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14. 21:07ㆍ나의 이야기
조사개요Ⅱ견훤의 생애Ⅱ견훤설화Ⅱ견훤산성Ⅱ성재산 견훤산성Ⅱ 견훤관련 산성 Ⅱ 민속 Ⅱ 개발방안
제3편 유적과 지명 > Ⅲ. 그 외 지역의 유적 | Ⅳ. 그 외 지역의 지명 ▒▒▒▒▒▒▒▒▒▒▒▒▒▒▒▒▒▒▒▒▒▒▒▒▒▒▒▒▒▒▒▒▒▒▒▒▒▒▒▒▒▒▒▒▒▒▒▒▒▒▒▒▒▒▒▒▒
견훤산성(甄萱山城)은 속리산 문장대로 향하는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마을 서북쪽으로 국립공원 입구의 우측 산봉(山峰)에 있다. 산성에 올라서면 속리산 문장대, 관음봉의 경관과 동쪽으로 청화산과 도장산을 바라볼 수 있는 표고 800m의 산정상부에 정방형의 퇴뫼식으로 구축되었다. 산성은 자연암벽을 이용하여 성지를 만들어 외부의 접근을 관망하기 좋은 위치로 4곳에 만들었다. 또한 급경사 지대에는 축성이 낮은 편이고 사람의 접근이 용이한 지형에는 높이 쌓았다. 지형에 따라 계곡을 이룬 곳은 높이 15m에 이르고 자연암벽 부분에는 불과 1m에서 4~5m로 낮게 쌓았으나 성벽의 외부는 15m 이상의 높은 벽을 이뤄 자연지형을 최대로 활용하였다. ⅰ) 망 대(望臺) ① 성벽 둘레 33m, 폭 5m이다. 말발굽형의 남·서쪽 성벽 높이는 9~10m이다. 큰 바위를 기단석처럼 이용해 쌓은 성벽은 외부에서 볼 때 그 높이는 15m에 이르고 견훤산성의 대표적 모습이다. 화북면 소재지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다. ② 성벽 둘레 26.4m, 폭 4~6m로 말굽마냥 돌출되었으며, 높이는 9~10m로 추정된다. 허물어진 부분이 많아 성벽 형태가 완연하지는 않으나 벽대(壁臺)로써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이 망대로 서(西)쪽의 화북면 장암2리의 입석리 방향과 청화산 방향을 관망할 수 있다. ③ 큰 바위 위에 낮게 쌓았다. 바위의 남쪽은 암벽이나 북쪽은 불안정한 상태를 메우기 위해 V자형으로 높이 쌓아 성랑(城廊)과 연결하여 망대를 구성하였다. 큰 바위 정상에 1m 정도 축성하였다. 속리산의 문장대,비로봉,관음봉 방향의 남서쪽을 관망하도록 했다. ④ 망대의 모습이 불확실한 유지(遺址)로 추정할 수 있고 속리산 지맥(支脈)과 연결된 서북 방향을 관망토록 하였다. ⅱ) 성 벽(城壁) ① 망대 ①과 ② 사이의 성벽으로 규모가 가장 큰 상태로 길이는 120m 정도이며 높이는 5.5m이다. 내벽성은 완전한 부분이 많으나 외벽은 50m 정도 허물어졌다. 내벽이 20m 정도 허물어진 지점이 성문지로 추정이 된다. 이는 성랑 전체를 살펴볼 때 성문을 발견할 수 없고 이 지점이 평지에서 오르는 방향이며 성내는 경사부분과 약간 완만한 지점도 있어 우물 구지(舊址)를 추정할 수 있는데다 성내의 빗물이 이 지점으로 몰리게 되어 있는 지형으로서 성문과 배수구가 가까운 위치에 있었으므로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배수로의 변형으로 지반의 침하와 유실로 성문과 성벽이 무너졌으리라 짐작된다. ② 북쪽 성벽의 길이 180m 정도이며 높이 9~10m에 폭은 2~4m이다. ②번 ④번의 망대사이가 연결돼 내벽은 완전한 상태이다. 외벽은 허물어진 부분이 있으나 일부분은 타원형으로 곡선의 성벽은 그 축성방법이 놀라울 정도이다. 또 서쪽으로 이어지는 내측벽은 2~4m이다. ③ 급경사진 지형을 이룬 서쪽으로 망대 ③과 ④의 사이에 연결된 토성과 석성의 혼용으로 외벽은 허물어지고 내벽은 1~2m의 석성으로 그 전체가 그리 높지 않다. ④ 남쪽으로 망대 ①과 ③ 사이에 연결된 120m로 내측성벽은 2~3m의 높이이나 외측은 허물어졌다. 폭은 70㎝ 정도이다. 성랑 안에는 경사면을 이루고 있으나 다소의 평평한 지점도 있다. 또 기와조각을 가끔 발견할 수 있고 축대를 쌓은 잡석도 찾아볼 수 있다. ⅲ) 견훤산성에 관한 기록 견훤산성에 관한 기록은 상산지 구증(舊增)에「재주서사십리구재청계산상유창옹정정미화연경술이건우청계사방가축성첩우수구성재화산속리지간지세험준성첩완고동유은성창서유화영중모량창가위령추풍령로지간방일명견훤성주오천삼백오십보중화오면인부수납(在州西四十里舊在淸溪山上有倉雍正丁未火煙庚戌移建于淸溪寺傍加築城堞于水口城在華山俗離之間地勢險峻城堞完固東有銀城倉西有化寧中牟兩倉可爲嶺秋風嶺兩路之間防一名甄萱城周五千三百五十步中化五面人夫收納」이다.
