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역사적 배경 / 문경의 의병과 독립운동사연구

2014. 5. 14. 16:57나의 이야기





       

2012/02/2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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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Ⅱ 역사적배경 한말국권회복 1910년대1920년대1930.40년대국외운동부록


 

 

문경의 의병과 독립운동사 연구

 

 

 제2장 역사적 배경

 

  

제1절 영남만인소와 문경

 

  1. 영남만인소의 전개

 

  19세기 중반 열강의 침탈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지면서 대원군을 비롯한 정치인들과 양반유생들은 위정척사운동으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여기에서 위정衛正은 주자학적 질서인 정正을 지킨다는 것이며, 척사斥邪는 주자학 이외의 사상, 특히 서양의 사상이나 종교는 사악하고 나쁜 것이므로 이를 배척해야 한다는 것이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이다.

 

  위정척사론은 주리론에 근거하여 화서 이항로李恒老와 노사 기정진奇正鎭을 비롯한 재야유생을 중심으로 형성‧확대되었다. 이항로는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올린 상소에서 주전척화론主戰斥和論을 전개하여 민족주체성과 민족문화의 자존성을 강조하였다. 즉 천주교를 이단사설로 규정, 극력 반대함으로써 위정척사운동을 서양세력을 물리치는 근본대책이라고 보았으며, 또 서양세력의 경제적 침략성을 간파하고 서양제품의 사용금지론使用禁止論과 불매불용론不買不用論을 제시하였다. 기정진은 병인양요 때 올린 상소에서 서양의 침략성을 간파한 역사적 통찰력을 보여 주었다. 즉 인수대별人獸大別의 의식을 이론화하여 서양을 금수로 규정하여 위정척사사상의 원리로 삼았으며, 또 서양의 천주교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국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내수외양론內修外攘論, 서양의 경제적 침략성을 간파한 양물금단론洋物禁斷論을 통해 개국을 적극 반대하였다.

 

  1873년 고종의 친정과 더불어 추진된 개화정책은 마침내 개화파의 주도하에 일본과의 개항으로 연결되었다. 이에 따라 대원군 집권하에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辛未洋擾를 거치면서 강화된 ‘척화斥和’의 분위기는 개항과 더불어 더욱 고조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곧 집단적인 상소운동으로 전개되었으니, 소위 ‘척사소斥邪疏’가 그것이다.

 

  척사소는 노론의 재야유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즉 김평묵金平黙 등 이항로의 제자들은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주장하면서 개항을 반대하였다. 이것은 일본과의 통교 반대와 이를 추진하던 집권 노론세력에 대한 비판으로 현실적인 위기의식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그러나 영남유림들의 움직임은 별로 없었다.

 

  영남유림이 적극적이고 집단적인 척사운동을 전개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1880년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 황준헌黃遵憲의『조선책략朝鮮策略』이었다. 즉 1880년 11월 안동‧영주 등지에서『조선책략朝鮮策略』을 비판하는 복합을 위한 척사통문이 도산서원과 영주향교에서 발송되면서 영남만인소는 점화되었다. 이른바 신사척사론辛巳斥邪論이다.

 

  1880년 11월 26일 안동향교에서 도내 유생 800여 명이 참석하여 도회를 열어 이만손李晩孫을 소수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조사에 최시술崔蓍述‧류필영柳必永‧권술봉權述鳳‧김현휘金絢輝‧이병호李炳鎬, 공사원에 김석규金碩奎‧김양진金養鎭‧김상흠金尙欽‧박재홍朴載洪‧하현원河顯源등이 선정되었다.

 

  한편 경상우도에서는 황난선黃蘭善‧이진상李震相‧송인호宋寅濩 등이 성주의 신광사神光寺에 모여 척사통문을 발송하고, 1880년 12월 15일 개령향교에서 도회를 열고 척사운동에 참여하였다. 경상좌‧우도에서 모임을 가진 유생들은 만인소의 도회소를 상주의 산양(현 문경시 산양면)으로 정하였다. 1881년 정월 20일 경부터 각처에서 만인소에 동참하려는 유생들이 산양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산양은 지리적으로 조령鳥嶺에 가까운 지역으로 영남 인사들이 서울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이곳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1881년 2월 4일 이만손을 소수로 영남 유생들은 산양도회를 출발하였다. 그리고 2월 18일 소유 27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복합상소에 들어갔다. 2월 23일 순흥의 유생들이 참여하면서 소원들은 400여 명에 이르렀다. 2월 26일 만인소가 받아들여졌다. 이후 3월 4일 안동의 김조영金祖永을 소수로 한 2차 만인소, 3월 6일 영주의 김석규金碩奎을 소수로 한 3차 만인소, 3월 24일 안동의 김진순金鎭淳을 소수로 한 4차 만인소가 복합상소로 전개되었다.1)

