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사 료 > Ⅳ. 삼국유사 / 사료와 전설로 보는 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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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사 료 > Ⅳ. 삼국유사  사료와 전설로 보는 견훤 / 문경문화원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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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후백제 연표사 료설 화유적과 지명문경지역의 유적문경지역의 지명그외지역 유적

  

 

 

  사료와 전설로 보는 견훤  

 

 

제1편 사  료 > Ⅳ. 삼국유사  

   1. 후백제 견훤

 

Ⅳ. 삼국유사

  1. 후백제 견훤

  삼국사본전에 견훤은 상주 가은현인인데 함통 8년 정해에 태어났고 본성은 이씨였는데 후에 견으로 성씨를 삼았다. 그의 부 아자개는 농사를 생업으로 하다가 광계 연중(서기 885~887)에 사불성(지금 상주)에 웅거하여 자칭 장군이라 하였다. 그에게는 사자가 있어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는데 그중 훤이 걸출하여 지략이 많았다 한다.

  이비가지에 의하면 진흥대왕의 비 사도의 시호는 백융부인이니 그의 제3자 구륜공의 자인 파진간 선품의 자 각간 작진이 처 왕교파리를 아내로 맞아 각간 원선을 낳으니 이가 아자개이었다. 자개의 제1처은 상원부인, 제2처는 남원부인이니 5자1녀를 낳았다. 장자는 곧 상부 훤이요, 제2자는 장군 능애, 제3자는 장군 용개, 제4자는 보개, 제5자는 장군 소개요, 1녀는 대주도금이라 하였다.

  또 고기에는 옛날에 한 부자가 광주북촌에 살았는데 1녀가 있어 모양이 단정하였다. 그의 부친에게 이르되 매양 자색의복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교혼한다 하였다. 그의 부친이「네가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찔러두라」고 하였다. 그 딸이 그리하였던 바 날이 밝아 실을 찾아보니 바늘이 북쪽 담 아래의 큰 지렁이 허리에 찔려 있었다. 그 후 임신이 되어 한 사내아이를 낳으니 나이 15세에 자칭 견훤이라고 하였다. 경복 원년(서기 852) 임자에 왕이라 일컫고 도읍을 완산군에 정하더니 치세 43년인 청태원년 갑오【역자주=이 연대는 잘못인 듯, 사기에는 을미, 즉 서기 935로 되어 있다】에 그이 세 아들이 반역하므로 훤은 태조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아들 금강이 즉위하여 천복 원년(서기 936) 병신에 고려병과 일선군에서 회전하다가 패하여 나라가 망하였다 한다. 처음에 훤이 유아시에 그의 부친이 들에서 밭을 갈고 있을 때 그의 모가 부친에게 밥을 갖다 주려하여 아이를 수풀 아래에 두었더니 범이 와서 젖을 먹이었다. 동네사람들이 듣고 이상히 여기었다. 훤이 장성하매 체모가 웅기하고 지기가 특립하여 범상치 않더니 군인이 되어 서울에 들어왔다가 서남해에 가서 방술할 때 과를 벼개하고 적을 기다리는 식으로 그 기상이 항상 사병의 으뜸이 되고 그 공로로 비장(보좌관)이 되었다. 당소종 경복 원년(서기 892)은 신라 진성왕 재위 6년이어니와, 이 때 군측에는 사랑받는 신하들이 있어 국권을 잡아 강기가 문란하여지고 게다가 기근으로 백성들이 유이하고 군도가 벌떼와 같이 일어났다.

  이에 훤이 속으로 반심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남쪽 주현을 침략하니 이르는 곳마다 모두 호응하며 한달 사이에 무리가 5천에 이르렀다. 드디어 무진주를 침습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공공연하게 왕이라 일컫지는 못하고 자칭 신라서남도통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국개국공이라 하니 용화(기) 원년(서기 889) 기유이었다. 혹은 경복 원년 임자라고도 한다. 이 때에 북원적 양길이 웅강하며 궁예는 자진하여 그의 부하가 되었다. 훤이 듣고 멀리 양길에게 비장의 직을 수하고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에 이르니 주민이 환영하는지라, 훤이 인심을 얻으려고 좌우에게 일러가로되「백제가 개국한지 6백여년에 당고종이 신라의 요청으로 장군 소정방을 보내어 선병 13만을 거느리고 도해하여 오고 신라의 김유신이 또한 휩쓸어와 황산을 거쳐 당군과 합하여 백제를 공멸하였으니 내 어찌 도읍을 건설하여 분원을 씻지 아니하랴」하고, 스스로 후백제왕이라 일컫고 관직을 분설하였다.

