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유적과 지명 > Ⅲ. 그 외 지역의 유적 | Ⅳ. 그 외 지역의 지명 / 사료와 전설로 보는 견훤

2014. 5. 14. 21:07나의 이야기






       

제3편 유적과 지명 > Ⅲ. 그 외 지역의 유적 | Ⅳ. 그 외 지역의 지명  사료와 전설로 보는 견훤 / 문경문화원 자료 

2012/06/19 17:09

복사http://blog.naver.com/lys0002/70140619901

전용뷰어 보기

조사개요견훤의 생애견훤설화견훤산성성재산 견훤산성 견훤관련 산성  민속  개발방안

  

 

 

  사료와 전설로 보는 견훤  

 

 

제3편 유적과 지명 > Ⅲ. 그 외 지역의 유적 | Ⅳ. 그 외 지역의 지명  

  그 외 지역의 유적 : 1. 견훤산성 | 2. 성산산성 | 3. 병풍산성 | 4. 지룡산성(청도) | 5. 견훤성(원주) | 6. 남고산성(전주) | 7. 동고산성(전주) | 8. 성동산성터(당진) | 9. 합미성(장수) | 10. 청원 정북리토성(청주) | 11. 양산성(영동) | 12. 소실령이성지(괴산) | 13. 상두산성지(정읍) | 14. 금성산성(나주) | 15. 왕궁평성(익산) | 16. 자미산성(나주) | 17. 견훤묘(논산) | 18. 포석정(경주) | 19. 금산사(김제) | 20. 견훤석문(김제) | 21. 삼태사 묘(안동) | 22. 표충사(대구) | 23. 견훤사당(상주) | 24. 개태사지(논산) | 25. 임휴사(대구) | 26. 은적사(대구) | 27. 안일사(대구)

  그 외 지역의 지명 : 1. 파군치 | 2. 살내 | 3. 반야월 | 4. 둔산동, 불로동, 지묘동 | 5. 서괘진 | 6. 몽탄 | 7. 한탄강 | 8. 여진 | 9. 발갱이 들(발검들) | 10. 어갱이 들(어검들) | 11. 점갱이 들(점검들) | 12. 안심 | 13. 팔공산 | 14. 왕산봉과 수기석 | 15. 명성산 | 16. 단발령

 

Ⅲ. 그 외 지역의 유적

  1. 견훤산성(경북도지정 기념물 제53호)

소재지 : 경북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기념물 : 경북도지정 제53호

  견훤산성(甄萱山城)은 속리산 문장대로 향하는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마을 서북쪽으로 국립공원 입구의 우측 산봉(山峰)에 있다. 산성에 올라서면 속리산 문장대, 관음봉의 경관과 동쪽으로 청화산과 도장산을 바라볼 수 있는 표고 800m의 산정상부에 정방형의 퇴뫼식으로 구축되었다. 산성은 자연암벽을 이용하여 성지를 만들어 외부의 접근을 관망하기 좋은 위치로 4곳에 만들었다. 또한 급경사 지대에는 축성이 낮은 편이고 사람의 접근이 용이한 지형에는 높이 쌓았다. 지형에 따라 계곡을 이룬 곳은 높이 15m에 이르고 자연암벽 부분에는 불과 1m에서 4~5m로 낮게 쌓았으나 성벽의 외부는 15m 이상의 높은 벽을 이뤄 자연지형을 최대로 활용하였다.
  60~70도의 사각지대(斜角地帶)를 이룬 서쪽은 토성과 석성을 혼용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일부 허물어진 곳이 많아 판별이 곤란하다. 그러나 안쪽도 성벽을 이루었는데 동서남북의 사방이 자연석축의 이면이 고른 상태로 정교하게 쌓아 이천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원형이 남아 그 보존 상태는 전장이 2/3가량이나 된다. 성곽의 길이는 모두 650m 정도로 추정하고 성벽의 부분별 실태는 다음과 같다.

  ⅰ) 망  대(望臺)

  ① 성벽 둘레 33m, 폭 5m이다. 말발굽형의 남·서쪽 성벽 높이는 9~10m이다. 큰 바위를 기단석처럼 이용해 쌓은 성벽은 외부에서 볼 때 그 높이는 15m에 이르고 견훤산성의 대표적 모습이다. 화북면 소재지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다.

  ② 성벽 둘레 26.4m, 폭 4~6m로 말굽마냥 돌출되었으며, 높이는 9~10m로 추정된다. 허물어진 부분이 많아 성벽 형태가 완연하지는 않으나 벽대(壁臺)로써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이 망대로 서(西)쪽의 화북면 장암2리의 입석리 방향과 청화산 방향을 관망할 수 있다.

  ③ 큰 바위 위에 낮게 쌓았다. 바위의 남쪽은 암벽이나 북쪽은 불안정한 상태를 메우기 위해 V자형으로 높이 쌓아 성랑(城廊)과 연결하여 망대를 구성하였다. 큰 바위 정상에 1m 정도 축성하였다. 속리산의 문장대,비로봉,관음봉 방향의 남서쪽을 관망하도록 했다.

  ④ 망대의 모습이 불확실한 유지(遺址)로 추정할 수 있고 속리산 지맥(支脈)과 연결된 서북 방향을 관망토록 하였다.

  ⅱ) 성  벽(城壁)

  ① 망대 ①과 ② 사이의 성벽으로 규모가 가장 큰 상태로 길이는 120m 정도이며 높이는 5.5m이다. 내벽성은 완전한 부분이 많으나 외벽은 50m 정도 허물어졌다. 내벽이 20m 정도 허물어진 지점이 성문지로 추정이 된다. 이는 성랑 전체를 살펴볼 때 성문을 발견할 수 없고 이 지점이 평지에서 오르는 방향이며 성내는 경사부분과 약간 완만한 지점도 있어 우물 구지(舊址)를 추정할 수 있는데다 성내의 빗물이 이 지점으로 몰리게 되어 있는 지형으로서 성문과 배수구가 가까운 위치에 있었으므로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배수로의 변형으로 지반의 침하와 유실로 성문과 성벽이 무너졌으리라 짐작된다.

