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협약이 불평등 조약인 이유 / 다음지식에서

2014. 2. 1. 10:38우리 역사 바로알기

 

 

 

 

 

      

간도협약이 불평등 조약인 이유가 뭔가요?

비공개 | 2012-04-19 23:20 | 조회 314 | 답변 2

 

 

   안녕하세요? 궁금한 것이 있어서 질문 하려고 합니다.


          간도협약이 불평등 조약인 이유가 무엇인가요?


          궁금합니다.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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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Fox | 답변 1395 | 채택률 73.4%

활동분야 : 국사,사학 (3위) | 세계사 (3위)
본인소개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사실 간도는 숙종때 청의 출입 금지지역에 조선인의 월경이 잦아지고 국경 분쟁이 생기자 백두산 정계비로 국경을 정했는데, 조선 말기- 대한제국기 백두산 정계비의 비문을 놓고 분쟁이 생겼습니다. 이 문제는 1909년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가 청과 간도 협약을 맺으면서 일단락되었고 일제가 패망하면서 간도협약이 무효화, 북한과 중국은 조중변계조약을 맺고 현재의 국경선을 확정했지요.


어째서 간도 협약이 불평등 조약이었냐면 일단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하는데.


   조선 말기 조선인들이 혼란한 국내 사정을 피해서 간도로 불법이주를 해서 살면서 두 나라간의 영토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월경하는 인원이 하도 많아서 결국 조선은 두만강 너머 국경에 멋대로 지계를 발급하고 월경을 인정해주기로 했죠. 만주 일대를 봉금 지역으로 지정했던 청나라는 1881년에야 처음으로 조선인들이 자신들의 영토에 거주하고있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이 지역에 계속 살던 조선인들을 인정하는 대신 청의 백성으로 귀화시키려했지만 조선에서는 이것을 막고 청과 다시 국경 교섭을 합니다.


    조선과 청은 몇번의 감계회담을 가졌는데 청은 두만강이 국경이니 그 원류를 밝혀 국경을 정하자고 했고 조선은 비석에 새겨진대로 토문강을 국경으로 정하자고 주장했습니다.(참고로 이 토문강 떡밥은.. 숙종실록에서 토문강으로 검색하면 간도 한국영토설을 논파시킬 강력한 근거가 나옵니다..) 근데 조선의 주장대로하면 만주지역이 죄다 조선의 땅이 되게 생겼으니 청이 거부하였고 회담은 결렬되었죠. 이후 국경이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은 곳을 제외하곤 청은 두만강 유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이 지역에 대한 권리를 행사합니다.


    근데 1890년대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이 급격하게 쇠퇴하면서 대한제국은 간도지방을 날로 먹으려는 속셈을 드러내고 1902년에 멋대로 간도 관리사를 파견해 현지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기도 했죠. 또한 진위대가 멋대로 청나라 관청이나 마을을 습격하기도 했구요. 당연히 대한제국과 청은 다시 외교분쟁이 붙었지만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잠시 중단됩니다.


    그러다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간도문제는 일본의 관할로 넘어갔죠.


    일본은 간도땅을 일단 한국령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대한제국을 먹으면서 간도까지 먹으려는 의도였지요. 그래서 일본은 간도가 한국령이라는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근데 일본은 만주의 철도 또한 시급한 문제였고 일본은 새로운 철도 부설권과 러시아가 남기고 간 철도의 경영권을 확보하고자 합니다. 만주 철도와 간도를 저울질하던 일본은 간도 보단 철도쪽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으로 청으로부터 철도에 관한 이권을 보장받고자 했고 일본과 대립하던 청은 일본이 간도 문제를 양보하면 철도 문제를 협조해주겠다고 했죠.


    이에 청과 일본은 만주 철도부설에 관한 협약과 간도 협약을 체결합니다. 사실 청나라도 15년만 지나면 일본이 부설한 철도를 국유화하리라고 했기에 영도 문제도 확실하게 매듭되고 철도도 나중에 우리 것이 되니 별 손해없다는 속내로 조약을 채결했지만, 아시다시피 청나라는 얼마 안가 망해버렸죠.


   한국에서 이를 불공평 조약이라고 하는 이유는 일본에게 빼앗긴 외교권 때문입니다.그리고 을사조약 또한 문제가 많은 조약이기도 해서 말이죠.

