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茶事

2014. 3. 11. 18:28차 이야기

 

 

 

 

 

      

고려시대 다사

 

 

(3) 고려의 다촌(茶村)과 다소(茶所)

다촌이란 사원(寺院)에 차를 만들어 바치는 마을을 말하며, 다소란 조정에 차를 만들어 바치는 지방을 말한다.  고려 때에는 사원에 차를 바치는 다촌과 나라에 차를 바치는 다소가 있었는데, 다촌은 주로 절 주변에 있으며 사찰 소유의 땅에 차를 재배하고 관리하여 만들어서 절에 바치는 마을이요,  다소란 각 지방마다 차 재배가 잘 되는 지역에 나라에서 관장하는 차밭을 설치하고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관리하여 차를 만들어 바치도록 하는 차 특산지를 말한다.  일명 공다소(貢茶所)라고도 하는데, 지금은 이런 곳이 없어졌고 옛 기록에만 전한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차를 만드는 곳을 제다소(製茶所)라고 하며 차 생산지를 공다소라고 부르고 있다.  다소라고 하는 말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으나 중국에는 다촌이란 마을은 없고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별한 사례이다.

 

*** 통도사의 평교다촌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에서 모셔온 부처님의 가사(袈裟)와 사리(舍利)를 봉안하고,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여 보름마다 불법을 설하여 계율종(戒律宗)의 근본도량으로 창건되었다.  그 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1천3백여년 동안 불보사찰로써 우리나라 3대 사찰중의 하나로 성장하었다.

   신라때 부터 역대 왕의 원찰이 되었는가 하면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어 그 법맥이 끊이지 않았고 가람의 웅대함은 갈수록 늘어나서 거찰로서의 면모을 갖추게 되었다.  이처럼 사찰의 규모가 커지자 사원의 소유토지도 늘어 났고 경내지역 역시 방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가람의 규모가 크고 많은 승려들이 상주하다 보니 사원에서 쓰는 차양식을 공급하는 다촌이 생겨나게 된 것이었다.  이 다촌이 북쪽 동을산 밑에 있는 평교다촌이다.  이 차마을은 사찰 사유지내에 있는데 통도사지(通度寺芝) 가운데 < 통도사 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 舍利袈裟事蹟略錄)> 의 사지사방산천비보(寺之四方山川裨補)조에 보면, " 또 절의 사방에 있는 산과 내는 절을 돕고 보호하는 것이다.  절의터는 사방 둘레가 4만7천여 보(步)인데 각 장생표(長生標) 열둘이 있다.  동쪽에는 흑석봉(黑石峰)이 있는데 돌 무더기 장생표 하나를 두었고 남쪽에는 사천(沙川) 포천(布川)의 봉탑(峰塔)이 있는데, 돌비석 장생표 하나를 배치하였고, 북쪽에는 동을산(冬乙山)이 있는데 돌무더기 장생표 하나를 두었고, 가운데에는 잉천(仍川)과 궤천(机川)이 있는데 각각 돌비석 장생표 둘을 배치 했다.  이상의 사방 장생표 안에 동쪽에는 조일방(祖日房)이 있고, 서쪽에는 자장방(慈藏房) 월명방(月明房)이 있고, 남쪽에는 적운방(赤雲房)과 호응방(呼應房)이 있고, 북쪽에는 백운방(白雲房)과 곡성방(穀成房)이 있는데 모두가 통도사의 속원(屬院)이다.

 

    이 곡성방은 자장율사가 처음 통도사를 창건할 때 지은 암자로 이곳에서 왕래하면서 감독하고 독려하려고 지었다.  후에 스님의 제자 곡성이라는 분이 있어서 이름하여 곡성사라고 하고 이내 주석(住錫)하여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곡성스님이 항상 정(定)에 들어 좌선을 하면 오색 구름이 절을 뒤덮고 다섯가지 향애가 골짜기에 퍼지므로 운곡사(雲谷寺)로 고쳤다고 한다.

