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조의 후삼국 통일 / 광종의 개혁과 왕권강화 / 성종의 치적과 국가통치기구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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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의 후삼국 통일/광종의 개혁과 왕권 강화/성종의 치적과 국가 통치 기구의 완성 한국사 민족사

2009/05/11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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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의 후삼국 통일


   궁예를 내쫓고 군신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왕건은 국호를 『고려』, 연호를『천수』라 하고 수도를 송악으로 옮겼다. 국호를 고려라 한 것은 고구려의 후계자라는 뜻인데, 장차 후삼국을 통일하고 옛 고구려의 땅을 되찾겠다는 태조의 포부가 반영된 것이었다.
    왕건은 즉위하자마자 궁예 시대와는 달리 신라와 화친하는 정책을 쓰는 한편, 사방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적극적인 평화 교섭을 벌임으로써 신라와 후백제 국경의 많은 지방 세력들이 그에게로 귀의하게 했다.


   견훤이 신라에 침입하여 경애왕을 죽였을 때도 왕건은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후백제군과 싸웠다. 그러나 견훤의 군대와 팔공산에서 마주쳐 일대 격전을 벌인 끝에 고려의 명장 신숭겸과 김락 장군은 전사하고 왕건도 겨우 목숨만 보전하여 패주하는 참패를 맛보아야 했다. 원래는 신라의 군신이 모여 신라를 위협하는 후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고려와 화친하여 원병을 끌어들이는 문제를 의논하고 있었다. 그런데 견훤이 선수를 쳐서 경주로 쳐들어가 고려와 화친하려던 경애왕을 위협하여 스스로 자결하도록 하고 경순왕을 세운 후, 신라의 대신을 포로로 잡고 신라 궁궐의 온갖 보물을 강탈해 돌아가다가 고려군과 충돌한 것이다.
    그러나 경순왕 역시 후백제를 미워하여 더욱 고려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에 힘써 마침내는 신라의 초청으로 왕건이 직접 신라의 서울 금성을 방문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왕건은 겸손하고 인자한 인상을 주어 신라인으로부터 부모를 대함과 같다는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고려와 후백제는 이후에도 쉴 새 없이 싸움을 벌였다. 고려는 후백제의 신라 침략을 봉쇄하는 방법으로 상주로부터 강주로 이어지는 낙동강 서부 지역에 방어망을 구축하고자 했고, 후백제는 반대로 이 방어선을 뚫고 동진하는 정책을 썼기 때문에 양국 군대는 문경, 풍기, 안동 등 곳곳에서 전투를 벌여야 했다.
   처음에는 견훤의 군사가 너무 강해 고려군이 수세에 몰렸으나, 930년(태조 13년) 지금의 안동인 고창 전투에서 극적으로 후백제군을 격파한 것을 계기로 고려측이 우세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그 이듬해 견훤의 신하 공직이 고려에 귀순하면서부터 전세는 역전되어 고려 세력이 후백제를 능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태조 17년에는 후백제의 웅진 이북 30여 성이 고려에 투항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후백제 내부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견훤은 아내가 여러 명이어서 아들도 10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았으므로 견훤이 특별히 사랑하여 장차 자기의 자리를 물려주려했다.
    그러자 신검은 양검과 함께 음모를 꾸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신검은 견훤을 폐위시켜 금산사에 가두고 금강을 죽인 다음 대왕을 자칭했다. 이렇게 40여 년간 쌓은 왕업이 못난 아들들에 의해 하루 아침에 무너져 버리자, 견훤은 인생이 덧없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금산사에 유폐되고 3개월 후에 견훤은 나주로 달아나 고려에 투항했고, 왕건은 뛸 듯이 기뻐하며 명장 유검필로 하여금 서해에 배를 띄워 견훤을 맞게 했다.
   견훤은 고려에 망명해 그의 적인 왕건에 의탁하여 못난 아들에 대한 복수를 꾀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견훤을 개경으로 성대히 맞아들여 『상부』라 칭하고, 양주를 식읍으로 내려 극진히 대접했다. 이렇게 되자 순천 지방의 세력가인 견훤의 사위 박영규가 고려로 내통해 왔고, 왕건은 신검군 정벌을 자원하는 견훤을 선봉장으로 임명하여 936년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후백제 정벌에 나섰다.


