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의 정변과 거란의 재침 /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자주북진운동

2013. 10. 29. 13:05우리 역사 바로알기

 

 

 

 

 

      

강조의 정변과 거란의 재침/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자주 북진 운동 한국사 민족사

2009/05/11 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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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의 정변과 거란의 재침


   
성종의 뒤를 이어 경종의 아들인 목종이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어머니인 천추태후가 대신 정사를 돌보았다. 일찍이 천추태후는 외척인 김치양과 정을 통해 좋지 않은 소문이 난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성종이 김치양을 머리 귀양보냈는 데, 목종이 즉위하자 천추태후는 기다렸다는 듯이 김치양을 다시 불러들여 공공연히 정을 나누며 그에게 정사를 맡기다시피 했다.
   이제 고려 조정은 김치양의 일파들로 가득 차게 되었고, 김치양은 제멋대로 정치를 하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으며 아무거리낌 없이 천추태후와 놀아났다. 그러다가 천추태후와의 사이에 아이까지 낳게 되자 목종을 없애고 그의 아들을 왕으로 삼으려는 나쁜 음모를 꾸미기에 이르렀다.


   원래 효성이 지극하고 마음이 여렸던 목종은 이 사실을 알고도 어쩌지를 못하고 속을 끓이다가 마침내는 후손도 없이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목종은 중추원 부사 채충순을 비밀리에 불러 김치양의 음모를 말하며 ⌈왕건 태조의 손자는 오직 욱의 아들이 대량원군뿐이니, 그대는 중추원사 최항과 힘을 다해 대량원군을 후계자로 삼아 내 뒤를 잇게 하여 왕위가 타인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하고, 친히 대량원군에게 후사를 부탁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목종은 눈앞의 급변에 대비하기 위해 서북면 순검사로있던 강조를 비밀리에 개경으로 불러들여 어지러운 대궐을 지키도록 했다. 당시 대궐 밖에서는 왕의 병이 위독하여 정사를 돌볼 수 없는 틈을 타서 김치양의 무리가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는 소문이 퍼져 인심이 매우 어지러웠다. 심지어는 목종이 이미 죽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어명을 받은 강조는 날쌘 군사 5천 명을 이끌고 급히 개경으로 올라오던 중에 부하 장군들과 나약한 임금 목종을 폐위키로 하고 대량원군을 새 임금으로 받들어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고자 했다. 이렇게 하여 급히 즉위한 왕이 바로 현종이다. 대궐로 들어온 강조는 즉시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그의 잔당 30여 명을 해도로 귀양보내는 한편, 목종을 폐위하여 천추태후와 함께 충주로 방출했다. 두 모자가 충주로 향해 갈 때 목종은 태후가 배고프다고 하면 옷을 벗어 음식과 바꾸어 밥상과 밥그릇을 받들어 올렸고, 태후가 말을 타고 떠날 때면 친히 말고삐를 잡는 등 극진한 효성을 다했다 한다.
   강조는 목종을 살려 둔 것이 못내 불안해 목종 모자가 경기도 적성 땅에 이르렀을 때 사람을 보내 목종을 죽이고 문짝으로 관을 만들어 현관에 안치했다가 다음 달에 화장하여 적성 남쪽에 장사지냈으니, 그 무덤이 공능이다. 이것이 목종의 비극적인 최후이고, 이 사건은 거란이 다시 침입하는 구실이 되었다.


    현종은 즉위하자마자 사신을 거란에 파견하여 목종의 죽음과 신왕의 즉위를 알렸고, 그 후로도 몇 차례 사신을 보내 거란의 감정을 풀고 국교를 두터이 하고자 했다. 그러나 거란의 성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야망을 달성해 보려고 신하 강조가 목종을 죽인 죄를 묻는다는 명분을 앞세워 친히 40만의 대병을 이끌고 오늘의 의주인 홍화진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순검사 양규는 정성, 이수화 등과 함께 외로이 포위된 성을 굳게 지켰고, 거란 성종은 개경으로 전진하기에 앞서 배후의 요충지인 홍화진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빠른 시일 내에 손아귀에 넣고자 했다. 그래서 여러 번 홍화진에 글을 보내 ⌈우리가 쳐들어온 것은 강조가 옛 임금을 죽이고 새 임금을 세운 것을 문책하려 한 것이니, 강조를 붙들어 보내면 곧 퇴군할 것이나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개경으로 곧장 쳐들어가 너희의 처자들까지 깡그리 죽이겠다.⌋며 고려의 장병을 위협했다.
    그러나 아무 효과가 없자, 비단과 은그릇을 성안의 장병에게 보내 항복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래도 고려의 장병들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자 할 수 없이 거란 성종은 포위를 풀고 홍화진을 그대로 남겨둔 채, 20만 대병을 새로 편성하여 통주 방면으로 쳐들어갔다.


