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사상 / 다음지식에서 내끄.... 님의 답변

2013. 10. 18. 05:06우리 역사 바로알기

 

 

 

 

 

      

한국윤리 原始信仰

 

 

애니미즘(animism)

무생물계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세계관. 물신숭배(物神崇拜)·영혼신앙(靈魂信仰) 또는 만유정령설(萬有精靈說)이라고도 번역되는 애니미즘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아니마(영혼)에서 나온 말이다. 영국의 인류학자 E.B.타일러가 《원시문화》(1871)에서 이 말을 처음 사용하였는데, 애니미즘적 사고방식은 ‘야만인의 철학’으로써 종교의 기원을 설명하는 동시에, 나아가서는 종교의 근본원리가 되었다고 주장한 데서 비롯된다. 타일러에 의하면 애니미즘적 사고방식은 꿈과 죽음의 경험에서 추리되어 성립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가령 잠자고 있는 동안 몸은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도 멀리 떠나 있는 꿈을 꾼다거나, 또는 죽음 직후에는 외관상 아무 변화는 없으나 살아 있을 때의 상태와는 다른 것을 느낀다. 그래서 육체와 유리되어 활동하는 원리, 즉 영혼을 상정(想定)하게 되었다. 수면과 가사(假死)는 영혼의 일시적 부재(不在)상태이며, 죽음은 그 영원한 부재상태이다. 그러나 사람이 죽고 난 뒤에도 영혼은 독립하여 활동하기 때문에 그것을 숭배하는 데서 종교가 비롯되었으며, 동물이나 나아가서는 자연물에까지 영혼을 인정함으로써 신의 관념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같은 타일러의 학설은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 종교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비판을 받기도 하고, 또한 원시인에게서 꿈이 그처럼 중대한 경험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두고 논란도 있었으나, 이원론(二元論)의 사고양식을 설명하는 양식으로서 아직도 그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 보통 사람이 넋을 잃으면 질병에 걸리거나 죽는다고 믿는데, 무당이 행하는 병치료법은 그같이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내어 환자의 육체에 되돌려주는 일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인디오 사회에서는, 인간과 특정의 동물이 넋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 신앙을 흔히 보게 되는데, 그 상대 동물이 죽으면 사람도 죽는다고 믿고 있다.

 

 

정령숭배(精靈崇拜, spiritism)

 

인간의 영혼 이외의 동·식물의 체내나 그 밖의 모든 사물에 그것과는 독립된 존재로서 잠정적으로 깃들어 있다고 생각되는 영혼을 숭배하는 일. 정령은 넓은 의미에서는 영혼·사령(死靈)·조령(祖靈)·영귀(靈鬼)·신성(神性)·귀신들을 포함하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신들과 같은 명확한 개성을 갖지 않은 종교적 대상을 말한다. 영국의 문화인류학자 E.B.타일러가 그의 저서 《Primitive Culture》(1871)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로서, 인간의 영혼이 외계의 사물에 적용된 것이 정령이라고 하였다. 원시종교나 민간신앙에서는 정령의 관념이 지배적이어서 정령에 대한 숭배도 성행하였다. 정령은 인간의 길흉화복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믿어지므로 두려운 마음에서 정령을 위무(慰撫)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의례가 행해진다. 한국의 ‘넋’, 미얀마의 ‘나트(nat)’, 태국의 ‘피(phi)’, 인도네시아의 ‘아니토(anito)’ 등은 모두 정령이라고 보아 무방할 존재들이다. 정령숭배는 조상숭배·자연숭배·샤머니즘 등과도 관계를 갖는가 하면, 또한 세계종교를 포함한 현대의 모든 종교의 기층부(基層部)와도 복잡한 관계로 얽혀 있어서 다양한 양상(樣相)을 나타낸다. 속신(俗信)의 유령도 그 한 종류이다. 타일러가 말한 애니미즘의 하나이지만, 그는 생령(生靈)을 종교의 기원으로 삼은 데 대하여 W.B.스펜서는 사령숭배를 가장 오래 된 신앙이라고 하였다. 사령(死靈)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화복(禍福)과 관계가 있다는 관념이 발달한 것은 농경 정주생활(定住生活)이 시작될 무렵부터이며, 사령의 운명에 대한 관념도 발달하여 음식물을 바치며 제(祭)를 지내게 된다. 사령에 대한 태도는 친애나 존경보다는 외포(畏怖)·공포와 같은 요소가 강하다. 특히 사령이 무사하게 사자(死者)의 나라에 도달하지 못하고 지상에 머무르거나 되돌아오는 것을 몹시 두려워한다. 사자에게 돈을 주거나 관(棺)을 회전시켜 돌아오는 길을 잊어버리게 하는 것 등은 그러한 데서 오는 주법(呪法)이다. 제사를 지내주는 사람이 없는 영을 더욱 무서워한다. 세월이 지나면 사령을 추선(追善)하거나 뼈를 씻는 등의 제2의 장례를 지내기도 하는데, 조령(祖靈)이라고 하는 존재가 되면 조상숭배(祖上崇拜)로 불리는 단계가 된다.

 

 

토테미즘(totemism)

 

토템 신앙에 의해 형성되는 사회체제 및 종교 형태. 토템이라는 말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인 오지브와족(族)이 어떤 종류의 동물이나 식물을 신성시하여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과 특수한 관계가 있다고 믿고 그 동·식물류(독수리·수달·곰·메기·떡갈나무 등)를 토템이라 하여 집단의 상징으로 삼은 데서 유래한다. 이와 같이 인간집단과 동·식물 또는 자연물이 특수한 관계를 유지하고 집단의 명칭을 그 동·식물이나 자연물에서 따붙인 예는 미개민족 사이에서 널리 발견되고 있다. 오늘날 토템이라는 말은 이런 유의 사회현상에 있어서 집단의 상징이나 징표로서의 동·식물이나 자연물을 가리키는 데 널리 쓰이며, 토테미즘이란 토템과 인간집단과의 여러 가지 관계를 둘러싼 신념·의례·풍습 등의 제도화된 체계를 가리킨다. 토템은 어느 특정 개인에 관계된 수호신이나 초자연력의 원천으로서의 동물, 또는 샤먼(무당)의 동물신 등과 동일시되는 일이 있어, 이런 입장에서 보는 토테미즘설도 있으나 현재에 와서 이것들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토템으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토템은 본래 집단적 상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어느 집단과 어느 동·식물, 자연물과의 결합이 토테미즘이라는 설도 그대로 긍정할 수만은 없다. 서아프리카의 표인(豹人:leopard men)의 비밀결사에서는 표범을 집단의 상징으로 삼고, 이것과 관계 있는 의식을 행하지만 이것을 토테미즘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어떤 현상이 토테미즘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에 합치되어야 한다. 그 조건 또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집단은 그 집단의 토템의 이름으로 불린다. ② 집단과 토템과의 관계는 신화·전설에 의하여 뒷받침되어 있다. ③ 토템으로 하고 있는 동·식물을 죽이거나 잡아먹는 일은 금기(禁忌)로 하고 있다. ④ 동일 토템 집단 내에서의 결혼은 금지되어 있다. ⑤ 토템에 대해서 집단적 의식을 행한다. 토테미즘은 현재도 북아메리카·오스트레일리아·멜라네시아·인도 등 넓은 범위에 존재하고 있으며, 전에는 남아메리카·폴리네시아·아프리카·북극 에스키모에도 존재했다고 한다. 토테미즘은 J.F.맥레넌의 조직적인 연구에 의해 1870년경부터 학계와 일반에게 알려지게 되었는데, E.뒤르켐의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 정밀한 연구에 의해서 종교기원론·본질론으로서 전개되었으며, 그 후의 조사연구로 여러 가지 측면이나 형태가 밝혀지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토테미즘을 제도적인 주술(呪術), 종교적 현상으로 보는 점에서는 여러 학문 사이에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으나 그 실체는 아직 충분히 해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샤머니즘(shamanism)

 

원시종교의 한 형태 또는 그 단계. 엑스터시[忘我·脫我·恍惚]와 같은 이상심리 상태에서 초자연적 존재와 직접 접촉·교섭하여, 이 과정 중에 점복(占卜)·예언·치병(治病)·제의(祭儀)·사령(死靈)의 인도(引導) 등을 행하는 주술·종교적 직능자인 샤먼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현상을 말한다. 북아시아의 샤머니즘이 가장 고전적·전형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역에 따라 여러 샤머니즘의 형태가 있으며, 다른 종교현상과 복합되어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원】 샤먼이란 말은 17세기 후반 트란스바이칼 지방과 예니세이강가에서 퉁구스인(人)을 접했던 한 러시아인에 의하여 알려졌는데, 이 말의 어원에 대하여 19세기의 동양학자들은 샤먼의 관념 내용과 병행하여 산스크리트의 승려를 뜻하는 시라마나(sramana), 팔리어(語)의 사마나(samana)에서 샤먼의 어원을 찾는 수입어설을 주장하였고, 20세기에 들어와서 J.네메스와 B.라우퍼 등은 퉁구스계 제종족 사이에서 주술사의 일종을 지칭하는 saman, saman, s’aman 등에서 유래하였다는 퉁구스 토착어설을 주장하였다. 이같이 샤먼의 어원에 대한 해설은 구구하나, 대체로 퉁구스 토착어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실제로 샤먼이란 말은 퉁구스·부랴트·야쿠트족에서만 쓰이는 말이며, 또한 샤먼의 역할이 북아시아 제종족 사이에서는 매우 중요하고 유사하지만 샤먼을 지칭하는 명칭은 여러 가지이고, 그 의미도 다양하다.

【분포】 본래 샤머니즘이라는 말은 북아시아의 제종족, 즉 보굴·오스댜크·사모예드·퉁구스족(族) 등 우랄 알타이 제종족과, 유카기르·축치 코리야크족 등의 고아시아족의 종교체계와 현상을 지칭한 것이었지만, 점차 종교학·민족학·인류학 등에서 세계 각지의 유사종교 현상을 의미하는 용어로서 널리 사용되었다. 샤머니즘이 처음 관찰된 곳이 시베리아이기 때문에, 샤머니즘의 지방적 의미는 일단 북아시아 제민족에서 행하는 종교현상을 지칭하는 것이 되었고, 또한 베링해협으로부터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북아시아 전역 자체 안의 ‘샤머니즘 문화파동(Schamanistsche Kulturwelle)’으로 인하여 북아시아 샤머니즘은 독자적 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샤머니즘은 가장 고전적·전형적 형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학문적 의미에서 볼 때 샤머니즘은 북아시아 이외에도 동아시아·동남아시아·중앙아시아와 남·북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지에 분포하는 하나의 원초적 종교형태이다.

【역사】 독일의 일부 고고학자들은 라스코 동굴벽화에서 남서 유럽 후기 구석기시대 샤머니즘의 존재를 상정(想定)하기도 하지만 이는 단정적인 것은 못된다. 시베리아 고고학의 성과에 의하면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야 희미하게나마 샤머니즘의 존재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한편 민족학의 측면에서는 샤먼의 보조령(補助靈)·보호령이 대부분 동물 모습의 정령이고, 샤먼의 복식에 해골·새·동물무늬의 모티프가 그려진다. 그리고 샤먼이 된 동기 중에, 샤먼 후보자가 해골로 화하고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체험을 한 자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샤머니즘은 동물층이라는 일련의 수렵민적 관념·습속에서 발생하였다고 한다. 또한 역사발전에 따른 사회·경제의 변천과 종교적 신앙의 변화를 동일선상에 놓고 샤머니즘의 기원을 토테미즘에서 찾는 종교사가들은, 샤먼은 원래 정령을 지배하는 일이 가능했던 토템 동물의 계승자로서,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발전하면서 토템 신앙에서 샤머니즘적 이데올로기와 의례로 진화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개는 샤머니즘이 계급발생 이전 시대와 식량의 수렵·채집 단계에서 생성·발달했다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입무(入巫)방법 및 과정】 M.엘리아데는 중앙·북동 아시아의 예로서 샤먼이 되는 방법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있다고 한다. ① 샤먼적 직능의 세습적 전달에 의한 샤먼, 즉 세습무(世襲巫) ② 신·정령의 소명(召命)에 의한 샤먼, 즉 강신무(降神巫) ③ 자유의지 또는 씨족의 의지에 의한 개인적 샤먼이 있다고 하는데, 이 중 세습무와 강신무가 전형적이다. 세습무이든 강신무이든, 장래의 샤먼 후보자는 어릴 때부터 그 소질을 보여 매우 신경질적이고 우울하며, 민감하고 몽롱하여 환각과 황홀상태에 빠지기 쉽다. 샤먼은 성별에 구애 없이 남자가 되기도 하고 또 여자가 되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입무과정에서는 무병(巫病)을 심하게 앓거나 환상 경험이라는 특수한 체험을 거치게 된다. 에스키모족(族)의 예를 보면 원인 모를 병을 앓거나 혼자 고행을 하다가 환상 속에서 신·정령을 만나게 되는데, 이러한 순간 이것을 경험한 사람은 신·정령과 접한 것으로 여겨 샤먼을 찾아가 병을 고친 뒤, 그 샤먼에게서 샤먼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배우고 나서 독자적인 샤먼이 된다. 그런데 샤먼이 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무병이나 환상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부족도 있다. 예를 들면 차리카우아 아파치족의 일부 샤먼은 환상을 경험하지 않고, 한 샤먼에게 학습하고 샤먼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이를 학습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경우 무병이나 환상을 경험한 샤먼과 비교하여 그 기능·능력면에서는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환상·무병을 경험하는 일은 신·정령의 부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회피할 수는 없다. 길리야크족의 한 샤먼이 “내가 만약 샤먼이 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그들이 이러한 강제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샤먼의 직능】 샤먼은 무격(巫覡)·주의(呪醫)·사제(司祭)·예언자, 신령(神靈)의 대변자, 사령(死靈)의 인도자 등으로 기능한다. 사람들은 샤먼이 엑스터시의 기술로 초인격적인 상태가 되어 초인적 능력을 발휘한다고 믿는다.

【한국의 샤먼】 샤먼을 한자(漢字)로 무격이라고 쓰는데, 무(巫:여성), 격(覡:남성)을 차용한 말이다. 따라서 샤머니즘을 무격신앙·무속(巫俗)신앙이라 하며, 샤먼을 무(巫)·무녀(巫女)·무당(巫堂)·무자(巫子)·무복(巫卜)·신자(神子)·단골·만신·박수·심방 등으로 부르지만, 대개는 남녀의 성에 따라 박수(남성)·무당(여성)의 호칭이 가장 많이 사용된다. 한국 무속의 샤머니즘 여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긍정·부정으로 학설이 나뉘며, 또한 북부의 강신무는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계통이고 남부의 세습무는 남방계의 주술사 계통이라는 설도 있으나, 무속은 그 전체가 샤머니즘이라는 것이 학계의 통념이다. 한국 무속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지만, 아주 오랜 고대사회 때부터 한민족의 주요한 신앙형태였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국조 단군이 무당이라는 설도 있지만, 무속이 문헌상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삼국시대로서, 신라 2대왕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은 왕호(王號)이자 무칭(巫稱)을 의미하며, 이 외에도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단편적으로 무당의 기록이 보인다. 이렇듯 오랜 역사를 가진 무속은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대다수 민중 속에서 크게 변질됨이 없이 존속되어 왔다. 무당의 형태는 지역에 따라 다소의 차이를 보이는데, 남부지역은 혈통을 따라 대대로 무당의 사제권이 계승되는 세습무가 지배적인 데 비해, 중·북부지역은 신(神)의 영력(靈力)에 의해 무당이 되는 강신무가 지배적이다. 이 같은 무당의 성격차에 따라서 무속의 신관(神觀)·신단(神壇)·제의식(祭儀式) 등 전반에 걸쳐 대조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단군(檀君)

 

한민족의 시조(始祖)로 받드는 고조선(古朝鮮:檀君朝鮮)의 첫 임금. 천제(天帝)인 환인(桓因)의 손자이며, 환웅(桓雄)의 아들로, BC 2333년 아사달(阿斯達: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조선을 개국하였다. 한국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고조선과 단군에 관한 기록으로는 중국의 《위서(魏書)》를 인용한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편(紀異篇)>에 실려 있는 자료가 있을 뿐, 정사(正史)인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 대조를 이룬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 권남(權擥)의 《응제시주(應製詩註)》에도 《삼국유사》와 비슷한 기술이 보이나, 단군에 관한 문제를 다룰 때에 우선 《삼국유사》의 기록을 사료(史料)로서 인용하고, 여기에 더 많은 신빙성을 둔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옛날 환인의 서자 환웅이 세상에 내려와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므로, 아버지가 환웅의 뜻을 헤아려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가 사람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의 신단수(神壇樹)에 내려와 신시라 이르니, 그가 곧 환웅천왕이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명(命)·병(病)·형(刑)·선(善)·악(惡)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렸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 살면서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이들에게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20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일렀다. 곰과 범은 이것을 먹고, 곰은 37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고 범은 못참아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熊女)는 그와 혼인해주는 이가 없어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배게 해달라고 축원하였다. 이에 환웅이 잠시 변하여 혼인하여서 아이를 낳으니, 그가 곧 단군 왕검(王儉)이다. 왕검이 당고(唐高:중국의 가장 오랜 역사 고전인 상서 첫머리에 올라 있는 제왕) 즉위 50년인 경인(庚寅:50년은 丁巳이니 틀린 듯하다)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으며, 이어서 백악산(白岳山)의 아사달로 옮긴 뒤 그 곳을 궁홀산(弓忽山)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 하였다. 단군은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주(周)나라 호왕(虎王)이 즉위한 기묘년(己卯年)에 기자(箕子)를 조선의 임금으로 봉한 후 장당경(藏唐京:황해도 신천군 文化面)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니 나이가 1,908세였다” 이 개국신화는 이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라 많은 해석이 나왔다. 한 예로서 이 신화는 고조선의 한 부족(部族)신화이던 것이, 훗날 고려시대에 대몽항쟁(對蒙抗爭) 등 민족의 단합이 요구되는 시대를 맞아서 민족의 시조로 받들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단군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는 《삼국유사》의 편찬시기가 앞에서 언급한 시대와 거의 같다는 점도 유의할 만하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평양에 사당을 짓고, 단군과 고구려의 동명왕(東明王)을 함께 모시기도 하였다. 한편, 민족의 형성과정과 관련된 단군신화에서 중심이 되는 곰 숭배사상이 한국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등지에 널리 퍼져 있던 고(古)아시아족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조상신이라는 점에서, 단군신화의 시대와 성격을 한국의 신석기시대 주민과 관련시키는 견해도 있다. 물론 이 신화를 청동기시대의 산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지배자의 출현을 빛내는 신화로 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단군신화 시대를 무문토기문화(無文土器文化)와 관련시키면서 환웅족(桓雄族)의 등장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는 견해도 있다. 이와 반대로, 역사과학의 입장에서 신화라는 것은 고대인의 한 관념형태이므로 단군신화를 곧 역사적 사실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원래 신화는 역사적인 사실 바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속에 담겨 있는 역사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으므로 어떤 맥락으로든 간에 신화의 의미는 풀려야 한다. 그러나 단군의 신화가 그대로 왕조사(王朝史)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도 무리이다. 아무튼 단군신화는 한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민족의 단합을 요구하는 구심체적(求心體的) 역할을 해왔다.

                                                             

 

고조선(古朝鮮)

 

BC 108년까지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존재한 한국 최초의 국가.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朝鮮)을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 ‘고조선’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그뒤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 용어가 널리 쓰였다. 지금은 단군이 건국한 조선과 위만조선을 포괄하여 고조선이라고 부른다. 고조선의 건국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단군신화에서는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기술하였으나, 그대로 믿기 어렵다. 건국연대를 위로 끌어올린 이유는, 역사가 오래될수록 그 왕조는 권위가 있으며 민족도 위대하다는 인식의 반영에 불과하다. 고조선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7세기 초이다. 이 무렵에 저술된 《관자(管子)》에 ‘발조선(發朝鮮)’이 제(齊)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보하이만[渤海灣] 북쪽에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랴오허[遼河]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 것이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집단이 성장하면서 큰 세력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세운 중심집단의 시조설화(始祖說話) 형식으로 만들어졌다가, 뒤에 고조선 국가 전체의 건국설화로 확대된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와 주(周)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제후들이 왕이라 칭하였는데, 이때 고조선도 인접국인 연(燕)나라와 동시에 왕을 칭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고조선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연을 공격하려다가 대부(大夫) 예(禮)의 만류로 그만두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조선은 BC 4세기 무렵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연과 대립하고, 또 당시 중국인들이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BC 3세기 후반부터 연이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고조선은 밀리기 시작하였다. BC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요하 상류에 근거를 둔 동호족(東胡族)을 원정한 다음 고조선 영역내로 쳐들어왔다. 이때 연은 요동지방에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고 장새(障塞)를 쌓았다. 그 결과 고조선은 서방 2,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고, 만번한(滿潘汗:랴오둥의 어니하 및 그와 합류한 청하의 하류지역에서 동북으로  성수산을 잇는 선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일대)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그 중심지를 요하 유역쪽에서 평양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그뒤 진(秦)나라가 연을 멸망시키고(BC 222), 요동군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고조선의 부왕(否王)은 진의 공격이 두려워서 복속할 것을 청하였지만, 직접 조회(朝會)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부왕이 죽고 아들 준왕(準王)이 즉위할 무렵 진(秦)이 내란으로 망하고, 대신 BC 202년 한(漢)이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은 진과 같이 동방진출을 적극 꾀하지 않고, 다만 과거 연이 쌓은 장새만을 수축하고 고조선과의 경계를 패수(浿水)로 재조정하였다. BC 195년 연왕(燕王) 노관(盧)이 한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지방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위만(衛滿)도 무리 약 1천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위만은 BC 194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우고,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에 입성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패배한 준왕은 뱃길로 한반도 남부로 가서 한왕(韓王)이 되었다.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조선이라고 부른다. 위만은 유이민집단과 토착 고조선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중국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진번·임둔 세력을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는 남쪽의 진국(辰國)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漢)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濊君) 남려(南閭) 세력은 한에 투항하였다. 이즈음 한은 동방진출을 본격화하였는데, 그것은 고조선과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양측은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한은 BC 109년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동원해 수륙 양면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였고, 고조선은 총력을 다하여 이에 저항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이탈되었다.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은 강화(講和)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여 호를 이끌고 남쪽의 진국으로 갔다. 또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상(相) 한음(韓陰), 이계상(尼谿相) 삼(參), 장군(將軍) 왕겹(王v)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長)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BC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한은 고조선의 영역에 낙랑·임둔·현도·진번 등 4군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이때 많은 고조선인들은 남쪽으로 이주하였고, 그들은 삼한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조선이 한의 대군을 맞아 약 1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고조선의 철기문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이었다. 고조선 후기에는 철기가 한층 더 보급되고, 이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고조선은 강력한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각 지배집단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조선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중앙정권으로부터 쉽게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조선 말기 지배층의 분열도 그러한 성격에 말미암은 바가 컸다. 지배층 사이의 취약한 결속력은 고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고조선 사회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지금 전하는 범금팔조(犯禁八條)를 통해 볼 때 계급의 분화가 상당히 진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제·신분제가 존재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명승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1266∼89)이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유사(遺事)를 모아서 지은 역사서(歷史書). 활자본. 5권 2책. 편찬 연대는 미상이나, 1281∼83년(충렬왕 7∼9) 사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현재까지 고려시대의 각본(刻本)은 발견되지 않았고, 완본으로는 1512년(조선 중종 7) 경주부사(慶州府使) 이계복(李繼福)에 의하여 중간(重刊)된 정덕본(正德本)이 최고본(最古本)이며, 그 이전에 판각(板刻)된 듯한 영본(零本)이 전한다. 본서는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더불어 현존하는 한국 고대 사적(史籍)의 쌍벽으로서,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史官)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사(正史)이므로 그 체재나 문장이 정제(整齊)된 데 비하여,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野史)이므로 체재나 문사(文辭)가 《삼국사기》에 못 미침은 사실이나, 거기서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史料)들을 수록하고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다. 즉, 그 중에서도 특히 고조선(古朝鮮)에 관한 서술은 한국의 반만년 역사를 내세울 수 있게 하고, 단군신화(檀君神話)는 단군을 국조(國祖)로 받드는 근거를 제시하여 주는 기록인 것이다. 그 밖에도 많은 전설·신화가 수록된 설화문학서(說話文學書)라고도 일컬을 만하며, 특히 향찰(鄕札)로 표기된 《혜성가(彗星歌)》 등 14수의 신라 향가(鄕歌)가 실려 있어 《균여전(均如傳)》에 수록된 11수와 함께 현재까지 전하는 향가의 전부를 이루고 있어 한국 고대 문학사(文學史)의 실증(實證)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일찍이 본서를 평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야 될 경우를 가정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삼국유사》의 체재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권1에 <왕력(王曆)> 제1과 <기이(紀異)> 제1을, 권2에 <기이> 제2를, 권3에 <흥법(興法)> 제3과 <탑상(塔像)> 제4를, 권4에 <의해(義解)> 제5를, 권5에 <신주(神呪)> 제6과 <감통(感通)> 제7과 <피은(避隱)> 제8 및 <효선(孝善)> 제9를 각각 수록하고 있다. <왕력>은 연표(年表)로서, 난을 다섯으로 갈라 위에 중국의 연대를 표시하고, 아래로 신라·고구려·백제 및 가락(駕洛)의 순으로 배열하였으며, 뒤에는 후삼국(後三國), 즉 신라·후고구려·후백제의 연대도 표시하였는데 《삼국사기》 연표의 경우와는 달리 역대 왕의 출생·즉위·치세(治世)를 비롯하여 기타 주요한 역사적 사실 등을 간단히 기록하고, 저자의 의견도 간간이 덧붙여 놓았다. <기이>편에는 그 제1에 고조선 이하 삼한(三韓)·부여(扶餘)·고구려와 통일 이전의 신라 등 여러 고대 국가의 흥망 및 신화·전설·신앙 등에 관한 유사(遺事) 36편을 기록하였고, 제2에는 통일신라시대 문무왕(文武王) 이후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까지의 신라 왕조 기사와 백제·후백제 및 가락국에 관한 약간의 유사 등 25편을 다루고 있다. <흥법>편에는 신라를 중심으로 한 불교 전래의 유래와 고승(高僧)들에 관한 행적을 서술한 7편의 글을, 다음의 <탑상>편에는 사기(寺記)와 탑·불상 등에 얽힌 승전(僧傳) 및 사탑(寺塔)의 유래에 관한 기록을 30편에 나누어 각각 실었다. <의해>편 역시 신라 때 고승들의 행적으로 14편의 설화를 실었고, <신주>편에는 밀교(密敎)의 이적(異蹟)과 이승(異僧)들의 전기 3편을, <감통>편에는 부처와의 영적 감응(感應)을 이룬 일반 신도들의 영검이나 영이(靈異) 등을 다룬 10편의 설화를 각각 실었으며, <피은>편에는 높은 경지에 도달하여 은둔(隱遁)한 일승(逸僧)들의 이적을 10편에 나누어 실었다. 마지막 <효선>편은 뛰어난 효행 및 선행에 대한 5편의 미담(美談)을 수록하였다. 이처럼 《삼국유사》의 저술은 저자가 사관(史官)이 아닌 일개 승려의 신분이었고, 그의 활동 범위가 주로 영남지방 일원이었다는 제약 때문에 불교 중심 또는 신라 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북방계통의 기사가 소홀해졌으며, 간혹 인용 전적(典籍)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을 뿐더러, 잘못 전해지는 사적을 그대로 모아서 수록한 것도 눈에 뜨이나, 그것은 《삼국유사》라는 책명(冊名)이 말해 주듯이 일사유문적(逸事遺聞的) 기록인 탓에 불가피한 일이었다 하겠으며, 당시의 민속·고어휘(古語彙)·성씨록(姓氏錄)·지명 기원(地名起源)·사상·신앙 및 일화(逸話) 등을 대부분 금석(金石) 및 고적(古籍)으로부터의 인용과 견문(見聞)에 의하여 집대성해 놓은 한국 고대 정치·사회·문화 생활의 유영(遺影)으로서 한민족(韓民族)의 역사를 기록한 일대 서사시(敍事詩)라 할 수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에 있어 유교의 합리주의적 사고(思考) 또는 사대주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누락시켰거나, 혹은 누락되었다고도 보여지는 고기(古記)의 기록들을 원형대로 온전히 수록한 데에 오히려 특색과 가치를 지니며, 실로 어느 의미에서는 정사(正史)인 《삼국사기》 이상의 가치를 지닌 민족사의 보전(寶典)이라 일컬을 만하다. 《삼국유사》의 신간본(新刊本)으로는 1908년 간행된 일본 도쿄대학 문학부[東京大學文學部]의 사지총서본(史志叢書本)이 가장 오래된 것이고, 조선사학회본(朝鮮史學會本)과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의 최남선 교감본(校勘本) 및 그의 증보본(增補本)이 있으며, 그 밖에 1921년 안순암(安順庵) 수택(手澤)의 정덕본을 영인(影印)하여 일본 교토대학 문학부 총서[京都大學文學部叢書] 제6에 수록한 것과 고전간행회본(古典刊行會本)이 있다. 8·15광복 후로는 삼중당본(三中堂本), 1946년 사서연역회(史書衍譯會)에서 번역하여 고려문화사(高麗文化社)에서 간행한 국역본(國譯本), 이병도(李丙燾)의 역주본(譯註本) 등 여러 가지가 있고, 동서문화센터의 이학수(李鶴洙) 영역본(英譯本)과 54년 《역사학보(歷史學報)》 제5집의 부록으로 이홍직(李弘稙)의 삼국유사 색인이 발간된 바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시대에 김부식(金富軾) 등이 기전체(紀傳體)로 편찬한 삼국의 역사서. 1145년(인종 23) 국왕의 명령을 받은 김부식의 주도 아래 최산보(崔山甫) 등 8명의 참고(參考)와 김충효(金忠孝) 등 2명의 관구(管勾)가 편찬하였다. 이들은 자료의 수집과 정리에서 함께 작업했지만,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와 머리말, 논찬(論贊) 및 사료의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은 김부식이 직접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진삼국사기표〉에는 “사대부가 우리 역사를 잘 알지 못하니 유감이다. 중국 사서는 우리 나라 사실을 간략히 적었고, 《고기(古記)》는 내용이 졸렬하므로 왕·신하·백성의 잘잘못을 가려 규범을 후세에 남기지 못하고 있다”고 하여 편찬 동기를 기록하고 있다. 구성은 크게 본기(本紀) 28권, 지(志) 9권, 연표(年表) 3권, 열전(列傳) 10권으로 이루어졌다.

【본기】 신라 12권(신라 5, 통일신라 7), 고구려 10권, 백제 6권으로 구성되어 신라에 그렇게 편중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정치·천재지변·전쟁·외교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정치 부문은 축성(築城)과 순행(巡幸), 관제 정비와 인사 이동, 조상과 하늘에 대한 제사라는 종교 관례 등이 서술되어, 당시 삼국의 사회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축성은 백제가 가장 많아 늘 전쟁을 치렀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순행은 1·2월에 많이 했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수렵을 목적으로 한 것이 많았던 반면에, 신라는 구휼과 권농 및 수렵 등 다양한 목적을 띠고 있었다. 인사 이동은 신라에서 가장 빈번하였으며, 종교 관례는 백제에서 많이 하였다. 천재지변 부문은 혜성·유성·일식·가뭄·홍수 등 600여 회의 천재와, 지진·화재 등 330여 회의 지변으로 구분되는데, 이들은 주로 정치적 사건을 예언하는 기능을 하였다. 전쟁 부문은 전체 440여 회의 전쟁이 발생하는데 대체로 고구려는 이민족, 백제는 신라와 전쟁하였다. 외교 부문은 620여 회의 교섭기록이 있는데 주로 조공(朝貢)을 중심으로 한 대중국 외교가 많았다. 물론 삼국은 독립국가로서 외교관계를 맺은 것이며 중국에 종속된 것은 아니었다.

【연표】 상·중·하로 구성되었는데 내용이 소략하다. 상(上)은 BC 57년(박혁거세 즉위)부터 274년(미추왕 13), 중(中)은 275년(미추왕 14)부터 608년(진평왕 30), 하(下)는 608년(진평왕 30)부터 935년(경순왕 9) 신라가 멸망한 다음해인 936년 후백제의 멸망까지 기록되어 있다.

【지】 제1권은 제사와 악(樂), 제2권은 색복(色服)·거기(車騎)·기용(器用)·옥사(屋舍), 제3~5권은 신라 지리, 제6권은 고구려·백제 지리, 제7~9권은 직관(職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지리지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통일 뒤에 넓혀진 영토 관념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제사지는 5묘(廟)·3사(祀)에 대한 설명이 많이 차지하고 있고, 악지는 악기·가악(歌樂)·무(舞)·악공, 직관지는 중앙관부·궁정관부·무관과 외직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열전】 기전체의 역사서로서는 열전이 빈약한 편이다. 전체 69명을 대상으로 했지만 특별히 항목을 분류하지는 않았다. 제1~3권은 김유신 열전이고, 제4권은 을지문덕·거칠부 등 8명의 열전, 제5권은 을파소(乙巴素) 등 10명의 열전, 제6권은 강수(强首)·최치원 등 학자들의 열전, 제7권은 관창(官昌)·계백(階伯) 등 순국열사 19명의 열전, 제8권은 솔거(率居)·도미(都彌) 등 11명의 열전, 제9권은 연개소문·창조리(創助利) 등 반신(叛臣)의 열전, 제10권은 궁예·견훤 등 역신(逆臣)의 열전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 동안 이 책에서 가장 주목되어 왔던 것은 사론(史論)의 성격을 지닌 논찬(論贊)이다. 논찬은 신라본기 10개, 고구려본기 7개, 백제본기 6개, 열전 8개 등 모두 31개가 있다. 내용은 주로 유교적 덕치주의, 군신의 행동, 사대적인 예절 등 유교적 명분과 춘추대의를 견지한 것이지만 반면에 한국 역사의 독자성을 고려한 현실주의적 입장을 띠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신채호 등이 비난한 것처럼 사대적인 악서(惡書)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이 단순히 사대주의의 산물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은 이것이 편찬된 시기와도 관련된다. 즉 이 책은 고려 귀족문화가 최고로 발전하던 시기의 산물이었다. 이런 시대는 대체로 전 시기의 역사를 정리하는 때인데, 특히 당시에는 거란 및 여진과 전쟁한 뒤 강력한 국가의식이 대두하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단지 유교정치 이념의 실현만이 아니라 국가의식의 구현이라는 차원에서 편찬되었던 것이다. 그 밖에도 이 책은 전근대 역사서의 특징인 술이부작(述而不作)의 객관성을 유지했는데, 이를 유지하기 위해 《고기》 《신라고사(新羅古史)》 《구삼국사(舊三國史)》 《삼한고기(三韓古記)》와 최치원의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및 김대문의 《화랑세기》 《고승전》 《계림잡전》과 《삼국지》 《후한서》 《위서(魏書)》 《진서(晉書)》 《송서(宋書)》 《남북사(南北史)》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오히려 한국 전근대 역사서술을 한 차원 높여주는 역할을 했는데 이 점은, 첫째 삼국을 1세기부터 완성된 국가로 파악하고 국왕을 절대적 지배자로 이해했으며, 둘째 천재지변과 인간활동을 연결시키면서 역사를 바라보고 국왕의 정치행동을 연결시켰으며, 셋째 역사를 교훈을 위한 것으로 파악하였으며, 넷째 강한 국가의식과 자아의식을 강조하였고, 다섯째 역사에서의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였다는 것에 잘 나타난다. 이 책은 1174년(명종 4) 사신을 통해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전에 초판을 간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13세기 후반에 성암본(誠庵本)이 만들어졌는데, 현재는 일부만 일본 궁내청(宮內廳)에 소장되어 있다. 다음으로 1394년(태조 3)에 3차 간행, 1512년(중종 7)에 4차 간행이 있었다. 4차 간행은 현재 완질의 형태로 옥산서원과 이병익(李炳翼)이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1760년(영조 36)에 간행된 것이 있는데, 러시아과학원 동방연구소 상트페테르부르크지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95년 서울대학교 허성도(許成道) 교수가 25년의 노력 끝에 CD-ROM책을 출판하였다.

                                                               

 

고구려(高句麗)

 

졸본지방(卒本地方)에서 일어나 한반도 북부와 중국 둥베이[東北]지방을 무대로 하여 발전한 고대국가.

【성립과 발전】 전설에 따르면 BC 37년에 주몽(朱蒙)이 이끈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佳江:渾江) 유역에 건국하였다고 한다. 고구려는 일찍이 기마민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졸본지방에서 일어나 동방 침입의 요로인 퉁거우[通溝]로 옮긴 뒤 낙랑군과 임둔군(臨屯郡)의 교통로를 단절시키는 등 한족(漢族)과의 투쟁과정에서 강대해졌다.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된 이후 현도군(玄郡)의 지배권 안에 있었으나 태조왕(太祖王:재위 53∼146) 때부터 강력한 대외발전을 꾀하였다. 태조왕은 현도군을 쳐서 푸순[撫順] 방면으로 축출하였고, 요동군(遼東郡)과 낙랑군(樂浪郡)을 공격하여 청천강 상류까지 진출하였으며, 임둔군의 옛 땅에 자립한 옥저(沃沮)와 동예(東濊)를 복속시켜 동해안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는 왕위의 형제상속제를 확립하여 고대국가체제를 갖춤으로써 고구려의 실질적인 시조가 되었다. 고국천왕(故國川王:재위 179∼197)은 왕위의 부자상속제(父子相續制)를 마련하였고, 5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는 등 체제 정비를 단행하여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다. 동천왕(東川王:재위 227∼248) 때는 중국의 위·오(吳)·촉(蜀) 3국의 대립시기였는데, 이때 동천왕은 요동군의 실권자 공손 연(公孫淵)과 통교하고 위나라를 견제하는 등 국제적 안목을 넓혔으나, 242년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다가 관구 검(丘儉)의 반격을 받아 서울인 환도성(丸都城)까지 함락되었다. 봉상왕(烽上王) 때는 선비족인 전연(前燕)의 모용 외(慕容?의 침입을 두 차례 받는 등 위기를 겪다가 313년 미천왕(美川王:재위 300∼331) 때는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 한반도에서 한사군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영토확장과 전성기】 소수림왕(小獸林王:재위 371∼384) 때는 불교 공인과 태학(太學) 설립(372), 율령(律令) 반포(373) 등으로 국가체제 정비와 정치적 안정기반을 구축하였다. 이와 같은 단계에서 즉위한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은 정복 군주로서 백제의 한성(漢城)을 침공하여 임진강과 한강선까지 진출하였고, 신라 내물왕(奈勿王)을 원조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북으로는 후연(後燕)을 쳐서 요동(遼東)을 차지하고 숙신(肅愼)을 복속시켜 만주와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장수왕(長壽王)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제도의 정비와 대외정책의 확대 등으로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중국의 남·북조(南北朝:北魏·宋)와 통교하였고, 유연(柔然) 등 새외(塞外) 민족과도 통교하면서 외교관계를 확대하여 중국을 견제하였다. 427년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수도를 고조선의 문화 유산지인 평양으로 천도하여 집권적 정치기구를 정비하고 국력을 신장시켰다.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낀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羅濟同盟)을 체결하였다. 472년(개로왕 18) 백제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의 남침을 막기 위해 군사를 청하기도 하였다. 장수왕의 남하정책의 목표는 한강 유역이며, 그 요충지는 충주(忠州) 지방이었다. 475년 결국 그는 백제의 한성을 침공하여 함락하고 개로왕(蓋鹵王)을 패사(敗死)시켜 고국원왕(故國原王)의 한을 풀고 아산만(牙山灣)까지 진출, 한강 유역을 지배하였다. 이때 백제는 수도를 웅진(熊津:공주)으로 옮기고,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신라는 죽령(竹嶺) 이북의 땅을 잃었다. 장수왕의 뒤를 이은 문자명왕(文咨明王)은 494년 부여(夫餘)를 복속시켜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중국과 자웅(雌雄)을 겨루었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와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가 당시의 광대한 판도를 밝혀주고 있다.

【수·당나라와의 투쟁】 6∼7세기 초의 정세를 보면, 589년 나제동맹이 체결되고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북진정책을 취하였으며, 위(魏)·진(晉)·남북조로 분열된 중국을 589년 수나라가 통일함으로써 고구려는 요동(遼東)에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때 동아시아의 정세는 돌궐(突厥)·고구려·백제·일본을 연결하는 남북 진영과 수(隋:후에는 唐)나라와 신라가 연결하는 동서 세력으로 갈라져 대립상태에 놓였다. 고구려 영양왕(陽王)은 진흥왕의 북진 정책으로 한강 유역 및 함경도 일대를 상실하자 남하정책을 포기하고 서진정책(西進政策)을 단행, 요서(遼西) 지방을 공격함으로써 수나라와 충돌하였다. 598년(영양왕 9) 수나라 문제(文帝)는 수륙군(水陸軍) 30만으로 침입하였으나 고구려의 반격과 질병·풍랑으로 퇴각하였다. 그 뒤 수나라 양제(煬帝)는 돌궐족을 복속시킨 뒤, 612년 113만 대군으로 요하(遼河)를 건너 요동성(遼東城:遼陽)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군의 강력한 항전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자 양제(煬帝)는 다시 약 30만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왔으나,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살수(薩水)에서 섬멸함으로써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이었다. 이로써 수나라는 618년 내란이 일어나서 망하고 당(唐)나라가 건국되었다. 이때 고구려는 당나라와 대립하고 돌궐 등과는 내왕하였기 때문에 당나라 태종(太宗)이 즉위하면서 고구려에 침입하려는 야심을 보이자, 고구려도 다롄[大連]과 부여성(눙안)을 연결하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기 시작하였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정권을 잡은 뒤부터는 당나라에 대한 태도가 더욱 강경하였고, 당나라와 연결한 신라를 백제와 더불어 자주 공격하였다. 한편, 당나라는 돌궐을 복속시키고 서역(西域)을 평정하였으며, 고구려의 세력권 내에 있던 거란족을 꾀어 고구려를 배반하게 하는 등 침공태세를 갖추었다. 645년(보장왕 4) 당나라 태종은 이적(李勣:李世勣)·장량(張亮)을 앞세우고 30만 군으로 요하를 건너, 50만 석의 군량이 있는 요동성을 점령하여 전진기지로 삼고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약 60일 사투(死鬪)하여 당나라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 뒤에도 당나라는 2차·3차(647년·648년)에 걸쳐 이적·우진달(于進達)·설만철(薛萬徹) 등을 보내어 침입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정치제도】 고구려의 정치적 기반으로는 소노부(消奴部)·계루부(桂婁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의 5부족 연맹의 조직을 들 수 있다. 처음에는 소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태조왕 때부터 계루부의 고씨(高氏)가 왕위를 대신하였다. 절노부는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왕비족으로 등장하였고, 전 왕족인 소노부, 왕족인 계루부·절노부의 대가(大加:嫡統大人)에게는 고추가(古雛加)라는 특별 칭호를 주었다. 이는 신라의 갈문왕(葛文王), 백제의 길사(吉師)와 같이 귀인(貴人)이라는 뜻이다. 고구려 초기의 관제는 왕 아래에 상가(相加)·대로(對盧)·패자(沛者), 이하 주부(主簿)·우태(優台)·승(丞) 등의 관리가 있었고, 왕과 제가(諸加)는 사자(使者)·조의(衣)·선인(先人) 등의 가신(家臣)을 거느렸다. 평양 천도 이후 행정조직과 관등(官等)조직이 정비되어 수상인 대대로(大對盧)·태대형(太大兄) 등 10여 관등이 정비되었고, 수상은 원칙적으로 3년마다 선거로 뽑았다. 수상인 대대로는 대막리지(大莫離支)·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라는 별칭이 있었다. 관등명을 보면 형(兄)·사자(使者)가 붙은 것이 많았는데, 형은 연장자라는 뜻으로 족장의 자리를 계승한다는 의미이며, 사자는 지방의 조세징수자의 뜻을 의미하는 것이다. 행정구역은 중앙을 동·서·남·북·중(내)의 5부로 나누어 대가가 통치하였다. 지방행정구역은 5부의 연맹체가 5부의 행정구역으로 전환되었다. 각 부 밑에는 여러 성(城)이 딸려 있었다. 각 부의 장을 욕살(褥薩), 성(城)의 장을 처려근지(處閭近支) 또는 도사(道使)라고 불렀다. 이 지방장관은 관리와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겸직하였다. 특수행정구역으로 평양성·국내성(國內城:通溝)·한성(漢城:載寧)을 삼경(三京)이라고 하였다. 군사제도는 군사조직을 행정조직과 일치시켜 욕살·도사 들은 자기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국가에서 동원할 때는 군대 편성에 대모달(大模達)·말객(末客) 등의 군관이 되어 지휘하게 하였다.