  ② 북쪽 성벽의 길이 180m 정도이며 높이 9~10m에 폭은 2~4m이다. ②번 ④번의 망대사이가 연결돼 내벽은 완전한 상태이다. 외벽은 허물어진 부분이 있으나 일부분은 타원형으로 곡선의 성벽은 그 축성방법이 놀라울 정도이다. 또 서쪽으로 이어지는 내측벽은 2~4m이다.

  ③ 급경사진 지형을 이룬 서쪽으로 망대 ③과 ④의 사이에 연결된 토성과 석성의 혼용으로 외벽은 허물어지고 내벽은 1~2m의 석성으로 그 전체가 그리 높지 않다.

  ④ 남쪽으로 망대 ①과 ③ 사이에 연결된 120m로 내측성벽은 2~3m의 높이이나 외측은 허물어졌다. 폭은 70㎝ 정도이다. 성랑 안에는 경사면을 이루고 있으나 다소의 평평한 지점도 있다. 또 기와조각을 가끔 발견할 수 있고 축대를 쌓은 잡석도 찾아볼 수 있다.

  ⅲ) 견훤산성에 관한 기록

  견훤산성에 관한 기록은 상산지 구증(舊增)에「재주서사십리구재청계산상유창옹정정미화연경술이건우청계사방가축성첩우수구성재화산속리지간지세험준성첩완고동유은성창서유화영중모량창가위령추풍령로지간방일명견훤성주오천삼백오십보중화오면인부수납(在州西四十里舊在淸溪山上有倉雍正丁未火煙庚戌移建于淸溪寺傍加築城堞于水口城在華山俗離之間地勢險峻城堞完固東有銀城倉西有化寧中牟兩倉可爲嶺秋風嶺兩路之間防一名甄萱城周五千三百五十步中化五面人夫收納」이다.
  이는 다만 청화산, 속리산 중간의 험준한 지세에 성첩이 있다는 기록일 뿐이다. 그 위의 기록은 성산산성일 것이다. 성산산성은 화서면 하송리의 대궐터(극락정사)에서 청계사 계곡까지 연결되어 있는 성으로 이 두 성을 일명 견훤성이라 부른다.

  2. 성산산성[城山山城 : 견훤산성(甄萱山城)]

소재지 : 경북 상주시 화서면 하송리
            (동경 127° 56′ 북위 36° 28′)
축   법 : 석  축
규   모 : 둘레 약 600m, 높이 2m, 폭 2m
시   대 : 후백제시대

  경북 상주군 화서면 하송리 청계산 계곡과 화서면 동관리 마을 사이에 있는 청계산 정상부에 위치한다. 일명 견훤산성으로 불리우고 있다. 성지 중앙에는 극락정사란 사찰이 있고 토축과 석축으로 천연의 자연지세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축성했는데 지금도 성벽이 남아 있다. 성의 둘레는 약 600m 정도의 타원형이다. 청계산 위에 창고가 있었는데 1727년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3년 뒤에 청계사 곁으로 이전하여 성첩을 쌓았다고 한다. 지세가 험준하고 완고하여 조령과 추풍령의 관방이라 하겠으며 동쪽에 은성창, 서쪽에 화령과 중령의 양창이 있었다고 한다.

  3. 병풍산성  

  아자개가 웅거했던 사불성은 지금의 상주시 병성면에 소재한 병풍산성이 되겠다. 골짜기를 끼고 있는 병풍산성은 둘레 1,770m 규모의 석축 산성인데 그 북쪽으로는 경명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박언창의 무덤인 사벌국 왕릉이 바라다보이고, 그 동편으로는 낙동강이 굽이돌고 있다. 낙동강을 수로로 이용할 수 있는 요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사벌국 고성을 설명하며 “병풍산 아래에 있다. 성 옆에 높고 둥근 구릉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사벌국 왕릉이라 한다. 신라 말년에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이 성에 웅거하였다.” 라고 하여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4. 지룡산성(地龍山城 : 청도)  

