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한말의 국권회복운동 / 문경의 의병과 독립운동사 연구

2014. 5. 14. 17:00나의 이야기






      

제3장 한말의 국권회복운동  문경의 의병과 독립운동사연구 / 문경시 발간자료 

2012/02/24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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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Ⅱ 역사적배경 한말국권회복 1910년대1920년대1930.40년대국외운동부록




문경의 의병과 독립운동사 연구

 

 

 제3장 한말의 국권회복운동 

 

  

제1절 의병항쟁

 

  1. 전기의병 

   1) 전기의병의 전개 

  19세기 후반 경상도 지역의 양반유생들은 1881년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통해 ‘척왜양일체론斥倭洋一體論’을 전개하였고, 1884년의 변복령變服令을 통해서 정부의 개화정책을 비판한 바 있다. 이것이 1894년의 갑오변란과 1895년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弑害‧변복령‧단발령斷髮令 등을 계기로 일본제국주의 세력과 개화파 관료집단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으로 전환되었다.

 

  이리하여 친일내각과 일본 흉적, 그리고 단발을 집행하는 지방관리인 왜 관찰사倭觀察使‧왜군수倭郡守 등을 표적으로 경상도 지방 각처에서는 유림들이 의병을 일으켰다.1) 이것이 1895년 말부터 1896년에 거쳐 전개된 을미의병乙未義兵이다.

 

  1894년 7월 안동의병은 전국에서 최초로 일어난 한말 의병이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위협한 갑오변란에 항거하여 일어난 것이다. 전국에서 본격적으로 일어난 의병은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항거하여 1895년 12월부터 일어나 이듬해까지 이어진 을미의병이다.

 

  경북에서 을미의병은 1895년 12월 안동에서 시작되었다. 그 뒤로 1896년 1월 안동을 비롯하여 예안(선성)‧봉화‧순흥‧풍기‧용궁‧예천‧영천榮川(영주)‧영양‧진보‧영덕‧영해‧청송의진 등 14개 군의 의진과 상주‧금산‧개령‧지례‧성주‧선산 등의 연합의진인 김산의진金山義陣이 있었다. 그 밖에 이강년李康秊이 결성한 문경의진聞慶義陣은 류인석의 호좌의진湖左義陣과 연합하였고, 안동‧봉화‧예안‧영천榮川(영주)‧순흥‧풍기의진은 서상열徐相烈이 이끄는 호좌의진과 연합하여 예천회맹醴泉會盟을 결성하였으며, 김도현金道鉉은 영양의진英陽義陣을 결성하여 강원도에서 일어난 민용호閔龍鎬의 강릉의진江陵義陣을 지원하였다.

 

  한편 경기도에서 결성된 김하락金河洛의 이천의진利川義陣은 남하하여 경상북도에서 결성된 의성‧청송‧경주‧흥해‧영덕‧영해‧영양‧안동의진과 연합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의성연합의진義城聯合義陣과 경주연합의진慶州聯合義陣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또 경북 달성출신의 문석봉文錫鳳은 충청도의 회덕懷德에서 창의하여 항쟁하였다.

 

  경상도 지방의 의진은 비교적 유림의 기반이 튼튼한 지역에서 결성되었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안동부 16개 군현에서는 퇴계학맥을 계승하거나 그 영향 아래 있던 보수적인 양반유생들이 의진을 만들고 지휘했다. 한편 상주‧선산‧김산‧지례‧개령 등의 군현을 중심으로 경북 서북부지역에서 결성된 김산의진은 안동의진이나 진주의진의 영향 아래, 한주학파寒洲學派나 퇴계학파退溪學派의 영향권에 있던 양반유생들에 의해 의진이 결성되기도 하였다.

 

[표-1] 문경 및 주변지역의 의병진영

의 진

결성시기

활동지역

진 용

활 동 상 황

안동의진

1894. 7. 25

안동‧예천‧
영주

徐相轍
(청풍유생)

- 안동일대에서 2,000여 명 모집.

- 상주 태봉의 일본군 병참부대공략.

예안의진
(선성의진)

1896. 1. 23

예안‧안동

李晩燾
(창의대장)

- 결성 후 안동의진에 참여.
- 예천회맹 참가.

안동의진

1896. 1. 17

안동

權世淵
(창의대장)

- 1896. 3. 14, 대장 김도화‧부

  장
  류난영‧도총 김하휴‧선봉장 류

  시연.

청송의진

1896. 3. 12

청송

沈誠之
(창의장)

- 류시연에 자극되어 창의.

- 의성‧이천의진과 연합의진 결성.

영양의진

1896. 2. 29

영양

趙承基
(창의장)

- 시위의병.

- 결성 후 김도현은 예안의진에

  합류.

진보의진

 

진보

許 薰
(창의장)

- 진보 漁川에 주둔.

- 영양의 김도현을 초청 제휴.

문경의진

1896. 2. 23

문경

李康秊
(창의장)

- 안동관찰사 김석중 처단.

- 3. 12, 호좌의진에 합세.

예천의진

1896. 2. 16

예천

朴周庠
(창의장)
張錫奎
(부장)

- 6. 6, 고평전투에서 패배 후

  해산.

봉화의진

1896. 3. 23

봉화‧예천‧
안동

琴錫柱
(창의장)

- 1896. 3. 28, 예천회맹에 참가.

- 태봉전투 후 7월 중순까지 활동.

영덕의진

1896

영덕

申運錫진영
金魯憲진영

- 김하락과 합세.

영해의진

1896. 3. 5

영해

李壽岳
(창의장)

- 영해지방 5대 성씨가 주도.

- 김하락의진과 합세.

풍기의진

1896. 3. 14경

풍기‧안동

金敎明
(창의장)

- 예천회맹에 참가.

- 안동의진에 합세.

순흥의진

1895. 3. 14경

순흥‧안동

洪鍾善
(창의장)

- 예천회맹에 참가.

- 안동의진에 합세.

영천의진

1896. 2. 6이전

영주‧안동

金禹昌
(창의장)

- 안동의진에 합세.

- 예천회맹에 참가.

의성의진

1896. 3. 17

의성

金象鍾
(창의장)

- 의성‧청송일대에서 활동.

- 청송‧이천의진과 연합의진 결성.

이천의진
(남한산성
의진)

1896. 1. 1

1896. 4. 20

경기 이천
경북 일원

閔承天
(창의대장)
金河洛
(도지휘)

- 광주‧양근의진과 연합의진 결

  성.

- 청송‧의성의진과 연합의진,경

  주 연합의진결성.

호좌의진

1896. 1. 28

제천‧안동
등지

柳麟錫
(창의장)
徐相烈
(초모장)

- 서상열, 영남소모장으로 안동

  에서 활동.

- 예천회맹을 주도.

 

  이와 같이 전기의병의 창의는 보수적인 유림사회가 가지고 있는 지역적‧학문적‧혈연적 전통 위에서 서원과 향교를 통해 유림층을 움직이고, 나아가 민중을 동원하였다. 특히 일향의 향론을 주도하고 있는 향교의 역할은 향론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중심이 되었으며, 주변지역을 연결하는 구심점이 되기도 하였다.

 

 

  창의 초기의 의병 격문은 경상도 각 군현의 향교를 중심으로 반포되어 공론화되었다. 양반유생들은 행정적으로 편제된 군현 단위의 지역적 조직 위에 학통이나 현실적인 이해관계 속에서 의진을 편성하였던 것이다.

 

 

   2) 이강년의 문경의진과 마고성전투

    (1) 이강년의 창의경위

  이강년李康秊(1858~1908)의 호는 운강雲岡(혹 雲崗), 자는 낙인樂仁(혹樂寅)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1858년 12월 30일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도태마을에서 효령대군 17대손 기태起台와 의령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879년 6월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행용양위부사과折衝將軍行龍壤衛副司果에 올라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곧 낙향하여 은거하였다.3)

 

  이강년 생가(가은읍 완장리) 이강년은 무과에 합격하여 부사과에 올라 선전관에 임명되었는데, “풍채가 늠름하고 담이 크며 위엄이 있어 무리를 압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정규의 「운강이공행장雲崗李公行狀」에는 이강년이 ‘8척 장골에다가 봉鳳의 눈매에 칼날 같은 눈썹, 붉은 얼굴빛을 띠었고, 수염을 휘날리며 말소리가 우렁차서 대장부의 기상이고, 평소에 학식은 물론 무예와 병서에 능하였다.’고 적혀 있다.4)

 

  이강년은 무과출신이지만 학문에도 뜻이 깊었다. 『운강선생창의일록雲崗先生倡義日錄』을 교정‧편집하였던 김회진金晦鎭의 「지識」에 따르면, 이강년을 ‘서생書生’으로 서술하였으며5)기려자騎驢子 송상도宋相燾의『 기려수필騎驢隨筆』에는, ‘인격이 뇌락강개磊落慷慨하고 담기膽氣가 범상치 않았으며 문사숙성文詞夙就 하였다.’고6) 적어 학문을 일찍 성취하였다고 평했다. 또 이강년은 문경에서 창의한 뒤 류인석의 지휘 아래 들어가 의리義理를 강명하였으며, 을미의병 해산 후 1897년 요동으로 가서 류인석을 만나고 돌아온 뒤 공부에 열중하여 충청‧경상도의 사우士友들을 찾아다니며 성리학과 노장사상을 토론하였다. 뿐만 아니라 1909년 충주 유림에서 화서 이항로의 문집을 간행할 때, 이에 적극 참여하기도 하였다.

 

  1894년 이강년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사건, 즉 갑오변란에 즈음하여 친일 적당과 일본군의 토벌을 결심한 바 있었다. 그러다 1895년 음력 8월 일본군의 명성황후 시해와 음력 11월 단발령 공포 이후 안동을 비롯한 각처 유생들이 창의하자, 이강년도 1896년 정월 11일 도태道胎장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7)

 

    (2) 마고성 전투

  이강년은 1896년 정월 11일 도태장터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정월 13일 농암장터에서 관찰사 김석중金奭中, 순검 이호윤李浩允과 김인담金仁覃을 적의 앞잡이로 판단하여 처단하고 군중들에게 경고하였다. 그리고 정월 15일 이강년은 안동창의대장 권세연權世淵을 방문하여 작전을 논의하고 돌아왔다.

 

  한편 이강년은 충주에 주둔하고 있던 류인석과 협력하고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류인석의 종사는 답서를 가지고 왔는데, “지금 부장한 사람에게 한 부대의 병사를 보내니 바라건대 협력하여 성사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이강년은 그 뜻에 감격하여 500명의 군사를 뽑아 모곡茅谷에 주둔하고 호좌의진에서 보낸 병사들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석현石峴의 마고성麻姑城으로 들어갔는데, 병사들은 오지 않고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정월 15일 이른 아침 갑자기 마고성에 일본군이 쳐들어 와 아침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약 6시간 동안 전투를 치렀다. 이강년이 거느린 문경의 진에 새로 모집된 병사들은 화약과 탄환을 갖추지 못한 채, 갑자기 강한 적을 만나 힘껏 싸웠으나 막아내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이 지른 불로 성문과 마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고, 포수 심거벽沈巨擘은8)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마고성전투에서 참패한 이강년은 다시 안동의진의 대장 권세연을 방문하여 작전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안동의진도 전열이 정비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정월 29일 제천으로 가서 류인석이 이끌던 호좌의진湖左義陣에 합류하였다.9)

 

   3) 호좌의진과 이강년

  (1) 호좌의진과 이강년의 위상

  류인석의 제천의진은 호좌의진을 말한다. 이는 지평에서 창의한 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 등의 지평의진이 제천으로 들어가 본진을 설치하고, 류인석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창의한 의진으로, 중부지역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호좌의진은 장담서사長潭書舍의 향음례鄕飮禮 실시에서 비롯되었다. 장담서사는 제천의 장담마을에 있던 것으로 성재 류중교와 의암 류인석이 거주하며 제자를 양성하던 당시 화서학파의 중심지였다. 화서학파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중암重庵 김평묵金平黙-성재省齋 류중교柳重敎-의암毅菴 류인석柳麟錫을 도통으로 하고 있는 호좌유림의 대표적인 학맥이다.

 

  장담서사의 향음례는 1895년 5월 15일 열렸다. 이틀에 걸쳐 거행된 향음례에는 여러 곳에서 5‧6백여 명의 호좌유림이 참석하였다. 류인석은 “나라는 환란이 이와 같은데, 만일 모르는 체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인심이 꺾여 수습하지 못할 것”10)이라고 하면서 시국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류인석의 시국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의 모색은 모친상을 당한 그 해 10월에 보다 구체화되었다. 류인석은 문인들을 모아 놓고 환란을 당한 선비의 처신방도로 처변삼사處變三事를 강론하였는데,11) 당시 유생들의 행동준거를 제공해 주었고, 류인석과 그의 문인들도 이에 따라 행동방향 을 결정하였다.

 

  류인석은 처음 거지수구去之守舊의 길을 택하고 요동으로 갔다. 그의 문인 입암立庵 주용규朱庸奎‧충재忠齋 오인영吳寅泳‧성암惺庵 박주순朴冑淳‧회당悔堂 박정수朴貞洙‧겸암謙庵 최병식崔炳軾‧최열崔烈‧이조승李肇承‧정화용鄭華鎔‧홍선표洪璇杓‧홍덕표洪德杓‧이정규李正奎 등이 스승을 따랐고, 경재敬齋 양두환梁斗渙은 자정수지自靖遂志를 택하였다. 그리고 실곡實谷 이필희李弼熙‧하사下沙 안승우安承禹‧조은釣隱 이범직李範稷‧경암敬庵 서상열徐相烈 등은 거의소청擧義掃淸을 선택하였다.12)

 

  거의소청을 결정한 이필희‧안승우‧이범직‧서상열 등은 1895년 11월 28일 지평에서 창의를 결의하고, 지평의 포군장 김백선金伯善을 영입함으로써 지평의진砥平義陣을 결성하였다.13) 지평의진은 김백선이 거느린 400여 명의 포수를 비롯하여 약 1천여 명의 의병으로 원주를 점령한 뒤, 12월 3일 제천에 무혈 입성하여 그 진용을 다시 정비하였다.14)

 

◦ 대 장 : 이필희李弼熙

◦ 군 사 : 서상열徐相烈      ◦ 중 군 : 이춘영李春永

◦ 선 봉 : 김백선金伯善      ◦ 군무도유사 : 안승우安承禹

◦ 서 기 : 원용정元容正      ◦ 참 모 : 이필근李弼根


  지평의진은 12월 5일 단양으로 진군하여 군수 권숙을 구금하고, 12월 8일 단양의 장회협전투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퇴각하여 풍기‧영춘을 거쳐 영월로 들어갔다.
15)

  지평의진의 소식을 들은 류인석은 요동행을 포기하고 주용규 등과 함께 영월로 들어감으로써 12월 15일 류인석을 총대장으로 하는 제천의진, 즉 호좌의진이 결성되었다.16)

◦ 총대장 : 류인석柳麟錫

◦ 중군장 : 이춘영李春永      ◦ 전군장 : 안승우安承禹

◦ 후군장 : 신지수申芝秀      ◦ 선봉장 : 김백선金伯善

◦ 조련장 : 안성해安成海      ◦ 참 모 : 박주순朴冑淳

◦ 사 객 : 장충식張忠植

◦ 종 사 : 이조승李肇承‧홍선표洪璇杓‧이기진李起振‧정화용鄭華鎔


  류인석은 진용을 편제하고 전국에 격문을 띄워 거의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군율을 강화하여 기강을 확립한 뒤 의진을 제천으로 옮기고 단양군수 권숙과 청풍군수 서상기를 처형하였다.
17)

  호좌의진은 1월 5일 충주성을 점령하고, 1월 11일 달천전투와 수안보전투를 거치면서 중부지방 일대에서 군세를 떨쳤다. 또 호좌의진은 이범직을 호서지역, 1월 18일에는 서상열을 소모장으로 삼아 원용정‧홍선표 등과 함께 영남지역, 신지수는 경기지역으로 파견하여 모병을 하였다. 한편, 호좌의진은 1월 22일 충주성을 떠나 1월 25일 제천으로 돌아오기까지 일본군에 대응하였다. 또 이 기간 중 원근에서 의병이 가세하여 이인영의 원주의진과 이강년의 문경의진이 합세하였다. 이리하여 호좌의진은 3월경에 이르러 2,000여 명에 달하는 의병을 거느리게 되었다.18)

  이강년이 류인석의 제천의진에 합류한 것은 1896년 정월 29일이다. 이강년은 류인석의 거의 소식을 듣고 정월 11일 창의하여 류인석과 서신을 통하여 연합의진의 구성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강년은 류인석을 찾아서 막료의 예를 올리는 한편 사제의 의를 맺었다. 그리고 2월 1일 제천의진의 유격장이 되었다.19)

  제천의진에서 이강년은 2월 6일 수안보전투를 비롯하여 조령지역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서상열이 안동‧예안‧봉화‧풍기 등 7읍 의진과 연합의진을 결성하고 상주 함창의 태봉에 주둔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자, 2월 13일 이강년은 약 1,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문경으로 이동한 후, 조령의 관문을 차단하여 일본군의 연락망을 차단하였다. 3월 13일 이강년은 장기렴이 이끄는 관군이 제천을 공격하기 위해 청풍 황강黃江으로 들어오자 길목을 차단하고 항전하였다. 그러나 4월 12일 장기렴의 제천 공략으로 중군장 안승우와 종사 홍사구가 전사하면서 제천의진은 크게 패하였다.

  그 후 제천의진은 단양‧풍기‧정선 등지를 거쳐 만주로 이동하였다. 이강년도 제천의진의 뒤를 따라 5월 23일 영월에 도착하였으나, 더 이상 형세가 진전될 수 없음을 알고 태백산으로 들어가 7월 28일 의진을 해산하였다. 이후 이강년은 문경으로 돌아와 후일을 기약하며 은거하였다.

  (2) 수안보전투

  2월 1일 제천의진 유격장으로 임명된 이강년은 2월 2일(3.15) 약 100여 명의 병력으로 전군장 홍대석洪大錫과 함께 수안보의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고 제천을 출발하였다. 2월 6일 수안보 남산에 도착한 이강년은 새벽부터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략하였다. 그러나 2명의 적을 사살한 것 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다.20) 결국 이강년은 병력을 돌려 덕주산성 남문 쪽으로 퇴군하였고, 홍대석은 청풍 서창으로 퇴각하였다.21)

  (3) 태봉전투와 조령지역 방어

  2월 10일 영남에 가 있던 서상열이 안동‧예안‧봉화‧풍기 등 7읍 의진과 연합의진을 결성하고 상주 함창의 태봉에 주둔한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상열은 제천 본진에 편지를 보내 이 지역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장수로 하여금 조령의 길목을 차단하여, 조령의 일본군 병참부대가 태봉의 일본군과 협력하지 못하도록 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22) 류인석은 동창에서 공세를 준비하고 있던,23) 이강년으로 하여금 9초의 병력을 이끌고 중군 윤기영尹基榮과 함께 출진토록 하였다.

  2월 13일 이강년은 약 1,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문경으로 이동하였다. 조령과 상주 태봉을 잇는 길목이 문경이었고, 이강년은 문경 가은출신이었기 때문에 지리에 익숙하였다. 이때 영남지방에서 활동하던 서상열을 따라 영남지방에 갔다가 돌아온 좌부장 정수봉鄭壽鳳이 합세하여 이강년의 작전을 도왔다.24)

  2월 16일 7읍 연합의진의 태봉전투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이강년은 조령의 관문을 차단하고 일본군의 연락망을 차단하였다. 즉 동창에서 남하한 이강년은 문경의 동원촌東院村(문경 상촌면 동원, 혹 동애원)에 근거를 마련하여 조령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태봉전투 이후 이강년은 2월 21일 조령 제1관문의 일본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와 화약류 62점을 노획하기도 하였다.25) 그러나 추적해 온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노획한 물자를 빼앗기고, 중군조차 적에게 포위되어 고립되기도 하였다. 이 전투에서 원주출신의 포군 이석길李錫吉이 전사하였다.26)

  이리하여 이강년은 예천의진의 부장 장문근張文根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당시 적성에 주둔하고 있던 장문근은 소식이 없었다. 결국 이강년은 서상열을 위한 조령의 통로를 차단하는 데 실패하였다.27) 태봉전투 이후 서상열은 잔여 병력을 이끌고 예천을 거쳐 명봉사鳴鳳寺로 이동하였다.

  서상열과의 연합작전 실패 후, 이강년은 수안보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과 대치하였다. 이강년은 병력을 나누어 영산골[靈山谷]과 구룡소九龍沼에 배치하였다. 당시 이강년은 7초의 병력을 거느리고 수안보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략하기 위해 나아갔다. 그러나 행군 도중 관음원觀音院에 이르렀을 때, 영산골 쪽의 파수처에서 들려오는 총소리를 듣고 회군하여 평천 뒷산에 매복하였다. 일본군이 개그늘[蓋陰]에서 방화를 하고 주민들을 해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이강년은 평천에서 이들과 격돌하였다. 이어서 이강년은 문경으로 퇴각하는 일본군을 당포까지 추격하는 등의 활동을 펴다가 제천으로 돌아갔다.28)

  제천으로 돌아온 이강년은 4월 초 전군장 홍대석洪大錫으로부터 조령을 막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홍대석은 수안보를 공격할 것이니 이강년은 조령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이강년은 조령을 막고 전군 홍대석의 호응을 기다렸으나 끝내 소식이 없었다.29) 왜냐하면 경병이 충주로 진군한다는 정보에 따라 홍대석은 서창의 수비에 급급한 상황이었고, 제천의 본진도 제천을 방어하기에 급급한 상황이었다.

