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의 자주개혁정치 / 최영의 죽음과 이성계의 집권 //네이버 블로그 돈마니 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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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자주 개혁 정치/최영의 죽음과 이성계의 집권 한국사 민족사

2009/05/11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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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자주 개혁 정치


   
고려가 40여 년에 걸친 몽골과의 투쟁을 중단하고 원에 항복한 이래 고려에 대한 원의 간섭과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원을 등에 업은 새로운 정치. 사회 세력이 성장하게 되었다. 이들 권문세가는 고려 전기로부터 대대로 세력가 집안이었거나 무인 정권시대에 등장한 가문으로서 친원파가 되어 권력을 장악한 자도 있고, 몽골어에 능통하여 역관으로 일하며 원의 앞잡이로 출세한 자, 또 원의 공주를 따라와 고려 조정에서 벼슬한 자 등 그 출신 성분이 다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문세가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불법으로 막대한 농장과 노비를 소유하여 국가 경제를 파탄시켰으며, 원의 앞잡이가 되거나 원의 사주를 받아 원나라가 고려에서 온갖 수탈을 자행하고 내정을 간섭하는 데 하수인 노릇을 했다.
    심한 경우 원과 내통하여 고려가 조금이라도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려는 눈치만 보이면 즉각 원에 알려 고려왕을 폐위시키거나 원으로 붙잡아 가도록 했다. 따라서 고려의 왕권은 땅에 떨어지고, 역대 왕들은 이들의 눈치만 볼뿐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라를 걱정하고 잘못된 정치를 쇄신하려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했으니, 이들이 바로 신진 사대부이다.
    이들은 새롭게 수입된 성리학을 공부하여 고려의 정치적. 사회적 모순을 시정하려는 혁신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중앙 관부의 하급 관리 출신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지방의 향리 자체들이었다.
    이들은 고향에 소규모 농장을 가지고 있는 중소 지주이거나 자영 농민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원의 세력을 등에 업고 불법 수단으로 막대한 농장을 소유했던 친원파 권문세가를 경멸하는 청렴결백한 인품의 소유자들이었다.

 

    권문세가들이 강대한 원의 세력과 결탁해 있는 동안에는 이들로 인해 생긴 폐단들을 개혁하려는 운동은 성공하기가 힘들었다. 따라서 신진 사대부들의 도움을 받아 개혁 운동을 일으켰던 충선왕의 개혁 정치는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 대륙을 강압적으로 지배하여 한족 출신 지식인들을 학대하던 원나라가 한족의 부흥국가인 명에 의해 북방으로 쫓겨나는 원, 명 교체기가 되면서 공민왕의 자주 개혁 운동이 등장하게 되었다.
    공민왕은 처음에는 원나라 위왕의 딸인 노국대장 공주를 아내로 맞이할 만큼 원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몽골의 간섭과 친원적인 권문세가들의 발호로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른 고려의 정치와 사회. 경제적 상황을 바로 보게 되면서부터 그는 주군의 자립과 국정 쇄신을 위한 자주개혁정치를 단행하게 되었고, 그 배후에는 신진 사대부들의 도움이 컸다. 공민왕은 대담하게도 원의 내정간섭기관이면서 연락기관이었던 정동행성을 폐지하고 원나라 순제의 처남인 기철을 위시한 친원파를 일소한 후, 몽골풍 변발머리와 옷을 폐지하고 왕 스스로가 앞장서 그것을 실천했다. 또 자주적 연호를 사용했으며 3성6부의 옛 관제를 복구시켰다.

 


   한편 영토의 회복에도 힘써 그 동안 원이 점령하고 있었던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철폐하여 잃었던 땅을 회복했으며, 후에는 압록강을 넘어 지금의 흥경을 중심으로 한 동령부를 공격하기도했다. 이러한 반원 자주정치는 원과 친원파 권문세가의 반발을 샀다. 그리하여 김용의 무리가 공민왕을 암살하려고 흥왕사에서 난리를 일으킨 흥왕사의 변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 결과 원은 일방적으로 공민왕을 폐위하는 선언을 하고 고려를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겠다고 엄포까지 했다. 그러나 공민왕은 이러한 도전을 무시하고 개혁의 의지를 더욱 굳혔다. 원을 견제하기 위해 명과 사신을 교환하는 등 친명정책을 추진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각종 개혁으로 권문세가의 세력을 억압했던 것이다.


