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랍제 윤회매의 복원과 전망 - 오문계 장인의 윤회매 복원

2014. 2. 26. 20:46차 이야기

 

 

 

 

 

         Ⅰ 서론


    ‘윤회매’는 밀랍으로 만든 한국공예품이다. 이덕무가 1768년 세상에 처음으로 내놓은 예술품이자 조선시대의 정신을 담은 문화이다. 그러나 이 기술과 문화는 그 동안 끊겨 전하지 못했다. 240년 뒤인 오늘 날 이를 복원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공예적 기술뿐만 아니라 ‘한국화’라는 독특한 문화[무엇이 독특한 것인지 설명이 쉽지 않지만 뒤에서 좀더 세밀하게 설명할 것이다.]를 지닌 무형문화의 소산이다.

   오늘날 우리 후손들은 이를 전승시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동시에 있다.  

 

 

 


 

  Ⅱ 밀랍제 ‘윤회매’와 이덕무


   윤회매는 이덕무[1741~1793]가 스스로 독학하여 터득한 밀랍공예의 한 작품이다. 이덕무가 이를 착안하여 만들어 처음 세상에 내놓은 것이 1768년이다.

 

 [매화 주인梅主] 박유관 주인(薄遊館主人) [朴趾源 1737~1805]1)


[증인] 형재(炯齋) [李德懋 1741~1793]2)
     영암(泠菴) [柳得恭 1749(영조 25)~?]3)
[글쓴이] 초정(楚亭)[朴齊家 1750~1815]4)


   이상은 윤회매를 판매한 증서5) 끝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증서 때문에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모 TV 방송에서 박지원을 윤회매의 만든 사람으로 이해한 것이 그것이다. 매화의 주인[梅主]이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이라는 사실이다. 이덕무가 만든 것이므로 당연히 매화의 주인은 그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덕무는 유득공과 함께 ‘증인’으로 나서고 있다. 이덕무와 유득공은 함께 어두운 방[暗室]에서 자면서 윤회매를 고안해 낸 장본인들이다. 


   영암(泠菴) 유득공(柳得恭)이 나와 암실(暗室) 속에서 함께 자면서 말로만 그 법을 배워 어슴푸레 알았다가, 뒤에 드디어 꽃을 만들어 묘경(妙境)까지 이르렀고, 자기 문지방에 ‘납매관(蠟梅館)’이라 써 붙이려고까지 하였다.


   실제 창안자들이 증인으로 나선 것은 서출 신분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이들은 뒤에 규장각 4대 검서관으로 박제가·유득공·李書九[1754~1825] 등이 유명하다. 매화의 주인인 박지원은 당시 32살로 2년에 홍대용[1731~1783]에게 지구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배운 뒤였다. 이덕무는 39살인 1779년에 유득공도 38살로 같은 해에 검서관이 된다. 하여튼 박지원의 문하에 있던, 19세의 청년 박제가가 ‘서사’로 참여하고 있다.


    만약 가지가 가지답지 않거나 꽃이 꽃답지 않거나 꽃술이 꽃술답지 않거나, 상(牀) 위에 올려놓아도 운치가 없거나 촛불 밑에서 매화의 성긴 그림자가 생기지 않거나 거문고를 탈 만한 흥을 돋우지 않거나 시(詩)의 운율을 도울 수가 없다는 등, 이 중 한 가지라도 그런 것이 있으면 모임[社]에 죽 알려 영원히 꽃을 사지 못하게 할 것임.


   이 인용문은 증서의 일부이다. 윤회매가 상품적 가치가 떨어질 경우 영원히 밀랍화를 팔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바탕에는 계속하여 윤회매를 만들어 팔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덕무가 39살에 규장각 검서관이 되기 전까지 뚜렷한 직책이 보이지 않는 것은 윤회매를 계속해서 만들었다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하여튼 이덕무, 유득공, 무릉씨 등은 서로 윤회매의 제작 기법으로 서로 연구하며 만들었다.