   드디어 경북 선산 일리천에서 격전이 벌어졌는데 후백제군이 대패하고, 끝내는 신검마저 항복함으로써 후백제는 건국한 지 45년만에 패망하고 말았다. 왕건은 후백제 지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검이 묶인 채 끌려오자, 죽이지 않고 오히려 위로하며 벼슬을 내려 주었다. 이에 견훤은 신검을 죽이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와 번민으로 등창이 나서 수일 후에 황산의 절에서 운명했다.

 


   이에 앞서 신라는 국토가 나날이 고려로 흡수되고 국력이 약해져 독립군가로서의 체모를 갖추기조차 어렵게 되자, 경순왕 9년인 935년 군신들과 협의한 끝에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시랑 김봉휴로 하여금 항복 문서를 쓰게 하고 고려에 항복을 자청하기에 이르렀다. 11 월에 고려 태조는 신라의 항서를 받고 신라왕에게 고려로 들어오도록 명했다.
    경순왕이 문무백관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고려로 향했을 때 그 일행이 탄 수레와 말들이 30여 리에 이르렀고,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길을 메울 정도였다고 한다. 태조가 교외까지 나가 영접하여 위로하고, 경순왕 김부를 정승에 봉하고 그 지위를 태자보다도 높게 했다. 그리고 태조의 맏딸 낙랑공주를 경순왕의 아내로 삼았으며 경주를 식읍으로 내려 주었다.


    한편 거란에 의해 멸망한 발해의 고구려계 유민들이 고려로 망명해 오자, 태조는 이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여 전택과 벼슬을 주어 우대했다. 당시 고려로 온 발해 유민 가운데에는 관직자, 장군, 학자, 승려 등 상류층 지식 계급이 상당수 있었는데, 왕건은 이들을 적재적소에 임명하여 후삼국 통일에 활용했다. 특히 발해의 마지막 세자 대광현에게는 왕계라는 성명을 줌과 동시에 왕족의 족보에 넣어 동족의식을 분명히 했고, 그의 선조에 대한 제사를 받들게 했다. 이리하여 고려는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고구려계 유민들까지 포함한 민족의 통일을 이룩하게 되었던 것이다.


    태조 왕건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며 북진 정책을 펴서 청천강까지 국경을 넓혔고, 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개척하여 서경이라 이름짓고 북진의 전초 기지 삼았다.
    태조 25년 10월 거란이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의 뜻으로 낙타 50필을 바쳤을 때 태조는 거란을 동족 국가인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라 하여 사신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낙타는 개경의 만부교 밑에 붙들어 두고 굶어 죽게 하는 등 적개심을 나타냈다. 이러한 태조의 북진 정책은 후대의 왕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왕건은 말년에 후대 왕들에 대한 가훈적인 당부를 훈요 10조로 남겼다. 또한 자신이 죽은 후의 정국을 우려하여 신하의 도리를 밝힌 『정계』와 『계백료서』 8편을 지어서 반포하기도 했다.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 너무나 많은 시간과 정력을 빼앗겨 고구려 국토 회복이라는 큰 꿈을 실현하기도 전에 아깝게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광종의 개혁과 왕권 강화