  결국 이강년은 단독으로 문경을 공략하기로 하고 수안보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중군 윤기영尹基榮이 문경에서 적의 급습을 받아 패전하고 후퇴하였다. 이에 이강년은 부득이 군사를 수습하여 평천을 출발하여 동창을 거쳐 제천으로 환군하였다.30)

  (4) 제천전투

  조령지역의 방어와 수안보 공략에 실패한 이강년은 3월 1일 동창을 거쳐, 3월 8일 제천으로 들어갔다.31) 이강년은 후퇴하는 과정에서 장수봉을 통하여 조령산성으로 본진을 옮기고 영하嶺下의 7읍을 장악하여 군량을 공급하는 통로를 확보하고 수안보와 가흥을 치자고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천의진은 일본군의 계속되는 공략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본진을 지키기에 급급하였다. 3월 13일(4.25) 장기렴張基濂이 경병 400명을 거느리고 충주에 도착하였다.32) 선유사 직함을 띤 장기렴의 목표는 제천을 공격하여 의병을 토벌하는 것이었다. 한편 원주에서도 김재은金在殷이 경병을 거느리고 진격해왔다.33) 이에 이강년은 군사를 거느리고 자장리慈藏里 방호芳湖 등지의 좁은 길목을 지켜 한 명을 죽이고 한 명을 사로잡았다.

  4월 11일(5.23) 원주를 점령하고 황강에 머물던 장기렴의 군대가 제천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당시 이강년은 제천의진의 후군장에 임명되어 제천에 머물고 있었는데, 군사를 이끌고 출진하여 관군에 대적하였다. 제천성을 사이에 두고 관군과 의병은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34) 제천전투 초기에 의병은 관군에게 큰 피해를 주며 기세를 올리기도 했다.

  4월 13일(5.26) 갑자기 몰아치는 악천후로 의병은 화승총을 사용할 수 없어 백병전을 감행하는 용감성을 보였다. 결국 제천의진은 제천을 빼앗기고 참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중군장 안승우와 종사 홍사구가 전사하였다.35) 4월 16일 우군장 이강년과 후군장 신지수가 제천을 야습하여 탈환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단양으로 물러나고 말았다.36)

  제천전투 이후 제천의진은 단양‧풍기‧정선 등지를 거쳐 만주로 이동하였다. 이강년도 제천의진의 뒤를 따라 5월 23일 영월에 도착하였으나, 더 이상 형세가 진전될 수 없음을 알고 태백산으로 들어가 7월 28일(이상陰曆) 의병을 해산하였다. 그 후 이강년은 문경으로 돌아와 후일을 기약하며 은거하였다.

 

  2. 중·후기 의병

  1) 중·후기 의병의 전개

  1904년 2월 23일(이하 陽曆) 한일의정서와 8월 22일 한일협약에 따라 내정간섭을 위한 고문정치가 강요되었다. 이에 따라 전기의병이 해산된 1896년부터 화적火賊‧동비東匪‧활빈당活貧黨 등으로 표현되는 소위 농민군 집단은 1905년 5월경부터 의병으로 전환되었다. 그 대표적인 의병으로1905년 9월(음력 7월) 강원도 주천에서 원용팔元容八(본명 元容錫)이 창의하였고, 충북 단양에서는 정운경鄭雲慶이 창의하였으며, 9월경에는 경북 영양에서 김도현金道鉉이 봉기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박제순-하야시 강제합의(을사조약)를 계기로 1906년부터 민종식閔宗植‧정용기鄭鏞基‧최익현崔益鉉‧신돌석申乭石‧김도현金道鉉 등 이 봉기하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정환직鄭煥直‧고광순高光洵‧백락구白樂龜(일명 樂九)‧박장호朴長浩 등이 거의하여 1907년 8월 의병항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에 따른 광무황제의 퇴위, 군대해산 등 일련의 망국사태가 이어지면서 이강년李康秊‧민긍호閔肯鎬‧허위許蔿‧김동신金東臣‧이인영李麟榮‧기삼연奇三衍‧이석용李錫庸‧이진용李鎭龍 등이 조직한 대규모의 연합의진이 전국 각처에서 결성되었다.37) 이것은 군대해산에 반대한 군인들의 봉기와 의병으로의 합류에 따른 의병항쟁의 큰 전환점이었다.

  박제순-하야시 강제합의서 (을사조약) 박제순-하야시 강제합의 이후 의병봉기의 확산 속에서 경상북도 지방의 의병항쟁은 매우 활발하였다. 신돌석은 1906년 3월부터 1908년 11월까지 경상북도 북부와 강원도 남부의 접경지대인 일월산과 동해안 일대를 무대로 활약하였다.38) 산남의진山南義陣의 정용기‧정환직‧최세윤崔世允은 1906년 3월부터 1908년 7월까지 경북의 영천‧청송‧영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39) 그리고 이강년은 1907년 4월 재기하여 1908년 7월까지 경상북도‧충청북도‧강원도의 3도 접경지대를 중심으로 문경‧단양‧영춘‧영월 사이의 약 200리 선을 주축으로 한 소백산맥과 차령산맥 사이, 소백산맥 북쪽을 주 전투장으로 활약하였다.40) 특히 신돌석의진은 이강년의진이나 산남의진과 밀접한 연계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동의 백남규白南奎(안동분견대 부위)‧이광렬李光烈‧류시연柳時淵 등이 봉기하여 영양‧청송‧안동‧의성 일대에서 활동하였고, 예천의 장윤덕張胤德‧영양의 김도현金道鉉‧진보의 이하현李夏鉉 등도 봉기하였다.41) 그 외에 김상태金尙台(소백산 일대)‧박연백朴淵伯(의성 일대)‧이춘양李春陽‧박인화朴仁和‧강진선姜進善 등이 경북 북부지방, 권병호權炳瑚는 경산‧청도 등 경북 남부지방에서 활동하였다.

  한편, 경상남도에서는 1907년 안의에서 봉기한 문태수文泰洙가 덕유산을 근거로 영남‧호남‧호서에 걸쳐 활동하였다. 그 외에도 가야산과 지리산을 근거로 맹활약한 서명국徐明國, 1908년 양산의 서병희徐炳熙, 1909년 거창의 전성범全聖範, 산청의 박동의朴東義, 하동의 이백응李白應, 진주의 유종환兪宗煥, 함양의 권석도權錫燾‧석상룡石祥龍 등이 봉기하였다.42) 그리고 을미의병 때 전라도에서 창의한 김동신金東臣도 재기하여 지리산을 중심으로 경남 서부지방에서 활동하였다.43)

  경상도에서 후기의병이 일어난 경위는 전기의병과 사뭇 달랐다. 전기 의병은 보수적인 유림사회가 가지고 있는 지연적‧학문적‧혈연적인 전통 위에서 전개되었는 데 비해, 후기의병은 지연적 기반 위에 보다 광범한 신분계층이 참여하고 있다. 즉 초기 창의단계에 있어서 전기의병은 영남지방의 보수적인 유림사회의 조직기반인 향교 등을 통해 광범한 연합의진으로 결성되고 있으나, 후기의병은 지역을 단위로 하여 독립된 조직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1906년 청송‧의성‧안동‧진보‧의흥향교가 창의통문을 발하여 의병 봉기를 고무하고 있는 예가 있기는 하지만,44)전기의병 때처럼 광범한 양반유생의 지지 속에 봉기한 것이 아니라 유능한 의병장을 중심으로 해산 군인 등 다양한 신분계층이 의병을 주도하였다.

  경상도 지방의 후기의병은 전기의병에서 활동하였던 의병장들의 항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전기의병 때 문경에서 창의하여 호좌의진湖左義陣에서도 활동한 이강년,45) 김산의진金山義陣의 허위‧양제안梁濟安,46) 안동의진의 이상룡李相龍‧류시연柳時淵, 영양의진의 김도현,47) 진주의진의 노응규盧應奎,48) 영해출신으로 영덕의진에 참가했던 신돌석申乭石,49) 흥해 출신으로 안동의진에 참여했던 최세윤崔世允50) 등이 창의의 기치를 들고 있다.

  즉 허위는 1907년 경기도 연천에서 다시 일어났고, 양제안은 민종식의 홍주의진에 참여했다가 산남의진에 참여하였다. 이상룡은 박경종과 가야산에 군사기지의 축조를 계획하였으며, 류시연은 청량산에서 창의하여 신돌석‧김도현‧이강년 등과 연결하여 활동하였다. 을미의병 때 안의에서 창의하였던 진주의진의 노응규는 1906년 말 충청도 황간에서 재기하였다.51)

  또 신돌석은 영덕에서 창의하였고, 최세윤은 산남의진에 참여하였고, 김도현은 영양에서 창의하였다. 그리고 후기의병에서 비로소 창의한 의병장은 정환직‧정용기 부자, 진보의 이하현 등이 있었다.

  1905년 9월 창의한 김도현을 필두로 전개된 후기의병이 본격화된 것은 1906년 음력 5월 5일 당시 상경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던 허위‧이강년‧여중룡‧이병구‧우용택 등이 창의를 모의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허위는 안동을 중심으로 강원도 일대, 이강년은 상주를 중심으로 충청도 일대, 여중룡은 김산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를 거쳐 의병장 최익현과 합세하여 경성에 모여 통감부를 격파하기로 맹서하고 창의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52) 이리하여 여중룡은 향리인 김산에서 창의를 계획하였으나 병으로 실패하였고, 허위는 경기도에서, 이강년은 문경에서 창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허위의 경우, 그는 경기도 연천에서 창의하면서 정환직‧정용기 부자를 독려하여 영천지방에서 창의하여 산남의진을 결성토록 하였고,53) 윤정의와 서병희를 독려하여 청도‧경주‧양산 등 경남‧북 접경지대에서 창의토록 하여, 이들을 연결하여 의진간의 연합작전을 계획하였다.54)

  이와 같이 의진간의 연합작전이나 통합의진의 구상은 창의 초기부터 제기된 것이었다. 또 이러한 구상은 의병의 열기가 확산되면서 더욱 구체화 되었다. 산남의진의 경우 정환직이나 정용기는 창의 초부터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기 위한 북상계획을 실현한다는 목표 하에 작전을 수립하였다.55)

  이강년의진의 경우에는 이인영李麟榮의 통문을 받고 북상을 시도하였으나 일본군의 저지로 실패하였다.56) 또 을미의병 때 김산의진에 참여한 바 있는 양제안은 산남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면서 덕유산을 중심으로 우로는 문태수文泰洙와 연결하여 지리산을 장악하고, 좌로는 이강년과 연결하여 조령‧태백산‧소백산 일대를 장악하는 유격전을 구상하기도 하였다.57)

  따라서 후기의병사에 있어서 가장 주목되는 서울진공을 목표로 한 13도 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연합진영聯合陣營 결성은 창의 초기부터 각 의병장들이 구상한 의진 상호간의 연합이나 제휴의 결실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그러나 후기의병에 있어서 커다란 분수령이 되는 것은 1907년 7월 19일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와 7월 31일 한국 군대의 해산이다. 무엇보다 일본군이 의병 탄압을 전담하고 해산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함으로써 의진은 종래 관군을 상대로 했던 소극적이며 미숙한 항전방법을 탈피하였다.

  특히 1907년 이후 일본군의 의병탄압작전이 광범하게 전개되면서 대부대를 이끌고 활동하던 경상도의 이강년‧신돌석‧최세윤, 전라도의 고광순 등이 전사하자 예하 부대장들은 독립된 소규모의 부대를 이끌고 게릴라적인 유격전을 통해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 대표적인 의병은 김상태(풍기)‧이춘양(봉화)‧변학기(봉화)‧박인화(예안)‧강진선(청송)‧서종락(청송)‧박연백(의성)‧전성범(거창)‧유종환‧권석도 등이다.

  중‧후기 의병항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문경지역에서는 이강년‧이인영‧신태식 등이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이끌고 활동하였다. 을미의병 때 문경에서 창의하였던 이강년은 1907년 4월 재기하여 1908년 7월까지 문경‧단양‧영춘‧영월 등 경상북도‧충청북도‧강원도의 3도 접경지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경기도 여주출신으로 문경에 살고 있던 이인영은 1907년 6월 관동창의대장에 취임하여 이강년과 합세하여 활동하던 중 1907년 11월 13도창의군의 총대장으로 서울진공작전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신태식은 1907년 8월 단양에서 창의하여 한때 이강년부대와 합세하기도 하였으나 독자적인 의병투쟁을 전개하였고,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을 조직하여 투쟁하기도 하였다. 그 외 문경출신의 다수 인사들이 이강년부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2) 이강년부대의 창의와 투쟁

  (1) 이강년부대의 창의와 제천·충주전투

    ① 이강년부대의 창의 경위

  을미의병 해산 이후 이강년은 갈 곳 없는 군사들과 가족을 거느리고 소백산중의 단양 금채동金采洞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뿐만 아니라 1897년 요동으로 망명하였던 류인석을 찾아가 존왕양이의 위정척사사상을 한층 심화시켜 학문적으로 성숙해졌고, 1899년 화서문집華西文集의 간행에 참여하여 그 문인들과 교유관계를 넓히면서 재기를 준비하였다.58)

  1905년 8월 원용팔이 봉기하였을 때 그는 신병으로 참여하지 못하였고,59) 원용팔 피체 이후에는 단양에서 창의한 정운경이 참여를 요청하였으나 참여하지 못했다.60) 왜냐하면 각처 의병들이 분산적이었고, 무기와 훈련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을사조약 이후 을미의병에 참여 했던 의병장들이 전국 각처에서 창의의 기치를 올리기 시작하자 이강년도 1906년 2월까지 강원‧충북‧경북‧경기도를 전전하며 의병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여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

  1906년 5월 5일 이강년은 허위‧여중룡‧우용택禹龍澤‧이병구李炳九 등과 서울의 혜화동에서 회합하여 창의를 모색하였다. 이 모임에서 허위는 안동을 중심으로 강원도 일대, 이강년은 상주를 중심으로 충청도 일대, 그리고 여중룡은 김산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를 거쳐 최익현과 합세하여 경성에 모여 통감부를 격파하기로 맹서하고 창의를 준비하였다.61) 이리하여 여중룡은 1906년 8월 김산에서 창의를 모색하였으나 병으로 실패하였고, 허위는 1907년 9월 경기도 연천에서 창의하였으며, 이강년은 1907년 5월 제천에서 창의하였다.

    ② 용소동 전투

1907년 5월 11일(음 3.29) 이강년은 제천에서 군사를 일으켜 다시 창의하였다. 그는 을미의병 이후 영춘지역에 은거하며, 제천의 박약재를 중심으로 창의 계획을 구체화시켰다. 우선 지평 상동리의 안기영安基榮의 집에 유숙하면서 안성해安成海와 함께 청풍출신의 포군 6명을 인솔하고 원주‧횡성‧강릉 등지에서 무기와 탄약, 그리고 뜻을 같이 할 동지를 모으며 전전하였다. 또 횡성의 봉복사에 머물던 중 안동분견대 부위출신 백남규白南奎를 영입하였다.

  1907년 5월 27일 제천으로 돌아오던 이강년은 영춘 용소동에서 일본 헌병의 야습을 받아 참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들은 흩어지고 운강 자신도 왼쪽 뺨, 오른쪽 팔과 손에 큰 부상을 입었다. 이때의 상황을『운강 선생창의일록雲崗先生倡義日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잠시 동안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영춘 순검이 왜병을 대동하고 습격해오니 함께 자던 여러 장수들이 모두 흩어지고 포졸 역시 그러하였다. 공은 적의 수가 많지 않을 것으로 짐작하고 칼을 들고 뛰어나가 손을 쓰려 하는 찰나 적이 휘두른 칼에 공의 왼쪽 뺨, 오른팔과 오른손에 상처를 입었고, 적도 역시 거의 죽게 되었는데, 순검은 조준원 趙浚元이었다. 왜병 한명도 역시 칼에 맞아 허리를 상하고 실탄을 재어 쏘려 하였으나 발사되지 않으니 하늘이 도운 일이었다. 적이 무서워 물러나고 공은 천천히 혼자 나아가니 적은 더욱 겁을 내어 감히 따라오지 못하였다.62)

  용소동전투 후 이강년은 김상태‧백남규 등과 함께 영춘‧청풍‧연풍 등지를 전전하며 나곡羅谷의 정두용鄭斗容, 억수동億水洞의 이진원李進源, 한양漢陽의 신태원申泰元, 연풍延豊의 조동기趙東驥의 집에서 상처를 치료하였다.63)

    ③ 제천전투

  1907년 7월 19일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와 7월 31일 한국 군대의 해산으로 후기의병은 커다란 분수령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소위 정미의병丁未義兵이다. 초대 통감 이등박문은 소위 ‘폭도진압暴徒鎭壓을 위해 7월 19일 밤부터 조선주차군사령관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의 예하부대를 출동시켜 탄압체제를 강화하고, 8월 1일부터 9월 3일에 걸쳐 조선군을 해산하였다. 군대해산을 계기로 8월 1일 서울시위대, 8월 6일 원주진위대, 8월 9일 강화도 분견대 등에서 봉기하여 모두 의병에 합류함으로써 의병항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1907년 8월 6일 원주진위대의 봉기 이후 의병항쟁은 1907년 10월경까지 강원도를 중심으로 충북‧경기도 동부‧경상도 북부지역에 이르기까지 파급되었다. 원주진위대의 대대장 홍유형洪裕馨이 군대해산의 명령을 전달받기 위해 서울에 소집된 사이에 대대장 대리 김덕제金德濟와 정교正校 민긍호閔肯鎬는 군대를 거느리고 원주 시민과 함께 봉기하여 우편국‧경찰분서‧군아 등을 습격하고 무기고를 점령하여 총기와 탄약을 확보하였다.

  원주진위대는 민긍호부대와 김덕제부대로 나뉘어 강원도‧충청도‧경기도 동부 등지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민긍호가 거느린 의병부대는 약 1,000명으로 충주‧제천‧죽산‧장호원‧여주‧홍천 방면으로 진출하여 활동하였고, 김덕제가 거느린 의병부대는 평창‧강릉‧양양‧간성‧홍천‧흡곡 등지로 진출하여 활동하였다.64)

  이강년은 군대해산 후 원주진위대가 봉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재기하였다. 우선 그는 무기와 군사를 모집하는 한편, 모집한 무기를 배향산拜向山에 은닉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강년은 광무황제의 밀지를 받았다.

  오호라! 나의 죄악이 커서 황천皇天이 돕지 않노라. 이로 말미암아 강린强隣이 틈을 엿보고 역신이 정권을 농락하여 4천년 종사와 삼천리강토가 하루아침에 오랑캐의 땅이 되었노라. 오직 나 하나의 목숨은 오히려 애석할 것이 없으나 오직 종사와 생령을 생각하면 애통하도다. 선전宣傳 이강년李康秊으로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삼아 칠로七路에 보내니 양가자제良家子才로 각기 의병을 일으키고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인부印符을 새겨 종사케 하노라. 만약 명령에 복종치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觀察使‧수령守令은 먼저 참하고 파출罷出하여 처분하라. 기보畿堡를 보존하는 한 가닥 희망은 사직社稷에 죽는데 달렸노라. 새서璽書를 비밀리 보내니 이로써 알아 모두 거행하라.光武 十一年 七月 日 御璽

  이강년은 8월 10일 배향산에서 병력을 이끌고 8월 13일 제천으로 들어가 주천酒泉에서 들어온 민긍호부대와 합류하여 의진을 재편성하였다.

  8월 15일 일본군이 제천으로 들어온다는 첩보를 접한 이강년은 민긍호부대와 함께 연합부대를 편성하여 제천 천남에서 야영중인 일본군을 급습하였다. 의병의 양면 공격을 받은 1개 소대병력의 일본군은 대패하여 충주로 도망하였다. 천남전투에서 의병은 일본군 사살 5명, 부상 13명의 전과를 거두었다.65)

    ④ 충주전투

  제천 천남에서 대승을 거둔 이강년‧민긍호부대의 연합의진은 8월 19일 주천酒泉으로 이동하여 부대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주천에 모인 40여 의진의 추대로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이 된 이강년은 의진을 새롭게 편성하였다. 그 진용은 다음과 같다.66)

◦ 도창의대장 이강년李康秊     ◦ 우군선봉장 권용일權用佾

◦ 중 군 장 김상태金相台        ◦ 후 군 장 신태원申泰元

◦ 좌 선봉장 하한서河漢瑞       ◦ 좌 익 장 김영식金永軾

◦ 우 선봉장 백남규白南奎       ◦ 별 진 장 김상한金商翰

◦ 전 군 장 윤기영尹基榮        ◦ 우 익 장 정연철鄭淵錣

◦ 좌 군 장 이용로李鏞魯        ◦ 우 군 장 변학기邊鶴基

◦ 우 군 장 이중봉李重鳳        ◦ 독 전 장 윤용구尹容九

◦ 감 군 장 이세영李世榮        ◦ 소 모 장 박우영朴右泳

◦ 총 독 장 이만원李萬源        ◦ 장 의 장 이명상李明相

◦ 사서(참모) 강순희姜順熙


  이강년은 충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진용을 정비하는 한편, 관동 및 제천‧청풍‧단양‧영춘 등 4군 의병부대에 격문을 보내어 충주공격에 대해 협공을 요청하였다. 8월 23일 감행된 충주성 공격은 이강년이 충주성의 우측을 맡고, 민긍호는 충주성의 좌측을 맡아 포위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민긍호부대가 충주로 가는 도중 박달령에서 적을 만나 패배함으로써 약속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고 말았다.