  이덕무가 윤회매를 처음 세상에 출하한 것은 28살인 1768년이었다.


    내가 17~18세였을 때 삼호(三湖)의 수명정(水明亭)에서 조용히 지내면서 무릇 3년 동안 매화를 주조하여 독서하는 등불에 비치는 그림자를 취하였으니, 세속과는 어울리지 않는 운치이나 다소 마음 붙일 즐거움이 되었다.

  17~18살 삼호의 수명정에서 3년 동안 윤회매를 만들었다는 이덕무의 고백이 나온다. 그렇다면 10년간의 윤회매를 연구하여 완성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기는 잘 모르지만, 유득공과 무릉씨는 함께 동호인으로 연구에 참여하였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영암(泠菴) 유득공(柳得恭)이 나와 암실(暗室) 속에서 함께 자면서 말로만 그 법을 배워 어슴푸레 알았다가, 뒤에 드디어 꽃을 만들어 묘경(妙境)까지 이르렀고, 자기 문지방에 ‘납매관(蠟梅館)’이라 써 붙이려고까지 하였다.

   무릉씨(武陵氏)는 삼매경(三昧境)을 헤매다가도, 매화를 만들기 시작하면 퍼뜩 정신 차려 화로를 끼고 앉는다. 밀랍을 본뜨고 털을 자를 때는 눈이 빛나고 손은 나는 듯하였고, 동자(童子)를 마구잡이로 부렸다. 손님의 눈앞에 내놓고 자랑삼아 과장할 때는 큰일이나 되는 듯이 하지만, 잠시 뒤에 경계가 바뀌고 일이 달라지면, 마치 천한 흙 인형을 버리듯 잊어버린다. 만약 그에게 감상(완물玩物)하는 기롱을 한다면 어찌 참으로 무릉씨를 아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들이 윤회매를 고안하기 위하여 얼마나 고심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Ⅲ 오문계 장인의 복원

  

   이덕무가 창안했으나 그동안 240여년간 끊어졌던 ‘밀랍제 윤회매’를 복원하는 데 성공하였다. 2004년 KBS 한 피디가 미국 버클리 대학에서 《윤회매십전輪回梅十箋》을 발견한 뒤 국내의 관련된 여러분들에게 복원을 의뢰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결국 오문계吳文啓[1942 ~ 현재] 장인에게 복원을 의뢰하여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은 2004년 KBS 1TV 수요기획으로 방영된 바[* 별첨 자료 참조] 있다. 

 

   공예가로 오문계가 이와 같이 인정을 받은 것은 ‘백제금동대향로’를 복원한 뒤부터의 일이다. 이 복원 과정도 MBC 창사 30주년 기념 ‘1300년만의 비밀 금동대향로’의 방영[* 별첨 자료 참조]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로 인하여 1995년 문화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가 복원한 국보 제287호인 백제금동대향로는 1997년에는 뉴욕 박물관에 전시되기도 하였다.

  이들의 작품은 모두 밀랍제를 이용한 공예품이었다. 그야말로 절정의 기능과 예능을 겸비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할 것이다.


   오문계가 공예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68년부터이니, 45년 동안 외길를 간 것이다. 그의 스승은 목공예명장이며 친형이기도 한 오해균에게 의해서이다.

   현재는 백제금속공예사[충청남도 공주시 검상동 검상고갯길 179, 규모 198평방미터(60평): 작업실 2칸, 거주실 1칸]과 ‘윤회매’ 공방[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 337 한옥마을내 , 규모 19.8평(6평) 작업 및 전시]을 운영하고 있다.  

 

 

 

 


  Ⅳ 복원 과정


    1 제작 도구



    2 제작 기법


    윤회매는 1) 꽃을 만드는 과정, 2) 나뭇가지에 붙이는 과정, 3) 꽂거나 심는 과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 관한 설명은 이덕무의 윤회매에 관한 기록을 옮긴 것이다.

