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파미르 고원 종주기 / 다정 김규현

2014. 4. 7. 01:06파미르 이야기

 

 

 

 

       

# 9 파미르고원 종주기

* 726년 봄, 호밀국 이스카심에서

 

▼ 혜초의 파미르고원 횡단지도

 

먼저 회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혜초는 여러 번 파미르고원을 넘을 시도를 하였지만, 가는 곳마다 도둑들이 길을 안내할 정도로 창궐하여 혼자 몸으로 파미르를 넘어 가기는 너무 위험하기에 계속 안전한 루트를 모색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란에서 뒤 돌아온 혜초는 우즈벡의 훼르가나계곡에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와칸주랑을 통한 가장 전통적인 루트를 택하기로 하고, 아무다리아강을 건너 토하라, 즉 현재의 아프간 발흐(마자리샤리프)-쿤두즈-화이쟈바드를 거처 드디어 와칸주랑의 시발점인 이스카심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기록과 시 한 구절을 남겼다

 

또 토화라국으로부터 동쪽으로 7일을 가면 호밀국의 왕이 사는 성에 이른다. 마침 토화라국에서 [이곳에] 왔을 때 서번에 가는 중국 사신을 만났다. 그래서 간략하게 4자의 운자(韻字)를 써서 오언시를 지었다.

 

“그대는 서번 길이 멀다고 한탄하나 나는 동쪽 길이 먼 것을 슬퍼하노라.

길은 거칠고 산마루에는 눈도 많이 쌓였는데 험한 골짜기에는 도적 떼도 많기도 하네.

새도 날아오르다 깎아지른 산에 놀라고 사람은 좁은 다리 지나가기 어렵네.

한 평생 살아가며 눈물 흘리지 않았는데 오늘 따라 눈물 천 줄기나 뿌리네“

 

그러니까 이곳 이스카심의 객사에서 서번(西蕃), 즉 당시 중앙아시의 패자였던 토화라국[현재의 아프간 발흐}으로 가는 당나라 사신을 만나 회포를 풀었다는 말이 된다. 아마도 오랜만에 친숙한 중국어가 오가는 가운데, 중국 음식과 술이 차려진 자리에서, 그의 당면 과제인, 파미르를 넘는 정보도 넘겨받았을 자리였을 것이다. 이 때 시심(詩心)이 발동한 혜초는 토화라에서 지은 시도 생각났는지 그것도 기록하였다.

또한 겨울날 토하라에 있을 때 눈을 만나서 그 감회를 오언시로 읊은 것이 있었다.

 

차가운 눈 더미는 얼음과 합쳐 얼었고 찬바람은 땅이 갈라지도록 매섭구나.

큰 바다는 얼어붙어 평평한 제단이 되고 강물이 낭떠러지를 자꾸만 깎아 먹네.

용문(龍門)에는 폭포까지 얼어붙어 끊기고 정구(井口)에는 얼음이 뱀처럼 서렸구나.

불을 가지고 산위에 올라 노래하니 파미르 고원을 어찌 넘을 것인가?“

 

위의 2수의 시구(詩句)는 혜초사문이 남긴 6수 중에서 가장 백미에 속하는 구절로서, 한 겨울날 이역만리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기가 막막한 나그네가 느꼈을 객수를 잘 묘사한 절창이라 평가 받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불을 가지고 계단 위에 올라 노래하니” 에 대한 해석은 글자해석은 겨우 할 수 있지만, 정확한 의미는 오리무중으로 필자에게도 풀리지 않는 화두로 남아있는 중이다.

다만, 혜초가 배화교(拜火敎, Zoroaster)의 성지인 이란의 야즈드(Yazd)까지 갔다가 왔고 당시 배화교가 소그드지방에도 성행하고 있었으니, 이 종교에 대해 혜초는 친숙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종교의 의식 중에 하나인- 산 위 제단에 올라 태양신 불을 숭배하는-의식행위를 상징하는 구절이 아닐까? 하는 정도로만 여겨질 뿐이다.