 

    사방 장생표의 터에는 삼천 대덕방(大德房)으로 나누어져 있고 동구에는 포천 산동이 있는데 일천의 대덕(大德)이 사는 방이다.

 

    북쪽 동을산에 있는 다촌은 차를 만들어 절에 바치던 곳이다.  절에 바치던 차부뚜막(茶조)과 차샘(茶泉)이 지금도 남아 없어지지 않으니 후세 사람들이 다소촌(茶所村)이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이상과 같이 통도사는 사방 경계에 장생표를 세워 사찰 경계지 임을 표시 했는데 북쪽의 동을산에는 통도사에 차를 만들어 바치던 평교다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차를 만들던 차 부뚜막(茶)과 차샘(茶)이 오래도록 전해졌다고 한다. 

지금은 너무나 많은 세월이 흘러 그 유적들을 찾을길이 없고, 또 차를 만들던 자리며 차를 재배하던 평교 다촌이 어느곳인지 조차 확실하게 알수가 없다.

 

    그러면 차를 만들던 차부뚜막(茶)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차 부뚜막이라고 하는 인( )자는 옥편에는 나와 있지 않는, 뜻이 분명하지 않은 글자이다.  아마도 이 글자는 밭전(田:茶田, 차밭)자의 잘못 기록한 글자일 수도 있고 아니면 또 다르게 형성된 글자 일수도 있다.  여하튼 입구(口)자 안에 불화(火)자가 들어 있으니 뜻으로 새겨 본다면 입 안에 불이들어 있으니 아궁이가 분명하다.

   차아궁이란 차 부뚜막을 말하는 것으로 차를 만들 때 솥을 걸어 놓고 차잎을 쪄내거나 볶아내는 시설물 장치이다.  그리고 차샘(茶泉)은 차를 만들 때 사용하는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샘이다.

 

㉠ 평교 다촌의 위치

  고려때 통도사에 차를 만들어 바치던 다촌 평교마을은 지금 어디 쯤일까.  기록에 의하면 북쪽 경계지인 동을산에 있었다고 하는데, 동을산은 또 어느곳인가를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통도사 사리가사사적약록에 보면 " 사방 장생표는 직간(直干)의 직위별 논밭으로 나뉘었는데 동남쪽의동내와 북쪽의 다촌 평교인 데 이는 거화군의 경계이다.  (四方 長生標 直干之位 田沓分伏 於東南 洞內北茶村坪郊乃居火郡之境也)" 라고 하였다.  이상에서 말하는 다촌 평교는 두가지로 풀이를 해 볼수가 있다. 

 

    첫째는 평교를 지명으로 보는 견해와, 둘째는 평평한 들판(坪郊)으로 보는 지형적인 견해이다.

첫째 평교를 지명으로 보면 " 북쪽의 차마을 평교는 거화군의 경계이다." 라고 풀어야 되고, 둘째 평교를 들판의 형태로 보면 "북쪽의 다촌 평평한 들판은 거화군의 경계이다."가 된다.

   여하튼 평교라는 이름은 차밭의 형상이 들판과 같은데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차밭에 별도의 이름이 필요치 않았다면 그냥 다촌으로 불리워졌을 것이요.  이름이 필요했다면 평평한 들판이라는 뜻으로 평교라고 불렀을 수도 있겠다.

 

    그러면 평평한 들판이라는 뜻을 지닌 평교 다촌은 그 위치가 어디쯤 될까.

위의 기록에 의하면 북쪽 동을산에 있다고 하였으니, 통도사의 북쪽 방향에 있을 것이다.  거화군의 경계라고 하니, 거화군은 삼국사기 잡지(雜志) 제3 지리1에 보면 " 헌양현(?陽縣)은 본디 거지화현(居知火縣)인데 경덕왕때 고친 이름이다.  지금까지 인습한다. (?陽縣 木居知火縣. 景德王改名.今因之 ) " 라고 하였다. 