  운문면 신원리에 있는 운문산 지맥에 지룡산이라는 산이 있다. 이 산 위에는 지금도 옛날의 산성을 쌓았던 흔적이 있으며 지룡산성,호거산성,운문산성이라 부르고 있다. 이 지룡산성이란 이름은 후백제왕 견훤이 이 산에 살던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야설로 인해 지룡산이라 부르게 되었고 여기에 있는 산성을 지룡산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룡산성은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삼국을 통일하게 된 계기의 터전이기도 하다. 이 산성을 축조한 후 후백제왕 견훤이 신라의 수도였던 금성을 공략하게 되자 신라왕이 나라를 들어 고려에 항복하게 되고 그 뒤 고려에 의해 후삼국이 통일되었던 것이다. 이 지룡산성에 얽혀 있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 온다. “신라말경 지금의 운문면 신원리 내포에 한 아름다운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원근 젊은이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이 처녀는 부모님을 모시고 화목하게 살고 있었다. 처녀가 성숙해지자 한편으로는 장래의 배필감을 생각하면서 가끔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했다. 어느날 밤중 처녀가 문을 잠그고 자고 있을 때 인기척에 놀라 깨어보니 어떤 낯선 총각이 방에 들어와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처녀는 얼마나 놀랐는지 소리도 못지를 지경이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처녀가 말하기를「누구시온데 이 밤중에 처녀 혼자 자는 방에 들어왔어요?」하자 그 총각이 대답하기를「나는 여기서 좀 떨어져 있는 곳에 살고 있으나 낭자를 주야로 사모하던 끝에 이러한 무례를 범하게 되었으니 너무 책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처녀는 총각의 말을 듣고 그 풍모를 자세히 쳐다보니 늠름하고 믿음직하게 생긴 미장부였다. 처녀는 자신도 모르게 이끌려 그날부터 두 사람은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고 처녀는 한시라도 총각을 잊지 못하여 애타게 기다리게 되었다 한다. 
  그 뒤부터 매일 자정이 좀 지나면 언제나 찬 바람이 일면서 그 늠름한 총각이 처녀방을 찾아 들어 사랑을 나누다 첫 닭이 울기전에 떠나 버리곤 했다. 이렇게 지내는 것이 얼마간 흘렀다. 그간 부모는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곳곳에 좋은 혼처를 구해도 딸은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막무가내였다. 부모들은 딸이 사모하는 젊은이가 있나 보다하고 딸을 달래고 야단을 쳐서 추궁하였으나 처녀는 그런 일이 없다고 하여 부모들은 딸의 말을 믿었다.
  이렇게 지나기를 수 개월 지나자 처녀는 아기를 갖게 되어 처녀는 자신이 잉태한 것을 부모에게 숨기고 배를 천으로 싸매어 지났으나 결국에는 부모가 알게 되었다. 딸이 고이 길러 좋은 혼처를 찾아 결혼시키려던 부모의 꿈은 깨어지고 말아 크게 실망하였다. 딸을 앉히고 그간 어떻게 된 연유인가를 물으니 딸은 감출 수가 없어서 지난 일들을 낱낱이 이야기 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니 어머니는 딸의 장래가 남의 이목이 두려워서 태산같은 걱정이 쌓이게 되었다.
  부모들은 이렇게 된 이상 하루바삐 그 총각집에 통혼을 하여 혼례를 치르기로 하고 딸에게 총각의 거처와 이름을 물었다. 그러나 딸은 눈물을 흘리며 대답하기를「죄송하오나 그 총각의 거처도 이름도 모르옵니다. 앞으로 석달간만 기다려 주면 소녀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때까지는 거처와 정체를 알려고 하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하니 석달간만 더 기다려 주세요」하고 간청하였다. 이에 부모들은 딸의 말을 믿고 몇 달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처녀가 아이를 잉태했다는 소문이 온 마을에 쫙 퍼지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딸아이가 아기를 배었다는 소문이 날까봐 항상 노심초사하던 어머니는 크게 당황하여 그 총각이 말한대로 오랫동안 기다릴 수 없으니 총각의 부모를 찾아 혼사를 이루도록 그 총각이 찾아오면 딸아이에게 말하도록 하였다.
  그날밤 처녀는 찾아온 총각에게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빨리 혼사를 치룰 수 있도록 부탁했다. 그러자 그 총각이 말하기를「여보 낭자 이제 날짜가 겨우 한달도 못 남았으니 참고 기다리도록 합시다.」하였다. 이튿날 사실을 부모님께 말씀드리니 아버지는 그 총각 말대로 기다리자고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안된다. 만약 그 총각이 약속을 지키지 않게 되면 너는 애비없는 자식을 낳게 되고, 아이와 너의 신세가 어떻게 되겠느냐.」하시며 눈물을 흘리니 처녀의 마음 또한 착잡하기 이를데 없었다. 며칠 후 어머니가 말하기를「좋은 방법을 생각해 두었으니 시키는대로 하라」하면서 명주실 꾸리를 하나 딸에게 주었다.「오늘밤에 그 총각이 다시 너를 찾아오면 그 발목에다 명주실을 묶어두면 반드시 그 거처를 알 수 있을 것이니 그대로 하여야 한다.」면서 거처를 알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날밤에도 총각은 여전히 처녀의 방을 찾아 들었다. 처녀는 명주실을 총각의 발목에 묶느냐 마느냐의 갈등속에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 총각의 말대로 며칠을 기다리자니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나고, 어머니의 말씀을 따르자니 며칠만 기다리면 된다는 총각의 말이 생각났다. 오랫동안 번민을 하던 처녀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르기로 하고 발목에다 명주실을 묶어 두었다. 이튿날 날이 밝자 처녀는 이 사실을 부모님에게 알렸다. 부모들은 딸 방으로 달려가 보니 명주실이 창문 구멍으로 빠져나가 있었다. 부모는 명주실을 따라갔더니 복호산(伏虎山)(=지룡산地龍山)옆 중턱에 위치한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동굴속으로 들어가 보자 동굴 끝에 오색이 찬란한 짚동같이 큰 지렁이 한 마리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부모는 지렁이가 워낙 커서 잡을 도리가 없었다. 여러 가지 궁리 끝에 노루 가죽을 가져와서 지렁이 몸통에 덮어 씌우니 죽고 말았다. 그날밤부터 그 총각도 처녀의 방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달이차서 처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자라나서 후백제왕 견훤이 되었다고 하며 황간(黃澗) 견씨(甄氏)의 시조라고 한다. 견훤은 신라를 정복하기 위해 선조 지렁이의 영지(靈地)인 지룡산을 찾아가서 지룡산성을 구축하고 신라 정벌을 위해 애를 썼으나 백성들에게 인심을 잃어 버리고 결국에는 아들 신검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후에 등창으로 죽고 말았다.(청도군지)

  5. 견훤성(원주)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문막면 후용리 산 3

축   법 : 석축

  옛 기록에는 나오지 않다가『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건등면월진리(建登面越辰里). 사유림(私有林), 견훤산성(甄萱山城)이라 칭(稱)함. 괴정부락의 남방일소병사에 있음. 석성으로서 주위 약 오정 거의 폐퇴함. 고려의 초기 견훤이 여병과 싸워 이곳에 병을 주둔한 곳이라 전함.『전국유적목록』에는 ‘문막면 월진리, 국유, 괴정부락의 남방 일소구상에 재(在). 석성, 속칭 견훤성’이라 하였다. 『문화유적총람』상에는 ‘견훤성,원성군 문막면 후용리 산 3(월진리), 후백제의 시조 견훤이 성을 쌓고 왕건과 싸워 승리를 거두게 되었으나, 군량이 떨어져 곤란할 때 견훤이 꾀를 써 강물에 석회를 풀었는데 왕건성에서는 쌀 씻는 물인 줄 알고 먹었다가 병사들이 죽어 퇴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괴정부락의 남방의 소구상에 약 500m정도 흔적만 남아 있다.’고 하였다. 성 서쪽 5㎞에는 남한강 지류인 섬강이 남서로 흘러 내리고, 2㎞ 서쪽에는 성주에서 서울로 향하는 영동고속도로와 국도가 나란히 달리고 있다.

