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차의 종류

2014. 3. 11. 14:05차 이야기

 

 

 

 

 

      

 

고려차의 종류

 

(1) 고려의 토산차

 

① 뇌원차(腦原茶)

② 대  차(大  茶)

③ 유  차

④ 작설차

⑤ 영아차

⑥ 노아차

⑦ 증갱차

⑧ 선  차

⑨ 향  차

⑩ 엄  차

 

(2) 송나라의 수입차

① 용봉차

② 쌍각용차

③ 자순차

④ 건  차

 

 

(3) 高麗茶의 種類

 

고려에서 사용한 차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가 있는 데 하나는 국내(고려)에서 생산해서 마신 토산차가 있고, 둘째는 외국(宋)에서 수입해서 마신 수입차가 있다.  국내에서 생산한 토산차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꼽는다면 고려왕실의 애용품인 뇌원차(腦原茶)와 대차(大茶) 그리고 유차(孺茶)와 녹태전(綠苔錢), 화전차(火前茶), 작설차 등이 있고 이름은 중국에서 빌려 왔지만 고려에서 생산한 자순차(紫筍茶), 영아차(靈芽茶), 노아차(露芽茶), 선차(仙茶) 등이 있다.  그리고 외국에서 들어온 수입차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용봉단차(龍鳳團茶)와 납차(臘茶), 향차(香茶), 건차(建茶), 엄차(俺茶)등이 있다.  그러면 국내에서 생산되고 토산차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 뇌원차(腦原茶)

① 차명(茶名)과 산지(産地)

② 뇌원차를 만든 시기

③ 진다의식에 사용한 뇌원차

④ 외국에 공물로 보낸 뇌원차

⑤ 부의품으로 사용한 뇌원차

⑥ 하사품으로 사용한 뇌원차

⑦ 공덕제에 사용한 뇌원차


뇌원차는 고려 왕실의 애용품으로 모든 진다의식에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공을 세운 신하에게 하사하는 하사품이나, 외국에 공물로 보내는 예물로서도 사용했고 또는 부의품(賻儀品)으로도 사용하였다.  이 차는 산지에 다소(茶所)를 설치하여 두고 그 산지에서 생산해서 공납하도록 하였으며 이처럼 거둬들인 차를 궁중에 보관하였다가 국가의 대소행사와 예물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이 뇌원차는 병차(餠茶:떡차)로서 멧돌에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사용하는 차였다.

 

① 차명(茶名)과 산지(産地)

뇌원차라는 차 이름이 붙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견이 있다.  먼저 일본인 점패방지진(點貝房之進)씨의 다의화(茶の話)를 보면 " 뇌원차의 제법과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일체 문헌으로 증거할 길이 없고 다만 고려의 토산차 이름이었다는 것만 추측이 된다."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뇌원차가 고려의 토산차 임에는 확실하나 그 제조방법과 이름에 대해서는 알길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일본인 도엽군산(稻葉君山)씨의 <조선의 사원차(朝鮮의 寺院茶)>에 보면 "거란국지(契丹國志)에는 이차를 뇌환차(腦丸茶)라고 하여 고려사(高麗史)에서는 뇌원차(腦原茶)라고 하는데 아마도 용뇌(龍腦)를 섞은 전다(塼茶:벽돌차)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뇌(腦)는 용뇌 즉 장뇌(樟腦)인데, 지금의 여러 차와는 달리 상당한 자극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이것은 당송인(唐宋人)의 제법과 일치될 것이다.  차약(茶藥)이라는 말도 이 시대의 유물이다."라고 하였다.

위의 기록을 보면 뇌원다는 용뇌를 섞은 벽돌차가 아닌가하고 추측을 하였는데, 이 뇌원차란 이름도 용뇌를 섞었기 때문에 뇌(腦)자를 따서 뇌원차라고 하지 않았겠는가라고 추리한 것이다.  이처럼 용뇌를 섞었기 때문에 뇌원다라고 한다는 견해가 나온 것이다.

 

그리고 같은 시대의 한국인 문일평(文一平)씨는 그의 다고사(茶故事)에서 " 뇌원차가 잎차가 아니고 떡 모양(餠樣)으로 빚어 만든 차 이므로 떡 모양 일편(一片)이 1각(角)이 될지나 다만 몇각이 1근이 되는지 그는 알 수 없다고 하였음은 탁견(卓見)이라 하겠다.  이렇게 토산차 중에 뇌원차 같은 특수 명칭을 가진 우물(尤物)도 있어 국내에서와 함께 국제에서의 증품(贈品)으로 충용(充用)하기도 하였다." 라고 했다.

이와 같이 뇌원차는 떡모양의 덩어리 차로써 특수한 이름을 가진 우수한 차인데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예물로 활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뇌원차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일본인 도엽군산씨의 말처럼 용뇌를 섞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뇌원차라고 하였을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 뇌원차라고 하였을까.  이쯤해서 이성우(李盛雨)의 말을 들어보자 이성우박사는 < 고려 이전 한국식생활사 연구(高麗以前 韓國食生活史 硏究)>에서 " 실제로 전남에 뇌원이란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산지일런지도 모른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이성우박사는 뇌원차가 전남지방에 있는 뇌원이라는 지방에서 생산된 차 일지도 모른다라고 하였다는 데 그러면 이 뇌원 지방은 지금의 어느 곳을 말하는지는 알수가 없다.