  이 때는 당 광화 3년(서기 900)이요, 신라 효공왕 4년이었다. 정명 4년(서기 918) 무인에 철원경에서 민심이 홀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즉위케 하니 훤이 듣고 사자를 보내어 하례하고 공작선과 지리산의 죽전등을 바치었다. 훤이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하는 체하고 속으로는 시기하여 태조에게 총마를 바치더니 3년 동 10월에는 기병 3천을 이끌고 조물성(지금은 자세치 않다)에 닥치므로 태조도 또한 정병을 거느리고 와서 대전하였다. 훤의 군사가 날래어 승부를 결치 못하겠으므로 태조가 거짓 화친하여 그 군사를 피로케 하려 하여 서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고 종제 왕신으로써 볼모를 삼으니 훤도 또한 사위 진호를 보내어 교환하였다.

  12월에 훤이 신라의 거서(지금은 자세치 않다) 등 20여성을 공취하고 사자를 후당에 보내어 번신이라 일컬었다. 당은 그에게 검교태위겸시중판백제군사란 작명을 주고 전대로 도독행전주자사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판치등사백제왕이라 하고 식읍은 2천5백호로 하였다. 4년에 진호가 갑자기 죽으니 훤은 고의로 죽인줄로 의심하여 곧 왕신을 가두고 사람을 보내어 전에 보냈던 총마를 돌려보내라 하니 태조가 웃으며 돌려보내었다. 천성 2년 정해 9월에 훤이 근품성(지금 산양면)을 공취하고 불지르니 신라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태조가 장차 출병하려 하니 훤이 고울부(지금 울주)를 습취하고 시림(혹은 계림서교라 한다)으로 군사를 내키어 드디어 신라왕도에 쳐들어갔다. 마침 신라왕이 부인으로 더불어 포석정에 나가 놀 때라 이로 말미암아 낭패막심이었다. 훤이 그 부인을 강제로 잡아 욕보이고 왕의 족제 김부로써 왕위를 잇게 하고 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을 부로로 하고 또 신라의 진보, 병기와 자녀 및 백공의 출중한 자를 취하여 데리고 갔다.

  태조가 정기 5천을 거느리고 공산하에서 훤을 맞이하여 크게 싸우다가 태조의 장수 김락과 신숭겸은 죽고 제군도 패배하니 태조는 경우 몸을 면했을 뿐으로 저항치 못하고 그 포악할 대로 내 버려 두었다. 훤은 승승하여 대목성(지금 약목) 경산부,강주를 노략하고 부곡성을 치며 또 의성부의 태수 홍술도 항전하다가 죽었다. 태조가 듣고 가로되 내가 오른쪽 손을 잃었다 하였다. 42년 경인에 훤이 고창군(지금 안동)을 치려고 대거하여 석산에 진을 치니 태조는 백보를 격하여 군북 병산에 진을 베풀고 여러번 싸우다가 훤이 패하자 시랑 김악을 잡았다.

  그 이튿날 훤이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순성을 습파하니 성주 원봉이 막지 못하고 밤에 도망하므로 태조가 대노하여 그 고을의 격을 떨어뜨려 하지현(지금 풍산읍이니 원봉은 본래 순성인인 때문이다)을 삼았다. 신라의 군신이 쇠세를 당하여 부흥키 어려우므로 우리 태조를 꾀어서 결호하고 후원을 삼으니, 훤이 듣고 또 왕도에 들어가 경악(포악)을 하고하 하였으나 태조가 혹 먼저갈까 두려워 하여 서신을 태조에게 보내 가로되 일전에 국상 김웅렴 등이 장차 족하를 서울로 불러들여 별이 원의 소리에 응한 듯이하니 이는 마치 안(메추라기)이 준(매)의 날개를 해치는 것과 같으며 반드시 생령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종사를 폐허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므로 내가 먼저 조편을 잡고 홀로 한월을 휘둘러 백료에게 백일을 가르키며 맹서하고 육부를 설유하되 의풍으로써 하였더니 뜻밖에 간신이 도망하고 방군이 돌아갔으므로 마침내 경명왕의 표제, 헌강왕의 외손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하여 위태한 나라를 재조하고 돌아간 임금의 자리를 잇게 하였다.