 

  1) 꽃을 만드는 과정은 다시 꽃잎[瓣], 꽃받침[萼], 꽃술[蘂], 꽃[花] 등의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1) 꽃잎[판瓣] 만들기


   밀랍을 반죽하는 자가 치자(梔子)로 물을 들이기 때문에 빛이 누렇게 되는데, 밀랍을 기름처럼 고아 질긴 종이에다 부어 짜면서 깨끗한 그릇에 받는다. 세 번을 그렇게 짜면 찌꺼기가 걸러져 빛이 말갛게 된다.
   걸러진 밀랍을 작은 도자기 접시에다 굽는데, 불이 세면 고기 눈이나 게거품 같은 것이 생기므로 불기운을 알맞게 하여 지나치게 끓지 않게 한다. 접시를 평지에다 내려놓고 재나 그을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 만약 고기 눈이나 게거품 같은 것이 생기면 꽃잎이 다 매미 껍질처럼 주름살이 잡혀 쓸 수가 없게 된다.

   단단하고 무늬가 고른 2~3치 되는 나무로 꽃잎을 본뜨는 도구를 만드는데, 이름을 매화골(梅花骨)이라 한다. 그 머리 부분을 깎아내어 하나의 매화 꽃잎 형(形)을 만드는데, 머리와 배는 둥글고 튀어나오게 하며 꼬리는 빨게 하여 마치 표주박을 갈라놓은 듯하게 또는 올챙이같이 만든다. 대체로 나무 끝이 튀어나오게 하기는 길가의 돈대(墩臺)같이 하고, 꽃잎 부분의 꼬리는 돈대의 턱같이 만든 다음, 목적(木賊 속새)으로 다듬어 아주 윤기 나고 매끄럽게 만든다. 그릇 하나에 냉천수(冷泉水)를 담아 밀랍을 담은 접시 가에다 놓고, 먼저 매화골을 냉천수에 담갔다가 꺼내서 다시 납장(蠟漿)에 담그는데 가쁜가쁜 손을 놀려 납장이 매화골의 뒤에까지 닿지 않도록 조심한다. 이것을 들어 다시 냉천수에 담그면 꽃잎이 콩 껍질처럼 뚝뚝 떨어져 나와 물 위에 뜬다. 만약 손놀림이 더디면 꽃잎이 둔하게 되고 너무 빠르면 꽃잎이 부서지며, 또 밀랍이 끓으면 꽃잎에 구멍이 생기고 밀랍이 식어버리면 꽃잎이 두꺼워진다. 묘리는 마음에 있으니 민첩하면 꽃잎이 고르게 되고 손도 나는 듯하다.
   대체로 밀랍에 담그는 즉시 골 자루로 접시 가를 한번 쟁그랑 소리가 나도록 두드리면 꽃잎이 골라진다. 꽃잎은 빠져나오는 대로 건져 종이 위에 엎어두면 금방 마른다. 꽃잎은 대체로 오목하면서도 얕고 둥글면서도 얇은 것이 좋다.


  (2) 꽃받침[악萼] 만들기


   꽃받침은 삼록지(三綠紙)를 쓴다. 연잎 줄기처럼 푸른 것을 쓰는데 너무 낡은 것은 못쓰고 벽록색(碧綠色)이 나는 것만 쓸 수 있다. 이것으로 만든 것은 매화 중에 기품(奇品)으로 이름을 녹악화(綠萼華)라 한다. 본래 다른 매화의 꽃받침은 다 황색으로 5 톱니처럼 되지만, 유독 조금 푸른 것은 나무 끝을 녹두(綠豆) 크기 정도로 깎고 아래는 빨게 한다. 녹지(綠紙) 끝을 톱니 모양으로 오리되 두더지 발바닥같이 5 군데를 뾰족하게 만든다. 콩대를 충분히 쌀 수 있을 정도로 길게 하는데, 종이의 아래 양쪽을 잘라서 뾰족하게 한다. 그 종이를 거꾸로 콩대에 감는데, 5개의 뾰족한 것을 반립(半粒) 크기쯤 콩이 달려 있는 오목한 곳 아래로 드리워지게 한 다음, 실로 그 오목한 부분의 종이를 묶고 두세 번 감는다. 다시 엄지와 식지(食指)로 종이의 뾰족한 부분을 만 후 실을 풀면 둥그스름한 꽃받침이 된다.

