한 <오례의>와 <삼강행실도>, 옛고려의 역사를 배워 오늘의 거울로 삼고자 만든 <고려사>, 농사를 장려하고 농사법을 개량하기 위해 지은 <농사직설>, 군사를 길러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한 <역대병요> 등이 있었고, 지리서로 <팔도지리지>를 펴내 행정 구역의 체계를 세웠으며,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를 펴내 의술을 보급시켜 국민의 건강을 지키게 했다.


    뿐만 아니라 인쇄술 발달에도 힘을 기울여 태종 때 만든 동활자인 계미자가 너무 크고 불편하여 다시 작고 예쁜 새 글자체를 만들어 사용했는데, 갑인년에 만들었다고 ⌈갑인자⌋라 했다. 그 외에도 ⌈경인자⌋, ⌈병진자⌋ 등의 훌륭한 금속활자를 계속 주조했다.
세종은 또 한문이 중국 글인데다가 너무 어렵고 배우는 데도 긴 시간이 걸려 백성들이 쉽게 익힐 수 없기 때문에 무식한 백성이 대부분일 수밖에 없다며, 백성들이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글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한글이 탄생되었다. 세종은 한글 제정을 위해 성삼문, 신숙주, 정인지, 박팽년, 이개 등 집현전 학사들의 지혜를 모아 연구에 골몰했다. 새로운 글을 탄생시키기 위한 작업은 험난하고도 고달팠다. 왕은 스스로 연구의 총책임자가 되어 집현전 학사들의 의견을 들어가며 눈이 짓무르도록 그 어려운 일을 차례차례 해나갔다.

    이리하여 세종 25년인 1443년에 드디어 새 글 ⌈훈민저음⌋ 이 완성될 수 있었다. 그 후 3년 동안의 충분한 실험을 겨쳐 세종 28년(1446년) 9월에 훈민정음을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우리 나라는 이날을 양력으로 환산한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여 온 국민이 기념하고 있다.
    세종은 이 밖에도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을 정리하게 하여 체계적인 악보를 편찬함으로서 오늘날 세계에 자랑할 만한 국악의 기틀을 마련했다. 특히 세조대왕은 농업 진흥에 힘써 농사에 관한 <농사직설> 등의 책과 책력을 만들어 보급하였으며, 비의 양이 농사와 직결되는 점에 유의하여 장영실, 이천 등에게 명하여 강우량을 재는 ⌈측우기⌋도 만들게 했다. 측우기는 서양에서 1639년 이탈리아의 카스텔리가 만든 것보다 2백 년이나 앞서서 발명한 세계적인 자랑거리이며, 하늘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농사법을 개량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정초, 이순지 등에게 명하여 천문 . 기상 . 역학 등을 연구하게 하여 이제가지 잘못 기록했던 것을 바로잡았으며, 이천, 장영실 등에게 시켜 ⌈혼천의⌋(천체 관측 기구)와 ⌈앙부일구⌋(해시계), ⌈자격루⌋(물시계) 등을 만들어 냈다. 이 같은 노력으로 15세기 조선의 과학 기술은 세계적인 선진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세종은 내치뿐만 아니라 영토 확장에도 힘을 기울여 압록강과 두만강가지 영토를 넓혔다. 세종 15년(1443년) 잠잠하던 북방의 여진족이 자주 국경 지방에 쳐들어와서 시끄럽게 굴자, 다음 해에 김종서를 함길도 도절제사로 보내 이 야인들을 다스리게했다. 지략과 용기가 뛰어난 김종서는 지혜로서 야인들을 모두 쫓아내고 두만강변인 경원 . 종성 . 회령 . 경홍 . 온성 . 부령에 6진을 설치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김종서가 개척한 6진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끊임없는 노력과 인내로 얻은 빛나는 결심이었다. 세종은 백성들을 새로 얻은 땅으로 옮겨 살게 하여 이곳을 영구히 우리 땅으로 만들었다. 이리하여 두만강 유역이 우리 영토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25년에는 압록강 방면에서 출몰하는 야인들을 내쫓고 4군을 설치함으로써 압록강 중류 유역이 모두 우리 강토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종무를 시켜 남해를 어지럽히는 왜구를 소탕하는 한편, 본거지인 대마도까지 쳐들어가 해적의 뿌리를 뽑았다. 그러나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로 살 터전을 잃은 그곳의 백성들은 대마도를 조선의 군현으로 삼아 줄 것을 요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자 통상만이라도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세종은 다시는 해적질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제포⌋와 ⌈부산포⌋, ⌈염포⌋등 3포를 열어 무역을 허락했다.
세종대왕은 이처럼 새로 탄생되어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조선을 정치. 군사. 문학. 과학. 예술 등 각 방면에서 든든한 반석위에 올려 놓고 찬란하게 꽃피게 한 위대한 성군이었던 것이다.