거지화현 즉, 거화현은 경덕왕 때 헌양현으로 고쳐서 양주군(良州郡一梁山郡)의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현종9년(1018)에 울주(蔚州一蔚山)에 속했고 인종 9년(1131)에 감무(監務)를 둔후 언양현(彦陽縣)으로 고쳤다.  조선시대에는 현감을 두었고 선조32년(1599)에는 울산으로 들어갔다가 광해군 4년(1612)에 다시 현으로 승격됐다. 고종32년(1895)에 현을 군으로 승격 하였다가 다시 한일합방 이후 일제에 의하여 군을 폐지하고 울산에 합병하였다.  지금은 경상남도 울주군(蔚州郡) 언양면에 속한다. 

    그렇다면 다촌 평교는 통도사의 북쪽인 언양면 일대의 평평한 들판이 펼쳐지는 동을산 밑이 될 것이다.

 

 

㉡ 다촌의 설치 연대

   다촌이 언제부터 설치 되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이에 대한 기록이나 문헌이 전하지 않으니 고증할 길이 막연하지만 대략 고려때 부터가 아닌가 추측한다.  호암 문일평씨의 다고사를 보면, " 이는 일설에 고려 정종(靖宗)때 쯤 되리라고 한다.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 다촌 또는 다소촌이 고려조에 된 것만은 사실이다." (고려 10대 정종:1034-1046)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근거에서 고려 정종때 설치 되었는지 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고증이 되지 않았지만 다소 긍정이 가는 점도 있다.  먼저 통도사의 평교 다촌과 관련이 깊은 통도사 손잉천 석비국장생표(通度寺 孫仍川 石碑國長生標)를 살펴보자 이 장생표는 경남 양산군 하북면 백록리 718의 1번지에 있는 보물제 74호이다.  화강암을 다듬어서 이두문을 해서(楷書)로 간결하게 음각하여 놓았는데 매우 귀중한 금석문이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 " 통도사 손잉천 국장생 일좌는 절에서 문의한 바 상서호부(商書戶部)에서 을축년 5월 일자의 통첩에 있는 이전의 판결과 같이 다시 세우게 하므로 이를 세운다.  태안 원년(1085) 을축 12월일 적다." 라고 되어있다.  -- 원문생략 --

   이 장생표의 비문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비는 나라에서 통첩을 받아 세운 것인데 본래 있던 것이 없어지자 다시 세운 것이다.  그 연대는 선종(宣宗) 2년(1085)으로 고려 초기에 해당된다.  이 장생표가 세워진 자리는 <통도사 사리가사사적약록>에서 지적 했듯이 동서남북 중앙등 5방에 모두 12개를 세웠는데 이것은 중앙의 손잉천(孫仍川一省仍川)에 세운 것이다.  이 장생표 외로도 2개가 더 있는데 그 내용은 앞의 것과 동일하다.  이 장생표를 세운 자리는 사찰의 경계이자 비보지로서 통도사에 소속된 사찰지임을 알수가 있다.  지금은 평교 다촌이 있었다는 동을산 밑에 있는 돌무더기(石?) 장생표는 찾을 수 없지만 같은 시기에 설치되었음을 알수가 있다.  그렇다면 동을산 밑에 있던 평교 다촌은 이 장생표를 설치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이 되며, 적어도 같은 시기에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아무튼 선종(宣宗) 이전에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데, 그러면 과연 언제까지 소급해 볼수가 있을까?   이는 다방 제도의 설치 연대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진다.  다방은 궁중에서 진다의식을 봉행하고 차를 수납 관리하는 관청으로서 고려 초인 성종 때 이미 설치 되었다.  임금이 공덕재를 설하기 위해서 친히 차를 갈아서 불전에 올리던 제도가 광종 때(949-975)부터 시작 되었는데 최승로의 상소로 성종 때(981-997)폐지 되고 이 일을 다방의 관원이 맡아서 행했다.

