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매 - 차를 말하다 / 헤럴드경제 기사 外

2014. 2. 26. 10:44차 이야기

 

 

 

 

      

 평창동 가인 갤러리에서 열리는 윤회매 오프닝 이벤트에

자연음식가 산당의 음식공양이 있어서 소개차 두 글을 함께 올리다 보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혜량바라옵니다.   ......... (()) .........

 

 

                                           -   茶    宗 謹書

 

 

      

 

 

윤회매 - 차를 꽃 피우다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 입춘이 지났으나 눈바람이 몰아치고, 날씨는 여전히 차갑다. 봄은 정녕 언제 오는 것일까?

그러나 깊게 쌓인 눈 아래, 매화나무 가지에는 조금씩 봄의 기운이 움트고 있다. 매화는 계절의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하고, 가장 먼저 눈부신 흰 꽃을 피워낸다. 봄의 전령사로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전기 학자이자 문인인 김시습은 ‘매월당집’이란 문집 속 ‘탐매(探梅: 매화를 찾아나서는 것)’라는 시에서 “큰 가지 작은 가지 눈속에 덮였는데/따뜻한 기운 알아 차례로 피어나네/옥골정혼이야 비록 말은 없지마는/남쪽 가지 봄뜻 따라 먼저 망울 맺는구나”라고 읊었다. 

 

 



 

 

 

 


    옛 선비들은 동지가 지난 사흘 뒤부터 81일째 되는 날에 매화가 핀다 하여 매일 한 송이씩 매화를 그리며 봄을 기다렸다.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라는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서울 도심에서 활짝 핀 청초한 매화를 보고 싶어하는 이들을 위해 특별한 전시가 열린다. 서울 종로구 서울 평창20길의 가인갤러리는 오는 27일부터 3월 28일까지 다음(茶愔)의 개인전 ‘윤회매(輪廻梅), 차(茶)를 피우다’를 개최한다.

    다음(茶愔)은 독특한 이력의 작가다. 국내 보다는 미국, 독일, 영국, 일본 등 해외에서 더 잘 알려진 그는 14세에 사찰의 단청에 매료돼 출가했다. 불자인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인천 수도사를 방문했던 그는 사찰의 황홀한 장엄에 이끌려 수도자가 됐다. 그리곤 범어사, 태안사, 개암사 등에서 수행했다.

    다음(茶愔)은 수행 목적으로 그리는 선화(禪畵)에 빠져 무수히 많은 밤을 지새웠다. 아울러 음악과 춤에도 재능을 보여 무형문화재 정지광스님으로부터 불교음악인 범패(梵唄)와 불교무용인 범무(梵舞)를 전수받았다. 또 자기 수양으로서의 다도(茶道)에 심취하기도 했다.

 

 

 

 


 

 

 

 


    이렇듯 차, 미술, 음악, 춤을 참선 수행의 수단으로 여기며 대중과 활발한 소통을 해오던 어느 날, 그는 일생의 ‘사랑’을 만나게 된다. 6년이라는 번뇌의 시간을 보낸 후 결국 20년의 승려 신분을 버리고 파계하게 된다. 동국대 불교대학원에서 불교미술사를 전공한 다음(茶愔)은 현재 윤회매(輪廻梅) 제작과 함께 무용및 음악, 퍼포먼스 등 다양한 공연예술을 펼치는 전방위 아티스트로 활약 중이다.

    윤회매(輪廻梅)는 조선 정조 때 북학파 실학자였던 이덕무선생에 의해 창제된 밀랍화인 윤회매를 찻자리에 놓고 감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차문화를 일컫는다. 벌이 꽃가루를 채집해 꿀을 만들고, 그 꿀에서 밀랍이 생기고, 그 밀랍이 다시 매화가 되니 이 모든 게 돌고 도는 윤회라는 뜻에서 ‘윤회매’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1996년 어느날, 다음(茶愔)은 이덕무선생이 집필했던 ‘윤회매십전’을 접하고 이를 탐독했다. 그리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윤회매 제작에 성공하게 됐고, 이후 독자적인 작업세계를 구축하게 됐다.

    미술평론가 류병학 씨는 “윤회매를 제작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 차를 마시는 것, 음악, 그리고 춤은 다음(茶愔)에게 일종의 ‘수도’에 해당된다"며 “다음(茶愔)이 제작한 윤회매의 자태를 보면 청빈 속에 살아가는 선비의 기개가 느껴진다. 또 이덕무 선생의 사상 등을 흠모하는 지극정성의 마음이 느껴진다”고 평했다.

