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대군과 단종 / 다음 지식에서

2013. 10. 29. 10:20우리 역사 바로알기

 

 

 

 

 

      

    세종(단종의 할아버지)은 건강이 좋지 못해지자 당시 세자였던 문종(단종의 아버지)에게 섭정을 하게 한다. 그러나 본래 병약했던지라(그래서 대신들 중에는 애초부터 수양대군을 세자로 삼자는 의견도 있었다고 함) 8년 간의 섭정 동안 업무 과중으로 인해 문종 역시 재위 기간을 대부분 병상에서 보내야 했을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다. 결국 문종은 등극 후 2년 반도 채 안 되어 12살인 아들 홍위를 남겨 두고 세상을 뜨고 만다.

 

    단종의 어머니는 문종에게 세 번째로 시집 온 세자빈으로(레즈비언 사건 등으로 두 명의 세자빈이 폐출됨) 그녀가 바로 현덕왕후 권씨이다. 드디어 맘을 주게 되는 여인을 세자빈으로 들인(본래는 당시 세자였던 문종의 후궁이었음) 문종이었지만 자신은 병약하였고 현덕왕후 역시 난산 끝에 단종을 출산하다 세상을 뜨니, 이로 인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은 더욱 쉬워진다. 당시 왕실에는 단종 내외를 지켜줄 만한 어른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왕대비는커녕 대비의 자리에 있었어야 할 어머니마저 돌아가신지 오래이니... 그래서 어린 단종은 자랄 때에도 덕이 높기로 이름 난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서열상 단종의 서조모)가 유모가 되어 키워 준다. 그러나 후궁인 처지라 혜빈 역시 낄 틈이 없었다. 하지만 단종을 위해 애쓰는 혜빈, 세종과 그녀의 소생인 세 아들이 단종을 돕기 위해 분투한다.(이들 중 장남인 한남군과 3남인 영풍군이 훗날 정조 대에 이르러 금성대군과 더불어 단종을 위해 애쓴 6종친(육종영六宗英)에 봉해진다.)

 

    문종이 승하한 후 바로 즉위했지만, 어린 단종은 말 그대로 너무 어려 정사를 돌볼 수가 없었기에 형식적인 결재를 해 주는데만 그치게 되고, 급기야 수양대군의 세력이 커질 대로 커져버리게 되었을 때는 어디에 옥새를 찍으면 될지만 묻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의정부는 물론 6조 직계제(6조가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과 직접 연계하는 것)마저 유명무실해진 것이다.

이렇게 왕권이 약해지고 신권이 강해지자 세종의 아들(단종의 숙부)들이 세력을 모으기 시작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진 것이 바로 차남인 수양대군이다. 이렇게 해서 왕실은 무수히 많은 피를 보게 되는 것이다.

 

    수양대군의 구실은 조카인 어린 임금을 보호하겠다는 것으로, 결국 그 유명한 계유정난(1453)을 일으킨다. 이때 한명회가 작성한 '살생부'에 따라 안평대군(세종의 3남)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죄명을 붙여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 역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정난 이후 일어난 사건 중 '이징옥의 난'이 있다. 함길도 절제사였던 이징옥이 대립 세력인 김종서계 사람임이 맘에 걸렸던 수양대군은 이징옥을 파직하고 후임으로 박호문을 임명하는데, 처음에는 이징옥도 인사 이동에 수긍해 인수 인계까지 한다. 그러나 일을 마치고 도성으로 향하던 중 정난 소식을 들은 이징옥이 발길을 돌려 박호문을 죽이고 난을 일으켜 스스로를 황제라 칭한 후, 여진의 후원을 약속 받고 두만강을 건너려 했지만 정종, 이행검 등에 의해 아들 3형제와 함께 살해되었다.