 

   이때 이미 불전에 공덕재를 지낼 때 임금이 직접차를 멧돌에 갈아서 올렸다고 하니, 이 시기 부터 불전에 차를 올리는 의식은 행해져 왔다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각 사찰에서 불전에 올리는 차를 공급받은 곳이 다촌이요.  이 다촌에서 차를 만들어 보냈다고 한다면, 공덕재가 베풀어지던 무렵에 이미 다촌이 생겼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필요성이 높아져야만 가능하기 때문에 사원의 다촌 설치는 공덕재가 정기적으로 베풀어지는 사원에서 부터 먼저 설치되고 다른 절도 따라서 설치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다촌은 광종때부터 성종때 사이에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와 같은 다촌은 통도사 뿐만 아니라 차 재배가 가능한 지역에 있는 큰 사찰에는 모두 설치되었을 것으로 사료되며 특히 고려때 16국사가 배출된 송광사(松廣寺)라든가 또는 선암사(仙巖寺), 또는 화엄사(華嚴寺)등 사찰에도 차가 그 이전부터 재배되었으니 다촌이 설치되었을 가능성은 높다고 하겠다.

특히 송광사의 차는 고려때 이미 명성이 나 있고 화엄사나 지리산 차도 이미 많이 알려진 차이다.

 

 


다소문헌

 

① 다사집 권3 : p 5, 지리지

② 다원 83년 4월호: p 26

③ 한국다예 : p 39, 차의분포

④ 사여이문 : p 87

⑤ 다도학 : p 177, 다소

⑥ 한국차문화 : p 113, 다소

⑦ 국사대사전 : 장흥도호부

⑧ 지도 5만문지 1

⑨ 문화유적총람

⑩ 천관산지(지재지)

⑪ 한국지명총람(다소면)(남평동복)

 

 

- 고려의 다소(茶所)

고려의 다소는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나라에 차를 만들어 바치는 지방이다.  이 다소는 차재배가 가능한 지역에는 모두 있었을 것으로 사료되나 기록이 전하는 곳은 극히 적은 숫자이다.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憲大王實錄) 卷150 지리지(地理志)에 보면, 장흥도호부에 13개소, 무장현에 2개소 동복현에 1개소등 모두 16개소에 다소가 있었다고 전하며 그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卷36, 남평현(南平縣)에 1개소가 있고,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卷13古律詩조에 1개소가 있다고 하였다.

 

다소란 염소(鹽所), 자기소(瓷器所)와 같이 서민집단이 거주하는 특수 행정구역으로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초기까지 있었던 지방제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도 여주목 고적(古蹟)조에 보면 " 이제 살펴보건데 신라에서 주군을 세워둘때 그 전정호구(田丁戶口)가 현(縣)이 되지못한 것은 향(鄕)이나 부곡(部曲)을 두어 소재지의 읍(邑)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때에도 소(所)라는 것이 있었는데, 금소(金所), 은소(銀所), 동소(銅所), 철소(鐵所), 사소(絲所), 주소(紬所), 지소(紙所), 와소(瓦所), 탄소(炭所), 염소(鹽所), 묵소(墨所), 곽소(藿所), 자기소(瓷器所), 어량소(魚梁所) 강소(薑所)의 구별이 있어 각각 그 물품을 공급하였다.  위 여러 소에는 모두 토성(土姓)의 아전과 백성이 있었다.

이상과 같이 현이나 군이 못되는 작은 부락에는 향이나 부곡이나 소를 두어 관리 하였는데 특히 특산물이 산출되는 지역에는 소(所)를 두어 관리 하였다.  이에 차가 생산되는 지역에는 다소(茶所)제도를 두었다.

