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의 난과 최씨정권 / 고려의 여진 정벌

2013. 10. 29. 12:52우리 역사 바로알기

 

 

 

 

 

      

무신의 난과 최씨 정권 수립/고려의 여진 정벌 한국사 민족사

2009/05/11 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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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난과 최씨 정권 수립


    고려 태조는 개국 이후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에 힘쓴 실력있는 장군들이 혹시라도 왕권에 도전하지 않을까 우려하여 유교주의적 정치를 펴는 동시에 점차 무신을 멀리하고 문신을 많이 등용했다.
    이것이 하나의 전통이 되어 고려는 대대로 문신을 높이 쓰고 무신을 홀대하는 문치주의 경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더욱이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치른 후에는 문신들이 군대의 우두머리가 되어 작전을 짜고 명령했기 때문에 무신은 한낱 임금의 호위병쯤으로 여겨지고 천시당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거란과의 전쟁을 계기로 무신이나 군인의 세력이 실제로는 상당히 상향되어 있었기 때문에 은연중에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는데, 이자겸의 난 이후 무신이 반란군 편에서 활약함으로써 무신 불신풍조가 만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만해진 무신들이 군인에게 지급했던 토지까지 빼앗음으로써 군인의 사기와 지위는 땅에 떨어지고 불만이 커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18대 임금으로 등극한 의종은 총애하는 몇몇 문신들과 어울려 노는 것만 좋아했고, 정사는 측근 문신들에게 맡기다시피 했다.
    이렇게 되자 가뜩이나 교만한 문신들이 무신을 자기집 종이나 되는 것처럼 취급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은 자기 아버지의 권력을 믿고 대장군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우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무신들은 새파란 젊은 문신들이 임금의 총애를 받는 것을 미끼로 함부로 사람을 업신여기고, 자기 아버지뻘이나 되는 나이 많은 장군들에게까지 손찌검을 하는 데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난을 일으켰다.

    이와 같이 고려의 무신난은 고려 귀족 사회의 자체 모순과 함께 차별 대우에 대한 군인의 불만이 의종의 실정을 계기로 폭발하여 일어나게 되었다.
   의종 24년인 1170년 8월, 왕이 문신들을 거느리고 보현원(지금의 장단)에 놀이를 나간 틈을 타서 대장군 정중부는 이의방, 이고 등의 동조를 얻어 난을 일으켜 썩은 문신들을 모조리 잡아죽이고 왕과 태자를 멀리 남해로 귀양보냈다. 이것이 ⌈경인의 난⌋ 또는 ⌈정중부의 난⌋ 이라고 하는 무신의 난이다.
    자기들을 멸시하던 문신들을 모조리 잡아죽이고 임금을 내쫓은 정중부 등 무신들은 의종의 어린 동생을 임금으로 앉혔는데 그가 바로 명종이다. 무신들은 문무 관직을 모두 독차지하여 자기들 마음대로 정치를 했다. 그러나 그 동안 쌓이고 쌓였던 분노가 폭발되어 난을 일으키고 정권을 잡기는 했으나, 무신들은 어떻게 정치를 해야 하는지, 또 어떤 정치가 옳은지 판단할 수 없을 만큼 무식한 군인들이 대부분인데다가 닥치는 대로 구가와 개인의 토지와 재산을 빼앗음으로써 나라꼴이 엉망이 되었다. 게다가 반란 세력의 장군들가에도 정권 장악을 놓고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벌어져 다수의 무신이 죽어 갔다.