【사회·경제】 3세기경의 총 호수는 3만 호, 지배계급 수가 1만여 명, 멸망 전의 총 호수는 69만 7,000이고, 성곽 수는 176에 달하였다. 지배층인 왕족과 관료는 정치·군사·교육 등을 담당하고 생산에 종사하지 않았으며, 농민·노비 등은 하호(下戶)라고 하여 생산에 종사하는 피지배층이었다. 삼국시대에는 고리대금업도 성행하여 평민을 노비로 몰락시키는 폐단이 생기자, 194년 고국천왕은 이를 막고자 을파소(乙巴素)를 등용하고 진대법(賑貸法)을 마련하여 빈민구제에 힘썼다. 부족국가시대의 제가회의(諸加會議)는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고구려 사회는 법률이 엄하여 반역자는 불로 태우고 목을 잘랐으며, 살인자와 전쟁에 패한 자는 목을 잘랐고, 도둑질을 한 자는 12배의 배상을 물렸으며, 우마(牛馬)를 죽인 자는 노비로 삼았다. 조세제도(租稅制度)는 곡식으로 매호(每戶)에서 받는 조(租)와, 베[布]나 곡식으로 개인에게서 받는 인두세(人頭稅)가 있었다. 산업은 직조기술이 발달하였고, 일본에 전파된 물품과 기술을 보면 철공·종이·묵필·맷돌이며 모피류가 수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역은 주로 남·북 중국 및 유목민족인 북방족들과 하였다.

【문화와 교육】 소수림왕(小獸林王) 때인 372년에 불교가 수입되었고, 이와 더불어 서역(西域)과 중국의 문화가 들어와 넓은 문화 세계를 인식하게 되었으며, 373년에는 율령(律令)이 반포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대학격인 태학(太學)이 372년에 설립되어 오경(五經)·삼사(三史) 《삼국지(三國志)》 《문선(文選)》 등을 가르쳐 한학(漢學) 교육이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초에 지방에 둔 경당(堂)은 사립학교로 경전(經典)과 기마(騎馬)·궁술(弓術) 등의 무술을 가르쳤다.

【국사편찬】 한학의 보급과 발달로 국사(國史)가 편찬되었는데, 《유기(留記)》(편찬자·연대 미상) 100권과, 600년(영양왕 11)에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의 《유기》 신집(新集) 5권 등이 편찬되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시가와 음악】 시가(詩歌)로는 유리왕(瑠璃王)의 《황조가(黃鳥歌)》, 법정사(法定師)의 《영고석(詠孤石)》, 을지문덕의 오언시(五言詩) 등이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전하며, 관(管)·현(絃)·격타악(擊打樂) 등 17종의 악기가 있었다. 왕산악(王山岳)은 양원왕(陽原王) 때 진(晉)나라 칠현금(七絃琴)을 개량하여 거문고를 만들었고, 100여 곡을 작곡하였다.

【미술】 고구려 예술의 특징은 와당(瓦當)의 귀신상(鬼神像)과 사신도(四神圖)의 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힘과 정열이 넘치고 있는 점이다. 특히 미술은 고분(古墳:굴식돌방무덤)에서 그 대표적 예를 찾아볼 수 있는데, 무용총·수렵총·각저총(角抵塚) 등의 초기 벽화는 고졸(古拙)하고, 감신총(龕神塚) 등 중기의 그림은 섬세하며 사실적(寫實的)이고, 사신총(四神塚) 등 후기 벽화는 웅대하며 건실하다. 강서고분(江西古墳)에 그려진 사신도(四神圖)는 벽화 중에서 최우수 작품으로 흑·백·청·주홍·갈색 등으로 빛깔의 조화미는 물론, 힘과 패기가 넘치며, 쌍영총(雙楹塚)의 기마상(騎馬像)·남녀입상(男女立像), 30여 인물행렬도와 풍속도는 당시의 풍속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불교】 372년(소수림왕 2) 전진(前秦)의 왕 부견(竪)의 명으로 순도(順道)가 불경(佛經)과 불상(佛像)을 가져왔고, 374년에는 동진의 승려 아도(阿道)가 들어와 불법을 전파하였다. 고국양왕(故國壤王:재위 384∼391) 때는 영(令)을 내려 불법을 숭상하도록 권장하였고, 광개토대왕 때인 392년에는 평양에 9개의 절을 지었으며, 395년에는 동진의 승려 담시(曇始)가 들어와 활발히 전도하였다. 평원왕(平原王) 때 승려 의연(義淵)은 위(魏)·제(齊)나라의 양대 고승인 법상(法上)에게 불교사를 배웠다. 영류왕(榮留王) 때 혜관(慧灌)은 625년 일본에 건너가 삼론종(三論宗)의 개조(開祖)가 되었고, 평원왕 때 담징(曇徵)은 일본의 호류사[法隆寺] 금당(金堂)의 벽화를 그렸으며, 지묵·맷돌 등을 전하였다. 특히 혜량(惠亮)은 신라에 들어가 진흥왕 때 국통(國統)·주통(州統)·군통(郡統)의 교단조직에 공헌, 초대 국통이 되었으며, 영양왕 때 보덕(普德)은 연개소문의 도교(道敎) 장려로 백제에 들어가 열반종(涅槃宗)을 개창(開創)하였다. 고구려에서 유행된 종파는 대승불교(大乘佛敎)인 삼론종이었다.

【도교】 도교(道敎) 전래에 관한 기록은 624년(영류왕 7) 당나라 고조 이연(李淵)이 도사(道使)를 파견하여 도법(道法)을 강론하도록 한 것으로 되어 있다. 643년 보장왕(寶藏王) 때 연개소문의 도교 장려책으로 숙달(叔達) 등 도사 8명이 입국하였다. 이때 불교를 탄압하였으므로 보덕이 백제로 망명하는 등 불교세력이 쇠퇴하였다.

【풍속】 고구려인은 검소·청결하고 상무적(尙武的)이며 기사(騎射)에 능하였다. 가옥은 왕궁과 관청·사원 등에만 기와를 덮고, 일반 민가는 초가(草家)였으며 온돌을 사용하였다. 귀족의 모자는 소골(蘇骨)이라고 하여 깃[羽]과 금으로 장식한 비단으로 된 관을 썼으며, 관리는 등급에 따라 복색(服色)이 다르고 무사(武士)는 절풍(折風)이란 건을 썼다.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주름잡은 치마를 입었으며, 남자는 큰 소매가 달린 저고리와 통넓은 바지를 입었고 상투를 틀었다. 상류층에서는 바둑·투호(投壺)·축국(蹴鞠) 등 대륙식 오락을 즐겼고, 하류층에서는 무도·음악·석전(石戰)·씨름 등을 즐겼다. 장례(葬禮) 풍속은 껴묻거리를 관 속에 넣는 후장(厚葬)의 풍속이 있었다. 특히 10월에는 시조신(始祖神)을 모시는 동맹(東盟)이란 제전을 열어 부족의 전통을 재확인하고 결속을 강화하였다.

【고구려의 멸망】 668년(보장왕 27) 나·당 연합군과의 싸움에 패함으로써 주몽 이래 700여 년을 이어온 고구려 왕조는 막을 내렸다. 당시의 내정은 70여 년에 걸친 수·당나라를 비롯한 거란·신라와의 투쟁으로 인한 인적·물적 손실은 많은 국력을 소모시켰다. 그리고 연개소문의 독재는 민심을 혼란시켰고, 666년 연개소문이 병사한 후 남생(男生)·남건(男建)·남산(男産) 세 아들의 불화로 지도층이 분열되었으며,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淵淨土)는 12성(城)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하였고, 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하는 등 내분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기회를 이용한 나·당 연합군은 668년 김인문(金仁問)이 이끈 27만의 신라군과 이적·설인귀(薛仁貴)가 이끈 당나라 군사 50만으로 평양성을 공격·함락시켰다. 이때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고 설인귀로 하여금 통치하게 하였고, 고구려의 영토를 9도독부(都督府) 42주(州)로 나누어 지배하는 한편, 2만 8200호를 당나라로 강제 이주시켰다.

 

태학(太學)

 

고구려·고려시대의 교육기관.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 전진(前秦)의 제도를 본떠 국립학교로서 중앙에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역사상 학교교육의 시초가 된다. 상류계급의 자제들만이 입학할 수 있는 귀족학교였으며 경학(經學)·문학·무예 등을 가르쳤다. 고려시대에는 국자감(國子監)의 한 분과(分科)로 인종 때 설치하였다. 대학(大學)이라고도 하며 정원은 300명으로, 문무관 5품 이상의 자손과 3품관의 증손에 한하여 입학할 자격을 주었다. 박사(博士)·조교(助敎) 등 교관을 두어 《역경(易經)》 《시경(詩經)》 《서경(書經)》 《삼례(三禮)》 《삼전춘추(三傳春秋)》 《효경(孝經)》 《논어(論語)》 등을 가르쳤으며 수업연한은 8년 반이었다.

 

경당(경堂)

 

고구려 때 평민층의 자제들을 위하여 설립한 사립 교육기관. 혼인하기 이전의 지방 평민층 자제들이 모여 경전을 외우고 사격술을 익히는 문무 겸수의 사설학숙(私設學塾)이었다. 이 무렵의 고구려에는 상류계급의 자녀를 가르치는 태학(太學)이 있었는데, 경당의 설치시기는 관학(官學)인 태학이 설립된 372년(소수림왕 2) 이후, 특히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인 것으로 짐작된다.

                                                             

 

백제(百濟)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온조왕(溫祚王)을 시조로 하여 BC 18년 현재의 한강 북쪽의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건국한 고대 삼국 중의 하나. 그러나 한강 유역을 통합하고 율령(律令)을 반포하는 등 실질적인 시조로 등장한 것은 고이왕(古爾王)이며, 근초고왕(近肖古王) 때 마한(馬韓) 전역을 통합한 뒤 크게 발전하여 역대 31왕(王)으로 이어지면서 660년까지 존속한 고대 왕국이다. 유리한 자연환경과, 지배층이 북방 유이민(流移民)을 모체로 한 단일체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등의 이점(利點)으로 일찍부터 정치·문화적 선진성(先進性)을 과시하고, 4세기 중엽에는 일본, 중국 랴오시[遼西] 지방·산둥반도[山東半島] 등지와 연결되는 고대의 해외 상업세력을 형성하였으며, 특히 일본 고대문화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성립과 발전】 고이왕(234∼286)은 16관등급, 6좌평(佐平)의 관제를 정비하고 관복(官服)제정, 율령 반포, 남당(南堂) 설치 등 고대국가의 체제를 마련하여 백제의 실질적 시조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낙랑군(樂浪郡)의 압력을 배제하면서 한강 유역을 통합하였다. 백제의 전성기인 근초고왕(346∼375) 때에는 정복군주로서 대방군(帶方郡)의 옛 땅을 확보하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살해하는 등 국위를 떨쳤다. 한편 마한을 완전히 통합하여 그 세력이 오늘날의 전라도 남해안까지 미치고, 중국 랴오시 지방까지 진출하는가 하면 중국의 남조(南朝)인 동진(東晉)과 통교하여 문화를 수입하고 다시 일본과도 접촉하여 한학(漢學)을 전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근초고왕 치세(治世)를 전후로 한 4세기 중엽에는 랴오시 지방, 산둥 반도 및 일본의 북부 규슈[九州] 지방까지 진출하여, 고대상업 세력을 형성하고, 특히 중국의 송(宋)·제(齊)·양(梁) 나라와의 교역은 물론, 일본에 대한 한반도의 문화이식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제17대 아신왕(阿莘王) 5년(396)에는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의 군대에 패하여 한성을 침공당하고 한강선(漢江線)까지 후퇴하여 임진강 유역을 잃었다. 비유왕(毗有王:427∼455)때에는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남하정책에 대비하여 신라 눌지왕(訥祗王)과 나제동맹(羅濟同盟:433)을 체결하여 고구려에 대항했으나 개로왕(蓋鹵王:455∼475) 때에는 장수왕의 압력이 더욱 가중되었다. 결국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에 침공하여 개로왕을 패사시키고 한강 유역이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 때 문주왕(文周王:475∼477)은 수도를 웅진(熊津:공주)으로 천도하였으나(475) 국세는 더욱 쇠약해졌다. 삼근왕(三斤王)에 이은 동성왕(東城王:479∼501)은 남제(南齊)와 외교하고, 신라 소지왕(炤知王)과 결혼동맹(結婚同盟:493)을 맺어 양국의 유대관계를 굳혔으나 임류각(臨流閣) 같은 궁전을 짓고 방종과 사치에 젖어 끝내 반신(反臣)인 좌평 백가(J加)에게 피살되었다. 무령왕(武寧王:501∼523)이 즉위하면서 안으로는 전국에 22개의 담로(魯:邑에 해당하는 행정단위)를 설치하여 왕족을 파견, 지방 통치를 강화하고 밖으로는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平山)을 공격하여 영토를 넓혔다. 또한 말갈(靺鞨)의 침입에 대비하는 한편 중국의 양나라와 통교하면서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聖王:523∼554)은 부왕(父王)의 업적을 기반으로 하여 중흥의 군주로 활약하였다. 그는 수도를 사비(泗?부여)로 천도하고(538)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개칭하는 한편, 중앙에 22부를 두고 지방을 5부, 5방 제도로 정비하여 국력의 쇄신에 진력하였다. 그는 중국 남조인 양나라와 통교하여 문물을 수입하는 한편,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썼다. 그리고 신라 진흥왕(眞興王)과 제휴하여 독산성(獨山城:지금의 禮山으로 추정)에 침입해온 고구려군을 격퇴시키는 등 한강 유역을 확보하였으나, 신라 진흥왕의 배반으로 나·제동맹은 결렬되고(553) 관산성(管山城:沃川)에서 싸우다가 왕이 전사(554)하여 한강 유역은 신라가 지배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백제의 국운은 날로 쇠약해지기만 하고 위덕왕(威德王)·혜왕(惠王)·법왕(法王)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600∼641)·의자왕(義慈王:641∼660) 때 지나친 토목공사와 신라의 침공 등으로 국력이 극도로 소모되고 민심이 이반함으로써 국정은 문란해졌다.

【멸망】 무왕의 뒤를 이은 의자왕은 초기에 문신인 성충(成忠)·흥수(興首), 무신인 윤충(允忠)·계백(階伯) 등을 등용하여 선정을 베푸는 한편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김품석(金品釋)과 그의 처자를 죽이는 등 신라에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643년에 고구려와 화친한 것을 계기로 당항성(黨項城)을 공략하는 등 지나친 외정과 사치스런 태자궁(太子宮)·망해정(望海亭)의 건축 등 향락에 빠지고 흥수·성충 등의 인재 배척이 민심을 이반시키면서 국정은 문란해졌다. 이 틈을 타고 나·당연합군이 합세하여 신라는 김유신(金庾信)·김법민(金法敏:文武王)·품일(品日) 등이 거느린 5만 명의 군대로 탄현(炭峴)을 넘어 공격하여 백제의 장군 계백이 거느린 5,000명의 결사대를 황산벌에서 격파하고,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과 신라의 김인문(金仁問)이 이끄는 13만 명의 당군은 백강(白江:錦江 하류)으로 침입, 백제군을 격파하니 660년(의자왕 20) 마침내 사비성이 함락되고 백제는 31왕 678년 만에 멸망하였다. 그 때 소정방은 의자왕과 태자 효(孝), 왕자 태(泰)·융(隆)·연(演) 및 신하 93명과 백성 1만 2870명을 포로로 하여 당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당나라는 백제 땅에 5도독부(都督府: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을 설치, 통치하다가 다시 이를 개편하여 웅진도독부를 최고의 치부(治府)로 하고 그 밑에 7주(州)·52현(縣)을 두어 잠시 통치하다가 훗날 신라가 통치하게 되었다.

【백제의 부흥운동】 왕족 출신의 복신(福信)은 승려인 도침(道琛)과 주류성(周留城:韓山)에서 부흥운동을 시도하여 왕자 풍(豊)을 영립하고 광복군을 조직, 일본에 원병을 청하고 임존성(任存城:大興)에서 기병한 흑치상지(黑齒常之)·지수신(遲受信) 등의 호응을 받아 662년(문무왕 2)에는 지라성(支羅城)·급윤성(及尹城)·대산책(大山柵)·사정(沙井)·내사지성(內斯只城:儒城) 등 대체로 금강 이동(以東)의 여러 성책(城柵)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당군에 대한 신라의 군량미 보급을 한때 불가능하게까지 하는 등 그 세력을 떨쳤으나, 복신과 도침의 불화로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풍이 복신을 죽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광복군은 약화되어 주류성이 함락되었다. 풍은 고구려로 망명하고, 흑치상지는 당나라에 들어가 무공을 세웠으며 지수신은 주류성이 함락된 이후에도 임존성에서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고구려로 망명하니 부흥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정치제도】 〈중앙관제〉 백제는 북방계통의 유이민에 의해 지배계급을 이루었다. 고이왕 이후 왕은 부여씨(扶餘氏)가 세습하였고, 귀족으로 성장한 8대 성(姓:解·眞·沙·燕·b·J·木·國氏)의 세력이 커짐과 함께 왕권은 미약해졌다. 백제는 일찍이 중국 주(周)나라 육전(六典) 제도를 본떠서 삼국 중 제도정비의 선구였다. 고이왕 때부터 왕 밑에 6좌평과 16관등급 제도를 두어 행정을 맡게 하고, 또 왕의 바로 밑에는 수상격인 상좌평(上佐平)을 두어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각 관청의 장관들은 3년마다 선거로 뽑았다. 성왕 때 사비로 천도(538)한 이후에는 내관(內官:12부)과 외관(外官:10부)으로 이루어지는 22부의 중앙관서를 새로 두었다. 중앙의 행정구역은 상·하·전·후·중의 5부로 구분하고 부 밑에 항(巷)을 두었으며 각 부에는 500명의 군인이 주둔하였다.

〈지방관제〉 전국을 5방(方)으로 구분하고 방밑에 10군(郡)을 두었으며, 방의 장관을 방령(方領), 군의 장관을 군장(郡將)이라 하였다. 방령은 700∼1,200명의 군인을 거느리고 군사적 임무도 겸하였다. 특히 무령왕 때부터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지방 대읍(大邑)에 22개의 담로를 설치하고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을 다스리게 하였다.

〈군사제도〉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로서 중앙의 5부에는 각 부마다 군사 500명씩을 배정하여 치안을 유지하였다. 지방의 5방 아래 10군을 두어 군마다 3인의 장군과 700∼1,200명의 군대를 두었는데, 지휘관은 방령·군장이었다. 방과 군은 행정구역인 동시에 순수한 군사적인 임무를 띠고 있었으므로, 각 성진(城鎭)은 모두 험준한 산에 의거한 산성이었다.

〈형벌제도〉 백제의 형법은 매우 가혹하였다. 살인자·반역자 및 전쟁에서 퇴군(退軍)한 자는 사형에 처하였으며, 부인을 범간(犯姦)한 자는 남편집의 노예가 되게 하고, 뇌물을 받은 관리와 절도자는 2배의 배상을 하게 하며 옥에 가두거나 귀양도 보냈다.

〈신분제도와 풍속〉 지배계급은 왕족인 부여씨와 8대 성씨의 귀족이 있었는데, 그들은 북방 부여족 계통이었다. 피지배계급은 마한의 토착인들로서 생산에 종사하여 군사·조세·부역의 의무를 지고 있었으며 이들 평민 밑에는 노예가 있었는데, 노예는 주로 전쟁 때 포로가 된 전쟁 노예, 형벌 노예 및 채무·구매·약탈 등으로 생겨난 노비도 있었다. 그리고 흉년이 들어 식량이 없으면 자식을 노예로 파는 수도 있었고, 살인자가 노예를 3명만 내놓으면 형벌을 면제받는 제도도 있었다. 풍속을 보면 왕은 큰 소매의 자주색 도포, 푸른 비단 바지를 입고 금관을 썼다. 관리는 관등에 따라 복색이 다르고 6관등급 이상은 은으로 장식한 관을 썼다. 평민은 적삼·잠방이를 입고 긴 소매의 웃옷을 입었다. 처녀는 댕기를 맸고 출가하면 머리를 좌우로 갈라서 땋아 얹었다.

【경제생활】 일찍이 농업이 발달하여 삼한시대부터 벼농사와 제언(堤堰)이 발달하였고, 직조술·염색술 등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금속공업도 발달하여 무기·금관·금은 장식품·불상 등을 만들었다. 토지제도는 국유가 원칙이고 토지의 측량방법은 두락제(斗落制)를 썼으며 조세는 조(租)를 쌀로, 세(稅)를 포·비단·삼베 등으로 바치게 하였는데 그 징수 방법과 양(量)에 대하여는 알 길이 없다. 백제의 대외무역을 보면 중국 남부 및 일본과 교역이 성행하여 일본에 말·누에·직조법·양조법 등의 생산품과 그 기술이 전파되었다. 백제의 무역항으로는 영암(靈岩) 및 당항성(黨項城)이 크게 번성하였다.

【종교생활】 삼국시대에도 민간에서는 천신·산신·해신·동물들을 비롯한 잡신을 모시는 샤머니즘이나 점술·조상 숭배 등이 널리 유행되었다. 백제에서는 동명신(東明神:주몽)·국모신(國母神:유화 부인)·구태신(仇台神:고이왕) 및 민간신앙이 있었다. 불교는 384년(침류왕 1) 동진(東晉)으로부터 인도의 중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처음으로 전래하고 385년 광주(廣州)에 한산사(漢山寺)를 세워 차차 전파되었다. 불교의 종파는 율종(律宗)과 성실종(成實宗)이 유행되었다. 불교는 불법(佛法)·사상과 문화 개발에 이바지하였는데, 중국 남조(南朝)와 국교가 열리면서 많은 구법승(求法僧)의 활약이 있었고, 특히 성왕(聖王) 때를 전후하여 일본에 불교를 전파시키는 등 번성하였다. 당시에 활약한 명승 가운데 위덕왕 때의 혜총(惠聰)은 일본에 계율종(戒律宗)을 전하고서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었으며, 역시 성왕 때 인도에 유학한 겸익(謙益)은 불법을 연구하고 율종(律宗)을 전래하여 율부(律部) 72권을 번역하였다. 또 성왕 때 혜현(惠顯)은 당나라에 구법승으로 가서 삼론종(三論宗)을 받아들이고, 관륵(觀勒)은 무왕 때 일본에 천문과 역법 등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성왕 때 노리사치계(怒利斯致契)가 일본에 불경 등을 전하고(552), 법왕(法王) 때는 살생금지령과 사상통일에 노력했으며, 무왕 때는 왕흥사(王興寺)·미륵사(彌勒寺)를 건축하여 불교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백제에 도교(道敎)가 전래되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부여에서 출토된 산경전(山景塼:화전)의 그림(三神山:道使)이 도교사상을 나타내는 것이며, 부여의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에서도 노장사상(老莊思想)의 유행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사기》 근구수왕조(近仇首王條)에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간하기를 ‘일찍이 도가(道家)의 말을 들으면…’이라고 한 기록을 봐도 당시 도교의 유행을 확인할 수 있다.

【한학(漢學)의 발달】 교육기관에 대하여는 명확한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으나 오경박사(五經博士)·의박사(醫博士)·역박사(易博士)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한학의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자가 광범위하게 사용된 증거로는 472년(개로왕 18) 북위[北魏]에 보낸 국서(國書)가 《위서(魏書)》에 실려 있고, 541년(성왕 19) 양(梁)나라 사신 육허(陸)가 와서 <예론(禮論)>을 강의하였으며, 근초고왕 때의 아직기(阿直岐)와 근구수왕 때의 왕인(王仁)이 일본에 한학을 전한 사실이 기록에 나타난다. 또한 무령왕 때 단양이(段楊爾)·고안무(高安茂) 등이 일본에 유학(儒學)을 전한 사실 등으로 보아 백제 한학의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고, 1971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해서체의 금석문이 지석(誌石:왕 523, 왕비 526)이나 사륙변려체(四六儷體)로 된 사택지적비 등은 이미 한문학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려준다.

【국사 편찬과 시가(詩歌)】 고대국가로 발전하면서 왕권의 존엄과 국가의 위신을 떨치게 되자 국왕의 정치적 업적을 수록할 국사 편찬사업에 착수하여 삼국 중 백제가 제일 먼저 그것을 편찬하였다. 375년(근초고왕 30)에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를 편찬하고, 그 밖에도 《니혼쇼키[日本書紀]》에 보면 《백제기(百濟記)》 《백제본기(百濟本記)》 《백제신찬(百濟新撰)》 등의 역사책이 있었다고 하나, 이 모두가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백제의 시가로는 작자·연대가 미상인 《정읍사(井邑詞)》가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전해지며, 가명(歌名)만이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전해지는 《지리산가(智異山歌)》 《무등산가(無等山歌)》 《방등산가(方等山歌)》 《선운산가(禪雲山歌)》 등이 있다.

【예술】 삼국은 역사적 환경의 차이로 각각 어느 정도 특성을 달리하고 있다. 백제의 예술은 우아하고 섬세한 미의식(美意識)이 세련된 것이 특징이다. 백제예술은 중국의 남조와 고구려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새로운 예술을 개발하였다. 특히 일본 아스카문화[飛鳥文化]를 개발시키는 등 한반도 문화 전달의 공이 컸다.

〈건축〉 백제의 건축은 절터·탑·고분(古墳)에서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절터로는 전북 익산시 금마면(金馬面) 소재의 백제 최대의 미륵사지(彌勒寺址)가 있고 이 곳에 남아 있는 미륵사지 석탑은 동양 최대의 것으로 목조탑(木造塔)의 형식을 모방한 석탑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정림사지 5층석탑(定林寺址五層石塔)은 우아하고 세련되어 안정감을 주며 삼국시대 석탑 중 가장 우수하다. 백제의 분묘는 복장(複葬)이 가능한 석실묘의 전통과 현실(玄室) 벽화의 내용면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으며, 동시에 중국 남조의 전실(塼室) 고분의 형태까지 받아들인 것으로, 당시 대륙과 활발한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백제 한성시대의 고분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石村洞)의 것이 대표적인데, 이는 졸본(卒本) 지방의 고구려 초기 고분과 유사한 적석총(積石塚)이며, 웅진(熊津)시대의 공주 송산리(宋山里) 고분은 굴식[橫穴式] 돌방[石室] 고분이다. 또한 무령왕릉과 같은 전분(塼墳)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특히 무령왕릉은 연화문(蓮花文)의 벽돌로 된 아치형의 전축분(塼築墳)으로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관·석수(石獸)·동자상(童子像)·청동경·자기·지석(誌石)·금은 장신구 등이 있는데, 이 고분을 통해서 백제의 국가상, 사회생활, 양(梁)나라와의 문화교류, 장법(葬法)은 물론이고, 특히 삼국간의 문화교류, 문화의 특수성과 공통성을 확인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고분이다. 또 사비시대의 부여 능산리(陵山里) 고분은 횡혈식 석실고분으로 송산리 고분보다 규모는 작으나 건축기술과 연화문·운문(雲文), 사신도(四神圖)의 벽화가 세련되었다. 그리고 충남 서산에 있는 마애삼존불상(磨崖三尊佛像)은 백제 말기에 화강암벽에 새긴 마애석불인데, 소박한 옷차림, 엷은 미소를 띤 온화한 아름다움은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금동관세음보살상(金銅觀世音菩薩像:충남 부여군 출토),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 무령왕릉의 출토품인 금제 관식(金製冠飾)·석수·동자상, 금은 장식품인 목걸이·팔찌·귀걸이 등이 유명하며 산수귀문전(山水鬼文塼)·연화문전(蓮花文塼) 등과 기와 등에도 백제미술의 우수성이 나타나 있는데, 고구려의 와당(瓦當)은 힘과 정열(와당의 귀신상)을 표현한데 비하여 백제의 것은 온화한 아름다움이 그 특색을 이루고 있다. 대표적 조각가로서는 신라의 황룡사(皇龍寺) 9층탑을 건축한 아비지(阿非知)가 있다.

【미술과 음악】 백제의 그림은 능산리 고분의 연화문·운문, 사신도(四神圖)의 벽화와 송산리 고분의 신수도(神宿圖)가 우아하고 섬세한 면을 표현해 주고 있으며, 화가로는 위덕왕의 왕자로 일본에 건너가서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화상(畵像)을 그린 아좌태자(阿佐太子), 백제 말기에 일본에 건너가 산수화를 전하고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남긴 하성(河成)이 있다. 그리고 글씨로는 사택지적비문(砂宅智積碑文:사륙변려체), 무령왕릉의 지석(誌石:해서체) 등이 있다. 백제의 음악에 대한 기록은 매우 적은 편이다. 그러나 5∼6세기에 중국 남송(南宋)과 북위(北魏)에 백제음악이 소개된 것이 있고, 《니혼쇼키》에 보면 백제의 음악가가 교대로 일본에 건너가서 음악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에는 고(鼓)·각(角)·공후()·쟁(箏) 등의 악기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7세기 초 백제의 미마지(味摩之)가 중국 오(吳)나라에서 배운 기악(伎樂)을 일본에 전한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백제문화의 일본 전파】 근초고왕 때 최초로 일본에 한학을 전하고, 근구수왕 때 왕인박사가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전했으며, 무령왕 때 단양이·고안무, 성왕 때 유귀(柳貴) 등은 오경박사(五經博士)로서 한학과 유학 등을 전하였다. 그리고 무왕 때 관륵(觀勒)은 천문·역법·지리 등을 전하고, 성왕 때(552) 노리사치계는 최초로 불교를 전했으며, 혜총은 쇼토쿠태자의 스승이 되고, 도장은 성실론(成實論)을 저술하였다. 아좌태자는 쇼토쿠태자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그 밖에도 화공(畵工)·와공(瓦工)과 경사(經師)·율사(律士)·의사들을 보냈다. 이와 같이 삼국 중 백제문화는 일본의 문화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신라(新羅)

 

BC 1세기에 영남지방에서 일어나, 고구려·백제와 더불어 한반도의 판도(版圖)를 가르고 7세기에 최초로 한반도를 통일한 왕조(BC 57∼AD 935). 시조 혁거세(赫居世)로부터 경순왕까지 56대, 992년간 존속하였다. 국호는 신라·신로(新盧)·사라(斯羅)·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으로 불렀는데, 모두 마을[邑里]을 뜻하는 사로(斯盧)로 해석된다. 신라는 《삼국사기》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3기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① 상대(上代:시조∼28대 진덕여왕, BC 57∼AD 654)는 원시부족국가·씨족국가를 거쳐 고대국가로 발전하여 골품제도가 확립된 시기이다. ② 중대(中代:29대 무열왕∼36대 혜공왕, 654∼780)는 삼국을 통일하고 전제왕권(專制王權)이 확립되어 문화의 황금기를 이룬 시기이다. ③ 하대(下代 :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780∼935)는 골품제도의 붕괴, 족당(族黨)의 형성 및 왕권의 쇠퇴로 호족(豪族)·해상세력이 등장하고 멸망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밖에 29대 무열왕 이전을 삼국시대, 그 이후를 통일신라시대로 크게 구분한다.

【상대】 신라의 모체는 진한(辰韓) 12개 성읍국(城邑國)의 하나인 사로(斯盧:慶州·月城)였는데, 사로국은 알천(閼川)의 양산촌(楊山村:及梁), 돌산(突山)의 고허촌(高墟村:沙梁), 취산(山)의 진지촌(珍支村:本彼), 무산(茂山)의 대수촌(大樹村:漸梁), 금산(金山)의 가리촌(加利村:漢祗), 명활산(明活山)의 고야촌(高耶村) 등 6개촌과 6개의 씨족으로 구성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해서 시조 혁거세가 즉위한 BC 57년이 건국연대로 되어 있으나 사로국이 성립된 것은 이보다 빠를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혁거세는 양산(楊山) 기슭의 나정(蘿井) 곁에 있던 알[卵] 속에서 나온 아이인데, 고허촌장인 소벌공(蘇伐公)이 데려다 길렀다. 혁거세의 나이 13세가 되자 6부족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여 왕호를 거서간(居西干:君長), 국호를 서나벌이라 하였다. 혁거세는 즉위 후에 알영(閼英)을 왕비로 맞았는데, 알영은 사량리(沙梁里)의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난 용의 오른쪽 갈빗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조의 난생설화(卵生說話)는 신라의 건국설화라기보다는 6부족의 연맹체인 사로국의 전설로 짐작되고 있다. 사로국을 모체로 하였던 초기의 신라는 박(朴)·석(昔)·김(金)의 3성(姓) 중에서 왕을 추대하고 이들이 주체가 되어 6부족의 연맹체를 이끌어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대륙과 멀리 떨어진 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과 간헐적으로 경주분지에 정착한 유리민(流離民) 집단의 이질적 요소 등으로 3국 가운데 가장 뒤늦게 발전하였다. 4세기에 들어 내물왕이 거서간(居西干:제사장)·차차웅(次次雄:무당)·이사금(尼師今:계승자)으로 변천한 왕호를 마립간(麻立干:통치자)으로 개칭하고, 3성 중 김씨가 왕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면서 고대국가의 실질적 시조로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대외적으로는 377년, 광개토왕이 국위를 떨치고 있던 고구려와 국교를 맺고, 볼모를 보내어 화친정책을 썼으며, 377년과 382년에는 고구려의 알선으로 중국의 전진(前秦)에 사신(使臣)을 보냈다. 또한 내물왕은 왜구가 자주 침입하여 괴롭히자 399년 고구려에서 5만의 원병을 얻어 백제군과 합세하여 왜구(倭寇)를 무찔렀다. 눌지왕 때는 고구려의 평양 천도(427) 등 군사적 압력이 가중되자 그 대비책으로 백제와 나제공수동맹(羅濟共守同盟)을 맺었고, 왕권의 계승을 둘러싼 분쟁을 막기 위해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마련하였다. 20대 자비왕은 중앙집권화를 위해 경주의 방리명(坊里名)을 정하였고(469), 소지왕은 지방의 귀족을 중앙으로 흡수하는 한편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처음으로 서울에 시장[市肆]을 열어 물화(物貨)의 원활한 유통을 꾀하는 등 서정쇄신에 힘썼으며, 대외적으로는 백제의 동성왕과 결혼동맹을 맺어 양국의 관계를 더욱 굳게 하였다(493). 지증왕 때에는 왕권강화와 내물왕계의 혈족결합을 전제로 왕위의 세습제를 확립하였고,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통치자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개칭하였고, 지방에 주·군·현(州郡縣)과 2소경(小京)을 두어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의 기반을 굳혔다. 또한 처음으로 지방에 군주(軍主)를 두어 실직주(悉直州)의 군주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정벌하게 하여 이를 신라영토에 편입시켰다(512). 왕권의 안정기에 들어간 신라는 법흥왕 때에 이르러 율령(律令)을 공포하고(520), 백관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으며(528), 불교를 공인하고, 처음으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법흥왕 23년을 건원(建元) 원년이라 하였으며(536), 병부(兵部)와 상대등(上大等) 등 새로운 관제를 설치하여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를 이룩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남조(南朝)의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냈고, 대가야국(大伽倻國:高靈地方)의 혼인요청을 받아들여 이를 회유하였으며, 524년에는 왕 자신이 남쪽의 경계를 순시하여 국경을 개척하였고, 532년에는 본가야(本伽倻:金官國)를 병합하여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다. 이어 진흥왕은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 상류 지역인 죽령(竹嶺) 이북에서 고현(高峴:鐵嶺) 이남에 이르는 고구려 10군(郡)을 점령하였다. 또한 백제를 공격하여(553) 한강 유역의 백제영토를 전부 차지하여 이 지방을 다스리기 위해 신주(新州:漢山州)를 두었으며, 이로써 120년간 지속되어온 나제동맹은 깨어졌다. 진흥왕은 낙동강 유역에도 손을 뻗쳐 562년 대가야를 병합함으로써 기름진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게 되어 합천(陜川)에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하여 백제방어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동북 해안을 따라 북진하여 안변(安邊)에 비열흘주(比列忽州)를 설치(556)하고 이원(利原)의 마운령(摩雲嶺)까지 진출하여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형성하였다. 이와 같은 진흥왕의 정복사업은 단양의 적성비(赤城碑)와 창녕·북한산·황초령(黃草嶺)·마운령에 세워진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가 웅변하여 주고 있다. 이후 당항성(黨項城:南陽灣)을 거점으로 하여 중국(陳·北齊) 통로의 관문으로 삼았다. 이어 진평왕은 관제의 정비에 힘써 위화부(位和府)·조부(調府)·예부(禮府)·승부(乘府) 등을 신설하여 관부를 직능별로 조직화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통일왕조로 등장한 수(隋)·당(唐)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선덕여왕 때는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신라에 대한 침공을 본격화하였으며, 이로 인해 나·당(羅唐) 통로의 거점인 당항성도 크게 위협을 받았고, 백제는 대야성(大耶城:陜川)을 점령하여 백제와의 서부국경은 경산(慶山)까지 후퇴하였다. 이에 신라는 김유신을 압독주(押督州:慶山)의 군주로 삼아 대처하였고, 친당정책(親唐政策)을 적극화하여 당에 유학생·유학승도 보냈다. 647년 비담(毗曇)·염종(廉宗) 등의 반란을 진압한 뒤 실질적 권력을 장악한 김춘추·김유신 일파는 진평왕의 동생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의 딸 진덕여왕을 옹립하고 중앙 관제를 정비 개편하여 품주(稟主)를 집사부(執事部)와 창부(倉部)로 분리하고 좌·우 이방부(左右理方部)를 설치하는 한편, 화백회의(和白會議)의 의장인 상대등(上大等)을 상징적인 위치로 바꾸고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侍中)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귀족층에 의한 관직독점이 배제되는 등 권력구조에 변혁이 일어나 귀족연합정치가 무너지고 전제왕권이 성장하게 되었다.

【중대】 진덕여왕 때 정권을 주도하였던 진골(眞骨) 출신의 김춘추가 상대등 알천(閼川)의 양보로 왕에 추대되어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자 성골(聖骨) 출신의 왕계는 진덕여왕으로 끝나고 이로부터 진골출신의 왕계가 비롯되었다. 무열왕은 당나라에 청원하여 나·당 연합군을 편성, 백제를 멸망시켰고(660), 문무왕은 백제의 부흥항쟁을 진압하는 한편 역시 당나라에 원군을 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668). 그러나 당나라는 일방적으로 백제의 고토(故土)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어 자국의 관리와 군대를 주둔시켰고, 신라마저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라 하고 문무왕을 계림도독에 임명하였으며,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는 등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 획책하였다. 신라는 당의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검모잠(劍牟岑)의 고구려 부흥군을 도와 당에 대항하도록 하였고, 또한 고구려의 왕족 안승(安勝) 이하 4,000여 호(戶)의 고구려 유민을 받아들여 금마저(金馬渚:全北 益山)에 보덕국(報德國)을 세우게 하는 등 영토의 잠식투쟁을 하였다. 671년 신라는 백제의 옛 수도 사비성(泗侁?扶餘)을 빼앗아 당군을 몰아내고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였다. 675년에는 당의 20만 병력을 매초성(買肖城:仁川) 등지에서 섬멸하고 676년에는 서해를 통하여 소부리주·기벌포(伎伐浦:錦江下流)에 쳐들어온 당나라의 설인귀(薛仁貴)부대를 격파하여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백제 멸망 후 16년간 존속하여온 웅진도독부를 축출하게 되었고, 위축된 당나라의 세력은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도 만주의 요동성(遼東省:遼陽)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대동강에서 원산만으로 이어지는 선의 이남에 이르는 반도를 통치하게 된 신라는 역사상 최초의 단일 왕국에 의한 통일국가를 이루게 되어 이로부터 통일신라시대가 개막되었다. 통일신라는 3배로 늘어난 영토를 조직적·능률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전제왕권의 확립을 위한 지배체제의 정비 및 개편과 새로운 문화창조에 힘썼다. 신문왕은 중앙관부에 예작부(例作府)와 공장부(工匠府)를 설치, 당나라 6전(典) 조직과 비슷한 정무(政務)분담형식의 집사부(執事部) 이하 14관부를 완성하여 일원적 지배체제를 이룩하였다. 지방제도에 있어서는 전국을 9주(州)로 나누어 그 밑에 군(郡)·현(縣)을 두었으며, 요소에 5소경(小京)을 두어 이곳에는 서울인 경주와 같이 6부제를 실시하고 왕이 때때로 순주(巡駐)하였다. 그리고 지방세력의 억제책으로 상수리(上守吏) 제도를 실시하고 689년에는 녹읍제(祿邑制)를 폐지하였다. 통일신라는 성덕왕(702∼737) 때 극성기(極盛期)를 맞이하였고, 통일 후 120여 년 간은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어 오늘날 안압지·임해전·포석정 등이 당시 상류사회의 호화로운 한 모습을 전하여 주고 있다.

【하대】 통일신라시대의 사회적 안정과 전제적(專制的) 관료제는 귀족 세력의 대두를 유발하여 경덕왕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한화정책(漢化政策)을 근간으로 하는 제도개혁을 단행하고 지방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녹읍제도를 부활하였다. 그러나 진골 귀족들의 왕권도전이 표면화하여 768년(혜공왕 4) 김대공(金大恭)의 난을 시발로 96각간(角干)에 의한 반란이 3년간 계속되다가 내물왕의 10대손 김양상(金良相)이 혜공왕을 살해하고 선덕왕으로 즉위하였는데, 이가 신라 하대의 첫 왕이다. 선덕왕의 뒤를 이은 원성왕은 족당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왕권의 강화책으로 골품에 의한 소수 귀족의 관직독점을 방지하고 관리를 인재 본위로 등용하기 위해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科擧의 일종)를 설치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는데, 이는 내물왕계의 원성왕이 왕위를 이으면서부터 무열왕계의 반격이 개시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헌덕왕 때에 이르러 무열왕계인 웅주도독(熊州都督) 김헌창(金憲昌)은 앞서 선덕왕이 죽었을 때 왕위에 오른 그의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이 내물왕계 귀족들의 반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웅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부르고 한때 청주·충주·김해 등지를 장악하였으나 토벌되었다. 왕위의 쟁탈전은 흥덕왕 이후에 더욱 격화되어 민애왕은 희강왕을 살해하여 즉위하고 신무왕(839)은 민애왕을 살해하여 즉위하였으며, 하대의 기간 155년 동안 20명의 왕이 교체되면서 재위 1년 미만의 왕이 4명이다. 이와 같은 왕권의 불안정은 중앙의 행정체제를 뒤흔들어 귀족연립적인 정치형태로 변질되고 정치·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으며,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지방에서는 군진(軍鎭)을 근거로 한 해상세력이 등장하였다. 군진은 9세기에 들어 해적이 발호(跋扈)하면서 이에 대처해서 설치된 청해진(淸海鎭:莞島)·당성진(唐城鎭:南陽)·혈구진(穴口鎭:江華) 등인데, 이 가운데 완도의 청해진이 해상세력의 중심이었다. 청해진은 828년 당나라에서 활약하다 돌아온 장보고(張保皐)가 설치한 것으로, 그는 1만의 병력으로 해적을 일소하고 해상권을 장악, 신라와 당나라·왜국 사이의 무역을 관장하여 해상의 패자(覇者)로 군림하였다. 그는 해상세력을 기반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앞서 희강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던 민애왕을 살해하여 신무왕을 즉위시키는 등 막강한 실력을 행사, 그의 딸을 문성왕에게 차비(次妃)로 바쳐 정치적 기반을 더욱 굳히려다 실패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자객에게 피살되었다. 이와 같이 왕권이 무력에 의해 유린되어 통치체제가 무너지자 지방에서는 새로운 호족(豪族) 세력이 형성되어 행정·징세권까지 장악하여 농민을 수탈하는 등 중앙의 경제기반을 잠식하였다. 진성여왕에 이르러 국정의 문란은 절정에 달하여 나라에서는 조세조차 거두지 못할 정도였고, 호족·군도(群盜)들에 시달린 백성들은 일본·중국 등으로 유망(流亡)하거나 사병(私兵)·도둑 등으로 변신하였다. 중앙의 정치적 부패와 통치권의 무정부상태에 따라 지방에서는 군호(群豪)가 나타나 북원(北原:原州)의 양길(梁吉), 죽주(竹州:竹山)의 기훤(箕萱)과 적고적(赤袴賊)·초적(草賊) 등이 무리를 지어 발호하였다. 이 중에서 전라남북도지방을 차지한 견훤(甄萱)은 후백제를 세우고, 강원도 북부·경기도·황해도 및 평안도지방을 차지한 궁예(弓裔)는 마진국(摩震國)을 세웠으며, 신라의 세력은 지금의 경상남북도를 차지하는 데 그쳐 이로부터 한반도는 얼마 동안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가 전개된다. 918년 후삼국 중 가장 강대하게 세력을 떨치던 궁예의 신하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자 신라의 경명왕은 이를 기존국가로 인정하여 사신(使臣)을 보내 수호하였다. 927년 견훤은 신라의 서울 경주까지 침범하여 경애왕을 잡아 자살하게 하고 왕제(王弟) 경순왕을 즉위시켜 신라의 국가적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935년 신라의 국토는 더욱 축소되어 민심은 고려로 기울어 나라를 더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경순왕은 마지막 화백회의(和白會議:君臣會議)를 열어 국토를 고려에 귀부(歸附)할 것을 결정하고 스스로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에 가서 그 절차를 밟았다. 고려의 태조는 경순왕을 정승(政丞)에 배(拜)하여 태자의 상위(上位)에 예우하고, 태조의 장녀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여 매년 1,000섬의 녹(祿)을 주었다. 이로써 시조로부터 56대왕, 992년을 이어온 신라의 사직(社稷)은 끝나고, 고려는 이 해에 후백제마저 병합하여 이로부터 한반도는 새로운 통일왕조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중앙관제】 신라의 관제는 골품제도와 관련을 맺으면서 편성된 것이다. 법흥왕 때에는 귀족회의의 의장격인 상대등(上大等)과 병부(兵部)를 두었고, 진평왕 때에는 위화부(位和部)·조부(調部)·예부(禮部)를 설치하였다. 651년(진덕여왕 5)에는 품주(稟主)가 집사부(執事部)와 창부(倉部)로 분리되어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中侍:통일 후에는 侍中)가 수상직을 맡으면서 국가 권력은 강화되어 중시는 상대등과 맞서는 위치에 있었다. 통일 후 신문왕 때에 공부(工部)에 해당되는 공장부(工匠府:682)와 예작부(例作府:686)를 설치하여 14개의 관청으로 중국의 6전 조직과 유사한 정무분담 체제가 이루어졌다. 신문왕 때에 국학(國學)이 설치된 것도(682) 왕권의 강화와 정치체제의 정비를 위한 유교 정치이념이 설정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통일신라의 관직체제는 망할 때까지 유지되었으며 중대에는 집사성의 시중(侍中)의 권한이 강화되었으나, 하대에 와서는 상대등의 권한이 다시 부상하는 현상이 나타나 이를 둘러싼 정권 다툼이 격화되었다.