 

    다음은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풍속관계자료찰요(風俗關係資料撮要)를 보면

<茶ノ一種. 腦原八高麗時代, 全南一地方, 地名 ニ行 其地ニ産七八茶ク如シ. 後ニ名 ヲ腦 先茶 ナ代コ. 盖シ忠宣王, 諱ヲシ變更シタクワ王ノナラカ>

<차의 일종. 뇌원이란 고려시대 전남 지방의 지명으로서 그곳에서 생산되는 차인 것 같다.  후에 그 이름을 뇌선차라 바꾸었다.  그것은 충선왕의 이름을 띠고 있으므로 변경한 것이리라.>

위의 기록을 보면 뇌원이란 고려시대 지명으로 전라남도에 소속된 지방을 가리킨다.  이 뇌원지방이 지금의 어느 곳을 말 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 뇌원지방에서 생산된 차를 뇌원차라고 하였으며 훗날 충선왕(忠宣王)의 어릴 때 휘(諱)인 원(原)자와 같은 음이라고 해서 원(原)자를 선(先)자로 바꿔서 뇌선차(腦先茶)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뇌원차는 일본인 도엽군산씨의 말처럼 용뇌를 섞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뇌원차라고 한 것이 아니라 전라남도 뇌원지방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에 그 지방의 지명을 따서 뇌원차라고 하였는데 공교록게도 뇌원의 원(原)자가 충선왕의 휘와 같은 음인 (原)자라서 충선왕때 이를 뇌선차(腦先茶)라고 이름을 바꿨다는 것이다.  이처럼 뇌원차는 전라남도의 뇌원지방에서 생산된 차를 말하지만 고려 왕실에서는 많은 량의 뇌원차가 필요했을 것이고 그 많은 량을 뇌원지방에서만 생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외에 다른 지방에서도 뇌원차를 생산했을 것이며 고려때 다소(茶所)가 설치되어 차 세금을 거둘수 있는 지역이면 모두 뇌원차를 생산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생산량도 많았을 터이나 그 량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고려왕실의 대표적인 차이기 때문에 역대로 많은 량을 거둬 들였을 것임은 확실하다.

 

② 뇌원차를 만든 시기

뇌원차를 처음 만들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부터이며 또 언제까지 뇌원차를 생산하였을까?  이 시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고려사에 보면 고려 초기 때부터 다원차의 명칭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고려사, 권 93, 열전(列傳) 권 제6, 최승노(崔承老)조를 보면,

" 성종(成宗) 8년(989)에 죽으니 시호는 문정(文貞)이요 나이는 63세이다.  왕은 몹시 슬퍼하고 하교하여 그의 공과 덕을 표창하고 태사(太師)를 추증(追贈)했으며 베 1천필, 밀가루 3백석(碩),  멥쌀 5백석, 유향(乳香) 1백량, 뇌원차  2백각(角) 대차(大茶) 10근(斤)을 부조했다." 고 하였다.

위의 기록을 보면 고려초 성종 8년(989)에 이미 역사에 등장하게 되는데 이 기록이 최초이다.  이를 보면 뇌원차는 이미 성종 8년 5월에 부의품으로 하사되었음을 볼 수가 있다.

이 차는 그해 봄에 만들어진 차일 것으로 추측이 되는 데 이와 같이 뇌원차를 부의품으로 사용할 정도이면 차가 만들어 시기는 실질적으로 더 소급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뇌원차를 부의품으로 사용한 임금은 기록상 성종이 처음이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2년 전인 성종 6년(987) 3월에 최지몽(崔知夢)이 나이 81세로 죽자 왕이 슬퍼하며 부의로 베 1천필, 쌀 3백석, 보리 2백석, 차(茶) 2백각(角),  향 20근을 내려주었다고 하였다.  이때 하사한 차가 2백각이라고 하였는데 이 차는 최승노에게 준 2백각과 수량이 똑 같고 차를 세는 단위가 똑 같고, 또 시기적으로도 2년 밖에 안되면 부의품으로 용도가 같고 하사하신 임금도 성종으로 똑 같다.  이로보면 최지몽에게 하사한 차 2백각도 뇌원차가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뇌원차의 생산시기는 2년 이상 더 소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차를 하사하신 시기가 3월달이니 이 때는 그해 차가 생산되기 전이다.  이 차는 전해(986년)의 생산품일 것이다.  또 이보다 생산 시기를 앞당길 수 있는 최승노가 성종께 올린 시무 28조(時務 28條)가 있다.

" 듣건데 성상(聖上)께서 공덕제(功德劑)를 설치하여 혹은 친히 차(茶)를 멧돌에 갈기도 하고 혹은 친히 보리도 간다하오니 신은 성체(聖體)의 근로(勤勞)하심이 깊이 애석하게 여깁니다.  이 폐단이 광종때 부터 시작 되었으니.... " 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왕이 친히 떡차를 멧돌에 갈기도 한다고 하였는데 이때 왕이 가는 차는 덩어리차로서 뇌원차를 말하는 것이다.  왕실에서 공덕제에 쓰는 차는 고려의 토산차 왕실의 전용차이며 고려왕실의 애용품인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왕이 손수 차를 가는 의식은 4대 광종(光宗)때 부터 시작 되었다고 하니, 뇌원차를 멧돌에 가는 의식은 광종(949~975)으로 부터 시작해서 성종 때(981~997)끝이 났으나 이때에 이미 뇌원차는 왕실의 의식용차로 사용 되었던 것이다.  이로보면 뇌원차가 만들어진 시기는 광종(적어도)때 부터 시작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뇌원다 생산을 중지한 시기는 언제쯤일까.  이에 대해서는 문헌에 확실하게 전하는 바가 없다.  하지만 충선왕이 뇌원차의 차이름을 뇌선차로 바꾸었다고 하니 적어도 충선왕(1308~1313)때 까지는 뇌원차가 만들어 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뇌원차는 고려 왕실의 전용차로서 고려초부터 고려말(충선왕)까지 계속 생산해서 진다의식에 충당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왕실에서 사용하였을 것으로)

 

③ 외국에 예물로 보낸 뇌원차

뇌원차를 외국에 공물로 보낸 예가 있었다. 