 

 

 

 

 

 

한국사이야기 - 간도 협약이 무효라고 공식발표됬는데 왜 무효인지 근거좀 가르쳐주세요

평민 | 2004-11-02 16:59 | 조회 529 | 답변 1

최근 우리나라 국회에서

간도 협약기 무효라고 공식 발표가 났잖아요..

그런데 이게

무효라고 말한 근거좀 가르쳐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자세하고 길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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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 | 답변 0 | 채택률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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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소개 : ..
    최근 간도협약 무효론이 국내에서 제기되고 있다. 간도협약이란 1909년 9월 4일 청·일 간에 체결된 것으로 일본이 만주에서 철도부설 및 석탄채굴권을 얻는 대신 간도가 청국 영유임을 인정한 조약이다. 당시 간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조선과 청국 사이에는 분쟁이 잦았다.
    조·청 간의 간도 영유권 분쟁은 조선 숙종시에 설치한 백두산정계비의 판독에서 시작된다. 정계비에는 조·청 간의 경계에 대해 “서쪽은 압록강으로 하고 동쪽은 토문강으로 한다”(西爲鴨綠 東爲土門)고 기록돼 있다. 이에 조선측이 양국 경계는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라고 한 데 대해 청국은 엉뚱하게도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읽어야 한다면서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조선측대로 읽으면 간도는 경계선의 우리 쪽으로 들어오고 청국측대로 읽으면 그것은 중국 쪽에 들어간다.

    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조·청 간에는 두 차례에 걸친 외교담판이 있었다. 1885년의 을유담판과 1887년의 정해담판이 그것이다. 두 차례 담판에도 불구하고 분쟁이 해결되지 않아 제3차 담판이 예정돼 있었는데, 난데없이 일본이 끼어들어 간도협약이란 걸 체결하여 간도가 청국 것임을 인정했다. 이 같은 간도협약이 국제법상 유효한가.

    간도협약에 앞서 1905년(광무9) 11월 17일 조·일 간에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됐다. 그러나 이 조약이 간도협약을 유효한 것으로 하는 법적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국제법상 보호조약이란 보호국이 외교권을 장악할 뿐, 피보호국의 영토처분권까지 갖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을사보호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첫째, 일본은 금후 조선의 외교관계를 통리지휘(統理指揮)하고 재외 조선인 및 조선 국익에 대해서는 일본이 이를 보호한다. 둘째, 일본은 조선이 체결한 국제조약의 이행에 책임을 지되 앞으로는 조선이 일본의 중개 없이 국제조약이나 그 밖의 국제적 약속을 하지 않아야 한다.

    셋째, 일본은 조선에 1명의 통감(統監)을 두되 통감은 필요에 따라 황제를 알현할 권리를 가진다. 넷째, 조·일 간에 체결된 조약들은 이 조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계속해서 효력을 가진다. 다섯째, 일본은 조선 황실의 안녕 및 존엄을 보장한다.

    이 같은 을사보호조약의 어느 곳에도 일본에 조선의 영토를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한 규정은 없다. 앞서 보았듯이, 일반 국제법상 보호조약이란 보호국이 피보호국의 외교권을 장악할 뿐 영토처분권까지 갖게 하는 것이 아니며, 을사보호조약에서도 그러한 규정은 없다. 따라서 청·일 간의 간도협약은 원천적 무효가 될 수밖에 없다.

    설사 을사보호조약에 영토처분권이 인정됐다고 하더라도 간도협약은 원천적으로 무효일 수밖에 없다는 점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을사보호조약 자체가 무효이기 때문이다.

    2차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보호령으로 하려 획책했다.

체코슬로바키아측이 이를 완강히 거부하자 독일은 그 나라 대통령과 외무장관을 베를린으로 호출했다.

    거듭된 회유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과 외무장관이 계속 저항하자 1939년 3월 15일 새벽 2시 베를린의 한 건물 밀실에서 히틀러의 임석하에 독일측 각료 두 사람이 양인의 등을 떠밀어 테이블에 앉힌 후 그들 손에 펜을 쥐어 주면서 문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2시간 내에 프라하를 폭격하여 반을 폐허로 만들 것이며, 이것은 재앙의 시작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고 협박했다.

    을사보호조약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체결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무효이고 권한이 없는 상태에서 체결된 간도협약 역시 무효임은 자명하다.

정부와 국민은 간도협약의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하고 자손에게 부끄럼이 없도록 현명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