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문명 / 깐슈 정수일 창작과 비평사 // 이찬구의 책읽기 중에서

2013. 11. 19. 12:17우리 이웃의 역사

 

 

 

 

 

      





    선물을 받았는데 선물 포장이 너무 예뻐서 뜯기가 아까울때가 있다.


실제 중요한 것은 그 포장지 안에 있는 선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닌데도....그 포장지가 눈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작가와 작품이라는 것도 이런 식의 관계가 아닌가 한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이야기를 할뿐.......자신의 실제 인생은 어찌보면 그 작품과는 무관한 것일것이다.


하지만....가끔 어떤 작가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소설이나 시보다도 더 소설같은 인생을 살기도 하고.....어느 영화보다 더 감동적인 


삶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이슬람 문명'의 저자인 정수일도 참으로 소설같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인데.......


이 책보다도 이 정수일이라는 사람 자체가 훨씬 흥미롭고 재미있는 경우라고 생각된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인데......


지은이 정수일은 중국 조선족 출신이다.


거대 중국의 소수 민족이었으니....출신 성분으로는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닌 셈이다.


하지만 정수일은 꽤나 머리가 좋았나 보다. 


수재들만 모인다는 베이징 대학 동방학부를 졸업했다.


그리고는 중국 국비 장학생으로 이집트와 모로코에서 유학생활을 했고, 이어서는 외교관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니까.....상당히 똑똑한데다가 공부도 열심히해서.......소수민족의 한계를 벗어나 국가 관료로 활동하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어쩐 일인지 더 이상 외교관 활동을 지속하지 않은채......북한으로 입국하게 된다.


요근래에 나온 그의 자서전(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서평에 의하면.....)에 따르면......먼가 조국에 대한 향수라고 해야하나....


그리움이라고 해야 하나.....하여튼 그런게 생긴 모양이었다.


외국에서 태어나 외국에서 떠돌다보니 생긴 일종의 향수이자......중국의 국익을 따르는 외교관 활동이 조선족인 그에게는 


조국에 대한 갈증을 일으킨것인지도 모른다.

 


    북에서 대학교수를 맡아 교직에 있던 그는 어느날 공작원에 선발되게 된다.


이 공작원이라는 것은 당연하게도 자발성의 원칙에 근거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배신할수밖에 없는 것이니.....


공작원에 선발된것은 그가 선택한 길이 아닐지 모르지만, 그 길을 택한 것은 그의 자발적 의지인것이 거의 확실할 것이다.


조선족 출신의 중국 외교관 생활을 거쳐 대학교수를 맡고 있던 그가 또 한번의 변신을 하는 순간이었다.


왜 공작원을 맡게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수가 없지만 아마도 중국 외교관 생활을 청산하고 북으로 들어간 이유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그 선택이 북에게는 애국이 되고 남에게는 간첩죄라는 이율배반적인 죄명을 짓게 되지만, 


우리 한민족에 앞에 선 그에게는 그런 영웅적인 호칭이나 반사회적인 범죄명 보다도 


그저 민족의 아픔을 느끼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했던 정수일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공작원이라는 길 또한 지식인의 사회 참여의 한 방편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북파 공작원, 쉽게 말해서 '간첩'으로서 그는 그렇게 뛰어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가 잡히는 순간에 보냈다는 정보의 수준은 기껏해야 월간지를 비롯한 각종 매체인쇄물이 대부분이었다고 하고.....


정치 공작원으로서 그가 포섭한 사람은 거의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공작원으로서 아니라 학자로서 그는 북한과 남한, 통틀어 우리 한민족에게는 큰 보물과도 같은 존재였었다.


우스개소리로 간첩 중에서 가장 학식이 높은 간첩이라고 할수 있으며, 그가 잡히고 나자.......학계에서는 간첩이 우리 나라 학문에 


준 영향을 두고 웃지 못할 일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12개국어를 구사하는 언어학적 자질과 성실한 연구 자세로 이슬람과 우리의 교류(동서교류사 라고 한다나?)에 대한 


여러 중요한 논문을 많이 발표한다.