  
태조 왕건이 재위 26년만에 주고 뒤를 이어 혜종이 즉위했다. 태조가 생존해 있을 때에는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에 공훈을 세운 공신이나 강력한 지방 세력들이 진심으로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태조 사후에는 배다른 왕자들 사이에 왕위 계승을 놓고 불화가 발생했으며. 신하들 역시 분열되어 권력투쟁을 벌임으로써 고려 정국은 불안하게 되었다.
   태조의 큰아들 혜종은 장화왕후 오씨 소생이다. 태조가 궁예의 장군으로서 나주를 경영할 때 목포 해안에 배를 대고 상륙하려고 육지를 바라보니 시냇물 위에 오색 구름이 떠 있었다. 이상히 여겨 가보았더니 아리따운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서로 사랑하게 되었는데 이 여인이 후에 장화왕후에 봉해진 오씨 부인이다. 이 무렵 태조 왕건의 나이가 이미 30여 세에 달해 당시로는 자식이 늦은 셈이었는데, 맏아들 태자 무까지 낳아 주자 태조의 사랑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왕건이 즉위한 후 후계자를 정하는데 있어서 큰 고민이 생겼다. 태자 무가 7 살이 되자 태조는 그가 왕위를 계승할만한 덕성을 가졌음을 알고 후계자로 삼고자 했으나, 어머니 장화 오씨의 친정 집안인 목포 오씨 가문이 견훤군의 침략으로 몰락함으로써 태자 무를 도와줄 세력이 너무도 미약했던 것이다. 그래서 태조는 국가에 공훈을 세워 조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충남 면천의 세력가 박술회를 후견인으로 정해 주고 태자 무를 후계자로 정한 후 눈을 감았다.
    그러나 혜종 즉위 초년의 상황은 태조가 우려했던 것 이상으로 혼란스러웠다. 태자 무의 이복 동생 태자 요와 태자 소는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던 외척 충주 유씨 가문의 후광을 업고 왕권을 잡을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두 딸을 주어 태조의 장인이 되었던 왕규 역시 태조와 자기의 작은 딸 사이에서 태어난 광주원군을 왕으로 삼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헤종은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대장부다운 용맹을 뽐냈던 태자 시절과는 달리 소극적이 자기방어에만 급급한 나머지 항상 주변에 용사를 대동하고 생명 보전에만 전전긍긍하다 병사함으로써, 그의 후견인이었던 박술희도 힘도 한 번 써보지 못하고 피살당하고 말았다.
    이러한 혼란 중에 왕규 일당의 반역을 염려한 요왕자는 서경을 진수하던 오촌 당숙 왕식렴을 비밀리에 불러들여 왕규 일당을 제거한 후 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정종이다.


    정종은 고려의 종묘 사직을 안정시킨 공로로 후에 『정종』이란 시호를 받긴 했지만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자신이 죽은 후 별 무리 없이 왕위를 동복 아우인 태자 소에게 물려준 것이나 조정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신껏 서경 천도를 단행하려고 한 것 등으로 볼 때 어느 정도는 왕권이 강화되었으며 고려왕조의 안정된 기반이 다져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종은 최승로가 시무책에서 평가한 바와 같이 즉위 후 8년까지는 중국의 3대에 견줄 만한 선정을 베풀어 고려의 정치와 사회를 안정시켰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주현공부법』을 발표하여 전국 주현의 특산물 제도를 정상화시켰고, 국가에 공훈한 자와 가족들에 대한 보상을 후하게 하여 인심을 얻었다. 국방에도 힘을 써 북쪽으로 계속 영토를 넓혀갔으며, 송과 국교를 맺어 긴밀히 왕래하며 거란족의 침략에 대비했다.
   이렇게 온건한 정치로 국정을 안정시킨 다음 광종은 과감한 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과료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혁신적인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것이 공신 세력 및 호족 세력들과 충돌하는 계기가 된다.