 

  영남만인소에서 제술된 척사소는 황준헌의『조선책략朝鮮策略』에 대한 비판이었다. 구체적으로 영남 유생들은 친중국親中國‧결일본結日本‧연미국聯美國을 통한 방아책防俄策 중 연미국에 대하여 지리적 조건을 들어 그 비합리성을 비판하였다. 또한 야소교와 천주교에 대한 이해도 야소교는 단지 명칭만을 바꾸어 전파를 용이하게 하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서원의 복설復設과 호포법의 개정을 통하여 내수內修와 외양外攘을 도모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영남만인소는 신사척사운동의 출발점이 되어 그 뒤 경기‧충청‧강원도의 척사소가 일어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를 통하여 전 유림이 당론과 지역을 초월하여 일본과 서양세력의 침략을 연맹으로 배척하는 반 외세를 목표로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충청도에서는 홍시중洪時中과 황재현黃載賢이 상소를 올렸고, 또 유생 300여 명이 한홍렬韓洪烈을 소수로 복합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4월 중순 경기도에서도 류기영柳冀榮과 이행규李行逵를 중심으로 100여 명이 복합상소를 올렸다.

 

  1881년 8월 안기영사건 이후 위정척사운동은 점차 수그러들게 되었다. 이후 1882년 3월 미국, 4월 영국, 5월 독일과 연속적으로 조약을 맺은 데 이어, 1884년에는 러시아, 그리고 1886년 프랑스와도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즉 조선은 개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위정척사운동에 참여했던 보수적인 유림들은 1890년대 의병항쟁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다.

 

 

  2. 영남만인소와 문경

 

  1880년 11월 26일 안동향교에서 열린 안동도회와 1880년 12월 15일 개령향교에서 열린 개령도회 이후 경상좌‧우도의 유생들은 만인소의 도회소를 문경의 산양(과거 상주 산양)으로 정하였다. 1881년 정월 20일 경부터 각처에서 만인소에 동참하려는 유생들이 산양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여 1월 29일 산양도회의 모양이 어느 정도 갖추어졌다.

 

  문경 산양은 지리적으로 조령鳥嶺에 가까운 지역으로 영남 인사들이 서울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이곳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교통의 요지였다. 따라서 이러한 지리적 요충지인 관계로 산양이 대도회소로 정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1881년 정월 20일부터 2월 4일 복합상소를 위해 서울로 출발하기 위해 산양에는 영남 각처의 유생들이 집결하였다. 영남 유생들은 산양에서 도회를 열어 파록爬錄을 하고, 각 지역으로부터 도착한 척사소를 검토하여 전前 예조판서禮曹判書 강진규姜晉奎의 척사소를 대표적인 척사소로 채택하였다. 이때 척사소를 작성한 유생들은 김석규‧이승희‧송인호‧이종기‧김기선‧김노선 등 영남의 대표적인 학자들이었다. 그 외 이진상도 산양도회에 편지로 척양의 뜻을 전하였다.

 

  문경 산양에 모인 영남 각처의 소유疏儒들은 도회소가 정한 운韻에 차운次韻하거나, 또 소수인 이만손의 척사운斥邪韻에 따라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산양은 2월 4일 복합상소를 위해 소유疏儒들이 서울로 출발하기까지 영남유림계의 중심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남만인소에 참여한 문경지역 유생들은 4명에 불과하였다. 「위정척사소초衛正斥邪疏草」에 의하면, 영남만인소에 참가한 문경지역의 유생들은 다음과 같다.2)

 

◦ 택소擇疏 김성준金性濬 문경聞慶 소포蕭浦

◦ 사소寫疏 채방진蔡邦鎭 문경聞慶 저동苧洞

◦ 관행管行 권정환權政煥 문경聞慶

◦ 직일直日 이정화李鼎和 문경聞慶 모곡茅谷

 

 

제2절 동학농민전쟁과 문경

 

  1. 동학농민군의 봉기

 

  1860년 경상도 경주에서 창도된 동학은 1860년대 초부터 경북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포교가 시작되었다. 이른바 은도기에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은 소백산맥의 험준한 산줄기 양쪽을 넘나들며 영남 북서부 일대의 많은 농민들을 포섭하고 있었다. 그래서 1894년 상주‧김산‧예천‧문경 등에는 동학에 든 지 수십 년 되는 교도들이 많았고, 이러한 교세를 배경으로 동학농민군은 종적‧횡적으로 연결망을 형성할 수 있었다.