그는 간첩으로 체포된 후에도 그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고 계속 하였다고 한다.


심지어는 검사 조차도 그의 연구열을 높이 사서 계속해서 논문을 집필할수있도록 해주었다고 하니.........

 

 


 

    그가 지식인으로서 공작원이 되어 내려온 이후 또 한번의 변화......


즉 학문으로 우리 민족에게 보탬이 되려는 것으로 자신의 방향을 잡게 된다.


남으로 침투할때 그는 레바논에 이어 필리핀 국적으로 국적 세탁을 통해 들어왔다가 이제는 한국인으로 국적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는 중국인-이북-레바논-필리핀-이남 의 국적을 가지게 된 셈이었다.


그 힘든 길을 거쳐서 이제 대한민국으로 국적을 정한 이 정수일.........(입국할때의 이름은 무하마드 깐수 였다고 한다.)의 모습은 


분단된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의 아픔을 여실히 보여주는.....


그러면서도 그런 분단을 자신의 이기심을 벗어나 통일을 향해 노력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면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여기서 무슨 간첩이 어떠니, 북한을 이롭게 한다느니....하는 얘기는 없을것으로 생각하고 . . . . . . )


내가 만약 이 정수일과 같은 조건에서 외교관으로 가는 탄탄대로 에서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면서 그길을 포기할수있을지......


생명을 걸어야 하는 남파 공작원의 길을 또 갈수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한 여러가지 면에서 정수일은 단순한 간첩이나 학자가 아니다.


(정수일에 대한 찬양 고무가 아니라, 지식인에게는 치열한 자기 반성과 역사적 부합성이 뒤따라야한다는 면에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 . . . . . . .


    (독후감은 없고, 저자 소개만 . . . . . . . . 책은 머........이슬람에 대한 상식(!)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무식한 기독교인을 비롯한 


일반 시민들은 이슬람의 상식을 알고자 하는 이에게 초보적인 쉬운 글로서 설명하고 있다.)







    밑은 다른 사람들이 쓴 정수일 에 대한 글이다. 참고로 실어둔다~


2004-10-04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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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깐슈   ‘정수일’에 대한 관심 





    최근 사학자 정수일씨는 2년간의 각고 끝에 <이븐 바투타 여행기> 완역본을 간행하고, 이븐 바투타 못지 않은 고된 인생 역정을 걸어왔다는 신문 기사를 보면서 그와 부인을 생각한다. 정수일씨가 독신으로 생활하던 1990년초 운명적으로 만난 배필은 다름 아닌 시골에서 국민학교를 같이 다녔던 동창생 000라는 사실을 알게된 것은 정수일씨가 간첩혐의로 구속된 직후였다. 


    국민학교 동창 모임에는 수년만에 한번 정도 얼굴 내미는 처지였는데 그 날따라 시골친구의 성화가 극성이어서 마지못해 참석하게 되었다. 

늦게 도착하여 빈 좌석을 채우고 서로간의 안부를 묻던 중 앞자리의 키큰 여자가 우여곡절 끝에 깐슈 정수일씨와 결혼한 000임을 

옆자리 친구가 귀띔해 주었다. 어릴 적의 기억은 별로 없었지만 비교적 쾌활한 성격이었고, 병원생활을 오래했다는 서로간의 공통점 때문에 자연스레 말상대가 되었다.


    그 동안 모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생활했으며 남편이 구속된 후 많은 고초도 겪었고, 세인의 관심을 피하기 위해 사직하고 남편의 

옥바라지만 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주위의 이야기인 즉 애기도 없으니 당연히 법적 이혼하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입방아도 있었다. 

그러나 뒤에 들리는 이야기로는 남편에 대한 정성은 세인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소문이었다. 그 후 깐슈 정수일에 대한 관심은 

유능한 학자이지만 잘못든 길로(?) 여자 동창생만 고생시켰다는 생각이었는 데 최근 언론에서 정수일씨에 대한 보도내용은 

그나 동창생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을 새삼스레 각인하게 되었다. 