  충주성 공격에 실패한 이강년부대는 단양을 거쳐 풍기로 남하하였다. 풍기에서 다시 적성赤城을 넘어 문경으로 들어간 이강년부대는 군사를 모집하고 군비를 조달하며 조령鳥嶺과 이화령梨花嶺을 지키면서 부대의 활동거점을 마련하였다.67)

  (2) 이강년부대의 문경진출과 전투

    ① 이강년부대의 문경진출

  1907년 8월 23일 충주성 공략에 실패한 이강년부대는 태장동台長洞을 거쳐 불당곡 이주승의 집에 이르러 숙박하였다. 그리고 증산‧월악리‧억수동‧용하동‧불억령‧단양 궁동‧상선암‧신구동‧풍기 도촌‧명봉사‧은풍‧문경 적성 평촌‧이정‧김용사‧용연‧당포를 거쳐 9월 7일 문경읍을 공략하여 장악하였다.68)

  문경읍에 주둔한 이강년은 독전장 이만원과 권용일을 배향산으로 보내 묻어둔 탄약을 운반하여 오게 하여 부족한 탄약을 보충하였다. 그리고 여주의병장 김현규金賢圭과 청풍의병장 조동교趙東敎를 만나 합류하였으며, 원주의병장 이인영李麟榮도 합류하였다. 더욱이 주목되는 것은 거창출신의 선비 차은표車隱豹, 혹 차성충車成忠이 운강을 방문한 것이다. 당시 차은표는 군대해산 이후 전국적으로 창의의 기치가 오르기 시작하자 안동의 이상룡李相龍, 예천의 이규홍李圭弘 등과 창의를 모색하고 있었다. 마침 호서에서 창의한 이강년부대가 문경으로 들어오자 이규홍을 방문하고 있던 차은표가 이강년을 방문하였던 것이다.69)

  당시 문경지역은 8월 11일 문경진위대聞慶鎭衛隊의 해산과 더불어 반일적인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는 상황이었다.70) 이강년부대가 문경지역을 장악하고 활동하자 경무분견소 및 우편국 등의 일본인들은 일본군 병참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함창으로 피신하였다. 그렇지만 이강년부대는 충주성 전투 이후 문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이다치지대[足達支隊]의 끈질긴 추격을 받았고, 이다치지대가 단양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그 배후를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다치지대는 제천전투 이후 8월 18일 서울에서 출동하였던 일본군이다. 즉 일본군 보병 51연대 제2대대장 이다치[足達] 중좌가 제2대대와 52연대 제2중대, 기병 제17연대의 1개 소대, 공병 제13대대의 1개 소대로 지대를 편성하고, 8월 21일 충주를 거쳐 23일 제천에 도착하여 제천읍을 짓밟았다. 그리고 충주성전투 이후 패퇴하고 있던 이강년부대를 단양까지 추격하며 압박해 오고 있었다.

  문경에 주둔하고 있던 이강년부대는 단양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강년은 후군장 신태원에게 군사 6초를 주어 노고성老姑城을 지키게 하고, 좌익장 김영식과 참모 이정래에게 정병 20명을 뽑아 주어 이화령梨花嶺을 파수하고, 천보락에게 포수 30명을 주어 관음원觀音院을 파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는 중군 김상태와 신원으로 진군하여 모항령毛項嶺을 지키면서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71)

  이강년부대가 문경을 장악하자 조선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는 남부수비관구사령관에게 명령하여 제14연대장 기구찌[菊池主殿] 대좌에게 보병 제14연대를 주력으로 하는 5종대의 토벌대를 편성하여 의병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제1종대는 보병 제14연대 중대장 등전藤田 대위가 이끌고 영천‧청송‧진보‧영양‧봉화, 제2종대는 보병 제14연대장 정택井澤 소좌가 이끌고 안동‧봉화‧풍기‧예천, 제3종대는 보병 제14연대장 국지菊池 대좌가 이끌고 해평‧낙동‧태봉‧문경, 제4종대는 보병 제14연대 중대장 수야[水野寺實] 대위가 이끌고 옥산‧상주‧함창‧문경‧상주‧태봉, 제5종대는 대전에 있는 보병 제47연대장 생전목신生田目新 중좌가 이끌고 옥천‧관기‧화령‧청계사‧함창으로 진출하였다.72)

  이리하여 단양에 주둔하고 있던 이다치지대[足達支隊]는 9월 9일 문경지역을 북쪽에서 공략하여 이강년부대와 합세하고 있던 이인영부대와 조령에서 접전하였으며, 한편 제14연대장 기구찌[菊池] 대좌는 제3종대를 이끌고 해평‧낙동‧태봉을 경유하여 9월 12일 문경으로 진출하였고, 제47 연대장 생전목신 중좌가 인솔하는 제5종대도 13일 함창에 도착하였다.73)

  이강년부대는 남북 양방면에서 일본군의 협격을 받으며 9월 9일부터 14일까지 문경지역에서 조령전투와 갈평전투, 그리고 적성전투를 수행하였다.

    ② 조령전투

  이강년부대가 문경지역에서 벌인 최초의 전투는 이강년부대와 연합했던 원주의병장 이인영부대가 수안보에 주둔하고 있던 이다치지대[足達支隊] 소속 보병 제51연대 제8중대 1개 소대와 벌인 조령전투였다.

  1907년 9월 9일 오전 2시부터 전개된 이 전투에서 조령관문을 지키던 원주의병장 이인영의 부대가 크게 패하였다. 이때 조동교부대와 김현규부대는 이인영의 원주의병이 기지고 있던 신식무기를 빼앗아 이동하고, 이인영부대로 하여금 관문을 지키게 했기 때문이다. 『운강선생창의일록雲崗先生倡義日錄』에서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동교가 충주의 적을 함께 토벌하기로 약속하고 먼저 조령의 파수병을 철수한 것과 김현규가 탄약을 청구하면서 함께 문경을 지키자고 약속한 것은 모두 사람을 속이는 간계였다. 이리하여 이인영의 조령 파수병이 성의 문루에 있다가 많은 장졸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 처음 조동교의 군사 30명이 먼저 조령을 지키다가 적이 온다는 말을 듣고 도망해 갔는데, 동교가 그 사실을 숨기고 다른 군사를 유인하여 자기 군사를 대신하게 하였다가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니, 그 적을 피하고 화를 전가한 죄는 주살하고도 남을 것이다. 원주진은 멀리 가버렸으니 조령 파수병으로 죽은 자를 의리상 남의 일로만 보고 있을 수 없으므로 도총독장 이만원과 우선봉 백남규, 좌익장 최용출에게 군사 50명을 거느리고 가서 시체를 거두어 매장하였는데 죽은 자가 32명이다.74)

  앞의 『운강선생창의일록』에서는 32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창의사실기倡義事實記』에서는 5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반면, 일본군 측의 보고에는 즉사자 7명, 부상자 5~6명으로 기록하고 있어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다치지대[足達支隊]에서 안보安保에 파견되어 있는 소대는 폭도의 일부(약 20명)가 조령鳥嶺 관문에 있음을 정탐하여 오늘 오전 2시에 풍요豊饒 소위가 하사 이하 약간 명을 인솔하고 이들 적을 습격하여 거의 전멸시켰음, 적의 즉사자는 7명, 부상자는 5~6명이 되지 않을까 추측됨, 우리 병사 1명이 중상을 입음.75

  이강년부대가 문경지역에 진출하여 조령을 방어하며 일본군의 공격에대비하고 있었으나, 이인영부대는 이다치지대[足達支隊] 소속 보병 제51연대 제8중대의 풍요豊饒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다치지대는 조령 부근의 가옥을 소각하여 의병이 머물지 못하도록 하였다.

    ③ 갈평전투

  이강년부대는 조령전투에서 전사한 군사들의 시체를 거두어 매장한 뒤, 혜국사惠國寺를 거쳐 9월 10일 요성堯城으로 이동하였다. 이강년부대와 연합하였던 여러 의병부대가 말없이 떠나 버렸으므로 적은 병력으로 여러 곳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성에 도착한 이강년부대는 군사들에게 점심을 먹이던 중 갈평葛坪에서 포성이 크게 일어나고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는 보고를 받았다.76)

  조령을 지키다가 도망하던 조동교와 김현규부대가 갈평에서 일본군 이다치지대[足達支隊]의 기습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강년은 용연龍淵을 거쳐 갈평으로 군사를 급히 이동하여 이들을 구원하고자 하였다. 이때의 상황을 권용일의 『정미왜란창의록丁未倭亂倡義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제장을 급히 모아 군사를 점고하고 군기를 갖춘 후에 갈평 사실을 탐지하니 적병이 김‧조 양진을 대파하고 민가에 불을 놓아 화광이 충천하고 백성이 어육이 되었다 하거늘 급히 군사를 몰아 용연에 도착하여 우선봉 백남규는 5백군을 거느리고 갈평 남산으로 오르고 좌선봉 하한서는 군사 4백 명을 거느리고 갈평 북편에 매복하고 도선봉 권용일은 1천 군사를 호령하여 갈편 동편에 매복하고 도총독장 이만원은 보수병報讐兵을 급히 몰아 중앙을 엄살掩殺하고 들어가고 선생은 산상에 높이 올라 적세를 탐정하여 독전을 지휘하여 일시에 달려 쳐라 하는 소리 청천백일에 벼락이 떨어지자 사방의 복병장졸이 일시에 달려드니 이 때 마침 적병들은 김‧조 양진을 대파하고 대진이오는 줄은 전연히 모르고 방금 군사를 쉬이는 판인데…. [이하 생략]77)

  조동교‧김현규부대를 대파한 일본군 40여 명이 민가 백여 호를 불태우고 휴식을 취하고 있던 중 이강년부대의 습격을 받았던 것이다. 일본군은 혼비백산하여 많은 군수물자를 버리고 도망쳤고, 의병들은 군수물자를 노획하여 용연으로 돌아왔다.

  9월 10일 전개된 갈평전투에서 이강년부대의 전사자는 3명이었고, 조동교‧김현규부대의 전사자는 수백 명이었다. 그렇지만 의병측의 전과도 상당하여 일본인 순사 3명과 한인 순사 2명을 포살하였다.78) 즉 11일 이강년 부대는 다시 갈평으로 나아가 순검 1명을 총살하고, 당포唐浦 방면으로 달아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괴성槐城에서 일본군 과전삼태랑戈田三太郞의 목을 베었다. 또 후군장 신태원이 일본군 1명을 베고 총과 환도를 노획하였다.

  9월 12일 이강년부대는 대승사로 진영을 옮겼고, 일본군 1명이 도망하다가 언덕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용연동의 집강 김홍규金鴻圭의 보고를 듣고 그 머리를 베어 오기도 하였다.79)

    ④ 갈평전투

  적성전투는 9월 14일 이강년부대의 후군장 신태원부대 6초 약 70여 명이 일본군 1개 소대와 전투를 벌여 신태원부대가 참패한 전투이다.

  갈평전투 이후 13일 대승사를 출발한 이강년부대는 적성을 거쳐 14일 명봉사로 이동하여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 후 후군장 신태원은 각처에 흩어진 군졸을 소모하기 위해 군사 6초를 거느리고 적성으로 들어갔고, 이강년부대는 명봉사를 출발하여 월감月鑑을 지나 상백上白으로 이동하여 주둔하고 있던 중, 후군장 신태원부대의 패배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80)

  당시 일본군 토벌대 제3종대는 기쿠치[菊池] 대좌의 지휘 하에 문경 부근에서 숙박하고 14일 갈평을 거쳐 대승사로 나아가 이강년부대를 추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생전목신生田目新 중좌가 지휘하는 토벌대 제4종대는 13일 오후 함창에 도착하여 제3종대와 합류하였다. 14일 제4종대의 송야松野대위가 적성으로 들어가 신태원이 거느린 의병과 접전하여 크게 승리하였던 것이다.

  적성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의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와 군경의 보고서에서는 각각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국지종대菊池縱隊는 함창에서 수야종대水野縱隊와 합세하여 13일 문경 부근에서 숙영하고 폭도가 대성사大成寺 및 김룡사金龍寺 부근에 집합한 것을 알고 불파소좌不破少佐에게 보병 1중대, 기관총 2를 주어 그것을 소탕시키게 하였다. 불파소좌不破少佐의 일대는 대성사와 김룡사 부근의 폭도 약간을 소탕하였으나 그 대부분은 이미 영천榮川(영주)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태봉에 있던 송야중대松野中隊는 삼해리三害里를 경유 대성사大成寺 부근을 정찰 중 적성 부근에 폭도가 집합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고 14일 적성시장의 동서남 3방면에서 촌락을 포위하고 돌격을 하자 폭도는 당황하여 시장 동북방 고지로 퇴각, 약간 저항을 하였으나 우리의 맹렬한 사격에 의하여 사상 11명을 유기하고 드디어 영천榮川(영주) 방면으로 궤주하였다. 이 폭도는 이강년李康秊이 인솔하는 것으로 반란병이 다수 섞여 있다.81)

1. 경상북도 적성赤城의 폭도를 토벌하기 위해 전진하고 있는 보병 14연대의 송야松野대위가 인솔하는 소대는 14일 적성에서 폭도 약 1백 명을 급습하여 그 가운데 15명을 죽이고 9명을 부상시켜 궤란시키고 또한 이들을 석곡石谷까지 추적함. 우리측의 손해는 없음. 동 소대는 15일 오후 8시에 문경으로 귀환했음.82)

  반면 권용일의 『정미왜란창의록丁未倭亂倡義錄』에서는 각각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익일에 명봉사로 행군하여 들어가니 노소 제승이 다 나와 환영하고 그간 전고를 못내 치하하더라. 이때 후군장 신태원申泰元으로 군사 6초를 주어 적성赤城 등지로 산재한 군졸을 소모召募차로 보내고 익일 행군하여 상백동上白洞에 도착하니 적성 인민이 와서 보고를 하되 후군장 신태원이 적성에 도착하여 적병과 전쟁이 되어 대패大敗를 보고 군졸이 많이 상하였다고 하거늘 도총독이만원과 천보락을 보내어 시신 36체를 장사하고 돌아오다.83)

  위의 기록에 의하면, 9월 14일 전개된 적성전투는 일본군 1개 소대와 이강년부대의 후군장 신태원부대 6초 약 70여 명이 벌인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사상자 없이 대승을 거두었고, 신태원부대는 전사 15명, 부상 9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권용일의 『정미왜란창의록丁未倭亂倡義錄』이나 운강선생창의일록雲崗先生倡義日錄에서는 전사한 의병 36명이라 기록하고 있어 일본군경의 기록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이강년은 좌익장 천보락千普洛과 총독장 이만원李萬源을 보내 전사한 의병의 시신을 수습하여 예로써 장사를 지냈다. 이와 같이 적성전투에서 다수의 의병이 전사하였지만, 후군장 신태원申泰元을 비롯하여 장치문張致文‧장복흥張復興‧장해진張海鎭‧장경한張景漢‧신병선申秉善 등 6인의 이름과 무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84)

  적성전투에서 패배한 이강년부대는 배음치背陰峙와 단양의 성금령星金嶺을 넘어 단양 영춘지역으로 나아갔다. 이강년부대가 물러난 뒤 문경을 비롯하여 상주‧예천‧영주지역은 일본군이 장악하였고, 일본군은 의병을 탄압한다는 명목으로 각처에서 약탈을 자행하였다.

  (3) 이강년부대의 호좌지역 활동과 죽령·순흥전투

    ① 이강년부대의 호좌지역 활동

  이강년부대는 1907년 8월 하순 문경지역을 장악한 뒤 9월 9일 조령전투와 9월 10일 갈평전투, 그리고 9월 14일 적성전투 후 충북 단양으로 이동하였다. 1907년 9월 18일 단양을 거쳐 영춘으로 들어가자 단양丹陽 의병장 이명상李明相, 삼척에서 들어온 원건상元建常이 합류하여 군세를 크게 떨쳤다.85) 이리하여 1907년 9월 이후 이강년부대는 단양‧영춘지역 전투(9.25), 영월지역 전투(10.4), 제천‧괴산‧연풍지역 전투(10.12), 원주 누치전투(10.22) 등을 치루었고, 11월 이후 죽령‧순흥지역 전투(11.2~11.15), 그리고 12월 이후 단양 복상동전투(12.16), 영원 전동전투(12.25) 등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11월 16일 이강년부대는 영월 거석리巨石里에서 유진하며, 다음과 같이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 도창의대장 이강년李康秊    ◦ 우군선봉장 권용일權用佾

◦ 중 군 장 김상태金相台       ◦ 후 군 장 신태원申泰元

◦ 좌 선봉장 하한서河漢瑞      ◦ 좌 익 장 김영식金永軾

◦ 우 선봉장 백남규白南奎      ◦ 별 진 장 김상한金商翰

◦ 전 군 장 윤기영尹基榮       ◦ 우 익 장 정연철鄭淵錣

◦ 좌 군 장 이용로李鏞魯       ◦ 우 군 장 변학기邊鶴基

◦ 우 군 장 이중봉李重鳳       ◦ 독 전 장 윤용구尹容九

◦ 감 군 장 이세영李世榮       ◦ 소 모 장 박우영朴右泳

◦ 총 독 장 이만원李萬源       ◦ 장 의 장 이명상李明相

◦ 사서(참모) 강순희姜順熙


  12월 말 이강년은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 이인영李麟榮으로부터 경기도 양주로 병력을 집결하라는 통문을 받고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북상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격으로 용소동龍沼洞 일대에서 1월 한 달 이상을 지체함으로써 연합의진에는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86)

  그 뒤 이강년부대는 강원도 지역으로 이동하여, 1908년 4월 낭천狼川‧춘천春川‧인제麟蹄‧간성杆城‧양양襄陽‧강릉江陵 등지에서 일본군과 산악전을 전개하며, 군비와 군사를 강화하였다.

    ② 갈평전투

  죽령‧순흥전투는 이강년부대가 1907년 11월 3일부터 11월 12일까지 소백산맥 죽령 일원에서 전개한 죽령전투竹嶺戰鬪와 순흥전투順興戰鬪를 말한다.

  이강년부대는 1907년 8월 하순 문경지역을 장악한 뒤 9월 9일 조령전투와 9월 10일 갈평전투, 그리고 9월 14일 적성전투 후 충북 단양으로 이동하였다. 그 뒤 강원도 일원에서 활동하던 이강년부대는 11월 3일 다시 소백산의 죽령으로 들어와 복병전으로 일본군을 공략하여 큰 타격을 주었는데, 이것이 죽령전투竹嶺戰鬪이다. 그러나 원주‧충주의 일본군과 남부수비관구 예하 일본군 주력이 남북에서 협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추위와 굶주림으로 동사자가 나올 만큼 사기가 저하되었으므로 이강년부대는 진용을 정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흥전투는 죽령전투 후 휴식을 취하며 다시 진용을 정비한 이강년부대가 소백산 고치재를 넘어 11월 11일 순흥을 공격한 전투이다. 순흥전투에 관한 『운강선생창의일록』‧《대한매일신보》‧『폭도사편집자료暴徒史編輯資料』등의 자료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무진일戊辰日에 순흥을 습격하였는데 적이 기미를 알고 벌써 달아났다. 그래서 순검의 집 3채를 불태우고 군사를 정돈하여 물러나려 하는데, [중략] 의풍義豊으로 회군하였다.87)《대한매일신보》1907년 11월 15일자 ◦ 十日 午前 八時에 申돌石이 率한 義兵 三百餘名이 奉化郡을 擊하야 官有家屋에 放火하얏는데 榮川郡 守備隊에서 派送한 警官이 急行하였고 李康秊이 率한 義兵 約二百兵과 申돌石의 部下와 合勢하여 永春方面으로부터 順興郡을 襲擊하야 官有家屋 及 民家 一百八十戶를 燒棄하고 更히 永春方面으로 回軍하였는대, 永川郡 守備隊가 追往하나 義兵의 氣勢가 益益 猖獗하므로 奉化順興豊基等郡이 不穩하였다 하고88) ◦ 객년 11월 11일, 거괴 이강년李康秊이 인솔하는 약 3백여 명은 영춘永春 방면에서, 괴수 신돌석申乭石이 인솔하는 약 200여 명은 영월寧越에서 같이 진출하여 순흥順興읍을 습격함에 그 세력 자못 창궐, 전읍을 불살랐다.89)

  앞의 자료를 비교해 보면, 다소 자료상의 차이점은 있으나, 순흥전투는 이강년부대와 신돌석부대가 순흥을 공격하고 영춘지방으로 퇴각한 전투이다. 또 신돌석부대와 이강년부대가 연합작전을 전개하였다는 위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신돌석부대는 11월 10일 봉화를 공격한 뒤, 11월 11일 순흥과 강원도 영춘으로 활동 영역을 점차 확장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순흥전투 후 일본군 남부수비관구 사령관은 대구주둔 보병 14연대 제1대 대장 아카시[赤司] 소좌에게 병력 3개 중대에 기관총 2정을 주어 의병을 토벌하라고 명령하였다.90) 아카시토벌대[赤司討伐隊]는 풍기로 이동하여 부근의 병력을 영주로 집결시켜 영주를 탄압작전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소백산과 일월산을 근거로 활동하고 있던 이강년부대와 신돌석부대, 그리고 강원도 삼척에 주둔하고 있던 민긍호부대를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4) 이강년부대의 경북 북부지역 진출과 전투

    ① 이강년부대의 경북 북부지역 진출

  경북 북부지역에서 전개된 의병부대의 대일항전은 1908년 1월 전국 의병부대의 연합에 의한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하면서 커다란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경북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강원도 남부지역에 걸쳐 활동하던 민긍호부대는 서울진공작전 실패 후 강원도 남부의 영월‧홍천‧원주‧횡성‧울진 일대에서 격렬한 항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08년 2월 강원도 원주 부근의 강림講林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민긍호가 전사한 뒤 변학기 등 예하부대장들이 소부대를 이끌고 활동을 전개하였다.91)

  이강년부대는 1908년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 실패 후 경기도 동북지역인 가평‧포천 등지와 강원도 인제‧강릉‧홍천‧양양 등지를 전전하며 일본군 수비대와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1908년 5월 3일(음 4.4) 이강년부대는 양양 백사장전투 후 태백산맥을 따라 남하하였다.92) 5월 4일 강릉을 거쳐 태백산을 따라 남하하여 영월군 상동면 운기리에 주둔한 이강년부대는 우선봉 백남규白南奎와 군선봉장 권용일權用佾을 만났다. 이 두 의병장은 지난해 영춘전투에서 패한 뒤 이강년이 영‧호남의 소모를 명한 바 있어, 모병한 4천 명의 군사로 서벽에 유진하고 있다가 이강년을 찾아온 것이다. 이리하여 춘양의 서벽으로 이동한 이강년부대는 삼척의 성익현成益鉉‧박흥록朴興錄 부대까지 합류함으로써 태백산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지역의 의병부대를 통합하는 연합의진을 형성하게 되었다.