 

  1873년 대원군이 밀려난 뒤, 동학은 삼남지방으로 교세를 확장하고, 조직망도 강화하였다. 1894년 동학은 농민세력을 동원한 반봉건‧반침략의 농민봉기를 통해 민족운동으로 승화되었다. 1894년 3월부터 호남지역의 동학농민군은 정부와 지배층을 상대로 반봉건투쟁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특히 동학의 남접에 해당하는 전라도 농민군의 활동이 전해지면서, 북접에 해당하는 충청도나 경상도에서도 동학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경상도 각 군현의 동학 교세는 크게 확대되었다.

 

  영남 북서부의 북접 동학 조직은 상공포尙公包‧충경포忠敬包‧관동포關東包‧영동포永同包‧선산포善山包 등 다섯 개 대접주 관할 아래 세력을 키워갔다.

 

  이들 각 포는 영남 서북부 안동‧의성‧풍기‧봉화‧예천‧용궁‧함창‧문경‧상주‧김산‧개령‧지례‧성주‧선산 등에서 각각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면서 서로 연계하여 활동하였다.3)

 

  호남지역의 남접 동학농민군이 봉건지배층을 상대로 전면 투쟁을 전개한 것과 달리 북접 교단은 관치官治 질서를 준수하는 범위 안에서 교세를 넓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접 농민군의 봉기에 자극받아 1894년 여름부터 북접의 농민군도 결집되기 시작하였다. 이들 군현의 농민군은 여름 이후 관아의 통제권에서 벗어나서 양반지배층은 물론 관부官府까지 누르는 형편이 되었다.

 

  이와 같이 동학농민군의 세력이 커지자, 보수지배층들은 조직적인 대응책으로 민보군을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즉 함양‧안의‧거창‧성주‧안동‧의성 등지에서 보수지배층이 민보군을 만들어 동학농민군을 견제하고 나섰던 것이다.

 

 

  2. 동학농민전쟁과 문경

 

  문경지역의 동학은 1871년 이필제李弼濟의 난으로 알려진 ‘문경적변聞慶賊變’에서 비롯되었다. 일찍이 동학창도자 최제우로부터 교화를 받은 이필제는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나 진천에 옮겼다가, 다시 문경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진다.4) 이필제는 1863년 동학에 들어가 그 후 동학에서 접소를 설치한 영해에 숨어 들었다가, 교조 최제우가 처형된 1871년 3월 10일 교조의 억울함을 푼다는 이유를 내걸고 동학 농민을 모아 영해란을 일으키고, 8월 2일에는 문경의 조령 초곡에서 문경란을 일으켰다. 조령 초곡은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이며 소백산맥 준령으로, 당시 동학은 이 지역에 비밀 단체를 꾸리고 있었다. 따라서 동학교도들을 규합하여 난을 일으키는 데 매우 알맞은 곳이었다. 그러나 실패 후 문경에서 정기현鄭岐鉉과 같이 붙잡혀 서울에서 형을 받고 47세에 죽음을 당했다.5)

 

  이필제의 문경란 이후, 문경지역의 동학조직은 그 잔여세력이 사교邪敎로 탄압을 받으면서도 일부는 조직을 유지했다. 문경의 신북身北과 가은의 가북加北지역에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1880년대 중반에는 문경군 동로면 소야리를 근거지로 한 동학의 교세는 문경‧예천지역을 총망라하고 있었다.

 

  문경‧예천지역 동학교단의 총수 최맹순崔孟淳은 옹기장사로 꾸며 각지의 동학교도들과 연결망을 만들어 놓았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옹기장사로 생활하였고, 친구들도 쉽게 모이고 흩어질 수 있는 상인들이었다. 행상을 하는 동시에 동학을 퍼뜨리는 통로를 만든 것이 여러 군현을 연결하는 농민군 조직으로 확대되는 연결망이 되었던 것이다. 반재원潘在元은『갑오척사록甲午斥邪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본군本郡에서는 이른바 최맹순崔孟淳이라는 자가 본년 3월에 소야蘇野 예천의 서쪽 50리 지점에 위치, 현 문경군 소야에서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보은의 동도들과 상통하여 스스로 관동수접주關東首接主라고 칭하였다. 그리고 무리들을 불러 모아 부서를 정하고 이른바 접주接主‧접사接司‧봉령奉令‧교수敎授‧대정大正‧중정中正 등을 임명하였다. 그 접接을 법소法所라고 하였고, 그들끼리는 도인道人이라고 불렀으며, 무리를 모집하는 것을 포덕布德이라고 하였다. 