 

 


 

 


    이번 전시는 일본 가고시마 교류전(2013), 영국 템즈페스티벌 대영박물관 공연(2007), 뉴욕 유엔본부 전시(2007) 등을 통해 해외에 먼저 소개됐던 다음(茶愔)의 예술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접할 수 있는 자리다. 높이 60cm에 이르는 백자 달항아리에 화려하게 핀 홍매와 쪽빛매를 꽂은 작품, 청자, 백자, 분청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홍매, 백매, 청매, 흑매 등 총 20여점이 출품된다. 작년말부터 올해초까지 봄을 기다리며 밀랍으로 피워낸 윤회매 작품도 전시된다.

    27일 오후 열리는 전시 오프닝에는 행위예술가 신용구, 해금연주자 강은일과 함께하는 다음(茶愔)의 그림자 퍼포먼스와 바라춤 공연이 펼쳐진다. 또한 작가의 오랜 친구인 방랑식객, 산당 임지호의 요리 퍼포먼스가 유기장 43호 이종덕의 식기와 함께 어우러진다.

    다음(茶愔)은 시카고주립대 초청 전시(1990), LA 포크아트페스티벌(1990), 한국현대미술 함부르크전 퍼포먼스(1995), 제8회 부산무용제(대상 수상,1999), 전국무용제(문화부장관상 수상 2000), 등에 참여했다. 02)394-3631

                                                                                           yrlee@heraldcorp.com

 

 

 

 

 

 

“들풀도 벌레도 모두 소중한 음식재료”
                                            자연음식 전문점 ‘산당’ 주인 임지호

    눈이 채 녹지 않은 보리밭에서 나물을 캔다. 냉이, 씀바귀, 별꽃나물. 코를 연신 훌쩍이며 호미질에 열중하는데, 같이 나온 동네 언니가 짝 소리 나게 등을 후려친다.

“그카믄 어떻케여! 보리꺼정 다 캐삐겠네!”

아닌 게 아니라 홀딱 뒤집어진 보리 싹을 누가 볼 세라 손가락으로 콕콕 되박아넣은 것이 벌써 몇 번. 그렇게 나물 한 소쿠리를 해가면, 어머니는 냉이만 골라 멸치다시마물에 콩가루를 후히 풀어 국을 끓였다. 그러면 정말 봄인가 했다. 봄은 사립문 너머 퍼져가는 냉잇국 냄새로 왔다.

경기 양평군 팔당호 부근, 웬 유별나다는 밥집 주인을 찾아가며 20년도 훨씬 전 그 냉잇국 냄새를 떠올렸다. 들풀도 매미 껍질도 식재료로 쓴다는 그 밥집에선 어떤 냄새로 봄을 부르고 무슨 음식으로 객(客)을 사로잡을까.

 

 

 

낯선 재료로 음식 만드는 ‘미다스 손’

 

    자연음식 전문점 ‘산당(山堂)’의 주인은 임지호씨(48)다. 그를 소개해준 가수 장사익씨는 그가 “너무 예쁘고 너무 맛있어 차마 먹어버리기 송구한 음식”을 만든다 했다. “똑같은 상을 두 번 차리지 않는다, 자연에서 난 모든 것을 재료로 삼는다”는 말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임씨는 한국을 대표하는 요리 명인 중 한 명임이 틀림없다. 지난해 12월1~12일, 그는 주(駐)뉴욕 한국문화원이 유엔본부 4층 대표단 식당에서 개최한 ‘한국음식 축제’의 주관 요리사로 일했다. 2주 동안 무려 1만여명의 각국 인사들이 그의 요리로 점심식사를 했다. 우리나라에도 그의 요리를 사랑하는 이들은 많다. 정기적으로 그를 찾는 동호인 클럽만도 수십 개다.

요리 하나로 수많은 ‘추종세력’을 몰고 다니는 그는 언뜻 보면 산적 같고 또 언뜻 보면 스님만 같기도 하다. 말하는 폼새도 그러하여, 요리사인지 수도자인지, 그도 아니면 예술가인지 감 잡기가 쉽지 않다. 그가 10, 20분 만에 촬영용으로 뚝딱 만들어온 ‘작품’ 두 가지를 시식하며 살아온 얘기를 캐물었다. 봄나물 소스와 동양란 흰 꽃으로 마무리한 대하찜은 입안 가득 바다 본연의 향취를 내뿜었고, 유자·석류 소스를 얹은 마늘 순 연어 샐러드는 “맛있다”는 감탄사를 연발케 했다.

그의 고향은 경북 안동시 임하면 금소다. 아버지가 예순 넘어 본 2대 독자. 연로한 아버지는 엄한 분이었다.