고려사 권6, 세가제6, 정종(靖宗) 4년 조에 보면,

" 4년 가을 7월 갑인(甲寅)일에 김원충(金元沖)이 거란(契丹)에서 돌아왔다.(중간생략) 거란의 조서에 표(表)를 올려 사은(謝恩)한 바를 살펴보니 조공(朝貢)과 아울러 금흡병(金吸甁), 은약병(銀藥甁), 복두사저포(?頭紗紵布), 공평포(貢平布), 뇌원차(腦原茶), 대지(大紙), 세묵(細墨), 용수등석(龍鬚登席) 등을 진공(進供)한 일을 잘 알겠노라." 고 했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고려에서 공물로 뇌원차를 거란에 보낸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조공이란 본시 그 나라의 특산물을 바치는 것으로 거란에 보낸 공물의 품목을 보면 모두가 고려에서 생산한 것들이다.  금흡병이나 은약병은 물론이요.  대지, 세묵등 모두가 고려의 특산품인 것이다.  이 가운데 들어있는 뇌원차는 물론 고려의 어용차이다.  궁중에서 어용으로 사용하는데 국가와 국가를 상대로 하는 공물에 까지 뇌원차를 사용한 것을 보면, 뇌원차가 고려 왕실에서 점유하는 위치가 자못 컷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외국에 예물로 보내는 물건은 그 품질이 뛰어나고 좋아야 하며 그 나라의 자랑거리가 될만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고려의 뇌원차는 고려의 대표적인 차라고 할 수가 있으며, 고려왕실의 전용차임을 알 수가 있다.  이 전용차가 거란에만 보냈을 이가 없다.

 

다음은 금(金)나라에 차를 공물로 보낸 기록이다.

고려사 16 세가권16, 인종(仁宗)조에 보면,

" 인종 8년(1130) 2월 기미일에 노영거 등 금나라에서 돌아왔는데 조서에 이르기를 사은을 칭하여 올린 것을 살펴보러, 진상한 은그릇, 차, 베 등 물건과 올린 표는 이미 보았노라." 고 하였다.

인종때 노영거 등을 금나라에 보내서 은그릇, 차, 베 등을 진상했다고 하는데, 이때 보낸 차가 뇌원차인지 아니면 다른 차인지 확실히 알수는 없지만 이 차도 고려왕실의 전요차인 뇌원차일 것이라고 믿는다.

 

다음은 원(元)나라에 차를 공물로 보낸 기록이다.

고려사절요 권 21 충렬왕(忠烈王)조에 보면,

" 충렬왕 18년(1292) 10월 을사일에 장군 홍선(洪詵)을 원나라에 보내서 향(香) 차(茶) 과일(果) 등의 물품을 바쳤다." 고 하였다.

(遣將軍洪詵如元, 獻香茶果等物)

충렬왕 때 장군 홍선을 원나라에 보내서 차와 향, 과일 등을 바쳤다고 했는데, 이때 원나라에 보낸 차도 뇌원차일 것이다.  비록 차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고려왕실의 대표적인 차가 뇌원차이고 뇌원차로 모든 예물을 삼았고 또 모든 차의 대명사 처럼 쓰여졌기 때문이다.

(고려사 30, 세가 30, 충렬왕 18년 10월)

" 乙巳 洪君還 遣將軍洪詵偕君如元獻香茶果等物?"

 

④ 부의품(賦儀品)으로 사용한 뇌원차

뇌원차는 고려왕실에서 역대 임금이 부의품으로 사용하였는데, 성종 임금이 내사령(內史令), 최지몽(崔知夢)에게 차 2백각(角)을 수시중(守侍中), 최승로(崔承老)에게 뇌원차 2백각과 대차 10근(斤)을 평장사(平章事), 최양(崔亮)에게 뇌원다 1천각을 부의하였고 목종(穆宗)이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에게 뇌원차 2백각과 대차 10근을 시중(侍中), 한언공(韓彦恭)에게 차 2백각을 부의품으로 내린 일이 있었다.

 

고려사 권 93, 열전 권6, 최승로(최승로)조를 보면,

" 성종 8년(989)에 죽으니 시호는 문정(文貞)이요.  나이는 63세 이다.  왕이 몹시 슬퍼하고 하교하여 그의 공덕을 표창하고 태사(太師)를 추증했으며 베 1천필, 밀가후 3백석, 멥쌀 5백석, 유향 1백량, 뇌원차 2백각, 대차 10근을 부조했다." 고 하였다.

성종 8년(989) 5월에 수시중(守侍中)을 지낸 최승로가 죽자 부의품으로 많은 물품을 부조하였는데 이때 뇌원차 2백각을 함께 내려 주었다.  최승로는 경주(慶州)사람으로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다.  그래서 훗날 시무 28조(時務 28條)를 지어서 올렸는데, 이때 임금이 손수차를 갈아 공덕제를 설하는 것을 보고 이를 폐지하자고 상소하여 이 제도를 폐지시킨 사람이다.

 

다음은 평장사를 지낸 최양(崔亮)에게 뇌원다를 부조한 기록인데, 고려사 열전 6 최양(崔亮)조를 보면,

" 성종 14년(995)에 죽으니 왕이 매우 슬퍼하며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증직하고 부의로 쌀 3백석, 보리 2백석, 뇌원차 1천각을 주고, 예를 갖추어 장사 지내고 광빈(匡彬)이란 시호를 내렸다." 고 하였다.