    공민왕은 우선 무신정권 이후 인사권을 장악하여 왕권을 제약하고 신진 사대부들의 진출을 억제했던 정방을 폐지하고, 개혁정치를 성공시키기 위해 권문세족과 인연이 먼 무명의 승려 신돈을 국사에 임명하여 국정을 총괄케 했다. 신돈에게 정치를 위임하게 된 배경에는 노국대장 공주의 허무하고 애달픈 죽음도 크게 작용했다. 비록 몽골의 공주였지만 고려가 몽골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일에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았고, 흥왕사의 변 때에도 공민왕이 숨어 있던 태후의 밀실 앞에서 당당한 태도로 끝까지 버텨 왕을 지켜냈던 당차고 용감한 여인이었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훌륭한 반려자였던 노국대장 공주가 공민왕 14년 아기를 낳다가 원통하게 죽자, 공민왕은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직접 그린 공주의 화상을 보며 눈물로 세상을 보냈기 때문에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가 없어 신돈에게 정치를 맡겼던 것이다.
    정권을 잡은 신돈은 먼저 이공수와 같은 권문세가 출신의 권신들을 축출하고 신진 사대부들을 다수 등용했으며, 공민왕에게 청하여 토지와 노비를 정리하기 위한 임시 관청인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스스로 판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권문세가들이 불법적으로 빼앗은 토지를 검사해 원 소유주에게 반환하고 노비를 풀어 주어 자유민이 되게 했다. 이러한 개혁으로 신돈은 일반 백성의 환영을 받아 성인이라고까지 칭송되었다. 그러나 당시 권문세가의 세력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그들의 원망과 미움을 사게된 신돈은 결국 모함을 받아 귀양을 가야 했고, 마침내는 요사한 중이라는 억울한 누명과 함께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신돈의 뒤를 이어 공민왕마저 죽음으로써 고려 왕실의 부흥의 꿈은 개지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공민왕은 정치가라기보다 예술가적 기질이 컸던 왕으로서 비록 자주적인 개혁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유능한 신돈이나 신진 사대부들의 보필이 있기는 했지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던 권문세가들의 세력을 억압하기에는 힘이 부쳤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공민왕을 도와 개혁 정치를 추진하려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신진 사대부들은 실망하지 않고 홍건적과 왜구와의 투쟁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무신 세력과 힘을 합쳐 권문세가들을 타도한 후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의 일대 개혁을 단행하는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고려의 부흥이 아닌 조선이란 신왕조의 창업으로 나타났다. 즉 고려 사회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들이 택한 길은, 말하자면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속담에 걸맞는 신왕조 창업이란 역사적 선택의 기연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최영의 죽음과 이성계의 집권


   
중국 대륙에서 원과 명이 서로 싸우고 있을 때 중국 북부 지방에는 자칭 백련교도라는 도적의 무리가 일어났다. 이들은 붉은 수건을 쓰고 중국 각지를 휩쓸며 약탈을 자행했기 때문에 홍건적이라 불렸다. 공민왕 8년과 10년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으로 한때는 개경이 점령되고, 공민왕이 안동까지 피난을 가야 하는 곤경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침략에 불과했고 오히려 일본의 해적인 왜구가 여러 해에 걸쳐 자주 침입하여 남해안은 물론 고려의 전해안 지역을 짓밟고, 내륙까지 진출하여 약탈을 자행함으로써 농토가 황폐하고 농민은 유랑하게 되어 나라가 망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심한 경우 해안 지역에서는 수십 리를 가도 사람이나 개 한 마리를 볼 수 없는 마을이 있을 정도로 황폐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왜구의 침략으로 해상교통이 막혀 지방으로부터 조세로 걷은 곡식이나 물자를 중앙으로 운반하기가 힘들어져 귀족들이 몰려 살던 개경은 경제적 파탄에 직면하게 되었다. 왜구를 막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일본과 외교적 교섭이 행해졌으나, 당시 일본도 내란으로 인해 이를 억제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고려는 강경책을 써서 최영, 이성계 등에게 육지로 올라온 왜구를 무찌르게 하고 정지, 박위 등 수군에게는 직접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치게 했다.
    또 최무선은 화통도감에서 각종 화포를 제작해 우수한 파괴력을 가진 화포를 이용하여 왜선을 격파함으로써 왜구는 점차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왜구의 격퇴 과정에서 공훈을 세운 최영, 이성계 등 신흥무신세력은 국민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올라 점차 고려 조정에 두각을 나타내면서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후에 최영과 이성계는 외교 문제를 둘러싸고 날카롭게 대립했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이인임의 추대를 받아 즉위한 후 권세를 독차지한 이인임 일파는 최영과 함께 공민왕 시대의 친명책을 버리고 친원책으로 되돌아갔는데, 이에 대해 이성계, 정몽주 등은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이때에 원의 세력을 몰아내고 만주까지 차지한 명나라의 주원장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원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꾸짖고, 이전에 원나라가 차지했던 철령 이북 땅을 다시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이렇게 되자 고려 조정은 오만한 명나라를 당장 쳐서 고구려의 국토를 회복하자고 서두르는 친원파와, 명은 원나라를 북으로 쫓을 만큼 강국이므로 잘 달래서 사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친명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왕 14년(1388년)에 명나라는 우리 나라 땅에 ⌈철령위⌋ 를 설치하겠다고 통고해 왔다. 즉 원의 쌍성총관부 관할에 있던 지역을 명의 직속영토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는 이인임 일파가 물러나고 최영, 이성계 등이 권력을 쥐고 있었던 시기로, 통고를 받은 최영은 분개하여 요동정벌을 주장했고 우왕도 이에 동조하여 전국적인 징병을 실시했다.