   그것을 납장에 담갔다가 굳기를 기다려 그 톱니 모양을 밖으로 쓰러뜨리면, 5개의 뾰족한 것이 고루 완전하게 되어 훨씬 색이 살아나게 된다. 5개의 뾰족한 것이 꽃받침의 둘레이고, 그 꼬리는 꼭지가 된다.

 

 


  (3) 꽃술[예蕊] 만들기

 

   노루털로 하얗고 속이 빈 것을 쓰는데 한 꽃술에 50개를 잘라서 섞이지 않도록 한다. 예리한 끝을 밀랍에 담가 날아가지 않게 한 다음, 잘 드는 칼로 그 털의 뿌리 쪽을 마치 규수(圭首 규벽(圭璧)의 머리 부분)처럼 2 쪽으로 가른다. 가운데 수염 하나나 혹 둘은 특별히 길게 두고 자르지 않는데, 그것은 씨앗을 맺게 하는 꽃술로 갓난애의 배꼽 꼭지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그림 매화를 따른 것이니, 진짜 꽃은 중앙의 꽃술 10여 개가 도리어 움푹 들어가 조금 짧다. 노루털이 없으면 혹 흰 모시의 날[經]을 쓰기도 한다.

   5 꽃잎을 꽃받침에다 접착시킨 뒤에 노루 털에다 다시 납장(蠟漿)을 물들여 꽂는다. 석자황(石雌黃) 가루와 포황(蒲黃) 가루, 혹은 황량(黃梁) 가루와 개자(芥子) 가루를 고루 섞은 다음 대꼬챙이에 풀을 묻혀 가볍게 꽃술 끝에 바르고는 황색 가루를 고루 묻힌다. 또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불로 털 꽃술의 끝을 태우면, 불탄 흔적이 자연 황색을 묻힌 것과 같이 된다.


  (4) 꽃[화花] 만들기


   거칠고 빳빳한 꽃잎은 마음대로 손톱으로 긁어내어 고르게 될 때까지 다듬고 꽃잎 꼬리에다 납장을 살짝 묻혀 포개 붙여 다섯 잎이 되도록 손가락 끝에 잡고 있다가 다섯 꽃잎이 완성되면 상 위에다 엎어둔다. 꽃받침에 다시 납장을 묻혀 꽃 속에 접착시키고 꼭지를 들어 놀려 보면, 다섯 꽃잎이 또렷이 드러나는데 꽃잎 꼬리 부분이 겹쳐져 구멍이 없게 된다. 그때 송곳 끝을 불에 달구어 구멍을 내고 꽃술을 꽂고 가루를 묻힌 다음 다시 송곳 끝으로 골라 위는 흩어지고 아래는 모이게 하며 겹쳐서 끌리거나 붙어서 빳빳하지 않게 한다. 《화보(畫譜》에 이르기를,

  “호랑이 수염같이 꿋꿋해야 한다.”

  하였는데, 경직(剄直)한 것이 좋다는 말이고, 또 이르기를,

  “가운데는 길게 하고 주위는 짧게 하여 촘촘히 붙은 것을 떼어주어야 한다.”

  하였다.

