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다도의 문화사] 3.고려의 다도 - 1)儀式의 핵심이 된 차

2014. 3. 1. 03:04차 이야기

 

 

 

    1) 의식의 핵심이 된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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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는 신라의 문화와 예술을 계승, 발전시켜나가는 가운데 다도 역시 불교문화와 더불어 더욱 융성해졌으며, 각종 의식의 주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고려사』「예부(禮部)」에 기록된 여러 의식을 살펴보면, 고려시대 이후부터 궁중에서는 여러 의식이 있을 때 다례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곧 연등회, 팔관회 등 국가적 규모의 년례행사를 실시할 때, 중국의 사신을 맞이할 때, 궁중의 주요행사로서 왕실의 후손이 태어나거나 왕자의 책봉, 공주를 시집보낼 때, 선왕(先王)을 위한 의식 등에서 다례가 행해졌다. 또한 군신이 더불어 연회하거나 고관의 회의 때, 신하가 죽거나 감형(減刑)할 때 등의 경우에도 차를 내는 의식을 행하였다.

 

  고려시대 국가의 가장 성대한 년중행사로는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를 들 수 있는데, 이때 왕실에서는 신하들과 함께 다과(茶菓)를 나누며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를 진다의식(進茶儀式)이라 하는데, 곧 음식과 술을 본격적으로 나누기 전에 신하가 왕에게 제일 먼저 차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고려사』「연등회의조(燃燈會儀條)」에는 진다를 행할 때의 의례지침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왕이 시신(侍臣)에게 진다(進茶)를 명하면 집례관(執禮官)은 전(殿)을 향하여 국긍 재배하고 차를  올린다. 어주(御酒)를 올리고 수라를 올릴 때 집례관이 거행하던 방식과 같은 것이다. 이때 임금은 반드시 태자 이하 시신제관(侍臣諸官)에게 차를 하사하는 것이 정례로 되어 있다. 이렇게 하여 차가 태자 이하 시신에게 이르게 되면 집례관이 배례를 청한다. 그러면 태자 이하 모두가 왕이 내린 차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재배를 행한다. 집례관의 집전에 따라 차를 마시고, 끝나면 읍하고 있다. 주식(酒食)때도 그 예식은 이와 동일하다.

  

   고려의 차문화는 송나라 사신들이 개성을 방문한 뒤 그 감사을 적은 기록으로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과 손목(孫穆)『계림유사(鷄林類事)』등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손목은 “송나라에서는 차를 ‘차’라고 하는데 고려에서는 ‘다’라고 하며, 다시(茶匙:차를 더는 숟가락)를 ‘다술’이라 한다”는 간단한 내용을 적었다.

 

   서긍의 『고려도경』은 고려에 관한 갖가지 견문(見聞)을 그림과 문장으로 엮은 것이며, 총 28문 300여 항으로 이루어진 내용 가운데 차에 관한 것은 기(器)4편의 ‘다조(茶祖)’라는 절목에 기록되어 있다.

    이 절목에서 고려인의 차습관, 법도와 함께 차에 대한 품평 등을 적고 있다. 이에 따르면 예로부터 고려인은 차 마시기를 좋아하여, 만나는 사람마다 ‘차를 마시고 가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다구(茶具)로는 도금한 금화조잔(金花鳥盞)과 청자 찻잔을 쓰고 화로는 은로(銀爐)를 쓰고 있는데 모두 중국을 본받았다고 하였다. 또한 고려에서 생산된 차는 그 맛이 쓰고 떫어 입에 넣을 수가 없기 때문에, 중국의 납차(臘茶)와 중국황실에서 쓰던 용봉사단차(龍鳳賜團茶)를 귀중히 여겨 송나라에서 오는 증정품 및 송나라 상인으로부터 산 것을 즐겨 마신다고 기록하였다.

 

 

   당시 고려왕실에서 사용하던 토산(土産)차는 하동 화개동에서 수확된 유차(孺茶)로서 그 질이 중국의 용봉사단차를 능가하는 우수한 차였다. 유차란 이른 봄 잔설(殘雪)속에 싹이 튼 눈잎(嫩葉)으로서 그 향기와 감미가 각별한 것인데, 곧 오늘의 작설차를 일컫는다. 그러나 사신이었던 서긍은 송나라의 입장에서 작설차의 우수성을 부각시키고자 상대적으로 고려의 차맛에 혹평을 한 것이라 여겨진다. 아울러 궁중과 상대부들의 끽다예법(喫茶禮法)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붉은색 탁자에 다구를 배열하고 그 위에 홍사(紅絲)보자기를 덮었으며, 매일   

             세차례씩 차를 내어오고 다음에는 더운 물을 가져와... 사신이 그 차를 다 마시

             면 기뻐하고 다 마시지 아니하면 불쾌해하므로 항상 억지로 차를 다 마신다.