경북 상주군 화서면 하송리 청계산 계곡과 화서면 동관리 마을 사이에 있는 청계산 정상부에 위치한다. 일명 견훤산성으로 불리우고 있다. 성지 중앙에는 극락정사란 사찰이 있고 토축과 석축으로 천연의 자연지세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축성했는데 지금도 성벽이 남아 있다. 성의 둘레는 약 600m 정도의 타원형이다. 청계산 위에 창고가 있었는데 1727년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3년 뒤에 청계사 곁으로 이전하여 성첩을 쌓았다고 한다. 지세가 험준하고 완고하여 조령과 추풍령의 관방이라 하겠으며 동쪽에 은성창, 서쪽에 화령과 중령의 양창이 있었다고 한다. 아자개가 웅거했던 사불성은 지금의 상주시 병성면에 소재한 병풍산성이 되겠다. 골짜기를 끼고 있는 병풍산성은 둘레 1,770m 규모의 석축 산성인데 그 북쪽으로는 경명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박언창의 무덤인 사벌국 왕릉이 바라다보이고, 그 동편으로는 낙동강이 굽이돌고 있다. 낙동강을 수로로 이용할 수 있는 요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사벌국 고성을 설명하며 “병풍산 아래에 있다. 성 옆에 높고 둥근 구릉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사벌국 왕릉이라 한다. 신라 말년에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이 성에 웅거하였다.” 라고 하여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운문면 신원리에 있는 운문산 지맥에 지룡산이라는 산이 있다. 이 산 위에는 지금도 옛날의 산성을 쌓았던 흔적이 있으며 지룡산성,호거산성,운문산성이라 부르고 있다. 이 지룡산성이란 이름은 후백제왕 견훤이 이 산에 살던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야설로 인해 지룡산이라 부르게 되었고 여기에 있는 산성을 지룡산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옛 기록에는 나오지 않다가『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건등면월진리(建登面越辰里). 사유림(私有林), 견훤산성(甄萱山城)이라 칭(稱)함. 괴정부락의 남방일소병사에 있음. 석성으로서 주위 약 오정 거의 폐퇴함. 고려의 초기 견훤이 여병과 싸워 이곳에 병을 주둔한 곳이라 전함.『전국유적목록』에는 ‘문막면 월진리, 국유, 괴정부락의 남방 일소구상에 재(在). 석성, 속칭 견훤성’이라 하였다. 『문화유적총람』상에는 ‘견훤성,원성군 문막면 후용리 산 3(월진리), 후백제의 시조 견훤이 성을 쌓고 왕건과 싸워 승리를 거두게 되었으나, 군량이 떨어져 곤란할 때 견훤이 꾀를 써 강물에 석회를 풀었는데 왕건성에서는 쌀 씻는 물인 줄 알고 먹었다가 병사들이 죽어 퇴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괴정부락의 남방의 소구상에 약 500m정도 흔적만 남아 있다.’고 하였다. 성 서쪽 5㎞에는 남한강 지류인 섬강이 남서로 흘러 내리고, 2㎞ 서쪽에는 성주에서 서울로 향하는 영동고속도로와 국도가 나란히 달리고 있다.