성종 14년(995) 여름 4월에 평장사를 지낸 최양이 죽자 성종 임금은 뇌원차를 1천쪽이나 주었다.  최승로와는 달리 대차(大茶)는 주지 않고 뇌원차만 준 까닭은 무엇일까.  6년 전에는 대차 10근을 최승로에게 주었는데 6년 후에는 대차는 주지않고 뇌원차만 무려 1천각이나 주었다.  그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당시에 대차는 보관한 차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음은 목종(穆宗) 임금이 내사령을 지낸 서희(徐熙)에게 뇌원차와 대차를 부조한 일이있다.

고려사 열전 7 서희(徐熙)조에 보면,

" 목종 원년(997)에 죽으니 나이는 57세이다.  왕이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부의로 베 1천필, 보리 3백석, 쌀 5백석, 뇌원차 2백각, 대차 10근, 전단향 3백량을 주고 예를 갖추어 장사 지내고 장위(章威)란 시호를 내렸다."고 하였다.

목종 원년(997)에 내사령을 지낸 서희가 죽자 목종은 뇌원차 2백각과 대차10근을 부조 했는데 이는 전왕(성종)의 예를 따른 것이다.  이때 목종이 서희에게 부조한 것이나 성종이 최승노에게 보조한 것이 똑같은 분량이다.  8년전에 성종이 최승노에게 부조한 예를 따르고 2년전에 성종이 최양에게 부조한 사례를 따르지 않은 까닭은 정상적인 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외로 성종 6년(987) 3월에 최지몽에게 차 2백각을 부조한 예나, 목종 7년(1004) 6월에 한언공에게 차 2백각을 부조한 사례는 모든 부의품 가운데 들어가는 뇌원차의 양을(2백각) 말하며 대차는 10근을 부조하였다.  이처럼 대신들이 죽으면 왕은 뇌원차 2백각과 대차 10근을 부조하였다

 

⑤ 하사품으로 사용한 뇌원다

뇌원차를 고려왕실에서 하사품으로 많이 사용하였는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보면 여러곳에 이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먼저 고려사 7 세가 권 7 문종(문종)조를 보자

" 문종 3년(1049) 3월 경자(庚子)일에 80살 이상된 국로(國老)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최보성(崔輔成), 사재경(司宰卿) 조옹(趙?), 태자첨사(太子詹事) 이택성(李澤成) 등을 합문(閤門)에서 잔치 했는데 왕이 친히 임석하여 술을 하사하고 이에 최보성과 조옹 등에게는 공복 각각 한벌과 복두(?頭) 두장과 뇌원차(腦原茶) 30각(角)을, 이택성에게는 공복 한벌을 하사하고 또 합문에서 말을 타고 정아문(正衙門)을 나가는 것을 허락했는데 세 늙은이는 이를 굳이 사양했다."

이 기록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다 나오는 기록인데, 문종이 은퇴한 고령의 노인들을 모셔다가 잔치를 베풀고 예물을 주어 대접 했는데 이때 뇌원차 30각을 하사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신하들이 죽었을 때 부의품으로만 뇌원차를 부조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하들에게도 뇌원차를 하사하신 것이다.

 

    다음은 성종(成宗) 임금이 국로들과 그의 모처(母妻)에게 차를 하사한 사례를 보자 고려사 3, 세가권 3, 성종(成宗) 조에 보면,

" 성종 9년(990) 겨울 10월 갑자일에 서경(西京)에 흘러 들어온 사람 중에서 88살 이상자를 가려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3품이상은 공복(公服) 한벌, 5품이상은 채단 2필, 복두 2장, 차 10각, 9품 이상은 비단 한필, 복두 1장, 차 5각을 주고, 입류(入流)자의 모처(母妻)가 80살 이상된 자 중에서 3품 이상은 베(布) 14필, 차 2근(斤), 5품 이상은 베 10필, 차 1근, 9품 이상은 베 6필 차 2각(角), 서민 남녀 백살 이상된 자와 경관(京官) 4품에게 그 집과 겸해서 베 20필, 벼 10석, 90살 이상은 베 4필, 벼 2석, 80살 이상과 독질자(篤疾者:불구자)에게는 베 3필, 벼 2석을 하사했다." 고 하였다.

 

   성종이 서경에 가서 그곳에 거주하는 자 중에서 80살 이상의 고령자에게 공복과 차, 베, 복두, 등을 하사했는데 5품 이상은 차 10각(角)을 주고, 9품 이상은 차 5각을 주고 그들의 모처(母妻)에게는 3품 이상은 차 2근(斤)을 주고 5품 이상은 차 1근(斤)을 주고 9품 이상은 차 2각(角)을 주고 서민에게는 차를 주지 않았다.  이때 성종이 하사한 차는 두 종류인데 남자에게는 뇌원차를 주었고 여자에게는 대차(大茶)를 주었다.

 

    다음은 현종(顯宗) 임금이 나이 많은 백성과 불구자에게 차를 하사한 예인 데, 고려사 4, 세가 권 4 현종(顯宗) 조를 보면, "현종 즉위년(1009) 7월 신사일에 왕이 구정(毬庭)에 나아가 백성의 남녀 나이 80세 이상 된 자와 불구자(篤疾者) 6백 35명을 모아 술밥(酒食), 포백(布帛), 차(茶), 약(藥) 등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辛巳御毬庭集民男女年八十以上及篤疾者六百三十五人贈酒食布帛茶藥有差)." 고 하였다.

