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29. 12:40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2009/05/11 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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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청자와 인쇄술
고려 청자는 고려 귀족들의 향락적인 생활의 소산인 대표적인 예술 작품이다. 신라가 조각 미술에 뛰어났다면, 고려는 자기공예기술이 뛰어났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정치 상황이 문화발전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고려청자가 우수한 점은 첫째 색깔이 아름답고, 둘째 자기의 형태가 뛰어나며 조화를 이뤘다는 데 있다. 병. 항아리. 잔. 주전자. 연적. 향로 등 정교하게 빚어진 각종 그릇에다 원숭이. 거북. 용. 사자. 물고기. 앵무새. 석류. 연꽃. 죽순 등 동식물 모양으로 여러 가지 장식을 한 것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탐스러울 뿐만 아니라 귀여움마저 느끼게 한다. 셋째는 문양의 아름다움이다. 처음에는 음각이나 양각 문양을 새겼으나 뒤에는 상감법을 이용하여 무늬를 새겨 넣었다. 이것은 고려 청자만이 갖는 독특한 수법인 것이다.
인종 때 고려에 왔던 송의 사신 서긍은 고려 청자의 황홀하고 신비스런 비취색을 보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천하 제일의 색깔이라고 극찬했다. 청자는 인종과 의종 때에 극도로 발달해 귀족들의 사치품으로는 물론이고 수출품으로도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12세기경에는 독특한 상감청자로 절정을 이루어 세계 최고의 도자기라는 평판을 얻었다. 도자기 표면에 흑토, 백토 등으로 춤추는 학 무늬, 모란 무늬, 석류. 포도 무늬 등을 ⌈상감⌋이라는 독특한 기술로 새겨 넣어 마치 무늬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고려 청자와 함께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금속활자 인쇄술 역시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발명되었다. 인쇄술은 고려 과학 기술의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목판 인쇄 기술의 발달은 대장경판의 조판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세계에 자랑할 만한 대표적인 문화재로 8만대장경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대장경판이란, 일체의 불경을 모아 목판에 새겨 놓은 것을 말하며 먹물을 묻혀 찍으면 불경 전집이 된다. 불교를 절대적으로 숭상했던 고려는 부처님의 힘을 빌어 나라의 안전을 꾀하려 했고, 이것은 대장경 조판으로 나타났다.
대장경 사업의 제 1차 간행과 제 2차 간행 둘로 나눌 수 있으며, 제 1차 대장경 조판은 ⌈초판고본대장경⌋과 ⌈속대장경⌋으로 나뉘어진다.
초판고본대장경은 거란 침입 때 부처님의 힘을 빌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자 간행에 착수한 것으로, 8대 현종 때 시작하여 11대 문종 때 완성되었다. 대구 부인사에 대장경 사업을 담당하는 도감을 설치하고 6천여 권의 대장경판을 만들었으나, 고종 19년 몽고 침략 때 불타 버려 약간 만이 일본에 남아 있을 뿐이다.
속대장경은 초판고본에 이어서 간행한 것으로, 문종의 넷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에서 불도를 닦고 돌아오는 길에 수집해 온 불경과, 요(거란)와 일본에서 수집한 것을 합쳐서 작성한 ⌈신편제종교장총록⌋이란 불경의 총목록에 따라 차례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모두 4,740권인데 역시 몽고 침입 때 초판고본대장경과 함께 불타 없어지고, 순천 송광사에 ⌈대반야열반경소⌋ 가운데 9권과 10권이 있고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일본에 조금씩 남아 있을 뿐이다.
제2차 대장경 간행, 즉 8만대장경의 조판은 몽고 침입 대 강화도를 임시 도읍으로 정해 피난살이를 하던 중 부처님의 힘으로 국난을 막고자 착수했다. 이때 다시 대장경을 간행한 것은 1차 대 만든 대장경이 모두 불타 없어졌기 대문이다. 그리하여 고종 23년(1236년) 강화도에 ⌈간경도감⌋ 이라는 부서를 설치한 후 곧장 조판에 착수하여 1251년(고종 38년)에 완성했다.