  6. 남고산성(전주)

소재지 : 전북 전주시 동서학동 724번지
            (동경 127° 09′ 북위 35° 47′)
규   모 : 둘레 5.3㎞ 높이 2.4m 상폭 35㎝ 하폭 82㎝
시   대 : 후백제 또는 통일신라시대
지   정 : 사적 제294호·지방기념물 제4호

  남고산성은 전라북도 전주시 동서학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축산성이며 사적 제294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성문지와 장대지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다. 일명 견훤산성 혹은 고덕산성이라고도 하는 고덕산의 서북쪽 골짜기를 에워싼 포곡형 산성이다. 이 성은 901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도성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현존하는 성벽은 임진왜란 때 전주부윤 이정란이 이곳에 입보하여 왜군을 막을 때 수축하였다. 그 뒤 1811년에 관찰사 이상황이 증축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박윤수가 관찰사로 부임하여 완료한 것이다. 숙종때에 부근의 위봉산성(威鳳山城)에 이어 진이 설치되었고 성내에는 진장(鎭將)이 머무르는 관청과 창고, 화약고 등이 있었다. 남북에 장대(將臺)가 있으며, 문은 동쪽과 서쪽에 있었다. 서쪽에는 암문(暗門)이 하나 있었고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포루가 있었으며, 특히 천경대, 만경대와 같이 절벽이 있어 자연적 요새를 이루었다. 남아 있는 북문지는 석축만 남아 있는데 너비 3.4m, 높이 1.2m이며 세 봉우리에는 각각 10㎡의 장대지가 있다. 본래 성내에는 연못이 네 군데나 있었고 우물이 25개나 되었으며, 영조 때의 기록에 의하면 둘레 2693보, 여장 1946척이고 성 안에 민가 100여채가 있었다 하나, 현재 성내에는 남고사, 관성조를 비롯하여 남고진의 내력을 기록한 남고진 사적비만 남아 있다.

  7. 동고산성(전주)

    동고산성은 전주시가의 동남방에 있는 승암산 동편에 자리한다. 그러나 성내의 대부분은 완주군 상관면 대성리에 포함된다. 동고(東固)란 남고산성이란 이름이 붙여지면서 대조적으로 생긴 이름인데 그곳에서 나온 기와편의 명문(銘文)에 의해서 창달 당시에는 전주성이란 불렀던 것 같다. 남고산성은 원래 고덕산성이라 하였음이 이미《세종지리지世宗地理志》에 보이고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에는 만경(萬頃 : 萬景)산성이라 불렀다는 것은《선조실록宣祖實錄》에 의해서 알 수 있다.
  이곳의 산성을 수축하고 남고진을 설치한 것은 순조 12년(1812)인데 이는 헌종 12년(1846)에 이삼만이 쓴 남고진사적비에 의해서 알 수 있다. 남고산성의 수축을 마친 관찰사 박윤수는 만억루신건기에서「남고·동고산성이 서로 맞서서 돌뿌리가 솟아 만마동 40리의 골짜기를 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동고」라는 이름은 이 때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전주가 후백제의 왕도였음은 여러 문헌에 보이지만 이 동고산성을 두고 견훤의 옛 궁터라고 한 것은 숙종 14년(1688)에 성황사를 이곳에 옮기면서 남겨진 전주 성황사 중창기에 잘 표현되어 있다.
 「옛터 성황사는 북쪽을 면하고 있는데다가 괴목나무 숲 그늘에 묻혀 있어 이를 다시 수리하더라도 10년이 못가서 다시 여전히 퇴페할 것이므로 이를 동쪽으로 옮겨 앉혔다. 이곳은 바로 견훤의 궁터라고 전해오는 곳이다.」이 성황사는 동고산성 중심부에 있는 대지상에 지금도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해오는 말일 뿐 그 확증은 없었다. 1980년 가을 산성의 개괄조사 도중 건물터에서 전주성명연화문와당(全州城銘蓮花文瓦當)이 발견됨으로써 이곳이 견훤의 궁터임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이 와당은 직경 15.2㎝로서 바깥 둘레에는 38개의 연주문(連珠文)을 두르고 가운데 바탕에는 여덟 잎의 연꽃무늬가 새겨졌는데 꽃잎마다 작은 꽃잎을 겹친 복판(複辦)으로서 이는 신라 말~고려 초의 연꽃무늬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안쪽 중심권은 자방(子房)이라 하여 그 안에 연씨 모양을 장식하는게 보통인데 이 와당에는 전주성(全州城)이란 글씨를 새겨 놓았다. 와당에 성의 이름을 새긴 예는 경주 월성(月城)에서 나온 것이 있을 뿐이었다. 연꽃무늬 와당을 장식하는 것은 불교 가람과 왕궁성 건물 외에는 쓰지 않는다. 이로써 동고산성은 견훤시대의 왕궁터임이 뒷받침 된 셈이다. 이 성터에서는 이 밖에도「전주성」「중방中方」「관官」자 등의 글씨가 찍힌 평기와편이 나왔다.
  이 산성은 서북으로 면한 수구의 남북으로 뻗은 규암절벽의 천험을 이용하여 동쪽이 높은 삼태기형의 골짜기를 감은 성인데 남북으로 뻗은 날개모양의 익성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장축은 서북방향이고 바깥 성벽의 둘레는 1,574m, 너비는 동서 314m, 남북 256m이다. 남북의 익성의 길이는 북쪽이 112m, 남쪽이 123m이며 높이는 수구가 230m, 동남쪽 최고봉은 306.6m이다. 석축은 능선 바깥 사면 중턱을 깎아 회랑도를 설치하고 그 바깥쪽에 석축을 하였는데 거의 무너졌으나 높이가 4m에 이르는 곳도 있다. 성안의 동쪽 사면은 3단으로 건물대지를 깎아내렸는데 윗단 대지는 길이 117m, 폭 20m 정도이고 중간 대지는 길이 113m, 폭 26m로서 그 안에는 건물 석축과 기와편들이 흩어져 있다. 성문은 수구에 서문 북익성의 동쪽 구석에 있고 남익성은 양권 근부에 남문이 있다. 각 성곽 모퉁이에는 역시 누대가 있다. 성안 중앙에는 우물이 있고 그 아래에 자그마한 유지(溜池)가 있다. 《동국여지승람》을 보면「기린봉 위에 소지(小池)가 있다」고 하였는데 현재의 기린봉은 아무리 보아도 그 산 위에 작은 못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으므로 이 동고산성이 있는 봉우리가 원래는「기린봉」이었던 모양이다. (완주군지)

  8. 성동산성터(당진)  

  충청남도 당진군 합덕면 도곡리 둔군봉에 있는 산성이다. 후백제 때 견훤이 축조한 산성으로서 고려와 싸우기 위해 쌓았다. 조선말엽 동학군을 무찌르기 위해 관군이 주둔하여 동학군과 싸웠다. 둘레는 1,000m가 되는 성으로 동학군의 시체가 쌓였던 곳이며 현재 그들의 묘도 있다.