현종이 구정에 80세 이상된 늙은이와 불구자 635명을 모아 술, 밥, 차, 비단등 주고 위로하였는 데 이때 현종은 일반 서민에게도 차를 하사하신 것이다.

 

    또 현종은 일반 백성 90살 이상된 노인들에게 차와 약을 하사 였는데,

고려사 4, 세가 권 4, 현종조에 보면,

" 현종 12년(1021) 2월 갑술일에 서울(京城)의 남녀로서 나이 90살 이상 된 자에게 술, 밥, 차, 약, 베, 비단 등을 차등있게 나누어 주었다.(甲戌賜京城男女年九十以上者酒食茶藥布帛有差)고 하였다. "

    이번에도 현종은 90살 이상된 노인들에게 차를 하사 하셨다.  임금이 일반 백성들에게 차를 하사한 사례는 보기 드문 일이다.

 

    또 그 이듬해 가을에 현종 임금은 서울의 노인과 불구자들에게 차를 하사 했는데,

고려사 4, 세가 권 4, 현종조에 보면,

" 현종 13년(1022) 9월 기사일에 서울의 남녀 80세 이상된 자와 불구자(篤疾者)에게 술, 밥, 차, 베 등을 차등있게 주었다.(九月己巳賜京城男女年八十以上及篤廢疾者酒食茶布有差)." 고 하였다.

현종이 서울에 거주하는 80살 이상 노인과 불구자들에게 차와 밥을 나누어 주었는데 이때 백성들에게 나누어 준 차는 그 이름이 밝혀지지를 않아서 알 수가 없지만 뇌원다가 아닌가 생각된다.

 

③ 사원에 시주한 뇌원차

    다음은 사원과 승려에게 차를 하사한 사례를 살펴보자

고려사 8, 제가 권 8, 문종(文宗) 조를 보면,

" 문종 21년(1067) 9월 정유일에 국사(國사) 해린(海麟)이 늙어서 산중으로 돌아 가기를 청하므로 왕이 친히 현화사(玄化寺)에서 전송하고 차, 약, 금.은그릇, 비단, 보물을 하사 했다. (九月丁酉國사海麟請老還山王親餞于玄化寺賜茶藥金銀기四綠段寶物)."고 하였다.

문종이 해린국사께서 산으로 돌아가고자 청하니 음허하고 친히 현화사까지 나와 전송을 하면서 차와 약을 하사했다.  이때 문종은 해린국사에게 차를 주었지만 숙종 임금은 절에다 차와 향을 시주했다.

 

    고려사 11, 세가 권 11, 숙종 조에 보면,

" 숙종 4년(1099) 9월 정묘일에 왕은 왕비, 원자와 양부(兩府)의 군신들과 우세(祐世) 승통을 거느리고 삼각산(三角山)에 납시었다.  윤달 임신일에 상자사(常慈寺)에 행차하였고 갑술일에는 승가굴(僧伽窟)에 행차하여 제(齊)를 설하고 은향완수로(銀香椀手爐) 각 1벌과 금강자수정염주(金剛子水精念珠) 각 1벌, 금대(金帶) 한 개와 아울러 금화과수번(金花果繡幡) 차(茶) 향(香) 옷(衣)을 시주했다." 고 하였다.

(金剛子水精念珠各一寶金帶一腰幷金花果繡幡茶香衣)

이처럼 숙종은 삼각산 승가굴에 가서 제를 지내고 은향로와 수정염주 그리고 차와 향을 시주한 것이다.  그리고 어디를 순행하는 길이면 길 옆에 있는 절에는 으례히 차와 향을 시주했다.

 

    고려사 12, 세가 권 12, 숙종조에 보면,

" 숙종 9년(1104) 8월 을사일에 촌부(村婦)와 야로(野老)가 다투어 길맛에서 과일을 올렸다.  왕은 각자에게 베와 비단을 하사 하셨다.  또 내부(內府)에서 차, 향, 옷가지를 내어 길갓의 절에 시주했다.(八月乙巳村婦野老爭獻爪果于路各賜布帛文出內府茶香衣?施于路傍師舍)." 고 하였다.

이와 같이 숙종은 순행하는 길 갓에 있는 절에 내부에 명을 내려 차와 향 등을 시주한 것이다.

 

유공자에게 하사한 뇌원다

    다음은 임금이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포상을 할 때 차를 하사한 사례이다. 

고려사절요 제6권, 숙종조에 보면,

" 숙종 2년(1097) 가을 7월에 동여진의 적선(賊船) 10척이 진명현(鎭溟縣:한남 親德原의 남쪽 24리에 있음)에서 약탈을 하므로 동북면 병마사 김한충(金漢忠)이 판관(判官), 강증(康拯)을 보내니, 적과 싸워 이기고 배 3척을 노획(鹵獲)하였으며 머리 48급을 베었으므로 김한충과 강증에게 은, 비단, 차, 약을 하사 하였다." 고 했다.

(秋七月, 東女眞, 賊船十?, 寇鎭溟縣, 東北面兵馬使金漢忠, 遣判官康拯, 輿戰克之, 獲船三?, 斬首四十八級, 賜漢忠拯, 銀絹, 茶藥)

숙종은 여진족들이 칩입해서 약탈하자 이를 물리치고 돌아온 김한충과 강증에게 포상으로 은과 비단 그리고 차와 약을 하사하신 것이다.

 

    또 현종(顯宗)은 바다에서 근무하는 말단 군인들에게 차와 베를 하사 했는데,

고려사절요 권 3, 현종조에 보면,

" 현종 9년(1018) 2월 무진일에 해(海) 노(弩) 2군(軍)의 교위(校尉)와 선군(船軍) 이하에게 차(茶)와 베(布)를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고 했었다.