8만대장경은 총 81,137매로 지금도 경남 합천 해인사에 원판이 보관되어 있다. 널따란 나무 판자에 글자를 새겨 종이에 찍어내도록 되어 있는데, 원판의 크기는 세로 24.5cm 가로 69.5cm며, 두게는 약 4cm로 양끝이 뒤틀리지 않게 각목을 덧붙였고, 네 귀는 구리로 장식했으며, 전면에 옻칠을 했다. 판면은 위 아래로 줄을 치고 1행에 14자, 한 면에 23행을 새겼으며 양면을 모두 사용했다. 또한 판의 한 끝에는 그 판에 새긴 불경의 이름과 권 수, 장 수를 새겨 놓았으며 총 1,511부 6,802권으로 되어 있다.
8만대장경은 조판이 정교하고 내용이 방대하면서도 철저한 고증을 거친 것으로, 세계 제 1의 대장경이라는 칭찬을 들을 만한 위대한 문화재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쇄 기술의 최종 목표는 금속활자의 발명에 있었다. 왜냐하면 금속활자의 발명은 인쇄술의 혁명을 가져왔고, 짧은 기간 내에 여러 권의 책을 간편하게 인쇄할 수 있어 책과 정보의 전달을 손쉽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금속활자 인쇄가 발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깨끗한 종이와 인쇄에 적합한 먹, 금속활자의 주조기술 등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런데 고려는 뛰어나고 다양한 한지를 해외로 수출해 명성을 얻고 있었고, 고려의 ⌈먹⌋하면 송의 선비들도 기회만 있으면 비싼 갓을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구입하여 애지중지했던 명품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게다가 신라 이래로 합금술과 금속주조술도 뛰어난 수준에 있었기 때문에 세계에서 제일 먼저 금속활자 인쇄 기술을 발명하게 된 듯하다.
역사상 가장 먼저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으로 알려진 책은 서기 1234년에 강화도에서 인쇄된 여덟 부의 <고금상정예문>으로, 당시 집권자 최우가 서문을 쓰고 최윤의가 지은 예법서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것은 서양 금속활자 인쇄술의 선구자라고 일컬어지는 구텐베르크보다 무려 200년이나 앞섰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본은 파리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직지심경이다. 이 책은 우왕 3년인 1377년에 충북 청주에 있던 흥덕사란 절에서 인쇄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고려는 세계에서 가장 빨리 금속활자 인쇄 기술을 발명해 세계 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하는 자랑스런 역사를 이룩했던 것이다.
고려인의 생활과 풍속
고려의 귀족들은 처음부터 높은 신분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공훈을 세워 공신으로 봉해져 새로 귀족이 된 사람들이 많았다. 신라의 옛 귀족 출신도 있었지만 병졸 출신이거나 성도 없이 이름만 가진 천민이 뛰어난 무공만으로 출세하여 공신이 된 자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신라가 여러 이성(이성) 귀족들에 의한 정치를 했다.
귀족들은 본래의 출신지를 본관이라 했는데 이것은 그들의 세력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문벌이라는 것이 중요시되었고, 귀족들은 국가로부터 전시과와 공음전이라는 명목으로 토지를 지급 받았다. 뿐만 아니라 교육과 과거를 독점했으며, 과거에 떨어지면 음서란 방법으로 관리로 출세할 수도 있었다. 음서란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높은 벼슬을 지내 국가에 공헌을 한 대가로 과거를 통하지 않고도 관리가 될 수 있게 한 제도로 심지어는 장인이나 외할아버지 덕을 보기까지 했다. 이렇게 되자 대부분의 백성들은 천대를 받으며 가난하게 산 반면 귀족은 점점 더 잘 살고 호강을 누리게 되었다.
사회가 이렇게 돌아가자 농사 지을 땅이 없는 소작농이나 백성들은 자진하여 세력 있는 귀족의 종이 되거나 땅을 빌어 농사를 짓는 사람들로 전락하게 되었다. 또한 귀족들의 경제력이 커짐에 따라 귀족이나 상인간에 큰 돈거래가 많아졌으며 이자 놀이까지 성행하게 되었고, 일부 귀족들은 돈표라는 것을 만들어 쓰기도 했다. 이것이 차차 발전하여 성종 때에는 건원중보라는 쇠돈을 만들어 썼고, 숙종 때에는 은 1근으로 만든 은병(활구)과 구리로 만든 해동통보 . 해동중보. 삼한통보와 같은 돈을 만들어 사용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아직도 돈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옛날 방식대로 포목이나 곡식으로 물건을 바꾸었다. 여유가 있고 한가한 생활을 하게 된 귀족들은 많은 시간을 오락으로 즐기거나 혹은 학문을 연구하는 데 할애하여 고려 전기에는 귀족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다.