【지방제도】 신라는 전국을 5주(州:軍主)로 나누고 주 밑에는 군(郡:太守)·현(縣:縣令)을 두어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였다. 말단행정 단위인 촌(村)의 장은 그 지역의 세력가를 촌주(村主)로 임명, 그 지방 행정기관의 통제를 받도록 하였다. 한편 각주에는 군단(軍團)인 정(停)을 두어 국방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지방행정 조직은 군사조직이기도 하여 지방관이 군사 지휘권을 겸하였다. 또한, 수도 행정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동원경(東原京:강릉, 639), 중원경(中原京:충주, 557) 등 2소경을 두고 사신(仕臣:왕족)을 파견하여 중앙집권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통일 후에는 확대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하여 677년(문무왕 17)경부터 685년(신문왕 5) 사이에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재편성하였다. 통일 후 지방제도는 점차 행정적인 성격으로 변모했으나 그 기구는 통일 전과 동일하게 주·군·현·촌과 향(鄕)·소(所)·부곡(部曲)으로 구성되었다. 촌은 몇 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양인들이 거주했고, 향·소·부곡은 피정복민이나 반역민을 집단적으로 사민(徒民)시켜 천민화한 집단지역으로 여겨진다. 특히 지방 향리(鄕吏)들의 세력 확대를 막기 위하여 상수리제도를 실시하였다. 이 제도는 각 주의 향리 1명씩을 인질로 중앙에 머무르게 하여 시위(侍衛)·사역(使役) 또는 궁중용 화목(火木)을 공급하게 하였다. 5소경 제도는 수도인 경주가 동쪽에 치우쳐 있는 불편을 보충하려는 의도와 지방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5소경의 위치는 원래의 신라영토 밖인 소백산맥 외각지대로서 신라가 정복한 피정목민들을 강제로 사민시켜 중앙에서 파견한 왕경인(王京人)의 지배를 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피정복 가야·백제·고구려인에 대하여는 그들의 신분과 관직에 따라 신라 17관등의 신분체제에 편성시켰다. 그러나 백제인은 10관등급(大奈麻), 고구려인은 7관등급(一吉飡) 이하의 신분에 편입되었다. 그러므로 출세의 제약을 받은 피정복민들은 그들의 진로와 출세를 문화면에서 발휘하였다. 그 결과 5소경은 지방문화 발달의 산실로서 문화의 중심을 이루었다. 대가야계(大伽倻系)의 강수(强首)·우륵(于勒)·김생(金生)은 중원경에서, 고구려계의 법경(法鏡)은 남원경에서 각각 출세한 사람들이다.

【관등제도】 신라의 관등제도는 골품제도(骨品制度)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관등제도는 법흥왕(6세기 초) 때에 완성되었는데 경위(京位:王京人) 17등과 외위(外位:地方人) 11등의 이원적 체계로 구성되었다. 진골(眞骨)은 최고 상한선인 이벌찬까지 승진할 수 있으나, 6두품은 6위인 아찬까지, 5두품은 10위인 대나마까지, 4두품은 12위인 대사까지 승진의 한계가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한선은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진골 출신도 다른 두품과 같이 17위(조위)에서 출발하였다. 이와 같이 구분된 골품제도는 신분에 따라 유능한 인재라도 출세에 제한을 받았고, 의·식·주의 일상생활도 차별을 두었다. 따라서 혼인도 같은 골품끼리하는 것이 상례였다. 만약 다른 골품과 결혼하면 그 소생은 어머니의 골품으로 전락하였다. 그래서 골품을 유지하기 위하여 근친결혼이 유행되었다. 이와 같은 골품제도의 모순에 불만을 가진 계층은 특히 6두품과 도당 유학생들이었다. 이들은 반골품적 입장을 취하면서 지방 호족들과 결부하여 반(反)사회적 집단으로 화하였다. 외위는 촌주를 포함한 지방의 유력자를 중앙에 포섭 편입시키면서 왕경인과 구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7세기 중엽에 와서는 유력한 지방의 촌주층에 대한 군공 포상책으로 경위 관등을 개방함에 따라 외위는 자연히 소멸되었다.

【군사조직】 신라는 초기에 6부(部)의 장정을 징발하여 편성한 6부병(六部兵)이 수도를 수비하였다. 삼국항쟁이 격화된 544년(진흥왕 5) 6개의 부대를 통합하여 대당(大幢)을 편성하였다. 진흥왕의 영토확장과 더불어 설치된 상주정(上州停:552), 한산정(漢山停:新州停, 604)과 문무왕 때 우수정(牛首停:比列忽停, 673), 무열왕 때 하서정(河西停:悉直停, 658), 신문왕 때 완산정(完山停:下州停, 685) 등 6정(停)을 편성, 주치(州治)에 배치하였다. 이 외에도 서당(誓幢:583), 낭당(郞幢:625)이란 부대를 두어 국방에 힘썼다. 한편 군조직과는 별도로 왕궁 수비대인 시위부(侍衛府:624)도 있었다. 통일 후 신문왕 때에 완성된 9서당은 수도에 주둔한 중앙군단으로서 신라인 외에 고구려·백제·말갈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9서당은 옷깃의 빛깔에 따라 부대 소속을 구별하였다. 지방의 군단인 10정은 9주를 기준으로 각 주에 1정씩 배치하고 한주(漢州)는 지역이 넓고 국방상 요지였기 때문에 2개의 정을 설치하였다. 10정이 배치된 곳은 국방상 지방통치의 거점이었다. 이와 같이 배치된 정은 국방 및 경찰의 임무도 겸하였으므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 이밖에 주 및 변방에 배치된 군단인 5주서(五州誓)와 3변수당(三邊守幢)도 있었고 또 노당(弩幢:弩牛部隊)·운제당(雲梯幢:登城部隊)·석투당(石投幢:抛車部隊)·여갑당(餘甲幢)과 법당(法幢) 등이 있다.

【토지제도】 토지제도는 국유제를 전제로 한 제도였다. 통일 전에는 전공(戰功)에 따라 지급된 식읍(食邑)과 관복무의 대가로 받은 녹읍제가 발전하였고, 능위전(陵位田)·사전(寺田) 등이 있었다. 통일 후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신문왕 때에 녹읍을 폐지하고(689), 수조권(收租權)만 인정하는 직전(職田:官僚田)과 세조(歲租)를 주는 제도로 바뀌었다. 성덕왕 때에는 정남(丁男)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여(722), 국가에 조세를 바치게 했다. 이 정전은 당나라의 균전제(均田制)를 연상시키며, 일본 쇼소인[正倉院]에서 발견된 신라장적(新羅帳籍)에서 보이는 연수유답(烟受有畓)·전(田)이 바로 정전과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정전제도는 종래 식읍이나 녹읍을 경작하던 농민을 국가가 지배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8세기 중엽에 이르자, 귀족 세력이 전제왕권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 결과 757년(경덕왕 16) 직전과 세조는 폐지되고 녹읍이 다시 부활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왕권강화를 위하여 귀족들의 토지 지배를 견제하려던 시책이 실패한 것으로 귀족세력이 국가를 능가한 것을 뜻한다. 이후 신라 사회는 귀족 및 사원세력을 중심으로 토지의 장원화(莊園化)가 초래되어 국가경제가 위태롭게 되었다.

【조세제도】 조세제도는 조·용·조(租庸調)에 바탕을 두었다. 이 중 조(租:田租)는 토지산물인 곡식이나 직물의 원료 등을 현물로 바쳤고, 용(庸)은 산성 축성, 궁궐 등을 짓는 일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부역(賦役)의 의무로 동원되었다. 조세(調稅)는 해당 지방의 특산물을 공납하는 것이었다. 신라시대의 세율은 토지산물의 10분의 1이었을 것이라는 간접적인 시사가 있기는 하나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일본 쇼소인에서 발견된 서원경(西原京)지방의 신라장적을 보면 농민들은 자신의 연수유답뿐만 아니라 관유지(官有地:官謨畓)·관료전·마전(麻田) 등을 공동으로 경작하였으며, 특히 뽕나무·잣나무·호두나무 등의 수가 장적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자기가 내는 세율 이상으로 부담을 지고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조세기준은 인정(人丁)의 수와 재산에 따라 민호(民戶)의 등급을 9등급으로 나누고 촌(村)을 단위로 하였다.

【사회·경제생활】 신라 사회는 골품제도를 근간으로 한 17등 관계(官階)를 두고 골품에 따른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고정시킨 귀족 중심의 사회였다. 삼국통일 후 식읍·사전(賜田)·마거(馬g:목마장) 등을 받아 경제적 부를 누린 귀족들과 많은 노비와 가축·사병(私兵)을 거느린 귀족도 나타났다. 수도인 경주는 17만 8936호, 1,360방, 55리, 35금입택(金入宅), 4절유택(四節遊宅) 등이 있는 호화로운 도시로서 통일 후 약 100여 년 간 번영을 누렸다. 오늘날 경주에 남아 있는 안압지·임해전·포석정 등은 당시의 호화로운 생활상을 반증해준다. 통일 후 인구 증가와 생활이 향상됨에 따라 개간사업이 광범위하게 추진되었다. 790년(원성왕 6) 벽골제(碧骨堤)가 개수 이용되었으며, 828년(흥덕왕 3) 김대렴이 당에서 차(茶)의 종자를 수입하여 재배하기도 하였다. 상업 활동은 이미 509년(지증왕 10) 동시전(東市典)이 설치되었고 695년(효소왕 4)에는 서시전과 남시전이 설치되어 문화의 유통이 활발하였다. 특히 신문왕 때는 공장부까지 설치되어 수공업이 발달하여 어아주(魚牙紬)·조하주(朝霞紬) 등의 명주와 금은 세공품·나전칠기·죽기 등이 생산되어 일본과 당나라에 수출되는 등 공사무역(公私貿易)이 성행하였다. 당과의 수출품은 대개 금·은·인삼·어아주·조하주 등이며, 수입품은 각종 비단·의복·문방구·서적 등이었다. 이와 같은 경제적 발전은 귀족 중심이었다. 한편 농민의 생활은 일본 정창원에서 발견된 서원경지방의 장적을 통하여 농민의 실태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촌(村)은 10호 정도의 혈연집단이 거주하는 자연부락을 기준으로 3∼4개의 촌을 관장하는 촌주(村主)가 중앙의 통치를 대행하였다. 장적의 내용을 보면 촌의 전답결수, 호구수, 인구수, 과목(果木)의 주수, 우마(牛馬)의 필수 등이 기록되었는데 이 장적은 3년마다 재작성하였다. 호(戶)의 등급은 9등급으로 나누고 연령의 등급은 6등급(小子女·追子女·助子女·丁男女·除公母·老公母)으로 나누었다. 이와 같은 통계는 농민들로부터의 정확한 조세징수와 노력동원의 편리를 위하여 조사 작성된 것이다. 당시의 자영농민은 귀족사회의 경제적·사회적 여건이 향상되었으나 예민화(隸民化)되는 실정이었다. 당시 귀족들은 농민과 천민의 희생 위에 그들의 삶을 영위하였으므로 신라 말의 정치적·사회적 파탄은 더욱 격심해졌다. 이와 같이 신라사회가 파탄을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은 골품제도에 의한 사회적 신분의 지위를 17등 관계로 고정화시킨 모순을 해소시키지 못했기 때문이고, 골품제도의 모순에 대한 시정책은 6두품의 정치적 이념에서도 반영되었다. 그러나 위정자들은 혼란한 사회질서를 권력을 통한 신분적 차별로 사회기강을 바로잡으려 했기 때문에 사회안정을 기할 수 없었고 도리어 반사회적 신분집단을 결속시키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구심점을 잃은 신라사회는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다.

【한문학과 유학】 한학(漢學)의 수용은 지배층으로부터 문화적 요인보다는 정치적 목적으로 발전하였다. 한학은 유학을 중심으로 확대되면서 특히 왕권의 성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한학의 발달은 왕권의 권위와 국가발전을 찬양하는 국사(國史)의 편찬으로도 나타났으며 의학·역학·천문·노장학 등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폭을 넓혀주었다. 이와 같이 한문의 수용과 보급은 법흥왕 때부터 진덕여왕 때에 성행한 불교를 통하여 한문의 사용이 확대되었고 수·당과의 외교에서 문화 발전에 안목을 넓혀주었다. 그리고 한자가 널리 보급된 사실과 한학의 수준은 현존한 금석문인 청제비(菁提碑), 진흥왕의 순수관경비, 적성비(赤城碑),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남산신성비 등에서도 알 수 있다. 한편 한문을 수입하면서 설총(薛聰)은 이두(吏讀)를 만들어 경서를 훈독하게 하였다. 삼국통일 후의 한학은 애국심의 강조에서 벗어나 전제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현실적인 유교정치 이념으로 변질되었다. 이에 따라 682년(신문왕 2) 국학(國學)이 설립되었고 717년(성덕왕 16)에는 당으로부터 공자(孔子)·10철(哲)·72제자의 화상을 얻어와서 국학에 안치하였다. 이어서 경덕왕 때에는 국학을 태학감(太學監)으로 개칭하고 경(卿)·박사·조교를 두고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을 필수과목으로 한 3분과로 나누어 교육하였다. 입학 자격은 15∼30세까지의 귀족자제이며 수업연한은 9년이었다. 788년(원성왕 4)에는 독서출신과를 두고 능력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관리에 채용하였다. 이 제도는 관리채용의 기준을 골품보다 유학의 실력에 두었기 때문에 6두품의 환영을 받았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중대에 활약한 문신으로서 강수(强首)는 외교문서에 능했고, 김대문(金大問)은 우리의 문화를 인식, 중국 것을 모방하던 단계에서 이탈하려는 경향을 나타낸 《화랑세기》 《한산기》 《계림잡전》 등 저서를 남겼으며, 경서에 조예가 깊은 설총은 이두문을 정리하여 한문학 학습에 공헌하였다. 하대에 들어와서는 왕족이나 6두품 중에서 당에 유학한 자들이 많아졌다. 이들은 10년간을 수학연한으로 당의 국학에 입학하여 학문과 종교분야에서 유능한 석학이 배출되었다. 이 때 당의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한 자가 58명이고, 오대(五代)의 후당(後唐)·후량(後梁) 때에도 32명이 되었다. 그 중에서 문명을 떨친 석학으로는 최치원(崔致遠)·박인범(朴仁範)·김악(金渥)·최승우(崔承祐)·최신지(崔愼之) 등이 배출되었다. 또한 유교 이외의 잡학 교육기관으로 산학·천문·의학·병학·육학 등을 전문으로 하는 관청에서 박사를 두고 학생을 교수하였다. 혜공왕 때 김암(金巖)은 천문·병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당에 유학하여 음양술을 연구, 둔갑술(遁甲術)을 지었으며 귀국 후 패강진장(浿江鎭將)으로 있을 때 농민들에게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교수하였다. 나말에 도선(道詵)은 풍수지리설을 선양시켜 《도선비기(道詵秘記)》를 남겼다. 이 풍수지리설은 고려 태조 왕건도 신봉, 그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 반영되어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되었다.

【문학과 음악】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 우리 민족은 노래와 춤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삼한(三韓)에서 행한 5월 기풍제(祈豊祭)나 10월 상달제에서 음주가무한 것을 보면 고대 문학은 종교적인 가무 제의(祭儀)에서 발생한 것임을 시사해준다. 삼국시대의 문학은 설화문학과 시가문학으로 대별되는데 신라의 설화문학에는 우노(于老)의 이야기 등을 들 수 있고, 시가문학으로는 향가를 들 수 있다. 향가로는 《삼국유사》에 혜성가(慧星歌)·안민가(安民歌)·헌화가(獻花歌) 등 14수가 전하며, 혁련 정(赫連挺)의 《균여전(均如傳)》에도 11수가 전한다. 888년(진성여왕 2) 대구화상(大矩和尙)과 위홍(魏弘)이 지은 《삼대목(三代目)》이란 향가집이 있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이 향가는 작가인 융천사(融天師)·광덕(廣德)·월명사(月明師) 등에서 보듯이 승려 사회와 화랑도(花郞徒:得烏) 사회에서 우수한 작품을 내고 있으며,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그 내용도 국가안태의 기원(혜성가), 불덕(佛德)에 대한 찬양과 기원(千手大悲歌), 사자(死者)에 대한 기도(願往生歌) 등 종교적인 뜻에서 창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시가와 관계가 있는 음악과 무용도 종교적 성격이 농후하다. 음악가로서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인 계고(階古)·이문(尼文)·법지(法知)·백결선생(百結先生)·옥보고(玉寶高)·귀금(貴金)·장안(長安)·극상(克相) 등이 대가였다. 악기로는 3죽(三竹:大笭·中笭·小笭)과 3현(三絃: 伽倻琴·玄琴·鄕琵琶), 대고(大鼓) 등이 사용되었다. 최치원(崔致遠)의 시 《향약잡영(鄕約雜詠)》에 나타난 금환(金丸)·월전(月顚)·대면(大面)·속독(束毒)·산예(猊) 등 5기(五伎)와 처용무·상염무(霜髥舞)가 있었다. 문장으로는 진흥왕의 순수비, 진덕여왕의 《태평송(太平頌)》, 강수의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 문무왕릉 비문과 최치원의 《계원필경(桂苑筆耕)》 외에 진감선사비문(眞鑑禪師碑文)·낭혜화상비문(朗慧和尙碑文)·지증대사비문(智證大師碑文)·숭복사비문(崇福寺碑文)이 있고, 최승우의 《사륙호본집(四六本集)》과 견훤을 위하여 왕건에게 보낸 격서(檄書), 즉 《대견훤기고려왕서(代甄萱寄高麗王書)》 등이 대표적 작품인데 신라 하대의 유작에서는 유교·불교·도교 사상의 색채가 혼용되어 나타난다.

【분묘】 신라시대 왕 귀족의 무덤은 경주시 황남동 고분군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삼국시대에는 왕궁이나 집으로부터 멀지 않은 평지에 무덤을 썼으나 통일 후에는 수도 주변의 산하(山下) 구릉지대를 택하여 무덤을 썼다. 무덤의 양식도 달라서 삼국시대에는 구덩식 돌무지덧널무덤에서 통일 후에는 굴식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변하고 화장법(火葬法)도 유행하였다. 구덩식 돌무지덧널무덤은 목곽을 덮고 외면을 돌로 쌓은 위에 흙으로 덮었기 때문에 도굴이 용이하지 않아 많은 껴묻거리[副葬品]가 출토되고 있다. 특히 금관총·금령총·서봉총·천마총 등에서는 금관(金冠)이 출토되었고, 1946년 경주 호우총(壺塚)에서는 ‘乙卯年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十’이란 명문이 새겨진 항아리가 출토되었다. 굴식 돌무지무덤[積石塚]의 구조는 널길[羨道]과 널방[玄室]으로 되어 있는데 널방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되어 있고, 천장은 돌로 덮였다. 입구는 대개 남쪽으로 있으며, 천장과 벽은 석회(石灰)를 발랐다. 굴식 돌방무덤은 많은 노력이 필요했지만 합장(合葬)하기에는 손쉽다는 장점이 있다. 분묘의 외형을 보면, 삼국시대에는 봉분의 붕괴를 막기 위하여 하단부에 자연석을 보이지 않게 적당한 간격으로 놓았으나 통일 후에는 석축(石築), 12지신상, 석상(石床), 방주석(方柱石), 석사자(石獅子)상, 문·무인석(文武人石) 등 둘레돌을 크게 이용하였는데, 신문왕릉·성덕왕릉·원성왕릉이 그와 같은 유형에 해당된다. 특히 죽은 뒤에도 방위신(方位神)인 12지신과 석사자 등 호석물을 세워 호위를 받으려 한 것은 전제왕권의 권위의식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불교】 고구려와 백제의 초기 불교 전래과정은 국가적 사절을 매개로 한 외교적 통로에 의한 전래였다. 그러나 신라 불교의 초기 전래는 눌지왕 때 고구려로부터 무명인에 의해 전래되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고, 소지왕 때 일선군(一善郡:善山) 지방 모례(毛禮)의 집에서 아도(阿道)가 전도했으나 이 역시 박해 속에 끝났다. 521년(법흥왕 8) 남조(南朝)인 양(梁)나라와 국교를 맺은 후 양나라 무제(武帝)가 보낸 승려 원표(元表)에 의하여 비로소 신라 왕실에 불교가 알려지자 법흥왕은 불교를 수용하고 이를 진흥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귀족의 반대로 실패하고 왕의 총애를 받던 이차돈(異次頓)마저 순교하게 되었다(527). 이를 계기로 불교가 공인되고 중단했던 흥륜사(興輪寺) 창건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다(535). 이와 같이 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실에서 불교를 수용한 원인은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정신적 지주로서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후 신라의 불교는 재래의 토속신앙을 극복하면서 고대국가의 이념과 사상을 통일하고 국가발전을 비는 호국신앙(護國信仰)과 현실구복적(現實求福的) 신앙으로 수용 발전되었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불교의 호국사상은 왕권의 신성함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불교왕명을 낳았다. 즉, 진평왕과 그 왕비는 석가의 모친명(名)을 따서 백정(白淨)·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 불렀고, 법흥왕은 법공(法空), 진흥왕은 법운(法雲)이라 하는 등 불교왕명시대가 찾아왔다. 불교의 호국관은 국가적 차원에서 불국사(佛國寺)·흥국사(興國寺)·흥왕사(興王寺) 등을 축조한 것이나, 황룡사9층탑의 축조 및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하여 화랑이 되었다는 신념 등은 왕실호위와 국가수호의 호국신앙의 표시였다. 또한 호국경(護國經)인 인왕경(仁王經)이 존중되고, 국가의 안태(安泰)를 비는 백좌강회(百座講會:仁王會)·팔관회(八關會) 등 불교행사가 성행하였다. 한편 승직제도인 국통제(國統制)가 진흥왕 때 수립되어 불교의 정치참여를 촉진시켰다. 또 현세구복적 성격면에서는 아들의 출산이나 치병(治病)을 기원하는 등 샤머니즘과 결부되어 불교의 대중화가 촉진되었다. 이와 같은 불교는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데 정치적 고문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중국 및 서역문화 수입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여 민족문화 개발에 활력소를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문화 개발에도 큰 몫을 담당하였다. 특히 승려들은 학문과 사상의 선각자가 되어 국민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원광(圓光)의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신라인의 도덕적 요강으로 실천되었다는 점에서도 실증된다. 통일 전 불교의 종파는 자장을 중심으로 하는 계율종(戒律宗)이 유행하여 국민사상의 통일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 한편 의상(義湘)의 화엄종(華嚴宗)은 원융사상(圓融思想)을 바탕으로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와 부합되었기 때문에 귀족사회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통일 후 중대의 불교는 나·당간의 친선관계가 이룩되면서 유학생·유학승의 노력으로 단순한 호국종교의 역할을 벗어나 사상과 이념을 앞세운 종교철학으로 발전하였다. 이 결과 5교(敎)의 종파가 성립되었다. 이때 원효는 통일신라의 불교를 철학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종파간의 대립의식이나 형식을 배격하고 일심(一心)·진여(眞如)와 통일·화합의 화정사상(和靜思想)을 강조하면서 불교의 형식화·귀족화를 거부하였다. 이로써 불교를 생활화하며 대중화하는 정토신앙을 확립하였다. 5교가 귀족들의 환영을 받은 데 대하여 정토신앙은 일반 민중의 환영을 받았다. 이 정토신앙은 불경의 깊은 교리를 터득하지 않더라도 극락세계에 생왕(生往)한다는 뜻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외면, 고해에서 벗어나 서방의 정토(淨土:극락)에 귀의할 수 있다는 지극히 단순한 신앙이었다. 그러므로 일반 백성들도 손쉽게 믿을 수 있었는데, 이와 같은 정토신앙은 통일신라의 사회적 모순에 시달리고 있던 민중들의 현실도피적 염세경향을 반영해준 불교 내세관의 표시라고 볼 수 있다. 8세기 이후 신라 사회에 정치적 권위가 추락되자 불교계에도 불경과 계율을 앞세워 중앙귀족과 연결된 5교의 전통과 권위에 대항하는 선종이 대두되어 지방 호족과 연결, 9산(九山:禪宗)의 종파가 이룩되었다. 하대의 선종사상은 교리보다 스스로 사색하여 개인적인 심적 체험과 도야로서 진리를 깨닫는 것(見性悟道)이 옳다고 생각한 종파로서 문자를 떠나(不立文字)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중요시하였다. 이 선종은 8세기 말 혜공왕 때의 신행(神行)과 9세기 초인 헌덕왕 때의 도의(道義)에 의하여 가지산파(迦智山派)가 성립되면서 9개파가 성립되었다. 선종은 정치·사회적으로 혼란을 거듭했던 하대에 심성(心性) 도야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시대적 환경에 부합될 수 있었다. 대개 6두품 출신이 지방 호족들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한 변경에서 개창되었기 때문에 호족의 종교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발전 성행한 선종은 중세(中世)의 지성을 성립시키는 자극제가 되었을 뿐만 아뉜신라 왕실의 권위를 부정함으로써 호족세력의 사상적 이념을 제시해주었다. 특히 해주(海州) 수미산파의 개창자 이엄(利嚴)이 호족 출신인 왕건(王建)의 스승이 된 것 등으로 미루어 선종사상은 고려 왕조 개창의 정신적 계기가 되었다. 선종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중국문화의 폭을 넓혀주었고, 한문학 발달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화랑도(花郞徒)

 

신라 때 청소년으로 조직되었던 수양단체. 국선도(國仙徒)·풍월도(風月徒)·원화도(源花徒)·풍류도(風流徒)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에는 ‘무리를 뽑아서 그들에게 효제(孝悌)와 충신을 가르쳐 나라를 다스리는 데 대요(大要)를 삼는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처음에 군신(君臣)이 인재를 알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어 사람들을 끼리끼리 모으고 떼지어 놀게 하여, 그 행실을 보아 거용(擧用)하려 하였다’ 하고, 이들은 ‘서로 도의를 닦고, 서로 가악(歌樂)으로 즐겁게 하며, 명산과 대천(大川)을 찾아 멀리 가보지 아니한 곳이 없으며, 이로 인하여 그들 중에 나쁘고, 나쁘지 아니한 것을 알게 되어, 그 중의 착한 자를 가리어 조정에 추천하게 되었다’고 그 설치목적과 수양과정을 적고 있다. 이로써 화랑도의 설치는 인물을 양성하여 그 가운데 인재를 가려서 국가에 등용함을 목적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소기(所期)의 성과에 대해 《삼국사기》는 ‘현좌(賢佐:賢相)와 충신이 이로부터 솟아나고, 양장(良將)과 용졸(勇卒)이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고 하였다. 그 설치연대에 대해서 《삼국사기》에는 576년(진흥왕 37)이라 하였으나, 562년에 이미 화랑 사다함(斯多含)이 대야성(大耶城:高靈)을 공격하여 큰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음으로 보아 신라는 이때에 이르러 이전부터 있었던 미비된 상태의 청소년 집단이던 화랑도를 국가조직 속에 편입시켜 무사단의 성격으로 강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화랑도는 처음에 남모(南毛)·준정(俊貞) 두 미녀를 뽑아 이를 원화(源花)라 하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조직하여 300여 명의 무리가 모였으나, 이 두 여단장은 서로 시기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해 취하게 한 뒤 강물에 던져 죽여버렸다. 이 일이 발각되어 준정도 사형에 처해지고, 그 무리들도 화목을 잃어 해산하였다. 그 후 나라에서는 귀족 출신의 외양이 잘생기고 품행이 곧은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받들게(단장으로) 하자 무리가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이로써 화랑도에는 그 지도자에 화랑이 있고 그 밑에 낭도가 있었는데, 초기의 화랑도는 조직도 미미한 것이었으나 576년 이후 국방정책과 관련하여 이를 관에서 운영하게 되면서 총지도자에 국선(國仙:源花·花主)을 두고 그 밑에 화랑이 있어 각각 문호(門戶:編隊)를 맡았다. 화랑도의 총지도자인 국선은 원칙적으로 전국에 l명, 화랑은 보통 3∼4명에서 7∼8명에 이를 때도 있었으며, 화랑이 거느린 각 문호의 낭도는 수천 명을 헤아렸다. 화랑도의 기원에 대해서는 ① 소도제단(蘇塗祭壇)의 무사(武士)들이 화랑도화하였다는 설(申采浩), ② 조선 고유의 신앙단인 부루교단(敎團)에서 연유하였다는 설(崔南善), ③ 원시 미성년집회에서 연유하였다는 설(李基白) 등이 있다. 화랑도는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우리의 옛 사회에는 소년들이 모이는 집이 있다 하여 ‘소년유축실(少年有築室)’이라 한 바와 같이 대체로 원시시대 이래로 촌락 또는 부족단위로 일정한 연령층의 청소년들이 모여 단체생활과 공동의 의식(儀式)을 수행하면서 사회의 전통적 가치와 질서를 터득하고 동일한 이상을 추구하며 가무와 무예를 익히던 연령급단조직(年令級團組織)이, 신라의 국세(國勢)가 팽창하여 부족집단의 규모를 넘어선 정치·군사조직으로 발전하자, 확대된 영역과 인구를 지닌 새로운 국가적 발전에 뒷받침될 인재의 양성을 목적으로 재편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화랑도는 그 조직과 수양과정을 통하여 ① 위로는 국가를 위하고, 아래로는 벗을 위하여 죽으며, ② 대의(大義)를 존중하여 의에 어그러지는 일은 죽음으로써 항거하고, ③ 병석에서 죽는 것을 꺼리고 국가를 위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함을 찬양하며, ④ 오직 전진이 있을 뿐, 물러섬을 부끄럽게 여겨, 적에 패하면 자결할지언정 포로가 됨을 수치로 아는 등 독특한 기질과 기풍을 연마, 함양하였다. 또한 원광법사(圓光法師)가 귀산(貴山)·취항(項) 두 화랑에게 주었다는 세속오계(世俗五戒:事君以忠·事親以孝·交友以信·臨戰無退·殺生有擇)가 화랑의 정신적 기저(基底)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화랑의 기풍은 당시 신라의 종교적 정신세계가 받쳐주었다. 그것은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 서문(鸞郞碑序文)에 나타나, 그는 ‘우리 나라에는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다. 이를 풍류(風流)라 하는데, 이는 삼교(三敎:儒敎·仙敎·佛敎)를 포함한 것으로, 모든 민중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하였다. 그들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니, 이는 공자(孔子)의 가르침이며(儒敎), 또한 모든 일을 거리낌없이 처리하고, 말을 아니하면서 일을 실행하는 것은 노자(老子)의 가르침이며(仙敎), 모든 악한 일을 행하지 않고, 착한 행실만 신봉하여 행하는 것은 석가(釋迦)의 교화(佛敎)’라 하였다. 실상 화랑도에게 일종의 수호신같이 숭배되었던 미륵존(彌勒尊)이나, 낭도 중에 승려가 많았으며, 승려가 화랑의 집회에 관계하였다는 점 등은 화랑도와 불교와의 관련을 말하여주는 것이다. 또한, 신선(神仙)사상을 좋아하던 진흥왕이 화랑도를 창설하면서 나라를 흥하게 하는 데는 반드시 풍월도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최치원이 말한 신라 고유의 신앙인 풍류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밖에 화랑의 원유지이던 포석정(鮑石亭)이 국가의 제의(祭儀)와 결합되었고, 김유신 등 화랑의 출전(出戰)에 주술적(呪術的)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고대의 전쟁에는 주술적인 면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과 같이 화랑도에도 제의적인 면이 남아 있어, 화랑은 무장(武將)으로서 사령자(司靈者)의 성격도 겸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결국 화랑도는 전래의 청소년 연령급단조직에 통일전쟁을 위한 현실적 국가주의와 유불선의 보편적 정신세계를 융합, 건전한 청소년을 양성함으로써 신라의 삼국통일에 필요한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성덕왕(재위 702∼732) 때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記)》에는 낭도를 이끌었던 역대 화랑은 200여 명에 이른다 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전하지 않는다. 이밖에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나 안축(安軸)의 《관동유기(關東遊記)》에 나오는 고성(高城) 삼일포(三日浦)의 단서(丹書)·마애단서(磨崖丹書)·36봉비(峰碑), 강릉(江陵) 한송정(寒松亭)의 사선비(四仙碑), 통천(通川) 총석정(叢石亭)의 애상비(崖上碑)·동봉고갈(東峰古碣)·동봉비(東峰碑) 등은 화랑의 유적을 알려주는 것들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나타난 대표적 화랑을 시대순으로 열거하면 사다함(斯多含)·백운(白雲)·설원랑(薛原郞)·미시랑(未尸郞)·김유신·김영윤(金令胤)·근랑(近郞)·죽지랑(竹旨郞)·호세랑(好世郞)·구창공(瞿S公)·거열랑(居烈郞)·실처랑(實處郞)·보동랑(寶同郞)·관품(官品)·문노(文努)·보천(寶川)·부례랑(夫禮郞)·준영랑(俊永郞)·기파랑(耆婆郞)·김응렴(金膺廉)·요원랑(邀元郞)·예흔랑(譽昕郞)·계원(桂元)·숙종랑(叔宗郞)·효종랑(孝宗郞) 등이 있다. 신라 말에 이르러 화랑이란 말은 쓰이지 않고 대신 선랑(仙郞)·국선(國仙) 등으로만 불렸다. 고려에서도 화랑이란 말은 쓰지 않고 선랑은 팔관회(八關會)의 무동(舞童)을, 국선은 충렬왕 이후 양반의 군역(軍役)을 지칭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선랑·국선이란 말은 쓰지 않게 되고 화랑이란 말은 초기에 남무(男巫:覡)를 가리키게 되어 이를 ‘화랑이’라고 하였으며, 조선 중기 이후에는 무부(巫夫:兩中), 걸립승(乞粒僧)의 무동, 사당(寺堂)의 거사(居士) 등을 지칭하게 되었다. 화랑도는 그 창설로부터 삼국통일이 완성된 문무왕에 이르는 약 l세기 동안 융성하여, 삼국통일의 어려운 시기에는 강한 무사도정신으로 나타나 국난을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통일 후 나라에 태평시대가 계속되면서 쇠퇴하여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그러나 그 정신은 소멸되지 않고 고려와 조선에 이어 내려오면서 국난을 맞을 때는 의병 등의 의기로 치솟아, 오늘날에도 그 정신은 도(道)로서 재흥(再興)을 염원하는 소리가 높다.

 

세속오계(世俗五戒)

 

신라 진평왕 때 승려 원광(圓光)이 화랑에게 일러준 다섯 가지 계율. 원광이 수(隋)나라에서 구법(求法)하고 귀국한 후, 화랑 귀산(貴山)과 추항(項)이 찾아가 일생을 두고 경계할 금언을 청하자, 원광이 이 오계를 주었다고 한다. 즉, 사군이충(事君以忠)·사친이효(事親以孝)·교우이신(交友以信)·임전무퇴(臨戰無退)·살생유택(殺生有擇)이다. 이는 뒤에 화랑도의 신조가 되어 화랑도가 크게 발전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이룩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최치원(崔致遠, 857∼?)

 

신라시대의 학자.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 자 고운(孤雲)·해운(海雲). 86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高)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 후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의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다. 글씨에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光塔碑)> <사산비(四山碑)>가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궤집(中山覆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이 있다.

                                                                   

 

 

원효(元曉, 617∼686. 3. 30)

 

신라 때의 승려. 속성 설(薛). 법명 원효, 아명 서당(誓幢)·신당(新幢). 설총(薛聰)의 아버지. 압량(押梁:慶山郡) 출생. 648년(진덕여왕 2) 황룡사(皇龍寺)에서 승려가 되어 수도에 정진하였다. 가산을 불문에 희사, 초개사(初開寺)를 세우고 자기가 태어난 집터에는 사라사(沙羅寺)를 세웠다. 650년(진덕여왕 4)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는데 중도에 고구려 순찰대에 붙잡혀 실패하였다. 661년 의상과 다시 유학길을 떠나 당항성(唐項城:南陽)에 이르러 한 고총(古塚)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마신 물이, 날이 새어서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음을 대오(大悟)하고 그냥 돌아왔다. 그 후 분황사(芬皇寺)에서 독자적으로 통불교(通佛敎:元曉宗·芬皇宗·海東宗 등으로도 불린다)를 제창,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하루는 거리에 나가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라고 노래한 것이 태종무열왕에게 전해져 요석공주(瑤石公主)와 잠자리를 같이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설총이 태어났다. 이 사실을 스스로 파계(破戒)로 단정,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小性居士)·복성거사(卜性居士)라 자칭, 《무애가(無3歌)》를 지어 부르며 군중 속에 퍼뜨리자 불교가 민중 속에 파고들었다. 또 당나라에서 들여온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왕과 고승(高僧)들 앞에서 강론, 존경을 받았다. 그 후 참선과 저술로 만년을 보내다가 70세에 혈사(穴寺)에서 입적하였다. 뒤에 고려 숙종이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불교사상의 융합과 그 실천에 힘쓴 정토교(淨土敎)의 선구자이며, 한국의 불교사상 큰 발자취를 남긴, 가장 위대한 고승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다. 저서에 《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 《화엄경소(華嚴經疏)》 《대열반경종요(大涅槃經宗要)》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 《대무량수경종요(大無量壽經宗要)》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 《미륵상생경종요(彌勒上生經宗要)》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보살영락본업경소(菩薩瓔珞本業經疏)》 《범강경보살(梵綱經菩薩)》 《계본사기(戒本私記)》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 《중변분별론소(中邊分別論疏)》 《판량비론(判量比論)》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 《십문화정론(十門和諍論)》 등이 있다.

                                                            

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

 

원효(元曉)가 구마라습(鳩摩羅什)이 한역한 《마하반야바라밀다경(摩訶般若波羅蜜多經)》의 요지를 기술한 책. 1권. 전체를 6문(門)으로 나누고 반야경의 중심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제1문 <술대의(述大意)>에서 반야경이 반야를 종(宗)으로 삼고 있다고 보고, 이를 실상(實相)·관조(觀照) 두 반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제2문 <현경종(顯經宗)>에서는 이 반야를 문자(文字)·실상·관조 셋으로 나누고, 주로 실상과 관조 두 반야를 설명하면서 그의 사상의 특징을 이루는, 여래장(如來藏)이야말로 실상반야라고 하였다. 제3문 <석제명(釋題名)>에서는 《대혜도경》의 대(大)·혜(慧)·도(度) 세 낱말의 의미를 풀이하였고, 제4문 <명연기(明緣起)>에서는 경전을 설(說)한 인연에 대하여 보살행(菩薩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의심을 끊게 하기 위해서, 중생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 불법에 신심을 내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등 그 나름의 6가지 사유를 들고 있다. 제5문 <판교(判敎)>에서는 중국 양(梁)나라의 법운(法雲)의 이교설(二敎說)과 《해심밀경(解深密經)》에 따른 현장(玄)의 삼종법륜(三種法輪) 교판의 오류를 지적한 것이다. 제6문 <소문(消文)>은 실제로 기술되지 않았다.

                                                            

무애가(無碍歌)

 

신라 때의 가요(歌謠).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재위 654∼661) 때 원효(元曉)가 파계하여 설총(薛聰)을 낳은 다음 속복(俗服)에 표주박 모양의 이상한 그릇을 들고 거리를 돌며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이 노래는 화엄경(華嚴經)의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3人一道出生死)”에서 가명(歌名)을 붙였다고 한다. 그 유래만 《삼국유사》와 《고려사》 <악지(樂志)>에 전하고,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국학(國學)

 

신라시대에 비롯된 오늘날의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교육기관. 682년(신문왕 2) 예부(禮府)에 설치, 3분과로 나누었다. 1분과는 《예기(禮記)》 《주역》 《논어》 《효경(孝經)》, 2분과는 《좌전(左傳)》 《모시(毛詩)》 《논어》 《효경》, 3분과는 《상서(尙書)》 《문선(文選)》 《논어》 《효경》의 과목을 두었다. 입학자격은 대사(大舍:12등관)부터 무위자(無位者)까지의 귀족으로 15세부터 30세까지이며, 재학연한은 9년이었으나 재질을 인정받지 못하면 퇴학을 당하고, 재질을 인정받으면 비록 9년이 지나도 재학을 허용받아 벼슬이 대나마(大奈麻:1등관)·나마(奈麻:2등관)에 이른 후에야 졸업하게 되었는데, 이들 국학 학생을 사인(舍人)이라 하였다. 경(卿:6등관) 1명, 대사(大舍:11∼13등관)·사(史:吏屬) 각 2명과 박사·조교 등의 교관을 두었다. 국학에는 717년(성덕왕 16) 당(唐)으로부터 문선왕(文宣王:孔子)·십철(十哲)·72제자의 화상(畵像)을 가져다 봉안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유교교육기관으로서의 체제를 완비하였다. 경덕왕이 태학감(太學監)으로 고쳤다가 혜공왕(惠恭王)이 다시 국학으로 고쳤다. 고려시대에는 1275년(충렬왕 1) 국자감(國子監)을 국학으로 고쳤다가 후에 성균감(成均監)·성균관으로 고쳤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성균관으로 통일되었다.

                                                           

 

고려(高麗)

 

신라 말에 송악(松嶽:開城)의 토호(土豪) 왕건(王建)이 분열된 한반도를 다시 통일하여 세운 왕조(918∼1392). 공양왕(恭讓王)까지 34대 475년간 존속했다. 왕건은 태봉(泰封)의 왕인 궁예(弓裔)의 부하로 있다가 918년 궁예를 추방하고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건국과 민족의 재통일】 왕건은 신숭겸(申崇謙)·홍유(洪儒)·배현경(裴玄慶)·복지겸(卜知謙) 등의 추대를 받아 철원(鐵圓:鐵原)에서 즉위하여 도읍을 송악으로 옮긴 다음 호족세력 통합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崇佛政策) 등으로 세력구축에 힘썼다. 이때 한반도 내의 형세는 후삼국(後三國)의 분열기였는데 935년 신라를 병합하였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격파하여 민족의 재통일을 성취하였다.

【왕권의 안정】 태조 때는 호족세력 통합의 방도로 호족과의 정략결혼이 성행함에 따라 대두한 많은 외척세력과 종실세력(宗室勢力)이 왕위 계승을 놓고 대립, 왕실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그 실례가 왕규(王規)의 난이다. 4대 광종(光宗) 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956년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958년 과거제도, 그리고 공복제도(公服制度)·칭제(稱帝)·건원(建元)을 실시하는 등 왕권의 위세를 과시하고 불평 귀족을 숙청하여 정치기강을 확립하였다. 5대 경종(景宗)은 전시과(田柴科)라 하여 전국가적 규모의 토지제도를 마련하여 관리들의 생활안정을 도모하였고, 최승로(崔承老)의 보필을 받은 6대 성종(成宗)은 새로운 사회질서를 위하여 유교적 정치사상에 입각한 2성(省) 6부(部)의 중앙관제를 마련하였으며, 성종 때는 지방관제를 정비하여 최초로 지방관(地方官)을 파견하는 등 중앙집권제 강화에 힘쓰는 한편, 학문과 산업을 장려하여 국가기반을 굳혔다. 11대 문종(文宗)에 이르러 율령(律令)·전제(田制)·관제(官制)·병제(兵制) 등이 완비되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완성되었다.

【사회의 동요와 무신의 난】 문종의 문치정책(文治政策)에 따라 최충(崔? 등이 12도(徒)를 설치하고 인재를 배출하여 문운(文運)을 크게 떨쳤으나,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경시하는 풍조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특히 문종 이후 17대 인종 때까지 인주이씨(仁州李氏)인 이자연(李子淵)→이호(李顥)→이자겸(李資謙)이 7대 80년간 왕실과 중복으로 혼인관계를 맺고 외척세력으로 등장하자, 왕권의 쇠약과 더불어 권력층은 토지를 겸병하기 시작하여 농민들의 몰락을 촉진시켰다. 이자겸의 세력이 왕권을 능가하자 인종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1126년 이자겸의 난을 일으켰으며, 이자겸과 척준경(拓俊京) 사이의 반목으로 척준경·정지상(鄭知常)·김부식(金富軾)의 순으로 집권자가 바뀌는 등 귀족정치의 모순이 폭발되어 고려는 내란기로 접어들었다. 35년(인종 13)에는 묘청(妙淸)이 서경천도와 금국정벌론(金國征伐論)을 주장하자 개경파와 서경파의 대립으로 묘청의 난이 일어나 귀족정치의 내분이 폭발하였다. 인종에 뒤이어 즉위한 의종(毅宗)은 군신과 더불어 향락을 일삼고 정사를 소홀히 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과거부터 불만이 많았던 무신들은 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을 중심으로 난을 일으켜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귀양보내고, 명종(明宗)을 즉위시켰다(정중부의 난). 그 후 무신간의 정권쟁탈전이 전개되어 79년(명종 9) 경대승(慶大升)은 정중부를 죽이고 집권하였고, 경대승이 병사하자 83년 천민출신인 이의민(李義旼)이 집권, 또 96년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을 죽이고 집권하여 최씨 무신정권은 우(瑀)·항(沆)·의(? 4대 60여 년간(1196∼1258) 계속되었다. 이 결과 전시과의 붕괴로 농장이 확대되었고, 노비 증가·사병(私兵) 양성·하극상(下克上) 풍조의 대두로 천민 및 농민의 반란이 일어나 사회질서가 붕괴되었다. 무신집권 기간에 일어난 사건을 보면 1173년 문신과 결탁하여 의종 복위운동을 한 김보당(金甫當)의 난, 74년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의 난과 승려들의 반란, 하층민의 반란으로는 76년 공주(公州) 명학소(明鶴所)의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의 난, 82년 전주(全州)의 관노(官奴)인 죽동(竹同)의 난, 그리고 93년 신라 부흥을 외쳤던 김사미(金沙彌)의 난과 효심(孝心)의 난, 1217년(고종 4) 서경에서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했던 최광수(崔光秀)의 난, 37년 전라도 담양에서 백제 부흥을 표방했던 이연년(李延年)의 난, 그리고 1198년(신종 1) 최충헌의 사노(私奴)인 만적(萬積)이 노비신분 해방운동을 전개한 사건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231년에 몽골의 침입을 받아 강화(江華)로 천도하였으나 59년 원(元)나라와 화의하여 충렬왕(忠烈王) 이후 공민왕(恭愍王) 때까지 80여 년간은 원나라의 내정간섭으로 자주성을 잃었다.