   이에 앞서 행영도통상에 임명된 강조는 군사를 거느리고 통주성 남쪽에서 기다리다 거란군과 싸워 승리했다. 그러나 이후 적을 지나치게 경시하여 대비에 소홀한 나머지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 이때 거란 성종은 강조를 달래 자기의 신하가 될 것을 권유했으나, 강조는 끝까지 ⌈고려 사람으로서 어찌 또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라며 완강히 거절하여 마침내 장렬히 죽음을 맞았다.
   이후 거란군은 총사령관을 잃은 고려군을 쉽게 격파해 개경을 점령했고, 현종은 멀리 나주로 피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명장 양규 등이 후방에서 굳게 버티고 있었고 귀주 일대에서 거란군을 괴롭혔다. 이에 보급로가 차단될까 두려워하던 거란은 고려측이 강화를 요청하자 현종이 친히 요나라 궁정에 입조할 것을 조건으로 별 소득없이 물러갔다. 그러나 현종이 거란 조정에 입조한다는 조건은, 고려가 실제로 원하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실현될 수도 없었고 또 실현되지도 않았다.
한편 개경에 들어갔다가 아무 소득도 없이 물러가던 거란군은 길목을 지키고 있던 순검사 양규와 귀주 별장 김숙홍에게 대패하여 수만 명의 군사를 잃었으며, 압록강을 건너다가 다시 정성 장군 부대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대단히 많은 숫자가 물에 빠져 죽었다.


   그 후 거란은 현종의 친조와 강동6주를 되돌려 달라며 여러차례 소규모적인 침입을 하더니, 현종 9년인 1018년에 소배압을 대장으로 하는 10만 군사를 일으켜 제3차 침입을 했다. 이에 고려는 서북면 행영통사 강감찬을 상원수로,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임명해 평안도 안주에서 적을 막게 했다.
   강감찬은 거란군이 오기 전에 홍화진 삼교천을 소가죽으로 막아 물을 적게 흐르게 했다. 그리하여 거란군이 마음놓고 건너가게 한 다음, 적이 한가운데에 이를 즈음 갑자기 물을 텄다. 적이 물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허우적거릴 때 미리 매복해 있던 군사로 덮쳐 크게 승리했다. 또한 강감찬은 소배압군이 도처에서 고려군의 공격에 시달리다가 견디지 못해 퇴각하는 것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여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했다. 이때 거란군 10만중에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대승리였다. 이리하여 거란의 침략은 실패하고 말았다. 고려는 이민족의 침략에 군관민이 단결하여 용감히 싸워 물리쳤기 때문에 거란 역시 침략을 포기했고, 현종10년에는 양국이 강화하여 평화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자주 북진 운동


   
예종이 죽고 인종이 14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외조부 이자겸이 세력을 잡게 되었다. 인주 이씨는 이자연 때부터 왕실의 외가로서 권력을 잡기 시작하여 그의 손자인 이자겸 때에 이르러 크게 세력을 떨쳤다. 이자겸은 딸을 예종의 부인으로 들여 그 소생인 인종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게 하고, 자기 세력을 더욱 확고히 하고자 외손자인 인종에게 다시 두딸을 왕비로 삼게 함으로써 이자겸은 인종의 외조부이자 장인이 되었다. 이렇게 위세가 커지자 자기가 싫어하는 인물은 갖가지 중상모략으로 내쫓고, 자기에게 아첨하는 사람만을 중요한 벼슬자리에 앉혀 마음대로 권세를 누렸다.
    그는 왕보다 더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으며 행패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끝내는 왕위까지 빼앗으려는 욕심까지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자겸은 ⌈십팔자(十八子)⌋, 즉 ⌈이씨(李氏)⌋가 왕이 도리라는 유언비어를 유포시키고 왕을 폐위하려 했다.