  당시 이강년부대의 상황을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경상북도 북부에 있는 폭도는 안동安東‧상주尙州‧문경聞慶 등 각 수비대의 압박으로 소백산小白山‧일월산日月山의 산곡험요山谷嶮要의 은신 소굴을 구축하고 때때로 부근 촌락을 약탈하면서 겨우 목숨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5월 상순 강원도 인제麟蹄 부근에서 내려온 이강년李康秊의 무리가 일월산 부근을 배회하면서 은근히 무뢰한無賴漢들을 규합하자 서벽리西碧里‧순흥順興 부근에 숨어 있던 수괴 변학기邊鶴基‧성익현成益鉉‧김상태金相泰‧정경태鄭敬泰‧백남규白南奎‧정연철鄭蓮哲 등이 서로 응하여 봉기, 일시 적세는 극히 강렬하였다.93)

  1908년 5월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에 주둔한 이강년부대는 경북 북부지방의 태백산과 소백산, 그리고 일월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백남규白南奎‧성익현成益顯‧김상태金相泰‧정경태鄭敬泰‧정연철鄭蓮哲 등의 의병부대와 연합의진을 편성하고 일본군에 대응하고 있었다.

  이때 이강년과 함께 활동했던 예하 부대장을 살펴보면 다음 표와 같다.

[표-2] 이강년부대의 예하 의병장 일람

의병장

연령
(1908)

출신지

신분‧경력

활동지역

규모

편 제

주 요 활 동

이강년
李康秊

51

문경

 ∙양반
 ∙武

  (1880)
 ∙宣傳官
 ∙을미의병

 경상‧강원‧
 충청일대

40

여진

∙이강년
(도창의대장)

∙제천전투
∙백담사전투
∙서벽전투
∙내성전투
∙재산전투

변학기
邊鶴基

 

안동

 ∙승려
 ∙구한국

  군 참봉‧

  주사

 봉화‧순흥‧
 삼척‧영월‧
 울진

350

∙변학기
(영남창의대장)
∙홍병팔(副將)
∙박원도(部將)

∙울진경무고문

 분견소습격  

(1907.10.18)
∙이강년과 연

 합조군장

 (1908.3.22)

성익현
成益鉉

 

강원
춘천

∙과객
∙양반

 울진‧삼척‧
 평해‧봉화

350

∙성익현(관동총

 독‧관동창의대

 장)

 

김상태
金相泰
(商台)

1864

1912

충북
영춘
남천

∙양반
∙이강년의진

 충북‧경북‧
 강원

 

∙이강년 사후

 총대장이 되어

 단양일대에서

 활동

∙서벽리전투
∙소백산일대 유

 격전
 (1908 이후)
∙1909.3, 단양

 순사주재소 습

 격

정경태
鄭敬泰

 

대구
춘천
강릉

∙강릉에서
 주막 경영

봉화‧영양

200

∙정경태
(관동창의대장)

 

백남규
白南奎

1884

1970

충북
충주

∙무관학교
∙안동진위대

 순흥‧봉화‧
 안동 등

800

∙이강년의진 우

 선봉장

∙1907, 순흥에

 서 창의
∙1908.3, 서벽

 전투
∙1909, 죽산 피

 체
∙1918, 상해 망

 명 기도,피체

윤국범
尹國範

1883

1911

예천
보문

∙동장

 풍기‧순흥‧
 영천 등

 

∙이강년‧최성천‧

 한명만‧김상태‧

 정경태 등

∙이강년‧최성

 천‧한명만‧김상

 태‧정경태 등
∙이강년의진 참

 여
∙최성천 등과

 자금조달
∙1911.1 피체,

 순국

권용일
權用佾

1883

1971

충북
제천

∙양반

 제천‧문경‧
 단양‧영월

 

∙이강년의진 우

 군선봉‧도선봉

∙1907.6, 이강

 년 의진에 참

 여
∙1908.8, 갈평

 전투
∙만주망명

금달연
琴達淵

1874

1914

순흥

∙양반
∙김낙임과
 창의

 영주‧순흥

 

∙이강년의진‧김

 상태 의병

∙1907, 순흥 헌

 병분견소 공략
∙1907. 이강년

 의 별초종사
∙1908, 김상태

 부대 선봉장

김낙임
金樂任

1881

1914

순흥

∙양반

순흥

 

∙이강년의진

∙이강년의진 군

 자금모집

김상한
金商翰

1842

1917

칠곡

청풍

∙양반
∙전 정언

문경‧단양

700

∙김상한(의병

 장)‧이명상‧이상

 태(소모장)‧이

 춘삼(좌익장)

∙1907, 이강년

 의 별진장
∙1908.9 해산


  이강년부대는 1908년 5월 하순부터 봉화의 서벽전투西碧戰鬪와 내성전투乃城戰鬪, 그리고 재산전투才山戰鬪를 수행하였다.

  일찍이 향교는 척사위정의 진원지로서 1839년 기해사옥己亥邪獄 때 척사 통문이 각지 향교와 서원으로 발송되었고,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시기에는 성주향교를 중심으로 척사론斥邪論이 일어났다. 또 1881년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에서 안동향교는 영남 열읍 유생들의 집결처였으며, 영주향교와 개령향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2) 이것은 향론을 일으키고 통합하는 기능을 향교가 통문을 통해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② 서벽전투

  1908년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 실패 후 이강년부대는 경기도 동북지역 가평‧포천 등지와 강원도 인제‧강릉‧홍천‧양양 등지를 전전하며 일본군 수비대와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1905년 5월 3일 이강년부대는 양양 백사장전투 후 태백산맥을 따라 경상도로 남하하였다.94)

  영월군 상동면 운기리로 남하하여 주둔하고 있던 이강년부대는 우선봉 백남규白南奎와 우군선봉장 권용일權用佾의 방문을 받았다. 이 두 의병장은 이강년이 지난해 영춘전투에서 패한 뒤 영‧호남의 소모를 명한 바 있어, 모병한 4천 군사로 서벽에 유진하고 있다가 상동에 주둔하고 있는 이강년을 찾아온 것이다.

  이리하여 서벽으로 이동한 이강년부대는 삼척의 성익현成益鉉‧박흥록朴興錄 부대까지 합류함으로써 태백산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지역의 의병부대를 통합하는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당시 이강년부대의 상황을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경상북도 북부에 있는 폭도는 안동安東‧상주尙州‧문경聞慶 등 각 수비대의 압박으로 소백산小白山‧일월산日月山의 산곡험요山谷嶮要의 은신 소굴을 구축하고 때때로 부근 촌락을 약탈하면서 겨우 목숨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5월 상순 강원도 인제麟蹄부근에서 내려온 이강년李康秊의 무리가 일월산 부근을 배회하면서 은근히 무뢰한無賴漢들을 규합하자 서벽리西碧里‧순흥順興 부근에 숨어 있던 수괴 변학기邊鶴基‧성익현成益鉉‧김상태金相泰‧정경태鄭敬泰‧백남규白南奎‧정연철鄭蓮哲 등이 서로 응하여 봉기, 일시 적세는 극히 강렬하였다.95)

  당시 봉화순사주재소와 영천경찰분서榮川警察分署의 보고서에 따르면, 1908년 5월 15일 일본군은 서벽리에 주둔하고 있는 의병 약 500명이 5월 19일경 봉화를 습격하고 20일에는 영주를 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96) 이에 영천수비대는 풍기분견소와 주재소에 응원을 요청하고, 봉화헌병소에서도 안동수비대에 응원대를 요청하였다. 곧이어 5월 16일 영천 수비대는 하사 이하 4명과 순사 6명(한인 순사 2명), 그리고 통역 1명을 파견하였다.97)

  이강년부대는 도선봉 백남규白南奎‧선봉 권용일權用佾‧우군장 변학기邊鶴基로 하여금 좁은 목에 매복하게 한 다음, 도총 이만원李萬源과 함께 3백명을 거느리고 직접 중군이 되어 세 길로 나뉘어서 대기하였다.98) 권용일의 『정미왜란창의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선생이 삼척 창의장 성익현을 불러 동구에 매복하게 시키더니 홀연 보초병이 급히 보報하되 ‘대구 적 수 천명이 들어오는데 십리 밖에 이르렀다.’허거늘, 선생이 제장을 급히 불러 권용일‧백남규는 각기 군사 일천 명씩 거느리고 적병이 들어오는 정면 좌우에 매복시키고 삼척 선봉 김상인金相寅과 박흥록朴興錄으로 삼척병 천여 명을 데리고 서벽 후록 산상에 매복시키며, 이만원李萬源‧변학기邊鶴基는 5백군씩 거느리고 좌우익처에 복병을 숨기고, 선생은 하선봉과 여재 장병을 거느리고 산상에 올라 기치를 세우고 홀기를 둘러 적병 오는 것을 암호로 가르치게 하고 다 각기 방위를 정하고 적병 오기를 고대하더니 불구에 적병이 과연 의심없이 달려 들어오는데…. [이하 생략]99)  

  5월 17일 새벽 4시 영천수비대는 봉화 오록에서 주실령을 넘어 두내리斗內里를 경유하여 서벽리로 들어가려 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이강년부대는 서벽리 동쪽의 골짜기 입구에서 영천수비대를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서벽전투는 5월 17일 새벽 4시부터 시작되었다.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와 일본 군경의 정보보고서를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5월 16일 영천榮川수비대장은 정찰을 위하여 하사 4명과 순사 6명을 서벽리西碧里로 파견하였다. 이 정찰대는 17일 오전 4시 서벽리 동방 약 10리 지점인 곡구谷口에서 우세한 폭도 일단과 조우하여 거의 포위되어 탄약이 떨어지자 하사 이하 3명은 행방불명이 되고 잔여는 가까스로 퇴각하였다. 이 폭도는 변학기邊鶴基가 지휘하는 집단으로 그 수 천千이라 호언하며 18일 대거 내성乃城으로 습격하여 왔다.100)

  17일 오전 4시 20분 영정嶺頂에서 약 2천 5백 미터를 동하東下하였을 때, 약 4백 미터 동방 좌전방左前方에 백흑의白黑衣의 적 약 4‧50명이 있음을 보는 동시 아我 일행을 향해 사격을 개시하였다. 그래서 좌방左方으로 전개展開하여 응전 중 적이 점차로 북방 고지에 나타나 잠간 동안에 갑자기 우리를 포위하려고 그 구역을 광대하게 또 대담한 포위를 형성하였다. 만약 동지에서 완전히 포위 당함에 있어서는 위험치고는 가장 심한 것이 있을 것이므로 완사緩射하면서 철수하기로 하여 주실령朱實嶺의 정상을 유지하면서 적의 세력을 확인한 즉 실수實數는 불명이나 그 우세함은 종전에 보지 못한 바이고 또 총기도 총이 많은 것을 보았다.101)

  서벽전투는 무려 4시간 동안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일본군은 5구의 시체를 남긴 채 주실령을 넘어 내성으로 퇴각하였다. 의병측 기록에 의하면, 서벽전투에서 20여 명의 목을 베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하사下士 1명, 병兵 1명, 순사巡査 2명, 통역通譯 1명이 행방불명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02)

  5월 20일 영천경찰분서에서는 서벽리에 들어가 행방불명된 5명의 시체를 수색한 결과,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이상의 5명은 전사한 것으로 확신하고 곡구谷口에서 반리半里 쯤 전방인촌村으로부터 인부 4명을 고용하여 곡구谷口로 출장하였던 바 한 사람도 촌민의 집에 있는 자가 없어 사체死體의 소재를 알아내는데 곤란이 극極했으나 인부를 지휘하여 전투한 부근의 장소를 빠짐없이 수색한 결과 신묘新墓를 발견 발굴發掘하였던 결과 제1착으로 도전稻田 순사, 제2착으로 하산下山 순사, 제3착으로 상원上原 오장의 3명의 사체를 발견하였는데 모두 목을 베어 일견一見 참상慘狀을 극極하고 있었다.103)

  서벽전투가 있었던 격전지는 현재 서벽초등학교 입구 항일의병기념비가 있는 곳이다. 당시 의병은 일본 군경의 목을 베어 서벽초등학교 입구에 있는 느티나무에 가지런히 매어 달았다. 일본 군경의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7일 서벽리西碧里 부근에서 생사불명生死不明이 되었던 상원오장上原伍長,도전稻田‧하산下山‧윤화영尹和永의 삼순사三巡査와 영천수비대榮川守備隊 통역 이모李某의 5명의 사체死體는 몸과 목의 있는 곳이 다른데 목은 서벽리西碧里 입구 수목樹木에 가지런히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104)

  서벽전투 항일의거기념비(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서벽초등학교 교문 느티나무숲에는 1984년 12월 건립된 항일의거기념비抗日義擧記念碑가 있다.

    ③ 내성전투

  1908년 5월 17일 서벽리를 공격했던 일본 군경 11명 중 6명은 5구의 사체를 남기고 주실령을 넘어 내성乃城으로 퇴각하였다. 이에 이강년부대의 우군장 변학기를 비롯하여 성익현‧정경태‧백남규‧정연철‧김상태 등은 퇴각하는 일본 군경을 추격하여 내성으로 진격하였다.

  당시 내성에는 예안에서 파견된 일본 군경 8명을 합쳐 내성헌병분견소와 내성주재소의 헌병 19명, 일본인 순사 3명, 합계 22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주 13명‧예천 9명‧안동 20명의 일본 군경이 내성으로 파견되어 응원하였다.105)

  5월 18일 내성면 황해리黃海里에 주둔하고 있던 의병 약 1,200명은 내성으로 진격하여 서방 고지와 동북방 고지를 확보하고 내성을 포위‧공략하였다. 이 내성전투에 대해 일본 군경의 정보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전황을 기록하고 있다.

  [전략] 적賊의 일부는 서방 고지에 올라가 점차 동북방 고지로 전개하여 포위한 연장延長이 약 3리에 걸쳤고, 3면으로부터 맹렬히 사격을 개시하였다. 아대我隊는 전도소위田島少尉 지휘하에 헌병 19명, 순사부장 청수원삼淸水源三, 순사 석원청수石原淸水‧등강칠차랑藤岡七次郞 계 23명이 동북방인 2개소의 고지를 점령하고 오전 9시부터 전투가 개시되어 오후 4시 15분에 이르러 드디어 적을 격퇴하였다. 적의 수는 미상이나 약 1천명을 내리지 않는다고 보았다.106)

  5월 18일 이강년부대는 내성을 습격하여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교전한 뒤 내성면 황해리로 퇴각하였다.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는 이 전투에서 의병 20명을 사살하고 격퇴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내성 헌병 분견소장인 전도田島 헌병소위는 헌병‧경관을 독려, 방전防戰 6시간에 걸쳐 그 20을 사살하고 겨우 내성 서북 1천 5백 미터 지점으로 격퇴시켰다. 그러나 폭도는 의연 그곳에 머물러 대오를 정돈하고 재차 내습하려는 기세가 보였다.107)

  내성전투가 펼쳐졌던 봉화군 봉화읍 내성전투 후 일본 군경은 황해리에 주둔하고 있는 의병을 추격하였다. 이에 의병은 오록梧麓으로 퇴각하였는데, 당시 오록에 집결한 각처 의병은 약 1,200명이라고 일본 군경은 파악하고 있다. 5월 19일 오록에 집결한 의병은 일본 군경과 다시 한 차례의 전투를 치르고 서벽리로 철수하였다.

    ④ 재산전투

  내성전투 이후 이강년부대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재산지역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재산전투는 1898년 6월 4일 대구에서 파견된 일본 군경과 벌인 전투로, 당시의 상황을 『운강선생창의일록雲崗先生倡義日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적 한 부대가 대구로부터 내습하여 온다는 소문을 듣고 제장들을 소집하여 방략을 지시하였는데, 이만원李萬源과 권용일權用佾을 동구洞口에 매복시키고, 하한서河漢瑞는 좌편에 매복시키고, 성익현成益鉉은 우편에 매복시키고, 백남규白南奎는 군사를 나누어 길을 끼고 양편으로 매복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강년은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남산에 올라가서 적을 기다렸다. 적은 의병의 복장을 가장하여 입고 의병의 깃발을 휘날리며 달려 들어오고 있었다. 이강년은 웃으며 말하기를 “적이 우리를 속이려는 것”이라고 하며 거짓으로 환영하는 의사를 보였다. 적이 빨리 달려들어 오는데, 깊숙이 들어오자 복병은 일제히 사격을 하고, 이강년은 산 위에서 싸움을 독려하니 탄환이 비 오듯 하였다. 적이 놀라서 서로 짓밟혀 죽는 자가 절반이 넘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사방으로 달아났다. 아군은 상한 자가 8인이며 죽은 자가 10여 인이었다.108)

  재산전투는 이강년부대 약 700명과 일본군 20명이 벌인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이강년부대는 지형지세를 이용한 유격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을 격퇴하였지만, 의병들도 적지 않은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이 재산전투에 대해 일본군측의 『조선폭도토벌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6월 4일 예안수비대장 하야중위河野中尉 이하 20명은 재산 서방 약 20리 거리에 있는 중신동中新洞에서 수괴 이강년이 인솔하는 폭도 약 7백과 조우 그를 공격 중 폭도는 일부 진지를 점령한 다음 포격을 가장한 폭성을 내어 토벌대의 사기 저하를 꾀하고, 대부분은 양익兩翼에서 포위하려는 형세를 보여 그 태도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토벌대의 맹렬한 사격에 의하여 사상 70여 명을 유기하고 영양 방향으로 이동하였다.109)  

  재산전투가 치러졌던 구렁마(봉화군 재산면 동면 2리) 재산전투가 벌어진 중신동中新洞은 현재 재산면 동면 2리인데, 속칭 ‘구렁마’라고도 한다. 이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은 동면저수지 위쪽에 무덤을 만들었으나 1970년대 초 새마을사업으로 농로를 확장하면서 훼손되었다고 한다.

    ⑤ 이강년부대의 강원도지역 전투와 이강년의 최후

  재산전투 이후 이강년부대의 활동은 난간에 봉착하였다. 무기와 탄약이 부족하고 병력마저 흩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일본군 수비대의 탄압작전은 이강년부대를 압박해오고 있었다. 이강년은 새로운 투쟁을 위하여 호남지역으로 남하할 계획 하에 태백‧소백산맥의 남쪽 산록을 따라 내려가고자 하였다.110)

  이강년부대는 6월 4일 전개된 재산전투 이후 강원도로 이동하여 황지潢地‧상동上東‧광탄廣灘‧송한松寒 등지를 거쳐 제천으로 들어가 6월 21일 오미리전투五美里戰鬪를 치렀다. 그 후 이강년부대는 병력을 증강한 일본군의 탄압 강화로 전력이 크게 위축되었는데, 권용일의 『정미왜란창의록』에서는 재산전투 이후 강원도 각처를 전전하던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승전곡을 부르고 회군하여 점고하니 아군 사자 10인이요 부상자 8인이라.시체를 감장하고 익일에 행군하여 각처로 다녀 충주를 향하여 차차 전진하니 그간 수삼차 대전에 탄환이 부족하여 다시는 어디 가서 구할 도리도 전혀 없고 적세는 점차 창궐하니 어찌하면 좋을는지 백계무책이라. 제천堤川 오미동五美洞에 당도하여 유진하고 제천 적과 접전하여 한번 전쟁을 하고 보니 탄환도 아주 절핍絶乏되고 군사도 점차 해산되어 겨우 수백 명에 지나지 못하니 아마도 우리 운명이 불원간 위태할 터이라고 하며 또 행군하여 사자산獅子山에 도착하여 유숙하고 또 원주 주천에 도착하니 때는 마침 6월 2일이라 군사를 점고하니 불과 100여 명이라. 하늘을 우러러 탄식 통곡하고 또 행군하여 청풍을 경유하여 작성鵲城에 도착하니 이는 참 하늘이 망케 하심이로다 하고 장졸간 서로 붙들고 서러워하더라.111)

  7월 1일 이강년부대는 영월에서 청풍 북쪽 남한강에 도착하였으나 강을 건널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본군이 추격하면서 나룻배를 끊은 상태였고, 또 장마철로 강물이 불어났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이강년부대는 영춘의 산길을 경유하여 능강동綾江東으로 향하려다가 마침 소금 장사의 배를 만나 강을 건너 작성鵲城 사기막재에 주둔하였다.112)

  7월 2일 이강년부대는 작성산 기슭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2시간 남짓 교전하였다. 작성전투鵲城戰鬪에서 이강년은 왼쪽 복사뼈에 일본군의 탄환을 맞아서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도선봉‧하한서 및 군사 7명이 전사하였다.113) 서울로 압송된 이강년은 10월 13일 서울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3) 이강년부대의 구성원과 성격

 『운강선생창의일록雲崗先生倡義日錄』을 보면 진용을 「장임록將任錄」‧「참모부參謀部」‧「종사부從事部」‧「좌종사부坐從事部」로 구분하고 있다. 장임록과 참모부, 그리고 종사부에 기록된 명단은 의병투쟁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고, 좌종사부는 투쟁에 직접 참여한 현역은 아니지만 의병에 찬동하고 이를 지원했던 사람들이다. 이 진용에 등재된 명단은 전기의병 때 참여한 인물을 포함하여 주로 후기의병에 참여한 인물들이다.