【대외관계】 한반도의 역사는 중국 대륙의 정치형세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고려가 건국할 때는 916년 요(遼:거란)나라, 5대 10국, 그리고 960년 5대 10국을 통일한 송(宋)왕조가 일어났다. 이때 고려는 대외정책으로 친송배요(親宋排遼)를 표방한 북진정책을 썼으므로 세 차례 거란의 침입을 받았다. 962년 광종 때(송나라 태조 3) 송나라와 국교를 맺은 양국간의 관계를 보면 송나라는 북방에 위치한 요나라와 금(金:女眞族)나라를 의식하여 정치적·군사적 의도에서 제휴하려고 하였으나, 고려는 송나라의 선진문화 수입에 주목적을 두고 친선관계를 맺었다. 고려와 여진족과의 관계를 보면 숙종 때 만주 하얼빈[哈爾濱] 지방에서 일어난 완엔부[完顔部]의 추장 영가(盈歌)가 여진족을 통합하여 북간도 지방을 통일한 후 우야소[烏雅束]가 함흥(咸興)까지 진출하여 고려군과 충돌하자, 숙종은 임간(林幹)에 이어 윤관(尹瓘)을 파견하여 여진정벌을 단행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윤관은 별무반(別武班)을 편성, 1107년(예종 2) 윤관과 오연총(吳延寵)이 여진을 토벌하여 9성(城)을 축성하였으나 1년 후 9성을 포기하였다. 그 이유는 여진족이 환부(還附)를 애걸해왔고, 수비의 곤란 및 보수세력의 성장 때문이었다. 그 후 여진족은 15년 아구타[阿骨打]가 국호를 금(金)이라 하고 25년(인종 3) 요나라를 멸한 뒤 26년 금나라는 고려에 사대(事大)의 예를 강요하기에 이르러 당시 집권자 이자겸 등의 주장으로 사대관계를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고려사회는 내분만 격화되어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무신의 난 등으로 더욱 혼란하여 원나라의 침입을 받아 자주성을 상실하기도 하였다. 그 후 1370년 공민왕 때에 이르러 지용수(池龍壽)와 이성계(李成桂)가 랴오둥[遼東] 지방을 공략하여 랴오양[遼陽]을 점령하였다. 공민왕 때 2차에 걸친 홍건적(紅巾賊)의 침입과 특히 우왕(禑王) 전후기의 왜구(倭寇)의 침입은 국정을 불안하게 했고 국력을 소모시켰다. 이와 같은 정치적·사회적 불안기에 명나라가 만주를 점령한 뒤 원나라가 지배하였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자, 이에 분개한 최영(崔瑩)은 우왕에게 품의하여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 이때 우군도통사 이성계는 위화도(威化島)에서 4불가론(不可論)을 내세워 회군을 단행하여 최영을 고양(高陽)으로 귀양보내고, 우왕을 폐위시켜 강화로 추방한 뒤 아들 창(昌)을 즉위시켰는데, 이가 곧 창왕(昌王)이다. 이렇게 하여 정치적·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새 왕조 조선을 개창할 계기를 마련하였다.

【중앙관제】 고려의 관제는 후삼국 통일 후 태봉과 신라의 관제를 병용하였는데, 당(唐)·송(宋)나라와 고려의 독자적인 제도도 섞여 있었다. 이러한 관제는 6대 성종 때에 정비되기 시작하여 문종에 이르러 일단 완성되었다. 체제의 특징을 보면 2성 6부는 당제(唐制)에 가깝고, 중추원(中樞院)과 삼사(三司)는 송제(宋制)를 채용한 것이며, 도병마사(都兵馬使)와 식목도감(式目都監)은 고려 자체의 필요성에서 생긴 것이다. 관직상의 품계는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인 양반제도를 두고, 관등급은 정(正)·종(從) 각 9품의 도합 18품으로 나누었다.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宰府)과 중추원은 각각 2품과 3품을 획선으로 하여 상하 이중적 조직으로 그 직무도 달랐다. 중서문하성의 2품 이상의 고관은 재신(宰臣:省宰·宰相)이라고 하여 정책을 수립·결정하고, 3품 이하의 관원은 성랑(省郞:郞舍·諫官)이라고 하여 봉박(封駁)과 서경(署經) 등의 임무를 맡고 있었으며, 정책의 실무를 담당한 것은 상서육부(尙書六部)였다. 여기에는 상서(尙書:정3품)가 책임자였지만, 그 위에 판사제(判事制)를 따로 두어 중서문하성의 성재(省宰)로 겸직시킨 점은 고려의 정치체제가 귀족중심이었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특히 왕권의 전제성(專制性)을 규제하는 대간제도(臺諫制度)가 있었는데,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어사대(御史臺)의 관원(官員)을 대간(臺諫)이라고 하였다. 대간제도를 보면 간쟁(諫諍)·봉박(封駁:중서문하성의 심사권과 도병마사의 의결권)·서경제도(署經制度)가 있었다. 이것도 귀족적 성격을 농후하게 반영해 주고 있다. 고려는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기에는 관제상의 격(格)을 낮추어 다음 도표와 같이 개편하여 운영하다가 공민왕 때에 관제가 다시 복귀되기도 하였다.

【지방관제】 기구 개편의 연혁을 보면 983년(성종 2) 12목(牧), 995년에 10도(道)·3경(京)·5도호부(都護府)·8목(牧)·양계(兩界)가 설치되고, 1018년(현종 9) 전국을 도와 양계로 나누어 그 밑에 4도호(都護)·8목을 비롯해 군(郡)·현(縣)·진(鎭) 등을 설치하였다. 5도제(道制)가 전국적으로 정착된 시기는 예종(睿宗)·인종(仁宗) 이후이다. 지방행정기구의 운영상의 내용을 보면 3경은 풍수설(風水說)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태조 때는 개경(開京)과 서경(西京)을, 성종 때는 동경(東京:慶州)을 설치하였으며, 문종 이후 동경 대신에 남경(南京:서울)을 넣었는데, 서경에는 분사제도(分司制度)를 두어 왕이 머무를 경우 정무처리를 할 수 있게 하였다. 경기는 특수행정구역으로 전시과의 사전(私田) 지급의 대상지로 삼았으며, 5도는 일반 행정구역으로, 도 밑에는 주(州)·현을 두고 군·현에 한하여 외관(外官)을 파견하였는데, 이들을 주군(主郡:領郡)·주현(主縣:領縣)이라고 하였다.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군(屬郡)과 속현(屬縣)이 더 많아 외관이 없는 속군과 속현은 외관이 파견된 군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지배하였다. 최하층인 촌(村)과 천민집단으로 구성된 향(鄕)·소(所)·부곡(部曲)은 현에 소속되어 향리(鄕吏)가 직접 다스렸다. 향리는 일반 평민이나 천민집단의 조세·공물의 징수와 노역징발의 사무를 관장했으며, 일품군(一品軍)의 장(長)이 되기도 하였다. 영향력이 있는 향리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심관제도(事審官制度)와 기인제도(其人制度)를 실시하였다. 군사적 특수지역인 양계(兩界)는 진(鎭)과 촌(村)을 두어 군사적 체제를 갖추었는데, 외관은 진까지 파견하였다.

【군사제도】 고려의 기본군제는 중앙의 2군(軍) 6위(衛)와 지방의 주현군(州縣軍:도)과 주진군(州鎭軍:양계)으로 편성되었다. 6위가 형성된 것은 995년(성종 14)경이며, 2군이 형성된 것은 현종(顯宗) 무렵이고, 친위대인 2군은 6위보다 우위에 있었다. 2군 6위는 각각 정·부 지휘관으로 상장군(上將軍)과 대장군(大將軍)이 있었다. 이들 2군 6위는 8개 군단의 정·부 지휘관으로 구성된 군사최고 합좌기관(合坐機關)인 중방(重房:정원 18명)을 갖추었다. 2군 6위의 병력은 모두 1,000명의 군인으로 조직된 영(領)으로 구성되었다. 영은 병종(兵種)에 따라 보승(保勝)·정용(精勇)·역령(役領)·상령(常領)·해령(海領)·감문위령(監門衛領)으로 구분되어 도합 45령으로 4만 5000명이었다. 영(領)의 지휘관은 장군(將軍) 1명, 중장군(中將軍) 2명, 그 아래 낭장(郞將)·별장(別將)·산원(散員)·위(尉)·대정(隊正) 등 군관이 배치되었으며, 이들도 합좌기관인 장군방(將軍房)을 가지고 있었다. 2군 6위의 중앙군은 신분과 군역 의무를 세습하는 군반씨족(軍班氏族) 출신의 전문적 군인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에게는 군인전(軍人田)이 지급되었으며, 중앙군과 지방군과는 교류가 없었다. 지방군은 도와 계(界)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도의 주현군 중 보승과 정용은 주현군의 핵심으로 치안(治安)·방수(防戌)의 역할을 담당하였고, 일품군(一品軍)은 노동부대로서 공역(工役)에 동원되었다. 양계는 국경지대의 군사적 지역인 만큼 진마다 초군(抄軍)·좌군(左軍)·우군(右軍)을 중심으로 한 정규군이 주둔하였다. 주현군은 947년(정종 2) 광군(光軍)이 그 효시가 된다. 주현군은 군인전이 지급되지 않는 병농일치(兵農一致)의 군인이었다. 이 밖에 광군(光軍)·별무반(別武班:神騎軍·神步軍·降魔軍)과 최우(崔瑀) 집권 때는 삼별초(三別抄)가 있었다.

【토지·조세 제도】 고려의 토지제도 정비과정을 보면, 940년(태조 23) 역분전(役分田)을 실시하였다. 역분전은 고려 건국과정에서 태조를 도운 조신(朝臣)과 군사(軍士)에게 품계가 아닌 충성도(忠誠度)에 따라 지급된 토지로 논공행상의 성격을 지녔다. 그 후 집권체제가 안정된 976년(경종 1) 전시과제도가 전국가적 규모로 실시되어 현직 및 퇴직자에게 관직의 고하[四色公服:紫·丹·緋·綠]와 인품에 따라 전지(田地)와 시지(柴地:땔나무를 얻는 땅)를 지급하였고, 따라서 이 제도 역시 역분전의 성격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였다. 이후 토지제도 체제가 정비된 것은 998년(목종 1)에 비로소 성종 때의 관제를 기준으로 관직의 고하에 따라 18과(科)로 나누어 토지를 지급한 개정전시과(改定田柴科:18品田柴科)를 마련하면서부터였다. 개정전시과는 1076년(문종 30) 갱정전시과(更定田柴科)로 개정되었는데, 이의 특징은 토지지급의 결수가 줄고, 무관에 대한 대우가 상승하였으며, 퇴직자는 토지 지급대상에서 제외되고 현직관리에게만 지급하되 경기에 한하였다. 전시과의 규정에 따라 지급된 토지는 수조권(收租權)의 귀속 여하에 따라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으로 나누어 지급하였다. 지급된 토지는 완전한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고 수조권만을 일정기간 인정하였는데, 이것은 모든 토지 관리권을 국가가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토지의 종류로는, 과전(科田)·공음전(功蔭田)·공해전(公田)·군인전(軍人田)·외역전(外役田)·내장전(內庄田)·구분전(口分田)·한인전(閑人田)·궁원전(宮院田)·사원전(寺院田)·둔전(屯田)·투화전(投化田) 등이 있었다. 조세(租稅)의 납부는 성종 때 수조권이 개인 또는 관청에 있는 사전은 수확의 1/2을 조(租)로 바치고 수조권이 국가에 있는 공전은 1/4을 조로 바치게 하였다. 공부(貢賦)는 지방의 특산물을 나라에 바치는 것인데, 주와 현에서 해마다 바치는 상공(常貢)과 소(所)에서 생산된 특정물건(금·은·동·종이·먹 등)을 바치는 별공(別貢)과 과일나무·삼밭[麻田] 등에 부과하는 잡공(雜貢)이 있었다. 또 요역(役:賦役)이라고 하여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평민 남자는 병역과 부역의 의무가 있었다. 병역은 군포(軍布)로 대납할 수 있었으며, 부역으로 토목공사에 동원될 때의 식사(食事)는 자기가 부담하였다. 호적(戶籍)은 3년마다 재작성하였다.

【화폐제도】 농업을 기본 경제로 한 당시 사회는 곡물(쌀)과 베[布]로 물물교역의 기준을 삼았으며, 996년(성종 15) 건원중보(乾元重寶)라는 한국 최초의 철전(鐵錢)을 만들어 썼으나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나 7대 목종 때는 차·술·음식의 매매시에 국한했다가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15대 숙종(肅宗) 때 의천(義天)과 윤관(尹瓘)의 주전론이 대두되어 주전도감(鑄錢都監)을 설치, 1101년 은병(銀甁:은 600g으로 주전하였다)을 만들었으나 귀족들 사이에서만 거래되거나 뇌물을 주고받는 데 많이 이용되었다. 1102년(숙종 7) 다시 해동통보(海東通寶)·해동중보·삼한통보(三韓通寶)·삼한중보·동국통보(東國通寶)·동국중보를 주조하였으며, 1278년(충렬왕 4) 쇄은(碎銀), 1331년(충혜왕 1) 소은병(小銀甁), 34대 공양왕 때 한국 최초의 지폐인 저화(楮貨)를 발행하였으나 모두 유통되지 못하였다.

【교육제도】 태조 때부터 교육기관으로 개경학(開京學)·서경학(西京學)을 두었으나 학교기관의 정비는 성종 때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한 정치기구 정비에 따라 관료 양성기관이 필요하여 992년(성종 11) 중앙에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였고, 지방의 12목에 경학박사(經學博士)·의학박사를 1명씩 파견하였다. 국자감의 특징을 보면 삼학(三學)은 동일한 내용을 교수했으나, 입학자격은 신분이 각기 달랐다. 삼학에는 박사(博士)와 조교(助敎)를 두고 가르쳤으나 잡학에는 박사만 두었다. 문종(文宗) 때는 개경에 최충의 문헌공도(文憲公徒) 등 12도의 사립학교 설치로 사학(私學)이 발달함에 따라 관학(官學)이 쇠퇴하자, 16대 예종은 관학 진흥책으로 국자감을 국학(國學)으로 개칭하고 국학 내에 최충의 9재학당을 모방하여 7재(七齋)를 설치하고 중국 고전을 중심으로 교육하는 한편, 국학 발전을 위한 육영재단으로 양현고(養賢庫)와 학술기관인 청연각(淸閣)·보문각(寶文閣)을 설치하였다. 1127년(인종 5) 지방교육기관으로 향학(鄕學)이 설치되어 교육기관이 완비되었다. 잡학 이외의 기술교육은 그 특수성에 따라 사천대(司天臺:천문·역법·지리·측후)·태사국(太史局:음양·술수)·태의감(太醫監:의학)·통문관(通文館:외국어)에서 담당하였다. 교육시설과 교육재단은 수서원(修書院:성종)·비서원(秘書院:성종)·서적포(書籍:숙종)·섬학전(贍學錢:충렬왕)이 있었으며, 국학과 향학의 교육운영을 위하여 학전(學田)을 지급하였다.

【사회】 고려사회도 신분의 세습을 원칙으로 하는 양반관료와 중인·평민(농민)·천민으로 구성되었다. 왕족과 귀족으로 편성된 상류층은 족벌세력을 형성하였고, 과전·공음전·공신전을 소유하여 경제적 부(富)를 독점했을 뿐만 아니라 정권에 참여하여 출세의 길도 독점하였다. 특히 5품 이상의 귀족에게 음서(蔭敍)나 공음전과 같은 특권을 부여한 것을 보더라도 특권계급을 공공연히 인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류층은 남반관리(南班官吏)·기술관·하급관리·하급장교로 지배층의 말단에 포섭되었고, 하류층인 평민은 일반 주·군·현에 거주하며 주로 농업에 종사하여 생산을 담당하는 농민들이었다. 고려에서는 이들을 백정(白丁)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특정한 직역(職役)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국가에 대한 조세·부역·역역(力役) 등을 부담하였으며, 제도적으로는 과거에 응시하여 관인(官人)으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이 보장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하였다. 이 점은 국학에 입학할 수 없었던 것을 보아도 짐작이 간다. 천민층은 향·소·부곡의 주민과 진척(津尺)·화척(禾尺:조선시대 백정)·재인(才人) 및 공·사의 노비뿐만 아니라 역(驛:교통기관)·관(館:숙박소)의 주민들이었다. 특히 노비들은 신분을 세습하여 매매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같이 편제된 고려사회는 평민으로부터 상류 귀족에 이르기까지 종(縱)으로는 5대, 횡(橫)으로는 8촌까지 포함하는 친족공동체를 이루고, 다시 가장이 통솔하는 몇 개의 가족단위로 분화되었는데 이러한 단위로 편제된 이유는 세·역·공물의 편리한 운영을 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고려시대에 이르러 성(姓)이 보편화되자 출신지를 본관(本貫)으로 정하고, 본관을 세력평가의 표준으로 삼기도 하였다.

【법률과 풍속】 당률(唐律)을 모방한 71조의 법률과 보조법률이 있었으나 일상생활과 관계되는 관습법을 중심으로 자치 질서를 인정하였다. 형벌은 태(笞)·장(杖)·도(徒:징역)·유(流:귀양)·사(死:사형)의 5형으로 나누었고, 죄의 종류는 모반죄·대역죄·악역죄·불효죄·살인죄·강도죄·절도죄 등이 있어, 그 중 모반죄·대역죄·악역죄·불효죄를 중죄로 다스렸으며, 관리의 독직(瀆職)은 과전(科田)을 몰수하고 장·도형에 처하였다. 풍속은 부처에게 제사지내는 연등회(燃燈會)와 토속신앙과 불교가 융합된 팔관회(八關會)가 성행하였으며, 명절은 설날·대보름·삼짇날[上巳:3월 3일]·석존제(釋尊祭)·단오절(5월 5일)·유두(流頭:6월 15일)·백중(百中:7월 15일)·중추절(가위:8월 15일)·중양절(重陽節:9월 9일)·상달(10월 15일)·동지 등이 연중행사로 발전하였다. 오락으로는 공치기·씨름·제기·석전(石戰)·바둑·장기·윷·연·광대놀이·꼭두각시놀이 등이 있었다. 의복관계는 4대 광종 때 공복제도를 마련하였으나 시대에 따라 달랐다. 평민은 대개 흰옷을 입었고, 여자들은 홍색(紅色)·황색(黃色)의 옷도 입었다. 남자는 상투·두건(頭巾)을 썼고, 부인은 머리에 쪽을 쪘으며, 귀부인은 외출 때 너울을 썼다. 처녀는 붉은 댕기, 총각은 검은 댕기를 달았고, 귀족은 가죽신, 서민은 짚신을 신었다. 죄인은 관이나 두건을 쓰지 못하였다. 장례풍속은 불교의 성행으로 화장(火葬)하는 풍습이 퍼졌고, 부모상은 100일 동안 복상하였으며, 고려 말에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가 수입된 뒤에 3년 동안 복상(服喪)하는 풍습이 시작되었다.

【유학과 한문학】 4대 광종은 유학을 중심으로 한 과거제도 실시로 새로운 지식계급이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였고, 6대 성종은 국자감·비서원·수서원을 설치하여 유교정치의 실천력을 담당할 수 있는 지식계급을 형성하였다. 특히 성종 때 최승로(崔承老)·김심언(金審言)의 활약으로 유교의 정치사상체계를 성립시켰는데, 이것은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전시대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한 것이다. 문종 때 최충의 9재학당을 비롯한 12도의 사학(私學)이 출현하여 경서(經書)·사적(史籍)·한문학이 크게 발달하였고, 정배걸(鄭倍傑)·노단(盧旦)·곽여(郭輿) 등의 유학자가 배출되었다. 이후 15대 숙종과 예종·인종 등의 관학진흥책으로 최약(崔)·홍관(洪灌)·박승중(朴承中)·김인존(金仁存)·김부식(金富軾)·정지상(鄭知常)·최윤의(崔允儀) 등이 활약하여 유학이 크게 발전하였다. 성리학(性理學)은 고려 말 문화변동의 원동력이 되었는데 1289년(충렬왕 15) 안향(安珦)이 연경(燕京)에 갔다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이것을 유교의 정통이라고 생각하여 책을 베끼고 주자의 초상화를 그려 가지고 왔다. 충선왕(忠宣王)은 연경에 만권당(萬卷堂)을 설치하여 양국의 문인(중국측:趙孟·虞集·閻復, 고려측:李齊賢·白正)들을 교류하게 함으로써 유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였다. 이때 원나라에서 충선왕을 10년간 받들었던 백이정(白正)이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고 온 뒤 이제현(李齊賢)·박충좌(朴忠佐)에게 전하여 고려 말기에는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길재(吉再) 등 뛰어난 성리학자가 배출되었는데, 특히 정몽주의 노력으로 철학적 이해가 깊어지게 되었다. 성리학은 고려 말 신흥 사대부 계급에 수용되었다. 고려 초기 한문학(漢文學)의 학풍은 중국을 모방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독자적 성격을 지니고 관념적이며 사대적 경향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9대 덕종(德宗) 말년에 왕가도(王可道)를 중심으로 한 북진파가 몰려나고, 인주(仁州)이씨가 집권하자 보수적 성격을 띤 유교 경전(經典)보다 안일함만을 찬미하는 한문학이 발달하였다. 이때 시(詩)나 문장에 뛰어난 사람은 김인존·김부식·정지상·홍관 등을 꼽을 수 있다. 무신의 난 이후 한문학 경향은 고려 초기 향가문학이 차츰 사라지면서 패관문학(稗官文學)이 대두되어 최씨 무신집권 하에서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패관문학은 주로 전설·신화·일화·풍속을 주제로 서술되었는데, 필자마다 색다른 성격을 띤다.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은 무신의 난 이전 시대에 대한 회고,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東明王篇)》은 종래의 한문학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로운 문장체를 이룩하여 한국 전통과 연결된 새로운 문학체계를 발전시켰다.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은 무신의 난이 일어나기 전 천태종의 정치 참여를 비난하였고, 무신의 난이 일어난 원인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였다. 그리고 성리학자들의 많은 문집이 나왔는데 전기의 시(詩)·문(文)과는 달리 정치·사회 등에 관한 논설이 중심이었다.

【국문학】 고려 초기에는 향가형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한문학은 과거제도에서 문예를 중시하여 한시(漢詩)가 발달하였고 귀족들의 필수적 교양이었으나 국문학은 대중 사이에 행해졌고, 민중은 향가 대신 민요를, 지식계급에서는 향가에서 변모한 경기체가(景幾體歌)가 유행되었다.

【역사편찬】 국초부터 춘추관(春秋館)에서 역사편찬을 담당하였다. 거란 침입 후 전란으로 소실된 사적을 편찬하기 위하여 1013년(현종 4) 최항(崔沆)·김심언(金審言) 등은 태조 때부터 7대 목종 때까지의 사적을 편찬, 32년(덕종 1) 황주량(黃周亮)은 《칠대실록(七代實錄)》(30권)을 완성하였다. 문종 때 박인량(朴寅亮)의 《고금록(古今錄)》, 예종 때 홍관은 연대미상인 《편년통재(編年通載)》의 뒤를 이은 《속편년통재(續編年通載)》를 편찬하였으나, 모두가 전하지 않는다. 1145년(인종 23)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삼국의 역사를 보수적 유교사관에 맞추어 기록한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전한다. 역사의식은 무신의 난과 몽골침입으로 시련을 겪은 뒤, 고려의 지식계급은 유교사관에 입각한 사학(史學)의 경향이 새로 대두되어 불교의 폐단, 권문세가들의 횡포 등 사회모순이 격화됨에 따라 이에 대한 비판과 민족적 자주성을 재인식하고 여기에 정통과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사관을 받아들여 새로운 역사학이 성립되었다. 23대 고종(高宗) 때 각훈(覺訓)은 불교계 정리책의 일환으로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을 편찬하였고, 25대 충렬왕 때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불교 입장에 서서 고대문화와 관계되는 주요한 사실을 기록하여 정통적 사관을 제시하였다. 또 충렬왕 때 이승휴(李承休)는 한시(漢詩)로 중국과 한국역사를 적은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썼다. 특히 이제현은 고려국사를 편찬하다가 중단하였으나 그의 사학은 조선시대의 역사서술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김종서 등이 편찬한 고려사), 그의 사관은 정통과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인쇄술】 고려문화 중 특히 발달한 것이 출판문화이다. 목판인쇄로 된 현종 때의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숙종 때의 《속장경(續藏經)》, 1251년(고종 38)에 완성된 《팔만대장경》 등 많은 장경사업을 이루었으며, 숙종 때는 서적포를 두어 서적출판을 담당하였다. 금속활자로는 1234년 최윤의(崔允儀)가 편찬한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이 독일 구텐베르크의 것보다 200년이나 앞선다. 이 사실은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전한다. 1377년(우왕 3)에 인쇄되었고, 하권이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직지심경(直指心經:直指心體要節)》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사서로서 전하지 않는 것을 참고로 부가하면 위의 [표]와 같다.

【예술】 고려예술은 귀족적·불교적 색채를 띤 미술이 성행했으나, 석탑·석등·불상 등 조각분야는 퇴화되고, 귀족들의 생활기구를 중심으로 한 자기·나전칠기·불구(佛具) 등이 발달하였다. 예술품 중 상감청자(象嵌靑瓷)는 세계적 공예품으로 민족예술의 정수이다. 자기의 발달을 보면 11세기 예종·인종 때에 이르러 송자(宋瓷)의 영향을 벗어나 장식이 없는 푸른 하늘색과 선(線)이 특징인 비색청자(翡色靑瓷)를 제작하였다. 12세기 중엽 의종 때에 이르러 고려인의 독창적 재능을 발휘한 자기가 상감청자이다. 상감청자는 비색청자의 표면에 양각(陽刻)·음각(陰刻)의 무늬를 넣고 백토와 흑토를 그릇 표면에 새겨넣는 방법으로 완성한 것이다. 고려 전기의 건축은 왕궁[滿月臺]·사찰[興旺寺]·귀족의 저택 등 귀족적·불교적인 건축에 치중하였으나, 말기에는 고려의 독특한 기상을 나타내고 있다. 건축의 특색은 층단식으로 외관이 높고 웅대하며, 건물의 기둥은 안쪽을 약간 기울게 하였고, 기둥을 주심포형(柱心包形)으로 하여 안정감을 보였으며, 태양광선의 이용법도 채택하였다. 대표적 건축으로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 안동 봉정사(鳳停寺)의 극락전(極樂殿), 예산 수덕사(修德寺)의 대웅전(大雄殿)이 현존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고려시대의 석탑은 정돈된 형태를 중시하지 않는 양식이 유행하여 안정감·정돈미가 무시되고, 탑의 형식이 다양화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1020년 현종 때 만든 신라계통의 양식인 현화사(玄化寺) 7층석탑, 광종 때 만든 송나라 때의 모형인 월정사(月精寺) 8각 9층석탑, 충목왕 때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서 만든 목조형(木造形) 양식인 경천사(敬天寺) 10층석탑이 유명하다. 그 밖에도 1009년의 예천(醴泉) 개심사(開心寺)의 5층탑, 21년의 흥국사(興國寺)의 탑, 22년의 제천(堤川) 사자빈신사석탑(獅子頻迅寺石塔) 등이 있다. 부도(浮屠)로는 신종(神宗) 때의 지광국사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강원도 원성군 법천사)과 태조 때의 홍법국사실상탑(弘法國師實相塔:충북 중원군 정토사)이 대표적 걸작으로 현재 경복궁 안에 있다. 불상(佛像)으로는 부석사 무량수전 안에 있는 소조여래상(塑造如來像)은 목조좌상(木造坐像)인 아미타여래상으로 신라 불상 형식을 계승한 고려시대 제일의 걸작이다. 이 밖에도 967년에 세운 은진미륵(恩津彌勒), 충주(忠州)의 철불좌상(鐵佛坐像)이 있다. 이 철불은 양 팔이 없어졌으나 아담하고 균형이 잘 잡혀 있다. 범종(梵鐘)으로는 천흥사범종(天興寺梵鐘:덕수궁 소장), 수원의 용주사범종(龍珠寺梵鐘), 탑산사범종(塔山寺梵鐘:해남 대흥사 소장) 등이 있는데, 신라시대의 양식을 계승한 종이다. 또한 연복사범종(演福寺梵鐘)·조계사범종(曹溪寺梵鐘) 등이 있고, 일본 등지에도 20여 개의 고려범종이 있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석비(石碑)로 남아 있는 것은 937년에 세운 해주의 광조사 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廣照寺眞澈大師寶月乘空塔碑), 940년의 원주 흥법사 진공대사탑비(興法寺眞空大師塔碑)와 강릉의 보현사 낭원대사오진탑비(普賢寺朗圓大師悟眞塔碑), 943년의 충주 정토사법경대사 자등탑비(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 975년의 여주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비(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 1017년의 정토사 홍법대사실상탑비(淨土寺弘法大師實相塔碑) 등이 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석등(石燈)으로는 은진(恩津)의 관촉사석등(灌燭寺石燈), 회양(淮陽)의 정양사석등(正陽寺石燈), 나주 서문내석등(西門內石燈), 신륵사 보제석종전석등(普濟石鐘前石燈), 개풍의 공민왕현릉비정릉석등(恭愍王玄陵妃正陵石燈)이 있다. 당간(幢竿)으로는 청주 용두사(龍頭寺)의 철당간(鐵幢竿), 나주 동문 밖의 석당간(石幢竿)이 유명하며, 당간지주(幢竿支柱)로는 남원의 만복사(萬福寺)와 천안의 천흥사(天興寺) 옛터, 홍천 희망리(希望里)와 춘천 근화동(槿花洞)의 것이 유명하다.

【그림과 글씨】 그림은 국초 이래 화가 양성을 위하여 도화원(圖畵院)을 설치하였다. 대표적 화가로는 《예성강도(禮成江圖)》의 이령(李寧),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의 이광필(李光弼),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의 공민왕, 혜허 등이 유명하다. 전해지는 작품으로는 《천산대렵도》 《음산대렵도(陰山大獵圖)》, 이제현(李齊賢)의 초상화가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안향(安珦)의 초상화가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있고, 혜허의 양유관음상이 일본에 있다. 벽화로는 모란과 들국화를 그린 예산 수덕사의 벽화와 사천왕상과 보살상을 그린 부석사 조사당의 벽화가 현존한다. 개풍군 수락암동(水落岩洞) 및 장단군 법당방(法堂坊) 고분의 벽화가 있다. 고려시대의 서체(書體)는 무신 집권기까지는 왕희지체(王羲之體)와 구양순체(歐陽詢體)가 유행하였고, 충선왕 때부터는 조맹부체(趙孟體)인 송설체(松雪體)가 유행하여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다. 그 중 유명한 사람은 유신(柳伸)·탄연(坦然)·최우(崔瑀)·이암(李)·유공권(柳公權)·한수(韓脩) 등이다.

【음악】 속악(俗樂)·아악(雅樂)·당악(唐樂)이 있었다. 속악은 한국 고유음악으로 가곡에는 《동동(動動)》 《대동강》 《한림별곡》 등이 있고, 악기에는 가야금·비파·장구·퉁소 등이 있다. 아악은 궁정·종묘 등에서 연주하는 정악(正樂)으로 송나라에서 예종 때 안직숭(安稷崇)이 전래하여 궁중음악으로 발달, 현재까지 한국에만 보존되어 있는 동양의 고전적 정악(正樂)이다. 악기로는 금종(金鐘)·옥경(玉磬), 각종 현금(絃琴)과 피리·퉁소 등이 있는데, 1370년 공민왕 때 명나라 태조가 고려 사신에게 새로 악기를 보내어 내용이 풍부해졌다. 이러한 음악은 가면극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져 처용무(處容舞) 등 탈춤을 중심으로 한 산대극(山臺劇)도 크게 유행하였다.

【불교】 태조 이래 불교를 국교로 숭상함으로써 정치·사회의 지도이념이 되었다. 불교의 경향을 보면 사찰에는 사원전(寺院田) 외에 왕실 귀족들의 희사로 토지와 노비가 증가되어 대장원(大莊園)을 소유하였고, 광종 때는 승과제도(僧科制度)를 마련하여 승과에 합격하면 교·선종을 막론하고 대선(大選)이란 첫 단계의 법계(法階)를 주었으며, 또 왕사(王師)·국사(國師) 제도로 승려들을 우대하였다. 문종 때 승려 개인에게도 별사전(別賜田)을 지급하였으며, 사원에는 면세·면역의 특전까지 부여하는 등 보호책이 강구되었기 때문에 많은 승려들이 배출되었다. 불교의 성격은 호국적·현세구복적(現世求福的)·귀족적 불교로 보호육성되었다. 따라서 역대 군왕들은 국가의 대업이나 안태(安泰)를 위하여 대사찰의 건립, 연등회 행사, 대장경 조판 등 국가적 불교사업을 추진하였다. 고려 초기 불교의 종파는 5교(五敎:敎宗)와 9산(九山:禪宗)이 양립, 존재하면서 대립 침체된 상태에 있었다. 당시의 고승으로는 균여대사(均如大師)·혜거(惠居)·탄문(坦文)·체관(諦觀)·의통(義通)이 있고 그들의 활약이 컸다. 이때 체관은 오월(吳越)에 건너가 《천태사교의(天台四敎義)》를 저술하여 천태종(天台宗)의 기본교리를 정리하였고, 의통은 오월에 건너가 중국 천태종의 13대 교조(敎祖)가 되어 교세를 떨쳤다. 문종의 아들인 의천(義天)은 송나라에서 화엄교리와 천태교리를 배우고 돌아와 교·선종의 대립으로 침체된 불교를 통합 발전시킬 의도에서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주장하고, 숙종 때 천태종을 창설하여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주장하였다. 천태종은 무신의 난 이전까지 왕실과 귀족의 보호로 육성되었으나, 그후 교단 자체 내의 변동으로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은 조계종(曹溪宗)을 개창하여 고려의 불교는 양종으로 분리되었다. 조계종은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을 깨닫는 것이며, 좌선(坐禪)을 주로 하여 마음에 경전을 깨닫도록 하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수도방법으로 수행을 강조하였다. 조계종이 교리상 발전을 보자 최씨정권은 왕족 문신들과 연결, 현실참여적인 천태종 세력을 억압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조계종을 후원하여 조계종을 무신정권의 사상적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몽골 간섭기에 미신적인 면이 강한 라마 불교가 들어오면서 폐해가 많아져 불교행사, 사탑의 건립 등으로 재정의 낭비가 컸다. 또한 승려들의 토지겸병과 고리대금업·상업행위·군역도피의 소굴 등으로 그 부패가 심하여져 고려 말 신흥사대부층의 성리학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정도전은 그의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불교를 멸륜해국(滅倫害國)의 도(道)라고 공박하였다. 후기의 고승으로 보우(普愚)는 임제종(臨濟宗)을 전래하여 조선 선종의 주류가 되었고, 혜근(慧勤)은 인도의 지공(指空)에게 구법, 조계종을 발전시켰으며, 자초(自超)는 조선 태조의 왕사(王師)로 활약하였다. 이와 같은 교세의 변화는 원효(元曉)의 사상적 기반이 있었으므로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할 수 있었고, 지눌도 의천의 사상적 통일 경험과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조계종의 사상체계가 수립된 것이다. 조계종도 고려 후기 사회의 모순을 시정하는 원동력은 못되었으나 교리상의 발전으로 불교계에 신풍을 불러일으켰다.

                                                                  

국자감(國子監)

고려시대 중앙의 최고교육기관. 607년 중국 수(隋)나라에서 창시되어 고려에서는 992년(성종 11) 태조 이후 교육기관이던 경학(京學)을 국자감으로 개칭하여 설치하였다. 1275년(충렬왕 1)에는 국학(國學), 98년에는 성균감(成均監), 1308년(충선왕 즉위)에는 성균관(成均館), 56년(공민왕 5)에는 다시 국자감, 62년에는 또다시 성균관으로 고쳐 조선으로 계승되었다. 국자감은 성종이 중앙과 지방관제를 정비하여 관리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관리양성기관의 기능도 가지게 되었는데,여기에 국자학(國子學)·태학(太學)·사문학(四門學) 등 유학(儒學) 전공의 3학과, 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 등 실무직 기술을 습득하는 3학을 두어 이들을 경사육학(京師六學)이라 하였다, 이 중 앞의 3학은 모두 유교의 경전(經典)과 문학을 전공하는 기관으로, 학과의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신분에 따른 구별이었으며, 지배계급의 자제로서 장래 고급관원으로 출세하려는 자들이 입학하였다. 한편 율학 등 3학은 일종의 직업학으로 전문직으로 나갈 계급이 낮은 신분의 자제들이 들어갔다. 국자감의 정원은 국자·태학·사문학이 각각 300명으로 모두 900명이었고, 율학 등 3학은 미상(未詳)이며, 각 학과마다 박사·조교가 교수하였다. 수학내용은 국자학·태학·사문학이 모두 동일하여 《효경(孝經)》 《논어(論語)》를 공통 필수과목으로 하고, 《주역(周易)》 《상서(尙書)》 《주례(周禮)》 《예기(禮記)》 《모시(毛詩)》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등은 전공교과로 하였다. 수학연한은 국자감시에 응시하는 데 필요한 6년과 국자감시에 합격한 후 3년이 지나야 최종시험인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할 수 있어 9년이 소요되었으며, 율학·서학·산학은 6년이 소요되었다. 1063년(문종 17) 문종은 사학(私學)이 융성하고 관학(官學:국자감)이 부진하자 교관의 책임이라 책망하고 국자감의 질적 향상을 꾀하여 직제를 제정하였다. 즉 제거(提擧:종2품)·동제거(同提擧:종2품)·관구(管句:정3품)·판사(判事:정3품) 각 2명, 좨주(祭酒:종3품)·사업(司業:종4품)·승(丞:종6품) 각 1명, 국자박사(정7품)·대학박사(종7품)·주부(注簿:종7품)·사문박사(종8품)·학정(學正:정9품)·학록(學錄:정9품) 각 2명, 학유(學諭:종9품) 4명, 직학(直學:종9품)·서학박사(종9품)·산학박사(종9품) 각 2명과 이속(吏屬)으로 서사(書史)·기관(記官) 각 2명을 두었고, 그 후에도 대사성(大司成:정3품)·명경박사(明經博士:정8품)·율학박사(종8품)·명경학유(明經學諭:종9품)·율학조교 등을 두었다. 1109년(예종 4)에는 과거 합격자를 십이도(十二徒)에 많이 빼앗기자 과거응시자를 위하여 국자감에 여택재(麗澤齋:周易)·대빙재(待聘齋:尙書)·경덕재(經德齋:毛詩)·구인재(求仁齋:周禮)·복응재(服膺齋:戴禮)·양정재(養正齋:春秋)·강예재(講藝齋:武學)의 7재를 두고 전공별 강의를 하였다. 1101년(숙종 6) 국자감에 서적포(書籍)라는 국립도서관을 설치하고, 1562년 성균관으로 개칭된 뒤에는 강예재가 없는 6재를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전문적으로 강의하는 9재로 바꾸어 성리학 중심의 교육으로 전환하였다.

                                                     

12도(十二徒)

고려의 12개 사학(私學:私塾). 12도의 시초는 1055년(문종 9) 문하시중(門下侍中:首相)으로 있다가 퇴관한 최충(崔沖)이 설립한 구재학당(九齋學堂:후에 문헌공도)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는 당시 국학(國學:국자감)이 시설·교육면으로 유명무실하여 학업 지망생이나 과거 응시자가 권위 있는 유학자가 세운 사학으로 모여들어 성황을 이룸으로써 다른 현관(顯官) 퇴직 유학들도 사숙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개경(開京)에 세운 사숙이 12개에 이르러 그 권위는 관학(官學)인 국자감을 능가하였고, 점차 과거 준비를 하는 예비학교와 같이 되었다. 사숙의 이름은 설립자의 시호나 호(號), 벼슬 이름을 딴 것으로, ① 시중(侍中)을 지낸 최충의 문헌공도(文憲公徒), ② 시중을 지낸 정배걸(鄭倍傑)의 홍문공도(弘文公徒:熊川徒), ③ 참정(參政) 노단(盧旦)의 광헌공도(匡憲公徒), ④ 좨주(祭酒) 김상빈(金尙賓)의 남산도(南山徒), ⑤ 복야(僕射) 김무체(金無滯)의 서원도(西園徒), ⑥ 시중 은정(殷鼎)의 문충공도(文忠公徒), ⑦ 평장사(平章事) 김의진(金義珍)의 양신공도(良愼公徒), ⑧ 평장사 황영(黃瑩)의 정경공도(貞敬公徒), ⑨ 유감(柳監)의 충평공도(忠平公徒), ⑩ 시중 문정(文正)의 정헌공도(貞憲公徒), ⑪ 시랑 서석(徐碩)의 서시랑도(徐侍郞徒), ⑫ 설립자 미상의 귀산도(龜山徒) 등이 있다.

                                                     

최충(崔沖, 984∼1068)

고려의 문신. 본관 해주(海州). 자 호연(浩然). 호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재(放晦齋). 시호 문헌(文憲). 1005년(목종 8) 문과에 장원, 11년(현종 2) 우습유(右拾遺)가 되었다. 13년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 때 태조에서 목종까지의 《칠대실록(七代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33년(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등을 지내고 37년(정종 3) 참지정사국사수찬관(參知政事國史修撰官) 때 《현종실록(顯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41년 서북로병마판사(西北路兵馬判事)로 나가 영원(寧遠)·평로(平虜)에 진을 치고, 산성개수(山城改修)를 감독했다. 47년(문종 1)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서 법률관들에게 율령(律令)을 가르쳐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50년 서북면도병마사(西北面都兵馬使) 때 농번기(農繁期)의 공역(工役) 금지와 국가 재정의 낭비를 막도록 상소하여 시행했고, 동여진(東女眞)의 동태를 파악, 국방을 강화하는 등 업적을 쌓고 53년 궤장(杖)을 하사받았다. 나이가 많다고 사직을 상주하자 만류 조서가 내려지고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協謀同德治理功臣)의 호와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 문하시중상주국치사(開府儀同三司守太師 兼 門下侍中上柱國致仕)라는 훈작을 내렸고, 55년 내사령(內史令)을 삼은 후 다시 추충찬도좌리 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이라는 호를 내렸다. 벼슬에서 물러나 송악산(松岳山) 아래에 사숙을 열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이를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 했는데, 12공도(公徒) 중의 하나이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앙받았다. 처음에는 정종의 묘정(廟庭)에, 후에 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해주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제향되었다. 《귀법사제영석각(歸法寺題詠石刻)》(개성)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원주) 《홍경사개창비(弘慶寺開創碑)》(직산) 등의 글씨가 남아 있고, 저서에 《최문헌공유고(崔文憲公遺稿)》가 있다.

 

의천(義天, 1055∼1101)

고려시대의 승려. 천태종(天台宗)의 개조(開祖). 자 의천. 시호 대각(大覺). 이름 후(煦). 문종의 넷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 11살 때 왕사(王師) 난원(爛圓) 밑에서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 영통사(靈通寺)에서 난원으로부터 화엄(華嚴)의 교관(敎觀)을 배웠다. 1084년 미복(微服)으로 중국 송(宋)나라에 입국하여, 계성사(啓聖寺)에서 유성법사(有誠法師)에게 화엄·천태 양종의 깊은 뜻을 깨우친 뒤 여러 절을 찾아다니며 불법을 공부하였다. 86년 귀국하여 개경(開京)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어 그곳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송·요·일본 등에서 수집해 온 불경·유서(儒書) 등 4,700여 권을 교정·간행했다. 95년(헌종 1)에는 화폐사용을 건의하여 이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97년 인예왕후의 원찰(願刹)인 국청사(國淸寺)가 낙성되자 주지가 되어 처음으로 천태를 강(講)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죽기 이틀 전에 국사(國師)에 책봉되었다. 고려의 불교가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으로 갈라져 대립하던 당시에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역설하고, 화엄종인 규봉(圭峰)의 학설로 고려의 교종을 통일한 후, 선종의 교리에 입각, 천태종을 개창하여 선종의 종파를 통합하고 원효(元曉)의 중심사상인 일불승(一佛乘)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원리에 입각하여 고려 불교의 융합을 실현, 한국 불교 발전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유학(儒學)에도 정통하였다. 저서에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석원사림(釋苑詞林)》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등이 있다.

