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다도의 문화사] 2. 신라의 茶道 - 2) 다도사상의 기반을 이룬 원효

2014. 3. 1. 02:43차 이야기

 

 

 

 

 

      

2) 다도사상의 기반을 이룬 원효(元曉)

 

    원효(元曉:618~686)스님은 한국불교를 통틀어 가장 빛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 ‘일정한 스승 없이 스스로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평했듯이, 원효스님은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중생 교화를 위해 무애자재(無碍自在)한 삶을 살다간 사상가이자 구도자이다.

  마음을 깊이 통찰하여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깨달음(本覺) 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향하는 일심사상(一心思想),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전체 불교를 하나의 진리에 귀납시켜 자기분별이 없는 보다 높은 입장에서 불교의 사상체계를 세운 화쟁사상(和諍思想), 그 어디에도 걸림없이 철저한 자유인으로 민중과 함께 생활하면서 중생 속의 부처를 깨우치고자 노력한 무애사상(無碍思想)등은 원효스님의 대표적인 사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백제(660년)와 고구려(668년)가 신라에게 정복당한 이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민심이 황폐해져 있었고, 유민들의 마음속에는 증오와 불신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불교는 민중 위에 군림하는 왕실 중심의 귀족불교로서 이러한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데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원효스님은 이때 민중들 속으로 들어가 광대, 거지들과 함께 어울리는 무애의 삶을 몸소 살아가면서, 한편으로는 당대의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탁월한 사상을 정립시켜나갔다.

 

  원효스님과 차에 관련된 기록으로는 『삼국유사』와 이규보의 「남행월일록(南行月日錄)」등에 다화(茶話)로 소개된 감천전설(甘泉傳說)이 유명하다. 곧 차 끓일 물이 나오지 않던 샘에 원효스님이 온 이후부터 감로수와 같은 옥천물이 나왔다고 하며, 또한 「남행월일록」에는 사복(蛇福)이 한평생 원효스님의 차 시중을 들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규보는 전북 변산에 있는 유서 깊은 원효방(元曉房)을 직접 찾아가서 자신이 느낀 깊은 감회를 시로 읊은 바 있다.

 

 

 


「원효방」


산 따라 높은 사다리 지나

발 포개어 좁은 길 지나니

위로 백 길의 아득한 산정(山頂)에

원효(元曉)가 지은 암자 보았네


신령스런 발자취는 아득하고

진영(眞影)만 한 폭의 그림으로 남았는데

다천(茶泉)은 찬 구슬이 가득 괴여

한 사발 마셔보니 젖과 같이 달구나


여기 그 옛날엔 물이 없어

불자가 머물러 살기 어렵더니

원효스님 한번 머문 뒤로는

맑은 물이 바위틈에 솟아올랐다네


우리스님 높은 자취 이어받고자

누더기 걸치고 이곳에 머물며

여덟자 방 둘러보니

한 켤레 신발만이 놓여 있구나


시중들 사람 아무도 없이

홀로 조석으로 앉아 있으니

소성거사(小星居士)가 다시 나타남인가

감히 허리 굽혀 절하지 못 하겠네.

 

 

「元曉房   원효방」

 

 

循山度危梯 疊足行線路

순산도위제 첩족행선로

上有百仞顚 曉聖會結宇

상유백인전 효성회결우

靈조渺何處 遺影留鵞素

영조묘하처 유영유아소

茶泉貯寒玉 酌飮味如乳

다천저한옥 자음미여유

此地舊無水 釋子難樓柱

차지구무수 석자난루주

曉公一來寄 甘液涌岩隔

효공일래기 감액용암격

吾師繼高蠋 短褐來此寓

오사계고촉 단갈래차우

環顧八尺房 惟有一雙屨

환고팔척방 유유일쌍구

亦無侍居者 獨坐度朝暮

역무시거자 독좌도조모

小性復生世 敢不拜구僂

소성부생세 감불배구루

 

   원효스님의 이러한 일심, 화쟁, 무애 사상은 신라인의 다도정신을 승화시키고 정립시키는 데 커다란 바탕이 되었다. 특히 자연 속에서 선도를 닦으며 우주와 인간의 삶을 일치시키는데 주력해온 화랑도(花郞道)는 원효스님의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으며 발전되었다.

 

 


   한편, 원효스님의 사상은 후일 일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 화엄종의 창시자이자 고산사(高山寺)를 창건한 승려 명혜(明惠: 1173~1232)는 원효스님의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읽은 뒤부터 스님을 깊이 흠모하게 되었고, 후일 원효의 생애를 그림으로 담기에 이르렀다. ‘화엄연기회권(華嚴緣起會圈)’ 이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교토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명혜의 이러한 사상은 제자 에이손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12세기 말 내란으로 인해 나라지방의 모든 사찰이 파괴되고 백성들이 극심한 궁핍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이때 에이손은 서대사(西大寺)를 중건하고 백성의 구휼작업에 앞장섰다. 에이손은 어려운 때일수록 남을 함께 생각하는 마음을 길러주기 위해 큰 그릇에 죽을 담아 여러 사람이 나눠먹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앞선 이들이 배를 충분히 채우는 바람에 뒷사람들에게는 죽이 돌아가지 않았으나, 마지막 사람까지 먹을 수 있도록 먼저 먹는 이들이 조금씩 양보하게 하는 가르침으로써 구휼과 함께 공동체정신을 실현시켰다. 이처럼 하나의 그릇에 음식을 담아 함께 나눠먹는 방법은 일찍이 원효가 경주의 걸인들과 살면서 실천했던 것으로, 이를 명혜가 이어받아 제자 에이손에게 물려준 것이었다.

 

   그 뒤 이 지방에서는 한 그릇에 죽을 담아 나눠먹는 풍습이 생겼고, 서대사에서는 큰 그릇에 담긴 차를 여럿이 한 모금씩 돌려가며 마시는 의식이 생기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원효의 무애사상(無碍思想)에 뿌리를 둔 의식은 이 지방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고, 오늘날에도 매년 3월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치르는 일본 특유의 차 행사로 계승되고 있다. 염불과 함께 한 그릇의 물, 죽, 차 등을 여러 사람들이 돌려 마시는 이 새로운 문화는 일본인들에게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의 방식을 일깨워 주었다.

 

 

 

 

                                         - 다음 카페 <선다향> 인연법(泥蓮華) 님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