  9. 합미성(合米城 : 장수)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장수읍 식천리 산 177

지정번호 : 지방기념물 36호

분   류 : 성곽

  장수읍에서 팔공산 쪽으로 오르다보면 신무산 아래에 둘레 320m, 높이는 밖으로 5m, 안에서는 1.5m 정도로 쌓은 성이며 어느 정도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는 산성이다. 이 성은 후백제 시대에 축조한 성으로 이 근처의 병사들이 군량미를 이곳에 저장하였기 때문에 합미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해 지하로 급수하던 수로관이 현재도 남아 있다.
  이 수군지를 쑤꾸머리라고 불렀으며 이산성에서 3㎞ 떨어진 곳에 신무산이 있는데 이 근처에 허수아비를 세워두고 적을 합미성으로 오지 못하게 하고 신무산으로 유인하여 적을 무찔렀다고 한다. 몇 해 전까지도 성지의 땅밑을 파면 불에 탄 쌀이 나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10. 청원 정북리토성(淸原 井北里土城 : 청주)

소재지 : 충북 청주시 정북동
축   법 : 토  성
규   모 : 둘레 655m, 높이 4m
시   대 : 삼국시대

  충청북도 청주시 정북동(출토당시 충북 청원군 북일면 정북리) 토성마을에 있는 백제시대의 토성이다. 둘레 655m, 성벽높이 약 4m 평지에 네모꼴을 한 토성으로 청주시의 북방에 있으며, 미호천과 무심천이 합류하는 까치내 부근 평야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성안에는 토성마을이 자리잡고 주변은 모두 논이다. 윗부분은 너비 2m 정도로 한 바퀴 돌 수 있는 길이 나 있다. 직선을 이룬 성벽의 길이는 동벽 180m, 남벽 155m, 서벽 160m, 북벽 160m로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다. 성벽의 중간에는 사방으로 통행할 수 있도록 성벽이 단절되거나 어긋나게 단절되어 옹성처럼 문터의 모습을 남기고 있다. 벽의 모서리에는 둥글게 높이를 높여 곡성처럼 바깥으로 내밀게 하였는데 각루 등의 시설이 있었던 듯 하다. 성벽의 바깥으로는 해자의 흔적이 있으며, 성벽은 부식된 화강암을 부순 마사토와 붉은 흙을 섞어 두께 7~15㎝씩 판축을 하여 만든 것이다. 1939년 성안에서 돌화살촉, 돌칼, 돌창이 출토된 일이 있다고 하며, 삼국시대의 그릇조각과 고려시대 이후의 자기 조각도 발견되고 있다.
  최근에 나타난『상당산성고금사적기』라는 조선 영조대의 자료에 의하면 이 토성이 후백제의 견훤에 의하여 축조되었고, 창고를 지어 곡식을 저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평지 네모꼴 토성은 그 유례가 드문 중국식 성터여서 전설로서의 견훤축성설은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며, 오히려 3세기경 이 지역의 중심된 취락성으로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1. 양산성(영동)  

  영동군에 소재하고 있는 양산성(陽山城)만 해도 견훤이 신라 경순왕 2년(928) 장군 관흔(官昕)을 시켜 쌓았다가 왕건에 의하여 격파되었다고 고산자(古山子)의 <대동지지>에 전한다.

  12. 소실령이 성지(城地 : 괴산)

소재지 : 충북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 사기막리 경계 소실령
            (동경 127° 50′ 북위 36° 41′)
축   법 : 석  축
시   대 : 후삼국시대

  이 산성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 송면초등학교의 북쪽 약 2㎞, 사기막리의 남쪽 약 2㎞ 지점에 있는 소실령을 가로막은 석성이다. 송면리에서 517번 지방도를 따라 북쪽으로 가다가 오른쪽(동쪽)의 갈모봉(해발 582.4m)과 서쪽 무명봉(해발 443.6m) 사이의 고개를 넘어 문망면-괴산으로 통하는 진로를 막아선 요충지다. 후삼국시대 견훤이 북쪽의 적 궁예를 막기 위해 쌓은 것이라고 하며, 지금은 대부분이 경지가 되어 몇 군데의 돌무더기가 남아 있을 뿐이다.

  13. 상두산 성지(象頭山 城地 : 정읍)

소재지 : 전북 정읍군 산외면 상두리 356
규   모 : 둘레 21m, 높이 2.5m, 상폭 3m
시   대 : 후백제(구전) 또는 조선시대

  정읍군 산외면 상두리와 김제군 금산면 선암리의 경계선상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 575m의 산정에 쌓은 소규모의 산성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 김제현 산천조와 태인현 산천조에 상두산성에 대하여 모두 간략히 적혀 있다.『문화유적총람』 下에는 후백제의 견훤이 쌓았다고 전해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같은 자료인『문화유적총람』下 정읍군 ‘상두산성지’에는 ‘1589년(조선 선조 22년)에 정여립이 모반하여 상두산에 성을 쌓고 관군과 싸웠다고 하여 지금도 성터와 집을 건립하였던 주초석이남아 있다’고 적고 있으나, 이 두 가지 기술에는 상치되지 않는 점들이 있다.
  또 이 지방에서는 ‘전라도, 황해도의 양도에서 일시에 한양 공격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안악군수 이축, 제령군수 박춘광, 신천군수 한음인, 황해감사 하운종 등이 이들의 음모를 미리 탐지하고 상고하니 관련된 모든 이가 체포·처형되었다. 이를 기축옥사라 한다’고 전하고 있다.
  정여립이 황해도 대동 무사단과 왕래하고 있었던 것을 모반의 조짐이라고 상소하고 정여립을 토벌하는 구실로 삼았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정여립이 전라북도 진안에 있는 죽도에서 관군의 급습을 받아 피할 사이 없어 자결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뒷날 정여립의 모반은 사실이 아니며, 정철과의 당파싸움의 희생이 되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그럼에도 상두산성에 관한 항설로 ‘이 때에 모반을 위한 축성이라 하여 산성을 헐어 버리고 민가는 전부 소개시켰다’고 믿고 있음은 왜곡된 역사인 식에서 온 것이라 하겠다. 지금은 산성에서 2㎞ 떨어진 곳에 원상두마을이 있으며, 산성터에 왕래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다. 더구나 수목이 우거져서 흔적을 확인하기는 더욱 곤란하다.