 

호말국은 중국측 자료에는 흔히 보아는 곳으로,『후한서』에서는 휴밀(休密)로,『위서』에서는 발화(鉢和)로,『양서』에서는 호밀단(胡密丹)으로,『당서』와『오공행기』에서는 호밀(護密)로, 혜림의『일체경음의』에서는 호멸(胡蔑)로, 그리고 『대당서역기』에서는 확간(鑊侃) 또는 달마실철제(達摩悉鐵帝)등으로 표기되고 있다. 이런 명칭의 어원은 대게 산스크리트의 와카나(Wakhana)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마지막 부분의 ‘달마실철제’ 만은 ‘파미르의 어원’의 경우처럼, 페르시아어 다리마스티(Dar-i-masti)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여서 산스크리트어계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 이란 페르세폴리스의 배화교의 불의 제단

 

 

 

 

 

 

▼ 배화교의 상징

 

혜초는 이어서 호밀국의 당시 상황을 소상히 그려내고 있다.

 

이 호밀국왕은 병마가 미약하여 스스로 나라를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대식국(大食國)의 통치를 받고 있어 해마다 비단 3천 필을 바친다.

산골짜기에 살고 있어 주거가 협소하고 백성들은 가난한 사람이 많다. 의복은 가죽옷과 모직 상의를 입으며 왕은 비단과 면직 옷을 입는다.

음식은 오직 떡과 보릿가루를 먹는다. 이 지방은 매우 추워서 다른 나라보다 심하다. 언어도 다른 여러 나라와 같지 않다. 양과 소가 나는데 아주 작고 크지 않으며 말과 노새도 있다.

승려도 있고 절도 있어서 소승이 행해진다. 왕과 수령과 백성들이 함께 불법을 섬겨서 다른 종교는 믿지 않으므로 이 나라에는 다른 종교는 없다. 남자는 수염과 머리를 깎고 여자는 머리를 기른다. 산 속에서 사는데 산에는 나무와 물도 없고 여러 가지 풀도 없다.

 

여기서 해마다 비단 3천필을 조공으로 바친다는 구절은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당대에는 말 한 마리가 비단 40필 값어치이니 3천 필이면 말 75마리에 해당된다. 현장과 혜초의 다음 행선지인 쉬그난[識匿節]조에서 보다시피, “약탈한 비단을 썩을 때까지 창고에 쌓아둘 망정 의복을 지어 입을 줄 모른다.”는 구절은 비단이 화폐를 대신해 결제수단으로 이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 중국, 티베트, 아랍권의 각축장이였던, 와칸주랑

와칸주랑은 북쪽으로는 와칸산맥 또는 알리추산맥이라는, 6천m급의 고봉들이 남으로는 힌두쿠시 산맥이 동서로 가로지른 사이의, 동서로 긴 형태의 분지로 그 사이로 고산의 만년설이 녹아내려 이룬 파미르천과 와칸천이 합쳐진 아비판즈(Ab-i Pānj)강이 흐르고 있는 지형이어서 옛부터 파미르고원을 횡단하는 유일한 길로써 이용되어 내려왔는데, 그 생김새 때문에 와칸주랑 (走廊)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위의 혜초의 기록에서 우리는 호밀국을 비롯한 당시의 와칸계곡(Wakhān, 鑊侃)의 여러 나라들이 아랍권의 침략을 받아 통치를 받으며 조공을 바치고는 있지만, 아직 종교적으로는 완전하게 이슬람화 되지 않은 채 국왕 및 백성들이 불교를 믿는 것이 허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혜초가 이스카심을 지나갈 때 이곳은 주위 강대국인 중국, 티베트, 아랍권의 각축장이었다. 다음의 사료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중국의 사서인『위서』「서역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는데,

 

발화국(鉢和國)은 갈반타(渴槃陁) 서쪽에 있는데, 대단히 춥고 사람과 가축이 함께 땅굴 속에서 산다. 큰 설산이 멀리서 보면, 은봉(銀峰)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빵과 보릿가루만 먹고 보리술을 마시며 모직외투를 입는다. 이곳에는 두 길이 있는데, 한 길은 서쪽의 에프탈로 향하고, 다른 한 길은 서남쪽의 에프탈이 통치하는 우디아나[烏長國]에 이른다.