   피지 않은 봉오리는 나무 끝을 콩의 크기 또는 녹두 크기로 깎아서 별도로 납장에 담가 본을 뜬다. 그것을 여자(余字) 또는 향주(項珠)라 한다.
   꽃봉오리 가운데가 벌어져 꽃술 끝이 살짝 나온 것은 시자(示字)라 하며, 동그란 봉오리에 꽃잎 하나가 끼어 있는 것은 이(李)라 하고, 다섯 꽃잎이 말려 있고 가운데 꽃술이 나와 있지 않은 것은
고노전(古魯錢)이라 하며, 말려 있으면서도 꽃술이 나와 있는 것은 수구(繡毬)라고 하는데, 이 2 가지는 다섯 꽃잎을 연이은 다음, 꽃잎 하나하나를 불에 쬐어 손가락으로 안쪽을 향해 휘어서 만든다. 꽃잎 3개는 떨어져버렸고 남은 2개마저 떨어지려고 하는데 꽃술만이 싱싱한 것은 원이(猿耳)라 한다. 한 봉오리에 2 꽃잎이 끼어 있는 것은 과[苽]라 하며, 5 꽃잎이 고루 충만한 것은 규경(窺鏡) 또는 영면(迎面)이라 한다. 남북(南北)으로는 꽃잎이 말려 있고 좌우로는 피어 있는 것은 면(冕)이라 하며, 꽃잎이 하나만 남아 있는 것은 호면(狐面)이라 한다.
   또 산두(蒜頭)ㆍ해아면(孩兒面)ㆍ토취(兎嘴)ㆍ구형(龜形)ㆍ풍락(風落)ㆍ삼태(三台)ㆍ배일(背日)ㆍ향양(向陽)이 있다.

   이 방법은 이덕무가 스스로 창안한 지화법
(紙花法)이다. 당시 속장(俗匠)들은 오목한 끌로 재단을 하므로 신기할 것이 없다. 도장석(圖章石) 혹은 연석(硯石)에다 매화 꽃잎 하나를 너무 깊거나 얕지 않게 파 매끄럽게 한 다음, 분지(粉紙)를 나비 날개 크기로 찢어 혀끝으로 침을 발라 오목 파인 돌에다 덮고 깨끗한 솜으로 누르면, 젖은 종이가 오목한 속에 찰싹 붙는다. 그것을 거꾸로 잡고 불에다 구우면 금방 바짝 마르는데, 예리한 칼끝으로 꽃잎 가를 따라 오린 다음 꼬리를 슬쩍 치켜들면 꽃잎이 된다. 꽃술을 꽂고 꽃받침을 대고 거꾸로 잡고 칠을 하는 순서로 매화를 만든다. 만약 복숭아꽃을 만들려면 꽃잎 머리를 약간 뾰족하게 하고 연지(臙脂) 즙을 적시며 꽃받침은 먹물에 주사(朱砂)를 타서 참새의 머리 색깔같이 만든다. 가지는 꼭 푸르지 않아도 된다.
  복숭아꽃이건 매화이건 가지 끝에 부드러운 잎 3~4개를 단다. 분지에 연한 녹색을 물들여 잎을 물고기 모양으로 오리되 등은 반드시 반장(反張 안쪽으로 오무라들게 함)되게 하고 가에는 반드시 가느다란 톱니 모양을 만든다. 가지 끝 잎은 조금 작게 하여 아래 절반은 연한 녹색, 위 절반은 연지 색을 물들인다. 돌 위에 잎 무늬를 음각하되 먼저 종문(縱紋) 하나를 새기고 좌우로 각기 5~6개의 비스듬한 횡문(橫紋)을 새기는데, 살이 없는 물고기 등뼈나 갈비뼈같이 새긴다. 지엽(紙葉)을 새긴 돌 위에다 덮고 무늬를 따라 엄지손톱으로 문지르면 자연스러운 잎이 되는데, 그대로 납장(蠟漿)에 적시면 선명한 윤기가 나고 매끈해진다.