 

    “덕분에 일찍 천자문을 뗐어요. 어쩌다 외울 것을 다 못 외우면 벌을 주셨는데, 대여섯 살 때부터 몸에 꼭 맞는 지게를 지워 산에 나무하러 보냈지요. 같이 다니는 동네 형들한테서 어리다고 놀림도 많이 받았어요. 어스름녘, 형들이 저만 놔두고 다 사라져버리면 모르는 길을 헤매고 더듬어 밤중에야 겨우 집에 도착할 때도 많았어요. 그러면서 담력이 커졌나봐요.”

 

    그는 집이 싫었다. 왠지 자꾸 밖으로 떠돌고만 싶었다. 하루 종일 흐르는 개울물만 쳐다보다 한밤중 집에 들어가면, 기다리다 지친 부모님은 모진 매를 내렸다. 그러면 또 그는 집을 나와 옆집 마루청 밑에 기어 들어가서는 잠을 잤다. 짐승도 귀신도 무섭지 않았다.

 

“    여덟 살 때 집을 나왔어요. 무슨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도라꾸(트럭)가 지나가기에 그냥 올라탔지요. 그리고 전국을 떠돌았어요. 빌어먹고 빌어자면서.”

숙식을 해결하기는 식당이 제격이었다. 중식집, 한식집, 요정, 분식집, 양식집 할 것 없이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일했다. “역마살이 끼었나 보다” 했더니, 그게 아니라 “그냥 재미로” 그랬단다.

    “굶기도 많이 굶었지요. 왜, 머릿속이 하얘질 만큼 배고픈 상태에서 시골역 대합실에 앉아 있잖아요. 그럼 여행객들이 둘러앉아 사과 같은 걸 깎아 먹어요. 그 사람들이 자리를 뜨면 얼른 달려가 바닥에 떨어진 껍질을 주워먹지요. 그게 얼마나 맛이 있던지…. 전 굶주림의 깊이만큼 인격적으로 성장했다고 생각해요.”

많이 보고 많이 걷고 많은 사람을 만나며 산지식을 쌓았다.

 

 

   “전 혼자잖아요. 자칫 나쁜 길로 빠지면 도와줄 이도 살려줄 이도 없지요. 그러니 잘 살아야 할밖에요. 한때는 가방 들고 다니는 사람이 부러워 야간학교에도 가봤어요. 그런데 얼마 못 가 깨달았지요.

 

책보다 거지들한테 배울 게 더 많다는 걸요. 그 불쌍한 인생을 보며 새삼 다짐했어요. 저렇게는 살지 말아야지, 다른 건 몰라도 인간으로서 실패하지는 말아야지….”

요리를 정식 직업으로 삼은 건 20대 중반 서울에 정착하면서부터였다. 결혼도 했지만 여기저기 떠도는 생활을 아주 멈추지는 못했다. 1980년대 중반에는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으로 갔다. 근로자 2000여 명의 세 끼 밥을 책임졌다.

“그때부터 식재료로 잘 쓰이지 않는 것들을 활용하기 시작했어요. 그곳 재료로 한국음식 맛을 내주고 싶었거든요. 석류, 야생화, 선인장…. 먹어서 죽지 않을 거면 뭐든 써먹었지요. 연구만 한 게 아니라 근로자들이 뭔가 먹을 걸 필요로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만들어줬어요. 사흘 밤 사흘 낮을 내리 일한 적도 있을 만큼.”

 

 

 

98년 양평 정착 … 동호인 클럽도 생겨

 

    한국에 돌아와서는 서린호텔 한식당 주방장이 됐다. 그런데 갈수록 음식 만들기가 재미없어졌다. 하늘 아래 온갖 재료를 다 활용해, 사람의 몸과 맘을 물처럼 맑게 해주는 음식들을 만들고 싶었다. 호텔을 박차고 나와 전국을 떠돌았다. 일년에 네댓 달은 산속, 바닷가에 머물며 새 재료를 구했다. 처음 보는 풀을 맛보다 독이 퍼져 혼수상태에 빠진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 가운데 이제껏 제대로 된 요리상에 올라본 적 없는 많은 생물들이 식재료로 재탄생했다. 들풀, 야생화, 매미껍데기, 구더기, 닭똥이며 생선 비늘까지.

 

   “자연히 먹고살기가 힘들었지요. 두 아들 공납금 제때 대기도 빠듯했어요. 집에 방문이 없어 친구들이 문 달아주고 쌀도 퍼주고요.”

그가 가족을 방기한 것은 아니었다. 한 푼이라도 벌면 곧바로 집에 가져갔다. 술도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난했다. ‘신들린 양 요리에 정진하고픈 욕심’버리지 못한 까닭이었다.