남고산성은 전라북도 전주시 동서학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축산성이며 사적 제294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성문지와 장대지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다. 일명 견훤산성 혹은 고덕산성이라고도 하는 고덕산의 서북쪽 골짜기를 에워싼 포곡형 산성이다. 이 성은 901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도성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현존하는 성벽은 임진왜란 때 전주부윤 이정란이 이곳에 입보하여 왜군을 막을 때 수축하였다. 그 뒤 1811년에 관찰사 이상황이 증축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박윤수가 관찰사로 부임하여 완료한 것이다. 숙종때에 부근의 위봉산성(威鳳山城)에 이어 진이 설치되었고 성내에는 진장(鎭將)이 머무르는 관청과 창고, 화약고 등이 있었다. 남북에 장대(將臺)가 있으며, 문은 동쪽과 서쪽에 있었다. 서쪽에는 암문(暗門)이 하나 있었고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포루가 있었으며, 특히 천경대, 만경대와 같이 절벽이 있어 자연적 요새를 이루었다. 남아 있는 북문지는 석축만 남아 있는데 너비 3.4m, 높이 1.2m이며 세 봉우리에는 각각 10㎡의 장대지가 있다. 본래 성내에는 연못이 네 군데나 있었고 우물이 25개나 되었으며, 영조 때의 기록에 의하면 둘레 2693보, 여장 1946척이고 성 안에 민가 100여채가 있었다 하나, 현재 성내에는 남고사, 관성조를 비롯하여 남고진의 내력을 기록한 남고진 사적비만 남아 있다. 동고산성은 전주시가의 동남방에 있는 승암산 동편에 자리한다. 그러나 성내의 대부분은 완주군 상관면 대성리에 포함된다. 동고(東固)란 남고산성이란 이름이 붙여지면서 대조적으로 생긴 이름인데 그곳에서 나온 기와편의 명문(銘文)에 의해서 창달 당시에는 전주성이란 불렀던 것 같다. 남고산성은 원래 고덕산성이라 하였음이 이미《세종지리지世宗地理志》에 보이고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에는 만경(萬頃 : 萬景)산성이라 불렀다는 것은《선조실록宣祖實錄》에 의해서 알 수 있다. 충청남도 당진군 합덕면 도곡리 둔군봉에 있는 산성이다. 후백제 때 견훤이 축조한 산성으로서 고려와 싸우기 위해 쌓았다. 조선말엽 동학군을 무찌르기 위해 관군이 주둔하여 동학군과 싸웠다. 둘레는 1,000m가 되는 성으로 동학군의 시체가 쌓였던 곳이며 현재 그들의 묘도 있다.
장수읍에서 팔공산 쪽으로 오르다보면 신무산 아래에 둘레 320m, 높이는 밖으로 5m, 안에서는 1.5m 정도로 쌓은 성이며 어느 정도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는 산성이다. 이 성은 후백제 시대에 축조한 성으로 이 근처의 병사들이 군량미를 이곳에 저장하였기 때문에 합미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해 지하로 급수하던 수로관이 현재도 남아 있다.