  장임록과 참모부, 그리고 종사부를 보면 각기 40명과 14명, 그리고 68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114) 이들은 전기의병에 참여한 인물도 상당수 있으며, 주로 경북 북부지방과 충청‧강원도 출신의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어 이강년부대의 활동지역을 추측할 수 있다. 이들의 신분은 양반유생 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전기의병의 지휘부가 명망 있는 양반유생이었음에 반해 후기의병의 경우, 참봉參奉이나 선달先達을 제외하고 대부분 전혀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던 지방유생들이다.115)

  좌종사부에 등재된 사람들도 모두 121명으로 대부분 지방유생들이다. 이중 전직관리는 8명(承旨1‧通政1‧議官3‧監察1‧主事2‧都事1‧參奉1명)이며, 등재된 121명 중 75명은 경상도 출신의 인물이며, 나머지는 주로 충청도와 강원도 출신이다. 그리고 경상도 출신의 인사는 주로 문경‧예천‧용궁 등 낙동강 연변에 거주하고 있다.116)

  이와 같은 진용으로 미뤄보면 전기의병의 편제와는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전기의병의 경우 각 고을에서 유력한 양반유생들의 창의가 있었으나, 후기의병에 와서는 소백산을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지방을 포괄하는 광범한 지역의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의병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마을 단위로 용력을 갖춘 인물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고 재력을 갖춘 인사들은 그 활동을 후원하고 있다. 한층 조직화되고 투쟁적인 형태의 진용을 갖춰가고 있다.

  예를 들어, 참모부의 조용필趙鏞弼과 좌종사부의 조용구趙鏞九의 경우이다. 이 두 사람은 현재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知保里(옛 龍宮縣 內下面 知保村)의 함안조씨咸安趙氏이다. 조용필은 한말 마을 장정들을 규합해 화적토벌에 참여하여 마장군馬將軍과 민중군閔中軍을 포살砲殺하거나 매살埋殺하여 집강執綱에 임명된 용력과 의기를 갖춘 인물로,117) 이강년의 의진에 참여하였다. 조용구는 같은 집안 인물로 의관議官이며 재력을 갖춘 인물로 조용필의 화적토벌이나 의병참가를 적극 후원하였다.

  또 하나의 예로, 김순흠金舜欽과 김낙문金洛文 부자의 경우이다. 김순흠은 1908년 9월 단식순국斷食殉國한 인물로 을미의병 때 이강년의 문경의진聞慶義陣과 허위許蔿 등의 김산의진金山義陣에 참여하려 하였으나 의병이 해산하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을사조약 후 이강년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의 차자 김낙문을 참여시키고 물심양면으로 의진을 후원하였다.118)

  그리고 의진의 실질적인 전투력이 된 병졸兵卒의 구성이다. 의진이 전투력을 갖춘 진용을 편성하기 위해서 우선 포군砲軍과 다수의 병졸兵卒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강년부대의 경우에도 처음부터 포군의 영입에 주력하였다. 1907년 3월 지평砥平의 안기영安基榮, 제천提川의 안성해安聖海 등과 창의하면서 영입한 청풍淸風의 포군砲軍 6명이라던가, 7월 광무황제의 강제퇴위에 따른 원주진위대 봉기 군인의 영입, 그리고 각지에 산재한 산포수山砲手의 영입 등이 이루어지면서 진용을 갖추게 된다.119)

  한편, 의진은 각처에서 지휘관들이 거느리고 오는 평민출신平民出身의 병졸을 주축으로 대오隊伍를 형성하였다.

[표-3] 『운강선생창의일록』, 「장임록」

번호

성 명

소 속

직 임

출신지

비 고

1

이강년(李康秊)

 

 

문경

의병장

2

김상태(金尙台)

 

중군장

영춘

단식자정

3

이만원(李萬源)

 

도총독장

청풍

종신금고형

4

백남규(白南奎)

 

도선봉

충주

 

5

하한서(河漢瑞)

 

도선봉

단양

작성/전몰

6

정연철(鄭淵錣)

 

후군장

제천

 

7

권용일(權用佾)

 

우군 선봉도선봉

청풍

 

8

윤기영(尹基榮)

 

전군장

원주

강릉/전몰

9

신태원(申泰元)

 

후군장

청풍

문경/전몰

10

이중봉(李重鳳)

 

우군장

청풍

종신유배형

11

이용로(李容魯)

 

좌군장

 

 

12

천보락(千普洛)

 

좌익장

문경

 

13

박갑주(朴甲冑)

 

우선봉

원주

 

14

허 섭(許 燮)

 

우선봉

영춘

투항

15

변학기(邊鶴基)

 

우군장

봉화

 

16

이세영(李世榮)

 

좌군장

제천

 

17

류시연(柳始然)

 

소모장

안동

 

18

김운선(金雲先)

 

중군 선봉

원주

 

19

박우영(朴尤永)

 

소모장

정선

 

20

이창교(李昌敎)

 

후군 선봉장

 

 

21

최동백(崔東白)

 

우군 선봉장

 

 

22

주현삼(朱玄三)

 

수문장

원주

영월/전사

23

유병선(劉秉先)

 

도령장

원주

 

24

김영식(金永軾)

 

우익장

영월

 

25

최용출(崔用出)

 

좌익장

영월

 

26

설창해(薛昌海)

 

영솔장

영월

 

27

김덕수(金德秀)

 

부영솔

서강

 

28

정재덕(鄭在德)

 

교련관

안동

 

29

안춘흥(安春興)

 

교련관

충주

 

30

윤용구(尹容九)

 

독전장

제천

 

31

윤희선(尹熹善)

 

소모 중군

충주

 

32

이사진(李士鎭)

 

소모 후군장

충주

 

33

박경팔(朴敬八)

 

방수장

 

 

34

이명상(李明相)

 

 

 

단양 의병장 풍기/전사

35

성병태(成秉泰)

 

중군진 후장

순흥

 

36

송재현(宋在賢)

 

방수장

삼랑

 

37

심장섭(沈章燮)

 

금란장

영천

 

38

조정희(趙正熙)

 

척후장

 

 

39

장진성(張進聖)

 

포장

용궁

 

40

신 숙(申 橚)

참모부

참모관 총독장

문경

 

41

신경희(申景熙)

참모부

참모관

문경

 

42

원철상(元哲常)

참모부

참모관

원주

 

43

임석준(任奭準)

참모부

참모관

청풍

영천/전사

44

이정규(李正奎)

참모부

참모겸사서

제천

 

45

강순희(姜順熙)

참모부

사서

제천

 

46

한태섭(韓台燮)

참모부

참모관

용궁

 

47

이백룡(李伯龍)

참모부

참모관

영춘

 

48

이규현(李奎顯)

참모부

참모 겸 사서

 

 

49

정해창(鄭海昌)

참모부

참모중군

제천

 

50

주광식(朱光植)

참모부

소모

제천

 

51

김필운(金弼雲)

참모부

소모

문경

 

52

조용필(趙鏞弼)

참모부

소모

의성

예천

53

장복삼(張復三)

참모부

소모

문경

 

54

강병수(姜炳秀)

종사부

 

문경

 

55

이승재(李承宰)

종사부

 

문경

이강년 맏아들

56

이원규(李源圭)

종사부

 

문경

전몰

57

이정래(李淨來)

종사부

 

예천

 

58

이선달(李先達)

종사부

 

영춘

 

59

안기영(安基永)

종사부

 

지평

 

60

금달연(琴達淵)

종사부

 

순흥

 

61

최준기(崔俊基)

종사부

 

 

 

62

김성칙(金聖則)

종사부

 

 

 

63

박용태(朴用台)

종사부

 

충주

 

64

박재익(朴在翼)

종사부

 

순흥

 

65

윤명구(尹明九)

종사부

 

연풍

 

66

노지사(盧地師)

종사부

 

충주

전사

67

원형희(元亨熙)

종사부

 

청풍

 

68

박응선(朴應善)

종사부

 

단양

 

69

변용만(邊用萬)

종사부

 

문경

영천/전사

70

강병욱(姜炳旭)

종사부

 

문경

 

71

배정희(裵正熙)

종사부

 

제천

 

72

박내익(朴來翊)

종사부

 

단양

 

73

이만흥(李晩興)

종사부

 

안동

 

74

박기인(朴基仁)

종사부

 

순흥

 

75

신 기(申 棋)

종사부

 

문경

전사

76

이상신(李象信)

종사부

 

홍천

 

77

주범순(朱範淳)

종사부

 

 

전사

78

이긍재(李兢宰)

종사부

 

문경

이강년 둘째 아들

79

사사연(史士淵)

종사부

 

충주

 

80

이사현(李士鉉)

종사부

 

문산

 

81

박규채(朴圭彩)

종사부

 

연풍

 

82

윤좌현(尹佐鉉)

종사부

 

청풍

 

83

황사문(黃斯文)

종사부

 

주천

 

84

홍범용(洪範用)

종사부

 

충주

 

85

조병은(趙秉殷)

종사부

 

영월

 

86

김창로(金昌魯)

종사부

 

 

전사

87

류문년(柳文秊)

종사부

 

문경

강릉/전사

88

이철래(李哲來)

종사부

 

원주

전사

89

김예홍(金禮弘)

종사부

 

풍기

 

90

장치문(張致文)

종사부

 

문경

적성/전사

91

장복흥(張復興)

종사부

 

문경

적성/전사

92

장해진(張海鎭)

종사부

 

문경

적성/전사

93

장경한(張景漢)

종사부

 

문경

적성/전사

94

김성옥(金成玉)

종사부

 

상주

 

95

김성운(金聖云)

종사부

 

태천

 

96

김순화(金順和)

종사부

 

청풍

 

97

이 달(李 達)

종사부

 

제천

 

98

엄선양(嚴善陽)

종사부

 

영춘

 

99

성성오(成星五)

종사부

 

원주

 

100

진만협(陳萬協)

종사부

 

충주

 

101

홍사창(洪思昌)

종사부

 

충주

 

102

권재중(權在中)

종사부

 

안동

 

103

김수준(金守濬)

종사부

 

감천

전사

104

김명옥(金鳴玉)

종사부

 

영천

전사

105

황부주(黃富周)

종사부

 

문경

 

106

이규해(李圭海)

종사부

 

문경

 

107

김덕용(金德容)

종사부

 

문경

 

108

김주상(金周相)

종사부

 

 

 

109

황재원(黃在源)

종사부

 

백동

 

110

신병선(申秉善)

종사부

 

문경

적성/전사

111

김춘득(金春得)

종사부

 

춘천

 

112

김형철(金炯哲)

종사부

 

예천

 

113

신태종(申泰宗)

종사부

 

원주

 

114

신태관(申泰寬)

종사부

 

원주

 

115

권복술(權福述)

종사부

 

용궁

충주/전사

116

이강혁(李康爀)

종사부

 

원주

 

117

심상선(沈相善)

종사부

 

원주

 

118

박교양(朴曒陽)

종사부

 

문경

갈평/부상

119

박봉양(朴鳳陽)

종사부

 

문경

박교양 弟

120

심문택(沈文澤)

종사부

 

원주

 

121

안교정(安敎情)

종사부

 

제천

 

122

원도상(元道常)

좌종사부

 

영춘

 

123

양일환(梁一煥)

좌종사부

 

청풍

 

124

이진원(李進源)

좌종사부

 

청풍

 

125

안재덕(安在德)

좌종사부

 

용궁

 

126

김진구(金進九)

좌종사부

 

상주

 

127

권응정(權應靖)

좌종사부

 

문경

 

128

홍대후(洪大厚)

좌종사부

을사년 유격장

예천

 

129

김만원(金萬源)

좌종사부

 

상주

 

130

이철원(李喆元)

좌종사부

 

예천

 

131

심홍당(沈洪堂)

좌종사부

 

문경

 

132

이지한(李芝漢)

좌종사부

 

용궁

 

133

고윤환(高允桓)

좌종사부

 

문경

 

134

이범용(李範容)

좌종사부

 

용궁

 

135

홍치유(洪致裕)

좌종사부

 

보은

 

136

안두환(安斗煥)

좌종사부

 

예천

 

137

최 찬(崔 瓚)

좌종사부

 

문경

 

138

안교형(安敎亨)

좌종사부

 

영주

 

139

김병동(金炳東)

좌종사부

 

안동

 

140

강병유(姜炳裕)

좌종사부

 

문경

 

141

서상업(徐相業)

좌종사부

 

대전

 

142

이현재(李鉉宰)

좌종사부

 

예천

 

143

김상욱(金商旭)

좌종사부

 

문경

 

144

김규홍(金圭鴻)

좌종사부

 

용궁

 

145

조용구(趙鏞九)

좌종사부

 

의성

 

146

정달규(丁達奎)

좌종사부

 

제천

 

147

백남규(白南珪)

좌종사부

 

용궁

 

148

염중희(廉重熙)

좌종사부

 

영월

 

149

맹철호(孟哲浩)

좌종사부

 

지평

 

150

이봉재(李鳳宰)

좌종사부

 

문경

 

151

이정의(李正儀)

좌종사부

 

문경

 

152

권태선(權泰宣)

좌종사부

 

용궁

 

153

김용태(金容泰)

좌종사부

 

예천

부상

154

이원재(李元宰)

좌종사부

 

상주

 

155

이건수(李健洙)

좌종사부

 

용궁

 

156

김철상(金喆相)

좌종사부

 

용궁

 

157

이강건(李康建)

좌종사부

 

문경

 

158

김문영(金文榮)

좌종사부

 

제천

 

159

김전영(金田榮)

좌종사부

 

영월

 

160

김상열(金商說)

좌종사부

 

문경

 

161

채섬환(蔡暹奐)

좌종사부

 

상주

 

162

류 준(柳 )

좌종사부

 

문경

 

163

허 달(許 達)

좌종사부

 

죽산

 

164

손진형(孫進衡)

좌종사부

 

경주

 

165

이지선(李芝璇)

좌종사부

 

용궁

 

166

박종봉(朴鍾鳳)

좌종사부

 

예천

 

167

고유훈(高有勳)

좌종사부

 

문경

고윤환 子

168

안재극(安在極)

좌종사부

 

용궁

 

169

김석규(金錫奎)

좌종사부

 

순흥

 

170

주시혁(周時赫)

좌종사부

 

문경

 

171

이성재(李成宰)

좌종사부

 

문경

 

172

김종화(金鍾和)

좌종사부

 

예천

 

173

이명수(李命洙)

좌종사부

 

영월

 

174

권용태(權龍泰)

좌종사부

 

용궁

 

175

이중진(李仲鎭)

좌종사부

 

용궁

 

176

권석인(權晳仁)

좌종사부

 

청풍

 

177

채형주(蔡亨周)

좌종사부

 

문경

 

178

변인규(卞仁奎)

좌종사부

 

문경

 

179

이실진(李實鎭)

좌종사부

 

용궁

 

180

류규년(柳奎秊)

좌종사부

 

 

 

181

권용창(權用昌)

좌종사부

 

제천

 

182

심만송(沈晩松)

좌종사부

 

제천

 

183

이주승(李冑承)

좌종사부

 

제천

 

184

심성모(沈聖模)

좌종사부

 

제천

 

185

정동환(鄭東煥)

좌종사부

 

괴산

 

186

이기호(李基鎬)

좌종사부

 

제천

 

187

홍우형(洪佑亨)

좌종사부

 

상주

 

188

강내영(姜來永)

좌종사부

 

문경

 

189

민순호(閔舜鎬)

좌종사부

 

문경

 

190

이기량(李起亮)

좌종사부

 

문경

 

191

오국환(吳國煥)

좌종사부

 

문경

 

192

김복철(金福哲)

좌종사부

 

예천

 

193

한장이(韓將履)

좌종사부

 

예천

 

194

이병대(李炳大)

좌종사부

 

용궁

 

195

김영상(金泳相)

좌종사부

 

용궁

 

196

강병수(姜炳修)

좌종사부

 

문경

 

197

김달원(金達源)

좌종사부

 

예천

 

198

김두상(金斗相)

좌종사부

 

용궁

 

199

이강문(李康文)

좌종사부

 

문경

 

200

이진영(李鎭榮)

좌종사부

 

문경

 

201

주취규(周聚奎)

좌종사부

 

예천

 

202

오우선(吳禹善)

좌종사부

 

상주

 

203

이상협(李相協)

좌종사부

 

문경

 

204

김정준(金定浚)

좌종사부

 

예천

 

205

장익환(張益煥)

좌종사부

 

문경

 

206

이윤순(李潤淳)

좌종사부

 

영춘

 

207

이유상(李逌相)

좌종사부

 

청풍

 

208

이경재(李景宰)

좌종사부

 

문경

 

209

신태식(申台植)

 

소모 후군장

문경

 

210

한용국(韓用國)

좌종사부

 

문경

 

211

신광묵(辛光黙)

 

 

제천

 

212

김규영(金奎榮)

 

 

 

 

213

정두원(鄭斗源)

 

 

제천

 

214

임철준(任哲準)

 

 

 

 

215

류원승(柳遠昇)

 

 

문경

 

216

신명교(申命敎)

 

화약도감

문경

 

217

신상희(申尙熙)

 

운량도감

문경

 

218

여규락(呂奎洛)

 

 

문경

 

219

여규원(呂奎元)

 

 

문경

 

220

김규영(金圭韺)

 

운량도감

문경

 

221

남노구(南魯九)

 

 

문경

 


  
4) 중후기의병기 문경출신의 의병장

  (1) 이인영부대

    ① 이인영의 생애와 학문

  이인영李麟榮(1866~1909)의 자는 공진公振, 호는 중남中南,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866년 경기도 여주군 북면 내룡리 교항동(다리목)에서 이현상李顯商의 4형제(麟榮‧殷榮‧起榮‧龜榮)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6년 2월 경기도 여주에서 창의하여 제천의진에 합류했다가 해산한 뒤 문경 가은 갈전에 은거하였다.120)

  이인영은 어려서부터 자질資質과 총명聰明함이 남달랐다. 일찍이 정동현鄭東鉉의 문하에서 유학을 공부하여 약관의 나이에 문사文辭가 숙성하고 공맹서孔孟書의 깊은 뜻을 깨우쳐 원근 학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러한 학문을 바탕으로 국내의 시사문제를 다룬 『도기기언道基記言』을 집필할 정도로 현실문제에 깊은 식견과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121) 더욱이 무반직을 거친 고조부와 증조부의 영향으로 군사 분야의 전략과 전술을 익혔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관동창의대장과 13도창의대장으로 의병항쟁을 전개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인영은 성품이 호탕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관직은 무임직인 대성전 재임齋任을 지냈다. 그는 을미의병 때 의병을 일으켜 청국군 응원군을 모으고 무기와 탄약을 구입하느라 많은 가산을 다 썼기 때문에 한때 이강년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가 을미의병 이후 문경 가은에 은거했던 이유도 이강년과의 친분과 호의 때문이라 여겨진다.122)

  이인영은 1896년 2월 경기도 여주에서 일어나 원주지역 일대에서 의병항쟁을 벌였다. 그는 원주에서 제천의병의 소모사 이범직李範稷부대와 김하락부대 아래에 있던 경기도 광주의 김태원金泰元부대와 협력하다가, 3월 상순경에는 제천에 주둔하고 있던 류인석의 제천의진에 합류하였다.123)

  이인영은 제천의진에서 주목할 만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896년 5월중순경 그가 영입한 7인의 청국병을 주력으로 5월 25일(음 4.13)의 제천전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124) 제천전투 패전 이후 전열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이인영은 별영장別營將을 맡았고,125) 곧이어 후군後軍 소모장召募將 별진別陣에 소속되어 소모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제천의병이 북상하는 과정에서 이인영은 그들을 따라가지 않고 정부의 해산권유에 응하여 귀가하였다.126)

    ② 이인영의 생애와 학문

  외교권을 빼앗기자, 의병들의 항일투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문경에 은거하던 이인영도 창의를 모색하였다. 이때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 강원도 원주에서 봉기하여 여주‧지평‧원주 일원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이은찬李殷瓚과 서울출신의 이구채李九采(九載)가 8월 말 해산병 80명이 포함된 500여 명의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문경으로 그를 찾아왔다.127)

  이들은 이인영에게 원주에 원수부元帥府를 세우라고 권하는 황제의 「밀칙密勅」을 보이며 의병 봉기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인영은 “나도 창의倡義에 뜻을 품은 지는 오래되나 부父가 병상에 누워 있어 기거를 사람에 의지해야 할 형편으로 차마 가정을 떠나지 못할 정리라.”하며 국가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문제로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이은찬은“이러한 국가 존망의 시기에 국가의 일이 급하고 부자의 은혜는 가벼우니 공은 먼저하고 사를 나중에 함이 마땅하다.”고 하며 간곡히 청하였다.128)

  9월 2일 원주에서 창의의 깃발을 올린 이인영은 8도에 격문을 띄워 의병의 봉기를 독려하였다. 이에 다수의 인사들과 해산군인들이 몰려들어 대규모의 연합의진의 체제를 갖추었다.129)이후 이인영부대는 제천을 무대로 활동 중이던 이강년부대와 의병활동을 벌였다.

  이인영은 의병부대의 향후 목표를 서울공격으로 설정하고 관동지역 의병부대의 통합을 통해 관동창의군關東倡義軍을 결성하여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이 되었다. 이때 관동창의군의 진용은 다음과 같다.

◦ 관동창의대장 이인영李麟榮

◦ 총 독 장 이구채李求采           ◦ 중 군 장 이은찬李殷瓚

◦ 좌 군 장 방인관方仁寬           ◦ 우 군 장 권중희權重熙

◦ 유 격 장 김해진金海鎭           ◦ 좌선봉장 정봉준鄭鳳俊

◦ 우 선 봉 장 김병화金炳和        ◦ 후 군 장 채상준蔡相俊

◦ 운 량 관 현이보玄履甫           ◦ 재 무 관 신창선申昌先‧민춘원閔春元

◦ 좌 총 독 장 김현복金顯福        ◦ 우총독장 이귀성李貴成

◦ 진위대사령부 민긍호閔肯鎬


  관동창의군의 직임과 편제를 보면, 관동창의군의 주도적 인물은 창의대장 이인영‧총독장 이구채‧중군장 이은찬 등이었다. 결국 서울진격작전을 전개했던 13도창의대진소의 기반이 되었다.

  이인영이 주도하고 있던 관동창의군은 원주를 떠나 횡성‧지평‧춘천 일대를 무대로 삼았다. 특히 관동창의군은 지평에서 1개월간 머물며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이는 한편, 서울진격을 위한 군사력 보강에 나섰다.