   광종은 먼저 후삼국 혼란기에 포로나 전재민으로 전락한 농민 중에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불쌍한 백성을 조사하여 자유민으로 해방시켜 주는 ⌈노비안검법⌋을 실시했다. 이 법을 실시한 결과 공신이나 호족의 경제적, 군사적 세력은 약화된 반면, 자유민이 된 노비들이 국가에 대해 조세와 부역의 의무를 지게 되어 국력이 강해지고 왕권이 강화되는 일석이조의 이득을 보게 되었다. 따라서 공신 세력을 비롯한 여러 세력들이 이 법에 반대했고 심지어는 광종의 부인인 대목황후 황보씨까지 적극 거부했다. 그러나 과감히 반대를 뿌리치고 적극적으로 노비안검법을 실시함으로써 많은 자유민이 생기게되어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또한 광종은 공신의 자제를 우선적으로 등용하는 종래의 무질서한 관리 등용하는 제도를 철폐하고 과거 제도를 도입해 유학을 익힌 신진 인사들을 다수 고려 조정에 진출시켜 신구 세력간의 세대 교체를 꾀했다. 그리고 과거 출신 관료들을 중심으로 왕권강화를 위한 관료 체제를 구축하여 공신 세력의 반대와 원망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광종은 이에 굴하지 않고 관료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자 자, 단, 비, 록으로 구분하는 4색 공복 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광종 11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공신과 호족 세력의 탄압에 나서 왕권에 대항하는 다수의 세력자를 축출, 살해하여 왕권의 전제화를 이룰 수 있었다. 이것 때문에 최승로는 시무책에서 광종 이후 경종이 즉위할 때는 훈신 숙장으로 살아 남은 자가 불과 40여명뿐이었다고 비평한 것이다.
   한편 광종은 강화된 왕권을 배경으로 ⌈칭제 건원⌋을 실시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었고, 광덕, 준풍 등 자주적 연호를 사용했으며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라 부르도록 했다.
   이로써 국초의 공신과 호족 세력이 크게 꺾인 반면, 유학을 공부한 문신들을 중심으로 한 관료체제를 구축하고 왕권을 강화시키는 데 성공하여 고려 왕조의 기반을 튼튼하게 했다. 이러한 광종의 업적을 기반으로 성종 때에는 중앙 관제를 완비하고 본격적인 지방 통치 체제를 구축하는 역사적 발전을 성취할 수 있었다.

 

 

 

성종의 치적과 국가 통치 기구의 완성


   
고려 5대조 임금인 경종은 죽음이 임박하자, 자신에게 왕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국정을 고려하여 근친인 성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학문을 좋아하고 유교주의적 이상 정치를 실현시키려 했던 성종은 제도와 문물을 크게 정비하여 고려 왕조의 기틀을 다졌고, 대외적으로는 거란의 침입을 외교적 수완으로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압록강 하류에까지 영토를 넓히는 데에 성공했다.
    성종은 국가의 오랜 폐단을 제거하고 국정을 쇄신하기 위해 중앙의 5품관 이상의 관리들로 하여금 각각 글을 올리게 하여 시정에 대해 논하도록 했다. 이에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올려 태조로부터 경종에 이르는 5대조의 치적에 대한 잘잘못을 거리낌없이 비판하여 왕이 교훈으로 삼도록 했다. 이 밖에도 이양 등이 시무책을 올려 정치에 반영하도록 촉구했는데, 성종은 이들 유학자들의 견해를 존중하여 백성들을 위한 훌륭한 제도를 마련하고 정치를 쇄신했다.
   그는 처음으로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 세력의 발호를 막고 생업을 일으키는데 힘써 백성들을 제대로 보살피게 했으며, 향리 제도를 마련하여 지방 세력들이 함부로 날뛰는 일이 없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중앙에 국자감이란 대학을 설치하고, 지방에도 경학 박사와 의학 박사를 파견하여 학문을 크게 일으켰다. 또한 과거 제도를 정비하여 지방의 훌륭한 인지들이 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성종은 또 중앙의 통치기구 개편에 착수하여 건국 초기에 태봉과 신라의 제도를 본따 임의로 설치했던 잡다한 기구를 없애고, 당의 3성 6부 5감제와 중추원, 삼사 제도 등을 마련했다. 그리고 후에 고려 실정에 맞게 도병마사 제도와 식목도감을 설치함으로써 고려만의 독특한 정치 체제를 마련할 수 있었다.
    3성이란 국가 정치 기구의 핵심으로서 중서성 .문하성 . 상서성을 말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기관인 중서성과 문하성을 합쳐 중서문하성의 2품 이상의 고관을 재신이라하여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중책을 맡겼다. 상서성은 백관을 총괄하는 기관으로, 그 아래에 이. 병. 호. 형. 예. 공부의 6부를 두었다.
   중추원은 3성과 나란히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기관으로, 왕명의 출납과 국가와 군사에 관한 업무를 맡았으며, 중추원의 고관을 추신이라 했다.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을 합쳐 양부라하며, 양부의 고관인 재신과 추신이 함께 모여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짓는 것을 재추회의, 일명 도당이라고 했다. 그리고 국초에는 검소하고 실질적인 면을 중시해서 ⌈재5추7⌋이라 하여 재신5명에 추신 7명만을 두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한편 6부는 상서성의 감독과 지시를 받으며 실제적인 행정업무를 담당했는데, 아래로는 중앙의 여러 관청을 통괄하고 위로는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중앙 행정의 중심 역할을 했다. 이 밖에도 풍속을 바로잡고 관리들의 잘못을 규탄하는 어사대를 설치하여 국민과 관리들의 기강을 엄정히 세웠다.
성종 2년인 983년에 지방을 야, 광, 충, 청, 공, 진, 상, 잔, 리, 승, 해, 황주의 12주로 나누어 12목을 둔 것이 중앙관을 파견하는 지방 관제의 시초가 되었다. 그 후 몇 차례의 개편 끝에 현종 9년에 지방 관제가 일단락 지어졌는데, 전국을 5도와 양계로 나누고 그 안에 3경, 5도호부, 8목을 비롯해 군, 현, 진 등을 설치했다. 그 중에서도 북방의 국경 지대인 동계와 북계 양계는 군사적인 특수 지역으로서 병마사라는 장관을 두어 계 아래에 설치한 진의 장들을 감독하게 하여 지방 행정과 함께 국방을 책임지도록 했다.