                                                       

지눌(知訥, 1158∼1210)

고려의 승려. 조계종(曹溪宗) 개조(開祖). 속성 정(鄭). 호 목우자(牧牛子). 시호 불일보조(佛日普照). 서흥(瑞興) 출생. 1165년(의종 19) 출가하여 종휘(宗暉)에게서 승려가 되었다. 82년(명종 12) 승과(僧科)에 급제했으나 출세를 단념하고 평양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했다. 창평(昌平) 청원사(淸源寺)에서 6조(祖)의 《단경(壇經)》을 읽고 대각(大覺)한 뒤에도 수도에 더욱 정진했다. 85년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서 《대장경》을 열독(閱讀)하고 선·교(禪敎) 통합의 필요성을 깨우쳤다. 공산(公山)의 거조사(居祖寺)에 머물면서 정혜사(定慧社)를 조직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 불교 쇄신운동에 눈떴다. 이어 지리산(智異山)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3년 동안의 참선 끝에 은둔생활을 탈피, 적극적 보살행(菩薩行)의 현실 참여를 목표로 삼았다. 1200년(신종 3)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로 옮겨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가 존재할 수 없다고 설파,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고 선(禪)으로써 체(體)를 삼고 교(敎)로써 용(用)을 삼아 선·교의 합일점을 추구했다. 한편, 의천(義天)이 교로써 선·교의 합일점을 모색한 반면, 종래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조계종에 통합, 종풍(宗風)을 떨쳐 의천의 천태종(天台宗)과 함께 고려 불교의 양대산맥의 내면적 통일을 기한 큰 업적을 이룩했다. 희종은 즉위하자 송악산을 조계산(曹溪山), 길상사를 수선사라 고쳐 제방(題榜)을 친히 써주고 만수가사(滿繡袈裟)를 내렸다. 법복을 입고 당에 올라가 승도를 소집, 설법하다가 주장을 잡은 채 죽으니 탑을 세워 탑호를 감로(甘露)라 하고, 국사(國師)에 추증하였다. 저서에 《진심직설(眞心直說)》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계초심학입문(誡初心學入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염불요문(念佛要門)》 《상당록(上堂錄)》 《법어》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竝入私記)》 등이 있다.

 

진심직설(眞心直說)

고려시대 조계종(曹溪宗)의 개조(開祖)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지은 불전. 활자본. 1권 1책. 1205년(희종 1) 저자가 진심의 바른 믿음(眞心正信), 진심의 다른 이름(眞心異名), 진심의 묘체(眞心妙體), 진심의 묘용(眞心妙用), 진심 체용의 같음과 다름(眞心體用同異) 등 15항에 걸쳐 간단한 설명을 붙이고 해설한 책이다. 후대의 불교도가 불교를 이해하는 데에 좋은 지침서이다.

 

돈오점수(頓悟漸修)

 불교에서 돈오(頓悟), 즉 문득 깨달음에 이르는 경지에 이르기까지에는 반드시 점진적 수행단계가 따른다는 말. 이에는 그 이전에 점수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과, 돈오 후에 점수한다[先悟後修]는 주장이 있다. 당(唐)나라 신회(神會)의 남종선(南宗禪) 계통은 후자를 강력하게 주장하여 이후의 선종은 주로 ‘선오후수(先悟後修)’의 입장을 취하였다. 고려시대 지눌(知訥)의 ‘돈오점수론’도 그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오(悟)’를 햇빛과 같이 갑자기 만법이 밝아지는 것이고, ‘수(修)’는 거울을 닦는 것과 같이 점차 밝아지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들면서, 만일 깨우치지 못하고 수행만 한다면 그것은 참된 수행이 아니라 하여 선오후수의 입장을 강조하였다.

                                                                

조계종(曹溪宗)

고려시대 11종(宗) 가운데 하나였으며, 조선시대 7종 가운데 하나였고, 근대 불교계 유일의 종파로 재발족한 종단.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한국 근대 불교 유일의 종파로 재발족한 불교 종단. 한국 불교 18개 종단의 하나이며, 한국 불교 최대의 종단이다. 신라 때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이며 도의국사(道義國師)가 개산(開山)한 가지산문(迦智山門)에서 기원하여, 고려시대 보조국사(普照國師)인 지눌(知訥)의 중천(重闡)을 거쳐, 보우국사(普愚國師) 태고(太古)가 구산(九山)을 통합하여 조계종이라 공개적으로 이름붙인 데서 비롯되었다. 창종(創宗)의 정신은 보조국사에 연유하는 선·교 일치(禪敎一致)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排佛政策)의 결과로 명맥만 유지하면서 선·교 양종(禪敎兩宗)의 8도도총섭(八道都總攝)제도가 임진왜란 때까지 계승되어오다가, 그 후 한말까지는 남북총섭시대(南北總攝時代)로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이 양립하였는데, 선종은 조계종·천태종(天台宗)·총남종(摠南宗), 교종은 화엄종(華嚴宗)·자은종(慈恩宗)·중신종(中神宗)·시흥종(始興宗)이었다. 1911년 일제의 불교 통합정책에 의하여 사찰령(寺刹令)이 제정되고 31본산(本山:本寺)제도가 생기면서 선·교 양종의 명칭이 사용되었고, 13년에는 31본산 연합사무소 위원장제도가 실시되다가, 23년에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이사(理事)제도가 되었고, 24년에는 선·교 양종을 통합하여 조선불교조계종이 설립되었다. 당시 총본산은 태고사(太古寺:지금의 조계사)에 있었는데, 산하 31개 본산의 주지는 조선총독이 승인하였으며, 말사(末寺)인 1,384사의 주지는 도지사의 승인사항이었다. 광복 후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였으나 54년부터 62년까지는 비구(比丘)·대처(帶妻) 승려 간의 분규가 끊이지 않아 이른바 불교정화운동이 계속되었고, 그 결과 62년 4월 비구·비구니만을 인정하는 통합종단으로서 대한불교조계종이 재발족,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종헌(宗憲)에 의하면 이 종단의 종지(宗旨)는 석가모니의 ‘자각각타 각행원만(自覺覺他覺行圓滿)’의 근본교리를 받들어 수행·실천하여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의 법을 전함으로써 중생을 제도(濟度)함에 있다. 종단의 주요기구로는 중앙종정기관(中央宗正機關)인 총무원과 최고의결기관인 중앙종회(中央宗會)가 있고, 별도로 포교원(布敎院) 등이 있으며, 지방에 25교구본사(敎區本寺)가 있고 그 밑에 말사를 거느린다. 25교구본사는 총무원 직할의 서울 조계사를 비롯하여 경기 화성군의 용주사(龍珠寺), 양주군의 봉선사(奉先寺), 강원 양양군의 신흥사(神興寺), 평창군의 월정사(月精寺), 충북 보은군의 법주사(法住寺), 충남 공주군의 마곡사(麻谷寺), 예산군의 수덕사(修德寺), 경북 금릉군의 직지사(直指寺), 대구의 동화사(桐華寺), 영천군의 은해사(銀海寺), 의성군의 고운사(孤雲寺), 경주시의 불국사, 경남 합천군의 해인사(海印寺), 하동군의 쌍계사(雙磎寺), 양산군의 통도사(通度寺), 부산의 범어사(梵魚寺), 전북 김제군의 금산사(金山寺), 고창군의 선운사(禪雲寺), 전남 장성군의 백양사(白羊寺), 구례군의 화엄사(華嚴寺), 승주군의 선암사(仙岩寺)·송광사(松廣寺), 해남군의 대흥사(大興寺), 제주 제주시의 관음사(觀音寺) 등이다. 종단본부는 서울 종로구 견지동(堅志洞) 45 조계사 경내에 있다.

                                                          

 

태고 보우(太古 普愚, 1301∼1382.12.24)

고려 말기의 승려. 일명 보허(普虛). 본관 홍주(洪州). 호 태고(太古). 시호 원증(圓證). 탑호(塔號) 보월승공(寶月昇空). 속성 홍(洪). 13세에 출가, 양주군 회암사(檜巖寺) 광지(廣智)에게서 불경을 배우고 가지산(迦智山) 하총림(下叢林)에서 도를 닦았다. 1325년(충숙왕 12) 승과(僧科)에 급제했으나 출사하지 않고 용문산(龍門山) 상원암(上院庵)과 성서(城西)의 감로사(甘露寺)에서 고행한 끝에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의 동쪽에 절을 짓고 태고사(太古寺)라고 하였다. 46년(충목왕 2) 중국에 가서 호주(湖州) 하무산(霞霧山) 청공(淸珙)의 법을 계승, 임제종(臨濟宗)을 열어 그 시조가 되었다. 48년에 귀국, 용문산의 소설사(小雪寺)에서 불도를 닦았다. 공민왕이 광명사(廣明寺)에 원융부(圓融府)를 짓자 왕사(王師)가 되어 원융부에 머물다가 신돈(辛旽)의 횡포가 심해지자 소설사로 돌아갔다. 신돈이 죽은 뒤 국사(國師)가 되고, 우왕이 즉위하자 영원사(瑩源寺)에 있다가 소설사에 가서 입적하였다. 북한산에 보월승공의 탑비가 있다. 선교일체론(禪敎一體論)을 주장, 선과 교를 다른 것으로 보던 당시의 불교관을 바로잡고, 일정설(一正說)을 정리하여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강조하였다. 저서로는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태고유음(太古遺音)》 등이 있다.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고려 말기의 고승 보우(普愚)의 어록(語錄). 목판본. 2권 1책. 제자인 고화(古樗)가 편집·간행하였다. 내용은 태고암가(太古菴歌)·잡화삼매가(雜華三昧歌) 등의 가송(歌頌)과 법어(法語)·서장(書狀) 등을 수록하였다. 책머리에는 이색(李穡)의 서문이, 책끝에는 정몽주(鄭夢周)의 발문이 실려 있다. 태고화상은 한국 임제종(臨濟宗)의 시조(始祖)로, 이 책은 그의 사상과 행장(行狀) 및 대한불교조계종의 사상적 연원을 아는 데에 좋은 자료가 된다.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산세(山勢)·지세(地勢)·수세(水勢) 등을 판단하여 이것을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연결시키는 설. 약칭 풍수설·지리설이라고도 한다. 도성(都城)·사찰(寺刹)·주거(住居)·분묘(墳墓) 등을 축조(築造)하는 데 있어 재화(災禍)를 물리치고 행복을 가져오는 지상(地相)을 판단하려는 이론으로, 이것을 감여(堪輿:堪은 天道, 輿는 地道), 또는 지리(地理)라고도 한다. 또 이것을 연구하는 사람을 풍수가(風水家) 또는 풍수선생·감여가(堪輿家)·지리가(地理家)·음양가(陰陽家) 등으로 부른다. 그들은 방위(方位)를 청룡(靑龍:東)·주작(朱雀:南)·백호(白虎:西)·현무(玄武:北)의 4가지로 나누어 모든 산천(山川)·당우(堂宇)는 이들 4개의 동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하였고, 어느 것을 주로 하는가는 그 장소나 풍수에 따라 다르게 된다. 그리고 땅 속에 흐르고 있는 정기(正氣)가 물에 의하여 방해되거나 바람에 의하여 흩어지지 않는 장소를 산천의 형세에 따라 선택하여 주거(住居)를 짓거나 조상의 묘를 쓰면 자손은 그 정기를 받아 부귀복수(富貴福壽)를 누리게 된다고 믿었다. 이와 같이 풍수의 자연현상과 그 변화가 인간생활의 행복에 깊은 관계가 있다는 생각은 이미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에 시작되어, 그것이 음양오행의 사상이나 참위설(讖緯說)과 혼합되어 전한(前漢) 말부터 후한(後漢)에 걸쳐 인간의 운명이나 화복에 관한 각종 예언설을 만들어냈고, 그것은 다시 초기 도교(道敎)의 성립에 따라 더욱 체계화되었다. 한국 문헌에서 풍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의 탈해왕(脫解王)에 관한 대목에 왕이 등극하기 전 호공(瓠公)으로 있을 때, 산에 올라 현월형(弦月形)의 택지(宅地)를 발견하고 속임수를 써서 그 택지를 빼앗아 후에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또 백제가 반월형(半月形)의 부여(扶餘)를 도성(都城)으로 삼은 것도, 고구려가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것도 모두 풍수사상에 의한 것이다. 삼국시대에 도입된 풍수사상은 신라 말기부터 활발하여져 고려시대에 전성을 이루어 조정과 민간에 널리 보급되었다. 특히 신라 말기에는 도선(道詵)과 같은 풍수대가가 나왔으며, 그는 중국에서 발달한 참위설을 골자로 하여 지리쇠왕설(地理衰旺說)·산천순역설(山川順逆說) 및 비보설(裨補說) 등을 주장하였다. 그는, 지리는 곳에 따라 쇠왕과 순역이 있으므로 왕지(旺地)와 순지(順地)를 택하여 거주할 것과 쇠지(衰地)와 역지(逆地)는 이것을 비보(裨補:도와서 더하다)할 것이라고 말한 일종의 비기도참서(記圖讖書)를 남겼다. 그 후 고려 때에 성행한 《도선비기(道詵記)》 등은 그 전체를 도선이 지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비기라 일컬어지는 예언서가 그의 사후 세상에 유전(流轉)되어 민심을 현혹시킨 일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그 사례가 많다. 고려 태조도 도선의 설을 믿은 것이 분명하여, 그가 자손을 경계한 《훈요십조(訓要十條)》 중에서, 절을 세울 때는 반드시 산수의 순역(順逆)을 점쳐서 지덕(地德)을 손박(損薄)하지 말도록 유훈(遺訓)하였다. 개경(開京:개성)도 풍수상의 명당(明堂)이라 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 <궁예전(弓裔傳)>, 《고려사(高麗史)》 <태조세가(太祖世家)>, 최자(崔滋)의 《삼도부(三都賦)》, 이중환(李重煥)의 《팔역지(八域志)》, 송나라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 명나라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 등에도 개경의 풍수를 찬양하였다. 즉 개경은 장풍득수(藏風得水)의 형국으로 내기불설(內氣不洩)의 명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첩첩으로 산이 둘러싸여 있어 국면(局面)이 넓지 못하고 또 물이 전부 중앙으로 모여들어 수덕(水德)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비보하기 위하여 많은 사탑(寺塔)을 세운 것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것도 그 태반의 이유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것이다. 즉 개경은 이미 지기(地氣)가 다해 왕업(王業)이 길지 못할 것이라는 풍수가들의 의견에 따라 구세력(舊勢力)의 본거지인 개경을 버리고 신 왕조의 면목을 일신하기 위해 천도를 단행하였다. 그 밖에도 《정감록(鄭鑑錄)》을 믿고 계룡산이 서울이 된다는 등 실로 풍수지리설이 국가와 민간에게 끼친 영향은 크다. 오늘날에도 민간에서는 풍수설을 좇아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운운하며 묘(墓)를 잘 써야 자손이 복을 받는다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다.

                                                    

도참사상(圖讖思想)

예언을 믿는 사상. 도참은 세운(世運)과 인사(人事)의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며 은어(隱語)를 많이 사용한다. 중국 고대 복희씨(伏羲氏) 때에 황허강[黃河]에서 용마(龍馬)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하도(河圖)의 도(圖)와 참(讖)이 합쳐서 이루어진 말로 보이며, 참위(讖緯)라는 말보다 먼저 생겼다. 중국 주(周)나라 말기, 천하가 오래도록 혼란에 빠지게 되자, 사람들이 평화를 갈구(渴求)하며 살길을 찾아 방황하였다. 이와 같은 민중의 욕구에 호응하여 일어난 것이 도참사상이며,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부서설(符瑞說)·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등을 혼합하여 천변지이(天變地異)를 현묘(玄妙)하게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기(史記)》 <노자전(老子傳)>에, 주(周)나라 태사(太史) 담()이 진(秦)나라의 헌공(獻公)을 만난 자리에서 도참을 진언(進言)하기를 “진나라가 처음에 주나라와 합치고, 합쳤다가 떨어졌는데, 500년 후에 다시 합치게 되고 그 때부터 17년이 경과하면 패왕(覇王)이 나올 것입니다”라고 한 말이 보이는데, 이것이 도참설의 가장 오래 된 기록이다. 그 예언이 적중하여 진나라의 소왕(昭王)이 주나라를 멸하고 그로부터 17년 후에 시황제(始皇帝)가 6국을 통일하여 패업(覇業)을 성취하였다. 《사기》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는 도사(道士) 노생(盧生)이 바다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도참을 진언하기를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호(胡)입니다”라고 했다. 진나라 시황은 그 말을 믿고 군사를 보내어 흉노족(匈奴族)을 격파하고 북쪽 국경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았다. 그러나 실지로 진나라를 망하게 만든 것은 시황의 작은 아들 호해(胡亥)의 학정(虐政)이었다. 전한(前漢) 말기에 왕망(王莽)이 득세했을 때, 우물 속에서 꺼낸 흰 돌에 “안한공 망에게 알린다. 황제가 되리라(告安漢公莽爲皇帝)”는 8글자가 붉은 글씨로 씌어 있었다. 왕망은 이것을 근거로 야심(野心)을 성취하였고, 그 후부터 제왕(帝王)이나 제왕이 되고자 하는 자가 이것을 많이 모방했다. 도참의 폐해(弊害)가 커졌기 때문에 위(魏)나라의 고조(高祖), 수(隋)나라의 문제(文帝), 송(宋)나라의 태조(太祖), 원(元)나라의 세조(世祖) 등이 모두 이를 금하였다. 한국에서도 삼국시대에 이미 도참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에 보면, 660년(의자왕 20)에 귀신 하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라고 연거푸 외치고 나서 땅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자리를 파게 하니, 길이 90 cm쯤 들어가서 거북 한 마리가 나왔는데, 그 등에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百濟同月輪 新羅如月新)”는 참언(讖言)의 구절이 있었다 한다. 그러나 도참설이 구체화한 것은 신라 말, 고려 초기의 도선국사(道詵國師) 때부터이다. 고려의 건국과 관련된 도참설로는 《삼국사기》 <최치원열전(崔致遠列傳)>에, 최치원이 지은 “계림은 누른 잎이고 송악은 푸른 소나무(鷄林黃葉 松嶽靑松)”란 참언구절이 있다. 이 때문에 고려 현종(顯宗)은 조상의 건국사업을 은밀히 도왔다고 하여, 동왕 11년 최치원에게 내사령(內史令)을 증직(贈職)하고, 13년에는 문창후(文昌侯)로 추봉(追封)하였다. 또 《고려사》 <태조세가(太祖世家)>에도 철원(鐵圓:태봉의 도읍)의 고경참(古鏡讖)이 나온다. 그것은 당나라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철원에서 이상한 노인에게 거울을 사서 벽에 걸었더니 햇빛에 비치어 147자(字)의 참문(讖文)이 보였는데,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일어난다는 내용이었다. 이 참문은 고려 일대(一代)를 두고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태조 왕건도 그의 <훈요10조(訓要十條)>에서 이것을 강조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는 중 신돈(辛旽)이 《도선비기(道詵秘記)》의 <송도기쇠설(松都氣衰說)>을 이용하여 충주로 천도(遷都)하기를 주청(奏請)하기도 하였다. 현재 민간에 돌아다니는 유일한 비기(秘記)로 풍수(風水)와 도참을 결부시켜 새 왕조의 출현을 예언한 《정감록(鄭鑑錄)》이 있는데, 조선 중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나 유래가 분명하지 않다. 과거에는 《정감록》에 현혹되어 10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다니느라 가산을 탕진한 사람도 있었다.

                                                                

안향(安珦, 1243∼1306)

고려시대의 문신·학자. 본관 순흥(順興). 초명 유(裕). 자 사온(士蘊). 호 회헌(晦軒). 시호 문성(文成).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70년 삼별초(三別抄)의 난 때 강화(江華)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한 뒤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 75년(충렬왕 1) 상주판관(尙州判官) 때 미신타파에 힘썼고, 판도사좌랑(版圖司佐郞)·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88년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郞)을 거쳐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고, 그해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연경(燕京)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하여, 돌아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 94년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로서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겸해 합포진(合浦鎭)에 부임하였고, 밀직사사(密直司使)를 거쳐 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첨의참리세자이사(僉議參理世子貳師)를 지냈다. 99년 수국사(修國史), 1304년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僉議侍郞贊成事判版圖司事)에 이르렀다. 한편, 섬학전(贍學錢)이란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하고, 국학대성전(國學大成殿)을 낙성하여 공자의 초상화를 비치하고, 제기(祭器)·악기(樂器)·육경(六經)·제자(諸子)·사(史) 등의 책을 구입하여 유학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죽은 뒤인 1318년(충숙왕 5)에 충숙왕은 원나라 화가에게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 초상화는 이제현(李齊賢)의 초상화와 더불어 고려시대의 가장 오래된 초상화로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白雲洞)에 그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서원을 만들었는데,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 영주의 소수서원에 제향되었다.

                                                       

 

조선왕조(朝鮮王朝)

고려의 뒤를 이어 함경도 출신의 무장(武將)인 이성계(李成桂)가 신진 사대부(士大夫)와 협력하여 세운 왕조. 1392년 즉위한 태조(太祖) 이성계에서 1910년 마지막 임금인 순종(純宗)에 이르기까지 27명의 왕이 승계하면서 519년간 지속되었다.

【건국】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고려왕조는 권문세족(權門勢族)이 발호하는 가운데, 정치체제가 약화되고 왕권이 쇠퇴하였으며, 밖으로는 이민족(異民族)의 침입이 계속되는 등, 혼란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때에 이성계는 여진족(女眞族)·홍건적(紅巾賊)·왜구 등을 물리쳐 명성을 높이며 중앙정계에 진출,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의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단행하여 구세력인 최영(崔瑩) 일파를 숙청하고, 또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마침내 1392년 7월 16일 개성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나라를 개창하니, 이를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고도 한다.

【국호와 국도】 태조는 처음 민심의 동요를 생각하여 국호를 계속 고려라 하고 서울을 개경(開京)에 정하였으나, 곧 민심의 혁신을 위하여 국호의 개정과 천도를 단행하였다. 먼저 국호는 고조선(古朝鮮)의 계승자임을 밝히고자 하는 자부심과 사명감에서 조선(朝鮮)으로 정하고 이를 1393년(태조 2) 2월 15일부터 사용하였다. 국호의 제정과 아울러 국도의 결정에 대하여도 큰 관심을 보여 태조는 계룡산(鷄龍山) 부근과 무악(毋岳:현재 서울의 서쪽), 그리고 한양(漢陽:지금의 서울)을 후보지로 삼고 중신들과 오랫동안 논의하여 마침내 94년 1월, 농업생산력이 높고 교통과 군사의 요지인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정하였다. 도성의 출입문으로서 숭례문(崇禮門:남대문)을 비롯한 4대문을 세우고 이곳을 한성부(漢城府)라 이름하였다.

【건국이념】 조선왕조는 그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다음과 같은 3대 정책을 건국의 이념으로 내세웠다. 첫째, 외교정책으로서 사대교린주의(事大交隣主義)를 채택, 중국 명(明)나라에 대하여는 종주국이라는 명분을 살려주면서, 사신의 왕래를 통하여 경제적·문화적 실리를 취하고, 아울러 새 왕조의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였다. 한편, 일본과 여진에 대해서는 교린을 내세워 우호적인 교제로 평화유지를 꾀하였으나, 그들이 변경을 혼란시키면 무력으로 제재하였다. 둘째, 문화정책으로서 숭유배불주의(崇儒排佛主義)를 내세워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정치·문화·사상계의 지도적 근본이념이 되게 하여 교육·과거·의례는 유교적인 체제로 바뀌어 갔다. 셋째, 경제정책으로서 농본민생주의(農本民生主義)를 채택, 건국 초부터 농업을 적극 장려하여 국민생활의 안정에 노력하였다.

【왕조의 발전】 조선왕조의 발전과정은 왕권의 강화, 제도의 정비, 사회구조, 대외관계의 변화에 따라 크게 6단계로 단계적 특성을 보였다. 제1기인 15세기에는 왕권이 확립되어 갔고, 제2기인 16세기에는 왕권의 약화와 더불어 사회체제가 변질되어 갔으며, 제3기인 17세기는 왜란(倭亂)·호란(胡亂)으로 동요되었던 사회구조를 정비하고 극복하는 과정이었고, 제4기인 18세기에는 정치적·경제적 안정과 더불어 문물이 융성하였으며, 제5기인 19세기 전반기에는 세도정치(勢道政治)로 말미암아 정치질서가 붕괴되고 이에 따라 사회체제가 와해되고 농촌사회가 동요하였고, 마지막 제6기인 19세기 후반기에는 문호(門戶)의 개방과 더불어 밀어닥친 세계 열강의 각축 속에서 내외의 정세가 크게 격동하였다.

〈확립기〉 태조(太祖)∼성종(成宗):태조의 치세는 이른바 창업기(創業期)로서, 국호를 정하고 도읍을 옮기며, 정치이념을 내세우고 문물제도를 정비함에 주력하였다. 이때에는 건국에 협조한 개국공신(開國功臣)이 실권을 장악하고 제도정비를 주도하였는데, 특히 조준은 전제개혁을 주관하여 새 왕조의 경제안정에 기여하였고,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경제문감(經濟文鑑)》을 편찬하여 통치이념의 방향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개국공신들의 세력 증대는 왕실과 알력을 빚었고, 두 차례에 걸쳐 왕자의 난이 일어나, 방원이 태종으로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하륜(河崙)·권근(權近)의 도움을 받아 왕권중심으로 권력구조를 바꾸고, 관제를 개편하여 관료제도를 정비하였다. 양전사업(量田事業)을 강화하고 사원경제(寺院經濟)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여 국가의 재정기반을 굳혔으며, 조세·신분·호적제도를 개혁하여 양인(良人)을 늘리고 국역(國役)기반을 확대하였다. 사병혁파(私兵革罷), 신문고 설치, 사섬서(司贍署) 설치, 계미자(癸未字) 주조, 호패법(號牌法) 실시, 서얼차대(庶差待) 등은 이때에 이루어졌다. 태종 때에 다져진 정치·경제·군사적 안정을 바탕으로 세종 때에는 문화의 융성기를 맞았다. 세종은 모범적인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구현하고자 황희(黃喜)·맹사성(孟思誠)·유관(柳寬) 등과 같은 청렴하고 노련한 재상을 등용하여 민의(民意)에 부합된 정치를 하였다. 아울러 집현전을 학술기관으로 확장하여 성삼문(成三問)·신숙주(申叔舟) 등의 젊고 재주 있는 학자들로 하여금 고금의 문물제도를 깊이 연구하게 하여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게 하였으며, 한글을 창제하여 민족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국민복지 향상에도 유의하여 조세·형벌·의료제도를 개선하고, 의창(義倉)제도를 실시하였으며, 측우기(測雨器)를 비롯한 각종 과학기계를 발명하였고, 아악(雅樂)을 정리하였다. 활자개량에도 힘써 많은 책을 간행하였는데, 《고려사(高麗史)》 《농사직설(農事直說)》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의방유취(醫方類聚)》 《동국정운(東國正韻)》 등은 이때에 펴낸 것들이다. 세종은 또한 국토확장에도 힘을 기울여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동북지방을 개척하여 6진(六鎭)을 설치하게 하였고, 최윤덕(崔潤德)으로 하여금 서북지방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4군(四郡)을 설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왜구의 본거지인 쓰시마섬[對馬島]을 정벌하고, 3포(三浦)를 열어 일본과의 제한된 무역을 하였다. 세종의 뒤를 이어 문종·단종이 즉위하였으나, 병약하고 연소하여 김종서 등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왕권이 약화되었다. 이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은 한명회(韓明澮)·양성지(梁誠之) 등의 협조를 얻어 무력으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세조(世祖)이다. 세조는 즉위하면서 단종의 복위를 꾀한 사육신(死六臣) 등을 제거하고 동북지방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반란을 진압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어 부국강병책을 강력히 추진하여 국력을 키우는 데 힘썼으며, 직전법(職田法)을 실시하여 국가수입을 늘렸고, 조직적이며 통일된 법전의 마련을 위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에 착수하는 한편, 민심을 수렴하고자 배불정책을 완화하여 원각사(圓覺寺)를 건조하고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불경을 간행하였다. 조선의 문물제도는 성종 때에 완성되었다. 성종은 특히, 유학을 장려하여 홍문관(弘文館)·독서당(讀書堂)을 설치하고, 서거정(徐居正) 등의 보필을 받아 《동국통감(東國通鑑)》을 비롯한 여러 서적을 편찬하였으며, 《경국대전》을 완성, 국가제도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농업을 장려하여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김종직(金宗直)을 중심으로 한 영남의 사림을 등용하며 훈구(勳舊) 세력의 강화를 견제하면서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은 건국 이후 1세기에 걸쳐 집권체제를 위한 정비작업을 일단락지었다.

〈변질기〉 연산군(燕山君)∼선조(宣祖):훈구세력에 의하여 지배되던 조선왕조는,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士林)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함으로써 정치적 갈등을 보였는데,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사림세력은 더욱 커지고, 마침내 양자의 대립은 표면화되었다. 연산군의 거듭되는 실정을 계기로 무오사화(戊午士禍)·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다. 연산군은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의 균형과 조화 위에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던 성종과는 달리 양파를 모두 배척하여 왕권을 전제화시키려 하여 두 차례의 사화를 일으켰으며, 특히 유자광(柳子光)·임사홍(任士洪) 등의 책동으로 끝내 정치도의를 상실한 채 국민에 대한 수탈을 자행하고 사치와 방탕으로 소일하다가 마침내 일부 유신(儒臣)들의 쿠데타로 쫓겨나고 중종(中宗)이 새 왕으로 추대되었다. 중종은 사림을 다시 중용하고 특히, 조광조(趙光祖)로 하여금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추진케 하여 무너진 유교정치를 부흥시켰다. 조광조는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사림세력의 대거 등용을 꾀하였고, 향약(鄕約)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성리학적 윤리와 향촌자치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사림의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높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여망에도 어느 정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혁의 성격이 너무도 급진적이고 과격하여 반대파의 공세를 받고 마침내 정계에서 밀려났는데, 이를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 한다.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훈구파와 대립하였던 사람들은 몇 차례에 걸친 사화로 말미암아 많은 타격을 입고 향촌으로 물러나기도 하였으나, 서원(書院)과 향약을 바탕으로 향촌에 뿌리를 내리면서 그 세력을 확장하여, 명종 때에는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정권을 잡은 후에는 이들 사림들 사이에서 정권다툼이 일어나는데, 이를 당쟁(黨爭)이라 한다. 선조 때에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분파가 당쟁의 시작이다. 지배층의 대립으로 그때마다 옥사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게 되고, 정권이 자주 바뀌면서 왕권은 약화되고 정치질서는 동요되어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소수 양반들에 의한 토지겸병과 농장의 확대는 국가재정을 위축시키고 이에 따라 농민의 부담이 늘어났다. 특히 공납(貢納)·군역(軍役)·환곡(還穀)에 있어서 폐단이 깊어 갔다. 또한 관료제도와 과거제도의 폐단은 양반계층을 대량으로 배출하여 신분구조에도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와 같이 정치·경제·사회의 질서가 변질되고 국력이 약화되는 가운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이어서 호란을 맞게 되었다. 조광조·이이(李珥)로 대표되는 16세기의 사림정치는 성리학적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국방강화와 대외정책에 효과적인 정책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정비기〉 광해군(光海君)∼숙종(肅宗):1592년에 시작되어 7년간 전개된 임진왜란의 피해는 막심하여 인구가 크게 감소하였고 농촌은 황폐화하였으며 토지대장과 호적대장이 없어져 국가운영이 마비상태에 빠졌다. 왜군의 방화로 문화재의 손실도 커서 불국사·경복궁 등의 건물, 사고(史庫)의 서적 등이 소실되었다.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내정과 외교에서 혁신적인 정치를 추진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을 비롯한 대북파(大北派)의 지지를 받아 즉위한 광해군은, 먼저 전란을 통해서 사림정치의 한계를 느끼고, 일부 사림들을 몰아내고 종친(宗親) 등의 정적을 대거 숙청하여 왕권을 안정시켰다. 이어서 전쟁으로 피폐한 산업과 재정기반을 재건하고 국방을 강화하기 위하여 양전사업·호적사업을 실시하고, 동시에 성지(城池)와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강화하였다. 또 전란 중에 질병이 많아 인명의 손상이 많았던 경험에 비추어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하게 하였으며, 불에 타버린 사고를 다시 갖추었다. 대외정책에서도, 명나라가 약해지고 북방의 여진족이 강성해지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간파하여 여진족의 후금(後金)과도 친선을 도모하는 등, 실리적이고 탄력성 있는 중립적 외교를 추구하였다. 광해군의 실리적이고 혁신적인 정치는 명분을 중요시하는 사림들에게는 크게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더욱이 광해군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는 등 유교적 윤리에 저촉되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광해군은 사림의 지지를 받은 서인(西人)에 의하여 쫓겨나고 인조(仁祖)가 즉위하였다. 인조를 옹립한 서인정권은 광해군 때의 중립적 외교정책을 지양하고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내세웠다. 1627년 후금은 조선을 침입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켰고, 이어 국호를 청(淸)이라 하고 사대(事大)를 요구하며 1636년 다시 침입하여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일으켰다. 인조는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45일간 지내다가 끝내 청나라와 화의를 맺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었다. 서인정권은 여진족과의 항쟁과정에서 국방력 강화의 명분을 내세워 금위영(禁衛營)·총융청(摠戎廳)·수어청(守禦廳)·어영청(禦營廳) 등 새로운 군영을 설치하여 이를 선조 때에 마련한 훈련도감(訓鍊都監)과 더불어 5군영이라 하였다.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종(孝宗)은, 특히 북벌(北伐)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방하고 이에 협력하는 송시열(宋時烈) 등의 서인 사림들을 등용하여 군비증강에 노력하였다. 이어서 왕위에 오른 현종(顯宗)과 숙종은 지나친 군비증강에서 오는 재정궁핍을 타개하고, 증대된 서인세력을 견제해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남인(南人)들을 등용하였다. 서인과 남인은 예송논쟁(禮訟論爭)·세자책봉의 문제로 한동안 정치적 갈등을 일으켰다. 이러한 당쟁의 격화로 정계는 혼란하였고 전후 복구를 위한 시책도 미봉적이었다. 황폐된 농촌사회의 구제와 탕진된 국가재정의 보완을 위한 개혁은 먼저 토지제도의 정비로 나타났고, 이어서 수취체제를 정비하여, 그 운영에 있어 협잡의 가능성이 많은 공법(貢法)에 대신하여 인조 때 영정법(永定法), 효종 때 양척동일법(量尺同一法)을 실시하여 전세(田稅)를 1결당 4두(斗)로 통일하였다. 그리고 지방 특산물이나 수공업제품을 현물로 바치는 공법제도에 여러 가지 폐단이 일어나자 쌀로 바치는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였다. 대동법은 일찍이 선조 때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한 이래 인조 때 강원도에서, 효종 때 충청도·전라도에서, 그리고 숙종 때에는 전국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조정의 노력과 더불어 민간에서도 전란의 극복을 위한 노력이 활발해졌다. 농업기술이 진전되었고 상공업계도 활성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잉여산물의 교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화폐제도도 개혁되어 인조·효종 때에 부분적인 동전(銅錢)의 주조가 있었고, 숙종 때에는 상평통보(常平通寶)가 전국적으로 사용되었다.

〈안정기〉 영조(英祖)∼정조(正祖):17세기의 조선은 두 차례의 전란을 극복하면서, 현실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정치·군사·경제 등 여러 면에서 개혁을 추진하여 어느 정도 사회가 정비되어 갔다. 18세기에는 이와 같은 사회안정을 바탕으로 국가적 노력과 사회변화가 연결되어 산업이 크게 발전하였고, 유통경제가 활기를 띠었으며, 이러한 가운데 새로운 사회건설을 이상으로 한 실학이 일어났으며, 서민문화(庶民文化)가 성장하였다. 이와 같은 18세기의 사회발전은 영조·정조의 치적에 힘입은 바 크다. 영조는 탕평책(蕩平策)을 표방, 당인(黨人)을 고루 등용하여 관료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려 하였고, 당인들이 장악한 군사권을 왕권에 귀속시키며, 당쟁의 소굴처럼 된 일부의 서원을 철폐하였다. 한편, 《속오례의(續五禮儀)》 《속대전(續大典)》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 《무원록(無寃錄)》 등을 편찬하여 문물을 재정비하였다. 또한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하여 그 부과에 있어 폐단이 많던 군역제도를 시정하고, 민의(民意)를 파악하고자 신문고제도를 부활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처로써 왕권이 크게 신장되었고, 관료정치가 정비되었으며, 민생안정에 기여하게 되었다. 정조 역시 영조의 왕권 강화정책을 계승·발전시켜 탕평책을 실시하는 한편,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정약용(丁若鏞) 등 새로운 인재들을 등용하여 학술활동을 진흥시켰으며 활자개량에도 힘써 편찬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때에 편찬된 서적으로는 《대전통편(大典通編)》 《동문휘고(同文彙考)》 《전운옥편(全韻玉篇)》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탁지지(度支志)》 등이 있다. 요컨대, 18세기에는 사회변화에 대처하고 민생안정을 위한 정치적 노력이 경주되어 중흥정치(中興政治)를 실현시켰고, 한편 서민들의 문화의식이 고양되어 민족문화의 저변이 확대되었고 진폭이 확장되었다. 특히, 이 시기를 전후하여 융성한 실학운동은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한 사회개혁운동으로서, 유교적 기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으나 서서히 근대사회로 지향하는 데 기여하였다.

〈침체기〉 순조(純祖)∼철종(哲宗):영조·정조의 중흥정치로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던 조선사회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勢道政治)로 말미암아 흔들리게 되었다. 세도정치의 시작은 정조 때의 홍국영(洪國榮)에서 비롯되었으나, 본격적인 세도가 시작된 것은 어린 순조를 대신해서 장인인 김조순(金祖淳)이 정권을 잡았을 때부터이다. 그의 세도와 함께 내외의 중요 관직은 그의 집안인 안동김씨(安東金氏) 일문이 독점하였다. 헌종(憲宗) 때에 조인영(趙寅永)이 세도를 부려 풍양조씨(豊壤趙氏)가 득세한 때도 있었으나, 철종이 즉위하면서 세도는 다시 안동김씨에게로 돌아갔다. 60여 년에 걸친 세도정치로 왕권은 매우 약화되었고 부패와 부정이 급속도로 만연하여 매관매직(賣官賣職)과 회뢰(賄賂)가 공공연하게 행해졌고, 지방 각 고을에서는 탐관오리의 착취·횡령으로 국민생활은 도탄에 빠졌다. 특히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국가재정이 파탄에 이르고, 농민들은 가난에 쪼들려 빚에 몰린 끝에 파산하여 고향을 떠나 유리걸식하거나 도둑떼에 들어갔다. 더구나 일문일족의 권력독점으로 양반사회제도가 밑바탕으로부터 흔들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농민들의 의식이 점차 높아져 곳곳에서 적극적인 반항을 시도하는 민란이 발생하였다. 1811년 순조 때 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난 홍경래(洪景來)의 난은 한때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고, 이후 민란은 더욱 확산되어 철종 때에는 삼남지방(三南地方)을 비롯하여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이때 밖으로는 천주교와 함께 서양세력이 조선에 위협을 주었다. 이에 백성들은 정신적 위안을 얻고자 하여 도교(道敎)가 유행하고 천주교와 동학(東學)에 귀의하기도 하였다.

〈격동기〉 고종(高宗)∼순종(純宗):19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조선의 전통사회는 그대로 유지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안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양반계층에 저항하는 농민세력이 성장해갔으며, 밖으로는 일본과 서양 열강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이 자라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철종의 뒤를 이어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국왕의 생부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정권을 장악하자, 안으로는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고,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열강의 접근에 대하여 쇄국정책으로 대항하였다. 그는 먼저 세도정치의 장본인인 안동김씨 일파를 몰아내고, 당파·신분·지방의 구별 없이 실력 본위로 인물을 등용하였다. 또 왕권강화를 위하여 비변사(備邊司)를 폐하고 의정부(議政府)의 기능을 회복하였고, 법치질서의 정비를 위하여 《대전회통(大典會通)》과 《육전조례(六典條例)》를 간행하였다. 또 삼정을 바로잡고 농민생활의 안정을 꾀하고자 탐관오리를 엄하게 징벌하고, 사치를 금하였으며, 호포제(戶布制)를 실시하여 군포(軍布) 부담의 형평을 기하고, 사창제(社倉制)를 실시하여 환곡을 합리적으로 운영토록 하였고,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그리고 위축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의 위신을 높이기 위하여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한편 외세의 침략적 접근을 막기 위하여 강경한 쇄국정책을 단행하여 먼저 천주교에 대탄압을 가하고, 이를 구실로 조선에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접근한 프랑스 함대를 격퇴하였다. 이를 병인양요(丙寅洋擾)라 한다. 이어서 미국 함대의 침공도 물리치며 쇄국정책을 강화하였으나, 대원군은 명성황후와 유림세력의 반발로 정계에서 물러났다. 1876년 개항과 함께 조선은 근대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개항을 전후하여 동학사상, 개화사상,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이 자라났고, 정권을 장악한 명성황후 일파는 정치적 경륜이 부족하여 정계는 혼란만을 거듭하였다. 개화와 보수의 갈등은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고, 청·일 양국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선에서 독점적 세력을 구축하려고 각축을 벌였다. 두 차례의 정변으로 조선에서의 정치적 세력이 약화된 일본은 경제적 침략을 강화하였다. 일본의 약탈적인 무역은 탐관오리의 수탈과 함께 농민층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쌀의 유출로 인한 물가의 앙등, 일본 어선의 진출에 따른 어민의 실업, 군란·정변 등에 따른 배상금 지불, 개화정책에 따르는 경비의 증대는 모두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불안한 농촌사회를 온상으로 하여 농민의 정신적 지주로 등장한 동학세력은 그 세력의 확장과 더불어 단순한 종교운동에서 벗어나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제폭구민(除暴救民)’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들고, 또 ‘척양척왜(斥洋斥倭)’를 내세우며 마침내 94년 대대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계기로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동학운동을 진압하면서 조선정부에 대하여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내정개혁을 요구하여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일본의 침략을 용이하게 한 갑오개혁은 정치·사회·경제 등 모든 부문에 걸쳐 광범한 근대적 개혁을 추진한 것이었으나 개혁의 반발이 내외에서 일어났다. 특히 일본의 조선정부에 대한 간섭과 만주까지의 세력 확대는 남하정책(南下政策)을 꾸준히 추진하던 러시아의 견제를 받았다. 러시아의 세력이 대두되자 민씨정권은 배일친러정책으로 전환하였고, 이에 당황한 일본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개혁을 더욱 급진적으로 추진하여, 종두법(種痘法)을 실시하고, 단발령(斷髮令)을 공포하였다. 이는 국민의 배일의식(排日意識)을 크게 고취시켰고, 그 결과 항일의병이 일어났다. 배일운동이 거세게 일자, 친러파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고,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자주권이 크게 손상되고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은 조선으로부터 많은 이권을 빼앗아 갔다. 이때를 당하여 안에서는 침략세력에 대항하는 민족적 각성과 근대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 갔다. 서재필(徐載弼)을 비롯한 일부 선각자들은 1896년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자주·자강과 자유·민권의 민족운동을 일으켰다. 독립협회에서는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신문》을 발간하면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여 근대화운동을 추진하였다. 1897년 8월 내외의 여론으로 마침내 고종도 러시아 공사관에서 환궁(還宮)하여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고, 왕을 황제(皇帝)라 칭하여 자주국가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대한제국은 근대국가로의 발전을 위하여 관제를 개혁하고 사회·경제적인 자강운동을 전개하였고, 특히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의 진흥에 힘썼다. 그러나 외세에 의존하는 고종과 보수적 집권층 때문에 대한제국은 일본·러시아 사이의 흥정 대상이 되어 갔다. 마침내 1904년 러·일전쟁에서 우위를 점한 일본은 영국과 영·일동맹을, 미국과 가쓰라 -태프트밀약을 맺어 한국의 강점을 착실히 추진하였다. 즉, 일본은 러·일전쟁을 도발함과 동시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로 체결하여 군사적 요지를 마음대로 점령한 데 이어 교통통신망을 장악하더니,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 이른바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실시하고, 마침내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인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을사조약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초대 통감(統監)으로 부임, 이른바 보호정치(保護政治)를 실시하였다. 이어서 일제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켜 한일신협약을 체결하고 조선 정부의 각부에 일본인 차관이 주재하는 이른바 차관정치(次官政治)를 강행하였다. 1910년 8월 마침내 이완용(李完用) 등 을사5적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국권을 강탈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막을 내렸다.