 

 

① 세종실록지리지의 다소

 

㉮ 무장현(茂長縣)

무장현에는 용산(龍山)과 재역(梓亦)이라는 다소가 두군데 있다.  무장현은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을 말하는데 원래 무송(茂松)과 장사(長沙)를 합친 이름이다.  무송현(茂松縣)은 본래 백제의 송미지현(松彌知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무송으로 고쳐서 무령군(武靈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때에도 그대로 따르다가 후에 장사무독(長沙務督)이 겸임으로 여기를 다스렸다. 

장사현(長沙縣)은 본래 백제의 상로현(上老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장사(長沙)로 고쳐서 무령군의 영현을 삼았다.  고려때에도 그대로 부르다가 후에 감무(監務)를 두어서 무송을 겸해서 다스렸다.  이때에 다소를 설치하고 감무가 이를 관장하였다.  조선 태종 17년(1417)에 무송과 장사의 두현을 합하여 무장현이라 이름하고 진(鎭)을 두었는데 병마사(兵馬使)로써 현의 행정을 겸하게 하였다.  세종5년(1423)에는 첨절제사(僉節制使)를 두었다가 후에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고종 32년(1895)에 승격하여 군(郡)이 되었다가 1914년에 고창군에 합하여 무장면이 되었다. 

무장면은 고창읍에서 서쪽으로 733번 지방도로를 타고 15km 가량 내려가면 나오는데 면소재지에는 오래된 향교(鄕校)와 토성(土城)이 있다.  용산다소와 재역다소가 어디쯤인지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지만 이 지역 임에는 확실하다.  하지만 지금은 옛적에 가꾸던 차나무 조차 찾을길이 없고 아는 사람도 없다.

이때에 다소를 설치하고 감무가 이를 관장하여 차를 공납하도록 하지 않아나 하는 생각이 든다.

 

 

㉯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

 

장흥도호부에는 13개소의 다소가 있었는 데, 요량(饒良), 수태(守太), 칠백유(七百乳), 정산(井山), 가을평(加乙坪), 운고(雲高), 정화(丁火), 창거(昌居), 향여(香餘), 웅점(熊岾), 가좌(加佐), 거개(居開), 안칙곡(安則谷)을 말한다.

장흥도호부는 전라남도 장흥군을 말하는데 본래 백제의 오차현(烏次縣)인데 신라 경덕왕때 오아현(烏兒縣)으로 고쳐 보성군(寶城郡)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초에는 안정현(安定縣)으로 고쳐서 영암군에 속하였다가, 인종이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의 고향이라 하여 장흥으로 개칭, 부(府)로 승격하였다.  원종 6년(1265)에 또 승격하여 희주목(희州牧)이 되었다가 충선왕 2년(1310)에 다시 강등하여 장흥부가 되었다.  고려 인종(1122-1146) (후에 왜구의 침입 때문에 거주민은 전부 북쪽 다른 지방으로 옮겨 빈땅이 되었다가 태조1년(1392년)에 수령현(遂寧縣), 중령산(中寧山)에 성을 쌓고 치소(治所)로 하였다.)

태종 13년(1413)에 도호부가 되고 이듬해 태종14년(1414)에 성이 좁다고 하여 수령현의 옛터로 옮겼다.  세조때 비로소 진(鎭)을 두었고, 고종 32년(1895)에 군이 되고 1914년에 약간의 변천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장흥군은 목포에서 부산으로 가는 2번 국도를 타고 약 1시간 가량 가면 강진을 지나서 있다.  서남해안을 끼고 옛부터 해상항로가 발달하여 원래의 장흥은 바닷가에 인접해 있으나 지금의 장흥읍은 내륙으로 들어와 있다.  이곳은 선사시대 부터 문물이 발달되었고 해상을 통해 중국이나 일본과도 문물교류가 빈번하게 이루어 졌던 곳으로 여기에는 오래된 사찰(천관사, 보림사)과 성곽 등 유물들이 많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을 꼽는다면 보림사와 천관사 그리고 修仁山城, 中寧山古城, 冠山城, 懷州古城과 지석묘(支石墓)가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지석묘의 숫자만도 무려 700여기에 달한다.  그 외로 선사유적들이 도처에 있어 아주 오랜 석기시대 부터 장흥은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가 있다.  고려 때에 이곳에서 공예태후(恭睿太后)가 나자 장흥이라 이름하고 부(府)로 승격시켰으며 그 이후 장흥도호부가 설치 되었다.