   2) 나뭇가지[條]에 매달기

 

   나뭇가지는 반드시 매화나무 가지 혹은 벽도(碧桃) 가지를 써야 한다. 촘촘해도 안 되고 길어도 안 되며 커도 안 된다. 체세(體勢)가 화격(畫格)에 맞는 것은 나뭇가지가 많아야 3을 넘지 않아야 하며 곁가지도 5~6개이면 된다. 색이 절반쯤 붉은 것이나 병들어 검은 반점이 생긴 것은 좋지 않다. 휘고 펴고 다듬고 묶는 것도 슬기로운 마음가짐과 능숙한 솜씨로 체세를 따라 조작해야 한다. 나뭇가지가 어리면 꽃이 고독해 보이고 나뭇가지가 늙으면 꽃이 애처로워 보인다. 어리지도 않고 늙지도 않아야 꽃이 전면(纏綿 격조 있게 얽혀 떨어지지 않음)하게 되며, 비스듬한 것 똑바른 것 혹은 상하 마주보게 해서 서로 격이 맞도록 한다.

   나뭇등걸[사楂]은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도토리나무, 철쭉나무 등을 쓴다.  가시나 이끼가 있으면서 괴이한 것이 더욱 좋으며, 색은 검푸르고 비에 벗겨지고 흙에 먹히고 좀이나 개미가 구멍을 내놓은 것이 좋다. 줄기[초梢]로는 두병(斗柄), 여자(女字), 철편(鐵鞭), 학슬(鶴膝), 용각(龍角), 녹각(鹿角), 궁소(弓梢), 조간(釣竿)이 있다. 《화보》에 ‘기조(氣條)에는 꽃을 달지 말라.’ 하였는데, 기조란 싹이 곧바로 자란 가지를 말한 것이다. 칼끝으로 줄기의 눈을 파고 꼭지 끝을 꽂는데 흔적이 보이지 않도록 하며 혹은 꼭지 끝에다 심기도 한다.《화보》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담상담상한 것이 좋고 촘촘한 것은 좋지 않다. 늙은 것이 좋고 어린 것은 좋지 않다. 파리한 것이 좋고 살찐 것은 좋지 않다. 봉오리 져 있는 것이 좋고 활짝 핀 것은 좋지 않다.”

 

 

  3) 꽃꽂이[植]로 꾸미기

 

   절지(折枝)를 고동병(古銅甁)이나 가요(哥窰)에다 물을 담아 꽂아 두면 가지가 시들지 않고, 등걸이 있는 것이면 필통(筆筒)이나 자두(磁斗)에 꽂는 것이 좋다. 오래 두고 보고 싶으면 가지에다 푸른 밀감 찌꺼기를 진하게 묻혀 물을 뿜어 목욕을 시킨다. 혹 비가 내리는 곳에다 옮겨 두면 훨씬 더 신선해 보이고, 혹 괴석(怪石)을 곁들이거나 바위 틈새에 심어두면 풍운(風韻)이 한결 돋보인다.


     Ⅴ 무형문화재상 의의


   이덕무가 창안한 밀랍제 ‘윤회매’는 단순한 관상용 매화가 아니다. 북학이라는 실학으로 접근한 것은 ‘윤회’라는 불교도 수용한 데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일반 유학자들은 정면으로 불교를 내세우기를 피하는 것[금기]이기 때문이다.

   이덕무의 윤회매는 두어 가지 특징 내지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처음이 실학자이면서도 유교적 세계관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꽂아두는 그릇[용기]으로 구리병 모양[동병식銅甁式], 네모 모양[자두식磁斗式], 도자기병 모양[가요식哥窰式], 둥근 필통 모양[필통식筆筒式] 등을 들고 있다. 이를 분석해보면 그릇의 재료가 쇠[구리], 자기이며 모양이 둥글거나 네모진 것 등이다. 이는 유가의 우주관이라는 담겨 있는 흔적이라고 할 것이다. 유교 의례에서 제기는 둥근 것=하늘, 네모진 것=땅 등이 얽혀 있다. 그뿐이 아니다. 재료는 나무, 쇠, 대나무 등을 망라하고 있다. 이를 흔히 ‘변두籩豆’라고 표현된다. 이러한 유교적 생각은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을 동일한 질서로 파악하려는 사상 소위 3재三才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덕무가 실학자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유가적 사회에 살고 그 문화의 범주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