    정수일씨가 번역한 <이븐 바투타 여행기>에 실린 그의 약력을 잠시만 훑어보자. 중국 연변에서 출생해 연변 고급중학교와 

베이징대학 동방학부를 졸업한 정씨는 이집트 카이로 대학 인문학부 연구생으로 수학했고, 중국 외교부와 모로코 주재 중국대사관에서 근무했다. 

조국인 북쪽으로 돌아간 뒤에는 평양국제관계대학과 평양외국어대학 동방학부 교수를 지냈고, 튀니지대학 사회경제연구소 연구원과 말레이대학 

이슬람아카데미 교수로 있었다. 남쪽으로 온 뒤에는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을 마친 뒤 같은 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험난했던 그의 삶 전 과정에서 그가 초지일관 몰입한 것은 동서문화교류의 역사에 대한 연구였다. 지난 92년 ‘무함마드 깐수’란 이름으로 펴낸, 500쪽이 넘는 방대한 연구서인 <신라·서역 교류사>는 이 분야에서 개척자 구실을 한 문제작이었다. 그는 연구 범위를 좀더 확장해 동서 교역사에 관한 원고를 집필하던 도중,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지난 97년 구속됐다. 이른바 ‘깐수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지난해 풀려날 때까지 5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면서 그는 초인적인 작업을 진행했다. 자료도 빈약하고 원고지조차 모자라 뒷면에 스스로 줄을 그어 사용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그는 <…여행기>의 번역뿐 아니라 <실크로드학>과 <세계문명교류사> 등과 같은 굵직굵직한 연구서를 집필했다. 이 때의 심경을 정씨는 이번에 펴낸 <…여행기>의 ‘옮긴이 후기’를 통해 이렇게 토로했다. 


   “한증탕 같은 여름철, 더덕더덕 땀띠 돋아난 엉덩이를 마룻바닥에 붙이고 하루 열댓 시간씩 뭉개면서 내내 생각한 것은 

유배 생활 18년간 5백권의 저서를 남긴 다산 정약용 선생이었다. 선생은 줄곧 앉아서 너무 오래 글을 쓰다보니 엉덩이가 짓뭉개져, 

벽에 선반을 매고 일어서서 글을 썼다고 한다. …선현들의 불요불굴의 의지와 실천은 이 책의 번역과정에서도 내내 옮긴이의 귀감이었다.” 


   그가 한 때 가명으로 사용했던 ‘깐수’란 이름은, 이슬람 세계에서 신라에 관한 최초의 기록을 남긴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의 <여러 도로와 여러 왕국에 관한 기록>에 등장한다. 쿠르다지바는 신라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중국의 맨 끝 깐수의 맞은 편”이라 기록했다. 정씨는 <신라·서역 교류사>에서 이 문제에 관해 18쪽에 걸쳐 매우 상세히 고증했다. 

이를 통해 정씨는 ‘깐수’가 중국의 ‘강주’ 또는 ‘항주’라는 설을 반박하고, 신라 영내의 ‘강주’를 가리킨다는 설을 설득력 있게 제기한 바 있다. 


아래 소설가 황석영의 <내가 만난 깐슈>글에서 정수일씨 부인 아니 여자동창생 000의 눈물어린 내조의 흔적을 보게한다.


[2001년 9월22일]


 

 


 


  황석영 특별기고 ..... 내가 만난 '깐수'  



―한 지식인의 운명에 대하여 


    지식인에 대한 존재의 규명에서 사르트르는 지배계급에 의해 실용 지식 전문가가 된 사회적 노동자가 동일한 모순을 

여러 수준에서 괴로워하기 시작하면서 진정한 지식인으로 태어난다고 말한다. 지식인이란 자기 내부와 사회 속에서 구체적 진실, 

또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모든 규범에 대한 탐구와 지배하는 힘의 이데올로기 사이에 대립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분열된 사회 속에서 만들어진 지식인은 그가 사회의 분열된 모습을 내면화한 까닭에 그 사회를 증거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적 산물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어떤 사회도 자기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는 그 사회의 

지식인들에 대해 비난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지식인이란 결국 그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이렇듯 진지하게 지식인에 대한 서구식의 고전적인 질문을 되씹는 것은 다름아닌 어느 동시대 사람 한 분을 모두에게 소개하고 싶어서다. 