귀족 문화의 바탕이 되었던 종교와 사상은 불교와 유교였다. 특히 불교는 태조가 국교로 정하여 장려한 이래 국가적인 종교로서 발전을 보았는데, 불교의 깊은 교리보다는 국가나 개인의 현세적 행복과 이익을 구하는 종교로 발전했다. 이러한 현세 구복적인 성격의 불교는 민간에게 크게 영향을 끼쳐 조금만 여유 있는 집이면 절에다 원당을 지어 놓고 기도를 드렸기 대문에 태조가 염려하던 대로 너무 많은 절이 세워져 국민 경제를 위협하기까지 했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를 남겨 자손들에게 국가의 대업은 부처님의 힘에 의한 것이니 힘써 불법을 발전시키라 했으며, 역대 임금들도 태조의 가르침에 따라 불교를 깊이 믿고 크게 육성시켰다.
따라서 개경을 중심으로 많은 절이 전국 각처에 세워지게 되었다. 특히 문종 때 세워진 흥왕사는 대표적인 절로서 국력을 다해 건축했다고 볼 수 있는데 2천8백 칸에 달하는 웅장한 절의 규모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낙성식을 할 때는 절에서 대궐까지 비단을 깔고 길가에 오색 영롱한 등을 밝힐 정도로 화려하고 호사스러웠다. 이러한 풍조는 민간에까지 크게 영향을 미쳐 연등회와 팔관회 같은 연중 행사 때에는 젊은 남녀들이 모두 나와 손에 손을 잡고 큰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더욱이 임금이 팔관회에 참석하기 위해 봉은사로 행차할 때면 그 행렬이 장관을 이루어 구경하는 백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고려의 불교는 신라 말부터 발전해 온 5교 9산의 종파가 서로 대립했으나, 명종 때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9산의 선종은 조계종으로 통합되고, 이에 앞서 대각국사 의천이 만든 천태종과 함께 5교 양종이 되었다. 특히 왕자로서 중이 된 의천은 송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오면서 가지고 들어온 많은 불경을 정리하여 속대장경을 간행했으며, 이것이 나중에 부처님의 힘을 빌어 외적의 침입을 막으려는 8만 대장경 조판으로 발전했다.
한편 민간에서는 우리 민족의 여러 가지 특징적인 풍속들이 유행되고 있었다. 부여 때부터 흰옷을 좋아한 우리 민족은 고려 때에도 남녀 구별 없이 흰옷을 입었다. 그러나 발달된 송나라의 문물이 민간에까지 영향을 끼쳐 신라 시대에는 귀족들만이 입었던 무색옷을 고려 때에는 서민들도 많이 입었다. 특히 머리 치장에도 신경을 써 남자 어른은 머리에 상투를 틀고 검은 건을 썼으며, 부인들은 긴 낭자 머리를 오른쪽 어깨에 늘어뜨렸다. 특히 귀부인들은 나들이를 할 때 머리에 비단 너울을 쓰고 가마나 말을 탔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적인 각종 불교 행사가 행해졌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 1월 15일의 연등회와 11월 15일의 팔관회였다. 이 두 행사는 모두 고유한 습속(습속)과 결합된 불교 행사로, 군신이 음악. 가무. 백희 등으로 여러 부처와 천지신명을 즐겁게 하여 국가나 왕실의 태평을 빌었다. 귀족이나 일반 백성들은 국가적인 행사인 연등회나 팔관회에 참석할 때에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쌍쌍이 짝을 지어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즐겁게 놀았다고 한다.
그리고 연등회 때에는 사찰마다 휘황찬란한 오색등을 다는 것은 물론 길거리와 골목, 민간의 집에까지 등을 달아 장관을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청춘 남녀가 절에 모여 탑을 돌며 소원을 빌었으며 간간이 사랑이 맺어지기도 했다.