충청북도 청주시 정북동(출토당시 충북 청원군 북일면 정북리) 토성마을에 있는 백제시대의 토성이다. 둘레 655m, 성벽높이 약 4m 평지에 네모꼴을 한 토성으로 청주시의 북방에 있으며, 미호천과 무심천이 합류하는 까치내 부근 평야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성안에는 토성마을이 자리잡고 주변은 모두 논이다. 윗부분은 너비 2m 정도로 한 바퀴 돌 수 있는 길이 나 있다. 직선을 이룬 성벽의 길이는 동벽 180m, 남벽 155m, 서벽 160m, 북벽 160m로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다. 성벽의 중간에는 사방으로 통행할 수 있도록 성벽이 단절되거나 어긋나게 단절되어 옹성처럼 문터의 모습을 남기고 있다. 벽의 모서리에는 둥글게 높이를 높여 곡성처럼 바깥으로 내밀게 하였는데 각루 등의 시설이 있었던 듯 하다. 성벽의 바깥으로는 해자의 흔적이 있으며, 성벽은 부식된 화강암을 부순 마사토와 붉은 흙을 섞어 두께 7~15㎝씩 판축을 하여 만든 것이다. 1939년 성안에서 돌화살촉, 돌칼, 돌창이 출토된 일이 있다고 하며, 삼국시대의 그릇조각과 고려시대 이후의 자기 조각도 발견되고 있다. 영동군에 소재하고 있는 양산성(陽山城)만 해도 견훤이 신라 경순왕 2년(928) 장군 관흔(官昕)을 시켜 쌓았다가 왕건에 의하여 격파되었다고 고산자(古山子)의 <대동지지>에 전한다.
이 산성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 송면초등학교의 북쪽 약 2㎞, 사기막리의 남쪽 약 2㎞ 지점에 있는 소실령을 가로막은 석성이다. 송면리에서 517번 지방도를 따라 북쪽으로 가다가 오른쪽(동쪽)의 갈모봉(해발 582.4m)과 서쪽 무명봉(해발 443.6m) 사이의 고개를 넘어 문망면-괴산으로 통하는 진로를 막아선 요충지다. 후삼국시대 견훤이 북쪽의 적 궁예를 막기 위해 쌓은 것이라고 하며, 지금은 대부분이 경지가 되어 몇 군데의 돌무더기가 남아 있을 뿐이다.
정읍군 산외면 상두리와 김제군 금산면 선암리의 경계선상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 575m의 산정에 쌓은 소규모의 산성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 김제현 산천조와 태인현 산천조에 상두산성에 대하여 모두 간략히 적혀 있다.『문화유적총람』 下에는 후백제의 견훤이 쌓았다고 전해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같은 자료인『문화유적총람』下 정읍군 ‘상두산성지’에는 ‘1589년(조선 선조 22년)에 정여립이 모반하여 상두산에 성을 쌓고 관군과 싸웠다고 하여 지금도 성터와 집을 건립하였던 주초석이남아 있다’고 적고 있으나, 이 두 가지 기술에는 상치되지 않는 점들이 있다.
금성산성은 나주시의 외곽에 있는 해발 450.3m의 금성산에 있다. 후삼국시대 후백제의 견훤이 무진주(광주)를 근거지로 하고 전쟁을 하였을 때, 왕건이 인천을 떠나 목포에 상륙하여 이 성에서 싸웠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지금은 시가지로 변하여 흔적을 알아보기 어렵다. 왕궁평성은 전북 익산군에 소재하며 도 지방기념물 제1호로써 '99. 9. 18 국가사적 제408호로 지정되었다. 왕궁평성은 이 지역 주민들에게는 ‘모질메산성’으로 불리우고 있는데 지난 '76년 익산 원광대 부설 마한 백제문화연구소와 '89년부터 시작해 '99년초에 끝난 부여문화재연구소의 1, 2차 왕궁리 유적발굴조사 결과 성의 대체적인 윤곽이 드러났다.