   그의 이름은 정수일, 1934년 만주 옌지(연길)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른바 `깐수 사건'의 주인공이다. 그는 일찍이 전 중국에서 수재만을 뽑는 베이징대학 동방학부를 수석으로 나온 

사람이며 제3세계에서의 지도력을 행사하려던 중국 정부에 의하여 발탁된 사람으로서 중국 국비장학생 1호가 되었던 이였다. 

중국 탕자쉬엔 외교부장은 그의 동기생이다. 정 선생은 이집트와 모로코에 유학했고 중동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동서 교역사와 실크로드학의 권위자가 되었으며 우리말에 중국어, 일본어, 영어, 그리고 전공인 아랍어와 포르투갈어, 

위구르어, 티베트어, 몽골어 등등 거의 열두 개 나라의 고대 언어에 정통하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어느 중국 고위층은 

그의 재주를 아껴서 인척 여성과 결혼을 시키려고 하였지만, 그는 귀국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그의 조국은 분단된 한반도의 북쪽인 조선을 의미하였다. 


    그는 중앙당으로 소환되고,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라 공작원으로 변신하게 된다. 십이개 국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고 

박학다식하다는 것은 국가 권력의 다급한 총동원령에 따라서 그 효용 가치가 엉뚱한 방향으로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그렇게 동원되었다. 중국 국적에서, 북조선 국적, 그리고 레바논 국적 등등 네 번의 `세탁'을 거쳐서 그가 취득한 최종 국적은 

필리핀 체류 아랍인 2세가 되어 버렸다. 그의 아랍 이름이 동방 교역지의 하나였던 `깐수'가 된 것이 그 때문이다. 

그는 여러 민족의 언어에 능통하고 박학한 실력 때문에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고 모 대학의 교환교수로 정착했다. 

나는 남북 분단체제에서 벌어진 음습하고 피 냄새 나는 첩보전에 대하여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십여 년의 우여곡절을 겪을 때에도 `곰팡이'가 끼어들지 않도록 철저하게 `

햇볕 아래 공개'하는 원칙을 세웠었다. 발표에 의하면 그의 상부선은 구체적인 활동을 요구했고 그는 하는 수 없이 

어느 월간지에 나온 것들을 팩스로 중국에 보냈다. 그야말로 원시적인 행위였던 셈이다. 

그래서 세상이 떠들썩하게 `깐수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그는 직업 공작원이었으므로 그가 겪은 외로움과 고초는 

우리네 진보인사가 받은 것과는 달랐을 것이다. 


    이 다음부터 실로 감동적인 지식인의 자기 결단과 선택이 이루어진다. 그는 국적이 필리핀이었으므로 국제법상 

국외추방을 요구할 수 있었고 그가 처음에 갇힌 곳은 출입국과 관세법 위반자들이 수감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정 선생은 자기의 국적은 분명히 북조선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최고형을 받게 된다. 

그는 안정된 학문 탐구의 짧지 않은 세월을 남한에서 보내는 동안 중요한 저서와 논문들을 남겼고, 

―그가 검거되기까지 자신의 진짜 신분을 밝히지 못하여 지금도 미안해하는― 부인도 얻게 되었다. 

그녀는 사실은 정 선생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이다 갖게 된 서재의 `지킴이'였다. 

