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다도의 문화사] 2. 신라의 다도 - 3) 산천 속에서 다도를 행한 화랑도와 충담

2014. 3. 1. 02:53차 이야기

 

 

 

 

 

      

3) 산천 속에서 다도를 행한 화랑도(花郞道)와 충담(忠談)


  신라의 다도는 승려뿐만 아니라 화랑(花郞)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채 발달하였다. 화랑들은 자연속에서 우주의 법도를 체험하며 본래의 한마음으로 돌아가려는 풍류정신(風流精神)를 실천하려는 이들이었는데, 이때 차는 수련의 훌륭한 매개체가 되었던 것이다. 화랑들이 이처럼 산천을 주유하는 가운데 차를 달여 마시며 심신을 닦아온 내용은 여러 기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특히 강릉으로 동쪽 15리 지점에 있는 한송정(寒松亭)에는 사선비(四仙碑)가 있고 근처에는 화랑들이 차를 끓였던 다천(茶泉)과 석구(石臼), 석조(石竈)가 남아있다. 따라서 고려 중기의 문장가인 이곡(李穀)이 천하의 고적을 탐방하고 기행문으로 지은 『동유기(東遊記)』를 비롯하여, 『동국여지승람』「강릉대도호부누대조」에 나타난 경포대(鏡浦臺)에 관한 기록, 김극기(金克己), 안축(安軸), 이곡(李穀) 등의 한송정에 관한 시, 이규보(李奎報)의『남행명록(南行明錄)』등에는 이러한 화랑과 다도의 관련성이 잘 드러나 있다.

 

  곧 후대의 문인들은 바닷가와 산속등지에서 화랑들이 사용했던 다구(茶具)와 여러 흔적들을 통해 그들의 수행모습을 유추하고 있는 것이다. 안축은 「한송정지(寒松亭誌)」에서 다음과 같이 글을 남긴 바 있다.


오직 차를 끓이던 샘만이

외호이 돌부리에 누워 있다


惟有煎茶井   유유전다정

依然在石根   의연재석근


또한 고려 중엽의 유명한 묵객인 이곡의 「한송정지(寒松亭誌)」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낭도는 갔으나 송정은 남아 있고

산정에는 돌솥만이 외로이 있다


仙去松亭在   선거송정재

山頂石鼎存   산정석정존

 


    이처럼 신라의 다도정신은 이미 신라시대에 화랑도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으며, 그 기반은 곧 원효스님의 일심,화쟁, 무애사상 속에서 마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 742~764) 당시에 충담스님과 관련된 차이야기가 다음과같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 오악(五嶽) 삼산(三山)의 신들이 때때로 모습을 드러내어 대궐 뜰에서 왕을 모시었다. 3월3일, 왕은 귀정문(歸正門)누각 위에 올라가 좌우 신하들에게 일렀다.

“누가 길거리에서의 위의(威儀)있는 승려 한 명을 데리고 올 수 있겠느냐?”

 

   이때 마침 품위 있고 모습이 깨끗한 고승이 이리저리 길을 배회하고 있었다. 측근 신하들이 얼른 가서 승려를 데리고 왔으나 왕은 말했다.

“내가 말하는 스님이 아니다.”

    승려를 돌려보낸 후 다시 납의(衲衣)를 입고 앵통(櫻筒)을 걸머진 한 승려가 남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왕은 그를 보자 기뻐하며 누각 위로 맞아들였으며, 그의 통 속을 보니 다구(茶具)가 담겨 있었다. 이에 왕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요?”

“소승은 충담이라 합니다.”

“어디서 오는 길이요?”

“저는 3월3일과 9월9일이면 차를 달여서 남산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彌勒世尊)께 올리는데, 오늘도 그 일을 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나에게도 차 한 잔 주겠소?”

 

    충담스님이 차를 다려서 왕에게 드렸는데 차의 맛이 이상하고 찻잔안에서는 묘한 향기가 풍겼다. 이에 다시 왕이 말했다.

“내 일찍이 들으니 대사가 기파랑(耆婆郞: 화랑의 이름) 을 찬미한 사뇌가(詞腦歌)가 그 뜻이 무척 높다고 하던데, 과연 그러하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하여 안민가(安民歌)를 지어주오.”

충담스님이 이내 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은 이를 아름답게 여겨 왕사(王師)로 봉했으나 스님은 두 번 절한 뒤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당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여 통일을 이룬 지 100년이 되는 해(760년, 경덕왕 19)에 나라에는 괴변이 생겼는데, 곧 하늘에 두 개의 해가 나란히 나타나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일식, 월식등에 따른 자연현상이지만, 천문학적 지식이 부족한 데다 백제,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이 끈질기게 계속되는 가운데 일어난 현상이어서 왕실에서는 더욱 촉각을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경덕왕은 승려이자 국선도(國仙徒:화랑)였던 월명대사(月明大師)에게 이를 해결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월명대사는 미륵의 자비를 비는 「도솔가」를 지었다. 월명대사가 「도솔가」를 부르자 괴변이 사라졌으며 이에 경덕왕은 대사에게 차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월명대사가 미륵세존을 모시는 산화가를 불렀더니 해의 괴변이 사라졌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좋은 차와 108개의 수정 염주를 하사하였다.


   이후 경덕왕은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충담스님에게 백성들의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안민가」를 짓도록 한 것이다. 향가는 당시 백성들에게 대중가요와 같은 것이었고, 하랑에게 차를 가르치는 법문을 충담스님이 「사뇌가」등을 통해 이미 향가로써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충담스님이 삼월삼짇날 삼화령에 차를 올린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경덕왕이 우연인 듯 가장하여 스님을 만난 것이라 하겠다. 이때 충담스님은 다음과 같이 「안민가」를 지었다.

 

 


「안민가」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린 아이로고

하실지면 백성이 임금의 사랑을 알리라.

먹고 사는 일이 절실한 백성에게 배불리 먹여 다스린다면

백성이 신라를 버리고 갈 리가 있겠는가.

나라는 그렇게 유지되어 가리라.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모두 태평하리라.

 

 


「安民歌  안민가」

 

君隱父也臣隱愛賜尸母史也        군은부야신은애사시모사야

民蔫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        민언광시한아해고위사시지

民是愛尸知古如                  민시애시지고여

窟理叱大胯生以支所音物生        굴이질대과생이지소음물생

此胯喰惡支治良羅                차과식악지치양라

此地胯括遺只於冬是去於丁        차지과괄유지어동시거어정

爲尸知國惡支持以支知古如後句    위시지국악지지이지지고여후구

君如臣多支民隱如                군여신다지민은여

爲內尸等焉國惡太平恨音叱如      위내시등언국악태평한음질여

 

 


  위 내용을 통해 충담스님이 매년 3월3일과 9월9일 남산에 올라 미륵세존에게 차를 올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양기가 충만한 삼월삼짇날과 중양절에 천지의 여러 신에게 제를 올리는 민간의 관습을 받아들여, 불교에서도 자연 속에서 산천에 모신 부처님에게 차를 공양해왔던 것이다. 이때 민간에서는 정화수를 사용하였을 것이지만 불교 및 왕실에서는 차를 올렸을 거임을 짐작할 수 있다.

 

 

 

                                                                  - 다음 카페 <선다향> 인연법(泥蓮華) 님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