그 외에도 고려 사람들은 명절을 대단히 좋아하여 1월 1일 설날, 3월 3일 상사일, 5월 5일 단오, 6월15일 유두, 8월 15일 추석 같은 큰 명절을 만들어 정성껏 만든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으며 즐겼다. 특히 3월 3일 상사일에는 햇쑥을 넣고 쑥떡을 해먹었으며, 5월5일 단오날에는 부녀자들이 동쪽 내에서 머리를 감고 그네를 뛰었고 남자들은 씨름과 석전을 했으며 귀족들은 격구 대회를 했다고 한다. 겨구는 젊은 무관이나 귀족의 자제들이 즐겨 하던 일종의 운동 경기로 공치기, 장치기, 방구라고도 불렸는데 신라 대 시작되어 고려시대에 와서 크게 유행했다. 놀이 방법은 두 패로 나뉜 기마 부대가 말을 타고 달리면서 끝을 구부려 만든 막대기로 땅 위에 놓인 공을 낚아채어 문구멍으로 통과시켜 승부를 겨루는 것이다.
삼별초의 대몽 항쟁
특별 부대인 삼별초는 몽고의 침입 때는 곳곳에서 몽고군을 괴롭혔고, 무신 정권이 한 번씩 바뀔 때는 항상 구집권자를 죽이는 데 활약이 컸다. 또한 마지막 집권자인 임유무가 죽고 원종이 친몽 정책으로 태도를 바꿔 몽고에 굴복하자, 이에 반발하여 개경 환도에도 불구하고 고려 조정의 명령에 순응하지 않고 버티었다.
원종은 몽고의 침략을 받아 강화도로 피난 온 지 39년만이 1270년에 몽고에 항복하고 개경으로 환도를 서둘렀는데, 유독 삼별초가 이에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조정에서는 장군 김지저를 강화도로 보내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하고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삼별초군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극도로 긴장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뜬소문을 퍼뜨렸다. 고려 조정이 삼별초군의 명부를 가지고 갔으니 이젠 큰일이다. 명부를 몽고에 넘겨준다더라, 그렇게 되면 우리 삼별초 군사들은 모두 죽는다 등의 유언비어였다.
삼별초의 장군 배중손은 장군 노영희와 의논한 후, ⌈앞으로 몽고군이 쳐들어와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해 갈 것이다. 나라를 구할 자는 모두 모여라.⌋ 라고 방을 붙이고 삼별초군을 독려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에 성안은 갑자기 소란해지며 삽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난리가 일어날 기미를 눈치챈 약삭빠른 사람들은 재빨리 배를 타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에 당황한 노영희는 ⌈누구든지 배를 타는 자는 모조리 죽이겠다.⌋ 고 공포한 후 일체 백성들이 섬 밖으로 도망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아울러 배중손은 임금이 쓰던 대궐에 군중을 모아 놓고 ⌈머지않아 몽고 오랑캐가 쳐들어와 우리를 못살게 굴 것이다. 우리를 따라야 생명을 보존하리라.⌋라고 백성들을 선동하는 한편, 도망하지 못하도록 성문을 굳게 닫았다.
그리고는 개경으로 가지 않고 강화도에 남아 있던 왕족 승하 후, 온을 받들어 왕으로 추대한 다음, 각부의 관원을 임명해 환도한 개경 정부에 맞서 새로운 강화도 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강화섬을 탈출하는 자가 늘어나고 민심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배중손은 할 수 없이 강화 서북쪽 해안에 1천여 척의 배를 대고 군수품과 백성들을 싣고 남쪽으로 향했다.
강화도에 쌓아 두었던 재물들을 모조리 실어 내어 텅 빈 섬을 만들고 남쪽으로 내려간 삼별초군은 그 해 가을 남해 진도에 닻을 내렸다. 배중손은 진도를 거점으로 삼고 새로 성을 쌓아 도성으로서의 시설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부근의 여러 섬과 해안 일대를 지배하여 해상 왕국을 이룩했다.
배중손의 저항이 이러하자 고려 정부는 장군 김방경과 몽고 장군 아해가 이끄는 여몽 연합군으로 하여금 삼별초를 치게 했으나 참패했다. 이어 다시 원종 12년 5월, 김방경과 혼도가 이끄는 여몽 연합군으로 재차 총공격을 가했다.
삼별초군은 죽음을 각오하고 대항했으나, 결국 1년만에 진도는 여. 몽 연합군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삼별초 정부의 왕이었던 온과 배중손 장군을 비롯해 강화에서 내려온 대부분의 장군 등이 거의 죽음을 당했다. 고려와 몽고 연합군은 도망치는 삼별초군을 쫓아가 남녀 1만여 명과 전함 수백척을 빼앗고, 진도 안에 쌓여 있던 4천 석의 양곡과 재물 등을 약탈해 개경으로 보냈다.