  특히 중국, 일본뿐만 아니라 인도, 인도네시아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와 국교를 확장해나감에 따라, 나라에 외국사신을 영접하는 예빈사(禮賓社)를 두게 되었고, 이때 차는 예빈의 핵심적 요소로 다루어졌다. 또한 다방내시(茶房內侍)의 제도를 마련하여 차에 대한 제반 법도(法度)를 도맡게 하는가 하면, 불교에서는 차를 전문적으로 생산하여 사찰에 바치는 다촌(茶村)을 두기도 하였다. 따라서 큰 사찰에서는 전용가마를 두어 각종 그릇과 기와 등을 직접 구워 사용하였고, 민간에도 전문 차가게인 다점(茶店)과 먼 길을 오가는 이들을 위한 다원(茶院)이 고갯마루 등에 만들어졌다.

 

   다구는 단차를 쪼개거나 부수어 가를 낼 때 쓰는 맷돌인 다마(茶磨), 찻물을 끓이는 다관(茶罐)을 비롯하여 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여러 종류의 다기(茶器)가 있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청자 차사발이 유명한데, 이 청자완은 중국 월주요(越州窯)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고려인 특유의 기질과 미가 담긴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하였다. 또한 다인들은 맷돌을 사용해 가루차를 직접 만들어 먹는 운치도 즐겼는데, 이인로(李仁老)는 「승원다마(僧院茶磨)」라는 시를 통해 이러한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승원다마」 

 

풍경도 울리지 않고 개미행렬도 느린 날

월부 휘두르니 옥색가루 휘날리네

법희는 참다운 자재(自在) 함으로부터 오고

맑은 하늘에 우렛소리 눈발마저 휘날리네

 

 

「僧院茶磨 승원다마」

不鳴風磬蟻遲日  불명풍경의지일

振揮月玉紛飛  진휘월부옥분비

法喜從來眞自在  법희종래진자재

淸天雷聲霜雪飛  청천뇌성상설비

 

 

   고려시대에는 단차(團茶). 말차(抹茶). 잎차가 두루 이용되었는데, 특히 말차와 단차를 즐겨마셨다. 고려인들은 손님에게 차를 대접할 때 대면한 자리에서 달이지 않고 뜰이나 다른 장소에서 달인 후 찻잔에 담아 내왔고, 손님은 주인이 권해야 비로소 차를 마시는 것이 예절이었다고 한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시대였으므로 왕실에서는 광종 때부터 공덕재(功德齋)에 공양할 차를 왕이 손수 올리는 풍속이 생겨났으며, 대신(大臣)이 죽었을 때 왕이 납원차(臘原茶 :腦原茶) 또는 대차(大茶)를 내렸다. 이에 고려 초기의 문장가로 유명한 최승로(崔承老:927~989)는, 성종에게 차와 관련한 지나친 폐단을 중지할 것을 상소한 바 있다.


     폐하께서 공덕을 쌓기 위해 친히 차와 보리를 갈아 불공에 정성을 다한다고 들었

     사온데, 이는 지나치신 일로서 성체(聖體)를 해칠까 두려울 뿐입니다. 이처럼 공덕

     를 쌓기 위해 재(齋)를 올리는 일은 광종 때부터 비롯된 일로, 불교의 가르침인

     인과응보(因果應報)를 그대로 믿는데서 오는 부질없는 일인 줄 아뢰옵니다.


    곧 왕이 부처님에게 올리기 위한 말차를 몸소 만들어 공양하는 행위가 지나친 것임을 상소하는 이러한 기록은, 당시 조야(朝野)에 차가 얼마나 성행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고려사』 권 64에 따르면, 성종은 차와 관련된 상소를 올린 최승로를 비롯하여 나라에 공이 컸던 최자몽,최향이 사망하다 부의품으로 뇌원차(腦原茶) 200각과 대차(大茶)10근을 보냈다고 한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차는 사찰과 왕실, 귀족등의 지배층에 널리 유행하여, 수행. 제의(祭儀). 의례는 물론 일반적 접대의 하나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 다음 카페 <선다향> 인연법(泥蓮華) 님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