고려 때 장흥에는 13개의 다소(茶所)가 있었는데 지금도 그때의 차나무 유종들이 도처에 야생하고 있다.  장흥은 차재배의 적지로서 일찍부터 차산업이 정착한 곳이다.  지금은 지명들이 모두 바뀌어 확인할 길이 없으나 장흥 전지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차나무는 지금도 이 지역 주민들이 차잎을 따서 차를 만들어 마시고 있다.  6.25까지만 해도 이 고장에서는 전차(錢茶)를 만들어 팔았다.

그 지명이 지금도 그대로 쓰이고 있는 곳은 거개(居開) 다소 한군데 뿐이다.  거개 다소는 장흥군 장동면(長東面) 용곡리(龍谷里) 거개 부락을 가리켰다.  그외 지명은 비슷하게 남아 있는데, 가령 요량(饒良)은 요곡(안양면 운흥리)으로 운고(雲高)는 운곡(대구 강진군 용운)으로 가좌(加佐)는 가지(장흥읍 해당리)로, 안칙곡(安則谷)은 안국(부산면 내안리)으로, 웅점(熊岾)은 웅치(熊治:보성군 웅치면)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 동복현(同福縣)

동복현에는 와촌(瓦村)이라는 옛 다소(茶所)가 한 군데 있는데 세종실록 지리지에 보면 (古茶所一 瓦村 今稱瓦旨茶貢里) " 지금은 와지다공리(瓦旨茶貢里)라고 부른다." 라고 하였다.  즉 와촌(기와촌)은 조정에 차를 만들어 바치던 다공(茶貢) 마을(里)이라 뜻으로 " 와지다공리" 라고 하였다.

이 와촌 다소가 있는 동복현은 광주시에서 동남쪽으로 약 30분 가량 지방도로를 따라 가면 나온다. 

화순군 동복면을 말하는데, 백제는 두부지현(豆夫只縣)이고 신라 경덕왕때 동복으로 고쳐 곡성군(谷城郡)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초에 보성군에 예속시켰다가 감무로 승격하였고 태조 3년(1394)에는 화순(和順)으로 들어갔다가 태종 5년(1405) 화순과 합쳐서 복순(福順)이라 했다.  태종 16년(1416)에 다시 화순으로 들어갔다가 현종5년(1064)에 복구되었다.  고종 32년(1895)에 승격하여 군이 되었다가 1914년에 군을 폐하고 회순에 합하여 동복면이 되었다.

 

    이 동복면은 광주직할시에서 동남쪽으로 약 30여분 동안 지방도로를 따라 가면 화순읍이 나오고, 화순읍에서 다시 비포장 도로로 약 1시간 가량 가면 동복면소재지에 도착한다.  이 면소재지 북쪽 옹성산(甕城山) 밑에는 고려 때에 창건한 한산사(寒山寺) 절터가 있고 그 터에는 삼층석탑(三層石塔)과 부도(浮屠)가 남아있다.  이 한산사를 감싸고 있는 옹성산 너머에 와촌 부락이 있다.  이 와촌 부락이 고려때 와촌다소이다.  지금은 화순군 북면 와천리(瓦川里) 와촌부락으로 행정구역이 북면(北面)에 속해 있지만 옛날에는 이 일대가 모두 동복현에 속해 있었다.