   또 하나의 비밀은 ‘윤회매’가 한국화의 범주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입장에서 볼 때 매화는 풍매화에 속한다. 풍매화란 바람으로 종자를 번식시키기 때문에 잎이 나기 전에 꽃이 핀다. 그러나 한국화는 그러한 감상법으로 접근할 수 없다. 예를 들면, 한  화폭에 목련과 국화가 그려져 있는 것을 자주 본다. 목련은 봄에 국화는 가을에 핀다. 실제적 사실로는 한 화폭에 담길 수 없다. 이것이 오늘날 서양식 그림으로 인식하는 태도 내지는 자세이다. 보통 한국화는 ‘감상’과 같이 쓰는 말로 ‘독화讀畵’가 있다. 그림을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목련은 ‘부귀’를 국화는 ‘절개’를 상징하기 때문에 ‘부귀와 절개’를 염원하는 그림인 것이다. 사실적 풍광이 아니라 ‘정서적 풍광’을 그린 것이다. 하나 더 예를 들어보자. 흔한 한국화 가운데 하나가 소나무에 앉은 학 그림[송학도]이 있다. 조류 학자에 의하면 학은 소나무에 절대로 앉지 않는다고 한다. 소나무에 앉는 것은 학이 아니라 백로라는 것이다. 그러면 소나무 가지 위에 왜 학을 앉게 하였을까? 송松=송頌, 학=장수 즉 송수頌壽로 오래 사시는 것을 기린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이덕무가 윤회매에서 나뭇잎을 단 것[복숭아 잎 모양(도엽식), 연초록 복숭아 잎 묶음 모양(연도엽첩식), 돌로 새긴 나뭇잎 무늬 모양(석각엽문식) ]은 한국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나무는 꽃이 있으면서 잎도 있어야 온전한 나무가 된다. 실제로는 잎이 없고 꽃잎만 있어야만 된다. 말하자면 윤회매는 ‘사실적인 그림’이 아니라 ‘정서적 그림’이라는 한국화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서양화에서도 ‘정서적 그림’인 추상화라는 양식이 있다. 그러나 이는 성격상 또 다른 세계일 뿐이다.

   윤회매는 비록 밀랍제이지만 한국화의 특징 내지는 비밀를 간직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문화인 것이다. 그저 단순한 관상용만이 아니라 문화와 역사가 숨쉬는 공간과 시간인 것이다. 그저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사상이며 철학이며 우리나라의 보편성·항구성·개성인 것이다.

   이러한 문화와 역사는 우리 후손이 꼭 보존하고 계승해야 할 무형문화재이다.

 

 

 


Ⅵ 결론


   싸이의 ‘강남스타일’ 이후로 한류는 세계의 중심부에 섰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대장금’ 등의 영상문화가 동남아 중심으로 유행했으나 ‘강남스타일’을 기점으로 세계를 무대로 삼은 것이다.

 

   밀랍을 써서 공예품을 만드는 것은 동·서양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각 나라는 그들 나름의 환경이라는 특수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인류와 같이 하는 보편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이것이 예술[공예]의 존재 이유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대로 ‘윤회매’는 조선시대가 전하는 기능이면서 동시에 세계관을 보여주는 무형문화재인 것이다.

   후손들은 복원된 ‘윤회매’를 다시 끊어지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지속적으로 전승하면서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동시에 책임도 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야 할 이유가 있다. 240여년만에 어렵게 복원한 조선시대의 예술적 기능이자 동시에 문화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승이야말로 ‘한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DNA이라고 보는 까닭이다.  



 

                                                다음 카페 <지식곳간과 가게> 구중회 님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