그러나 죽음을 면한 삼별초의 김통정 장군은 살아 남은 삼별초군을 이끌고 탐라로 들어가 성을 쌓고 끝까지 항전을 계속했다. 2년 동안 굴복하지 않고 완강하게 대항하는 탐라의 삼별초를 쳐부술 길이 없던 몽골군은 김통정을 달래 항복할 것을 권유해 보았으나 끝가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1273년 원종 14년 봄에 1만여 명의 여몽 연합군을 보내 탐라를 치게 했다. 탐라에 상륙한 여몽 연합군은 완강한 삼별초의 저항에 부딪쳐 얼마간 주춤했으나, 삼별초군의 몇 배나 되는 군대로 총공격을 가하여 결국 탐라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삼별초군은 더 이상 싸울 수 없음을 알고 거의 항복했으나, 김통정 장군 등 70여 명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한라산 깊은 숲으로 들어가 숨어 버렸다.
⌈우리 삼별초의 용사들은 4년간에 걸쳐 몽고 오랑캐와 그 앞잡이 원종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웠노라. 그러나 이제 하늘마저 우리를 버리셨으니 어찌 한단 말이냐. 오랑캐에 항복하여 더럽게 사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목숨을 깨끗이 끊을까 한다.⌋
말을 마친 김통정은 땅을 치며 통곡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를 따랐던 70여 명의 군사들도 김통정의 뒤를 이어 함께 목숨을 끊고 말았다.
탐라섬을 함락시킨 연합군은 몽고군 5백 명과 고려군 1천 명을 각각 탐라에 머물러 지키게 한 후, 수많은 포로들을 데리고 탐라를 떠났다.
이로써 4년간에 걸친 삼별초의 끈질긴 항쟁은 마침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삼별초의 애국 용사들이 무려 4년이란 오랜 세월에 걸쳐 몽고와 앞잡이가 되어 자주성을 잃고 오랑캐에 복종한 고려 정부에 대항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맞서 싸운 점은, 적에게 쉽게 굴하지 않는 고려인의 기백과 자주 정신을 보여준 좋은 본보기라 하겠다.
제주도 한라산 기슭 김통정이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곳에는 그때의 정열과 함성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이고 그의 죽음을 기리는 차디찬 기념비만 조용히 서 있을 뿐이지만 찾는 이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고려와 몽골의 투쟁
동북아시아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송과 금은 이미 기운이 쇠약해져 새로 일어난 강력한 몽골 세력에 대항할 만한 힘이 없었다. 그리하여 서기 1227년, 칭기즈 칸은 무서운 속도로 동쪽으로 쳐내려와 서하를 멸망시키고, 이어서 1234년에는 송과 동맹을 맺어 금을 멸망시켯던 것이다. 몽골을 통일하고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지역,남부 러시아까지 정복했던 칭기즈 칸이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하고자 했다.
만주 일대를 휩쓸고 양쯔 강 유역까지 짓밟은 몽고는 다시 동진하여 만주 남부의 대요수국을 공격했다. 그러자 쫓겨난 거란족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략했다. 이때 고려는 오랫동안 평화가 계속된 데다가 문신과 무신간의 정권 싸움으로 정치가 문란해져 있었기 대문에 외적의 침입을 막을 힘이 없었다. 이것을 눈치챈 거란족은 정주성을 함락하고, 곽주와 서경을 거쳐 개경까지 쳐들어왔다. 그러나 고려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철원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원주로 빠져나갔다. 그대 고려의 대장군 김취려가 길목을 막고 포위해 들어가자, 기세에 눌린 거란군은 대관령을 넘어 북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이들은 함경북도 일대에 웅거해 있으면서 자주 고려를 괴롭혔기 때문에 고려는 골치를 앓게 되었고, 마침내 고종 5년(1218년)에 몽골과 동진의 도움을 받아 거란의 잔당을 토벌했다.
