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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초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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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며,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겨서도 안 된다. 사회적 지위가 어떠하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신앙인의 참된 자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라고 사람들이 말하는지 물으신다.
이어서 제자들 자신은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도 물으신다.
이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한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라고
밝히시자 이를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큰 충격에 빠진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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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고르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2,1-9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억누르는 사람들이 바로 부자가 아닙니까?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자들도 그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받드는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도 그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참으로 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지고한 법을 이행하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러분은 율법에 따라 범법자로 선고를 받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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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27-3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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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이맘때 사랑하는 저의 외할머니가 선종하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저에게 많은 사랑을 주었던 분입니다.
무엇보다 깊은 신앙으로 저에게 큰 모범이 된
외할머니에 대한 생각이 지금도 끊이지 않습니다.
임종을 지킬 때 할머니가 마지막 숨을
고요히 내쉬던 순간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빈소에서 허전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으로
할머니의 생전 모습을 회상하던 것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보다 더 깊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묘지에
외할머니를 안장하던 날의 풍경과 느낌입니다.
경기도 파주였는데, 아직 늦겨울이었지만
그날은 마치 봄날처럼 따스했습니다.
하늘도 아주 맑고 드높았습니다.
그리고 슬픔보다는 주님에 대한 감사함이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로운 품에 할머니가 안긴다는 사실이 너무나
‘확실하게’ 다가왔습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믿음을 그처럼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힐 듯이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조용하지만 고왔던 할머니의 삶이,
고생도 많았지만 하느님께 충실했던 그 삶이
주님의 자비 안에 온전히 받아들여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머니가 주님 곁에서 누릴 평화와 행복을
사랑하는 가족에게 나누어 준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본당 신부로 부임한 뒤로는 죽음을 앞둔 이들에 대한
병자성사나 교우들의 빈소를 방문해 연도를 바치는 일,
장례 미사를 봉헌하는 일이 잦습니다.
그러한 기회에 주님 안에서 충실하게 살아온 분들이
조용히 주님께로 떠나며 슬픔 속에서도 표현하기
어려운 평화를 누리고 있음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오롯한 자비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 이어지는 성경 구절에서는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고 말합니다(야고 1,13 참조).
참으로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며 충실히 살아온 사람에게
죽음은 심판을 이기는 주님의 자비를 만나는 자리일 것이며,
그 자비를 우리 또한 이 땅의 순례의 여정에서도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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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 미사-
♬ 구원자 예수 너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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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사즐모(댄스스포츠 사교댄스모임 - 라틴, 모던, 사교, 리듬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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