 

   “1990년대 초·중반엔 인사동에서 열리는 전시회 오프닝 파티 음식을 많이 해줬어요. 수고비요? 한 푼도 안 받았죠. 그저 재료비만 받고, 그것도 부족하면 제 돈까지 보태가며 요리했어요. 그 작가가 태어난 고향을 찾아가 그 흙에 뿌리박고 큰 꽃, 나물, 벌레, 해산물을 잡아다 재료로 썼지요. 생명의 근원이 담긴 요리를요.”

예술가들이 하는 몇몇 식당의 주방장, 불교방송 요리칼럼니스트, 프리랜서 요리연구가 겸 코디네이터 등으로 일하다 1998년에야 양평 이곳에 ‘산당’을 내고 비로소 정착했다. 대학 조리과 재학 중 군에 간 큰아들, 해외유학 중인 둘째 아들은 그의 꿈이자 자랑이다.

 

    “고생을 워낙 많이 해 세상 사람들이 좀 우습겠다”고 하자,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고생이란 게 뭔가요. 전 고생한 기억 별로 없어요. 자학적으로 생각할 필요 있나요. 모든 것은 운명인 걸요. 부산 공사판 함바에서 일할 땐데 빵만 사놓으면 봉지를 다 뜯어놓는 도둑고양이가 있었어요. 어느 날 또 그러기에 돌멩이를 냅다 던졌죠. 아, 그런데 그놈이 그만 죽어버린 거예요. 그때 깨달았지요. 나쁘다 하는 것도 모두 내 기준일 뿐 그를 심판할 자격은 제게 없다는 걸요. 그러니 모든 사람이 두렵고 소중할밖에요.”

 

    그는 새로운 재료의 활용뿐 아니라 ‘이미지 요리’로도 유명하다. 먹는 이의 취향과 이미지에 따라 수십 가지 천연 조미료와 향료, 소스를 활용해 매번 다른 요리를 창안한다. 맘 담고 정성 담은 요리는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바치는 공양이나 다름없다.

“요리사가 되길 참 잘했어요. 음식 맛은 자연이 만드는 거거든요. 또 사람의 몸과 영혼을 살게 하지요. 그래서 음식 만드는 사람은 건강해야 해요. 먹을 때만 맛있는 게 아니라, 먹고 나서 집에 갈 때도 행복한 음식. 사람들이 절 기억하느냐 못 하느냐는 중요치 않아요.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죠. 제 몫은 거기까지니까요.”   (끝)

 



양평 자연음식 전문점 ‘산당’


 

 정해진 상 차림은 없다. 주인이 그날그날 확보한 재료와 영감에 따라 즉흥적으로 조리해 낸다.

그 ‘요리 예술’에, 기대와 궁금증은 감탄으로 바뀐다. 98년 여름, 양평 팔당호변 언덕에 ‘자연음식’ 전문점 산당 (031-772-3959)을 낸 임지호(45)씨는 “똑같은 상을 두번 차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손님 구색에 따라서도 변주한다. 연인끼리 오면, 여자에겐 꽃 수술을 넣은 죽을, 남자에겐 마죽을 내는 식이다.

그에겐 하늘 아래 모든 게 음식 재료다. 오랜 세월 떠돌며 들풀과 야생화, 열매와 이파리
들을 활용했다. 솔잎, 찔레 순, 야생 박하, 매미 껍질, 생선 비늘, 닭 배설물까지 쓴다.

산채요리 연구가를 자처하면서도 고기와 해물에도 손이 미친다. 그에겐 ‘이미지 요리전문가’
라는 호칭도 붙어있다. 재료 때깔을 그대로 살려 컬러풀한 요리들은 젓가락 대기가 아깝게
아름답다. 죽산예술제 관객들에게 즉흥 요리를 해 먹이는 것을 비롯해 요리 포퍼먼스도 벌인다.

정갈한 새우젓을 곁들인 돼지 바비큐, 야채 샐러드, 들깨가 작은 열매처럼 송송 매달린 쑥 튀김, 장떡과 도토리묵, 잡채, 찻잎 물을 들인 야채 순대, 진달래꽃을 얹은 두부, 조기 비늘과 모시대 튀김, 딸기 인삼 들꽃 오징어 김을 켜켜이 쌓은 요리까지 줄줄이 낸다. 송광사 기와에 유약을 발라 다시 구웠다는 바비큐 접시를 비롯해 자기 그릇들도 작품 수준이다.  

 

                                                                    - 관련기사  : Ibanez 님의 글에 소개되어 있슴.

 

 

 

* 찾아가는 길 

 

 88도로 - 광주 방면 - 퇴촌방면 - 양평(용문산)방면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운심리 104 - 1 
산당(임지호의 요리연구소) 031- 772 - 3959

 

 

 

       -      다음 지식에서   Ibanez 님의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