  14. 금성산성(錦城山城 : 나주)

소재지 : 전남 나주시 경현동 금성산
            (동경 126° 42′ 북위 35° 031′)
축   법 : 석  축
규   모 : 둘레 900m, 높이 3.6m
시   대 : 후백제시대

  금성산성은 나주시의 외곽에 있는 해발 450.3m의 금성산에 있다. 후삼국시대 후백제의 견훤이 무진주(광주)를 근거지로 하고 전쟁을 하였을 때, 왕건이 인천을 떠나 목포에 상륙하여 이 성에서 싸웠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지금은 시가지로 변하여 흔적을 알아보기 어렵다.
  성의 높이는 3.6m이며, 3면은 험한 지세이다. 나주가 진(鎭)일 때에 그 구실을 하였지만, 진이 장성(長城)의 입안산성으로 옮겨 가면서 폐성 되었다. 지금도 석축으로 된 성터가 남아 있다. 총 길이는 900m에 가까웠는데, 그 중 200m 정도가 남아 있다.『문헌비고』에는 ‘금성산성 석축 주2946척, 고12척 삼면험준 고유창고지’라 적고 있다.

  15. 왕궁평성(익산)  

  왕궁평성은 전북 익산군에 소재하며 도 지방기념물 제1호로써 '99. 9. 18 국가사적 제408호로 지정되었다. 왕궁평성은 이 지역 주민들에게는 ‘모질메산성’으로 불리우고 있는데 지난 '76년 익산 원광대 부설 마한 백제문화연구소와 '89년부터 시작해 '99년초에 끝난 부여문화재연구소의 1, 2차 왕궁리 유적발굴조사 결과 성의 대체적인 윤곽이 드러났다.
  이 성은 남북으로 495m, 동서로 235m인 장방형이며 성벽의 두께가 3m에 달할 뿐 아니라 성벽의 축조기법이 백제양식이며 성 안에서 그 시대의 기와 및 와당을 비롯한 토기, 생활용구 등이 출토되어 백제의 궁성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곳은 백제 무왕이 천도했으나 별도의 도읍지였던 곳이며 후백제 때는 견훤이 궁성으로 잠시 이용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 안에 국보 제289호로 지정돼 있는 왕궁리 오층석탑과 주춧돌, 그 시대의 정원석으로 보이는 관상석들이 흩어져 있다.

  16. 자미산성(나주)  

소재지 : 전남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 신촌리

기념물 : 제88호

  반남면은 백제의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반남일대에 영산강유역 특유의 옹관고분이 최대, 최밀의 분포상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중앙에 위치한 자미산에 대형산성(자미산성)이 축조되어 있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자미산성은 백제 이전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가 영산강유역을 영역으로 삼은 이후에 영산강유역 토착세력의 중심지인 이곳을 반내부리현(半奈夫里縣)이라는 일개현으로 편제하여, 짐짓 이 지역을 무시하는 정책을 썼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 통일신라는 이곳을 반남군으로 승격시켜 주었지만 영산강유역의 최고 중심지로까지는 떠오르지 못했다.
  후삼국시대에 이르러 자미산성에 견훤군이 주둔하여 나주의 왕건군과 대항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이 때문인지 고려의 천하가 되면서 반남군은 반남현으로 강등되었다. 고려말에는 자미산성이 삼별초군대의 거점으로 활용되기도 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자미산성은 영산강의 대지류인 삼포강이 애워싸고 완만한 구릉성 평지가 펼쳐져 있는 반남면 평야지대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자미산에 축조되었다. 이곳은 영산강과 바다의 수로에 접해있어서 영산강유역과 서남해안지역으로 통하는 요지에 해당된다. 자미산은 두 봉우리로 이루어진 누에고치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산성은 자미산의 두 봉우리를 포함한 전체산의 둘레를 3단으로 둘러 축조한 계단식, 퇴뫼식 산성이다. 성안에는 평탄한 건물터와 용왕샘이란 샘터도 있다. 문터는 3곳에 있으나 문의 규모는 알 수 없다.
  이곳을 중심으로 이웃해서 대안리 고분군(사적 제76호), 덕산리 고분군(사적 제77호), 신촌리 고분군(사적 제78호) 등이 있어서 이 성이 이 지역의 중심세력이 거처하였던 곳임을 알 수 있다. 계단식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영산창성지(榮山倉城址)나 학산리토성지(鶴山里土城址)처럼 고대에 축조된 성곽으로 여겨진다. 정상

  17. 견훤묘(논산)  

  견훤의 묘소는 《세종실록》지리지 공주목 은진현 조에 “현의 남쪽 12리 풍계촌(風界村)에 있다”고 하였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현 남쪽 12리 풍계촌에 있는데 속칭 왕묘(王墓)라 전한다(은진현 塚墓 條)”라는 기록이 전한다. 견훤의 묘에 이르는 큰 무덤이다. 최승로의 상서문에 따르면 왕건은 견훤이 사망하자 부의(賻儀)를 넉넉하게 하였다고 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국왕으로서의 격에 맞게끔 장대한 유택을 조영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견훤은 임종시에 “완산이 그립다. 완산이 보이도록 모덤을 써 달라”고 말하여 그 유언에 따라 무덤의 좌향을 전주쪽으로 정하였다고 전해온다.