반남면은 백제의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반남일대에 영산강유역 특유의 옹관고분이 최대, 최밀의 분포상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중앙에 위치한 자미산에 대형산성(자미산성)이 축조되어 있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자미산성은 백제 이전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가 영산강유역을 영역으로 삼은 이후에 영산강유역 토착세력의 중심지인 이곳을 반내부리현(半奈夫里縣)이라는 일개현으로 편제하여, 짐짓 이 지역을 무시하는 정책을 썼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 통일신라는 이곳을 반남군으로 승격시켜 주었지만 영산강유역의 최고 중심지로까지는 떠오르지 못했다. 견훤의 묘소는 《세종실록》지리지 공주목 은진현 조에 “현의 남쪽 12리 풍계촌(風界村)에 있다”고 하였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현 남쪽 12리 풍계촌에 있는데 속칭 왕묘(王墓)라 전한다(은진현 塚墓 條)”라는 기록이 전한다. 견훤의 묘에 이르는 큰 무덤이다. 최승로의 상서문에 따르면 왕건은 견훤이 사망하자 부의(賻儀)를 넉넉하게 하였다고 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국왕으로서의 격에 맞게끔 장대한 유택을 조영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견훤은 임종시에 “완산이 그립다. 완산이 보이도록 모덤을 써 달라”고 말하여 그 유언에 따라 무덤의 좌향을 전주쪽으로 정하였다고 전해온다. 포석정(鮑石亭)은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경주 남산의 서쪽 계류가에 위치하였던 정자 및 연회장소를 일컫는다. 창설연대는 자세하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정자는 없어졌으나, 포어(鮑魚)의 형태를 모방하여 만든 수구가 남아 있다. 계수(溪水)를 받아들여 이것을 전복껍질 모양의 수구(水溝)에 흐르게 하고 그것에 술잔을 띄워 문무백관(文武百官)의 품계에 쫓아 열을 지어 앉아서 시(詩)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흐르는 술잔을 차례로 마시면서 흥겨워하였다. 곡수(曲水)의 주연(酒宴)은 옛날 중국과 일본에서도 있었다 하나 오늘날까지 그 역력한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은 오직 경주의 포석정뿐이다. 곡수거는 가장 긴 세로축이 10.3m, 가로 축이 약 5m크기로 깊이 50㎝ 가량되는 도랑이 나 있다. 모두 63개의 석재로 조립되었다.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 무악산에 있는 사찰을 말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이다. 《금산사사적》에 의하면 이 절은 600년에 창건되었다. 즉 백제 법왕이 그의 즉위년(599)에 칙령으로 살생을 금하고, 그 이듬해에 금산사에서 38인의 승려를 득도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진표율사에 의해 중창(신라 혜공왕 2년무렵)되면서 대가람의 면모로 일신되었다. 진표는 미륵장륙상을 조성하여 미륵전에 안치했고, 금당의 한 벽화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자기에게 계법을 주던 모습을 그렸다.『삼국유사』에는 금산사 중창불사 광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북 김제에 소재하며 이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견훤석문이라 불리는 돌로 쌓은 홍예문이 있다. 돌로 쌓은 성의 문인데 성의 자취는 없고 문만 남아 있다. 이곳에 있었던 성에 대해 이곳 주민들은 견훤이 쌓았다고 믿고 있으나 확실치 않다.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안동권씨의 시조 권행(權幸), 안동김씨의 시조 김선평(金宣平), 안동장씨의 시조 장길(張吉)을 제향하는 사당을 말한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15호이다. 삼공신묘·안동삼태사묘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안동시 북문동에 있다. 창건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초에 안동부민이 3태사의 업적을 추모하여 사당을 세우고 치제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하며 1561년(명종 16)에 중수하였다. 문헌에 의하면 신라 말엽에 김행이 고창군(古昌郡:지금의 안동)을 지키고 있을 때 후백제왕 견훤이 반란을 일으켜 경주로 쳐들어와 왕을 죽이고 왕비를 능욕하였으므로 고려 태조 왕건이 천인무도한 견훤을 토벌하고자 신라로 내려왔다. 표충사는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을 향사하는 사우로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에 위치하고 있다. 