【통치구조】 조선왕조가 지향한 통치체제의 성격은 유교적 양반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로, 관념적으로는 왕권이 강화된 듯 보이나, 실질적으로는 약화되었다. 군왕은 재상(宰相)을 임명하고 재상과 정사를 협의하는 것이 주요 권한이며, 정책결정에서도 재가(裁可)하는 권한만을 가질 뿐, 주도권은 가지지 못하였고, 그 권한은 재상·언관(言官)·감찰관(監察官) 등에 의해 견제되었다. 따라서 실질적인 통치권은 군주가 아니라 재상에게 주어졌다. 《경국대전》에도 재상의 부서인 의정부가 정책결정에 있어 최고의 기관임을 규정하고 있다. 태종·세조 때에 일시적으로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가 실시되어 의정부의 기능이 약화된 적도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재상중심체제였다. 한편, 경연(經筵)제도가 있어, 의정부 재상과 홍문관·승정원의 고관이 모여 국왕과 더불어 경사(經史)를 읽으면서 정책을 토론하였는데, 이것 역시 군왕의 독재를 견제하는 기능을 하였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삼사(三司)를 중심으로 언관의 역할이 증대되었고, 구언제(求言制)·상소제(上疏制)·신문고(申聞鼓) 제도 등이 있어 언론이 크게 창달되었다. 조선은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위하여 지방의 모든 군(郡)·현(縣)에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었고, 수령(守令)의 지위도 참상관(參上官)으로 높였으며, 상피제(相避制)를 실시하여 본향(本鄕)으로의 취임을 통제하고, 수령들의 토착화를 막기 위하여 임기제(任期制)를 강화하였다. 한편, 관찰사의 기능을 강화하고, 향리(鄕吏)의 지위를 약화시켰으며, 퇴직 관리들에 대한 통제를 가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왕조에서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고 관료조직이 보다 합리적으로 조직된 것은 국민들이 토호나 향리의 사적인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국가의 공적 지배로 들어감으로써 국가기반의 확충이 보장됨을 뜻한다. 중앙집권의 강화로 교통과 통신조직이 전국적으로 짜여지고 행정능률이 개선되었다.

〈관품〉 조선의 모든 관료는 동반(東班:문관)·서반(西班:무관)으로 구분되고, 이들 동·서반의 품계는 정(正)·종(從) 각 9품으로 나누어 도합 18품계를 정하여 각 관등의 품계를 일정하게 하였다. 18품계의 관등은 다시 정책결정관인 당상관(堂上官)과 행정집행관인 당하관(堂下官)으로 나뉘며, 당하관은 다시 참상관·참하관으로 구분되는데, 참하관은 참외(參外)라 하여 직계가 낮은 실무자였다.

〈중앙관제〉 중앙행정조직은 의정부와 6조(六曹)의 체제로 편제되었다. 의정부는 그 우두머리인 3정승, 즉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합좌기관(合坐機關)이다. 3정승은 국가의 중요한 정사를 논의하고 그 합의사항을 국왕에게 품의하며, 왕의 재가는 역시 의정부를 거쳐 해당관부에 전달되었다.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6조가 각기 맡은 임무는 고려의 6부와 별 차이가 없으나, 그 기능이 보다 강화되었다. 장관을 판서(判書), 차관을 참판(參判)이라 하는데, 이들 고급 행정관원은 정책결정에 참여하여 기능적 분화와 통일성을 조화시켰다. 이 밖에 왕명의 출납을 맡은 승정원(承政院)이 있어 그에 소속된 도승지(都承旨) 이하 6승지는 각기 6조의 행정업무를 분담하여 왕의 비서(書) 기능을 맡았으므로 때로는 다른 기관을 무시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행정기관을 견제하는 기구로서 홍문관(弘文館)·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의 이른바 3사(三司)가 있다. 이들 3사는 정책결정 및 집행과정의 착오와 부정을 막기 위한 언관으로서, 특히 사헌부는 백관을 규찰하는 감찰관이기도 하였으며 서경(署經)이라 하여 임명된 관리의 신분·내력 등을 조사하여 그 가부를 승인하는 임무도 맡았다. 홍문관은 집현전(集賢殿)의 후신으로서, 경적(經籍)을 모아 정사를 토론하고 문필을 다스려서 국왕의 고문 역할을 하였다. 사간원은 국왕의 정치에 대한 간쟁(諫爭)을 임무로 하였으므로, 3사는 의정부 6조의 행정기관을 견제하는 위치에서 권력의 편중을 막았다. 그리고 국왕의 명을 받아 죄인을 다스리는 의금부(義禁府), 역사를 편찬하는 춘추관(春秋館), 서울의 행정을 맡은 한성부(漢城府), 백성의 죄를 다스리는 포도청(捕盜廳) 등이 있다. 조선의 통치구조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변질되어 갔는데, 비변사(備邊司)가 정치의 주요 역할을 담당하였다. 비변사는 초기에 지변사재상(知邊司宰相)을 중심으로 군무를 협의하던 임시기구였으나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상설기구가 되면서 문무 고위관리들의 합의기관으로 확대되고 군사는 물론 정치·외교 등 일반 정무까지도 처결하였다. 비변사에는 위로 3정승으로부터 공조를 제외한 5조판서, 5군영의 대장들, 유수(留守)·대제학 그리고 군무에 능한 현·전직고관 등 당상관 이상의 문무 고위관리가 참여하였는데, 이로써 조선 전기의 최고 정무기관인 의정부의 기능은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비변사가 정치를 주도하였다. 그 후 대원군에 의해 비변사가 폐지되고 의정부의 기능이 복구되었으나, 1880년 관제개혁 때 최고의 행정부로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 그 밑에 12사(司)를 두어 사무를 분장케 하고, 통리기무아문의 장관을 총리대신(總理大臣)이라 하였다. 이어서 임오군란 후 통리기무아문을 분리, 외무행정을 맡아 보는 통리아문(統理衙門:外衙門), 내무행정과 군국기무를 맡은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內衙門)을 설치하였다. 갑오개혁으로 중앙에는 궁내부(宮內府)·의정부(議政府)의 2부와 내무·외무·탁지(度支)·군무(軍務)·법무·학무·공무·농상무(農商務)의 8아문을, 지방에는 8도를 고쳐 13도를 설치하였다. 곧이어 궁내부를 독립시키고, 의정부를 내각(內閣)으로 고쳐 내부·외부·탁지부·군부·법부·학부·농상공부의 7부를 직속시켜 내각의 장관을 총리대신이라 하고 각부의 장관을 대신이라 하였다. 그 밖에 특수기관으로 감찰업무를 맡은 도찰원(都察院), 자문기관인 중추원(中樞院), 회계를 맡은 회계심사원(會計審査院), 경찰업무를 맡은 경무청(警務廳), 최고재판소인 의금사(義禁司), 서울의 행정을 맡은 한성부 등이 설치되었다. 개화기 정치제도의 특징은 행정과 사법의 분리에 있다

                                                              

 

성균관(成均館)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한국 최고의 학부기관으로서 ‘성균’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충렬왕 때인 1289년에 그때까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을 ‘성균’이라는 말로 개칭하면서부터이다. 충숙왕대인 1308년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었고, 공민왕대에는 국자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62년에 다시 성균관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조선 건국 이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어, 95년부터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에 대성전(大聖殿)과 동무(東)·서무(西)·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庫) 및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 등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성균관은 태학(太學)으로도 불리었으며, 중국 주나라 때 제후의 도읍에 설치한 학교의 명칭인 ‘반궁(泮宮)’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성균관에는 최고의 책임자로 정3품직인 대사성(大司成)을 두었으며, 그 아래에 좨주(祭酒)·악정(樂正)·직강(直講)·박사(博士)·학정(學正)·학록(學錄)·학유(學諭) 등의 관직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는 과거제도와 긴밀히 연결되어서, 초시인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儒生)에게 우선적으로 성균관에의 입학 기회를 주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1429년(세종 11)부터 200명으로 정착되었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을 상재생(上齋生)이라 하였으며, 소정의 선발 시험인 승보(升補)나 음서(蔭敍)에 의해 입학한 유생들을 하재생(下齋生)이라 하였다. 성균관 유생은 기숙사격인 동재와 서재에서 생활하였으며, 출석 점수 원점(圓點)을 300점 이상 취득해야만이 대과 초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유생의 생활은 엄격한 규칙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자치적인 활동기구로 재회(齋會)가 있었다. 유생은 기숙사생활을 하는 동안 국가로부터 학전(學田)과 외거노비(外居奴婢) 등을 제공받았으며, 교육 경비로 쓰이는 전곡(錢穀)의 출납은 양현고에서 담당하였다. 유생은 또한 당대의 학문·정치현실에도 매우 민감하여 문묘종사(文廟從祀)나 정부의 불교숭상 움직임에 대해 집단 상소를 올렸으며,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권당(捲堂:수업거부) 또는 공관(空館)이라는 실력행사를 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 학문의 전당으로서 관리의 모집단으로 주요한 기능을 한 성균관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교육재정이 궁핍화하고 과거제도가 불공정하게 운영되면서 그 기능이 약화되었다. 1894년의 갑오개혁은 성균관의 역사에서 중요한 굴절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갑오개혁이 단행되면서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근대적인 교육개혁이 추진되면서 일정한 변모를 겪게 되었다. 성균관은 개화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유학과 도덕을 지켜 나가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며, 1946년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그 전통은 계승되었다. 1785년(정조 9)에 편찬된 《태학지(太學志)》에는 성균관의 건물 배치도 및 성균관 제도의 변천과정, 유생의 활동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어서 조선시대 성균관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된다.

                                                                    

 

정도전(鄭道傳, 1337∼1398)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학자. 본관 봉화(奉化). 자 종지(宗之). 호 삼봉(三峰). 1362년(공민왕 11) 진사, 이듬해 충주사록(忠州司錄)을 거쳐 전교시주부(典敎寺主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내고 부모상으로 사직하였다. 70년 성균박사가 되고 이어 태상박사(太常博士)를 거쳐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75년(우왕 1) 성균사예(成均司藝)·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하였고 이 해 권신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親元排明)정책을 반대하다가 회진현(會津懸)에 유배되었다. 77년 유형을 마치고 고향 영주(榮州)에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종사하며, 특히 주자학적 입장에서 불교배척론을 체계화하였다. 83년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의 막료가 되었고 이듬해 성절사(聖節使) 정몽주(鄭夢周)의 서장관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85년 성균좨주(成均祭酒), 이듬해 남양부사(南陽府使)로 있다가 88년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승진하였다. 이성계의 우익으로서 조준(趙浚)과 함께 전제개혁론을 주장, 89년(창왕 1)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였고 창왕(昌王)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는데 적극 가담하여 봉화현충의군(奉化縣忠義君)에 책록되었다. 90년(공양왕 2) 경연지사(經延知事)로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대사성(同判都評議使司事兼成均大司成)·삼사부사(三司副使)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몰아내고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科田法)을 실시하게 함으로써 조선 개국의 정치·경제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듬해 이성계가 군사권을 장악하여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설치하자 우군총제사(右軍摠制使)가 되고 이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재직 중, 구세력의 역습으로 탄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고 봉화로 유배되었다. 92년 한때 풀렸으나 정몽주의 탄핵으로 투옥되었고 정몽주가 살해된 뒤 풀려나와 조준·남은(南誾)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그 공으로 분의좌명개국공신(奮義佐命開國功臣) 1등에 녹훈되고,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예문춘추관사(藝文春秋館事)에 임명되어 사은 겸 정조사(謝恩兼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94년(태조 3) 한양천도 때는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의 기지를 결정하고 궁·문의 모든 칭호를 정했다.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찬진하여 법제의 기본을 이룩하게 하고 95년 정총(鄭摠) 등과 《고려사》 37권을 찬진했으며, 97년 동북면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가 되어 성을 수축하고 역참(驛站)을 신설했다. 제l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에게 참수되었다. 유학(儒學)의 대가로 개국 후 군사·외교·행정·역사·성리학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였고, 척불숭유(斥佛崇儒)를 국시로 삼게 하여 유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저서에 《삼봉집(三峰集)》 《경제육전(經濟六典)》 《경제문감(經濟文鑑)》 《심기리편(心氣理篇)》 《불씨잡변(佛氏雜辨)》 《심문천답(心問天答)》 《진법서(陳法書)》 《금남잡제(錦南雜題)》 등이 있고, 작품에 <납씨가(納氏歌)> <정동방곡(靖東方曲)> <문덕곡> <신도가(新都歌)> 등이 있다.

                                                

 

기화(己和, 1376∼1433)

 

조선 전기의 승려. 본관 충주(忠州). 속성 유(劉). 이름 수이(守伊). 법호 득통(得通). 당호 함허(涵虛). 1396년(태조 5) 관악산 의상암(義湘庵)으로 출가하였으며, 이듬해 회암사(檜巖寺)로 가서 무학왕사(無學王師)에게 법요(法要)를 배운 후, 여러 곳을 다니다가 다시 회암사에 가서 홀로 수도에 정진하였다. 그 뒤 공덕산(功德山)의 대승사(大乘寺), 천마산(天摩山)의 관음굴(觀音窟), 불희사(佛禧寺) 등에서 학인(學人)들을 지도하고 자모산(慈母山) 연봉사(烟峰寺)에 들어가 함허당(涵處堂)이라 이름하고 3년간 수도를 계속하였다. 1420년(세종 2) 오대산에 가서 여러 성인들을 공양하고 월정사(月精寺)에 있을 때 세종이 청하여 대자어찰(大慈御刹)에 머물렀다. 4년 후 이를 사퇴하고 길상(吉祥)·공덕(功德)·운악(雲嶽) 등 여러 산을 편력하다가 31년 희양산(曦陽山)에 이르러 봉암사(峰巖寺)를 중수(重修)하고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에 《원각경소(圓覺經疏)》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 《현정론(顯正論)》 《반야참문(般若懺文)》 《윤관(綸貫)》 등이 있다.

                                                         

 

함허화상어록(涵虛和尙語錄)

 

조선 전기의 승려 기화(己和)의 시문집. 규장각본은 목판본, 국립중앙도서관본은 활자본. 1권. 표제(表題)는 함허당득통화상어록(涵虛堂得通和尙語錄). 1988년 경인문화사에서 간행한 한국역대문집총서에 실려 있다. 1440년 문경 봉암사(鳳巖寺)에서 간행. 전여필(全汝弼)의 서문과 제자 야부(T夫)의 행장이 있다. 1940년 월정사(月精寺)에서 활자본으로 중간하였는데, 여기에는 권상로(權相老)가 첨부한 <금강경서(金剛經序)>와 <법화경후발(法華經後跋)> 및 출가시(出家詩)가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행장, 천가법어(薦駕法語) 27편, 찬·송·가·음(吟) 12편, 시문 92수, 시중(示衆)·권념(勸念) 2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가법어·제문·헌향·수어 등은 모두 죽은 자를 위한 법문이나 제문이다. <원각경송(圓覺經頌)>과 <법화경송(法華經頌)>은 《원각경》과 《법화경》의 중심 내용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종풍가(宗風歌)>는 7언 20구로 된 게송으로 오늘날 한국 불교의 사상적인 풍조를 축소해 놓은 듯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자경음(自慶吟)>은 4언 80구로 부동지(不動地), 평등성지(平等性地), 일초칙입여래지(一超則入如來知)에 이른 자신의 심경을 가식없이 표현하였다. 그는 <미타찬(彌陀讚)>과 <안양찬(安養讚)>에서 아미타불에 대한 염불의 효험을 극구 찬양하였다. 조선 전기 배불의 도도한 흐름속에서 《현정론(顯正論)》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 등의 저술을 통하여 이념적으로 유교와 불교의 공존을 모색하고자 노력했음에도 수많은 사원들이 헐리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승려로서의 심회를 노래한 시가 <유감(有感)>이다.

                                                         

 

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 진보(眞寶). 초명 서홍(瑞鴻). 자 경호(景浩). 초자 계호(季浩). 호 퇴계(退溪)·도옹(陶翁)·퇴도(退陶)·청량산인(淸凉山人). 시호 문순(文純). 예안(禮安) 출생. 12세 때 숙부 이우(李%)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1523년(중종 18)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28년 진사가 되고 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부정자(副正子)·박사(博士)·호조좌랑(戶曹佐郞) 등을 거쳐 39년 수찬(修撰)·정언(正言) 등을 거쳐 형조좌랑으로서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겸직하였다. 42년 검상(檢詳)으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사인(舍人)으로 문학(文學)·교감(校勘) 등을 겸직, 장령(掌令)을 거쳐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이기(李)에 의해 삭직되었다가 이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고 응교(應敎) 등의 벼슬을 거쳐 52년 대사성에 재임, 54년 형조·병조의 참의에 이어 56년 부제학, 2년 후 공조참판이 되었다. 66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68년(선조 1)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 주자(朱子)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을 이(理)·기(氣) 이원(二元)으로써 설명,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어서,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을 의미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적(形而下的) 존재로서 이의 법칙을 따라 구상화(具象化)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면서도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보아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는데, 즉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端)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타[乘]는 것은 7정(情)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기대승(奇大升)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은 사칠분이기여부론(四七分理氣與否論)의 발단이 되었고 인간의 존재와 본질도 행동적인 면에서보다는 이념적인 면에서 추구하며, 인간의 순수이성(純粹理性)은 절대선(絶對善)이며 여기에 따른 것을 최고의 덕(德)으로 보았다. 그의 학풍은 뒤에 그의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고, 이이(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스로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창설,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중종·명종·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단양(丹陽)의 단암서원(丹巖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퇴계전서(退溪全書):修正天命圖說·聖學十圖·自省錄·朱書記疑·心經釋疑·宋季之明理學通錄·古鏡重磨方·朱子書節要·理學通錄·啓蒙傳疑·經書釋義·喪禮問答·戊辰封事·退溪書節要·四七續編》이 있고 작품으로는 시조에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글씨에 《퇴계필적(退溪筆迹)》이 있다.

                                                               

 

4단 7정론(四端七情論)

 

조선시대의 석학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주장한 인생관의 논리적 학설. 사단(四端)이란 맹자(孟子)가 실천도덕의 근간으로 삼은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며, 칠정(七情)이란 《예기(禮記)》와 《중용(中庸)》에 나오는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慾)을 말한다. 이황은, 4단이란 이(理)에서 나오는 마음이고 칠정이란 기(氣)에서 나오는 마음이라 하였으며, 인간의 마음은 이와 기를 함께 지니고 있지만, 마음의 작용은 이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기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즉 선과 악이 섞이지 않은 마음의 작용인 4단은 이의 발동에 속하는 것으로, 이것은 인성(人性)에 있어 본연의 성(性)과 기질(氣質)의 성(性)이 다른 것과 같다고 하여 이른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이황의 이러한 학설은 그 후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켜 200여 년 간에 걸쳐 유명한 사칠변론(四七辯論)을 일으킨 서막이 되었다. 즉 기대승(奇大升)은 이황에게 질문서를 보내어, 이와 기는 관념적으로는 구분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서는 구분할 수 없다고 주장,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내세웠으며, 이를 다시 이이(李珥)가 뒷받침하여 이기이원론적 일원론(理氣二元論的一元論)을 말하여 이황의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이이의 기호학과(畿湖學派)가 대립, 부단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이는 마침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 사이에 벌어진 당쟁(黨爭)의 이론적인 근거가 되기에 이르렀다.

                                                                   

 

이이(李珥, 1536∼1584)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릉 출생.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를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정치사상】 이이가 관직생활을 시작한 명종말~선조 초는 명종대에 정치를 좌우한 척신이 제거되고 새로운 정치세력이 부상한 정치적 변동기였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尹元衡) 등 그간 정사를 전횡한 권신이 차례로 쫓겨나고, 을사사화 때 죄를 입은 사람들이 신원되는 등 정세가 일변함에 따라 사림이 정계에 복귀하기 시작하였고, 곧이어 선조가 즉위하자 사림의 정계 진출은 더욱 본격화되어 그동안 훈척정치하에서 이루어진 폐정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방안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중앙의 고위관직을 상당부분 차지한 구신(舊臣)과 삼사(三司)를 중심으로 포진한 사림이 대치한 정국의 구도 속에서 구체제 인물에 대한 처리 방식을 놓고 사림간의 견해차이가 드러났는데, 강온의 입장차이에 따라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이 갈렸다. 이이는 처음에는 훈척으로부터 사림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 사림의 정치집단인 붕당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주장하였으나, 이 때에 사림이 분열하자 붕당의 지나친 분파활동이 수반하는 폐단을 경계하며 사림의 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분열된 사림의 결합을 위한 그의 노력은 치열해져가는 정쟁(政爭)의 격화 속에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그 자신마저 동인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그의 붕당관은 그가 가진 시국관과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 가장 시급한 문제는 훈척정치 아래에서 파생된 많은 사회적 모순과 폐정을 개혁하여 민생고를 해결하는 일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위해서는 이제 막 정권담당층으로 자리굳힌 사림의 총력을 결집시킬 필요성에서 그 분열과 소모적인 논쟁을 경계한 것이다. 자기가 살던 16세기의 조선 사회를, 건국 뒤 정비된 각종 제도가 무너져가는 ‘중쇠기(中衰期)’라고 진단하고서, 시급한 국가의 재정비를 위해 일대 경장(更張)이 요구되는 시대라고 판단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변통(變通)을 통한 일대 경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동호문답》 《만언봉사》 등의 저술을 통하여 안민(安民)을 위한 국정 개혁안을 선조에게 제시하였는데, 이것이 ‘경장론(更張論)’이다. 《만언봉사》에 의하면 ‘정치에 있어서는 때를 아는 것이 소중하고 일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것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때에 알맞게 한다(時宜)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을 하고 법을 마련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시대가 바뀌면 법제도 맞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 맞게 제도를 개혁해야 하며, 이러한 변통을 통해 경장이 이루어져야 안민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가 당시 조선 사회를 중쇠기로 파악한 구체적 증후로서 지배층의 기강 해이와 백성의 경제적 파탄을 들었는데, 그 원인은 각종 제도의 폐단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비를 위해서는 마땅히 잘못된 제도를 경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경장의 구체적인 방법은 국가의 통치체제 정비를 통해 기강을 확립하고, 공안(貢案)과 군정(軍政)등 부세(賦稅)제도의 개혁을 통해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서원향약(西原鄕約)·해주향약(海州鄕約)·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 등을 만들어 향약과 사창법을 실시함으로써 향촌에서의 농민생활 안정과 사족중심의 향촌질서 유지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국 그는 이러한 방법으로 안민을 이루어 중세사회의 동요를 막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경장론은 동·서인의 분쟁 격화와 선조의 소극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당대에는 거의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치사상은 시의를 쫓아 실공(實功)과 실효를 강조한 현실적 면모를 보이는데, 진리란 현실 문제와 직결된 것이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 점에서 일관되게 주장한 이기론, 즉 이(理)와 기(氣)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한 율곡성리설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철학사상】 16세기 전반기에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연구 결과로 이기론·사단칠정론·인심도심설 등 이기심성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표출되어 이를 둘러싼 논쟁과 학문적 심화과정을 통해 조선 성리학이 정착되었다. 이황과 기대승(奇大升)간의 사칠논쟁, 이를 둘러싼 성혼과 이이와의 우율논변(牛栗論辨)이 벌어지고, 서경덕과 이황이 각기 기(氣)와 이(理)를 둘러싸고 학설상의 차이를 보이는데, 이이는 이들의 주장을 아우르며 독특한 성리설을 전개하였다. 이황은 이기론에 있어서는 기뿐만 아니라 이도 발한다는 이기호발설을 견지하여 ‘이발이기수지 기발이이승지(理發而氣隨之氣發而理乘之)’를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견해는 사단칠정론에도 그대로 이어져 순선(純善)인 사단(四端)은 이발(理發)의 결과이고 유선악(有善惡)인 칠정(七情)은 기발(氣發)의 결과이므로, 결국 사단과 칠정을 별개로 취급하여 ‘사단대칠정’ 논리를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이는 이발을 인정하지 않고 ‘발하는 것은 기이며 발하는 까닭이 이’라고 하여 ‘기발이이승지’의 한 길(一途)만을 주장하면서 사단칠정이 모두 이것 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단지 칠정은 정(情)의 전부이며, 사단은 칠정중에서 선한 것만을 가려내 말한 것이라고 하여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칠정포사단’의 논리를 전개하여 기대승의 사단칠정론에 찬동하였다. 이이의 경우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는 구별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사물에 있어 이는 기의 주재(主宰)역할을 하고 기는 이의 재료가 된다는 점에서 양자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고, 하나이며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이들의 관계를 ‘이기지묘(理氣之妙)’라고 표현하였다. 이들이 이런 사상을 갖게된 현실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황의 경우 이이보다 35년 연상으로 훈척정치하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를 살면서 타락한 정치윤리와 도덕을 바로잡기 위해서 기보다는 이, 칠정보다는 사단, 인심보다는 도심에 역점을 두어 선(善)을 지향하는 이 위주의 이기이원론적 사고방식을 취한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이이의 경우, 정권 담당층이 훈척에서 사림으로 교체되는 등 개선된 정치 여건속에서 시급한 민생문제 해결을 위해 현실에 적극 참여하고 개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의리와 실사(實事)가 결합되고 이와 기가 통합된 일 원론적 사고방식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이의 이기론은 다양한 현상(氣)속에 보편적 원리(理)가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이가 현실 속에서는 구체적 기에 의해 규정되고 따라서 보편적 이는 구체적인 변화상을 떠나서는 추구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가 주장한 경장론의 변통논리와 일맥 상통한다. 이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변화하고 제한적인 기(氣局) 속에는 항상 보편적 이(理通)가 존재한다는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제시하였다. 이를 서경덕의 주기론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 이이는 그가 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기불리를 주장하였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서경덕이 궁극적 존재를 기, 즉 태허지기(太虛之氣)로 인식한 데 대해서는 비판을 가하여 궁극적 존재는 태허지기가 아니라 바로 이, 즉 태극지리(太極之理)라고 주장하여 이의 중요성을 동시에 부각시켰다. 결국 이이는 서경덕의 기 위주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이의 중요성을 들어 비판하고, 이황의 이 위주의 이기이원론 이기호발설에 대해서는 기의 중요성과 이기불리를 들어 기발일도설(氣發一途說) 이기지묘를 주장하였으니, 이이는 서경덕과 이황 등 당대 성리학자의 상이한 주장을 균형있게 아우르며 그의 독특한 성리설을 전개시켜 나갔다고 하겠다.

                                                            

 

사화(士禍)

 

조선시대에 조신(朝臣) 및 선비들이 반대파에게 몰려 화(禍)를 입은 사건. 조선 개국 이래 역대의 임금이 문치(文治)에 힘을 쓰고 유학(儒學)을 장려했기 때문에 우수한 학자가 많이 배출되고, 선비사회, 즉 유림(儒林)은 활기에 차 있었다. 그러나 세조∼성종 때에 이르러 그들 사이에 주의·사상·감정·정실(情實)·향토(鄕土)관계 등으로 여러 파별(派別)이 생겼는데, 개중에는 기미가 상통하는 파도 있었으나 서로 대립·반목하는 파도 있었다. 이를 네 파로 대별하면 훈구파(勳舊派)·절의파(節義派)·사림파(士林派)·청담파(淸談派) 등이다. 그 중의 훈구파는 세조의 찬역(簒逆)을 도와 높은 지위와 많은 녹전을 차지한 부귀가 겸전한 일파인데,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이석정(李石亭)·양성지(梁誠之)·권람(權擥)·신숙주(申叔舟)·강희맹(姜希孟)·서거정(徐巨正)·이극돈(李克墩) 등이다. 절의파는 세조의 찬역행위를 절대반대한 김시습(金時習) 등의 생육신(生六臣)을 중심으로 한 파이다. 사림파는 경상도 밀양(密陽) 출신인 김종직(金宗直)을 중심으로 한 일파이다. 사림파의 중심인물인 김종직은 동방성리학(性理學)의 정통을 이어받은 대학자로서 그의 제자 중에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위(曺偉)·김일손(金馹孫)·유호인(兪好仁) 등이 있었다. 이들은 세조의 찬역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점에서는 절의파와 일맥상통하지만 적당한 기회를 얻으면 조정의 요직에 들어가 포부를 펴보려는 점에 있어서는 절의파와 생각을 달리하였다. 그러므로 훈구파에 있어서 정면의 적은 사림파였다. 청담파는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본떠 서울 동대문 밖 죽림에 모여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세월을 보낸 일파로서 남효온(南孝溫)·홍유손(洪裕孫) 등이 대표적이다. 훈구파는 조정의 요직에 있어 세조∼성종 시대의 여러 가지 관찬사업(官撰事業), 즉 조정에서 간행하는 서적 편찬에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이며, 따라서 한 나라의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 그들의 녹전은 주로 경기도·충청도에 있었기 때문에 지역적으로 볼 때, 이들은 기호파(畿湖派)이고,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은 대개 경상도, 즉 영남(嶺南)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영남파라 하였다. 훈구파와 사림파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대립과 반목이 점점 심각해졌는데, 1498년(연산군 4) 두 파는 정면충돌을 하였으며, 그 결과 권력을 쥐고 있던 훈구파의 일격에 사림파는 패배하였다.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게재(揭載)한 것에서 발단이 된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의하여 김종직은 이미 죽은 후였으므로 부관참시(剖棺斬屍)의 욕을 당하고 그 밖의 많은 제자들은 처형되거나 귀양갔다. 두 번째의 사화는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甲子士禍)이다. 갑자사화는 투기가 심하여 왕비(王妃)의 자리에서 쫓겨나 사약을 받은 성종의 비(妃) 윤씨(尹氏)의 소생인 연산군이 성종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후 생모(生母)에 관한 사실을 알게 되자, 폐비에 찬성한 신하들과 평소에 연산군의 학정을 불평하던 일부 사림파의 선비들을 한데 묶어,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서 일어났다. 이것은 무오사화처럼, 훈구·사림파 간의 대립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선비가 많이 죽음을 당하였다는 의미에서 사화이다. 세 번째의 기묘사화(己卯士禍)도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대립에서 발생한 사화이다. 훈구파의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공훈에 비판적이던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위훈삭제사건(僞勳削除事件)을 일으켜 심정(沈貞)·남곤(南袞)·홍경주(洪景舟) 등에게 타격을 가하려다 그들의 반격을 받아 패배한 사건이다. 조광조·김식(金湜)·기준(奇遵)·한충(韓忠)·김구(金絿)·김정(金淨)·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 등의 기묘명현(己卯名賢)이 죽거나 유배되었다. 네 번째는 1545년(인종 1)의 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이것은 왕실의 외척인 윤임(尹任), 즉 대윤(大尹)과 같은 파평(坡平) 윤씨인 윤원형(尹元衡), 즉 소윤(小尹) 사이의 권력다툼에 말려들어 많은 선비가 타격을 받은 사건이다. 이것도 갑자사화의 경우처럼 선비사회 사이의 싸움은 아니지만 많은 선비가 희생되었기 때문에 사화라고 한다. 4대사화는 1575년(선조 8)에 이르러 당쟁(黨爭)이 일어나기 전의 선비들에 대한 옥사였다. 그러나 사화는 소수인의 음모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고, 파당을 가진 다수인의 공공연한 논쟁이 따르는 대립과 투쟁에서 패자는 반역자로 몰려 지위를 빼앗기거나 목숨을 잃고, 한 파가 승리하면 이에 대하여 새로운 반대파가 또 생겨 그것이 또다른 사화를 야기시켰다. 이러는 동안 정치의 기강은 더욱 문란해지고, 뜻있는 선비들은 관직을 버리고 당·서원 등을 세워 유생(儒生)들의 집합 또는 강학(講學)의 장소로 삼는 동시에, 그들 일족의 자녀교육을 하고 이를 통하여 동족적인 당파의 결합을 굳게 하였다. 이와 같이 사화에 의하여 육성된 정치비판과 반대파에 대한 복수관념은, 서원의 발전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당쟁을 격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뜻있는 선비들의 향토 복귀와 교육 실시는 고관대작이 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공리적·세속적인 관학(官學)에 대하여 수양과 사색을 주로 하는 진리탐구의 참다운 학문을 하겠다는 사조와 경향을 낳게 하고, 이로 인하여 사학(私學)의 대연원(大淵源)이 열리게 되었다.

                                                    

 

훈구파(勳舊派)

 

조선 세조의 찬위(簒位)를 도와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관료학자들. 정인지(鄭麟趾)·신숙주(申叔舟)·최항(崔恒)·권람(權擥)·서거정(徐居正)·양성지(梁誠之)·이석형(李石亨)·강희맹(姜希孟)·이극돈(李克墩) 등이 이 파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조의 공신(功臣)·충신(忠臣) 또는 어용학자(御用學者)들로서 높은 관직에 기용되었고, 관찬사업(官撰事業)에 참여하여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수차에 걸친 공신전(功臣田)의 지급을 통하여 막대한 농장(農莊)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신진사류(新進士類)인 사림파(士林派)의 등장으로 그 세력이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즉, 사림파는 훈구파에 대해 토지제도의 개혁을 요구함으로써 두 세력 사이에 충돌을 야기하였으며,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훈구파는 이 사화에서 영남유생과 싸워 승리했고,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도 사실상 승리하였다.

                                                    

 

사림(士林)

 

조선 중기에 사회와 정치를 주도한 세력을 지칭하는 말. 고려 말·조선 초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두 차례의 사화(士禍)를 겪은 15세기 말엽에 와서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니는 정치세력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본래 지방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는 중소지주 출신의 지식인으로, 중앙의 정계에 진출하기보다는 지방에서 유향소(留鄕所)를 통하여 영향력을 행사해 오던 세력이었다. 학문적으로는 사장(詞章)보다는 경학(經學)을 중시하였고, 경학의 기본 정신을 송대 신유학 가운데서도 성리학(性理學)에서 구하였다.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김종직(金宗直)이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金馹孫) 등의 제자를 배출하면서 그 세력이 커졌다. 성종 초에 김종직 등 영남출신 사류(士類)를 등용하면서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훈신(勳臣)들의 장기 집권에 따른 비리로 인해 동요하는 지방사회의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세조 말에 혁파된 유향소제도를 부활하여 《주례(周禮)》의 향사례(鄕射禮)·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시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기반이 강한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유향소가 권력가의 지방에 대한 수탈의 하부조직으로 악용되었다. 이에 지방에서는 사마소(司馬所)라는 독립기구를 만들어 대항하는 한편, 중앙에서는 삼사(三司) 등 주로 언론·문필 기관의 관직을 통해 정계로 진출하여 훈신·척신(戚臣) 계열의 비리를 비판하는 언론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에 대한 훈신·척신의 보복으로 사화가 발생하여 그 세력이 크게 제거되었지만, 중종대에 다시 정계에 진출하여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일종의 천거제인 현량과(賢良科)를 통해 자기 세력을 중앙으로 크게 진출시키고, 지방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주자(朱子)가 증손(增損)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군현마다 시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훈신·척신의 강한 반발로 또다시 사화가 발생하여 그 세력이 크게 꺾였다. 이후 지방에서 서원(書院)과 향약을 토대로 기반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다가, 16세기 후반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척신정치가 일단 종식되면서 중앙에 활발하게 진출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에는 척신정치의 척결문제를 둘러싸고 선배 관인과 후배 관인이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으로 대립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붕당(朋黨)으로의 분기가 거듭되고 일부 세력의 도태를 겪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계기로 17세기 후반까지 학연을 기반으로 한 서인·남인(南人)을 중심으로 붕당정치의 질서를 수립하였다. 권력가들의 탄압을 뚫고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면서 자기들의 이념을 정치에 구현하려 한 전통은 그후 조선 후기의 지배층이 사회와 국정을 이끄는 기본정신이 되었다.

                                                                

 

서원(書院)

 

조선 중기 이후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운 사설기관(私設機關). 서원의 명칭은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궁중에 있던 서적(書籍)의 편수처(編修處)이던 여정전서원(麗正殿書院)·집현전서원(集賢殿書院)에서 유리한 것인데, 송나라 때 지방의 사숙(私塾)에 조정(朝廷)에서 서원이라는 이름을 준 데서 학교의 명칭이 되어 수양(陽)·석고(石鼓)·악록(嶽麓)·백록동(白鹿洞) 등의 4대서원이 생겼으며, 특히 주자(朱子)가 강론(講論)을 하던 백록동서원은 유명하였다. 이 후 서원은 선현(先賢)과 향현(鄕賢)을 제향(祭享)하는 사우(祠宇)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書齋)를 아울러 갖추게 되었는데 고려시대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서재(書齋)·서당(書堂)·정사(精舍)·선현사(先賢祠)·향현사(鄕賢祠) 등과 문익점(文益漸)을 제사하는 도천서원(道川書院)이 1401년(태종 1) 단성(丹城)에, 김굉필(金宏弼)을 제사하는 천곡서원(川谷書院)이 1528년(중종 23) 성주(星州)에, 김구(金坵)를 제사하는 도동서원(道洞書院)이 34년(중종 29) 부안(扶安)에 각각 세워졌으나 모두 사(祠)와 재(齋)의 기능을 겸비한 서원은 없었는데, 42년(중종 37) 경상도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관내 순흥(順興) 백운동(白雲洞)에 고려 유교(儒敎)의 중흥자(中興者) 안향(安珦)의 구가(舊家)가 있음을 알고 거기에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를 지내고 경적(經籍)을 구입하여 유생들을 모아 가르치니 이것이 사와 재를 겸비한 최초의 서원으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그 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와서 이를 보고 중국 백록동 고사(古事)처럼 조정에서 사액(賜額)과 전토(田土)를 주도록 건의함에 따라 명종은 50년(명종 5) 이를 권장하는 뜻에서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친필로 쓴 액(額:간판)과 서적을 하사하고 학전(學田)·노비(奴婢)를 급부(給付)하면서 이들 토지와 노비에 대한 면세(免稅)·면역(免役)의 특권을 내려 이것이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서원의 설치는 전국에 미쳐 명종 이전에 설립된 것이 29개, 선조 때는 124개에 이르렀고, 당쟁이 극심했던 숙종 때 설치한 것만 300여 개소에 이르러 1도에 80~90개의 서원이 세워졌으며, 국가 공인(公認)의 절차인 사액(賜額)의 청원에 따라 사액을 내린 서원도 늘어나 숙종 때만 해도 130여 개소에 이르렀다. 초기의 서원은 인재를 키우고 선현·향현을 제사지내며 유교적 향촌 질서를 유지, 시정(時政)을 비판하는 사림(士林)의 공론(公論)을 형성하는 구실을 하는 등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하였으나 증설되어감에 따라 혈연(血緣)·지연(地緣)관계나 학벌(學閥)·사제(師弟)·당파(黨派) 관계 등과 연결되어 지방 양반층의 이익집단화(利益集團化)하는 경향을 띠게 되고 사액서원의 경우 부속된 토지는 면세되고, 노비는 면역되기 때문에 양민의 투탁(投託)을 유인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 때문에 서원은 양민이 원노(院奴)가 되어 군역(軍役)을 기피하는 곳이 되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군정(軍丁)의 부족을 초래하였고 불량유생의 협잡소굴이 되는가 하면 서원세력을 배경으로 수령(守令)을 좌우하는 등 작폐도 많았다. 또한 면세의 특권을 남용한 서원전(書院田)의 증가로 국고 수입을 감퇴시켰으며, 유생은 관학(官學)인 향교(鄕校)를 외면, 서원에 들어가 붕당(朋黨)에 가담하여 당쟁에 빠져 향교의 쇠퇴를 가속시켰다. 서원의 폐단에 대한 논란은 인조(仁祖) 이후 꾸준히 있었으나 특권 계급의 복잡한 이해 관계 때문에 손을 대지 못하고 1657년(효종 8) 서필원(徐必遠)은 서원의 폐단을 논하다가 파직되기도 하였다. 효종·숙종 때는 사액(賜額)에 대한 통제를 가하고 누설자(累設者)를 처벌하는 규정까지 두었으나 잦은 정권 교체로 오히려 증설되었다. 1738년(영조 14) 안동 김상헌(金尙憲)의 원향(院享)을 철폐한 것을 시발로 대대적인 서원 정비에 들어가 200여 개소를 철폐하였으나 그래도 700여 개소나 남아 있었으며 이 중 송시열(宋時烈)의 원향이 36개소나 되어 가장 많았고, 유명한 것으로는 도산서원(陶山書院)·송악서원(松嶽書院)·화양서원(華陽書院)·만동묘(萬東廟) 등이 있었다. 1864년(고종 1)에 집권한 대원군(大院君)은 서원에 대한 일체의 특권을 철폐하여, 서원의 설치를 엄금하고 그 이듬해 5월에는 대표적인 서원인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폐쇄한 이후 적극적으로 서원의 정비를 단행하여, 사표(師表)가 될 만한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한양. 자 효직(孝直). 호 정암(靜庵). 시호 문정(文正).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어천찰방(魚川察訪)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1510년(중종 5)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고, 다시 이조판서 안당(安d)의 천거로 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전적·감찰·정언·수찬·교리·전한 등을 역임하고 18년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것은 국왕 교육,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 질서의 개편, 사림파 등용, 훈구정치(勳舊政治) 개혁을 급격하게 추진하는 것이었다. 국왕 교육은 군주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에서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왕이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에 힘써 노력하여 정체(政體)를 세우고 교화를 행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앞 시기의 사화(士禍)와 같은 탄압을 피하기 위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할 것을 역설하였다. 성리학 이념의 전파를 위해서는 정몽주(鄭夢周)의 문묘종사(文廟從祀)와 김굉필·정여창(鄭汝昌)에 대한 관직 추증을 시행하였으며, 나아가 뒤의 두 사람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청하였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행하여 전국에 반포하게 한 것은 사림파가 주체가 되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18년에 천거를 통해 과거 급제자를 뽑는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주장하여 이듬해에는 천거로 올라온 120명을 대책(對策)으로 시험하여 28인을 선발하였는데 그 급제자는 주로 사림파 인물들이었다. 훈구정치를 극복하려는 정책들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추진되었다.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연산군 때에 좌의정을 지냈다는 이유로 반정(反正) 후에 폐위된 중종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반정공신들의 자의적인 조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도교 신앙의 제사를 집행하는 관서로서 성리학적 의례에 어긋나는 소격서(昭格署)를 미신으로 몰아 혁파한 것도 사상적인 문제인 동시에 훈구파 체제를 허물기 위한 노력이었다. 급기야 19년에는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부당한 녹훈자(錄勳者)가 있음을 비판하여 결국 105명의 공신 중 2등공신 이하 76명에 이르는 인원의 훈작(勳爵)을 삭제하였다. 이러한 정책 수행은 반정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 등에 의해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는 공격을 받았으며, 벌레가 ‘조광조가 왕이 될 것(走肖爲王)’이라는 문구를 파먹은 나뭇잎이 임금에게 바쳐지기도 하였다. 결국 사림파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의 지지를 업은 훈구파가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킴에 따라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그러나 후일 사림파의 승리에 따라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이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당에 제향되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덕(德)과 예(禮)로 다스리는 유학의 이상적 정치인 왕도(王道)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이었으며, “도학을 높이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고 지치(至治)를 일으킨다”는 진술로 압축한 바와 같이 도학정치의 구현인 지치라고 표현하였다. 동시에 그러한 이념은 사마시에 제출한 답안인 <춘부(春賦)>에 나타나듯이 자연질서 속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따뜻하고 강렬한 확신이 기초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학문과 경륜이 완숙되기 전에 정치에 뛰어들어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개혁을 추진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점은 후대 사림들에게 경계해야 할 점으로 평가되었다. 훈구파의 반격으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개혁은 한때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의 이념과 정책은 후대 선비들의 학문과 정치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조선 후기까지의 모든 사족(士族)은 그가 정몽주·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도통(道統)의 정맥(正脈)을 후대에 이어준 인물이라는 점에 정파를 초월하여 합의하고 추앙하였다. 그것은 학문의 전수 관계로 인한 것만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행하려 한 노력에 대한 경의였다. 문집에 《정암집》이 있다.

                                                               

 

향약(鄕約)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 시행주체·규모·지역 등에 따라 향규(鄕規)·일향약속(一鄕約束)·향립약조(鄕立約條)·향헌(鄕憲)·면약(面約)·동약(洞約)·동계(洞契)·동규(洞規)·촌약(村約)·촌계(村契)·이약(里約)·이사계(里社契)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렀다. 시행시기나 지역에 따라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유교적인 예속(禮俗)을 보급하고, 농민들을 향촌사회에 긴박시켜 토지로부터의 이탈을 막고 공동체적으로 결속시킴으로써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16세기에 농업 생산력의 증대, 이에 따른 상업의 발달 등 경제적 조건의 변화로 향촌사회가 동요하고, 훈구파의 향촌사회에 대한 수탈과 비리가 심화되었다. 이에 중종대에 정계에 진출한 조광조(趙光祖) 등의 사림파(士林派)는 훈척들의 지방통제 수단으로 이용되던 경재소(京在所)·유향소(留鄕所) 등의 철폐를 주장하고 그 대안으로서 향약의 보급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소농민경제의 안정을 바탕으로 한 중소지주층의 향촌 지배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일단 좌절되었으나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한 선조대에 와서 각 지방의 여건에 따라 서원(書院)이 중심이 되어 자연촌, 즉 이(里)를 단위로 시행하였다. 이 시기에 이황(李滉)·이이(李珥) 등에 의해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의 강령인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 잘못은 서로 바로잡아주며, 예속을 서로 권장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준다는 취지를 살려 조선의 실정에 맞는 향약이 마련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사족세력은 하층민들을 통제하고 사족 중심의 신분질서를 강화할 목적에서 양반신분의 상계(上契)와 상민신분의 하계(下契)를 합친 형태의 동약(洞約)을 만들었다. 보통 몇 개의 자연촌을 합친 규모로 운영되었으며, 목천동약(木川洞約)과 영조 때의 퇴계학파 최흥원(崔興遠)이 이황의 《예안향약(禮安鄕約)》을 증보하여 사용한 《부인동동약(夫仁洞洞約)》이 유명하다. 또한 1571년(선조 4) 이이는 《여씨향약》 및 《예안향약》을 근거로 《서원향약(西原鄕約)》과 이를 자신이 수정 증보하여 77년에  《해주향약(海州鄕約)》을 만들었는데, 이들 향약은 조선후기에 가장 널리 보급된 한국 향약으로서는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7세기 후반부터 유향(儒鄕)이 나누어져 사족의 영향력이 약화된 반면에, 면리제(面里制)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수령권(守令權)이 강화되어, 지방관이 주도하여 향약이 확산되어 갔다. 면을 단위로 하여 기존의 동계·촌계를 하부단위로 편입시켜 신분에 관계없이 지역주민 전부를 의무적으로 참여시켰다. 18세기 중엽 이후 재지사족을 매개로 하던 기존의 수취체제가 수령에 의한 향약의 하부구조로서 공동납체계 속에 포함되면서 그 성격이 변모되어갔고, 동계운영에 있어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하층민의 요구와 입장이 첨예하게 표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층민이 참여하기를 꺼리거나 하계안이 없어지는 현상이 일반화되어, 사족이 주도하는 동약에서의 운영권은 기층민간의 생활공동체로서의 촌계류(村契類) 조직과 마찰을 일으키고 점차 기층민의 입장이 반영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19세기 중 후반 서학(西學)·동학(東學) 등 주자학적 질서를 부정하는 새로운 사상이 등장함에 따라 향약의 조직은 위정척사운동에 활용되었다.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측에서 미풍양속이라는 미명 아래 식민통치에 활용하였다.