  1907년 10월 서북 양도를 제외한 전국 각 지역에 격문을 띄워 의병장들에게 통합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서울로 진격하려는 자신의 계획에 따라 11월에 경기도 양주로 모일 것을 촉구하였다.130) 그 결과 16진陣의 병력을 합하여 수 천명의 의병이 이인영의 휘하에 모여들게 되었다.131)

  한편, 이인영은 1907년 10월 16일 서울사람 김세영金世榮을 상경시켜 일본의 대한침략을 성토하는 격문을 13도 관찰사, 대한매일신보사, 각국 공사관 및 일본 통감에게 보냈다. 그 요지는 일본의 불의와 횡포를 따지고 한국의 어려운 처지를 상세히 설명하는 한편, 의병은 순수한 애국혈단愛國血團이므로 열강도 이를 만국공법萬國公法에 입각하여 교전단체로 인정해야 하며, 또 정의와 인도를 국제관계의 전범으로 삼고 있는 나라들은 반드시 의병을 동일한 목소리로 성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132) 나아가 이인영은 1907년 10월 31일자로 대한관동창의장大韓關東倡義將 이인영李麟榮을 비롯한 주역들이 서명한 격문을 각국 영사관과 미국주재 한인들에게 보냈다.133)

  이들 격문은 의병의 대일항전이 바로 독립전쟁임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고, 나아가 한국문제에 대한 국제적 여론을 환기시킴으로써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이 무난히 성사될 수 있는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인영의 관동창의군은 지평을 떠나 양주에 도착하는 과정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친일관군과 수십 회의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1907년 11월 7~9일에 전개된 삼산전투三山戰鬪와 마전전투麻田戰鬪가 가장 컸다. 삼산전투와 마전전투에서는 약 5천명의 의병과 5백에서 6백 명의 일본군이 격돌하여 양측에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134) 이와 같이 이인영이 거느린 관동창의군은 치열한 전투를 치르면서 양주에 도착하였다.

    ③ 13도창의대진소의 결성과 서울진공작전

  1907년 12월 초 양주에 도착한 관동창의군은 서울 동부 및 강원 영서 일대에서 활약 중이던 허위부대許蔿部隊‧민긍호부대閔肯鎬部隊 등 다수의 부대가 합류함으로써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하게 되었다. 당시 양주에 집결한 의병부대는 총 48진, 대략 1만명으로 민긍호부대 2천명, 이인영부대 1천명을 비롯한 강원도 의병이 약 6천명이었고, 경기도의 허위부대 약 2천명, 평안도의 방인관부대 80명, 함경도의 정봉준부대 80명, 전라도의 문태수부대 100명 등이었다.

  양주에 집결한 각처 의병장들은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하고, 이인영을 13도창의대장에 추대하였다. 그리고 이인영은 13도창의대진소의 직임을 분장하였는데, 1908년 1월 지도부의 진용은 다음과 같다.135)

◦ 13도창의대장 이인영李麟榮      ◦군 사 장 허 위許 蔿

◦ 관동창의대장 민긍호閔肯鎬      ◦호서창의대장 이강년李康秊

◦ 교남창의대장 박정빈朴正斌      ◦진동창의대장 권중희權重熙

◦ 관서창의대장 방인관方仁寬      ◦관북창의대장 정봉준鄭鳳俊


  처음 13도창의대진소의 직임에는 전라창의대장 문태수文泰洙, 교남창의 대장 신돌석申乭石이 편제되어 있었으나 조직을 개편하면서 배제되었다.

  그리고 호서창의대장 이강년은 조만간 상경이 가능할 것으로 보아 그대로 두었는데, 이강년은 끝내 참여하지 못했다.136)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의 조직개편을 마친 이인영은 서울탈환을 목표로 진격하였다. 그 목적은 일제 통감부를 타격하여 ‘성하城下의 맹盟’을 맺고 종래의 소위 신협약을 파기하여 대대적인 항일활동을 벌이는 한편,137) 마관조약馬關條約의 내용대로 한국의 독립과 황실의 안전을 꾀하는 것이었다.

  이인영은 먼저 허위로 하여금 300명의 선봉대를 이끌고 진군토록 하였다. 그러나 허위의 선봉대는 미처 본대가 도착하기 전인 1월 15일경 매복 중이던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장시간 전투를 벌였으나 형세가 불리하여 퇴각하고 말았다. 급기야 3일 후 이인영이 약 2천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당도하여 후군의 도착을 기다렸으나,138) 선봉대의 패배로 의병측의 사기는 상당히 꺾인 상태였다.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은 무산될 위기에 처하였다.

  1908년 1월 28일 창의대장 이인영은 부친의 부음을 받게 되었다. 이인영은 “나라에 불충함이 부모에 불효함이 되고 부모에 불효함이 나라에 불충함이 된다. 그 도道는 하나이며 둘이 아닌 것인즉 나는 국풍國風을 지켜 3년 상을 치러 효도를 마친 후 제기하겠다.”며 후사를 군사장 허위에게 당부하고 문경으로 귀향하였다.139) 이리하여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문경의 본가로 귀향한 이인영은 부친상을 치르고 3년 상을 마친 연후에 다시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추적으로 더 이상 활동이 불가하게 되자 상주로 이거하였다가 다시 황간 금계동으로 옮겨 은거하였다.140) 1909년 6월 7일 문경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1909년 8월 13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살형을 언도 받고, 9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황성신문皇城新聞》에서는 당시 이인영의 체포 경위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 李氏被捕 數日前에 慶北尙州郡에서 太田駐在日憲兵에게 被捕된 暴徒首領 李麟榮氏는 十七日에 太田憲兵分遣所中尉, 兵一名으로 當地憲兵分隊本部로 護送하엿다는데 氏는 本來 驪州의 大儒鄕黨에서 重視할뿐아니라 憂國之士로 自任하야 恒常 國事로 東奔西走함으로 曾往 乙未年에도 首先倡起한 事가 有하더니 昨年 政變以來로 許蔿‧李康秊‧李殷瓚等을 指揮命令하엿으며 作春에는 諸將을 會集하고 一次大擧하야 京城을 襲擊하기로 策하고 楊洲에서 屢次密議를 行하얏스나 其時에 親喪을 遭함으로 慶北聞慶으로 歸하야 機會를 遂失하고 喪中에 各處로 來往하다가 天命의 盡함을 因하야 今番尙州太田憲兵隊에게 捕捉되엿다는데 氏는 被捉한 後에도 言語動作이 泰然하다더라.141)

  (2) 신태식부대

  신태식申泰植(1864~1932)은 경북 문경군 가은면 민지리(도내동)에서 1864년 음력 11월 22일 신명하申命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명은 절회哲會, 자는 열향悅鄕, 호는 도암島菴 또는 괴헌槐軒이다. 시조는 고려 태조 때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이며, 중조는 문신 문희공文僖公 신개申槩이다. 문경에 세거한 유가의 후손으로 평소 곧은 성품으로 한학에 조예가 깊은 문장가로 알려졌다.142)

  신태식은 1895년 을미의병 때 문경에서 의병을 소모하는 과정에 밀정혐의가 있는 가은면의 김골패金骨牌와 상주의 강용이姜龍伊 등을 잡아 농암장터에서 총살하였으며, 국왕 고종의 의병해산조칙에 따라 해산하였다. 1902년 내부주사內部主事와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을 지냈다.

  신태식은 1907년 8월 관동창의대장 이인영의 격문을 받고 문경에서 창의하였다. 그리고 이강년부대와 연합하면서 갈평전투를 비롯 죽령‧소백산맥을 중심으로 울진‧평해‧영양‧영월‧산동‧제천‧원주‧홍천‧철원‧가평‧영평‧양양‧강계 등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그는 갈평전투 뒤 단양에서 수백 명의 의병을 모아 부대를 편성하였는데, 그 진용은 다음과 같다.

◦ 대 장 신태식申泰植

◦ 도선봉 전세영全世榮      ◦ 좌선봉 강창근姜昌根

◦ 중 군 류제칠柳齊七       ◦ 참 모 엄해윤嚴海潤

◦ 령 솔 조수안趙守安       ◦ 별 포 김운선金雲先


  신태식은 이강년부대와 합진하여 후군소모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는데, 1907년 말 이강년부대와 같은 시기에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북상하다가 부상을 입고 한때 이강년부대에 들어갔다. 1908년 7월 이강년이 피체된 뒤, 신태식은 9월 횡성으로 퇴각하다가 적탄에 어깨를 맞아 부상하였으나 양주 안산전투安山戰鬪에서는 일본군 장교 장삼랑張三郞을 생포하여 총살하는 등의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1908년 12월 경기도 영평군永平郡 이동裡洞전투에서 왼쪽 다리에 부상을 입고 붙잡혔다.

  1909년 1월 9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영평 군민들이 비를 세워 덕을 기린 사실을 들어 호소함에 따라 무기형이 되었다가, 다시 상고하여 1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1918년 1월 19일 출감하여,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고, 1920년 3월 경상도 출신의 의병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해 조직한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朝鮮獨立運動後援義勇團의 경상북도 단장에 뽑혔다. 1920년 10월 의용단은 만주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연락하며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국내에서 독립군 지원을 위해 활동하다가, 1921년 겨울 조직이 드러나 관련자들이 붙잡혔다. 신태식은 1922년 12월 28일 대구감옥에 갇혔다가 1년 징역형을 받고, 1924년 6월 5일 출감하였다. 1932년 1월 15일 별세하였으니, 그의 나이 69세였다.143)

  (3) 곽이섭(郭理燮)부대

  경북 문경군 가북면 상고리 출신의 의병장이다. 그는 1907년 10월부터 11월까지 총기로 무장하고 10여 명의 의병부대를 지휘하며 충북 진천鎭川‧음성陰城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펴다가 붙들려, 1909년 7월 31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144)

  (4) 정흥대(鄭興大)부대

  경북 문경군 가북면 도니동 출신의 의병장으로 1907년 음력 7월 29일 관동창의대장 이인영 아래에서 부하 80여 명의 부대를 이끌고 상주‧문경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같은 해 음력 8월 1일 부하 30여 명과 함께 문경읍내에 들어가 친일순검 박시영朴時永‧박세진朴世鎭의 집을 불태우고 붙들렸다. 1908년 10월 19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폭동 및 방화죄’로 종신형을 언도받았으나, 검사가 공소하는 바람에 1909년 2월 9일 대구공소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145)

  5) 중·후기 의병기 문경출신 의병참가자

  문경지역에서 중‧후기의병에 참여하여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의병 참가자는 대부분 1896년 이강년이 창의하였던 문경의진聞慶義陣과 1907년 8월 이강년부대李康秊部隊에 종군하였던 인물들이다. 내용은 다음 표와 같다.

[표-4] 중‧후기의병기 문경출신 의병참가자

의 병

생몰‧연령

출신지

신분‧경력

활동기간

활동지역

주 요 활 동

강내영
姜來永

1884~1974

문경

 

1907

경상‧강원‧
충청도

◦이강년부대 종사
◦1997년 건국포장

강병욱
姜炳旭

1871~1952

문경

자 國明
호 住汕

1907~
1914

경상‧강원‧
충청도

◦이강년부대 종사관
◦1914년 5월 영월 하동

 에서 군자금모집 활동,

 피체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

고유훈
高有勳

1870~1941

문경

자 相保
高允桓의
아들

1907.7~

경상‧강원‧
충청도

◦이강년부대 좌종사
◦이강년 피체 이후 김태

 부대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

고윤환
高允桓

1845~1915

문경

자 武顯
호 雙山
高有勳의 부

1907.7~
1908.7

경상‧강원‧
충청도

◦이강년부대 좌종사
◦이강년 피체 이후 은거
◦1992년 건국포장

곽이섭
郭理燮

1866~

문경

의병장

1907.10

충북 진천‧
음성

◦1907년 10월~11월 부

 하 10명,음성‧진천일원

 활
◦1909년 징역 3년 옥고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

권응정
權應靖
(權五銖)

1863~1937

문경

자 喜若

호 百拙

1907~

경상‧강원‧
충청도

◦이강년부대 좌종사
◦이강년 피체 이후 김상

 태 부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김낙문
金洛文

1872~1942

문경

金舜欽의 부

 

 

◦이강년부대 참가
◦민단조합, 군자금 모집
◦1992년 건국포장

김철상
金哲尙

1878~1966

문경

 

1907~
1908

 

경상‧강원‧
충청도

◦이강년부대 좌종사
◦1909년 이후 은거
◦1982년 대통령표창

남만귀
南萬貴

1877~

문경

 

1907.8~

1909

경북 문경‧
충북 괴산

◦이인영부대

◦1909년 5월 징역3년 옥

 고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

민순호
閔舜鎬

1880~1965

문경

자 鳳來
호 愚樵

1896
1907~
1910

경상‧강원‧
충청도

◦1896년 문경의진
◦1907년 이강년부대 후

 군 소모장
◦1908년 이강년 피체 이

 후 김상태와 대일투쟁
◦1968년 대통령표창

박윤중
朴潤重
(朴用萊)

1876~1907

문경

 

 

 

◦1907년 시위대 참교
◦1907년 8월 군대해산

 에 분격 일군에 대한 전

 사
◦1980년 대통령표창

변용만
邊用萬

?~1908

문경

 

 

 

◦1907년 이강년부대 종사
◦1908년 영주에서 교전

 중 전사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

신경희
申景熙

1849~1907

문경

 

1896

1907

문경 단양

◦1896년 문경의진 참모
◦1907년 이강년부대 참

 가, 단양에서 교전 중

 피체, 도주, 은거
◦1977년 건국포장

신 기
申 棋

?~1907

문경

 

1907~

 

◦1907년 이강년부대 종

 사, 순국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

신 숙
申 橚
(申石用)

1843~1926

문경

 

1896

1907.8

~11

문경‧제천‧

풍기 등

◦1896년 이강년의진 참가
◦1907년 이강년부대 참모

 관‧총독장, 충주전투 등
◦1911년 피체, 징역 7

 년 옥고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

심거벽
沈巨擘
(沈義燮)
(沈相震)

1855~1896

문경

 

1896

문경

◦1896년 문경의진
◦문경 마섭에서 전사

오국환
吳國煥

1882~1946

문경

 

1907.8~

 

◦1907년 이강년부대 좌종사
◦1997년 건국포장

류문년
柳文秊
(柳壽秊)

1887~1907

문경

 

1907.8~

 

◦1907년 이강년부대 종사
◦1907년 강릉에서 피

 체 옥사
◦1982년 대통령표창

류 준
柳 준

1892~1937

문경

 

1896
1907.8~

 

◦1896년 문경의진
◦1907년 이강년부대 좌종

 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이강수
李康壽

1866~1925

문경

이강년의
종제

1896
1907.8~

문경
경상‧강원‧
충청도

◦1896년 문경의진 소모장
◦제천의진 유격장, 우군

 장
◦1907년 이강년부대, 제

 천 전투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

이긍재
李兢宰

1888~1951

문경

호 蒼海
이강년의
차자

1907.8~
1908.7

경상‧강원‧
충청도

◦1907년 이강년부대 종사

 관
◦1993년 대통령표창

이동하
李東下
(李淨來)

1856~
1919

문경

 

1907.7~
1908.7

경상‧강원‧
충청도

◦1907년 이강년부대 참모
◦1908년 이강년부대 참모

 장
◦1910년 간도로 망명
◦1915년 민단조합 충남지

 점장
◦1915년 조선독립의군부

 차여
◦1916년 피체, 1918년

 징역 1년, 1919년 6월

 석

 귀향중 옥사
◦1986년 건국포장

이명재
李明宰

1892~
1947

문경

이강년의
계자

1907.8~
1908.7

경상‧강원‧
충청도

◦1907년 이강년부대 종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이승재
李承宰

1873~
1917

문경

이강년의
장자

1896
1907.8~
1911.6

경상‧강원‧
충청도

◦1896년 문경의진
◦1907년 이강년부대 종군
◦1908년 7월 이강년 피

 체 이후 김상태 부대와

 활
◦1911년 6월 김상태 피

 체 이후 한양이와 이등

 암살 계획, 투옥
◦1977년 건국포장

이원규
李源圭

1874~
1907

문경

 

1896
1907.8~
1907

경상‧강원‧
충청도

◦1896년 문경의진
◦1907년 이강년부대 종군
◦1907년 11월 순국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이정의
李正儀

1851~
1933

문경

 

1896
1905
1907

경상‧강원‧
충청도

◦1896년 제천의진 전군장
◦1905년 원용팔부대 전군

 장
◦1907년 이강년부대 좌종

 사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

이진영
李鎭榮

1849~
1930

문경

 

1907.8~
1908.7

경상‧강원‧
충청도

◦1907년 이강년부대 좌종

 사
◦1997년 건국포장

장복흥
張復興

1863~
1907

문경

 

1896
1907.9

경상‧강원‧
충청도

◦1896년 제천의진 종사
◦1907년 이강년부대 종

 사, 적성전투에서 전사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

장익환
張益煥

1881~
1930

문경

 

1905

경상‧강원‧
충청도

◦1905년 정운경부대 참전
◦1907년 이강년부대 좌종

 사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

장치문

張致文

1860~
1907

문경

 

 

 

◦1907년 이강년부대 종사
◦1907년 8월 적성전투

 전사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

정흥대

鄭興大

1860~
1909

문경

 

1907.
음7.29~

상주‧문경

◦1907년 이인영부대 참

 전, 부하 80명과 상주‧

 문경 활동
◦1907년 8월 부하 30명

 친일순경의 집을 방화
◦1909년 2월 교수형, 순

 국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주시혁
周時赫

1865~
1950

문경

 

1907.8~
1918

경상‧강원‧
충청도

◦1907년 이강년부대 좌종

 사
◦1908년 7월 이후 김상

 태 부대
◦건국훈장 애족장

천보락
千普洛

1852~
1908

문경

 

1896
1907.8~
1908

경상‧강원‧
충청도

◦1896년 류인석의진 선

 봉장, 수안보‧조령전투
◦1907년 이강년부대 좌익

 장
◦1908년 강릉‧양양 활

 동, 전사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최 찬
崔 瓚
(崔振玉)

1856~
1928

문경

 

1896

경상‧강원‧
충청도

◦1896년 문경의진
◦1907년 8월 이강년부

 대 좌종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한용국
韓用國

1886~
1959

문경

 

1896
1907.8~
1908.9

경상‧강원‧
충청도

◦1896년 문경의진 참모
◦1907년 8월 이강년부

 대 좌종사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

 

 

제2절 계몽운동

 

  1. 계몽운동의 전개 

   1) 전기의병의 전개 

  한말 계몽운동은 “한편으로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국가의 독립을 보조‧유지‧회복하고, 다른 한편으로 국내 보수지배세력의 횡포로부터 민중의 인권을 보호하고 신장하기 위해 민중의 의식을 계발한 조직적인 운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146) 그러나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국권을 침탈당하면서 점차 침략자 일본에 대한 대응논리 내지 행동양식으로서 자주독립과 국권회복을 모색한다는 전자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국권회복운동의 하나로 조직된 최초의 계몽운동단체는 교육진흥敎育振興을 표방한 1904년의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였다.147) 그러나 계몽운동이 좀 더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대한자강회의 조직이었다. 1906년 4월 설립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는 1907년 8월 강제 해산되기까지 전국에 25개 지회와 1,5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경상도 지방의 대한자강회 지방지회는 1906년 8월 고령‧동래지회,148) 그리고 1907년 2월 22일 청도지회, 3월 김해지회가 지회설립청원서를 제출하여 설립이 인허되었다.149)

 

  1907년 8월 대한자강회가 해산되고 3개월 뒤인 11월 10일 설립된 대한협회大韓協會는 기존 대한자강회 지회의 조직 일부를 인수할 수 있었다.

 

  경상도의 경우 동래‧김해지회가 계승되어,150) 1910년 9월 대한협회가 해산될 때까지 경북 10개 군, 경남 7개 군에 지회가 설립되었다.대한자강회가 해산되고 설립된 대한협회는 당시 지역학회운동의 일환으로 조직된 5개의 학회와 함께 통감부 체제하의 합법적인 단체로서 다소 타협적인 민족주의 성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리하여 계몽운동은 1907년 말부터 분화현상을 보이면서, 단체조직에 있어서도 한편으로는 대한협회와 5개의 학회, 다른 한편으로는 신민회와 대동청년단 등으로 갈라서게 되었다.151)

  한편, 서울에서 활동하던 지방출신의 인사들은 상호간의 친목과 출신지역에 계몽사상 보급을 목표로 계몽운동단체를 조직하였다.152) 재경 영남인사가 조직한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는 관동학회關東學會와 함께 가장 늦게 설립된 학회였다. 이미 을미의병 해산이후 상경한 경상도 유림들이 충의사忠義社를 중심으로 왕성하게 활동하였고,153) 한편으로는 1907년 문우회文友會인 영우회嶺友會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다.154) 교남교육회는 체계적인 흥학운동興學運動을 목표로 재경 경상도 인사 중 비교적 선각적인 유생들이 세웠으며, 대구와 동래출신의 인사가 중심이 되었다.

  1905년부터 경상도 각지에 독자적인 계몽운동단체가 나타났다. 경상도 지방 계몽운동단체 조직 상황은 다음과 같다.

[표-5] 경상도지방의 계몽운동단체 조직 상황

단 체 명

결 성 일

결성지

중 심 인 물

비 고

大邱廣文社

1905.봄

대구

金光濟(회장) 등

 興學設校

大東廣文會

1907.2.11

대구

朴海齡(회장) 등

 광문사의 부속기관인 文會

大邱廣學會

1906.8

대구

尹弼五‧金善久

 경성 광학사의 지회성격

達城親睦會

1908.9.5

대구

李根雨‧金容璇

 대한협회와 보조

講義園

1913.3.15

대구

洪宙一‧徐丙龍

 달성친목회 내에 설치

鳳城廣學會

1908.4

봉화

琴錫柱‧金濩圭

 흥학조칙에 따른 학교설립

永北學會

1908.6

안동

安東郡 紳士

 교육방침 연구

慶州郡敎育會

1908.11

경주

慶州 人民

 교육발달

懇親敎育會

1909

청도

雲門面 新院洞民

 문명학교 유지

雲山親睦會

1909

청도

雲門面民

 교육 및 상업발달

  비고 : 이 표는《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등에 의거하여 작성하였음.