(二月, 賜海弩二軍校尉, 船軍以下, 茶布有差)

 

    또 예종(睿宗)은 서북면병마사 박경인(朴景仁)이 임지로 떠나자 차와 약을 주고 위로 하였다.

고려사절요 제 8권, 예종조에 보면,

" 예종 10년(1115) 8월에 서북면 병마사 박경작(朴景綽)이 어전에 나아가서 사례하고 떠나니, 이름을 고쳐서 경인(景仁)으로 하사하고 차와 약을 주었다고 했다. "

(西北面兵馬使 朴景綽, 階辭, 故賜名景仁, 賜茶藥)

 

    다음은 문하시중 이정공(李靖恭)이 흥왕사의 비문을 지어서 올리자 치하하고 차를 하사했다.

고려사 절요 제 6권, 숙종조에 보면,

" 숙종 2년(1097) 6월 무자일에 문하시랑(門下侍中) 이정공(李靖恭)이 흥왕사(興王寺)의 비문을 지어 바치자 조(詔)를 내려 칭찬하고 겸하여 비단, 은그릇, 차, 포목(布) 안마(鞍馬) 안장 차린 말 등을 하사 하여다."고 했다.

(戊子, 門下侍中 李靖恭, 편進, 興王寺碑文, 賜詔?諭, 兼賜匹段, 銀, 茶布, 鞍馬等物)

 

 

    그러면 이와 같이 공을 세운 신하들이나 나이 많은 국로(國老)들에게 차를 하사하는 관습은 언제부터 행하여 졌을까.  이는 고려사 태조(太祖)편을 보면 알 수가 있다.

"" 태조 14년(931) 가을 8월 계축일에 보윤(甫尹) 선규(善規)를 보내어 신라왕에게 안장을 얹은 말과, 능라(綾羅), 채금(綵錦)을 선사하고, 아울러 백관에게는 채백(綵帛)을 내려주어 군인과 민간인에게는 차(茶)와 복두(?頭) 승니에게는 차와 향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고 했다.

(秋人月, 遣甫尹善規, 遺新羅王, 鞍馬, 綾羅, 綵金帛, 幷賜百官, 綵帛, 軍民, 茶?頭, 僧尼茶香有差)

이상과 같이 태조때 부터 차를 선물로 사용하였던 점을 보면 이 관습은 아마도 삼국시대 부터 내려온 관습을 그대로 계승한 것 같다.

 

 

 


- 대차(大茶)

① 차명과 産地

② 大茶를 만든 시기

③ 부의품으로 사용한 大茶

④ 하사품으로 사용한 大茶

 

- 대차(大茶)

대차는 고려왕실의 애용품으로 진다의식에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공이 많은 신하의 죽음에 보내는 부의품으로 또는 하사품으로 사용하였다.  이 대차는 나라에 차를 만들어 바치는 다소(茶所)에서 뇌원차를 만든 이후에 만들은 차로서 고려왕실의 유일한 잎차였다.

 

① 차명(茶名)과 산지(産地)

대차라는 차 이름에 대해서는 두 사람이 각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먼저 일본인 점패방지진(鮎貝房之進)씨의 다의 화(茶の話)를 보면, " 차의 품수를 大.小로서 구별할리도 없고 매우 이상한 명칭인데 나는 중국차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옛날 大는 옛날 방언으로써 지나(支那) 즉, 大國의 大의 뜻으로 중국 물품의 형용사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위의 기록을 보면 일본인 점패방지진씨는 대다가 대국차 즉 중국차를 가리키는 말이다 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씨는 이와 반대되는 의견을 말하고 있다.  그의 다고사(茶故事), (17. 茶故事禮遺)에 보면 " 그리고 차의 명칭에 大小가 있으니 문종때의 고려사(高麗史)에 나타난 차 중에는 대차(大茶)란 것이 보인다.  이 대차에 대하여 어떤 학자(鮎貝房土進)는 대국차(大國茶), 곧 당차(唐茶)로 해석 하였다.  그러나 문종의 제4자인 대각국사(大覺國사)의 문집을 보면 송승(宋僧) 변진(辯眞)이 동국사에게 보낸 예물중에 소차일백편(小茶一百片)이 적혀있다.  이로 추찰한다면 전술한 대차가 반드시 대국차를 의미한 것이 아니고 당시 송(宋國)에 이미 대차, 소차의 명칭이 있었던 모양이다.  다만 이 대소차에 관한 연구는 이후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라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호암 문일평씨는 대차는 일본인이 이야기 하듯 대국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차와 소차라는 차의 명칭이 있다는 것이다.  대각 국사는 중국 항주에 고려사(高麗寺)를 세운 분인데 그 곳에서 많은 중국의 승려들과 교유를 했고 그중에 한사람이 변진(辯眞)이라는 사람이다.  이 변진이 대각국사에게 소차(小茶) 일백편(片)을 선물한 일이 있었다.  이 소다차小茶)라는 차의 명칭을 보면 대차(大茶)라는 명칭도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중국에는 대차(大茶)와 소차(小茶)가 있었을 것으로 사료되는 바, 이로보면 대차나 소차는 차의 명칭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차는 대국차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대차, 소차라는 차의 명칭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대단히 안목이 높은 견해라고 할 수가 있다.  차에다 대(大)자를 붙이는 데는 몇까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차의 크기를 분류할 때 대소의 구별이 따른다.  예를 들면 송나라때 명품이었던 용봉단차(龍鳳團茶)는 小龍과 大龍 그리고 小鳳과 大鳳으로 구분했는데 선화북원공다록(宣和北苑貢茶錄)에 보면 상세히 도면까지 나와 있는 데 모양새는 둥글고 표면에는 용과 봉의 무늬를 새겼다.