 

 

 

㉡ 동국여지승람의 다소

 

㉮ 남평현(南平縣)

    남평현에는 다소가 1군데 있었는 데 신증동국여지승람권36 남평현조에 보면, " 다소, 남쪽 30리에서 시작해서 끝은 60리까지이다.  (茶所南如三十里端六十里)" 라고 되어 있다.  남평현에 있는 다소는 현의 남쪽 30리 밖에서 시작해서 60리 까지 연결되어 있는데 그 넓이가 30여리나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다소는 남평현은 어디쯤에 있었을까.

    남평현은 본래 백제의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현웅(玄雄)으로 고쳐 무주(武州一玄州)의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때 남평(南平一永平)으로 고쳐 나주에 소속시켜 명종 2년(1172)에 감무를 두었었다.  공양왕 2년(1390)에는 화순감무의 관할이 되었다가 태조 3년(1394)에 감무를 따로 두었다가 뒤에 현령으로 고쳤다.  고종 32년(1895)에 군으로 승격하여 나주부에 소속시켰다.  1914년에 나주군으로 병합하여 지금은 나주군 남평면이 되었다.  그러나 다소가 있던 지역은 남평현에서 분리되어 다도면(茶道面)으로 독립되었는데 이 다도면은 다소면(茶所面)과 도천면(道川面)을 합하여 다도면의 다(茶)자와 도천면의 도(道)자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 1914년 4월 1일에 행정개편을 할 때 생겨난 관청명이다.  그리고 옛 다소가 있던 지역을 다소면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나주호(羅州湖)의 남쪽으로 사방 3십 여리에 해당한다.  차를 생산하던 다소의 부락 이름은 다음과 같다.  척동(尺洞), 진동(陳洞), 도롱(都弄), 대초(大草), 호봉(虎峯), 반이(班伊), 시랑(侍郞), 장기(場基), 방하(防下), 만세(萬世), 준적(準赤), 연봉(連峯), 봉창(鳳昌), 서동(瑞洞), 봉석(鳳石), 동산(東山), 청소(淸沼), 용동(龍洞), 방촌(旁村), 구다(舊茶), 노가(老加), 산월(山月), 갈마(渴馬), 오산(烏山), 평평(平坪)의 25개 부락이 운흥사(雲興寺)와 불회사(佛會寺)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지금도 이들 지역에는 차나무가 많이 야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사용하고 있는 지명이 고려 때부터 사용한 이름인지는 알수가 없다.  다만 이 고장이 고려때 차를 만들어 바치던 <다소>이며 지금도 차나무가 많이 야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소면은 남평현에 소속된 지역으로 직금은 나주군 다도면 관할이다.

수몰지역 : 남대, 호봉, 시랑, 반이, 용곡, 장기, 안심.

 

 

 

㉢ 동국이상국집

 

㉮ 화계(花溪)

    화계에는 다소가 있었을 것으로 사료되나 세종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그 기록이 빠져 있다.  그러나 지금도 많은 차가 야생하고 있고, 오랜 세월동안 퇴색하지 않고 지리산의 명차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려때 이규보선생의 시문집인 동국이상국집 권13, 고율시(古律詩)조에 보면, 이규보선생이 손한장(孫翰長)의 화답시에 화운답을 해서 보낸 싯구중에 " 화계는 차의 생산지이다(花溪茶所産). " 라는 주석문이 나온다.  이 구절을 보고 혹자는 < 화계는 다소이다>라고 주장을 하고 있으나, 이 문구는 <다소>를 말하는게 아니고 차의 산지라는 뜻이다.  이는 글귀를 잘못 풀이한데서 생긴 오류지만 화계에 다소가 설치되었을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  화계는 고려때 이미 차의 산지로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터였고, 이규보선생도 한때 화계에 가셔 차를 따서 마셨던 일이 있다고 하였다.  손한장이 진양(晋陽)에서 부기(簿記)를 맡아 보고 있을 때 찾아가 만났는데 아마 이때 함께 화계(고려때 화계는 진양군에 속하였다.)에 가서 차를 따서 마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손한장에게 보낸 싯구에 보면 " 우연히 유다(孺茶)의 시를 지었는데 그대에게 전해짐을 어이 뜻했으리.  시를 보자 화계 놀이 홀연히 추억 되는구료, 옛일을 생각하니 서럽게 눈물이 나네.  운봉의 독특한 향기 맡아 보니, 남방에서 마시던 맛 완연 하구나.  따라서 화계에서 차따던 일 논하네.  관에서 감독하여 노약자 까지도 징발 하였네." 라고 하였다.  화계에 차를 따면서 보고 느낀 일들을 토로하고 있는 데 이때 관에서 노약자까지도 징발하여 차를 딴 것을 보면 화계는 분명히 차의 공납을 받아들이는 마을이요.  차의 생산지임에 확실하다.