  대구광학회大邱廣學會는 1906년 4월 서울에서 설립된 광학사廣學社155) 의지회로 1906년 8월 대구의 윤필오尹弼五‧김선구金善久 등 5~6인의 선각적 인물이 발기하여 결성하였다.156)서울의 광학사는 학교와 교육을 진흥하고 학술을 전국에 널리 퍼트리기 위한 단체로 경북의 김호규‧김진수와 같은 유생들이 1906년 2월 체임된 경북관찰사 이근호李根澔의 후원 하에 재경인사들과 함께 설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한자강회와는 표리를 이루는 연락기관으로 설립되었으므로,157) 그 지회인 대구광학회는 대한자강회의 지회 성격도 띠고 있었다.

  1906년 3월 경북관찰사로 부임한 신태휴는 대구광문사와 협의하여 근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1906년 3월 광무황제의 흥학조칙興學詔勅에 따라 3월 20일 경북관찰사 신태휴의 흥학훈령興學訓令이 발표되기에 이르렀다.158) 흥학훈령을 관찰사가 발표하자 대구지방의 유력인사로 조직된 대구광문사는 총회를 열어 학교총무인 권태성權泰成‧김진수金進洙‧김호규金濩圭(봉화인)‧김택로金澤魯(안동인) 등이 흥학조칙을 낭독‧선포하였다.159)

  뿐만 아니라 학교설립을 위한 방략을 결의한 관찰사와 학교총무들은 흥학조칙을 받들고 각 군을 순행하여 학교를 확장하기로 하였다.160)

  이리하여 관찰사 신태휴는 학교총무學校總務 김호규 등을 대동하고 안동‧예안을 필두로 41개 군을 돌면서 학교설립을 추진하였다.161) 뿐만 아니라 신태휴는 학교설립의 실천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김광제金光濟를 파견하였으며,162) 각 군 유생들에게도 권학문勸學文을 발송하여 학교 설립을 위해 단결‧용진할 것을 권유하였다.163)

  대구광학회와는 달리 대구에는 이미 1906년 1월 대구광문사가 설립되어 흥학설교興學設校를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달성광문사達城廣文社라 불리기도 한 대구광문사는 1907년 음력 정월 16일, 회 이름을 대동광학회大東廣文會로 바꾸었다.164)

  대구광학회는 대한자강회와 밀착되어 대구지방의 계몽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대구광학회의 사무실은 대구의 유지인 이동진李東珍이 설립하고, 그의 아들 이일우李一雨가 운영하고 있던 우현서루友弦書樓를 이용하였다. 우현서루는 동‧서양의 책 수백 종을 비치한 도서실로, 대구지방의 계몽적 인사들이 출입하여 개화의 산실 역할을 맡았다.165) 대구지방은 토착 신흥자본가들이 새로운 경제체제에 대해 자립적인 태세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군사‧정치력을 배경으로 한 일본인의 경제침투가 강행되어 일본인에 의한 경제구조로 재편성되어 가고 있었다. 따라서 경 제적 예속이라는 위기의식의 증폭과 함께 외교권을 박탈당한 이후 국권마저 빼앗겨 가는 상황에서 침략의 담보인 국채문제를 간과할 수 없었다.

  1907년 2월 16일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 부사장 서상돈徐相燉 등이 발의한 대구단연상채소大邱斷煙償債所를 필두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경북지방의 경우에는 경북각군국채의무금수합소慶北各郡國債義務金收合所가 결성되어 대구단연상채소와 유기적인 연결 속에 전개되었다. 또 각 군에서는 국채보상을 위한 보상소가 설립되어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 확산되었다.

  1908년 9월 5일 결성된 달성친목회達城親睦會는 이근우李根雨‧김용선金容璇 등의 계몽지식인들이 발기하였다. 그 회원들은 신흥자본가세력의 후원속에 신사상과 신문물을 희구하며 성장한 계몽지식인이었다. 대구를 중심으로 청년의 교육敎育‧실업장려實業獎勵를 표방한 달성친목회는 청년들을 단결시켜 비밀리에 배일사상을 고취시키던 단체였다.166)

  1909년 청도군 동이위면東二位面(현 雲門面)의 유지들이 간친교육회懇親敎育會와 운산친목회雲山親睦會를 설립하였다. 전자는 동이위면 신원동新院洞에 설립된 사립 문명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었고, 후자는 그곳에 있던 운산시계雲山詩契를 변경하여 친목회親睦會로 정하고 교육과 상업발달을 목적으로 조직된 것이다.167) 안동에서는 유지들이 1908년 10월 영가학교永嘉學校와 동명학교東明學校를 설립하고 교육방침을 연구하기 위한 영북학회永北學會를 조직하였고,168) 봉화군에서는 금석주琴錫柱‧김호규金濩圭 등 100여 명이 봉성광학회鳳城廣學會를 조직하고 학교 설립과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교육에 힘을 쏟았다.169) 경주에서는 1908년 2월 인민들이 교육회敎育會를 조직하고 규칙을 제정하여 학도의 강제모집‧교수, 부형이 학도를 입학시키지 않을 경우 벌금을 징수한다는 방침을 세우는 열성을 보이기도 하였다.170)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경상도에 있어서 한말 계몽운동은 교육과 실업을 진흥하여 국권회복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앙중심의 계몽운동과 마찬가지로 그 강도에 있어서 차이는 있었을지 모르나, 지방의 운동도 추구한 이념과 방법은 같은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의병전쟁계열의 인사들이 의병전쟁의 한계를 인식하고 계몽운동의 실천으로 교육에 관심을 보였듯이,171) 1910년 국권상실에 즈음하여 계몽운동계열의 인사들도 실력양성이 가진 국권회복운동으로서의 한계를 인식하고 무장투쟁 노선으로 선회하여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나서게 되었다. 따라서 1910년대 독립운동에 있어서 무장투쟁노선은 의병전쟁계열과 이해를 공유하게 되었다.

 

  2. 문경지역의 계몽운동

  1905년 이후 계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경상북도의 경우에도 중앙의 계몽운동단체 지방지회와 독자적인 계몽운동단체가 결성되었다.

  하지만 문경지역에는 계몽운동단체를 조직하거나 참여하는 유생들은 보이지 않는다. 문경지역 인사들이 계몽운동에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는 1908년이다. 그 해 3월 서울에서 활동하던 영남출신의 인사들이 상호간의 친목과 계몽사상의 보급을 목표로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를 조직하였는데, 거기에 문경출신의 재경인사들도 다수 참여하고 있었다. 문경지역 출신으로 교남교육회에 가입한 인사는 다음과 같다.172)

문경지역 교남교육회 회원

◦ 김인호金麟浩   ◦ 김종구金鍾九   ◦ 채장묵蔡章黙   ◦ 신철희申喆熙

◦ 조양원趙良元   ◦ 황의필黃義弼   ◦ 황의목黃義睦   ◦ 채홍국蔡鴻國

◦ 황의형黃義衡   ◦ 엄장섭嚴章燮   ◦ 엄경섭嚴敬燮   ◦ 황의박黃義博

◦ 고영기高永箕   ◦ 김영건金永建   ◦ 권중협權重協   ◦ 신태준申泰駿

◦ 황정연黃正淵   ◦ 황의주黃義周


  교남교육회는 창립 이래 1910년 5월까지 총 615명의 회원이 가입하였다. 회원의 출신지역을 보면 경북지역이 409명, 경남지역이 136명이며, 출신지역 미상이 68명, 전북 무안 1명과 강원도 횡성 1명이다.

  문경지역의 교남교육회 회원은 모두 18명이다. 이들은 문경지역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장수황씨長水黃氏‧인천채씨仁川蔡氏‧개성고씨開城高氏 등 유력 가문출신이다. 그중 권중협權重協은 육군무관학교(1898) 출신으로 육군 참위(1898)를 거쳐 진위대 보병 제2대대 중대장을 역임하였으며, 김인호金麟浩(1871~1909)는 대한제국 육군 부위副尉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채장묵蔡章黙(1863~1914) 역시 대한제국 육군 부위副尉‧교위校尉를 거쳐 통정通政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교남교육회의 평의원評議員 신철희申喆熙는 문경군수聞慶郡守를 역임하였고, 황의필黃義弼(1866~1951)173)은 문경군수에 임명되었으며, 황의박黃義博(1883~1938)은 1910년 10월 충청북도 군서기에 임명된 뒤 익산‧개천‧용강군수를 지내는 등 일제 통치기구의 하부조직에 종사하였다.174)

  한편,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황정연黃正淵이 눈길을 끈다. 그는 1921년 북경에서 조직된 보합단保合團의 국내지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붙들려 1921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제령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175)

  1) 신교육구국운동

  1906년 3월 광무황제의 흥학조칙興學詔勅에 따라 3월 20일 경북관찰사 신태휴는 흥학훈령興學訓令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신태휴는 대구광문사 소속의 학교총무 권태성權泰成‧김진수金進洙‧김호규金濩圭(봉화인)‧김택로金澤魯(안동인) 등을 대동하고 안동‧예안을 필두로 관하 41개 군을 순방하여 학교설립을 추진하였다.

  문경지역의 대표적인 근대학교는 사립 도천소학교道川普通學校이다. 1906년 사립 도천소학교 발기인 황의필黃義弼은 다음과 같이 학부에 인허를 청원하였다.

  本郡本面이 接在今禮安 之 境 하와 遐 僻 習俗이 頑昧異常하야 一自本校設立之後로 大驚小怪에 斥爲異端하야 見國旗則指以東學旗號하고 聞愛國歌則認若東學呪誦하며 且義兵惡菌이 塞滿腸肚하야 [중략] 團結同志하고 激勵學員하야 一以抵排하고 一以說諭이나 此等愚昧난 卒難開悟이오니 發起者이 若心費力은 庶可下燭하올지라 若不上部로 獎勵保護하시면 難免衆楚之咻에 虛或一貧之虧하와 玆以冒懇하오니 査燭後本校私立을 特爲認許하시고 另加獎護하심을 伏望이라.176)

  위 청원서를 보면, 한말 문경지역은 동학교도와 의병들의 활동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1906년 문경지역의 선각적인 유림들은 학교 설립을 통해 그 난국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즉 황의필 등이 1906년 설립된 문경지역의 신교육기관 사립 도천소학교를 소학교로 인허해 줄 것을 학부에 신청하고 있는 것이다.

  1907년 3월 황철연黃喆淵(문경군 북면 대토리)과 신태준申泰俊(용궁군 중하면 청호리)이 설립한 사립 도천소학교는 생도 50여 명을 모집하여 교육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립 도천소학교는 1907년 9월 3일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08년 봄에 중건하였다. 즉 1907년 9월 3일 사립 도천소학교는 이강년의병부대에 의해 교사로 쓰이던 장수황씨 종택 강당이 소실되었고, 또 문중인사들이 잡혀가 심한 고초를 당하기도 하였다.177)

  1908년 중건과정에서 학교설립에 반대하는 세력과 연결된 문경군수 신용진辛龍鎭은 도천소학교의 중건낙성식重建落成式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설립과정에서 기부된 각 서당(사숙)의 재물도 탈취하였다.178) 그 후 군수 신용진은 은결隱結 결전結錢 400원을 유용한 일이 드러나 대구재무서로 잡혀갔다.179) 이에 1908년 10월, 도천소학교를 발기‧설립한 황철연과 신태준은 군수에게 탈취당한 서당 재산을 학교에 돌려 달라고 요구하며 단지혈서로 관찰부에 청원하였다.180)

  그 후 문경군수 신용진은 관찰사의 권고 때문인지 “면장 및 대소인민에게”다음과 같은 권고문勸告文을 발표하였다.

  現今 文明世界에 敎育一款은 上天子로 至庶人히 莫不注意之時代也라 故로 有志先覺者ㅣ 特設道川學校하야 敎科綜明하고 新學勇進터니 不幸被燹掃蕩之後로 經費窘絀에 實所慨歎이라 然而興學之心이 百折不挫하고 一新重建하야 敎師는 闕俸益勵에 確樹模範하고 學員은 斷指結誓 血心扶植하니 壯哉라 斯志여聞風者ㅣ 孰不感舊而贊成也哉아 本職도 素注意于此하야 夙夜憂憫에 愧乏補益之道 故로 玆以天聲疾呼하오니 惟願僉君子는 顯護此校를 須知自己之事하고 協心團體하야 勸道子姪에 亟亟趨學케하며 爲父兄者는 各盡義務하야 講究維持方針에 使此學校로 完全蔚興則諸君名譽가 非但轟振於嶠南而已라 實爲帝國之光榮이로 同胞之慶幸矣니 警哉勉哉어다.181)

  한편, 1907년 문경 대승사大乘寺에는 승려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한 경흥학교慶興學校가 설립되었다. 경흥학교는 문경 대승사의 권화응權華應‧김용사 김월현金月現‧상주 남장사 김취선金就善‧예천 용문사 윤포운尹布運‧풍기 명봉사 이월운李月運‧안동 광흥사 김담화金曇華 등의 승려가 청년승려의 교육 발달을 위해 대승사에 창설한 학교였다.182) 그 후 문경 대승사에는 1910년 4월 총무 홍월초洪月初 등의 승려가 원종학교圓宗學校를 설립하기도 하였다.183)

  그 외 문경군 가은면에는 신한균申漢均‧김태영金泰永‧김재명金在明‧신의균申義均 등의 지사들이 교육의 부진을 개탄하고 토지를 팔아 청년교육을 위한 야학교夜學校를 세우기도 하였다.184)

  2) 국채보상운동

  1907년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국채 1,300만 환을 갚아야 한다는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대구에서 발기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경북지방의 경우에는 이 운동이 대구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다른 지방에 비해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갔다.

  1907년 1월 29일의 발의에 이어, 2월 21일에 대구단연회大邱斷煙會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대구민의소가 국민대회를 소집하여 대중들의 참여를 유도하자, 민중들의 참여가 격증하였다. 특히 이틀 뒤인 2월 23일에는 대구 남일동에서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南一洞佩物廢止婦人會가 조직되면서 취지서가 발표되는 등 그 반응은 대단한 것이었다.185)

  대구단연회 주도 인물들은 이를 확산시켜 나가기로 방침을 굳혔다. 그래서 경북국채보상도총회慶北國債報償道總會를 구성하여 보상금의 관리와 단체에 대한 관리를 조직화하기까지186) 국채보상운동은 각 군으로 확산되었다.

[표-6] 경상북도 지방 국채보상소 설립상황

단 체 명

설립시기

중 심 인 물

비 고

大邱斷烟償債所
혹 大邱斷烟會

1907.2.21

大邱廣文社/壽昌社에
國債志願金收合事務所

∙《大韓每日申報》1907.3.9

大邱南一洞佩物廢止
婦人會

1907.2.23

大邱 有志婦人

∙《大韓每日申報》1907.3.9
∙《大韓每日申報》1907.3.8

國債報償脫環會

1907.4.

大邱 有志婦人

∙《大韓每日申報》1907.4.22

高靈郡國債報償會

1907.3.13

李奎紳‧李寅梓‧李相羲

∙《大韓每日申報》1907.4.21

善山斷烟同盟會
善山斷烟償債所
혹 善山斷烟同盟會

1907.3.

1907.3.

沈廷燮
沈廷燮‧李愚烈

∙《皇城新聞》1907.3.7
∙《大韓每日申報》1907.4.13
∙《皇城新聞》1907.4.1

金泉國債報償會
혹 大韓同盟會

1907.3.

李秉宰‧金安瑞‧金順瑞
등 21인 김천민의소

∙《大韓每日申報》1907.4.4
∙《大韓每日申報》1907.5.8
∙《皇城新聞》1907.3.28

淸道國債義捐會

1907.4.4

金馹俊‧박병현‧朴龍在‧
金明玉‧李庭禹

∙《大韓每日申報》1907.4.4

國債報償尙州義務所

1907.4.9

朴在翊‧朴正準 등
11인

∙《大韓每日申報》1907.4.8‧12

∙《皇城新聞》1907.3.28

(尙州)償債所

1907.4.

金在益‧姜信圭

∙《大韓每日申報》1907.4.13

星州郡國債報償義務會

1907.4.12

李承熙‧裵遇鴻

∙《皇城新聞》1907.4.8‧11
∙《大韓每日申報》1907.4.13

慶山國債報償斷烟同盟會

1907.4.28

崔伯熙‧金宇淑‧金昌信

∙《大韓每日申報》1907.4.27

醴泉國債報償會

1907.4.

韓啓昌‧金東圭‧崔龍熙

∙《皇城新聞》1907.4.13

聞慶國債補償金支援所

聞慶國債補償金義務所

1907.4.

1907.4.

蔡元植‧錢道熙
蔡永震‧李康五

∙《皇城新聞》1907.4.10
∙《皇城新聞》1907.4.16

慶州郡商務所決成會
慶州郡國債報償斷烟同志會 禁烟同盟會

1907.5.

李中久(회장)‧崔鉉軾

∙《皇城新聞》1907.5.22

玄風郡國債報償同盟會
혹 玄風郡斷烟償債會

1907.5.14

金眞極‧김오발

∙《大韓每日申報》1907.5.25

∙《大韓每日申報》1907.5.12

龍宮國債報償會

1907.5.14

鄭寅卓‧全병태

 

大邱南山洞國債報償婦人會

1907.6.

徐주元(회장)

∙《大韓每日申報》1907.6.20

鬱島郡(國債報償會)

1907.7.

金光鎬‧田在恒

∙《皇城新聞》1907.7.13


  국채보상운동은 대구광문사大邱廣文社가 1907년 2월 대구단연상채소大邱斷煙償債所를 조직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서울에서는 1907년 4월 국채보상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國債報償志願金總合所가 만들어졌다.187) 한편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의 유기적인 연락기관으로 1907년 7월 경상북도에는 경북각군국채의무금수합소慶北各郡國債義務金收合所가 결성되었다. 이리하여 수합소는 대구단연상채소大邱斷烟償債所와 함께 서울의 총합소를 연결하는 경상북도지역 국채보상운동의 지도기관이 되었다.

  문경군의 경우, 1907년 4월 설립된 문경국채보상금지원소聞慶國債補償金支援所와 문경국채보상금의무소聞慶國債補償金義務所가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였다. 문경국채보상지원소는 채원식蔡元植‧전도희錢道熙 등 9인이 설립하고 광고문을 발포하였으며,188)

  문경국채보상금의무소는 채영진蔡永震‧이강오李康五 등 19인이 설립하고 의연금을 모집하기 시작하였다.189)

1) 趙東杰, 「義兵運動의 韓國民族主義上의 位置」上‧下,《한국민족운동사연구》제1‧3집,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1986‧1989.

2) 權五榮, 「1881년의 嶺南萬人疏」, 尹炳奭敎授華甲紀念 『韓國近代史論叢』, 지식산업사,1990.

3) 『雲崗先生文集』 卷之二, 附錄 「行狀」.

4) 李正奎, 『恒齋集』卷15, 「雲崗李公行狀」.

5) 『雲崗先生倡義日錄』, 「識」(金晦鎭).

6) 宋相燾, 『騎驢隨筆』, 「李康秊」.

7) 『雲崗先生倡義日錄』 卷之一.

8) 沈巨擘의 호는 洪黨, 본관은 靑松으로 문경출신이다.

9) 『雲崗先生倡義日錄』 卷之一; 『雲崗先生倡義日錄』은 정월 29일, 『雲崗先生遺稿』의 『倡義事實記』는 정월 19일로 기록되어 있다.

10) 李正奎, 『從義錄』.

11) 『昭義新編』卷2, 「雜錄」.

12) 李正奎, 『從義錄』.

13) 李正奎, 『從義錄』.

14) 李正奎, 『從義錄』.

15) 李正奎, 『從義錄』.

16) 李正奎, 『從義錄』.

17) 李正奎, 『從義錄』.

18) 李正奎, 『從義錄』; 李康秊, 『雲崗先生倡義日錄』; 朴貞洙, 『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 등을 참조.

19) 李正奎, 『恒齋集』卷15, 「雲崗李公行狀」.

20) 朴貞洙‧姜順熙, 『倡義事實記』 丙申 2월 1일자.

21) 朴貞洙, 『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 丙申 2월 6일자.

22) 朴貞洙‧姜順熙, 『倡義事實記』, 6쪽.

23) 朴貞洙, 『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 丙申 2월 10일자.

24) 朴貞洙, 『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 丙申 2월 14일자.

25) 朴貞洙‧姜順熙, 『倡義事實記』, 6쪽, 「駐次東院村條」.

26) 朴貞洙‧姜順熙, 『倡義事實記』, 6쪽, 「駐次東院村條」.

27) 朴貞洙‧姜順熙, 『倡義事實記』, 7쪽.

28) 朴貞洙‧姜順熙, 『倡義事實記』, 7쪽.

29) 朴貞洙, 『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 丙申 2월 22일자.

30) 朴貞洙, 『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 丙申 2월 28일자.

31) 朴貞洙, 『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 丙申 3월 8일자.

32) 朴貞洙, 『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 丙申 3월 13일자.

33) 張忠植, 『일기』 丙申 3월 13일자.

34) 朴貞洙, 『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 丙申 4월 13일자.

35) 李正奎, 「安下沙傳」‧「洪思九傳」, 『육의사열전』.

36) 元容正, 『대략』 丙申 4월 17일자.

37) 『暴徒編冊』 3호, 「暴徒槪況」.

38) 김정미, 「한말 경상도 영해지방의 의병전쟁」,《大丘史學》제42집, 대구사학회, 1991.

39) 裵勇一, 「山南義陣考」,《한국민족운동사연구》5,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1991, 41쪽.

40) 洪淳鈺, 「義兵 李康秊部隊 戰鬪考(1907~1908)」,《軍史》5,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1982.

41) 愼鏞廈, 「全國 ‘十三道倡義大陣所’의 聯合義兵運動」,《한국독립운동사연구》제1집,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7.