                                                       

 

사색 당파(四色黨派)

 

동인(東人)

조선 중기의 정파. 16세기 중엽, 선조 즉위 후 중앙 정계를 장악한 사림파(士林派)들 가운데서 후배 관인들을 중심으로 성립되어 주로 선배들로 구성된 서인(西人)에 맞섰다. 명칭은 후배측 입장에서 분파의 계기를 이룬 김효원(金孝元)의 집이 동쪽에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으며, 중심 구성원은 유성룡(柳成龍)·이산해(李山海)·이발(李潑)·우성전(禹性傳)·최영경(崔永慶) 등이었다. 대개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들로 구성되어 처음부터 학연적 성격이 짙었다. 특히 심성(心性)을 강조하면서 훈척정치(勳戚政治)와의 투쟁과정에서 사상적 지주로 형성되어온 이황의 학문이 사상적 중심이 되었던 만큼, 구체제의 요소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렬하고 훈구정치의 인물과 체제를 급격히 청산하려는 입장을 보였다. 그리하여 수뢰혐의에 대한 격렬한 비판 등의 방식으로 서인을 압박하였으나, 그러한 공세적 입장으로 인하여 오히려 시류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이 가담함으로써 순수성이 훼손되는 부작용도 겪었다. 1582년(선조 15) 이이(李珥)가 중재 노력을 포기하고 서인을 자처한 이후로 그들과의 사이에 굳어진 양당체제에서 명분과 실력면으로 우위를 점하였다. 89년 자파 인물인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수세에 몰렸으나, 2년 후 서인 지도자 정철(鄭澈)이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선조에 의해 축출되자 세력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그 전부터의 내부적 입장 차이가 이때 서인에 대한 공세를 둘러싸고 격화되어, 정철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주장하는 이산해·정인홍(鄭仁弘) 중심의 북인(北人)과 온건론을 주장하는 우성전·유성룡 등의 남인(南人)으로 분기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조식의 문인이고 후자는 이황의 문인이라는 학연적 성격을 가졌다. 남인과 북인으로의 분기 이후에는 단일 붕당으로서의 동질성(同質性)이 사라지고 모두 동인이라는 명칭도 의미를 잃었다.

 

서인(西人)

조선 중기의 정파. 15세기 말 이후 중앙에 진출하여 훈구파(勳舊派)의 심한 탄압을 이겨내고 16세기 중엽 선조 즉위 후 중앙정계를 장악한 사림파(士林派)들 가운데서, 훈구정치(勳舊政治)의 인물과 체제를 급격히 청산하려는 후배 관인들인 동인(東人)에 대립한 선배 세대들을 중심으로 성립되었다. 명칭은 분파의 중심 인물이었던 심의겸(沈義謙)의 집이 도성 안 서쪽에 있었던 데서 기인하였다. 초기에는 학문적 구심이나 확고한 중심인물이 없었지만, 중립적 입장에 서서 양파의 대립을 조정하려던 이이(李珥)가 동인 일부의 극단적인 주장에 그 노력을 포기하고 서인임을 자처하게 되자 그와 성혼(成渾)이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선조대 중반까지 적극적인 체제 개혁을 내세운 동인의 공격을 받는 수세적인 입장에 있다가, 1588년(선조 21) 모반을 기도했다는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계기로 정철(鄭澈)이 중심이 되어 동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정철이 국왕의 후계를 세우자고 건의한 것이 선조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곧 실세하였다. 그 후 정치의 주도권을 남인과 북인에게 넘겨준 상태에 있었으나, 광해군대 북인이 무리한 정책을 추진하면서 입지가 좁아지자 1623년에 무력을 동원하여 인조를 추대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하였다[仁祖反正]. 인조대에는 공신세력과 일반 사류들의 대립이 계속되어 통일된 정파적 입장을 가지고 정치를 운영하지는 못하였고, 효종 즉위 후에 공신세력을 축출함으로써 강력하게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김육(金堉)과 김집(金集)의 대립 등 그 내부에 정치적 입장의 차이는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그 후 현종대 왕실 상례(喪禮)문제 등을 쟁점으로 남인과 크게 대립하였고[禮訟] 숙종대에 들어가서도 계속되는 공방전에 진퇴를 거듭하였으나 1694년의 남인 축출로 권력을 확고히 함으로써 조선 후기까지 중앙권력은 대개 이들의 후계세력이 장악하였다. 숙종 초기에 이미 그 내부에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이 분파되었고,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蕩平策) 밑에서 정치세력과 명분의 재편이 이루어졌으므로, 한 정파로서 어느 정도 통일된 입장을 유지한 것은 숙종대가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다. 이황의 학문적 성과를 인정하고 이이와 성혼의 권위를 적극 내세웠으므로 그들을 성균관(成均館)의 공자 사당[文廟]에 모시려는 정책이 남인과의 대립에서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그 학통은 김장생(金長生)·김집·송시열(宋時烈) 등에게 이어졌고, 17세기에는 성리학의 이념을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 예론(禮論)의 정리를 과제로 하였다. 학문과 정치의 주제로 삼은 명(明)나라에 대한 사대나 왕실 상례 등이 공리공담(空理空談)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으나, 조선 후기에는 그것들 자체가 사회 주도이념으로서의 구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나아가 구성원들은 대동법(大同法)·호포제(戶布制)와 같은 구체적인 정책이나 농사 방법 등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남인(南人)

조선 중·후기 동인(東人)으로부터 북인(北人)과 함께 분파된 정파. 1588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이용하여 동인에 타격을 가한 서인에 대해, 절충적 입장을 지킨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을 중심으로 성립하여, 적극적인 서인 배격을 주장한 정인홍(鄭仁弘)·이발(李潑) 등의 북인과 맞섰다. 학맥으로 이황(李滉)의 제자와 지역적으로 경상좌도의 기반에서 성장한 사림이 중심이 되었다. 시비의 분별보다 정파간의 협동에 의한 정국의 안정에 중점을 두는 입장을 지녔으며, 임진왜란 중에 서인·북인 세력과 공존하면서 정국을 주도해 전란 극복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과의 싸움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 강력한 주전론의 비판을 받아, 전란 말기에 실세하였다. 광해군 때에는 북인의 독주에 대해 서인과 함께 비판적 입장을 취하다가, 인조를 추대한 서인의 정변(인조반정)을 인정하고 이원익(李元翼)·정경세(鄭經世)·장현광(張顯光) 등을 중심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이때는 몇몇 쟁점에서 서인과 대립하기도 하나, 그보다는 오히려 서인 일반과 손잡고 공신세력의 권력독점과 대청 강화책을 비판하는 양상이 두드러졌다. 대체로 공신과 서인세력에 눌려 열세를 면치 못하였으나 기호지역 출신인 허목(許穆)·허적(許積)과 북인의 후예인 윤휴(尹) 등이 크게 진출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이후 기호 출신과 영남 출신은 입장에 차이를 보이면서, 중앙 정치에서의 활동과 새로운 사상의 탐구에 기호남인이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왕실 상례를 둘러싼 논쟁[禮訟]에서 왕가의 특수성을 주장하여 상복 기간을 길게 잡는 이론으로 서인과 대립하던 중, 1674년의 2차 논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현종 말기와 숙종 초년의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680년의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대거 숙청되고, 9년 뒤 정국을 뒤집었으나, 다시 5년 만에 서인에 밀려 실세하였다. 그 뒤로는 영조·정조대의 탕평책 아래에서 오광운(吳光運)·채제공(蔡濟恭) 등을 중심으로 큰 역할을 한 적도 있으나, 서인·노론이 주도하는 정치판도를 뒤집지는 못하다가 정조가 죽은 뒤 중앙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대체로 국왕권의 강화와 소농민의 안정을 추구하는 입장을 지키면서, 국왕보다 사족(士族)의 정치 주도권을 강조하는 서인과 이념적으로 대조되었다. 특히 17세기 이후로는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정약용(丁若鏞)으로 대표되는 실학파의 한 흐름을 배출하였다. 이들의 업적에는 광범위한 개혁론이 포함되는데, 거기에는 실세한 시기가 많은 데서 기인한 강렬한 현실비판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익이 화폐 유통을 반대한 것, 적서차별 철폐에 대한 소극적 입장, 신분제 극복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 것 등에서 드러나듯이 복고적인 입장도 강하게 나타난다. 한편, 새로운 사상에 대한 탐구는 천주교(天主敎)를 수용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북인(北人)

조선 중기의 정파. 16세기 후반에 성립된 동인으로부터 남인과 함께 분파되었다. 1588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이용하여 동인을 숙청하였다가 곧 실세한 서인에 대해, 정인홍(鄭仁弘)·이발(李潑) 등을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배격과 유성룡(柳成龍) 등의 공존의 입장이 대립하였고 이들이 각기 북인과 남인으로 분기하게 되었다. 학통상으로는 동인이 이황(李滉)과 조식(曺植) 및 서경덕(徐敬德)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있던 중 이황의 제자들이 주로 남인이 된 데 비해 북인은 조식 및 서경덕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주전론(主戰論)을 펼친 명분을 바탕으로 연소한 신진들의 지지를 모아 전란 후 정국을 주도하였지만, 전란 후유증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현실 정치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바탕으로 대북(大北) 대 소북(小北), 대북내에서의 골북(骨北)·육북(肉北) 등으로 분파가 계속되었다. 여기에는 서인과 남인에 비해 복잡한 학통도 한 원인이 되었다. 몇 차례의 부침을 겪은 끝에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이이첨(李爾瞻)을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의 피해를 극복하는 데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학통상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정인홍이 시도한 이언적(李彦迪)과 이황 배격[晦退辨斥]이 실패로 돌아간 후, 선조의 적자(嫡子)이자 국왕의 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선조비(宣祖妃)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축출하려는 정책을 펴면서 서인과 남인을 크게 배격하였다. 그것이 결국 자기 입지를 더욱 좁히는 결과로, 무력을 동원한 서인의 광해군 축출[仁祖反正]로 정계에서 숙청되었다. 그 후 남이공(南以恭)·정온(鄭蘊) 등이 인조대 정치에 참여하였으나 정파로서의 의미는 소멸되었고 일부 인물들은 남인과 행동을 함께하였다. 사상은, 정통 주자성리학과 거리를 둔, 조식을 스승으로 하였던 데 나타나듯이, 서인 및 남인과 어느 정도 다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었으나, 명(明)이 후금(後金)과의 싸움에 군대를 동원하라고 요구하였을 때에는 광해군과는 달리 대개 출병에 찬성하는 등 사대 명분론 등에서는 다른 사림들과 입장을 함께하였다.

                                                             

 

예학(禮學)

 

예(禮)의 본질과 의의, 내용의 옳고 그름을 탐구하는 유학(儒學)의 한 분야. 본래 중국 고대의 종교적 제사의식(祭祀儀式)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예는 주대(周代)에 와서 인간행위의 규범이자 사회질서의 근간으로 정형화되면서 고대문화 전반을 의미하였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유학을 창시한 공자(孔子)는 바로 이러한 예에 정통했던 인물로 예치(禮治)를 행함으로써 당시 혼란했던 사회를 바로 잡으려고 하였으며, 예의 형식뿐만 아니라 본질을 강조하였다. 공자에 의해 이론적 기반이 마련되었던 예는 전국시대(戰國時代) 말 순자(荀子)에 의해 적극적으로 계승되었다. 그는 예를 인간이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보편적 이치(理致)로 보았으며, 그 객관적 사회성을 강조하여 사회 전체의 틀 또는 규범적 지침으로까지 확대하여 규정하였다. 한대(漢代)에 이르러 유학이 공식적인 국가이념으로 정착되면서 편찬되었던 삼례(三禮), 즉 《예기(禮記)》 《주례(周禮)》 《의례(儀禮)》는 주로 순자가 예에 관하여 내린 해석을 바탕으로 그때까지 전승되어 온 예에 관한 이론과 시행내용을 종합한 것이었는데, 이는 곧 예학의 성립을 의미하였다. 이후 한대와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금문학파(今文學派)와 고문학파(古文學派)의 논쟁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예학은 당시 사상계·정치계와 밀접한 연관을 맺으면서 예의 적용을 둘러싼 논의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남북조시대와 당대(唐代)를 거치면서 예는 국가·왕실의 예인 오례(五禮)와 사가(私家)의 예인 가례(家禮)로 분화하였으며, 송대(宋代)에 성리학(性理學)이 성립되고 주자(朱子)에 의해 《주자가례》가 저술되면서 가례의 비중이 점점 커져갔다. 주자는 예를 ‘천리가 절도에 맞게 드러난 것이요, 인간사에 본받아야 할 규범(天理之節文 人事之儀則)’이라고 정의하여 성리학의 철학적 기반인 이기론(理氣論)과 예의 본질을 연관지어 설명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처럼 예학은 예의 이론[禮論]과 예의 견해[禮說]를 중심으로 전개 발전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 예가 언제 전래되었는가는 확실하지 않으나 《예기》가 국학(國學)의 교수과목인 것으로 보아 이미 삼국시대부터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가 본격적으로 수용된 것은 고려 말에 《주자가례》가 도입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성리학이 지배이념으로 되면서부터였다. 그리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추구하였던 전기에는 제도적 성격이 강한 《주례》와 왕실의 예인 오례가 강조되었으며, 성종대(成宗代)에 이를 집대성한 《국조오례(國朝五禮)》가 편찬되기도 하였다. 사림(士林)이 등장하는 중기에 오면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고 국조오례의파(國朝五禮儀派)와 고례파(古禮派)의 대립으로 상징되는 여러 차례의 전례논쟁(典禮論爭)을 거치면서 예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김장생(金長生)의 《가례집람(家禮輯覽)》과 정구(鄭逑)의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 등 수준 높은 예서(禮書)들이 많이 저술되었으며, 학파에 따라 예론이나 예설에서 차이를 보이기도 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차이는 17세기 예송(禮訟)에서 《주자가례》 《의례》 등을 중시하며 왕례(王禮)와 사례(士禮)의 동일성을 강조하는 왕사동례(王士同禮)와 《예기》 《주례》 등을 중시하며 왕례와 사례의 차이를 강조하는 왕사부동례(王士不同禮)로 나타났다. 예송(禮訟)에서의 사상적 차이는 중세 사회체제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연결되었으며, 때문에 예송은 조선 후기사회로 가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만 했던 하나의 과정이었다. 후기에는 왕권이 강화되면서 국가가 왕실의 예를 다시 정리하고 향례(鄕禮)를 장악하려는 모습이 나타났지만, 그 사회적 비중은 상당히 줄어들고 그나마 세도정치기(勢道政治期)에는 정약용(丁若鏞) 등 몇몇 학자들에 의해 《주례》가 다시 주목을 받았을 뿐 거의 형해화(形骸化)되어 버렸다. 이처럼 예학은 시기에 따라 긍정적 또는 부정적 영향을 끼쳐왔다. 따라서 우리 역사에 예학이 가지는 위치와 영향에 대해서는 시기별로 좀더 세밀한 평가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

 

조선 후기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된, 인간과 동식물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에 대한 이론. 같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이고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이다. 조선조 중기까지의 성리학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된 것은 하늘과 사람의 관계였다. 그 결과 사람의 삶의 바탕이 되는 하늘의 이치를 근거로 하여 하늘과 사람이 본래 하나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는데, 이러한 논리에서 보면 동물이나 식물의 삶도 본질적으로 하늘의 이치를 바탕으로 하므로 역시 하늘과 하나라는 사실이 성립된다. 이러한 이론이 성립되면 관심의 대상이 저절로 사람과 동식물의 관계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 조선조 후기에 인물성동이론이 활발하게 전개된 까닭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성리학에서는 원래 인간의 본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이에 따르면, 본연지성의 입장에서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존재가 되지만 기질지성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각각 기질에 따라서 구별되는 존재로 파악된다. 그런데 이때 의문이 일어나는 것은 본연지성의 입장에서 볼 때 동물이나 식물까지도 모두 동일한 존재가 되는가 어떤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의문은 주로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제기되었다. 1678년(숙종 4) 권상유(權尙游)가 주희의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에 있는 “혼연한 태극의 전체가 모든 물체에 각기 갖추어져 있지 않음이 없다”는 말에 의심을 품고 그의 형 권상하(權尙夏)에게 질문하였을 때, 권상하는 “이(理)를 말하면 온전하지 않음이 없으나 성(性)을 말하면 편벽된 것과 온전한 것이 있다”고 답하였다. 이로부터 권상하의 문하에 인물성동이론에 관한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의 논쟁을 출신지역에 따라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고도 한다. 이간은 사람과 동물이 다르고 사람들 상호간에도 서로 다른 것은 기질의 차이 때문이므로 본연지성의 입장에서는 모두 같다고 파악함으로써 인물성동이론을 주장하였다. 이에 비하여 한원진은, 본연지성을 주장하는 근거는 성즉리설(性卽理說)인데, 성즉리란 성즉리지재기(性卽理之在氣)의 줄임말로 볼 수 있으므로 본연지성이라 하더라도 실제로는 기(氣)에 내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고 파악함으로써 기질지성의 실재성을 부각시키고 이를 근거로 해서 인물성이론을 주장하였다.

                                                        

 

실학(實學)

 

조선 후기인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 이학(理學:성리학)과 예학(禮學)으로 대표된 당시의 전통유학에서 벗어나고자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 유학의 한 분파의 학문 및 사상. 이 실학은 첫째 전근대의식에 대립되는 근대의식 및 근대지향의식, 둘째 몰민족의식에 대립되는 민족의식을 척도로 하여 재구성된 조선 후기 유학의 개신적(改新的) 사상으로서, 조선 후기에 일어난 개신유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그 두 척도는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민족의 존립 번영을 전제로 한 근대지향, 근대지향을 전제로 한 민족의 존립 번영이라는 일체(一體)의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실학은 근대지향의식과 민족의식 두 척도를 아울러 충족시키는 경우가 전형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관례로 보면 민족의식의 면에서는 뚜렷한 것이 없더라도 근대지향의식에 뚜렷한 특징이 있는 경우에는 이를 실학에 포함시켜 온 일이 많다. 조선 후기에 있어 근대지향의식이란 매우 선각적인 것일 뿐더러 당시의 상황으로는 후일의 일부 계열과 같이 반민족적인 근대지향이 될 여지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반대로 근대지향의식 면에서는 뚜렷한 것이 없으면서 민족의식 면에 뚜렷한 특징이 있는 경우는 반드시 실학에 포함시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민족의식은 민족의 형성 이래 수시로 발현된 것으로서 실학계만이 전유(專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근대적 혹은 근대지향적이라 함은 물론 서양 근대의 여러 특징적인 양상을 모델로 하고 지칭하는 것인데, 그 중에도 사농공상(士農工商)을 일체로 하는 새로운 ‘국민’의 개념, 이 사상적 기반 위의 새로운 국민국가관 등 그것을 서양 국민주의와의 비교에 역점을 두고 살펴보는 견해가 두드러진다. 또 민족의식 면에서의 특징으로는 첫째로 중국 중심의 화(華)·이(夷) 사상을 암암리에 전제로 한 국제질서를 탈피하고 한민족(韓民族) 중심의 자각을 드러낸 경우, 둘째 그러한 민족의 자각이 단지 민족감정으로 끝나지 않고 역사·지리·언어·군사 등에 걸쳐 민족에 초점을 둔 지식체계의 형성으로 나타난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실학이라는 새 개념의 형성과정】본래 실학이라는 용어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유학의 본령에 충실한 학풍(學風)’을 뜻하는 것으로서 시대에 따라 수기와 치인의 중점이 달랐다. 조선 후기의 실학파 제유(諸儒)도 그들 자신의 학문을 실학으로 자처한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말의 원의(原義)가 그러하더라도 그것을 ‘이학(理學) 편중에서 탈피한 개신유학’ 혹은 ‘민족의식과 근대지향의식에 충실한 개신유학’이라는 뜻으로 전용하여 그것이 일반에 통용되는 한 괴이한 것은 아니며, 이와 같은 전의(轉義)는 이미 1930년대 이래 수십 년 간 대체로 순조롭게 일반에게 받아들여져 왔다. 조선 후기 실학이 근대지향의식과 민족의식의 두 척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조선 후기 실학이라는 개념의 형성과정에서 입증된다. 1870년대는 조선 후기 실학의 최종단계에 해당하며, 이때에 이미 실학파 제유는 서양 근대문명을 배경으로 한 외세의 충격을 실감하고 있었다. 1880년대와 1900년대에는 외세의 충격에 직면하여 근대지향의식과 민족의식의 복합으로서의 사상적인 대응이 요구되었다. 개화(開化)·자강(自强) 사상이 그 대표적인 것이며, 그들의 상당수는 조선 후기 실학사상과 인적(人的) 및 사상적 맥락을 가졌었고, 또 실사구시(實事求是)·이용후생(利用厚生) 등 실학파가 즐겨 표방하던 것을 이어받았다. 또 뒤에는 실용의 학문으로서의 실학이 민중 가운데에 고취되었다. 1910년대와 20년대에는 외세의 충격에 대처하는 현실적 방안으로서라기보다도 사상사적(思想史的) 대상으로서 조선 후기 실학이 주목되었다. 민족의식과 거기서 연유한 근대지향의식은 일본의 지배하에서 더욱 당연한 현실의 요구였으나, 조선 후기 실학은 현실타개의 방안으로는 벌써 뒤늦은 것이었고, 다만 민족적 주체성에 입각한 역사적 근거로서 그것이 재평가되어야 할 단계였던 것이다. 30년에는 실학이라는 말의 새 개념, 즉 오늘날 통용되는 개념이 정립되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조선학(朝鮮學)이라는 개념의 모색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면서 동시대에 이루어졌으며, 한편으로 그 실학을 서양근대사상과 대비하여 이것을 근대사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가 전개되었다.

【유학의 전개형태로서의 실학】 유학은 크게 보아 ① 의리지학(義理之學:철학), ② 고거지학(考據之學) 혹은 고증지학(考證之學:문헌비판적 고전학), ③ 사장지학(詞章之學)혹은 사장지학(辭章之學:문학), ④ 경세지학(經世之學) 혹은 경제지학(經濟之學:법정·경제·군사 등의 정책론 및 그 사상·역사·지리 등도 포함될 수 있다) 등을 포괄하는 지식체계이며, 또 유학은 시대를 따라 인물을 따라 각기 특징을 달리하는 여러 유형을 보여왔다. 유학의 의리학적 측면은 주자학(朱子學)이나 양명학(陽明學)이나 서양의 충격에 대처할 만큼 근대적인 것으로 발전하지 못하였고 그것은 현재도 유학이 계속 추구하는 과제이니 만큼 유학의 전통적인 의리학에서는 근대지향적인 요소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민족의식에서는 주자학도 양명학도 의리의 실천으로써 그 본령을 발휘한 예가 많다. 조선 후기 실학과 제유의 의리학에 대한 태도는 회의적인 것이 많고, 의리학 특히 주자학이 독점하다시피한 사상계에 대하여 비판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 주목된다. 유학의 고증학적 측면은 유학의 의리·사상·경세 등 다른 부문과 같은 연구대상상(硏究對象上) 구분이라기보다 연구방법상의 문제였다. 그 엄밀한 실증적·귀납적인 방벙은 근대적이라 할만한 것이었으나 대개는 학문을 위한 학문에 그쳐, 그 주대상인 경학(經學)도 유학의 사상내용을 확대하는 데로 끌어가지 못하였으며, 그 밖의 대상에서도 사회과학으로는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자연과학에 이르러는 별다른 관심을 표시하지 않아 사상적인 근대지향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또 고증학은 비정치적인 것으로 시종하여 민족의식과도 거리가 먼 것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과 제유 가운데에는 이 고증학에도 힘을 기울인 예가 많았으며 넓은 의미의 실증적인 연구가 성행하였다. 또한 유학의 사장학적 측면은 오늘날의 학이라는 개념으로 보기는 어려우나 유학의 체계에서는 중요한 일부로 간주되어 왔다. 조선 후기 실학과 제유의 문학작품 가운데에는 근대지향적인 관점, 민족적인 관점에서 가장 실학정신을 담은 것이 많다. 유학의 경세학적 측면은 근대지향적인 관점에서나 민족적인 관점에서나 가장 실학적인 요소가 담길 수 있는 분야이며 또한 조선 후기 실학의 핵심적인 부분은 역시 현실문제에 직결되는 이 경세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학의 체계에서는 정확하게 그 위치를 부여하기 어려우면서 조선 후기 실학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에 자연과학(自然科學) 및 기술(技術)이 있다. 근대지향적인 요소를 찾아볼 가능성은 여기에도 많이 내포되어 있다.

【실학파】 조선 후기 실학파에 속하는 대표적 인물은 다음과 같다. ① 제1기:한백겸(韓百謙:1551∼1615)·류몽인(柳夢寅:1559~1623)·이수광(李光:1563~1628)·허균(許筠:1568~1618). ② 제2기:유형원(柳馨遠:1622~73)·박세당(朴世堂:1629~1703)·김만중(金萬重:1637~92)·정제두(鄭齊斗:1649~1736)·이이명(李命:1658~1722)·정상기(鄭尙驥:1678~1752)·이익(李瀷:1681~1763)·이중환(李重煥:1690~1760)·유수원(柳壽垣:1694~1755)·정항령(鄭恒齡:1700~?)·신후담(愼後聃:1702~61)·안정복(安鼎福:1712~91)·신경준(申景濬:1712~81)·위백규(魏伯珪:1712~98)·홍대용(洪大容:1731~91)·이긍익(李肯翊:1736~1806)·이만운(李萬運:1736~?)·박지원(朴趾源:1737~1805)·이덕무(李德懋:1741~93)·우하영(禹夏永:1741~1812)·유득공(柳得恭:1749~?)·박제가(朴齊家:1750~?)·성해응(成海應:1760~1839)·정약용(丁若鏞:1762~1836)·한치윤(韓致奫:1765~1814)·유희(柳僖:1773~1837)·③제3기:김정희(金正喜:1786~1856)·이규경(李圭景:1788~?)·김정호(金正浩:?~1864)·최한기(崔漢綺:1803~1879)·이제마(李濟馬:1836~1900) 등이 흔히 손꼽혀 왔으며 시기별로는 유형원·이익·정약용이 각각 한 시대를 대표한다는 견해도 있다. 또 그 주장의 내용과 시대를 아울러 고려하여 ① 이익을 대종(大宗)으로 하는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토지제도 및 행정기구 기타 제도상의 개혁에 치중하는 학파, ② 박지원을 중심으로 하는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상공업의 유통 및 생산 기구 일반 기술면의 혁신을 지표로 하는 학파, ③ 김정희에 이르러 일가를 이루게 된 실사구시파(實事求是派):경서 및 금석(金石)·전고(典故)의 고증을 위주로 하는 학파로, 정약용을 이 3개 유파의 집대성자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유형원(柳馨遠, 1622∼1673)

 

조선 중기의 실학자. 본관 문화(文化). 자 덕부(德夫). 호 반계(磻溪). 서울 출생. 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5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7세에 《서경(書經)》 <우공기주편(禹貢冀州編)>을 읽고 매우 감탄하였다고 한다. 외숙 이원진(李元鎭)과 고모부 김세렴(金世濂)에게 사사하였고, 문장에 뛰어나서 21세에 《백경사잠(百警四箴)》을 지었다. 23세 때 할머니 상(喪)을 당하고, 27세에 어머니 상, 30세 때 할아버지 상을 당하여 전후 9년간 상복을 입었으며, 지평(砥平)·여주(驪州) 등지로 옮겨 살았다. 이러한 환경변화는 사상과 생활 태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653년(효종 4) 부안현 우반동(愚磻洞)에 정착하였다. 이듬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전심하면서 수차 전국을 유람하였다. 65·66년 두 차례에 걸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농촌에서 농민을 지도하는 한편, 구휼(救恤)을 위하여 양곡을 비치하게 하고, 큰 배 4,5척과 마필(馬匹) 등을 비치하여 구급(救急)에 대비하게 하였다. 학문은 성리학·역사·지리·병법·음운(音韻)·선술(仙術)·문학 등에 두루 미쳤다. 당시 조선왕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피폐된 국력을 회복하기 위한 처방이 필요하였다. 이에 저서 《반계수록(磻溪隨錄)》을 통하여 전반적인 제도개편을 구상하였다. 중농사상에 입각하여 토지 겸병(兼倂)을 억제하고 토지를 균등하게 배분할 수 있도록 전제(田制)를 개편, 세제·녹봉제(祿俸制)의 확립, 과거제의 폐지와 천거제의 실시, 신분·직업의 세습제 탈피와 기회균등의 구현, 관제·학제의 전면 개편 등을 주장하였다. 뒷날 이익(李瀷)·홍대용(洪大容)·정약용(丁若鏞) 등에게 이어져 실학(實學)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하였으나, 정책으로는 채택되지 못하였다. 다만 학문적 가치가 인정되어, 1770년(영조 46) 영조의 명으로 《반계수록》 26권이 간행되었다. 실학을 최초로 체계화하였으며, 이 밖에 20여 종의 저서와 문집을 남겼으나 남아 있지 않고, 위의 《반계수록》과 《군현제(郡縣制)》 1권이 전할 뿐이다. 호조참의(戶曹參議)·찬선(贊善)에 추증되었고, 부안 동림서원(東林書院)에 제향되었다.

                                                                  

 

박세당(朴世堂, 1629∼1703)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반남. 자 계긍(季肯). 호 서계(西溪)·잠수(潛). 시호 문정(文貞). 참판 정(炡)의 아들.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장원, 64년 부수찬(副修撰)으로 황해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67년 수찬에 이어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장형(杖刑)을 받았다. 그 해 동지사서장관(冬至使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예조참의 등을 지낸 뒤, 94년 갑술옥사에 소론이 득세하자 승지로 특진하였다. 이어서 공조판서를 거쳐 이조·형조의 판서를 지냈다. 1703년 중추부판사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사변록(思辨錄)》을 저술, 주자학을 비판하고 독자적 견해를 발표하였다. 이에 반주자(反朱子)로서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이 찍혀 삭직, 유배 도중 옥과(玉果)에서 죽었다. 사직(司直) 이인엽(李寅燁)의 상소로 신원되었다. 이중환(李重煥)·안정복(安鼎福) 등보다 앞선 시대의 실학파 학자로서, 농촌생활에 토대를 둔 박물학(博物學)의 학풍을 이룩하였으며, 글씨도 잘썼다. 저서로 《사변록》 외에 《색경(穡經)》 《서계집》 등이 있다.

                                                                   

 

이익(李瀷, 1681∼1763)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여주(驪州). 자 자신(子新). 호 성호(星湖). 1705년(숙종 3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응시, 낙방하였다. 이듬해 형 잠(潛)이 장희빈(張禧嬪)을 두둔하다가 당쟁의 제물로 장살(杖殺)되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낙향,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처음 성리학(性理學)에서 출발하였으나 차차 이이(李珥)·유형원(柳馨遠)의 학문에 심취하였는데, 특히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천문·지리·율산(律算)·의학(醫學)에 이르기까지 능통하였으며, 서학(西學)에도 관심을 가졌다. 투철한 주체의식과 비판정신을 토대로 그의 주요저서인 《성호사설(星湖僿說)》과 《곽우록(藿憂錄)》을 통해 당시의 사회제도를 실증적으로 분석·비판하여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였다. 중농사상(重農思想)에 입각하여 전제(田制)개혁의 방향을 개인의 토지점유를 제한하여 전주(田主)의 몰락을 방지하려는 한전론(限田論)에서 찾았으며, 노비신분을 점차적으로 해방시킬 것 등을 주장하는 한편 당쟁의 발생은 이해(利害)의 상반에서 오는 것이라고 분석, 양반도 산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사농합일(士農合一)이론을 주장하였다. 인재등용에 대해서는 과거제도에만 의존하지 말고 공거제(貢擧制)를 아울러 실시할 것 등도 제시하였다. 27년(영조 3)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63년 83세의 고령에 이르자 나라에서는 우로예전(優老例典)에 따라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로 승자(陞資)의 은전을 베풀었으나 그 해에 죽었다.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그의 학문은 직계 후학들에 의하여 계승·발전되었다. 초서(草書)에 능했으며 저서에는 앞에 든 것 외에도 《성호집(星湖集)》 《이선생예설(李先生禮說)》 《사서삼경》 《근사록(近史錄)》 등이 있고, 편저에 《사칠신편(四七新編)》 《상위전후록(喪威前後錄)》 《자복편(自卜編)》 《관물편(觀物編)》 《백언해(百諺解)》 등이 있다.

                                                                   

 

홍대용(洪大容, 1731∼1783)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 남양(南陽). 자 덕보(德保). 호 담헌(湛軒)·홍지(弘之). 북학파(北學派)의 학자인 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학풍은 유학(儒學)보다도 군국(軍國)·경제(經濟)에 전심하였다. 1765년(영조 41) 숙부인 억(檍)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군관(軍官)으로 수행, 베이징[北京]에서 엄성(嚴誠)·반정균(潘庭筠)·육비(陸飛) 등과 사귀어 경의(經義)·성리(性理)·역사·풍속 등에 대하여 토론했다. 또 천주당(天主堂)에 가서 서양 문물을 견학하고 독일 사람인 흠천감정(欽天監正) 할레르슈타인[劉松齡], 부감(副監) 고가이슬[鮑友管]과 면담했으며, 관상대(觀象臺)를 견학하여 천문(天文)지식을 넓혔다. 귀국 후 수차 과거에 실패하고 75년 음보로 선공감(繕工監) 감역이 되었다. 그 후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감찰·태인(泰仁)현감 등을 거쳐 80년(정조 4) 영주(榮州)군수가 되었다. 북학파의 선구자로 지구(地球)의 자전설(自轉說)을 설파하였고, 균전제(均田制)·부병제(府兵制)를 토대로 하는 경제정책의 개혁, 과거제도를 폐지하여 공거제(貢擧制)에 의한 인재 등용, 신분의 차이없이 8세 이상의 모든 아동에게 교육시켜야 한다는 혁신적인 개혁사상을 제창하였다. 저서에 《담헌설총(湛軒說叢)》이 있고, 편서(編書)에 《건정필담(乾淨筆談)》 《주해수용(籌解需用)》 《담헌연기(湛軒燕記)》 《임하경륜(林下經綸)》 《사서문의(四書問疑)》 《항전척독(抗傳尺牘)》 《삼경문변(三經問辨)》 등이 있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조선 후기의 실학자·소설가. 본관 반남(潘南). 자 중미(仲美). 호 연암(燕巖).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를 지낸 조부 슬하에서 자라다가 16세에 조부가 죽자 결혼, 처숙(妻叔) 이군문(李君文)에게 수학, 학문 전반을 연구하다가 30세부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과 사귀고 서양의 신학문에 접하였다. 1777년(정조 1) 권신 홍국영(洪國榮)에 의해 벽파(僻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사, 독서에 전념하다가 80년(정조 4) 친족형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 랴오둥[遼東]·러허[熱河]·베이징[北京] 등지를 지나는 동안 특히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도움이 되는 청나라의 실제적인 생활과 기술을 눈여겨 보고 귀국,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하여 청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당시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과 개혁을 논하였다. 86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89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이듬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제릉령(齊陵令), 91년(정조 15)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역임한 뒤 사퇴했다가 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었다. 이듬해 왕명을 받아 농서(農書) 2권을 찬진(撰進)하고 1800년(순조 즉위) 양양부사(襄陽府使)에 승진,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당시 홍대용·박제가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이른바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漢文小說)을 발표, 당시의 양반계층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이 그의 제자들이며 정경대부(正卿大夫)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연암집(燕巖集)》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등이 있고, 작품에 《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 《마장전(馬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민옹전(閔翁傳)》 《양반전(兩班傳)》 등이 있다.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 밀양(密陽). 자 차수(次修)·재선(在先)·수기(修其). 호 초정(楚亭)·정유(貞)·위항도인(葦杭道人). 19세 때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 1776년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과 합작한 시집 《건연집(巾衍集)》이 청나라에 소개되어 조선 시문 사대가(詩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78년(정조 2)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筠) 등에게 새 학문을 배우고 귀국하여 《북학의(北學議)》 <내외편(內外篇)>을 저술, 이듬해 정조의 특명으로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이 되어 많은 서적을 편찬하고, 그 뒤 진하사(進賀使)·동지사(冬至使)를 수행, 두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94년 춘당대(春塘臺) 무과에 장원하여 오위장(五衛將)에 오르고, 이듬해 영평현감(永平縣監)으로 나갔다. 98년 《북학의》 진소본(進疏本)을 작성하고, 1801년(순조 1) 사은사를 수행, 네 번째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동남성문(東南城門)의 흉서사건(凶書事件)에 사돈 윤가기(尹可基)가 주모자로 지목되어 연좌로 종성(鐘城)에 유배되었다가 4년 만에 풀려났다. 저서에 《명농초고(明農草藁)》 《정유시고(貞詩稿)》 《유정집(亭集)》이 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본관 나주(羅州). 자 미용(美鏞)·송보(頌甫). 초자 귀농(歸農). 호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자하도인(紫霞道人)·탁옹(翁)·태수(苔)·문암일인(門巖逸人)·철마산초(鐵馬山樵). 가톨릭 세례명 요안. 시호 문도(文度). 광주(廣州) 출생. 1776년(정조 즉위)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李家煥) 및 이승훈(李昇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經義進土)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84년 이벽(李蘗)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功西派)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副司直)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장기(長?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 그 곳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규장각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모시강의(毛詩講義)》 《매씨서평(梅氏書平)》 《상서고훈(尙書古訓)》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상례사전(喪禮四箋)》 《사례가식(四禮家式)》 《악서고존(樂書孤存)》 《주역심전(周易心箋)》 《역학제언(易學諸言)》 《춘추고징(春秋考徵)》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맹자요의(孟子要義)》 등이 실려 있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조선 후기의 서화가·문신·문인·금석학자. 본관 경주. 자 원춘(元春). 호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예산 출생.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충청우도암행어사·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24세 때 연경(燕京)에 가서 당대의 거유(巨儒) 완원(阮元)·옹방강(翁方綱)·조강(曹江) 등과 교유, 경학(經學)·금석학(金石學)·서화(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예술은 시·서·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淸)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다. 40년(헌종 6)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48년 풀려나왔고, 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는 함흥 황초령(黃草嶺)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를 고석(考釋)하고, 16년에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조선 건국시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이며, ‘진흥’이란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 것임을 밝혔다. 또한 《실사구시설》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안됨을 주장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베이징[北京]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 권과 불상 등을 가져와서 마곡사(麻谷寺)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70세에는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先考墓)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광주(廣州) 봉은사(奉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세상을 떴다. 문집에 《완당집(阮堂集)》, 저서에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완당척독(阮堂尺牘)》 등이 있고, 작품에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 등이 있다.

                                                              

 

최한기(崔漢綺, 1803∼1875)

 

조선 후기의 실학자·과학사상가. 본관 삭녕(朔寧). 자 운로(芸老). 호 혜강(惠崗)·패동(浿東)·명남루(明南樓)·기화당(氣和堂). 1825년(순조 25) 사마시(司馬試) 급제 후 학문에 전념하다가 72년(고종 9) 아들 병대(柄大)가 고종의 시종이 되자,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를 지냈다. 지리학자 김정호(金正浩)와 교분이 두터웠으며, 수많은 저작을 통해 경험주의적 인식론(認識論)을 확립하여 일체의 선험적(先驗的) 이론이나 학설을 배격하고 사물을 수학적·실증적으로 파악할 것을 주장, 한국 사상사에 근대적 합리주의를 싹트게 했다. 이런 기초 위에서 진보적 역사관을 수립하고 현실문제를 비판, 과감한 개혁을 부르짖었으며, 외국과의 대등한 교류를 주장하는 등 실학파 학자들의 전통을 계승하여, 뒤이어 등장하는 개화사상가들의 선구가 되었다. 이러한 사상들은 외국에서 높이 평가되어 그의 주저들이 중국에서 간행·소개되었으나, 한국 학계에서는 최근에야 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천문·지리·농학·의학·수학 등 학문 전반에 박학하여 1,0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현재는 15종 80여 권만이 남아 있다. 저서에 《농정회요(農政會要)》 《육해법(陸海法)》 《청구도제(靑丘圖題)》 《만국경위지구도(萬國經緯地球圖)》 《추측록(推測錄)》 《강관론(講官論)》 《신기통(神氣通)》 《기측체의(氣測體義)》 《감평(鑑平)》 《의상리수(儀象理數)》 《심기도설(心器圖說)》 《소차유찬(疏箚類纂)》 《습산진벌(習算津筏)》 《우주책(宇宙策)》 《지구전요(地球典要)》 《인정(人政)》 《명남루집(明南樓集)》 등이 있다.