 

    이렇듯 신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영의정에 올라 직접 단종을 대신해 서무를 관장하며 왕권까지 장악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에 단종은 여산 송씨 가문에서 중전(정순왕후)을 맞이하고, 숙부였던 수양대군을 믿고 의지했던 예전과는 달리 여러 숙부들과 대신들이 하나 둘 죽어 나가는 것을 의심에 찬 눈초리로 보며 그제서야 숙부가 다른 뜻을 품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왕위를 지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번번이 수양대군의 세력에 의해 좌절되는데, 그때마다 수양대군은 오직 조카인 단종을 보호하기 위한 일이라며 잡아떼기만 할 뿐이었다.(수양대군 입장에서는 정권에 대한 욕심이 없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고, 또 그때까지만 해도 본심을 드러내기엔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측근인 금성대군(세종의 6남)과 궁인, 신하들마저 유배와 죽음을 당하게 되자 극도의 두려움을 느낀 단종은 자신과 중전을 해치는 일 만큼은 하지 말기를 청하며 왕위를 내 놓고 상왕으로 물러난다.

 

드디어 수양대군이 등극하니... 그가 바로 조선의 7대 임금 세조!

 

    그러나 민심은 여전히 어린 임금과 중전에게 있는데다 충신들의 절개가 맞물리니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는 이들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이른바 '상왕(단종) 복위' 사건(1456)으로 여섯 신하가 죽음을 맞는다. 예지력이 돋보였다고 전해지는 한명회의 조언과 더불어 동참했던 김질, 그의 장인인 정창손의 밀고로 죽게 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이 목숨으로 절개를 지켰다 하여 '사육신'이라  일컬어지게 된 것이다. 수양대군이 보기에는 역적이니 본인들은 물론이오, 집안의 사내들은 다 처형되고 아녀자들은 관비가 되는 등 그야말로 멸문지화를 당한다.

    그밖에도 김문기, 권자신 등 여러 선비들까지 조금이라도 가담한 자들은 모두 처형되어 신하들의 씨가 말랐다 할 정도였다.

 

    또한 목숨은 부지했으나 충심으로 벼슬을 버린 여섯 신하를 '생육신'이라 하는데 김시습, 이맹전, 원호, 조여, 성담수, 남효온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런 훌륭한 뜻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로 인해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1457)되어 영월에서 유배 생활을 시작한다. 이 때 다시 만날 것을 소망하면서 중전과 헤어지며 건넌 다리가 바로 '영도교'(청계천에 위치)이다.

    하지만 영영 못보게 되는 두 사람, 그것은 같은 해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되어 단종은 아예 서인으로 강등되고 결국 한 달 뒤 수양대군(세조)이 보낸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뜨고 만다.

    이를 두고 백성들은 단종이 조금만 더 살았더라도 조선은 더욱 태평하였을 것이라며 영특했던 어린 임금을 기렸다고 전해진다.

 

    둘 다 어렸던데다 시국의 아픔 때문인지 단종은 중전인 정순왕후와의 사이에서 후사는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수양대군(세조)의 세력이 중전마저 없앨 생각으로 어떻게든 구실을 잡으려 했지만 백성들의 보살핌으로 중전은 80세를 넘겼을 정도로 장수를 누렸다. 어쩌면 단종의 뒤를 이을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여론의 악화가 신경쓰였던 수양대군이 그나마라도 모른 척 해 주어 정순왕후라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참고로 등극 후 수양대군(세조)은 말년에 단종의 어머니이자 형수인 현덕왕후 권씨의 혼백에 시달려 이 때문에 의경세자(요절한 세조의 장남, 예종의 형)가 죽은 후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치는 패륜까지 범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명회의 두 딸을 아들인 예종의 비(장순왕후)와 손자인 성종의 비(공혜왕후)로 맞았지만 모두 요절하였는데, 이 때 백성들은 '임금(세조)도 부원군(한명회)도 벌을 받는 것'이라며 혀를 찼다고 한다. 또 피부병으로 고생한 것도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난 후부터라니, 즉위 내내 자신이 행한 일이 천벌을 받아 마땅한 일이었음을 모르지 않았던 듯 싶다.

2008-03-26 09:09 | 출처 : 본인작성 , [카페] 시와 음악이 있는 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