 

  원래 최맹순은 여러 해 동안 옹기장사를 하던 사람이었으며 그의 무리들은 모두가 사방에서 모였다가 흩어졌다 하는 무뢰배들이었다. 그들은 떠돌아다니면서 침탈을 일삼다가 6월에서 7월 사이에 그 세력이 매우 커져서 마을을 횡행하며 포덕을 한다고 하면서 속여서 꾀어내고 협박하니 여기에 가담하는 자들이 날마다 수천을 헤아렸다.

 

  이에 접소接所를 분설分設하여 각 면의 방곡坊曲에 접소가 없는 곳이 없었으나 서북西北의 외지外地가 특히 심하였다. 대접大接은 만여 명이나 되었으며, 소접小接은 수십, 수백 명이었다. 시정市井의 동혼童昏‧평민‧노비‧머슴 등의 무리들은 자신들이 득세한 시기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관장官長을 능욕하고, 사대부를 욕보이고, 마을을 겁략하고, 재물을 약탈하고, 무기를 훔치고, 남의 나귀와 말을 몰고 가고, 남의 무덤을 파헤쳤다.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하여 묶어놓고 구타하였으며 종종 살인까지 저질렀다. 그러니 인심이 흉흉하여 아침에 저녁 일을 헤아리지 못하였다.6)

 

  이와 같이 동학교도들의 연결망이 형성되고 관부의 단속이 줄어들자, 보은집회報恩集會 이래 동학의 교세는 점차 커져갔다. 최맹순은 1894년 3월 소야에서 공공연히 접接 조직을 설치하고 농민군을 묶어내기 시작하니 그 수가 7만여 명에 이르렀다.

 

  수접주首接主라 불리게 된 최맹순은 면리面里 단위까지 나아가 포 조직을 늘여, 48접소나 되었다.7) 수접주는 대접주와 말단 접주의 중간 위치에 있으면서 지역 농민군을 관장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대접주 조직의 바탕이 없는 군현에서 농민군을 지휘해 나가던 지도부는 수접주를 통해 농민군에게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즉 최맹순은 예천‧문경지역을 관할하는 관동포關東包의 수접주였던 것이다.8)

 

  이와 같은 동학조직은 1894년 7월 활동하기 시작하여 산양‧용궁을 무혈점거하고 예천을 압박하였다. 그러나 8월 문경읍을 공략하던 관군에 일본군이 가세함으로써, 문경의 동학농민군은 고모산성에서 패하고 말았다. 이틀 동안의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완전히 무찌르고 문경읍을 회복하였다.

 

  11월 22일 문경‧예천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을 지휘하던 동학 수접주 최맹순은 붙잡혀 사형되었고, 그 아들 최한걸崔汗杰과 접사 장복극張卜極이 총살되었다. 박주대朴周大의『저상일월渚上日月』과 반재원의『갑오척사록』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1月 22日, 소야蘇野의 동학접주 최맹순을 읍집강소邑執綱所에서 복주伏誅하였다. 또한 효수梟首하여 뭇사람들에게 경계하였다. 대개 이 사람이 영남의 동학을 창시한 자로서 그 자식과 사돈까지 모두 도륙하였다.9)

 

  21日 癸巳, 통수統首가 갑자기 보고하기를, “동도의 거괴 최맹순이 충주의 독기篤基 등지에 숨어 있으니 급히 부병을 파견하여 체포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즉시 유사와 포병 30여 명을 파견하였는데 벌천伐川까지 추격하여 최맹순과 그의 아들 한걸汗杰 및 장복극張卜極을 잡아왔다.

 

  22日 甲午, 부병이 최맹순 등 3명을 체포하여 관부로 들여보냈다. 군수는 이들의 죄를 조사하여 다짐을 받도록 하였다.