둘째는 차잎의 크고 작은 것을 가지고 분류할 때 대소의 구별이 따랐다.  우리나라는 세작(細雀) 중작(中雀) 대작(大雀)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일찍 딴 것은 차잎이 어려서 크기가 작기 때문에 세작이라고 하고 늦게 딴 것은 잎이 크기 때문에 대작이라고 한다.  그리고 중작은 그 중간 쯤 되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차의 품종에 따라 대소의 구별이 있었다.  지금까지 연구 발표된 차의 품종을 모두 4가지로 분류하는 데 중국 소엽종, 중국 대엽종, 인도아샘종, 버마산종이 그것이다.  이때 차잎이 작은 것은 소엽종, 차잎이 크고 나무도 큰 것은 대엽종이라고 그 중간쯤 되는 것이 아샘종과 산종이다.

 

이상과 같이 차에 따르는 대소의 구별은, 차의 크고 작은 것과 차잎의 크고 작은 것과, 차품종의 크고 작은 것으로 구분이 되었다.

첫째 차의 크고 작은 구별은 떡차의 크고 작은 것을 말하며, 잎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려의 대차는 잎차이지 떡차가 아니다.  뇌원차는 떡차로서 헤아리는 단위가 몇 각(角)이라고 하지만, 대차는 잎차로서 몇 근(斤)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차의 크기에 의한 구분은 아닌 것 같다. 

둘째로 차의 품종에 의한 구별 안에 우리나라에 있는 차나무는 모두 중국 소엽종 계통이다.  대엽종은 중국의 운남성, 사천성 일대에 주로 자생한다.

그리고 중간종에 속하는 아샘종이나 산종은 인도나 미얀마 등지에 있다.  그러므로 품종에 의한 구분도 아니다. 

셋째로 차잎의 크기에 의한 구분으로 작은 것은 세엽(細葉) 중간 것은 중엽(中葉) 큰 것은 대엽(大葉)으로 구분이 된다.

이런 차잎을 가지고 차를 만들었을 때 선별하면 세작, 중작, 대작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선별과정에서 구분이 되는 것이며 차잎에서 구별하기는 매우 어렵다.  차잎을 어릴 때 일찍 따면 차잎이 작으므로 세엽이랄 수 있고 늦게 따면 차 잎이 커져서 대엽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고려때 대차는 차잎이 쇤 것, 즉 늙은 차잎, 커진 차잎을 말하는 것 같다.  차잎이 어릴 때 딴 소엽은 뇌원차를 만들고 그 이후에 쇤 차잎을 따서 대차를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뜻에서 대차(大茶)라는 차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여기에서 더붙여 둘 말은 일본인이 주장한 대국차 즉 중국차설은 우리가 중국을 가리켜 대국이라고 지칭은 하지만 중국차를 가리켜 대국차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문일평씨가 말한 소차(小茶) 일백편(一百片)은 용봉차의 작은 소용(小龍)이나 소봉(小鳳)을 말하는 것 같다.  고려의 대차와는 무관한 것이다.

 

 

다음은 대차의 산지에 대해서 살펴 보기로 하겠다.

고려 때 대차를 생산했다고 하는 기록은 찾아 볼 수가 없다.  다만 대차가 뇌원차와 함께 기록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서 대차도 뇌원차가 생산되는 지역에서 같이 생산이 되지 않아나 하고 추측해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차는 차잎이 쇤 거스로 만든 차로써 잎차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어린 차잎으로 떡차를 만들고 난 이후에 쇤차잎을 이용해서 만든 것이 대차이다.

 

중국의 당송시대나 우리나라의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는 떡차시대로서 떡차 중심의 제다법이나 음다법이 유행하던 시대이다.  그러므로 당시 어린 차잎은 떡차를 만들고 쇤 차잎은 잎차를 만들었다.  이러한 방법이 조선시대에 와서는 떡차의 쇠퇴와 잎차의 발달이 이루어지면서 바뀌게 된다.  어린 차잎으로 잎차를 만들고 쇤 차잎으로 떡차를 만드는 것이다.  그나마 요즘은 잎차만 만들고 떡차는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왕실에서 사용할 차가 떡차도 있어야 되고 잎차도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떡차로는 뇌원차를 잎차로는 대차를 생산해서 사용한 것이다.  외국에서 들어온 차를 궁중의 전용으로 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왕실에서는 뇌원차를 생산하는 다소(茶所)에서 대다도 함께 생산하도록 해서 공납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때 차가 생산되는 모든 지역에서 다 대차가 만들어졌을 것이며 뇌원차를 만들고 나면 다음 차잎으로 대차를 만들어 공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생산량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량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고려왕실의 전용차이기 때문에 역대로 많은 량이 생산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  유차(孺 茶) 

 

유차는 노규선사와 이규보 선생이 함께 명명한 차 이름이다.  선생은 옴당 손득지외 네사람에게 화답해서 보낸 싯귀중에 

" 미치광이 손 한번 맛보고 유차라 이름 했으니, 늙은 나이에 어린애처럼 탐내는 데야 어이하리."  하였다. 