  족하는 충고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한갖 유언을 들어 백계로 왕위를 엿보고, 다방으로 나라를 침노하였으나 오히려 나의 말머리도 보지 못하고 나의 소털 하나도 뽑지 못하였다. 동초에 도두 색상은 성산진 아래에 손을 묶이었고 월내에 좌장 김락은 해골을 미리사 앞에 들어내었으며 그밖에 살획이 많고 추금도 적지 아니하였다. 강약이 이와 같으니 승패를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목적하는 바는 활을 평양문루에 걸고 나의 말로 패강물을 마시게 할 것이나, 전월 7일에 오월국사 반상서가 와서 조서를 전하되 경이 고려와 오래 화호를 통하고 서로 인맹을 맺은 것을 들었더니 근래 질자의 죽음을 원인으로 드디어 화친의 구호를 잃고 서로 지경을 침노하여 전쟁을 그치지 아니하므로 지금 일부러 사자를 발하여 경의 본도로 보내고 또 고려에도 글을 보내니 각기 서로 친목하고 길이 평화를 도모하도록 하라 하였다. 나는 존왕의 의를 두터이 하고 사대의 정을 깊이 하던 바 지금 조유를 듣고 곧 받들려 하나 다만 족하가 우리를 파하고자 하되 능히 파하지 못하고 곤경에 있으면서도 싸우려고 하는 것을 염려한다. 지금 그 조서를 등사하여 보내니 유의하여 상실하기를 바란다. 토끼와 개가 서로 지칠대로 지치면 마침내 비웃음을 받을 것이요, 조개와 황새가 서로 버티면 또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미복을 경계로 삼아 후회를 스스로 끼침이 없게 하라」 하였다. 

  천성 2년 정월에 태조가 답서하여 오월국 통화사 반상서의 전한 바 조서 한 통을 받들고 겸하여 족하의 준 장서의 사연을 받아 보았다. 화초부사가 이에 제서를 가지고 오고 척소 호음과 겸하여 교회를 입었다. 지검을 받들어 비록 감격은 하였으나 화전을 펴보니 혐의스러운 것이 많다. 지금 회사에게 탁하여 나의 심증을 피로하여 한다. 나의 위로 천명을 받들고 아래로 인민의 추대에 못이겨 외람히 장수의 직권을 가지고 경륜의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전자에 삼한의 액회로 구토가 흉황하여 인민은 많이 황건에 속하여 도적이 되고 전야는 적토가 되지 아니함이 없었다. 풍진의 소요함을 그치게 하고 방국의 재앙을 구하려 하여 이에 선린으로 우호를 맺으니, 과연 수천리가 농상을 즐겨 힘써 칠팔년 동안 사졸이 한가한 잠을 자더니 계유년 10월에 홀연히 사태가 발생하여 교전을 하게까지 되었다. 족하가 처음에는 적을 가벼이 여기어 마치 당랑이 거철함과 같이 곧장 달려들다가 마침내 어려움을 알고 용퇴한 것은 모기가 산을 진 것과 같았다. 공손히 사례하고 하늘을 가르쳐 맹세하노니 오늘부터는 길이 화목하여 조금이라도 맹세를 어리면 신이 벌할 것이다. 나도 또한 지과의 무를 숭상하고 불살의 인을 기하려 하여 마침내 중위를 풀어 피졸들을 쉬게 하고 질자도 거절치 않고 다만 백성만을 편안케 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내가 남인에게 큰 덕을 베푼 것이었다. 그런데 의외에도 삽혈도 마르지 않아서 흉위가 다시 일어났다. 봉채의 독이 생민을 침해하고 낭호의 광이 기전을 가르막아 금성이 곤궁하고 황옥이 경진하도록 되었다. 존주의 의를 행함에 있어 누가 환·문의 패업과 같느냐. 