 

  최맹순(나이 42세)이 말하기를, “저는 본래 강원도 춘천 사람으로 허망한 사술邪術을 배워 22년 동안 은둔하여 그것을 몰래 익혔습니다. 그러다가 금년 3월 본군 소야 땅에 접소를 설치하고 타도他道과 본도本道를 막론하고 무리를 꾀어서 모으자 그 숫자가 7만여 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땅은 좁고 무리는 많아서 각처에 접소를 설치하니 그 숫자가 48개가 되었습니다. 이른바 무리들은 모두 거칠고 잡된 난류亂類들이었습니다. 조정의 명령과 순영의 지시를 어기고 지키지 않았으니 이미 효수하여 경계시킬 죄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또 남의 무덤을 파헤치고 재산을 빼앗았으며 용궁龍宮의 무기를 탈취하여 예천 읍민들을 도륙하려고 하다가 결국 패하여 달아나서 강원도 평창平昌접소에 의탁하였습니다. 100명 정도의 접의 졸개들을 모아 지난달 17일 본읍 적성리로 갑자기 들이닥쳐 인가에 불을 지르고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였습니다. 충주 독기령篤基嶺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스스로 죄를 돌아보건대 어찌 삼시라도 용서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빨리 처형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최한걸(나이 21세)이 말하기를, “제 아비가 이미 죄인의 우두머리이므로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죽을죄를 지었음을 자백하오니 빨리 처형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장복극(나이 55세)이 말하기를, “저는 본래 본군 소야에 거주하였습니다. 최가崔哥과 이웃에 살았던 관계로 사학邪學에 유혹되어 들어가 접사가 되어 무리들을 불러 모았는데 500여 인에 이르렀습니다. 최맹순과 공모하여 고을을 공격하였고 결국 패하여 쫓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동학에 이술異術이 있다고 맹신하여 밤낮으로 부지런히 그것을 공부하였으며 이것을 배워야만 난세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군대를 물리치는 부적[退兵符]과 군대를 물리치는 주문[退兵呪文]을 지니고 있다가 체포될 때 결국 탄로가 났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음을 자백하오니 빨리 처형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초의 말을 다 받은 뒤에 군수는 초루譙樓에 자리를 마련하고 크게 군위軍威를 벌려 놓았다. 집강과 여러 집사들은 모두 서열에 따라 도열하였으며 부병 500〜600명이 좌우로 늘어섰다. 최맹순에게 엄하게 곤장 1대를 친 뒤에 즉시 무사武士에게 그를 끌고나가 남사장南沙場에서 목을 잘라 내걸도록 하여 백성들을 경계시켰다. 마침 장날이어서 좌우에서 구경한 사람들이 수천 명이었는데 모두 통쾌하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최한걸과 장복극을 끌고 나와 각각 엄하게 곤장 한 대씩을 치고는 칼을 씌워 옥에 가두었다.

유사 등이 모두 아뢰기를, “오늘은 장날이어서 두 놈의 친척과 추종무리들이 부중에 많이 들어와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밤을 틈타 빼내어갈까 걱정이 되니 죽여서 후환을 없애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하였다. 군수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는 즉시 끌고 가도록 명령을 내리자 부병들이 일제히 몰려들어 둘러싸고 끌고 가서 총을 난사하여 죽인 후 모래사장에 묻었다.10)

1) 權五榮, 「1881년의 嶺南萬人疏」, 尹炳奭敎授華甲紀念『韓國近代史論叢』, 지식산업     사,1990.
2) 金俊亨, 「『衛正斥邪疏草』해제」 및 「자료『衛正斥邪疏草』」,《慶南史學》제10집, 慶南大    學校 史學會, 1994.
3) 申榮祐, 「甲午農民戰爭과 嶺南 保守勢力의 對應」, 延世大學校 大學院 學位論文, 1991.
4) 高承濟, 「李朝末期 村落反亂運動과 村落社會의 構造的變化」, 『傳統時代의 民衆運動』    (下), 풀빛, 1981.
5) 金義煥, 「辛未年(1871) 李弼濟亂」, 『傳統時代의 民衆運動』(下), 풀빛, 1981.
6) 潘在元,『甲午斥邪錄』, 「執綱所日記」.
7) 申榮祐, 「甲午農民戰爭과 嶺南 保守勢力의 對應」, 延世大學校 大學院 學位論文, 1991.
8) 申榮祐, 「甲午農民戰爭과 嶺南 保守勢力의 對應」, 延世大學校 大學院 學位論文, 1991.
9) 朴周大, 『渚上日月』, 1894년 11월 22일자.
10) 潘在元,『甲午斥邪錄』, 11월 21‧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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