그는 방대한 자료와 주를 붙인 <동방교역사>의 원고 마지막 부분을 손질하다가 잡혀왔고 검사는 취조 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검사는 그의 마지막 원고를 관계 기관에서 찾아다가 검사실에서 정리하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이 원고의 중요한 가치를 검사도 알았던 것이다. 그는 정 선생에게 사형을 구형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변호인단은 물론이고 재판부도 그의 곡절 많은 삶과 오랫동안 단절될 수밖에 없는 연구의 성과를 안타까워하면서 

과거에 비할 수 없는 7년형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전향했다. 그는 자신의 다른 길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전민족에 봉사할 시간이 별로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메모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법무부 노트에 깨알 같은 글씨로 자료도 변변치 않고 조명도 좋지 

않은 독방에서 아내가 들여주는 최소한의 책들과 기억을 더듬어 가며 저술을 시작했다. 

노트로 거의 사백여 권에 이르는 집필을 그는 수감된 5년 동안에 해냈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었을 작업이었지만 그는 마지막 설득 과정에서 이들 노작들을 감옥 밖으로 고스란히 보존해 내올 수가 있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보다 더욱 전문적이고, 거의 박물적 지식을 겸비했던 중세 이슬람의 학자이며 여행가였던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 <도시들의 진기함, 여행의 경이 등에 대하여>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초역해 냈다. 

이것은 책으로 네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이며, 중세시대 동방의 문화와 문명을 올바르게 자리매김할 귀중한 책이다. 

알제리에서 바투타의 기록이 처음 발견되었고 프랑스가 이를 입수하여 식민지 경영에 필요한 만큼 요약하여 

번역한 것이 유일하다고 한다. 이븐 바투타의 13만㎞에 이르는 30여 년의 여정은 동아시아의 근대와 문명에 대하여 깊이 

성찰해야 할 이 시기에 절실히 필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그는 이 외에도 서구인의 눈으로 본 동방세계에 대한 명저인 <율>과 당국의 양해로 간신히 보존한 <동방교역사>, 

그리고 <동방교역사전>, 북한에서부터 해왔던 <아랍어 사전>을 보완 정리해 냈다. 

나는 그의 노트와 그가 꼼꼼하게 그려낸 지도를 보면서 눈물이 나왔다. 

그것은 구치소에서 휴지로 나누어 주던 손바닥만한 백지를 밥풀로 붙여서 만든 종이였는데 거기다 이븐 바투타가 여행한 

육로 및 해로를 붉고 푸른 볼펜으로 정성스럽게 그려 놓았다. 이것을 어찌 그람시 선생의 <옥중수고>에 비길 것인가. 

그는 그를 아끼고 키워 주었던 큰 나라 중국의 엘리트로 편안한 학문 생활을 하면서 더 높은 업적을 쌓을 수도 있었다. 

조국의 북과 남은 이 소중한 재보를 헌신짝 같이 다루다가 결국은 말살해 버릴 뻔하였다. 아아,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과거에 얼마나 수많은 아까운 자산들이 그렇게 이름없이 말살되었던 것일까. 

우리는 반세기 만에 겨우 이러한 것들을 추스를 만큼의 아주 작은 여유를 남북의 변화를 통하여 확보할 수가 있었다. 


    그는 8·15 사면으로 풀려나와 다시 학문에 정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국적이 없어져 버렸다. 

여기서 다시 그의 고뇌와 선택이 시작되었다. 그는 `대한민국 국적'을 신청한다. 

그에게 이미 남이나 북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며, 그이 말처럼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민족 앞에 밥값이라도 하려면” 

자신의 구상을 빠짐없이 집필해 내야 하는 것이다. 

그는 나와 헤어지기 전에 젖은 눈으로 중얼거린다. 

“분단시대의 지식인은 수의환향(囚衣還鄕)이 자신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으로 돌아가는 장기수 선생들에게도 인사를 드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또한 그분들의 삼사십년에 걸친, 너무나도 길어서 추상적인 세월이 되어버린 어둡고 비좁은 독방의 삶을 다시 생각한다. 


2000년 8월30일  소설가 황석영 


  스물여섯에 14세기 3대륙 바람처럼 떠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