  18. 포석정(경주)  

  포석정(鮑石亭)은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경주 남산의 서쪽 계류가에 위치하였던 정자 및 연회장소를 일컫는다. 창설연대는 자세하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정자는 없어졌으나, 포어(鮑魚)의 형태를 모방하여 만든 수구가 남아 있다. 계수(溪水)를 받아들여 이것을 전복껍질 모양의 수구(水溝)에 흐르게 하고 그것에 술잔을 띄워 문무백관(文武百官)의 품계에 쫓아 열을 지어 앉아서 시(詩)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흐르는 술잔을 차례로 마시면서 흥겨워하였다. 곡수(曲水)의 주연(酒宴)은 옛날 중국과 일본에서도 있었다 하나 오늘날까지 그 역력한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은 오직 경주의 포석정뿐이다. 곡수거는 가장 긴 세로축이 10.3m, 가로 축이 약 5m크기로 깊이 50㎝ 가량되는 도랑이 나 있다. 모두 63개의 석재로 조립되었다. 
  견훤은 927년 9월 신라의 도성을 쳐들어가 포석정에서 유희를 즐기던 왕을 비롯한 비빈·종척들을 죽이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견훤이 갑자기 도성에 들어갔다. 이 때에 신라왕은 비빈 종척과 더불어 포석정에 나가 주연을 베풀고 오락을 즐기다가 갑자기 적병이 왔다는 말을 듣고 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과 부인은 달아나 성 남쪽의 이궁(離宮)에 숨고 종신·영관·궁녀들은 모두 잡혔다. 견훤은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고 왕궁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좌우로 하여금 왕을 찾아내게 하여 군중에 두고 핍박하여 자숙토록 하고 강제로 왕비를 능욕하였으며 그 부하를 풀어놓아 빈첩들을 난행하게 하고 왕의 표제인 김부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왕제 효겸과 제신 영경 등을 포로로 하고 자녀들과 백공과 병복과 진보를 모조리 약탈하여 돌아갔다. (《고려사》 태조세가 10년 9월조) 참고로  포석정 일대는 성남이 궁터라 한다. 이궁이란 임금이 행차할 때 머무는 별궁을 가리키는데 이곳은 왕족과 귀족들의 놀이터인 것이다. 산 좋고 물 좋은 부엉굴(포석정 원래명칭)을 환락의 터전으로 삼고 이궁을 지었던 모양인데 지금 여러 건축터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세종실록 15년 기사에 보면 백성에게 술을 삼가라는 계주문(戒酒文)속에서 “신라는 포석정에서 망하고 백제는 낙화암에서 망했다”는 대목을 볼 수 있다.

  19. 금산사(김제)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 무악산에 있는 사찰을 말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이다. 《금산사사적》에 의하면 이 절은 600년에 창건되었다. 즉 백제 법왕이 그의 즉위년(599)에 칙령으로 살생을 금하고, 그 이듬해에 금산사에서 38인의 승려를 득도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진표율사에 의해 중창(신라 혜공왕 2년무렵)되면서 대가람의 면모로 일신되었다. 진표는 미륵장륙상을 조성하여 미륵전에 안치했고, 금당의 한 벽화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자기에게 계법을 주던 모습을 그렸다.『삼국유사』에는 금산사 중창불사 광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율사는(미륵보살로부터) 교법받기를 마치자 금산사를 세우려고 산에서 내려왔다. 대연진(大淵津)에 이르니 문득 용왕이 나와서 옥가사를 바치고 팔만권속을 거느리고 그를 호위하며 금산사로 갔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며칠안에 절이 완성되었다. 또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감응하여 구름을 타고 내려와서 율사에게 계법을 주니 율사는 시주에게 권하여 미륵장육상을 만들게 했다. 또 미륵보살이 내려와서 계법을 주던 모양을 금당 남쪽 벽에 그렸다. 불상은 갑진년(764) 6월 9일에 만들어서 병오년(766) 5월 1일에 안치했으니 이해는 대력(大曆) 원년(신라 혜공왕 2년)이었다. 금산사에는 미륵신앙의 성지이며, 절의 중심공간인 미륵전은 그 당당한 표현이다.
  미륵신앙이란 무엇인가? 미륵보살은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년이 지나 이 세계(사바세계)에 출현, 화림원 안의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여 미륵불이 되고 세 차례의 설법(龍華三會)을 통해 석가모니가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을 남김없이 교화하여 이 세계를 불(佛)국토로 완성할 미래불로 대승불교는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륵신앙은 미래의 부처를 간절히 구하는, 이 세상이 불국토로 바뀌기를 기원하는 중생들이 갖는 희망의 신앙이다. 고통과 질곡의 말세의 삶속에서 그 고통과 질곡을 벗어던지고 맞을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얼마나 큰 꿈인가. 불교의 신앙 가운데 미륵신앙은 민중신앙적인 요소가 강하다. 미륵신앙이 개인적인 신앙으로서도 큰 의미를 갖지만, 그보다는 민족이나 소외된 계층의 집단적인 신앙으로 더 잘 표출되는 것은 새로운 세상의 꿈을 제시하는 신앙의 특성 때문이리라. 한편 금산사는 스스로 미륵의 화신으로 자처했던 풍운아 견훤의 절이기도 했다. 
  견훤은 용의 아들로 알려졌는데, 후백제를 일으켜 옛 백제의 고토를 회복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신라말기의 한반도를 풍미했다. 그는 완산(지금의 전주)을 도읍지로 삼았으며, 국가적인 원찰로 금산사를 정했다. 그러나 역사란 늘 잔인한 것! 그는 스스로 금산사를 원찰로 삼아 그 서원으로 그야말로 전륜성왕 같은 인물이 되려 했으나 나중에 아들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는 참담한 신세가 된다. 견훤은 말년에 넷째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러자 맏아들인 신검을 필두로 양검,용검 등 아들들이 쿠테타를 일으켜 왕권을 찬탈했으며, 견훤은 아들들에 의해 금산사에 갇혔다. 신검은 금강을 죽인 다음 왕위에 올랐다. 금산사에서 석달동안 갇혀있던 견훤은 감시자들에게 술을 먹여 취한 틈을 타서 도망쳤다. 금성(지금의 나주)으로 도주한 그는 고려 태조 왕건에게 투항, 자기의 아들들을 쳐줄 것을 간청하는 굴욕을 겪는다. 왕건은 곧 후백제를 쳐부셔 비로소 후삼국을 통일했다. 그런지 며칠 만에 견훤은 번민과 절망감, 울화를 이기지 못해 병을 얻었고, 등에 등창이 나서 죽고 말았다.
  견훤은 스스로 미륵을 자처하여 메시아를 갈구하던 백제유민들의 정서를 얻는데 성공했으나 피붙이들의 권력 싸움을 자초함으로써 그 희망이 좌절되는 비극적 인물로『삼국유사』는 그리고 있다. 미륵신앙의 본거지를 자기화 하지만 그것은 결국 그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견훤이 금산사에 갇히자 김제 만경지역은 물론 옛 백제 전 지역에 이런 동요가 퍼져나갔다. 가여워라 완산아(完山兒) 애비잃고 우네….