    먼저 장군 이고가 정중부에게 대항했다가 살해당했고, 이의방 역시 그의 딸을 태자비로 들여보낸 후 정권을 한 손에 잡고 휘두르다가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 의해 역시 살해당했다. 또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이 거제도에 귀양가 있던 전왕 의종을 다시 옹립하여 경주에서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했다. 그리하여 그나마 살아 남았던 다수의 문신들이 죽음을 당했고, 정중부 일당의 행패는 점점 더 심해져 초야에 묻혀 있는 선비는 무론 죄 없는 백성마저 함부로 죽이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렇게 되자 각처에서 의병이 조직되고, 왕권을 되찾겠다는 일부 문신들의 반란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명종 4년에는 귀법사의 승려 백여 명과 여러 절에서 모인 승려 2천여 명이 무신들의 난을 평정하겠다고 개경 성벽을 넘어 들어오다가 피살되기도 했다. 또한 같은 해 9월에는 서경유수 조위총 등이 개경으로 진격해 왔으나, 역시 패하여 무신들의 콧대만 더욱 높여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무신들은 거의 모든 관직을 독점했고, 장군들이 모여 서 회합을 갖는 ⌈중방⌋이라는 새로운 권력청을 두어 크고 작은 일까지 모두 이곳에서 결정지었다. 왕은 단지 이름뿐이었고 정치는 장군들이 중방에 모여 멋대로 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정중부는 스스로 문하시중이 되어 함께 난리를 일으킨 다른 장군들을 다 물리치고 아들 정균과 함께 권력을 독점해 못된 짓을 일삼았다. 이에 화가 난 장군 경대승이 난을 일으켜 정중부 부자를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경대승은 비록 무식한 장군이었지만 성격이 결백하여 무인들의 횡포를 막으려 노력했고, 아버지인 경진이 농민들로부터 뺏은 토지와 재물을 돌려주어 인심을 얻었다. 그는 ⌈도방⌋이라는 사설 단체를 두어 신변 보호에 힘쓰면서 혁신적인 정책을 많이 실시했으나 20세에 요절했다.
   경대승이 죽은 후, 김보당의 난 때 경주에서 의종을 죽여 난을 평정하는 데 기여한 공으로 장군이 된 천민 출신 이의민이 세도를 부리다가 최충헌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이리하여 30여년에 걸친 무신들의 권력 다툼과 사회 혼란은 가라앉고, 최충헌 형제에 의한 독재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의민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최충헌은 먼저 이의민 일파와 그에게 동조하던 썩은 무신들을 모조리 쫓아낸 후, ⌈10조 봉사⌋라는 혁신적인 쇄신 정책을 건의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게 했다. 또한 문신들도 등용하는 선정을 베풀어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정권을 잡으려는 무리들이 각지에서 암암리에 그를 암살하고자 했다. 이에 신변에 위험을 느낀 최충헌은 경대승이 실시한 적이 있는 ⌈도방⌋을 다시 세워 6번 교대로 집을 지키게 했다. 이것이 ⌈도방 정치⌋의 시초이다.


    정치에 맛을 들인 최충헌은 자기의 지위를 더욱 확고히 굳히고자 명종 임금을 폐위하고 새 왕을 세우는 등 역대 왕들을 마음대로 세우고 폐위시킴으로써 왕은 이름뿐이었고 실권은 모두 최충헌에게 있었다. 그는 또한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은 친동생 최충수뿐만 아니라 누구를 막론하고 모조리 죽여 버렸으며, 반대자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교정도감⌋이라는 정보 기구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것이 한걸음 나아가 일본의 막부와 같은 구실을 하게 되어 역대 최씨 집권은 마치 막부 대장군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그 후 그의 아들 최우가 대를 이어 역시 강력한 독재 정치를 했으며, 최씨 정권은 최항, 최의에 이르기까지 무려 4대 60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최충헌 다음으로 최씨 정권을 강력하게 만든 최우는 아버지와는 달리 문신과 무신을 골고루 등용해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정치 문제를 자유로이 의논할 수 있는 ⌈정방⌋을 자기 집 사랑방에 설치했다. 또한 무술에 뛰어난 무인들을 뽑아 ⌈야별초⌋를 조직하여 그의 사저를 지키게 했다. 야별초는 이후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게 되었고, 훗날 몽고군과 끝까지 대항한 삼별초의 근간을 이루는 부대로 성장했다.

 

 

고려의 여진 정벌

    거란과 모처럼 평화가 수립되어 한시름 놓을 무렵, 또다시 고려를 괴롭힌 것은 다름 아닌 여진족이었다. 고려가 덕종 2년인 1033년부터 정종 10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12년이라는 긴 세월을 소비하여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았던 것도 거란뿐만 아니라 여진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여진은 수와 당나라 대에 말갈이라고 불리던 북방 민족의 하나로 오랫동안 고구려의 백성으로 복속되어 있었고, 발해 건국 당시에는 일부 부족이 고구려 유민과 힘을 합쳐 당군을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하는 데 공헌하기도 했다. 이후 대부분의 여진족은 발해의 국민이 되어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발해가 거란에 의해 망한 후에는 거란의 지배하로 들어간 소수의 여진족을 제외한 대부분이 반독립 상태로 있으면서 고려와 거란을 상국으로 섬겼다. 그들은 그때까지 국가를 형성할 수 있을 정도로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앞서 있고 역사적으로 오랜 관계를 맺었던 친근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부르며 고려를 통해 문화와 경제적 욕구를 만족시키려 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식량, 포목, 철제, 농기구, 철제 무기 등 필요한 물품을 고려에서 구입해 갔고, 대신 마필이나 모피 등을 고려에 바치곤 했다. 그들 중에는 원주지에 살면서 수시로 왕래하며 고려의 신하 노릇을 자청하는 향화인이 많았고, 심지어는 아예 고려에 들어와 고려 백성이 되고자 하는 투화인도 적지 않았다. 고려는 이들에게 가옥과 토지를 주어 생활 근거지를 마련해 주었고, 많지는 않았지만 경우에 따라서 능력 있는 자를 공직에 임명하기도 했다. 그래서 고려가 거란과 싸울 때 여진족이 한몫을 단단히 해낸 적도 있었다.