 

 

 

단종의 양위와 세조의 업적


   
세종대왕 시대의 문화적 황금기가 끝나고 몸이 허약한 큰아들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조선 왕실은 다시금 임금 자리를 노리는 왕자들 사이에 와위를 둘러싼 암투가 벌어졌다. 그 대표적인 왕자가 수양대군이다. 원래 세종은 아들이 18명이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둘째인 수양대군이 가장 뛰어나고 야심이 컸다.
그는 자기 형인 문종이 단 2년도 제대로 임금 노릇을 못하고 죽고 겨우 12세빡에 되지 않은 조카 단종이 즉위하자, 웅지를 펴볼 결심으로 한명회, 권람 등 뛰어난 인재를 자시의 집으로 모았다. 즉 그는 어린 왕을 돕는다는 핑계로 정치를 마음대로 주무르던 원로 대신 김종서와 황보인 등이 혹시라도 딴마음을 먹으면 조선 왕조가 망할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정변을 일으키고 김종서 등을 죽여 정권을 잡은 것이다. 이것을 ⌈계유정난⌋이라고 한다.


    이렇게 무력으로 정권을 잡고서 역대 왕족으로는 유일하게 영의정이 되어 마음대로 정치를 하던 수양대군은 정인지, 권람, 한명회 등 자기 심복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나이어린 단종 임금은 왕위에 오른 지 3년도 못 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귀양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이를 옳지 않게 여긴 집현전 학사 출신의 성삼문, 이개, 하위지 등 문신들과 무신들이 반기를 들고 단종 복위를 꾀하나, 거사 계획은 사전에 밀고자의 고발로 발각되어 모두 처형당했다. 이것이 사육신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어린 단종은 끝내 영월에서 죽음을 당하여불귀의 객이 되었고, 세조를 왕위에 추대한 정인지, 최항, 양성지, 신숙주, 서거정, 한명회 등이 중심이 되어 세종대왕의 업적에 버금가는 세조대왕 시기의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다.
이들은 실용적인 학문에 능하여 국민을 잘살게 하는 부국강병을 실현했으며,  국가 주도로 수많은 편찬 사업에 참여하여 주옥같은 책들을 널리 펴내는 데 공헌했다. 그래서 이들은 ⌈훈구파⌋ 또는 ⌈관학파⌋라고 불렸고, 성종 시대가지 정치를 주도하는 중심 세력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훈구파들에 대하여 비판적인 세력이 향촌 사회를 중심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성리학을 전공하고 대의 명분과 정통 사상에 투철했던 재야 유학자들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했다. 그리하여 고향 산천에 숨어 살면서 단종에 대한 충절을 끝가지 고지하며 두문 분출하거나, 아니면 세상을 풍자하며 방랑으로 일생을 마친 인물들도 있었다. 김시스블 비로산 권절, 원호, 조려 등 생육신들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김시습은 일찍이 세종대왕 때에 소년의 몸으로 임금 앞에서 뛰어난 시를 지어 장래가 기대되는 천재소년으로 칭송을 들었던 재사였다. 그러나 그는 속세를 등지고 승려의 행색으로 방랑하며 울적한 심정을 시나 소설로 풀 뿐이었다.


    이와 같이 단종을 위해서 몸바쳤던 사육신과 끝까지 절개를 지켰던 생육신의 의리와 충절은 숙종 때에 와서 높이 평가되어, 높은 벼슬을 내리고 사당을 지어 그들의 충절이 후세에 길이 전해지도록 했다.
    한편 불교 신자였던 세조도 후에 과거를 깊이 뉘우치고 불도에 힘써 3.1운동의 진원지가 된 오늘날의 파고다 공원 자리에 원각사를 짓고 10층탑을 쌓았으며, 간경도감을 두어 불경을 찍어내 널리 보급하는 데 힘썼다. 또한 석가모니의 일대기인 <석보상절>을 손수 한글로 지어 간행하기도 하고,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을 궁중으로 불러 사육신의 명복을 비는 제를 지내기도 했다.


    농업의 장려에도 힘을 기울여 궁중에 잠실을 설치해 왕후와 세자비로 하여금 누에를 치게 하여 양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모범이 되게 했다. 그리고 백성들의 생활을 걱정하여 상평창을 설치하고 곡가를 조절하여 농민들이 살 길을 열어 주는 데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밖에도 널리 인재를 등용하여 정치를 쇄신하는 데 힘썼고, <동국통감>과 <국조보감> 등 훌륭한 역사책을 많이 편찬해 정치인들로 하여금 통치의 귀감으로 삼도록 했다. 그는 부국강병이 나라 발전의 근본임을 강조했으며, 손수<병정>, <병서대지>, <삼각전법> 등의 병서를 간행하기도 했다.또한 압록강 유역의 야인을 압록강 밖으로 몰아내고, 그곳에서 남쪽의 백성을 대거 이주시켜 토지를 개간하고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영구적으로 우리의 강토가 되게 했다.
세종의 많은 업적 가운데서 특히 <경국대전>을 펴내 조선 왕조를 훌륭한 법전을 가진 법치 국가로 만든 것은 아주 뛰어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피의 역사를 기록한 후 와위에 오른 세조였지만, 정치에 있어서는 태종과 세종에 못지 않은 훌륭한 정치를 배풀어 조선 왕조의 기초를 다지는 데 공헌햇으며, 대외적으로는 이장옥의 난과 이시애의 난을 잘 다스려 나라의 위신을 살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