    3경은 수도인 개경 외에 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서경과 옛 신라의 수도였던 동경을 지칭했으나, 후에는 동경 대신 오늘날의 서울인 남경이 포함되었다. 3경은 풍수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역대 국왕들은 지덕을 얻기 위해 수시로 서경과 남경으로 행차하여 한동안 머물곤 했다.
   고려는 후삼국의 분열 대립 과정을 거치면서 확대 개편했던 군사 조직을 북방 민족과의 군사적 충돌을 계기로 보다 조직적으로 정비했다. 그 결과 중앙의 군사 조직은 성종 때 마련한 2군제를 기반으로 현종 때 6위를 마련하여 2군 6위 제도가 완성되었다. 2군은 왕의 친위군이었으며, 6위는 개경 수비와 수도치안 및 변방의 방위를 지원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2군 6위 제도가 완성되었다. 2군은 왕의 친위군이었으며, 6위는 개경수비와 수도 치안 및 변방의 방위를 지원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2군 6위에는 각기 정. 부 지휘관으로 상장군과 대장군이 있었고, 이들이 합좌 기구인 중방에 모여 군무의 중대사를 결정했다. 증방은 이후에 성격이 변질되어 무신난 직후에는 국가 최고 통치 기구가 된 적도 있었다.


    지방에는 주.현군이 있었는데, 그 성격은 양계 지역과 5도 지역이 차이가 있었다. 특히 양계는 후방인 5도와는 달리 국경지대의 군사 지역이었기 때문에 진마다 정규군인 좌군. 우군. 초군을 두어 농사를 짓는 한편 유사시에는 언제나 싸울 수 있도록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등 전병적인 상비군 역할을 했다.
    성종은 또 농업을 장려하여 남아도는 무기로 농기구를 만들고, 세금을 절반으로 줄였으며, 가뭄이나 수해 같은 천재지변을 당한 지역에는 3년 동안 부역을 면제해 주기도 했다.
    또한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의창이란는 기관을 설치하여 춘궁기에 곡식을 대여해 주었다가 추수 때 받는 추납 제도를 실시했으며, 물가조절기관으로 상평창을 설치하는 등 농민을 위한 정책적 배려를 아끼지 않아 마음놓고 생업에 힘쓰며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