후삼국이 정립하면서 고려와 신라는 후백제에 대하여 공동전선을 펴고 있었으나, 후백제의 기세는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갔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에 침입하여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주를 분략하자 927년(태조 10) 고려 태조는 신라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의를 표하는 한편, 친히 정병을 거느리고 급히 남하하여 개전 중의 견훤을 팔공(대구 팔공산)에서 요격하다가 견훤의 군대에 포위되어 태조는 몹시 형세가 다급하게 되었다. 그 때 고려의 대장 신숭겸과 김락이 사력을 다하여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태조는 그 틈을 타서 가까스로 몸을 빼어 달아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상주시 화서면 하송1리 청계마을에 견훤사당이 있다. 사당의 신주 독개(犢蓋)에는 “후백제대왕신위(後百濟大王神位)”라는 위패가 있다. 상량문에는 “도왕 19재(道王十九載)”라는 연호가 있어 1839년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는 매월 정월보름과 시월보름에 동고사를 지내고 있는데 과거에는 제물로 소까지 잡았을 정도로 성대하게 치뤘다고 한다. 소 재 지 :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이 개태사지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세력을 완전히 물리치고, 부처의 위력과 하늘의 힘으로 나라를 지켜 달라는 기원문을 손수 지어 바치고 동왕(同王) 23년(940)에 창건한 절의 터이다. 당시 절 안에는 고려 태조의 영정이 있어 나라에 전쟁의 기미가 있으면 그 영정앞에 기원문을 올려 나라가 태평하기를 빌었다고 한다. 그후 이 절은 고려말기에 이르러 왜구의 빈번한 약탈에 의해 사세가 차츰 기운 것으로 보인다.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에 있는 대구시 전통사찰 제6호(88. 7. 28)이다. 동화사의 말사이고 921년(경명왕 5년) 영조대사가 창건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이 팔공산 동수대전에서 견훤과 싸우다가 대패하고 견훤의 추격을 피하여 반야월과 안일사를 거쳐 이곳에 와서 기도를 드리고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찾아 쉬어갔다 하여 절 이름을 임휴사라 한다. 대구시 남구 봉덕산 앞산공원 안에 있는 사찰로서 동화사의 말사이다. 926년(경애왕 3년)에 영조대사가 창건하였으며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의 격전에서 대패하여 단신으로 견훤군의 추격을 피해 몸을 숨긴 곳이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신라말 후삼국 때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였다. 나라가 위태롭게 된 신라는 고려 왕건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이에 왕건은 신라를 돕고자 군사를 이끌고 적과 맞섰으나 의외로 대패하고 은적사에 몸을 숨겼다. 왕건이 굴에 숨자 왕거미가 출입구에 거미줄을 쳐 견훤의 추격병들로부터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 굴에서 3일간 머물고 현재 안일암이 있는 곳에서 3개월을 쉰 왕건은 김천 황악산을 경유해 철원으로 회군했다. 그 뒤 왕위에 오른 왕건은 자신이 숨어 3일간 보낸 굴이 있는 곳에다 절을 짓게 하여 은적사라 불렀다 한다. 대구시 남구 대명동 앞산 안지랭이 골에 있는 사찰이다. 동화사의 말사이고 927년(경순왕 1)에 영조대사가 창건하였다. 안일사(安逸寺) 또는 왕건이 싸움터에서 지친 몸을 풀어 편안히 쉴 수 있었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됐는데 절집 인근에는 돌로 된 굴이 하나 있어 왕건이 여기에 몸을 피했다고 전해온다. 그 굴이 바로 지금도 안지랑골 등산객들이 촛불을 켜고 치성을 드리는 왕궁(王窟)이다.
.................................................................................................................................................................................... Ⅲ. 그 외 지역의 지명 대구 동화사와 파계사로 갈라지는 길목의 재 이름인데, 공산전투에서 견훤군이 고려군을 격파했다고 해서 붙인 전투관련 지명 이름이다. 전탄(箭灘)과 지묘동 살내는 현재 대구시 서변천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공산전투에서 견훤군과 고려군이 격전을 치룰 때 화살이 쌓여 강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인 전투관련 지명 이름이다. 이 살내를 중심으로 양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고려의 장군인 신숭겸과 김락이 이끄는 증원병이 합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일시 원기를 회복하여 전열을 정비한 고려군이 후백제군을 밀어붙이면서 진출한 곳이 미리사(美利寺) 앞이었다. 현재 미리사터로 추정되는 곳은 파군재에서 동화사로 올라가는 길과 파계사로 올라가는 길 사이에 위치한 지묘동에 왕산(王山) 아래 산기슭으로서, 현재 신숭겸 장군의 순절단과 신숭겸장군이 순절한 곳을 의미하는 내용이 담긴 비각이 있는 표충단이 서 있으며, 그 뒷산을 왕산이라 한다. 