42) 愼鏞廈, 「全國 ‘十三道倡義大陣所’의 聯合義兵運動」,《한국독립운동사연구》제1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7, 11쪽.

4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제2권, 1983, 589-593쪽.

44)《황성신문》1906년 5월 8일자, ‘慶北義兵’.

45) 朴貞洙, 『雲崗先生倡義顚末』卷之一.

46) 權大雄, 「金山義陣考」, 尹炳奭敎授華甲紀念 『韓國近代史論叢』, 지식산업사, 1990.

47) 金道鉉, 「碧山先生倡義顚末」, 『독립운동사자료집』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83, 719쪽.

48) 許善道, 『倡義將愼菴盧應奎先生抗日鬪爭略傳』(등사본), 1967.

49) 盈德郡, 『盈德郡誌』, 1981, 609쪽.

50) 金道鉉, 「碧山先生倡義顚末」, 『독립운동사자료집』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83, 36쪽.

51) 許善道, 『倡義將愼菴盧應奎先生抗日鬪爭略傳』(등사본), 1967.

52) 呂中龍, 『南隱先生遺集』卷之二, 「乙巳日記」.

53) 『山南倡義誌』(上) 卷之一.

54) 金正明 編, 「警秘收 第279號, 隆熙 3년 12월 14일, ‘義兵將徐炳熙逮捕의 件’」, 『朝鮮獨立運動』, 原書房, 1967, 105쪽.

55) 『山南倡義誌』(上), 「都察使父子論議」.

56) 李求鎔, 「雲崗 李康秊의 抗日義兵活動」,《江原史學》제7집, 강원대학교사학회, 1991; 鄭濟愚, 「舊韓末 義兵將 李康秊 硏究」, 인하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2.

57) 梁漢緯, 『梁碧濤公濟安實記』.

58) 朴貞洙, 『雲崗先生倡義日錄』卷之一.

59) 朴貞洙, 『雲崗先生倡義日錄』卷之一.

60) 鄭雲慶, 『松雲集』卷四, 「祭雲岡李公文」.

61) 呂中龍, 『南隱先生遺集』卷之二, 「乙巳日記」.

62) 朴貞洙, 『雲崗先生倡義日錄』卷之一.

63) 朴貞洙, 『雲崗先生倡義日錄』卷之一.

64) 朝鮮駐箚軍司令部, 『朝鮮暴徒討伐誌』, 1913, 685-687쪽.

65) 朴貞洙, 『雲崗先生倡義日錄』卷之一.

66 『문경의 의병과 독립운동사 연구

66) 朴貞洙, 『雲崗先生倡義日錄』卷之一.

67) 洪淳鈺, 「義兵 李康秊部隊 戰鬪考(1907~1908)」,《軍史》5,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1982; 鄭濟愚, 「舊韓末 義兵將 李康秊 硏究」, 인하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1992; 具完會, 『韓末의 堤川義兵』, 集文堂, 1997.

68) 朴貞洙, 『雲崗先生倡義日錄』 卷之一; 『雲岡先生遺稿』, 附錄 卷二一, 「倡義事實記」; 權用佾, 「丁未倭亂倡義錄」(權淸隱履歷誌),《창작과비평》통권 64호 겨울호, 창작과비평사, 1977, 210쪽.

69) 李圭弘, 『洗心軒日記』(필사본).

70)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參1發 제50호, 1907년 8월 12일, 한국주차군사령관 보고」, 日本外交史料館 所藏 『韓末義兵資料』Ⅳ, 2002, 41쪽.

71) 朴貞洙, 『雲崗先生倡義日錄』卷之一, 7月 己未條; 權用佾, 「丁未倭亂倡義錄」(權淸隱履歷誌),《창작과비평》통권 64호 겨울호, 창작과비평사, 1977, 211쪽.

72) 朝鮮駐箚軍司令部, 『朝鮮暴徒討伐誌』, 1913, 697쪽.

71) 朴貞洙, 『雲崗先生倡義日錄』卷之一, 7月 己未條; 權用佾, 「丁未倭亂倡義錄」(權淸隱履歷誌),《창작과비평》통권 64호 겨울호, 창작과비평사, 1977, 211쪽.

72) 朝鮮駐箚軍司令部, 『朝鮮暴徒討伐誌』, 1913, 697쪽.

73)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參1發 제111호, 1907년 9월 10일, 한국주차군사령관보고」, 日本外交史料館 所藏 『韓末義兵資料』Ⅳ, 2002, 73쪽;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參1發 제120호, 1907년 9월 14일, 한국주차군사령관 보고」, 日本外交史料館所藏 『韓末義兵資料』Ⅳ, 2002, 85쪽;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參1發 제121호, 1907년 9월 15일, 한국주차군사령관 보고」, 日本外交史料館 所藏 『韓末義兵資料』Ⅳ, 2002, 88쪽.4) 朴貞洙, 『雲崗先生倡義日錄』卷之一, 8월 庚申條.

74) 朴貞洙, 『雲崗先生倡義日錄』卷之一, 8월 庚申條.

75)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參1發 제111호, 1907년 9월 10일, 한국주차군사령관 보고」, 日本外交史料館 所藏 『韓末義兵資料』Ⅳ, 2002, 73쪽.

76) 朴貞洙, 『雲崗先生倡義日錄』卷之一, 8월 壬戌條.

77) 權用佾, 「丁未倭亂倡義錄」(權淸隱履歷誌),《창작과비평》통권 64호 겨울호, 창작과 비평사, 1977, 211-212쪽. 그 밖의 갈평전투의 병력배치와 전투상황은 『雲崗先生倡義日錄』과 『倡義事實記』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나 병력의 규모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폭도사편집자료』에는 1천명 이상으로 기록하고 있다.

81) 朝鮮駐箚軍司令部, 『朝鮮暴徒討伐誌』, 1913, 698-699쪽.

82)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參1發 제125호, 1907년 9월 17일, 한국주차군사령관 보고」, 日本外交史料館 所藏 『韓末義兵資料』Ⅳ, 2002, 88쪽.

83) 權用佾, 「丁未倭亂倡義錄」(權淸隱履歷誌),《창작과비평》통권 64호 겨울호, 창작과 비평사, 1977, 211-212쪽.

84) 朴貞洙, 『雲崗先生倡義日錄』卷之二, 「將任錄」; 문경시는 한국자연환경연구소 주관으로 2007년 10월 1일부터【동로 적성리 의병총 유해발굴】에 착수하여 11월 16일 현장설명회를 가졌다. 발굴 결과 『雲崗先生倡義日錄������ 등의 문헌기록과 구전되고 있는 의병총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문헌기록과 구전을 고려할 때, 적성리 전방 시루봉 경사면 구릉지 일대에 의병총이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적성전투 당시의 급박한 상황과 현재 이 일대가 오미자과수원으로 개간‧경작되고 있는 실정을 고려할 때, 정확한 위치를 추적하기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장래 문헌기록과 구전을 정밀히 검토하여 재조사를 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본다.

85) 위와 같은 자료.

86) 朴貞洙, 『雲崗先生倡義日錄』卷之一; 愼鏞廈, 「全國13道倡義大陣所의 聯合義兵運動」,《한국독립운동사연구》제1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7.

87) 『雲岡先生倡義日錄』卷之一, 10월 戊辰條.

88)《대한매일신보》1907년 11월 15일자.

8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暴徒史編輯資料」, 『독립운동사자료집』3, 1983, 582쪽.

9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朝鮮暴徒討伐誌」, 『독립운동사자료집』 3, 1983, 717쪽.

9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暴徒史編輯資料」, 『독립운동사자료집』3, 1983, 598쪽.

92) 鄭濟愚, 「韓末 義兵將 李康秊 硏究」, 인하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2.

9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朝鮮暴徒討伐誌」, 『독립운동사자료집』2, 1983, 762쪽.

94) 鄭濟愚, 「韓末 義兵將 李康秊 硏究」, 인하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2.

95) 朝鮮駐箚軍司令部, 『朝鮮暴徒討伐誌』, 1913.

96) 국사편찬위원회, 「榮秘第06號, 隆熙 2年 5月 16日, ‘匪徒 報告에 關한 件’」, 『韓國獨立運動史』資料 11, 義兵編Ⅳ, 1982, 65쪽.

97) 국사편찬위원회, 「安秘收第233號, 隆熙 2年 5月 18日, ‘暴徒 來襲에 關한 件’」, 『韓國獨立運動史』資料 11, 義兵編Ⅳ, 1982, 74쪽.

98) 『雲崗先生倡義日錄』2, 隆熙 2年 4月條.

99) 權用佾, 「丁未倭亂倡義錄」(權淸隱履歷誌),《창작과비평》통권 64호 겨울호, 창작과비평사, 1977, 226쪽.

100) 朝鮮駐箚軍司令部, 『朝鮮暴徒討伐誌』, 1913.

101) 국사편찬위원회, 「號外秘一, 隆熙 2年 5月 17日, ‘暴徒 來襲에 關한 件’」, 『韓國獨立運動史』資料 11, 義兵編 Ⅳ, 1982, 71쪽.

102) 국사편찬위원회, 「安秘收第233號, 隆熙 2年 5月 18日, ‘暴徒 來襲에 關한 件’」, 『韓國獨立運動史』資料 11, 義兵編 Ⅳ, 1982, 74쪽.

103) 국사편찬위원회, 「榮秘發 號外 第6號, 隆熙 2年 5月 21日, ‘暴徒事件’」, 『韓國獨立運動史』資料 11, 義兵編 Ⅳ, 1982, 95쪽.

104) 국사편찬위원회, 「榮秘 號外 第4號, 隆熙 2年 5月 20日, ‘暴徒 事件’」, 『韓國獨立運動史』資料 11, 義兵編 Ⅳ, 1982, 95쪽.

105) 국사편찬위원회, 「榮秘 號外 第2, 隆熙 2年 5月 18日, ‘匪徒에 관한 件’」,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11, 義兵編 Ⅳ, 1982, 75쪽.

106) 국사편찬위원회, 「榮秘 號外 第3號, 隆熙 2年 5月 19日, ‘暴徒事件’」, 『韓國獨立運動史』資料 11, 義兵編 Ⅳ, 1982, 79쪽.

107) 朝鮮駐箚軍司令部, 『朝鮮暴徒討伐誌』, 1913.

108) 『雲崗先生倡義日錄』卷2, 9쪽.

109) 朝鮮駐箚軍司令部, 『朝鮮暴徒討伐誌』, 1913.

110) 朴貞洙‧姜順熙, 『倡義事實記』, 戊申 5월 23일자.

111) 權用佾, 「丁未倭亂倡義錄」(權淸隱履歷誌),《창작과비평》통권 64호 겨울호, 창작과비평사, 1977, 228쪽.

112) 朴貞洙‧姜順熙, 『倡義事實記』, 戊申 6월 4일자.

113) 朴貞洙‧姜順熙, 『倡義事實記』, 戊申 6월 4일자.

114) 朴貞洙, 『雲崗先生倡義日錄』卷之二.

115) 朴貞洙, 『雲崗先生倡義日錄』卷之二.

116) 朴貞洙, 『雲崗先生倡義日錄』卷之二.

117)《皇城新聞》1906년 7월 21일자.

118) 『竹圃先生實記』 및 「殉國烈士竹圃金先生略傳」.

119) 朴貞洙, 『雲崗先生倡義日錄』卷之一.

120) 國家報勳處, 『獨立有功者功勳錄』第1卷, 1986, 845쪽; 오영섭, 「韓末 13道倡義大將 李麟榮의 生涯와 活動」,《한국독립운동사연구》제19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2, 201쪽.

121)《대한매일신보》1909년 7월 28일자, ‘義兵總大將 李麟榮氏의 略史(續)’; 국사편찬위원회, 「第一回 李麟榮問答調書」, 『韓國獨立運動史』1, 1965, 719‧736쪽; 宋相燾, 『騎驢隨筆』, 國史編纂委員會, 1971, 126쪽.

122) 국사편찬위원회, 「十三道倡義大將李麟榮逮捕始末」, 『韓國獨立運動史』1, 1965, 718쪽.

123) 李正奎, 『從義錄』, 36쪽.

124) 朴貞洙, 『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 丙申 5월 일, 459-460쪽.

125) 元容正, 『義菴柳先生西行大略』, 483쪽.

126) 宋相燾, 『騎驢隨筆』, 國史編纂委員會, 1971, 126쪽; 국사편찬위원회, 「第一回 李麟榮問答調書」, 『韓國獨立運動史』1, 1965, 729쪽.

127)《대한매일신보》1909년 7월 28일자, ‘義兵總大將 李麟榮氏의 略史(續)’.128)《대한매일신보》1909년 7월 28일자, ‘義兵總大將 李麟榮氏의 略史(續)’.

129)《대한매일신보》1909년 7월 28일자, ‘義兵總大將 李麟榮氏의 略史(續)’.

130)《대한매일신보》1909년 7월 28일자, ‘義兵總大將 李麟榮氏의 略史(續)’.

131) 국사편찬위원회, 「十三道倡義大將李麟榮逮捕始末」, 『韓國獨立運動史』1, 1965, 719쪽.

132) 『駐韓日本公使館記錄』, 警秘發 第176號, 「大韓每日申報ト暴徒」; 국사편찬위원회,「第二回李麟榮問答調書」, 『韓國獨立運動史』1, 1965, 734-745쪽.

133)《대한매일신보》1909년 7월 28일자, ‘義兵總大將 李麟榮氏의 略史(續)’.134) 국사편찬위원회, 「韓憲警乙第404號, ‘通報’」, 『韓國獨立運動史』資料 10 義兵篇Ⅲ,1981.

135)《대한매일신보》1909년 7월 28일자, ‘義兵總大將 李麟榮氏의 略史(續)’.

136) 국사편찬위원회, 「第二回李麟榮問答調書」, 『韓國獨立運動史』1, 1965, 738쪽.

137) 국사편찬위원회, 「第二回李麟榮問答調書」, 『韓國獨立運動史』1, 1965, 738쪽.

138) 국사편찬위원회, 「第二回李麟榮問答調書」, 『韓國獨立運動史』1, 1965, 731쪽.

139)《대한매일신보》1909년 7월 31일자, ‘義兵總大將 李麟榮氏의 略史(續)’; 국사편찬위원회, 「第二回李麟榮問答調書」, 『韓國獨立運動史』1, 1965, 723쪽.

140) 宋相燾, 『騎驢隨筆』, 國史編纂委員會, 1971, 128쪽.

141)《황성신문》1909년 6월 19일자.

142) 「도암신태식선생비문」(점촌시 모전동 소재); 鄭濟愚, 「島菴 申泰植의 抗日義兵活動-‘丁未年倡義歌’와 『雲崗倡義錄』과의 대비-」,《한국민족운동사연구》제6집,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1992; 具玩會, 『韓末의 堤川義兵』, 1997, 497쪽.

143) 심상훈, 「1920년대 초 朝鮮獨立運動後援義勇團의 활동과 이념」,《安東史學》第8輯,안동사학회, 2003.

14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별집1, 1983, 500-501쪽; 國家報勳處, 『獨立有功者功勳錄』第12卷, 1996, 96쪽.

14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별집1, 1983, 483쪽; 國家報勳處, 『獨立有功者功勳錄』第9卷, 1991, 727쪽.

146) 김종덕, 「한말 계몽운동의 계보와 성격」, 『조선후기의 체제위기와 사회운동』,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9.

147) 趙恒來, 「舊韓末 社會團體의 救國運動」,《省谷論叢》제7집, 성곡학술문화재단, 1976;柳永烈, 「大韓自强會의 愛國啓蒙運動」, 『韓國民族主義運動史』, 一潮閣, 1987; 趙東杰,「韓末啓蒙主義의 構造와 獨立運動上의 位置」,《韓國學論叢》11, 국민대 한국학연구소,1989.

148)《大韓自强會月報》제3호, 1906년 8월 41‧43쪽;《大韓自强會月報》제4호, 1906년 9월 42‧48쪽.

149)《大韓自强會月報》제9호, 1907년 3월 45쪽‧1907년 4월 제10호, 44쪽.

150)《大韓協會會報》제1호, 1908년 4월, 40‧41‧44쪽.

151) 趙東杰, 「韓末啓蒙主義의 構造와 獨立運動上의 位置」,《韓國學論叢》11,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1989, 71-74쪽.

152) 이른바 5학회로 지칭되던 5개의 지역학회인 西北學會(西友學會와 漢北興學會가 통합)‧湖南學會‧畿湖學會‧嶠南敎育會‧關東學會를 말한다.

153) 呂中龍, 『南隱先生遺集』, 「雜著」忠義社創立趣旨書‧忠義社條例‧署名錄.

154) 姜夏馥, 「會序」,《嶠南敎育會雜誌》제1호, 1909, 6쪽.

155) 廣學社는 南廷哲‧金濩圭 등의 인사가 발기하여 조직한 大韓自强會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단체이다. 대한자강회는 1906년 4월 말 토요일에 개회한 뒤 이튿날 일요일 廣學社를 창립하였다.

156)《황성신문》1906년 8월 20일자, ‘學會請師’.

157)《황성신문》1906년 5월 1일자, 論說 ‘告廣學社及一般社會同胞’.

158) 「興學訓令」은《황성신문》1906년 3월 19일부터 29일까지 연재되고,《대한매일신보》도 1906년 3월 29일자로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一. 각 군의 100호마다 일학교를 설립하되, 民戶가 극빈하고 學員이 부족하여 학교설립이 어려우면 2‧300호를 합하여 하나의 학교를 설립할 것.

一. 학교 경비는 100호가 매월 각 1兩 5錢씩 학교에 납부할 것.

一. 10호내에서 취학해야 할 子‧弟‧姪이 취학하지 않은 경우에는 그 父‧叔‧兄을 처벌하며 매삭 벌금 1兩 5錢을 학교에 납부하여 경비로 충당하고 완강히 거부하는 자는 지명‧보고할 것.

一. 각 면 각 동의 서당은 모두 폐지하고, 塾師는 머물지 말 것이며, 그 歲入錢穀이나 田畓은 학교로 부칠 것.

一. 學校課學規程은 군수와 교사가 상의하여 정할 것.

一. 학도의 年齡 8세부터 30세까지로 할 것.

一. 학도의 經紀, 교사의 擇定, 학도의 抄集, 교비의 收納은 통장이 군수의 지휘‧감독을 받아 성실히 거행할 것.

一. 통장이 성실치 않으면 군수가 징치하고, 심하면 관찰부가 엄징할 것.

一. 학교시설에 있어서 의연‧보조하면 돈의 多寡에 따라 널리 선양할 것.

159)《대한매일신보》1906년 4월 25일자, ‘慶北盛學’.

160)《대한매일신보》1906년 4월 22일자, ‘慶學大興’.

161)《황성신문》1906년 4월 23일자, ‘慶北校況’.

162)《대한매일신보》1906년 5월 29일자, ‘達察廣學’.

163)《황성신문》1906년 9월 1일자, ‘廣學勸學文’.

164)《황성신문》1906년 7월 26일자, ‘廣文社長注意’‧1907년 2월 11일자, ‘廣告’.

165)《大韓自强會月報》第4號, 1906년 10월, 42쪽; 大倫六十年史編纂委員會, 『大倫六十年史』,1982.

166) 大警 第2339號, 大正 8年 7月 24日, 達成親睦會 및 講遊園에 대한 「復命書」, 國史編纂委員會,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7, 國權恢復團 1, 1988, 297쪽.

167)《황성신문》1909년 6월 24일자, ‘兩個目的’.

168)《황성신문》1908년 10월 31일자, ‘永北學會’.

169)《황성신문》1908년 4월 19일자, ‘鳳城廣學會’.

170)《황성신문》1908년 11월 5일자, ‘事不穩當’.

171) 의병전쟁에 참여했던 보수적인 유생에 의해 설립된 학교는 金山의 呂中龍과 呂永韶(祚)가 설립한 養成學校, 보현산에 은거했던 梁濟安이 설립한 斗磨學校, 그리고 봉화의 琴錫柱‧金濩圭가 조직한 鳳城廣學會가 있었고, 또 일제의 기밀문서에 의하면 대구에서 대구광문사에서 활동하던 김광제는 자신이 의병출신으로 자칭 의병대장이라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

172)《嶠南敎育會雜誌》第一卷 第一號~第二卷 第十二號, 「會員名簿」.

173) 황의필(黃義弼, 1866~1951)은 자는 載卿, 호가 于齊이다. 일찍이 상경하여 한성신학연구원에서 신학문을 이수하고, 한말 친일계 언론 한성일보‧대한일보‧국민일보 등에서 기자 겸 주필을 역임하였다. 문경지역에서 도천학교 설립을 주도하였으며, 1909년 문경군수를 역임하였다.

174) 權大雄, 「韓末 嶠南敎育會 硏究」, 重山鄭德基博士華甲紀念 『韓國史의 理解』, 경인문화사, 1996.

175) 國家報勳處, 『獨立有功者功勳錄』第14卷, 2000.

176)《황성신문》1906년 7월 20일자, ‘請設小校學’.

177)《대한매일신보》1907년 9월 8일자, ‘남방소식’.

178)《황성신문》1908년 5월 17일자, ‘學校魔賊’.

179)《황성신문》1908년 6월 26일자, ‘偸隱被督’.

180)《황성신문》1908년 10월 16일자, ‘斷指生徒治療’;《대한매일신보》1908년 10월 8일자, ‘량씨열심’.

181)《황성신문》1908년 11월 13일자, ‘聞倅獎學’.

182)《황성신문》1907년 1월 10일자, ‘僧進新學’.

183)《황성신문》1910년 4월 29일자, ‘廣告’.

184)《대한매일신보》1909년 7월 9일자, ‘聞慶有慶’.

185)《대한매일신보》1907년 3월 8일자, ‘경고아부인동포아’.

186)《대한매일신보》1907년 7월 25일자, ‘잡보’.

187)《대한매일신보》1907년 5월 28일자.

188)《황성신문》1907년 4월 10일자, ‘志願所發文’.

189)《황성신문》1907년 4월 16일자, ‘又一起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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