    그러자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친명파들은 ①조그만 나라가 큰 나라를 친다는 것은 무리다.②농사철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민심을 동요시키는 행위이다.③명나라 원정에 힘을 소비하다가 왜구가 다시 쳐들어오면 어떻게 막겠는가?④장마철이 곧 닥치면 활을 쏠 수 없으며, 만약 질병이 돌면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이유를 들며 반대했다. 그러나 최영은 이번 기회에 명나라를 쳐서 중국에 빼앗겼던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아야 한다며 간곡히 우왕을 설득했다. 물론 다른 여러 신하들의 반대도 있었지만, 우왕은 최영의 뜻을 받아들여 명나라를 치도록 명령했다.


    그리하여 최영은 팔도도통사가 되어 서경에 머물면서 전쟁을 총지휘하고 조민수를 좌군,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3만 8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요동 정벌을 위해 북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이성계 휘하의 군대는 압록강의 위화도에 이르러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이성계는 조민수를 달래고 부하들을 선동하여 회군을 감행했다.
    이 소식을 들은 최영은 ⌈이제 고려는 망하는구나!⌋라고 탄식하며 우왕과 함께 남쪽으로 도망해 개경의 화원으로 들어갔다. 이때 최영 휘하에 남은 군사는 불과 50여 명밖에 없었다. 개경에서 다시 천여 명의 군사를 모아 이성계군과 용전분투했으나, 결국 최영은 이성계군에게 붙잡혀 고봉현으로 귀양갔다가 두 달 후에 처형당하고 말았다.
    나라의 땅을 넓혀 위대한 고려를 이룩하려던 늙은 장군은 73세룰 일기로 역사에서 사라져 간 것이다. 전해지는 최영 장군의 사적에 의하면 최영이 죽음을 당하기 직전에 사람들에게 ⌈내가 평생에 욕심을 가진 적이 있다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과연 그의 무덤에는 한 포기의 풀도 나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의 무덤을 붉은 무덤이라 불렀다. 한편 최영이 죽었다는 소식이 개성에 전해지자, 백성들은 모두 슬피 울었고 시장은 모두 철시했으며 최영의 무덤을 지날 때면 사람들은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고 지나갔다고 전해진다.


    최영은 일찍이 그의 아버님이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가르친 뜻을 받들어 평생 재물에 대한 욕심 없이 국가로부터 상으로 받았던 재물이나 농토를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주는 청빈한 사람이었으며, 오직 나라만을 위해 살다 간 위대한 장군이기도 했다. 후일 조선시대 변계량이 최영의 충정을 기리는 시를 지어 후세 사람에게 귀감이 되도록 했는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위엄을 떨쳐 나라를 구할 때 백발이 성성하구나
말을 배우는 거리의 아동도 모두 그의 이름을 알고 있고
한 조각 붉은 마음 영원히 죽지 않아
그 이름은 천추만세 태산과 같이 길이 남으리......


    한편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는 우왕을 귀양보내 죽이고 새로 창왕을 세운 후 정권을 한 손에 쥐고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했다.

 

 

 

고려말 국내외 정세


   
고려말의 국내외 정세는 참으로 복잡 미묘했다. 중국 대륙에서는 원이 명에 의해 옛 몽골 땅으로 쫓겨나 국호를 북원이라 바꾸어 겨우 국가의 명맥을 유지했고, 양자강 남쪽에서 일어난 한족의 부흥국인 명나라가 북진하여 북경에 도읍을 정하고 중국 대륙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명나라는 만주와 한반도 쪽으로 세력을 뻗쳐 철령위 사건을 일으켰다. 일본에서는 통일 왕조적 기능을 상실한 가마쿠라 막부의 무능과 부패로 도처에서 도적이 창궐했고, 그 가운데 하나인 왜구가 해안 지대를 침략하여 고려 정부를 괴롭혔다.


   이렇듯 중국 대륙에서의 동요와 홍건적, 왜구의 침입 등으로 국제 질서는 무너지고 고려의 국력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또한 당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던 불교계가 타락하여 지식인과 국민에게 신망을 잃음으로써 불교를 배척하는 신흥 사대부의 기운이 점차 확산되어 갔다. 뿐만 아니라 권문세가들이 불법적으로 국가와 개인의 토지를 강점하여 고려말의 개혁가 조준이 상소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나라의 공전은 바늘 하나 꽂을 땅도 남지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가의 수입은 격감하고, 자영 농민은 대부분 소작인이나 노비로 전락하여 국가와 백성이 함께 망할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