 

519년 송운과 혜생도 9월 중순경에 이곳을 지나가면서 앞 『위서』의 내용과 비슷하게 기술하였는데, 이 나라 남쪽 국경에 있는 큰 설산은 마치 옥봉(玉峰) 은봉(銀峯)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 옥구슬 은구슬 같은 파미르 연봉들

 

 

 

 

 

또한『신당서』「서역전」에도 호밀국의 위치와 물산 등에 관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비교적 소상히 밝히고 있다.

 

호밀은 일명 달마실철제 혹은 확간(鑊侃, Wakhan)이라고 하며 원위(元魏) 때는 발화(鉢和)라고도 하였고 토화라의 옛터에 자리하고 있다. 동남쪽에서 곧바로 장안까지는 9천리이며 사방은 세로가 1천6백리이고, 가로는 겨우 4~5리에 불과하다. 왕은 색가심성(塞迦審城)에 거주하는데, 이 성은 북변에서 오호하(烏滸河,판지강)와 접하고, 기후는 춥고 땅은 울퉁불퉁하고 모래와 돌로 뒤덮여 있다. 산물로는 콩, 맥류, 양마가 생산된다. 이곳 사람들의 눈은 푸르다.

그러나 현장은 호밀을 달마실철제국이라고 부르면서, 옛 토화라의 옛 땅에 있는데, 작기는 하지만 인내력이 강한 말이 많이 나고, 도읍지는 혼타다성(昏馱多城)이라고 하였던 것을 보면, 호밀국의 도읍지는 주위 정세에 따라 때로는 이스카심과 혼타다로 옮겨 다녔던 것 같다.

이상의 여러 기록에서 보다시피, 와칸은 파미르 고원 남도(南道)의 요로에 위치하고 있어서 서쪽으로는 토화라를 경유해 페르시아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우디아나와 카슈미르를 지나 인도대륙으로 이어진다. 이렇듯 와칸주랑은 지리적, 전략적으로 요충지였기에 일찍부터 여러 세력간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렇기에 당나라는 카슈미르, 아프간, 우디아나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각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곳을 방치해둘 수가 없었고. 한편 티베트도 애써 점령한 안서사진(安西四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발율인 현 파키스탄의 스카르두와 소발률인 길깃트를 경유하는 길을 확보해야만 했기에 와칸은 내줄 수 없는 요충지였다. 이런 전략적인 목적은 이슬람권까지도 마찬가지였기에 정세는 더욱 복잡하게 돌아갔다.

 

▼ 와칸의 얌춘요새

 

 

 

 

▼ 와칸의 야마구티의 쿠샨왕국(BC2)의 하하요새

 

 

 

이에 당나라는 개원 연간에 이 나라 왕들에게 정식 왕위를 책봉하고, 742년 왕자 힐길리복(頡吉利匐)이 내조하자 현종은 그에게 철권(鐵券)까지 하사하였고 759년에는 호밀국왕 흘설이구비시(紇設伊俱鼻施)가 당나라에 조공차 오자 당 숙종(肅宗)은 그에게 이씨성(李氏性)까지 하사하였을 정도로 공을 들였다. 그리고 747년에는 고선지(高仙芝)의 소발률(小勃律)인 길깃트를 토벌이 이루어졌는데, 그때의 원정로가 바로 이 호밀국을 지나 바로길고개를 넘어 소발률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수십 년 이전, 혜초가 이곳을 지나갈 726년경에는 와칸지방은 이미 이슬람의 세력하에 들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