   그러나 11세기 중엽 북만주에 있던 여진족의 일파인 완안 부족에 영가라는 추장이 나타나면서부터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그의 조카 우야소에 의해 완안부를 중심으로 여진 전체가 통일되는 새 기운이 일어나면서 정세는 크게 변했다. 이때부터 완안부는 고려에도 세력을 뻗쳐 정주관까지 침략해 들어와 고려와의 관계가 점차 험악해지게 되었고, 마침내는 몇 차례의 군사 충돌까지 있었다. 특히 숙종이 임간 장군을 보내 우야소군을 쳤다가 오히려 크게 피해 군사를 거의 잃고 돌아오자 고려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고려의 상비군인 6위가 약화되었고, 보병 위주의 고려군이 기병인 여진군을 이기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숙종 때에는 윤관의 건의에 따라 ⌈별무반⌋이라는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게 되었던 것이다. 상비군인 6위가 약화되었고,  상비군인 6위와는 별도의 군단이란 뜻에서 별무반이라고 이름지은 듯하며, 신기군. 신보군. 향마군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신기군 기병이고 신보군은 보병인데 각기 귀족과 양민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숭병으로 조직된 항마군은 마귀의 항복을 받는 군대라는 뜻이다.


    고려는 이들을 훈련시켜 대규모 여진 정벌 계획을 수립했으나 숙종이 죽음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예종 2년에 왕명을 받은 원수 윤관이 부원수 오연총과 함께 17만 대군을 이끌고 천리장성을 넘어 여진족의 땅으로 진격했다. 그는 북으로 두만강 유역까지 나아가 적의 주력 부대를 격퇴하고, 이곳에 함주. 길주.공험진 등 9성을 쌓아 백성들이 옮겨 살도록 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방어하도록 했다.
   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데, 일본 학자나 일부 국내 학자들은 함흥평야로 보는 경향이 있고, 소수는 오늘의 연변 자치 지역까지 포함시킨 두만강 유역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9성의 북쪽 지역 공험진에 세운 척경비인 선춘령비의 위치가 백두산 동북쪽 700리에 있었다는 <고려사> 지리지의 기록에 따르면 9성의 일부가 간도 지방에까지 걸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더욱이 일제시대 간도 파출소에서 간도 개척 관계를 조사할 때 촌민들이 소하 강변에서 건진 큰 비석을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글자가 거의 지워져 읽을 수는 없었지만 비를 세운 시기를 알려 주는 간지가 예종 2년의 간지와 같다는 당시 촌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선춘령비는 소하강 근처에 세워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윤관의 여진 정벌의 성공과 9성의 경영은 고려 왕조 역대의 숙원을 풀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나라 역사의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한 기념비적인 사실이었다. 그러나 살 곳을 잃게 된 여진족은 거의 발악적으로 고려를 괴롭혔다. 윤관이 개경으로 돌아오자 여진은 즉시 웅주성을 에워싸고 맹렬한 공격을 감행했고, 할 수없이 윤관은 왕명을 받아 다시 한번 싸움터로 나아가 웅주성을 구해야만 했다. 이후에도 여진족은 여러 차례 침공해 왔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다급해진 여진족은 청화사를 보내 9성을 돌려주면 대대손손 고려를 침공하지 않고 해마다 조공을 바치겠다는 맹세를 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조정에서는 9성의 위치가 도성에서 너무 멀어 이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주 군사를 일으켜야 하고, 나라 안에서도 오랜 전쟁으로 백성이 많이 죽은데다가 기근과 질병마저 늘어나 백성의 원성이 높다는 이유로 9성을 돌려주자는 공론이 지배적이었다. 예종은 할 수 없이 조공을 조건으로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고 말았다.
그 후 우야소의 아우 아골타가 여진을 통일하여 나라를 건국하니, 바로 금이다. 금나라는 1125년에 요를 멸한 다음, 송을 쳐서 서울 변경을 함락시켜 흥종과 휘종 두 황제를 포로로 잡아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금은 고려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오히려 고려를 협박해 군신의 관계를 맺을 것을 강요했다. 고려에서는 오랑캐들의 무례한 짓이라며 많은 사람이 분개하여 반대했으나,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이자겸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외적으로 평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 인종을 움직여 금의 요구를 승낙하고 말았다. 이로써 금의 군사적 침략은 없었고 금이 망할 때까지 평화 관계가 유지되었으나, 고려의 북진 정책은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