그런데 이것은 고려의 커다란 실책이었다. 몽골은 고려를 도와 거란을 친다는 명목으로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영토에 들어왔고, 거란족을 격파하자 본색을 드러내어 거란을 쫓아 준 대가로 엄청난 예물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고려를 치기 위한 구실을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에 들어와 마음껏 행패를 부리고 돌아가던 몽골의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 부근에서 강도에게 피살된 사건이 발생했다. 기회만 엿보던 몽골은 이를 트집잡아 고종 18년(1231년) 장군 살리타를 보내 고려로 쳐들어왔다. 당시 몽고는 금방이라도 전세계를 정복할 듯이 세력이 막강했던 터라 조그만 고려쯤은 하루 아침에 식은 죽 먹기로 쑥밭을 만들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명장 박서가 귀주성에서 굳게 길목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몽골군은 할 수 없이 다른 길로 돌아서 개경으로 내려왔다. 아무 준비도 없던 고려 조정은 미리 겁부터 집어먹고 강화사를 보내 몽골의 요청대로 화의를 맺게 된다. 그리하여 몽골은 고려의 정치를 감시하는 다루가치 72명과 서북면에 수비군을 주둔시키는 조건으로 일단 물러갔다. 그러나 고려는 어떤 형태로든지 결코 오랑캐인 몽골인에게 굴복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들을 내쫓을 기회를 엿보았다. 더욱이 최충헌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그의 아들 최우는 끝까지 굽히지 않고 항쟁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서울을 강화도로 옮기고는 문무백관과 개경 백성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들어가 몽골에 반기를 들었다.
이에 화가 난 몽고는 재차 살리타를 보내 고려를 침략했다. 당시는 몽골이 벌써 중국 대륙은 물론 멀리 중앙아시아를 비롯해 유럽까지 굴복시켜 대제국 건설에 성공했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살리타는 군사를 거느리고 재차 남하해 왔으나, 뱃길에 익숙하지 못해 강화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대신 임진강을 건너 남경을 점령한 후 전국을 휩쓸며 약탈과 분탕질을 일삼았다. 그러나 경기도 용인에서 승병장 김윤후의 화살을 맞고 대장 살리타가 죽자 몽골군은 힘없이 돌아가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김윤후에게 상장군이라는 높은 벼슬을 주고자 했으나 그는 사양하고 절로 들어갔다. 그 후 김윤후 스님은 충주에 서 3차로 침입해 온 몽골군을 잘 막아내 다시 한번 큰 공을 세웠다. 몽골의 왕은 분하여 이를 갈며 다음 해 (1235년)에 당을태에게 정병 10만을 주어 고려를 치게 했다. 그는 몽골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고려인 홍복원을 길잡이로 해서 물밀듯이 쳐들어왔으나, 끝내 강화성을 함락하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화풀이로 전국을 누비면서 모조리 짓밟고 불질렀는데, 이때 대구 부인사에 보관해 두었던 대장경판과 황룡사 9층탑도 소실되어 버렸다.
고려가 몽골과 싸울 때 최우가 죽고 뒤를 이어 최항이 집권했으나, 몇 년 못 가서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불초하기로 이름난 최항의 서자 최의가 무신들을 등에 업고 정권을 잡았으나, 정치를 전혀 몰랐던 최의는 장군들에게 인심을 잃어 원종 9년 김준 장군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4대 60년에 걸친 최씨 무단 독재 정치는 끝을 맺고 말았다.
이러한 순간에도 육지에선 몽골이 4차, 5차, 6차로 계속 쳐들어와 온 국토를 짓밟고 있었다. 이러한 참상을 전해 들은 원종은 백성이 없으면 어찌 임금 노릇을 할 수 있겠느냐고 눈물을 흘리며 태자를 몽골로 보내 항복할 뜻을 전했다. 그러나 성격이 단순한 무신들은 최후까지 싸워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굴복할 수 없다고 벼텼고, 문신들은 황폐한 국토와 고통받는 백성을 생각하여 일단 머리를 숙이고 나라의 힘을 기른 다음 다시 항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싸워 봐야 승산이 없었고 이미 먹을 것조차 바닥이 난 강화도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원종은 하는 수 없이 1270년 백관을 거느리고 강화도를 나와 몽골에 항복했다. 이때부터 고려는 몽골의 온갖 간섭과 수탈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와 같이 몽골의 침략에 대항해서 끈질기게 40년간이나 무섭게 싸우고도 왕조와 국토를 그대로 보전한 사례는 세계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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