    이러한 기미를 알아챈 왕은 신하 김찬과 안보린, 장군 최탁 등을 시켜 이자겸 일파를 몰아내려 했다. 왕명을 받은 최탁 장군은 군졸들과 함께 이자겸 일파인 척준경분터 먼저 제거하고자 그의 아들과 아우를 죽였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척준경은 도리어 부하들을 이끌고 대낮에 궁궐을 부수고 불을 질러 쳐들어가니, 인종은 도리어 반란군에 붙들려 이자겸의 집에 갇히고 말았다.  왕을 자기 집에 가둔 이자겸은 몰래 독약을 먹여 죽이려 했으나, 그의 딸인 왕비가 사전에 알고 못 마시게 함으로써 겨우 화를 면했다. 그러나 이후 인종은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이자겸이 왕노릇을 했다. 이자겸과 척준경은 반란 이후 권력을 함부로 휘둘러 횡포가 더욱 심하더니, 어느새 서로간에 불화가 생겼다. 고난은 함께 할 수 있지만 영화는 함께 하기 어렵다는 말 그대로였다. 인종의 어의로 있던 최사전은 이것을 잘 이용하여 척준경으로 하여금 죄를 뉘우치게 하고 왕을 받들 것을 종용했다. 그러자 척준경은 왕명을 받들어 이자겸의 일파를 제거하고, 전남 영광으로 이자겸을 귀양보냈다. 그리고 얼마 뒤 척준경마저 탄핵을 받아 귀양가서 병들어 죽음으로써 한때의 영화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이자겸의 난은 진압되었으나 그 여파는 참으로 컸다. 궁궐이 불탄 데다가 인종이 이자겸의 손에서 놀아남으로써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으며 인심도 매우 흉흉했다. 이때 승려 묘청이 등장하여 이러한 모든 고난들이 닥친 것은 개경의 지덕이 쇠약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수도를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옮기면 왕권이 강화되고 나라도 강해져서 다시 한번 북진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묘청의 주장은 국도를 서경으로 옮겨 민심을 새롭게 하고 기울어 가는 나라의 기운을 바로잡자는 것이었다. 당시 묘청이 주동이 되어 새 도읍지로 내세운 서경은, 묘청의 고향이기도 했지만 원래 고조선의 중심지였으며 고구려의 서울이기도 했던 곳으로,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오랜 도시 중의 하나였다. 더구나 고구려의 계승국이라고 자부해 온 고려로서는 태조 왕건 때부터 서경의 재건에 힘썼고, 지명도 일부러 서경으로 고쳐 개경 다음가는 도시로 만들기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던 곳이다. 당시 풍수지리설에 능한 사람들은 모두 개경보다는 서경이 지덕이 왕성해서 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 왕기가 뻗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자주 정신이 강했던 고려인들은 금에 굴복해 사대의 예를 취한 것에 반발이 심했다. 어제까지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우러러보던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고 강성해지자 거꾸로 그들의 임금을 황제로 받들도록 요구한 것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이에 묘청은 뜻을 함께 했던 정지상, 백수한 등과 결탁하여 우리 나라도 왕을 황제라고 부르도록 하자고 인종에게 건의했다. 개경은 이미 운이 다했으니 서울을 서경으로 옮기면 국운이 연장되고 금나라는 물론, 그밖에 36개국이 조공을 바치리라고 인종을 설득해 천도 계획을 세우고 서둘러 서경에 대화궁을 짓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개경 출신 유학자인 김부식, 이지저 등은 묘청 일파의 말이 황당한 거짓말이며, 풍수지리설도 근거 없는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며 맹공을 퍼부었다. 그리고 황제로 칭호를 바꾸면 중국의 큰 나라들이 감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등의 이유를 내세워 서경 천도 운동에 맹렬히 반대했다. 사실 김부식 일파는 인주 이씨 대신 정권을 차지한 문벌 귀족으로 정권 유지 차원에서 현상 유지를 고집했던 사대파요, 이에 반하여 풍수설에 심취해 있던 신진 세력 묘청 일파는 고려의 정치를 혁신하여 자주적 부국강병책을 성취해 보려고 한 자주파인 셈이다.


    이렇게 조정이 두 파로 나뉘어 싸우게 되자, 자연히 수적으로 우세한 사대주의 김부식 일파가 묘청파를 눌러 서경 천도를 포기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서경 천도의 희망을 완전히 잃은 묘청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드디어 난을 일으켰다. 묘청은 인종 13년인 1135년에 서경의 주요 관원들과 결탁하여 ⌈대위국⌋이란 나라를 세우고 연호를⌈천개⌋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동조하는 조광, 유담 등과 의논하여 북부 지방 사람들을 관리로 임명하고 김부식의 개경 세력에 대항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인종은 즉시 김부식을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묘청의 반란을 진입하도록 했다. 김부식은 출전하기에 앞서 개경에 남아 있던 묘청 일파인 정지상, 김안 등이 목을 벤 후 서경으로 진군했다. 김부식의 관군을 맞아 묘청은 끈질기게 대항했으나, 어이없게도 자신이 부하였던 조광한테 배신당해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고려 사회를 자주 국가로 새롭게 만들어 고구려 옛 땅을 회복하려던 서경 천도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사대주의적 문벌 귀족이 판을 치게 되었다.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북벌 추진은 ⌈조선 역사 1천 년의 가장 큰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묘청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김부식 등 사대주의적 문벌 귀족들은 더욱 세력을 강화하여 문신 위주의 문벌귀족 체제를 굳혀 나아감으로써 고려 사회는 깊은 수렁의 늪으로 빠져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무신난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