공산전투에서 왕건이 밤에 견훤군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칠 때 한밤중에 새벽달이 떠 있었기에 붙인 전투관련 지명 이름이다. 대구 동구의 오랜 역사는 마을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다. 팔공산 기슭에는 고려 태조 왕건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후백제의 견훤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주둔한 둔산(屯山)동, 공산싸움에서 패하여 파군재를 넘어 도망갈 때 젊은 사람이 많아보여 붙였다는 불로(不老)동, 왕건을 탈출시키는 꾀를 짜낸 지묘(智妙)동 등. 오늘날의 대구시 대명 9동의 옛 이름은 서괘진이라고 한다. 괘진이란 지명은 이곳을 세거지(世居地)로 정한 두사충이 이곳이 강가는 아니지만 모양이 흡사 강의 흐름과 같고 나룻배가 닿는 곳과 같다고 해서 괘진(掛津)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서괘진과 동괘진의 분기점은 현 앞산공원으로 올라가는 현충로를 기점으로 서편이 서괘진이요, 동편이 동괘진에 해당하는 곳이다. 서괘진은 옛날 아지랑골 또는 안지랑이로 불리는 곳이었으며,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에게 패한 후 이골짜기에 안심하고 숨어 지내다가 갔다는 데서 고려 때부터 안지랑이골로 불리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 옛날의 서괘진인 이곳은 앞산의 울창한 숲과 맑은 공기를 품고 있어서 대구 시민들의 휴시처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몽탄강은 부안군과 나주군 동강면 사이를 흐르는 영산강의 하류이다. 무안 몽탄에는 왕건의 전설이 남아 있다. 몽탄은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 싸울 때 꿈에 신령이 나타나 강을 건너라고 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한탄강은 궁예가 후백제와 전쟁을 치르고 돌아가던 중「운명이 다했다」며 한탄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전설이 있다. 지금의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일대의 낙동강 나루로 왕건이 “저 나루는 모두 나의 나루이니라”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지금의 구미시 고아읍 송림리 및 대구시 수성구 지산동 앞들로 신검이 고려군에 피해 항복한 곳. 지금의 구미시 고아읍 관심리 앞들 이름으로 견훤과 왕건간의 전투와 관련된 지명이다. 지금의 구미시 고아읍 괴평리 앞들로 고려군이 신검의 진지를 점령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태조 왕건이 신라를 도우려고 군사를 이끌고 팔공산 자락까지 와서 후백제 견훤과 싸우다가 대패하여 정신없이 달아나게 되었는데 뒤돌아 보니 추격하는 후백제군이 더 따라오지 않아 “이제 안심(安心)했다”라고 한 말에서 “안심”이라는 유래가 있다고 한다. 경상북도의 웅산으로 대구직할시와 달성군, 영천군, 칠곡군 경계에 있는 팔공산(1,192m)은 산역면적 12,208㏊로 1980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태백산맥의 남단에 자리하고 주봉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봉과 서봉을 거느리고 있으며,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편 것처럼 뼏쳐있다. 정상의 남쪽으로는 염불봉, 태실봉, 인동, 노족봉, 관봉 등이 연봉을 이루고 서쪽으로는 톱날바위, 파계봉, 파계재를 넘어 다시 북쪽으로 꺾어져 멀리 가산을 거쳐 다부원의 소아현에 이르고 있다. 왕산봉은 칠곡군 지천면 송정리 뒷산으로 낙화1리와 경계하고 있다. 서기 928년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팔공산에서 격전 중 전세가 불리하자 대장 신숭겸과 갑옷을 바꾸어 입고 달아나 왕산봉에서 전열을 재정비 승전하였다 한다. 왕건 태조가 유진한 곳이라 하여 왕건봉이라고도 하며 깃발을 꽂은 돌을 수기석, 그 골짜기를 끼봉골이라 한다. 명성산은 철원군 갈말읍과 경기도 포천군 영북면, 이동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명성산, 즉 울음산은 궁예가 자신의 부하였던 고려 태조 왕건에게 패한 후 이곳으로 쫓겨와 크게 울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신라의 마지막 세자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통한의 눈물을 뿌림에 산천도 울었다 하여 비롯된 이름이라고도 한다. 단발령은 강원도에 소재하며 신라의 마지막 태자 마의태자가 금강산이 바라다 보이는 고갯마루에 올라 비운의 철천지한을 씻고자 수도승이 되기 위해 삭발을 했다고 하여 붙여진 고개이름이라고 한다.
목차Ⅱ후백제 연표Ⅱ사 료Ⅱ설 화Ⅱ유적과 지명Ⅱ문경지역의 유적Ⅱ문경지역의 지명Ⅱ그외지역 유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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