리고 노규선사께 올리는 시제에 이르기를 " 운봉에 사는 노규선사가 조아다를 얻어 나에게 보이고 ‘유차’라 이름하고 시를 청하기에 지어주었다." 하였으니 전자는 선생이 손수 차를 끓여 마셔보고 어린아이 젖냄새 비슷하다 하여 유차라고 이름했다.  " 입에 닿자 달콤하고 부드러워 어린아이의 젖냄새 비슷하구나" 그리고 후자는 노규선사가 선생의 말에 동감하여 유차라고 이름하고 시를 청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성생이 명제를 내고 선사가 뜻을 확정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품질

유차의 품질은 지극히 뛰어난 것으로 최고품의 차였다.  "" 선사는 어디에서 이런 귀중품을 얻었는가, 손에 닿자 향기가 코를 찌르는 구려." 하였고, 또 "  부귀의 가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데 우리 선사 이를 얻음이 괴상하구료."  한것을 보면 부귀한 집에서도 쉽게 얻기 어려운 귀중품의 차로서 남방 사람들이 만들어 임금님께 바친것을 임금이 선사께 하사하신 것이다.

 

 

채다

차 따는 시기에 대해서 " 시냇가 차 잎사귀 이른 봄에 싹트게 하여 황금같은 노란 움 눈속에 차라났네." 하였고, " 서북쪽은 혹한에 손가락 빠지는데, 남방에는 섣달 기후 봄과 같구나, 좀쌀 같은 누런싹 마디마다 ?의岵릿?, 같은 하늘아래 지방 절후 각기 다르네." 하였다.  그리고 " 한식전에 딴 향기로운 차는 많이 얻기 어려우니, 소반에 가득한 봄 죽순과는 판이하다." 하였고,  " 섣달 후에 움트는 싹 평생에 가장 사랑하여 맵고 강렬한 향기 코를 찌르는구나! " 하였다.  그리고 또 " 강남 눈속에서 따지 않았다면 어찌 이월 중에 서울에 당도하리."하였으니, 이상의 기록으로 보면 섣달후 이월 이전이니 정월달에 차를 따서 유차를 만든 것 같다.  한식전에 딴 차도 이월이전이니 유차는 일창의 움만을 취해서 만든 것이다.

 

 

조다

   유차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선생은 " 간신히 채취하여 불에 쬐어 단차를 만들어서, 남보다 앞서 임금님께 드리려 하네! " 하였고, " 수 많은 잎 따서 한개의 떡을 이루었으니, 떡 한개에 천금인들 어찌 쉽게 구할 손가?" 하였다.  그리고 " 일천가지 망가뜨려 한모금 차 마련하였으니, 이 이치 생각한다면 참으로 어이 없구려! "  하였으니, 일만 개의 움을 따서 떡 한 개만한 차 한덩어리를 만들었으니 천금으로도 구하기 어렸고 향기가 새어 나갈까 염려하여 상자 속에 넣고 겹겹히 감쌌다.

 

 

- 작설차

 

작설차는 차나무의 어린 잎이 마치 참새의 혀바닥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차는 잎차의 종류로서 대차와 함께 고려 초기 때부터 쓰여진 차 이름이다.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1178~1234)이 송광사의 보조국사의 영정을 모신 방장실에서 어린 시자를 시켜 눈을 퍼다가 소반 가득이 쌓아놓고 용천을 만들어 고인 설수를 끓여 작설차를 달여 마셨다.  이 시구에 나온 작설차 이름이 맨 처음이다.


엊저녁 간간히 내리던 눈

새벽엔 놀랍게도 한 자나 쌓였네

고루 뿌려 구덩이 메워졌고

무겁게 눌린 나무가지 꺽어졌네

숲의 새는 추위에 처마 밑으로 날아들고

바위 틈의 지친 사슴 굴 속을 찾아든다.

돈난간 요대로 변했고

흙계단은  옥계단을 이루었네

한파는 설신을 침범하고

눈 빛은 창문을 뚫고 들어오네

산 사람은 큰 추위에 맡겨두고

차 끓이며 좋은 시절 음미한다오

시동 불러 깨끗한 눈 가져다가

소반 가득 옥가루 쌓아 놓고

손으로 새기노라니

우뚝한 산의 형세 방불하구나

구멍뚫어 용천에 비기고

물을 떠서 작을을 끓인다

어찌 스스로 즐거움 도모해서랴

남이 깨끗이 마시도록 함이지

이것은 오직 방외의 맛이니

인간세상에 누설하지 말라

아 나는 본래 서생으로

세속을 벗어나 스님들 사이에 끼었다오

조그만 방에서 맒은 바람을 마시며

유가의 지독한 더위 식혀간다오

간절히 안심결을 묻는다네

내 불문을 묻고자 하여

스승에게 무설 설하기를 청하네

 

 

    다음은 고려말 두문동 72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1330~?)의 시구에 나오는 작설차 이름이다.


그리운 서울 소식 숲집에 이르니

가는 풀에 새로 봉한 착설차여라

식사 뒤의 한 사발은 두루 맛이 있고

취한 뒤의 세 사발은 가장 뛰어나고 자랑스럽네

마른 창자 적신 곳엔 앙금도 없고

앓는 눈 열릴 때 현기증 없어지네

이 물건의 영묘한 공덕 시험은 헤아리기 어렵고

시마가 다가오니 수마는 멀어진다네

 

 

 


    다음은 공민왕때 사람으로 한수(韓脩: 1333~1384)의 시구에도 작설차 이름이 나온다

 

지존의 나머지가 어찌 내게 나누어지기를 기대하였으랴

작설은 금년에 귀하고 없더라

봉래산에서 돌아오는 것은 소망이 아니고

다만 배 속의 글을 엷게 하기에 알맞네

 

    이상과 같이 작설차 이름은 고려 초기 진각국사에 의해서 거론되기 시작하여 궁중외에

일반에서는 잎차의 종류로는 작설차를 마시고 있었음을 알수가 있다.


 

 

                               - 네이버 블로그 < 炫爐의 블로그> 마운틴 님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