                                                                

 

위정척사(衛正斥邪)

 

조선 후기 유교적인 질서를 보존하고 외국세력 및 문물의 침투를 배척한 논리 및 운동. 문호개방 이후 개화사상이 고조되고 정부의 개화정책이 외세의 침투에 주체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어 주로 성리학을 신봉하는 보수적인 유생들이 주도해 나갔는데, 그 논리 및 운동은 외세의 침투상황에 따라 단계적으로 전개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에는 이항로(李恒老)·기정진(奇正鎭) 등이 서양세력의 침범은 국가 존망의 위기를 조성한다고 주장하면서 서양문물을 배척하고 통상에 반대하였다. 76년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뒤에는 최익현(崔益鉉)이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내세워 개항에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고, 척사의 대상이 일본으로 확대되었다. 81년(고종 18) 김굉집(金宏集)이 일본에서 들여온 《조선책략(朝鮮策略)》을 보급시키면서 각 지방의 유생들이 격렬히 비판하는 상소를 하였고, 정부의 개화정책을 반대하는 정치적 움직임으로 확대되어 개화와 보수 두 세력의 대립과 갈등이 빚어졌다. 그뒤 통상무역이 전개되고 미곡수출이 진전되면서 농민층의 몰락이 가속화되자, 농민몰락과 관련된 여러 원인들을 제시하고 그 안정책을 건의하였다. 1894~95년 갑오·을미 개혁을 계기로 개화파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개화망국론(開化亡國論)을 펴고, 개화파 정부와 일본세력에 대하여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군주의 결단에 호소하고 정부에 건의하는 상소운동의 한계를 깨달으면서 일부는 항일의병전쟁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주체적인 근대화를 위한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정치체제와 사회·경제 질서를 그대로 유지시키려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는 점에서 전근대적인 성격이 강하였으나, 국내의 현실적인 정치·사회 문제의 개선 및 개혁을 포괄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동학(東學)

 

1860년(철종 11) 경주(慶州) 사람 최제우(崔濟愚)에 의하여 창도된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신흥종교. 최제우는 전통적인 유교(儒敎)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유교 경전을 배워, 성년이 되어서는 지방의 유학자로 이름이 나 있었다. 당시 한국은 어린 헌종왕의 즉위로 외척(外戚)의 세도정치가 계속되면서 정권다툼으로 지배층의 알력이 극도에 달하였고, 양반과 토호(土豪)들은 백성들에 대한 횡포와 착취를 자행함으로써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각지에서 농민봉기를 일으키는 등, 사회는 매우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더구나 일본을 비롯한 외세(外勢)의 간섭이 날로 심해져 국운이 위기에 처하는 한편, 국민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유교·불교가 극도로 부패하여 조정은 민중을 제도(濟度)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게다가 새로 들어온 서학(西學:천주교)의 세력이 날로 팽창하여 그 이질적인 사고(思考)와 행동이 우리의 전통적인 그것과 서로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때 최제우는 서학에 대처하여 민족의 주체성과 도덕관을 바로 세우고, 국권을 튼튼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도(道)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구세제민(救世濟民)의 큰 뜻을 품고 양산(梁山) 천수산(千壽山)의 암굴 속에서 수도하면서 도를 갈구(渴求)한 지 수년 만에 ‘한울님(上帝)’의 계시를 받아 ‘동학’이라는 대도(大道)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동학은 서학에 대응할 만한 동토(東土) 한국의 종교라는 뜻으로, 그 사상의 기본은 종래의 풍수사상과 유(儒)·불(佛)·선(仙:道敎)의 교리를 토대로 하여,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의 사상에 두고 있다. ‘인내천’의 사상은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지상천국(地上天國)의 이념과 만민평등의 이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에는 종래의 유교적 윤리와 퇴폐한 양반사회의 질서를 부정하는 반봉건적이며 혁명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었다. 최제우가 ‘한울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계시는 ‘동학’이란 교명(敎名)과 영부(靈符)와 주문(呪文)이라고 한다. 영부란 백지(白紙)에 한울님의 계시에 따라 그린 일종의 부적(符籍)으로, 궁을형(弓乙形)으로 되어 있고 때로는 태극부(太極符)·궁을부(弓乙符)라고도 부른다. 주문은 13자로 된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의 본주(本呪)와 8자로 된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라는 강령주(降靈呪) 등이 있다. 이 영부와 주문은 동학을 포교하는 데 중요한 방편으로 사용되었는데, 예컨대 주문을 외면서 칼춤을 추고 영부를 불에 태워, 그 재를 물에 타서 마시면 빈곤에서 해방되고, 병자는 병이 나아 장수하며 영세무궁(永世無窮)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동학은 신분·적서(嫡庶)제도 등에도 반기를 들어 이를 비판하였으므로, 그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교리는 당시 사회적 불안과 질병이 크게 유행하던 삼남지방에서 신속히 전파되었다. 포교를 시작한 지 불과 3,4년 사이에 교세는 경상도·충청도·전라도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이같은 추세를 지켜보던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마찬가지로 불온한 사상적 집단이며 민심을 현혹시키는 또 하나의 사교(邪敎)라고 단정하고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863년에는 최제우를 비롯한 20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체포되어, 최제우는 이듬해 대구에서 사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최제우를 비롯한 많은 교인들이 순교한 후에도 조정의 탄압이 계속되자 교인들은 지하로 숨어들어가 신앙생활을 계속하게 되었고, 한편 최제우의 뒤를 이은 2세 교조 최시형(崔時亨:海月)은 태백산과 소백산 지역에서 은밀히 교세를 정비·강화하였다. 전부터 내려오던 접주(接主)제도를 확대 개편하여, 교인들의 일단(一團)을 ‘포(包)’라 하고 여기에 포주(包主)를 두었다. 포주 위에는 접주·대접주, 그 위에 도주(道主)·대도주를 두는 한편, 포주·접주 밑에는 ‘육임(六任)’이라 하여 교장(敎長)·교수(敎授)·교집(敎執)·교강(敎綱)·대중(大中)·중정(中正)을 두었다. 이와 같이 대중 속에 조직된 동학은 94년(고종 31)에 발생한 동학농민전쟁의 주체가 되었고, 이 때 사형을 당한 최시형의 뒤를 이은 3세 교주 손병희(孫秉熙)는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여 계속 교세확장에 힘쓰게 되었다. 한편 동학은 이 때 시천교(侍天敎)라는 또 하나의 교파가 분리되었다.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군에서 시작된 동학계(東學系) 농민의 혁명운동. 그 규모와 이념적인 면에서 농민봉기로 보지 않고 정치개혁을 외친 하나의 혁명으로 간주하며, 또 농민들이 궐기하여 부정과 외세(外勢)에 항거하였으므로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역사적 배경】 조선 왕조의 봉건적 질서가 해이(解弛)하기 시작한 18세기부터 비롯되었는데, 그것은 곧 농업·산업·수공업·신분제도 등 하부구조에서의 봉건적 구성의 붕괴가 바로 사회의식에 반영되어 실학(實學)의 발생과 평민의식의 대두를 보게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단적인 실례로서 1811년(순조 11)에 있었던 홍경래의 난을 들 수 있으며, 그 후 62년(철종 13) 진주(晉州)의 농민봉기를 시초로 삼남 각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은 극도로 문란해진 삼정(三政)에 대한 반항으로, 이미 이때부터 혁명 발생의 역사적 배경은 조성되고 있었다. 혁명의 이념적 바탕이 된 동학은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풍수사상과 유(儒)·불(佛)·선(仙)의 교리를 토대로 서학(西學:기독교)에 대항하여 ‘인내천(人乃天):천심즉인심(天心則人心)’을 내걸고, 새로운 세계는 내세(來世)가 아니라 현세에 있음을 갈파하여, 당시 재야에 있던 양반계급은 물론 학정과 가난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가 커다란 종교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최제우를 체포, 64년 사형에 처하였다. 교도들은 교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궐기하여 혁명에 호소하자는 강경론이 대두되었고, 뒤에 그 동학군을 영도한 인물로 전봉준(全琫準)이 등장하였다.

【제1차 농민운동】 76년 개항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감행하여 조선을 일본의 시장화하는 한편, 조선에서 쌀을 반출해 감으로써 물가를 자극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이중으로 억압하였고, 일본인 어부들의 횡포는 조선 어민의 생활을 위협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 기선(汽船)이 조선 연안에서 무역에 종사함은 물론, 세미(歲米) 운송을 위한 기선의 도입으로 종래의 조군(漕軍)과 선상(船商)은 몰락하게 되었고, 그 위에 세미운송의 책임자인 전운사(轉運使)의 횡포 또한 막심하였다. 이러한 절박한 사정 속에서 탐관오리의 횡포는 갈수록 가중되어 백성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 무렵 고부군수로 조병갑(趙秉甲)이 부임하였다. 신임 군수는 농민들로부터 무리한 세미를 거두어 들이고, 백성들에게 무고한 죄명을 씌워 2만 냥이 넘는 돈을 수탈하는가 하면 부친의 송덕비각(頌德碑閣)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1,000여 냥을 농민들로부터 강제로 징수하였다. 또한 시급하지도 않은 만석신보(萬石新洑)를 축조한다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쌓게 하고, 가을에 수세(水稅)를 받아 700여 섬을 착복하는 등 온갖 탐학을 다하였다. 농민을 중심으로 한 고부군민은 학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동학의 고부접주(古阜接主)로 있는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봉준을 선두로 마침내 울분을 터뜨렸다. 94년 1월 10일 새벽, 1,000여 명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은 흰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몽둥이와 죽창을 들고, “전운사를 폐지하라, 균전사(均田使)를 없애라, 타국 상인의 미곡 매점과 밀수출을 막아라, 외국상인이 내륙 각지로 횡행(橫行)하는 것을 막아라, 각 포구의 어염선세(漁鹽船稅)를 혁파하라, 수세 기타 잡세를 없애라, 탐관오리를 제거하라, 각읍의 수령·이서(吏胥)들의 학정 협잡을 근절시키라”는 등의 폐정개혁 조목을 내걸고 노도와 같은 형세로 고부관아에 밀어닥쳤다. 이들은 무기를 탈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모두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전라감사(全羅監司)로부터 고부민란에 관한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군수 조병갑을 체포 압송하게 하는 한편, 용안현감(龍安縣監) 박원명(朴源明)을 후임으로 부임하게 하고, 이어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使)로 보냈다. 신임군수 박원명은 도내 형편을 잘 아는 광주사람으로, 그의 적절한 조처에 의하여 군중은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후에 부임한 안핵사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모두 동학교도와 농민에게 전가시켜 농민봉기의 주모자를 수색하는 한편 동학교도의 명단을 만들어 이들을 체포하고자 하였다. 전봉준은 피신하여 정세를 관망하다가 이 기회에 고질의 뿌리를 뽑아야 하겠다고 판단, 인근의 동학 접주들에게 통문을 돌려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교조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마침내 94년 3월 하순, 태인(泰仁)·무장(茂長)·금구(金構)·부안(扶安)·고창(高敞)·흥덕(興德) 등의 접주들이 각기 병력을 이끌고 전봉준이 먼저 점령한 백산(白山)으로 모여드니, 그 수가 1만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전봉준은 대오를 정비한 다음 거사의 대의를 선포하였다. 곧, ① 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시키지 말 것, ② 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濟世安民)할 것, ③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밝힐 것, ④ 병(兵)을 몰아 서울에 들어가 권귀(權貴)를 진멸(盡滅)시킬 것 등의 4대강령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관리들의 탐학에 시달리던 인근 각처의 동학군과 농민들은 새로운 희망을 품고 앞을 다투어 백산으로 모여들었다. 태인의 동학군은 3월 29일 자발적으로 관아를 습격하여 관속(官屬)들을 응징하고 무기를 탈취하니 혁명군의 기세는 한층 더 충천하였다. 급보에 접한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은 영장(營將) 이광양(李光陽)·이재섭(李在燮) 등에게 명하여 영병(領兵) 250명과 보부상대(褓負商隊) 수천 명을 이끌고 동학군을 섬멸하라고 하였다. 4월 6일부터 7일 새벽까지 관군은 도교산(道橋山)에 진을 치고 있던 동학군과 황토현(黃土峴)에서 싸움을 벌였다. 관군은 철저히 참패하여 이광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병이 전사하였다. 사기충천한 동학군은 불과 한 달 만에 호남 일대를 휩쓸면서 관아를 습격하고 옥문을 부수어 죄수를 방면하였으며, 무기와 탄약을 빼앗고 이서가(吏胥家)에 방화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전라병사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에 임명하고 군사 800을 파견하여 난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전주성(全州城)에 입성한 초토사 홍계훈의 경군(京軍)과 동학군은 월평리(月平里)의 황룡촌(黃龍村)에서 첫 대전을 벌였다. 일대 격전의 결과 경군은 대패하였고 동학군은 정읍 방면으로 북상, 4월 27일에는 초토사가 출진한 뒤 방비가 허술한 전주성을 쉽게 함락시켰다. 한편 홍계훈의 경군은 28일에야 전주성 밖에 이르러 완산(完山)에 포진하고 포격을 가하였다. 동학군은 여러 차례 반격을 가하였으나 소총과 죽창만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차차 수세에 몰려 500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하고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홍계훈은 이 때를 이용하여 선무공작(宣撫工作)을 시작하였으니, 즉 정부는 고부군수·전라감사·안핵사 등을 이미 징계하였고, 앞으로도 탐관오리는 계속 처벌할 것과 폐정(弊政)의 시정을 약속하였다. 때마침 앞서 요청하였던 청(淸)나라의 원군이 아산만에 도착하였고, 일본은 일본대로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에 출병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동학군은 우세한 장비를 갖춘 정부군과 지구전(持久戰)을 벌이는 것은 불리할 뿐더러 청·일 양군이 출동하여 국가의 안전이 염려되는 시기에 정부군과 싸운다는 것은 대의(大義)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폐정개혁 12개조를 요구하고 정부군의 선무공작에 순응하여 전주성에서 철병하였다. 강화(講和)가 성립된 뒤 대부분의 농민은 철수하고 동학군은 폐정개혁의 실시와 교세확장을 위하여 전라도 53주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으로 청군은 이미 상륙하였고, 일본도 톈진조약[天津條約]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제2차 농민운동】 전라도 각읍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정치의 실현을 꾀하던 전봉준은 일병(日兵)이 궁궐을 침범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대원군을 섭정으로 하고, 청·일 양국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폐정개혁을 논할 때가 아니라 항일투쟁을 벌일 때가 왔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신곡(新穀)이 여무는 시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가 9월에 접어들자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孫華中)은 광주에서 궐기하였으며, 호남·호서의 동학교도와 농민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전봉준은 전주 삼례(參禮)를 동학군의 근거지로 삼고 대군을 인솔, 일단 논산에 집결한 뒤 3방향으로 나누어 공주(公州)로 향하였다. 또한 각지의 수령들도 수원·옥천 등 요지를 점거하여 동학군을 원호하였다. 한편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관군과 일본군은 급히 증원부대를 요청, 동학군이 공주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10월 21일 전봉준의 10만 호남군과 손병희의 10만 호서군은 관군과 일본 연합군을 공격, 혈전을 거듭하였으나 상대방의 막강한 근대적 무기와 화력으로 인해 우금치(于金峙)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하여 논산·금구·태인 등으로 퇴각하였다. 전봉준은 순창(淳昌)에서 재기를 꾀하던 중, 11월 배반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95년 3월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이로써 미증유(未曾有)의 광범한 민중의 무장봉기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1년 동안에 걸쳐 30∼40만의 희생자를 낸 채 끝났고, 이들의 개혁의지는 이후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쳐 위정자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여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정치적 혁신을 가져왔다.

                                                             

천도교(天道敎)

 

조선 후기 1860년(철종 11)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를 교조(敎祖)로 하는 동학(東學)을 1905년 제3대 교조 손병희(孫秉熙)가 천도교로 개칭한 종교.

【창도과정】 최제우는 전통적 유교 가문에서 태어나 지방의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 후기는 국내적으로는 외척(外戚)의 세도정치와 양반·토호들이 일반 백성에 대한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자행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민란이 각지에서 발생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의 무력침략의 위기를 맞던 시대였다. 최제우는 21세에 구세제민(救世濟民)의 큰 뜻을 품고 도(道)를 얻고자 주류팔로(周流八路)의 길에 나서 울산 유곡동 여시바윗골, 양산 천성산 암굴에서 수도하고 도를 갈구하여 1860년 4월 5일 ‘한울님(하느님)’으로부터 인류 구제의 도인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도의 이름을 ‘무극대도’라고만 하였다. 최제우가 포교를 시작하여 많은 교도들이 모이자, 관(官)과 유생들이 혹세무민한다는 구실로 탄압하여 부득이 전남 남원 교룡산성(蛟龍山城)으로 피신하였다. 이 때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많은 저술을 하였다. 특히 1862년 1월경에 지은 《논학문(論學文:東學論)》에서 처음으로 무극대도는 천도(天道)이며 그 학은 서학이 아닌 ‘동학(東學)’이라고 천명하였다. 이로써 동학이라 지칭하게 되었다. 이 해에 다시 경주의 박대여(朴大汝) 집에 머물면서 포교하자, 충청·전라 지방에서까지 수천 명의 교도들이 모여들자 교도들을 조직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1862년 12월 동학의 신앙공동체인 접(接)제도를 설치하고 접주(接主) 16명을 임명하였다. 최제우는 1863년 3월 경주 용담정으로 돌아와 대대적인 포교활동에 나섰다. 접주들로 하여금 교도들을 수십 명씩 동원하여 용담정에 와서 강도(講道)를 받게 하는가 하면, 동학 교단 책임을 맡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해월(海月) 최경상(崔慶翔:時亨)을 선임하였다. 한편 관의 탄압을 예견하고 그 해 8월 14일에는 도통(道統)을 최경상에게 완전히 물려주었다. 날이 갈수록 동학 교세가 커지자, 놀란 조정은 그해 12월 10일에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를 파견, 최제우를 체포하여 이듬해 3월 10일 대구에서 정형을 집행하여 최제우는 41세를 일기로 순도하였다.

【종교사상】 동학, 즉 천도교는 신, 즉 한울님을 모시는 유신적(有神的) 종교인데, 신관을 비롯하여 인간관·윤리관·역사관·수행체제가 모두 독특하다. ① 신앙대상인 한울님(天主)은 유일신으로 인격적이며 모든 사람들이 모시고 있는 초월적이면서 내재하는 신이며, 아직도 참뜻을 펴려고 애쓰는 신이다. 그러나 창조주나 심판의 신은 아니다. 그리고 신은 영적인 것과 기적(氣的)인 것을 아울러 갖고 있다고 본다. ② 인내천(人乃天)으로 대표되는 천도교의 인간관은 사람을 한울님처럼 존엄한 존재로 본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존엄한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사람의 존엄성이 곧 한울님의 존엄성과 같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인간평등과 존엄성을 신앙의 실천적인 핵심으로 삼는다. ③ 사인여천(事人如天)으로 대표되는 윤리관은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듯이 하자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보고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처럼 섬겨야 한다. 1920년대의 천도교가 어린이운동의 목표로 어린이의 윤리적 해방을 내세웠던 것도 역시 어린이도 한울님을 모셨다고 보는 천도교의 신앙에서 연유된 것이다. ④ 천도교는 개체 영(靈)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부인하지도 않았으나 영생론을 주장한다. 영생은 종교적인 높은 체험의 경지에 이르면 가난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며, 시간 속에서도 영원을 살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⑤ 천도교의 역사관은 발전론과 순환론을 겸한 파동형(波動形:起伏盛衰論) 사관으로 보며, 문명의 단위를 동·서로 양분하여 지금은 대전환의 시기인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시점으로 본다. 즉 지금까지의 문명은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문명이 전개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⑥ 천도교는 현세주의적인 종교로서 모든 사람이 한울님처럼 대접받을 수 있는 정치·경제·문화 체제가 이루어지도록 힘써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자는 종교이다. 그 과정에서 평등한 인간구제, 부유한 사회구제를 위한 정신개벽·민족개벽·사회개벽 운동을 추진함으로써 사회변동을 위한 현실참여에 적극적이 된다.

【수행체제】 천도교의 수행은 개인적으로는 청원(請願)과 기복(祈福)이 수반되지만, 신앙체제를 확립하여 도성입덕(道成立德)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데 있으며, 집단적으로는 신앙공동체를 이루면서 희생·봉사로써 보국안민(輔國安民)·포덕천하(布德天下)·광제창생(廣濟蒼生)에 이바지하는 데 두고 있다. 그의 실행을 위해서 성(誠)·경(敬)·신(信)을 실천 윤리의 준칙(準則)으로 삼고 있으며, 종교행위로는 ① 주문(呪文), ② 청수(淸水), ③ 심고(心告), ④ 경전봉독(經典奉讀), ⑤ 기도, ⑥ 성미(誠米), ⑦ 시일식(侍日式), ⑧ 기념식 등이 있다. 주문은 본 주문이 13자로서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이며, 강령주문(降靈呪文)은 8자로서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다. 이 글을 수없이 반복하여 외우는데, 그 목적은 마음을 닦고(修心), 기운을 바르게(正氣) 하는 데 있다. 심고는 “한울님 감응하시기를 축원하면서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다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청수는 모든 제례의식 때 깨끗한 물을 그릇에 떠다 바치는 것이며, 경전봉독은 《천도교 경전》(《東經大典》과 《龍潭遺詞》)을 경건하게 읽는 것이다. 기도는 심고·청수봉전(奉奠)·주문 읽는 것을 시간과 날짜를 정해놓고 행하는 것을 말하며, 성미는 우리들이 끼니마다 먹는 음식을 한울님의 녹(祿)이라고 생각하여 끼니마다 쌀 등을 한 숟가락씩 뜨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 모아서 교단에 바친다. 시일식은 1주일에 한 번(일요일에 교당에서 행함) 집회하여 의식을 행하는 것이며, 기념식은 창도일(創道日) 등 기념할 만한 날에 의식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 중에서 주문·청수·시일·성미·기도를 특히 오관(五款)이라 하여 교인의 의무로 정하고 있다. 제사의식은 향아설위(向我設位)라 하여 제수를 모시는 사람을 향해 차려놓는데, 이것은 조상이나 스승님의 영(靈)도 내 안에 모셔져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끝으로 천도교의 수행기본(修行基本)은 기원만도, 깨달음만도 아닌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의 은총과 자력을 겸하는 데 있다.

【천도교의 약사】 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순도한 이후 교세가 급격히 줄어들었으나 제2세 교조 해월 최경상의 노력으로 다시 복구, 1870년경에는 신도수가 수천에 이르렀다. 그러나 영해지방에서 이필제(李弼濟)가 주축이 되어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일으켜 71년 3월 10일 군아(郡衙) 습격과 8월 2일의 문경 초곡 군기고 습격사건으로 300여 교도가 희생되어 또다시 타격을 받았다. 75년 최경상은 이름을 시형(時亨)으로 고치고 강원도 지방과 충청도 지방의 포교를 시작, 많은 교도를 얻었다. 이때 최시형은 양천주(養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실천적 수도요령과, 위생 등 생활의 합리화를 내세워 민중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리하여 80년에는 강원도 인제와 단양 천동에서 《동경대전(東經大典)》과 《용담유사(龍潭遺事)》를 최초로 목판 간행하여 경전종교로서의 기틀을 세웠다. 이후 충청도 지방으로, 89년경에는 교세가 전라도 지방까지 뻗치기에 이르렀다. 92년경에 이르자 신앙자유를 내세워 충청도 공주와 전라도 삼례에서 대대적인 민중시위를 벌였는데 이후부터 교세는 급격히 늘어났다. 이듬해인 93년에는 서울 광화문 앞에서 정부를 상대로 한 종교 자유화와 교조신원을 소청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자 3월에는 충북 보은 장내리에서 수만 교도들이 모여 보국안민·척왜양이(斥倭洋夷)를 내세운 반봉건·반제국주의적 정치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 운동 역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94년 3월에 이르러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全琫準) 고부 접주에 의해 고부민란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전봉준·김개남(金開南)·손화중(孫華中)·김덕명(金德明) 등 지방의 동학 대접주가 공동으로 동학군을 동원, 동학혁명으로 발전시켰다. 5월에는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이루어져 53곳에 집강소(執綱所:군사위원회 같은 것)가 설치되어 폐정(廢政)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청·일전쟁이 일어나 결국 청국이 패퇴하기 시작하자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강점하려 들었는데 이때 최시형은 전 동학군에 기포령(起包令)을 내려 반제국주의 무력항쟁에 나서도록 하였다. 그러나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퇴, 수만의 희생을 내고 막을 내렸다. 이로부터 4년 뒤인 98년에는 최시형마저 체포되어 6월에 순도함으로써 동학(천도교)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900년에는 지도급 인물 중 손천민(孫天民)과 김연국(金演局)이 체포되어 손천민이 순도하자, 위기를 느낀 제3세 교조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는 1901∼1902년에 망명길에 나서 상하이[上海]까지 갔다가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으로 일본에서 1906년 1월까지 머물렀으며,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국내 동학군을 동원하여 진보회(進步會)를 조직, 10월 8일 360곳에서 30만 명이 색옷입기와 단발을 단행하는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한국 근대화의 민중운동이었으나 동학군이 주동이 되었음이 세상에 알려지자 곧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국내 지도자인 이용구(李容九)가 단독으로 일진회(一進會)와 합동, 노골적인 친일행위를 자행하였다.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근대적 종교체제를 갖추는 데 힘썼다. 1906년 1월 말경에 귀국하여 2월부터 천도교 중앙총부를 설치하고, 9월에는 이용구를 포함한 교도 62명을 출교 처분하였다. 10년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자 종교적 수행을 강화하는 한편 보국안민이라는 슬로건 아래 민족해방운동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국민교육을 위해 800여 개의 강습소를 설치, 기본교육에 힘썼으며 보성전문학교·동덕여학교를 경영 또는 보조하는가 하면, 16개 학교에 보조금을 제공하였다. 19년 3월 1일 천도교는 그리스도교계·불교계 인사 및 학생들과 더불어 독립운동을 위한 대민중시위를 주도하였다. 22년 5월 19일 제3세 교조인 의암 손병희가 생애를 마치자 한때 교세는 주춤하였다. 그러나 청년들에 의해 19년 9월에 발족한 천도교 청년교리 강연부를 토대로 20년 3월에 천도교청년회를 조직, 종합잡지 《개벽(開闢)》을 간행함으로써 문화운동이 시작되었고, 21년에는 어린이운동의 선구자인 천도교소년회를 발족시켰다. 22년 9월에는 천도교청년회를 천도교청년당(黨)으로 발전시켜 여성운동·농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때 천도교가 간행한 잡지만도 《개벽》을 비롯하여 《신여성》 《어린이》 《학생》 《농민》 《천도교 월보》 《신인간》 《별건곤(別乾坤)》 《자수대학강의》 등이 있었는데,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서 35년 이후부터는 거의 마비상태에 들어갔다. 그러자 천도교 청년들은 오심당(吾心黨:22년 조직)을 조직, 35∼36년에 조선독립운동을 꾀하다 발각되어 많은 인사가 체포·구금되었고, 38년에는 제4세 대도주 춘암(春菴) 박인호(朴寅浩)가 주도한 멸왜기도사건(滅委祈禱事件)이 발각되어 수십 명이 체포·구금되기도 하였다. 45년 8·15광복 이후 국토가 양단되자 북한에서는 천도교 북조선종무원과 천도교 청우당(靑友黨)을 조직, 활동하였는데 280만 교인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48년 북한측이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를 반대, 이미 분단정권을 세우고 국토 분단을 영구화하려 하자, 48년 2월에 3·1재현운동, 즉 남북통일 총선거운동을 전개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1만 70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로부터 조직적인 탄압을 받았는데 그래도 많은 교도들은 영우회(靈友會)라는 이름 아래 국토통일운동을 계속하였다. 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북한에서는 많은 교도들이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천도교의 조직과 현황】 천도교의 조직은 교조가 제정한 접(接)이 기본을 이루면서 포(包)와 도소(都所)로 발전하였다. 접은 40∼50호를 단위로 한 기본조직이며, 포는 여러 개의 접을 포용하는 조직이다. 이 접과 포의 조직은 모두 전교자(傳敎者)와 수교자(受敎者)의 인간관계를 통한 지역적인 조직이다. 이것이 천도교로 바뀌면서 1906년부터 발족한 지방교구제와 병존하게 되어 양원 조직을 이루었다. 즉 접을 토대로 한 조직으로 연원(淵源)조직이 있는 한편, 행정구역 단위로 마련한 교구조직이 있다. 연원조직은 접 → 교훈 → 도훈 → 도정으로 200호 단위의 조직이며, 교구조직은 면에 전교실, 군에 교구, 중앙에 중앙총부가 있다. 94년 현재, 교회 조직은 최고결의기관으로 전국대의원대회와 중간 결의기관으로 종의원(宗議院)이 있고, 집행기관으로는 종무(宗務)위원회가, 감사기관으로는 중앙감사원이 있다. 또 재산을 관리하는 천도교 유지재단이 있다. 용담수도원 등 수도원이 10개, 2,000개 교구에 교도수는 100만 명이 넘는다. 연호(年號)는 창도 해인 1860년을 ‘포덕(布德) 1년’으로 하는 포덕 연호를 쓰고 있다.

                                                             

 

개화사상(開化思想)

 

조선 후기에 개화파가 발전시킨 부르주아적 개혁사상. 이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와 역관 출신 오경석(吳慶錫), 의관 출신 유홍기(劉鴻基) 등이었다. 이미 실학적 학풍을 체득한 박규수는 1861년과 72년 두 차례 북경에 가서 자본주의 열강의 무력에 굴복한 청의 현실을 목격하였고, 66년 평안도감사 시절 제너럴셔먼호 사건 등을 직접 겪으면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지닌 열강에게 대항하려면 문호개방을 통한 조선의 부국강병이 절실하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중인 출신의 역관 오경석은 50년대부터 사신을 따라 천진·북경 등지를 드나들면서 중국에 유입된 새로운 서구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서양문물을 소개한 《해국도지(海國圖志)》 《영환지략(瀛環志略)》 《만국공보(萬國公報)》 등의 신서(新書)를 가지고 왔다. 이 책들은 모두 화이론적 세계관에 젖어 있던 봉건 지배층에게는 이단이었지만, 쇄국정책을 펴던 조선에서 세계정세와 서구사회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입문서이기도 하였다. 오경석은 자연히 시대에 뒤떨어진 조선 봉건사회를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고, 자신의 동지이자 절친한 친구인 의관 출신 유홍기에게 자신이 중국에서 구입해온 책과 보고 들은 것을 전하며 함께 연구할 것을 권하였다. 두 사람은 구입한 문명서적을 바탕으로 세계정세를 연구하여 사회제도로서의 자본주의를 이해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조선이 얼마나 뒤떨어졌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낡은 봉건제도를 청산하지 않고는 구미열강의 침략으로 나라가 멸망하리라고 생각하고, 나라의 발전을 위한 일대혁신이 불가피하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자본주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세계 대세에 상응하여 조선의 정치·경제·문화 생활을 개혁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박영교(朴泳敎)·홍영식(洪英植)·서광범(徐光範)·김윤식(金允植)·유길준(兪吉濬) 등과 교류를 시작하면서 이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그 핵심적 내용은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들이 제시한 ‘14개조 정강’에서 총체적으로 표현되었다. 그것은, 정치면에서는 대외적으로 청나라와 종속관계를 청산하려는 것이며, 대내적으로 조선왕조의 전제주의 정치체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려 한 정치개혁이었다. 사회면에서도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권을 제정하여 중세적 신분제를 청산하려는 것이었으며, 경제면에서는 개화파들이 지주전호제를 유지하는 선에서 국가재정을 강화하려고 지조법(地租法)의 개혁만을 내세웠다. 상공업면에서도 자본주의적 기업의 육성 문제나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하였지만, 자본주의적 산업경제로의 발전을 지향하였다. 이와 같이 개화사상은 조선사회의 자본주의화를 그 사상의 기본적인 방향으로 설정하면서도, 지주적 토지소유의 옹호·발전을 통한 지주경영의 자본가적 경영에로의 개편을 구상, 지주 및 지주와 거의 이해가 일치하는 대상인(大商人)을 근대사회의 건설주체로 설정하였다. 이와 같이 개화사상은 우선 당시 봉건적 토지소유 제도와 농민에 대한 봉건적 착취의 청산에 가장 큰 이해관계를 가진 농민보다는 지주의 입장을 옹호함으로써 농민들의 반봉건적 개혁역량과 결합하지 못하는 계급적 한계를 드러내었다. 또한 지주 중심의 개혁방향은, 지주제 존속을 바탕으로 한 조선사회의 식민지화에 혈안이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투쟁할 내적 근거를 약하게 하였고, 그 결과 개화사상은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철저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사상적 한계를 띠었다. 한편, 개화사상은 기본적으로 개혁의 방향에는 일치하면서도 부르주아적 개혁의 방법을 두고 크게 두 흐름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청의 양무론(洋務論)적 입장에서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서양의 과학·기술 문명을 도입하되 개혁정책은 민씨정권과의 타협 아래 점진적으로 수행하자는 온건적 입장이었다. 다른 하나는 서양의 과학·기술 문명뿐만 아니라 사상·제도까지 도입해야 한다는 전제 위에서 철저한 개혁정책을 펴기 위해서는 민씨정권의 타도를 통해 권력을 쟁취한 뒤 급진적으로 추진하자는 변법(變法)적 입장이었다. 이후 온건적 입장은 갑오개혁, 그리고 대한제국 시기의 광무개혁(光武改革)을 주도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으로 이어졌고, 급진적 입장은 1884년의 갑신정변, 그리고 대한제국 시기 독립협회의 개혁사상으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 이래 조선봉건사회가 당면했던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고 부국강병한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려던 개화사상은, 이전의 실학사상(實學思想)이나 봉건유생들의 척사사상(斥邪思想)보다는 진일보한 부르주아적 개혁사상이었다. 그러나 지주적 기반을 가진 개화파의 계급적 한계와 당시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에 대한 인식의 불철저로 말미암아 조선사회의 자주적 근대화를 이끌어내는 사상으로까지는 자리잡지 못하였다.

                                                                    

 

증산교(甑山敎)

 

1901년 고부(古阜) 출신의 유생(儒生) 강일순(姜一淳)이 전주(全州) 모악산(母岳山) 아래에서 창도한 흠치교(敎)와, 나중에 그의 부인 고씨(高氏)가 창도한 태을교(太乙敎)를 비롯하여 현재의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에 이르기까지, 이 계열의 교파를 통틀어 이르는 말. 교주 강일순의 도호(道號)가 증산(甑山)이었으므로 증산교 또는 증산교단이라고 하며, 일제강점기에는 흠치교라고 하였다. 1894년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혁명이 실패하자 강일순은 전국을 떠돌다가 모악산 대원사(大願寺)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고 동학과 마찬가지인 ‘후천선계개벽(後天仙界開闢)’을 주장하는 흠치교를 창설하였다. 그 교리는 ‘천지공사(天地公事)’로 집약되며, 그것은 다시 운도공사(運度公事)·신도공사(神道公事)·인도공사(人道公事)로 구분된다. 그는 여러 가지 이적(異蹟)을 행하였다고 전한다. 그가 죽은 후 교인들이 흩어지자 1911년 그의 부인이 태을교를 만들어 교인들을 다시 모았으나, 그 후 보천교(普天敎)·미륵불교·모악교(母岳敎)·용화교(龍華敎)·증산대도·태극도·대순진리회 등 많은 파로 갈리었다.

                                                                 

 

원불교(圓佛敎)

 

1916년 전북 익산시(益山市)에서 소태산(小太山) 박중빈(朴重彬)이 개창한 불교의 한 유파. 우주의 근본원리인 일원상(一圓相, 즉 ∥의 모양)의 진리를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 종교로, 진리적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통하여 낙원세계를 실현시키려는 이상을 내세우고 있다.

【약사(略史)】 교조 중빈은 전남 영광(靈光)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우주와 인생에 대한 회의를 품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머리에 가득찬 의문을 한학(漢學)공부로는 풀 수가 없었으므로, 범인(凡人)보다는 높은 차원의 경지에 있는 어떤 대상으로부터 의심의 해답을 얻고자 산상기도와 도사(道士)를 찾는 일에 열중하였다. 이같은 그의 구도정신은 결국 그를 외부로부터의 문제해결을 포기하고 독자적 수도 고행에 들어가게 만들었는데, 어떤 일정한 수행법을 택하지도 못한 채 망아(忘我)의 침잠(沈潛)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폐인이 되었다. 5년여의 침잠 끝에 1916년 4월 28일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 깨어난 그에게는 우주와 세계의 새로운 질서가 뚜렷이 드러나 보였다는데, 그 질서를 “만유(萬有)가 한 체성(體性)이며 만법(萬法)이 한 근원”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불생 불멸(不生不滅)과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진리를 천명하였다. 그후 그는 유(儒)·불(佛)·선(仙) 3교의 경전을 비롯하여 그리스도교의 성서 등을 두루 섭렵하였는데, 특히 《금강경(金剛經)》이 자신이 깨달은 진리와 일치함을 깨닫고 근본 진리를 밝히는 데는 불법(佛法)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여 석가를 선각자로 존숭하는 동시에 불교와의 인연을 스스로 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펴기 위하여서는 종래의 불교와는 크게 다른 새 불교·새 교단을 설립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물질이 개벽(開闢)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내걸었다. 동시에 그는 새 교단 창립과 새 세상 구제(救濟)의 대책을 법어(法語)로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수신(修身)의 요법(要法), 제가(齊家)의 요법, 강자 약자(强者弱者)의 진화상(進化上)의 요법, 지도인(指導人)으로서 준비할 점 등으로 되어 있다. 이같은 개교(開敎)의 기치 아래 최초의 법어로써 16년 새 교단을 열 의사를 표명하자, 마을사람들을 중심으로 인근에서 40여 명이 모였다. 그는 이 가운데서 8명을 선발하고 후에 정산(鼎山) 송규(宋奎:후에 一代宗法師)를 맞아 도합 9명을 새 교단 창립의 첫 제자로 삼았다. 원불교에서는 이 해를 원기(圓紀) 1년으로 삼고 있다. 그는 불교의 현대화·생활화를 주장하면서 신앙의 대상을 불상(佛像)이 아닌 법신불(法身佛)의 일원상(一圓相)으로 삼고, 시주(施主)·동냥·불공 등을 폐지하는 대신에 각자가 정당한 직업에 종사하며 교화사업을 시행한다는 이른바 ‘생활불교’를 표방하였다. 그리하여 17년 저축조합의 조직을 필두로, 18년에는 바다를 막는 간척사업을 시작하여 이듬해 2만 6,000평의 논을 조성하고, 그후 엿공장·과수원·농축장·양잠·한약방 등 생산적인 경영을 하여 새 교단 창립의 경제적 기틀을 마련하였다. 한편, 19년에는 9명의 제자와 함께 대기도(大祈禱)를 시작하여 3개월 후 최종 기도에서 ‘백지혈인(白指血印)의 법인성사(法認聖事)’라는 기적(奇蹟)을 낳고, 여기에서 무아봉공(無我奉公)의 정신적 기초를 확립하여 신성(信誠)·단결(團結)·공심(公心)을 더욱 굳건히 하였는데, 이것이 곧 교단 창립의 얼이 되었다. 24년, 마침내 서중안(徐中安) 등이 발기인이 되어 전북 익산에서 불법연구회를 창설하고 중빈을 총재로 추대하였다. 38년에는 《불교정전(佛敎正典)》을 간행하여 기본원리인 일원상의 진리를 포명(布明)하였으나, 일본 관헌의 탄압이 계속되어 겨우 교단을 유지해 나갔다. 43년 교주가 죽자 송규가 종법사(宗法師)가 되어 교통(敎統)을 계승하고, 광복 후 47년에는 교명을 원불교로 개칭하는 한편, 교육·자선(慈善)·교화(敎化)의 3대 실천목표를 세워 포교에 힘쓰다가, 62년 규가 죽자 김대거(金大擧)가 2대 종법사에 취임하였다.

【교리】 법신불 일원상을 최고의 종지(宗旨)로 삼는데, 일원상의 신앙은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을 목표로, 어느 곳 어느 때나 신앙심을 지키어 천지(天地)·부모·동포·법률의 4은(四恩)에 보답하는 것을 불공으로 삼고, 자력양성(自力養成)·지자본위(智者本位)·타자녀교육(他子女敎育)·공도자 숭배(公導者崇拜)의 4요(四要)를 실천함으로써 복락의 길을 닦자는 것이다. 일원상의 수행이념은 무시선(無時禪)·무처선(無處禪)을 표준으로 하여, 언제 어디서나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정신수양·사리연구(事理硏究)·작업취사(作業取捨)의 3학(學)을 수행하여 신(信)·분(忿)·의(疑)·성(誠)의 ‘진행 4조(進行四條:추진할 네 가지)’로써 불신(不信)·탐욕·나(懶)·우(愚)의 ‘사연 4조(捨捐四條:버려야 할 네 가지)’를 제거하는 8조의 실행에 의하여 원만한 인격을 양성한다는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법신불 일원상을 대상으로 신앙하고 수행하는 정각정행(正覺正行)·지은보은(知恩報恩)·불법활용(佛法活用)·무아봉공(無我奉公)을 4대 강령으로 삼고 있다.

【현황】 익산에 있는 중앙총부(中央總部)에서 교단을 총괄운영하고 지방에 교구(敎區)와 교당(敎堂)을 두고 있으며, 그 운영기구로서 종법사(宗法師)를 중심으로 수위단회(首位團會)·중앙교의회(中央敎議會)·교정위원회(敎政委員會) 및 교정원(敎政院)과 감찰원 등이 있다. 교당에는 교무(敎務)와 교도가 있는데, 교도는 10인을 1단으로 하는 10인 1단 교화단(敎化團)을 조직하는 것이 특색이다. 각종 연구소 외에 교육기관으로 원광대학교(圓光大學校)·영산선원(靈山禪院) 등의 종합대학, 전문대학 1, 중·고등학교 6, 선원(禪院) 3개처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교당별로 설치한 유치원·유아원과 양로원·보육원·수양원 등 자선기관도 운영하고 있다. 한편, 교단 직영의 산업체로 제약회사를 비롯하여 4개의 농원과 정미소·원예원 등이 있으며, 복지기관으로 양·한방(洋韓方)의 종합병원과 보화당한의원 등이 전국 주요도시에 있다. 문화사업으로 경전의 출판과 《원광(圓光)》 《원불교신보(新報)》 등 정기간행물도 간행하고 있다. 1993년 현재 20개의 국내 교구에 520여 교당과, 미국·일본·캐나다·중국 등 3개의 해외교구에 20여 개의 해외 교당이 있으며, 신도수는 100여 만명에 이른다.

                                                             

 

신흥 종교(new religion)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제도종교에 비하여 성립 시기가 오래 되지 않은 종교. 이때 ‘새롭다’라는 의미는 기성종교와의 관련하에서만 쓰일 수 있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흔히 신흥종교라고도 일컬어져 왔으나 이 용어는 신종교가 교리·의례·조직의 측면에서 기성종교에 비해 정교화되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결핍된 종교라는 부정적인 함축을 띠고 있기 때문에 보다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용어로 신종교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신종교의 발생 원인은 아노미(anomie), 상대적 박탈감, 전통적 가치관 또는 기성 제도종교의 설득력 상실, 문화접변에 따른 충격 등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모든 ‘위기’마다 신종교가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신종교가 사회적 위기에 대한 반응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므로 각각의 구체적 사례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신종교는 교리혼합주의(syncretism), 기존 질서에 대한 부정, 현실주의적 구원관, 임박한 종말론의 강조, 선민사상, 신자 집단 내의 강력한 연대감 등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의 신종교는 19세기 말∼20세기 초의 개항기, 일제강점기와 1960∼70년대 산업화시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신종교는 동학계(東學系)·증산계(甑山系)·단군계(檀君系)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외에도 유교계·불교계·남학계(南學系)·기독교계·무속계의 신종교가 발생하였다. 이들 신종교는 《정감록(鄭鑑錄)》·남조선신앙(南朝鮮信仰) 등 종말론적 대망사상과 미륵신앙, 그리고 운세사상이 사상적 기반이 되어 후천개벽(後天開闢)을 표방했다. 동학(東學)의 최제우나 남학(南學)의 이운규(李雲圭), 정역(正易)의 김항(金恒), 증산교(甑山敎)의 강일순(姜一淳) 등의 세계관은 모두 후천개벽론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 시기 신종교의 효시인 동학의 성립에는 해체기에 직면한 조선봉건사회의 체제모순과 서양제국의 침략에 따른 대내외적 위기, 18세기 중엽 이후 빈발하던 민란, 그리고 유교의 위상 약화와 천주교의 확산이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특히 18세기 중엽 이후 빈발하던 민란은 동학의 성립 배경이자 동학이 대규모 민중종교운동으로 확대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동학은 최제우(崔濟愚)에 의해서 1860년 경상도 경주에서 성립되었다. 후천개벽을 선포했으며 연원제(淵源制) 조직원리에 기초한 접(接)과 포(包)조직을 통해서 포교를 행하였다.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에 이르러 삼남 일대로 교세가 크게 확대되었다. 94년에는 교단 차원의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과 민중의 변혁적 열망이 결합하여 동학농민전쟁을 수행하였다. 동학농민전쟁 이후에는 강원도·황해도·평안도 등지로 교세가 확산되어 전국 일원으로 널리 분포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3·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천도교청년당(天道敎靑年黨)을 중심으로 애국계몽적 문화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동학계 신종교는 천도교를 비롯해서 시천교(侍天敎)·수운교(水雲敎)·동학본부 등이 있다. 증산교는 증산 강일순에 의해서 1901년 전라도 모악산에서 성립되었다. 후천개벽과 해원상생(解寃相生)이 주요 교리이다. 핵심 주문인 ‘태을주(太乙呪)’의 첫머리가 ‘흠치흠치()’로 시작하기 때문에 흠치교로 불리기도 한다. 창교주 사후 극심한 분열의 모습을 보여 일제강점기에만 100여 개의 분파가 성립하였다. 주요 증산계 신종교는 보천교(普天敎)·태을교(太乙敎)·태극도(太極道), 그리고 1972년 태극도에서 파생하여 박한경(朴漢慶)이 설립한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와 1980년 안경전이 설립한 증산도가 있다. 대종교(大倧敎)는 홍암(弘巖) 나철(羅喆)에 의해서 단군신화의 모티프를 근간으로 1909년에 성립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등 강한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외에도 단군계 신종교는 한얼교·개천교(開天敎)·단군영모회 등이 있다. 원불교는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에 의해서 1916년에 성립된 종교이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표어 아래 종교신앙과 생활실천의 일치를 주장한다. 이 밖에도 금강도(金剛道)·각세도(覺世道)·봉남교(奉南敎:일명 찬물교), 강대성이 설립한 유교계 신종교인 갱정유도(更正儒道)가 있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 시기에는 기독교계 신종교가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는데, 이는 기독교의 급성장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이들 신종교는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과정에서 뿌리뽑힘의 위기를 겪고 있는 도시 대중들에게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고 심리적 소속감을 부여하는 통로로 작용하였다. 기독교계 신종교는 대체로 신비주의적 지향을 강하게 띠고 있으며, 기독교적인 메시아니즘(messianism)과 종말론, 그리고 토착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전 시기의 신종교가 사회개벽 지향적, 공동체적, 농촌중심형이라면 기독교적 종말론의 강조, 개인구원 중심, 도시형 종교라는 점이 이 시기 신종교의 특징이다. 통일교(정식 명칭은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전도관(傳道館)·승리제단(勝利祭壇)·애천교회 등이 대표적이다. 1954년 문선명(文鮮明)이 설립한 통일교는 반공주의와 성적 타락을 주장하는 등 독특한 성경해석을 하고 있으며 주된 교리서로 《원리강론》이 있다. 국내보다 일본·미국 등지를 중심으로 세력을 크게 확산하였다. 박태선(朴泰善)이 설립한 전도관은 메시아를 자처하여 1950년대부터 전도관과 신앙촌을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펼쳤다. 승리제단(일명 영생교)은 조희성이 전도관으로부터 독립하여 1980년에 설립하였다. 임박한 종말과 영생 불사를 주장하고 있다. 이외에도 관성교·무량천도와 같은 무속계 신종교도 있다. 외래 신종교로는 일본계의 창가학회(創價學會:일명 남묘호랭교)·천리교, 미국계의 여호와의 증인·모르몬교·안식교, 그리고 중국계의 일관도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종교는 왜색(倭色) 시비로, 여호와의 증인교는 수혈거부와 집총거부 등으로 사회적 관심을 끌기도 했다. 종교는 사회구조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신종교의 발생은 사회변동에 대한 반응이자 동시에 사회변동의 촉발제가 되기도 한다. 신종교의 발생은 그 자체가 당대의 사회적 위기상황이나 기성종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성립된 것이기 때문에 기성종교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며, 그 사회와 종교를 혁신하기 위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한다. 이로 인하여 기성종교와 사회로부터 이단·사이비종교·사교(邪敎) 등으로 배척받기도 한다. 이와 같은 신종교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상당 부분 자의적인 것이거나 결과론적인 것으로 신종교가 지니는 사회고발적 성향이나 창조성을 무시할 위험성이 있다. 그러므로 기성종교나 사회제도의 관점에서 신종교에 가하는 평가를 신종교 일반의 성격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2006-06-19 17:08 | 출처 : 본인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