  기회를 타서 한을 도모하던 것은 오직 망·탁의 간악함이었다. 왕의 지존으로써 그대에게 굽히어 자(자서민)라고 하게 하는 등 존비 차서를 잃으니 상하가 다같이 근심하여 이르되 원보의 충순이 아니면 어찌 다시 사직을 편안케 할 수 있으랴 한다. 나의 마음은 악이 없고 뜻은 존왕에 간절하여 장차 조정을 구원하여 방국의 위를 붙들어 일으키려 하나 족하는 티끌 만한 소리를 보고 천지의 후은을 저버리어 군주를 죽이고 궁궐을 불사르며 대관들을 참살하고 토민을 무찌르며 미녀는 취하여 같이 수례에 심고 진보도 약탈하여 서로 짐에 실으니 그 흉악함은 걸주보다 더하고 불인함은 경효보다 심하다. 나의 붕천의 원한과 각일의 정성은 다 극심하여 응전의 축과 견마의 근을 본받으려고 하여 두 번째 군사를 일으켜 두 해를 지냈다. 육전에 있어서는 우레같이 달리고 번개같이 빠르며 수전에 있어서는 범처럼 치고 용처럼 뛰어올라 동하면 반드시 성공하고 거수하면 또한 헛되이 발한 것이 없었다. 윤경을 해안에서 쫓을 때에 갑옷이 산과 같이 쌓였고 추조를 성변에서 잡았을 때에 시체가 들을 덮었으며 연산군에서 길환을 군전에서 목베고 마리성(이산군인 듯하다)에서 수오를 독기하에 죽였으며 임존성(지금 대흥군)을 뺏던 날에 형적등 수백인이 몸을 버렸고, 청주현(상주영내)의 현명)을 깨칠 때에 직심등 사오 무리가 머리를 바쳤으며 동수(지금 동화사)는 기를 바라보고 궤산하고 경산은 구슬을 머금고 항복했으며 강주는 남으로부터 내속하고 나부는 서에서 이속하였다.

  공략이 이와 같으니 수복이 어찌 멀다하랴. 기필코 저수의 진중에서 장이의 천한을 씻고 오강안상에서 한왕의 최후 일첩의 심리를 이룰 것이니 마침내 풍파는 쉬고 환해(천하)는 길이 맑을 것이다. 하늘이 돕는 바 이어늘 명이 어디로 돌아가리요, 하물며 오월왕전하의 덕이 포황에 족하고 그 인은 자소에 깊어 특히 단금에서 윤음(왕은)을 내려 청구(동방)의 난리를 그치라 함을 받들게 되었다. 이미 가르침을 받았으니 어찌 존봉치 아니하랴. 만일 족하가 임금의 뜻을 이어서 흉기(병기)를 모두 놓으면 오직 상국(오월)의 어진 은혜에 합할 뿐 아니라 또한 동방의 끊어진 실마리를 가히 이을 것이요, 만일 허물을 고치지 않으면 후회막급이리라」 하였다.(이 글은 최치원의 소작이다). 장흥 3년에 견훤의 신하로 용맹하고 지략이 있는 공직이 태조에게 와서 항복하니 훤이 공직의 이자일녀를 잡아서 다리 심줄을 불에 지져서 끊었으며 추 9월에는 훤이 일길을 시켜 수군으로 고려 예성강에 들어가 3일을 머물러 염·백·진 3주의 배 1백척을 불지르고 갔다.(운운한다). 

  청태 원년 갑오에 태조가 운주(자세치 않다)에 출진하였다는 말을 훤이 듣고 갑사를 선택하여 빨리 가게 하였는데 방루도 채 못싸서 태조의 장군 유금필이 굳센 기병으로 쳐서 3천여명을 목베니 태진이북의 30여성이 소문을 듣고 자진 항복하매 훤의 휘하인 술사 종훈과 의원 지겸과 용장 상봉·작필 등이 모두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병신 정월에 훤이 그 아들에게 이르기를 노부가 신라말기에 후백제라고 한지 지금 여러 해가 되어 군사가 북군보다 배나 더하되 오히려 불리하니 아마 하늘이 고려를 위하여 가수하는 것 같으니 북왕에게 귀순하여 수령(생명)을 보전하여야 하겠다고 하였다. 그의 아들 신검·용검·양검 등 3인이 다 응하지 아니하였다. 

  이선가기에는 훤에게 구자가 있으니 장은 신검(혹은 견성이라 함), 둘째는 태사 겸뇌, 셋째는 좌승 용술, 넷째는 태사 총지, 다섯째는 대아간 종우, 여섯째는 이름이 전하지 않고, 일곱째는 좌승 위흥, 여덟째는 태사 청구며, 일녀는 국대부인이니 모두 상원부인의 소생이다. 또 가로되 훤의 처첩이 많아서 아들 10여인을 두었는데 사남인 금강은 키가 크고 지략이 많으므로 훤이 특히 사랑하여 전위할 의사가 있으매 그의 형 신검·양검·용검들이 알고 근심하였다. 이때 양검은 강주도독, 용검은 무주도독으로 있고 신검만이 홀로 부측에 있었다. 이손 능환이 사람을 강주·무주에 보내어 양검 등과 공모하고 청태 2년 을미 3월에 영순 등과 함께 신검을 권하여 훤을 금산불우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서 금강을 죽이고 신검은 자칭 대왕이라 일컫고 경내를 대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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