   그러나 어느 기록에도 화계가 다소 였다는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지금도 화개장터에서 신흥사 절터에 이르는 화개천의 양쪽산 기슭에는 많은 차나무가 야생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고려시대의 다소에 대해서 살펴 보았는데 한가지 큰 의문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고려때 차가 생산된 지역이 앞에서 열거한 다소가 있는 지역 외로도 더 많은 곳에서 공물로 차를 나라에 바쳤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다소로 기록은 되어 있지 않지만 사실은 다소의 역할을 (차가 생산되고 있는 지역에서는) 모두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모두 36개 군현에 토공(土貢)이 있었다고 전하는 데 그중에서 무장현과 장흥도호부와 동복현에만 다소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36개(전라도 28개 경상도 8개) 군현에서 모두 차를 공물로 나라에 바쳤는데 다른 군현에는 다소가 없고 3개(무장, 장흥, 동복) 군현에만 다소가 있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다소가 없는 나머지 군현에도 차가 생산이 되었고 또 다른 다소와 마찬가지로 나라에 차를 공물로 바쳤는데 어찌하여 3개 군현에만 다소가 있었고 다른 군현에는 다소가 없겠는가. 이것은 어쩌면 다소가 있었는데 그 지명을 알수가 없어 누락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된다.  그것은 세종지리지에는 나와 있지 않은 남평현의 다소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소로 기록이 되어 있다.  이러한 사례를 보면 전자의 기록에는 누락되어 있어도 후자의 기록에는 올라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세종지리지에는 36개 군현에 토공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38개(전라도 28개, 경상도 10개) 군현에 토산차가 생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종지리지보다 2개 군현이 더 늘어난 셈이다.  그러나 전라도의 7개(부안, 정읍, 해진, 구례, 장성, 무진, 고흥) 군현이 빠지고 전라도의 7개(태인, 광산, 해남, 남원, 능성, 흥양, 화순) 군현이 늘어났고, 경상도에서 1개(함양군)군이 빠지고 3개(양산, 곤양, 단성)군현이 늘어났다.  결과적으로 2개 군현이 늘어났지만 빠진 군현에서는 차 생산이 중단이 된 것이 아니고 생산은 계속되었는데 기록에서만 누락된 것이다.  이처럼 조사와 기록이 불확실한 점을 감안한다면 모든 토공이 있었던 군현에는 다소가 설치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니다.  나라에 차를 토공으로 바쳤던 지역에는 모두가 다소를 설치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다소문헌

① 다사집 권3 : p 5, 지리지

② 다원 83년 4월호: p 26

③ 한국다예 : p 39, 차의분포

④ 사여이문 : p 87

⑤ 다도학 : p 177, 다소

⑥ 한국차문화 : p 113, 다소

⑦ 국사대사전 : 장흥도호부

⑧ 지도 5만문지 1

⑨ 문화유적총람

⑩ 천관산지(지재지)

⑪ 한국지명총람(다소면)(남평동복)

 

 

                        - 네이버 블로그 <炫爐의 블로그>  마운틴 님의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