  20. 견훤석문(김제)  

  전북 김제에 소재하며 이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견훤석문이라 불리는 돌로 쌓은 홍예문이 있다. 돌로 쌓은 성의 문인데 성의 자취는 없고 문만 남아 있다. 이곳에 있었던 성에 대해 이곳 주민들은 견훤이 쌓았다고 믿고 있으나 확실치 않다.

  21. 삼태사 묘(안동)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안동권씨의 시조 권행(權幸), 안동김씨의 시조 김선평(金宣平), 안동장씨의 시조 장길(張吉)을 제향하는 사당을 말한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15호이다. 삼공신묘·안동삼태사묘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안동시 북문동에 있다. 창건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초에 안동부민이 3태사의 업적을 추모하여 사당을 세우고 치제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하며 1561년(명종 16)에 중수하였다. 문헌에 의하면 신라 말엽에 김행이 고창군(古昌郡:지금의 안동)을 지키고 있을 때 후백제왕 견훤이 반란을 일으켜 경주로 쳐들어와 왕을 죽이고 왕비를 능욕하였으므로 고려 태조 왕건이 천인무도한 견훤을 토벌하고자 신라로 내려왔다.
  왕건의 군대와 견훤의 군대가 팔공산을 중심으로 대치하고 있을 때 김행이 김선평, 장길과 상의한 끝에 고려를 도와 신라의 복수를 꾀하였다. 뒤에 왕건이 삼국을 통일한 뒤에 김행의 용기를 칭찬하여 권씨로 개성(改姓)하게 하고 김선평과 장길을 모두 태사에 봉한 뒤 안동을 부로 승격시키고 사당을 지어 부민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당시부터 천여년간 안동권씨 측에서 묘사를 주관하였으나 영조 때 왕명으로 3공신의 자손은 동일한 것이니 3태사의 자손이 공동관리할 것을 명하여 오늘에 이른다. 명 안에는 묘정비·보물각·숭보당·경모루 등이 있어 유물과 유적을 보관하고 있으며 3태사의 자손들이 모여서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또한 3공신묘는 지방의 사우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며 고려건축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여 중수 때에도 제도를 변경하지 않았다.《참고문헌》 典故大方, 安東府邑誌

  22. 표충사(대구)  

  표충사는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을 향사하는 사우로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에 위치하고 있다. 후삼국이 정립하면서 고려와 신라는 후백제에 대하여 공동전선을 펴고 있었으나, 후백제의 기세는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갔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에 침입하여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주를 분략하자 927년(태조 10) 고려 태조는 신라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의를 표하는 한편, 친히 정병을 거느리고 급히 남하하여 개전 중의 견훤을 팔공(대구 팔공산)에서 요격하다가 견훤의 군대에 포위되어 태조는 몹시 형세가 다급하게 되었다. 그 때 고려의 대장 신숭겸과 김락이 사력을 다하여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태조는 그 틈을 타서 가까스로 몸을 빼어 달아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태조는 이 전투에서 전사한 두 장군을 오래도록 추념하였다. 태조가 팔관회를 열고 신숭겸,김락 등 두 공신을 생각하고 가상을 만들어 열석시키고 술과 음식을 주었더니, 곡 없어지고 가상이 일어나 마치 산 사람처럼 춤을 추었다고 하는 것을 추념의 정이 깊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뒤에 예종이 두 장군을 추도하는「도이장가」를 지었다는 데서도 두 장군이 역대 국왕들에게도 크게 존경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곳 신숭겸이 전사한 장소에 그의 후손과 유림에 의해 표충사가 세워졌다. 고려 태조는 신숭겸이 전하했던 장소에 원찰을 창건하여 이를 지묘사라 부르고 전지 3백무를 하사하였다. 이어 해안현(대구 동촌)에서 기름을 모아 지묘사에 바쳐 연등의 경비를 삼게 함으로써 신숭겸을 추념하는 태조의 마음이 간절했음을 알 수 있다. 1607년(선조 40) 8월에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 유영순이 공의 외후손으로서 영남에 거주하는 후손들에게 통문을 보내고 경비를 거두어 지묘사 옛터에 사우를 창건하였다. 그후 사우가 퇴락하게 되자 1670년(헌종 11)에 향토의 유생 최익남 등의 토론에 따라 사우를 다시 새롭게 고쳐 신숭겸을 봉안하고 충열사라 현판을 걸었다. 그리고 대구유학 이시주 등이 상소를 올려 1672년(현종 13)에 표충사라 사액되었다. 1676년(숙종 2)에 신숭겸과 함께 동수전에서 순절한 김락을 배향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문경현감으로서 순국한 증좌승지 신길원(신숭겸의 후손)을 1726년에 추가 배향했다.
  1871년(고종 8) 서원 철폐령으로 표충사가 훼철되었다가 1988년 사림의 여론에 따라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얻어 표충사 중건공사를 일으켜 훼철된 지 117년 만에 준공을 보았다. 1993년 한식날에 신숭겸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이로부터 사당향사를 다시 받들었다. 현재는 신숭겸만 향사하고 있다. 1974년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3. 견훤사당(상주)  

  상주시 화서면 하송1리 청계마을에 견훤사당이 있다. 사당의 신주 독개(犢蓋)에는 “후백제대왕신위(後百濟大王神位)”라는 위패가 있다. 상량문에는 “도왕 19재(道王十九載)”라는 연호가 있어 1839년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는 매월 정월보름과 시월보름에 동고사를 지내고 있는데 과거에는 제물로 소까지 잡았을 정도로 성대하게 치뤘다고 한다.

  24. 개테사지(開泰寺址 : 논산)  

  소 재 지 :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이 개태사지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세력을 완전히 물리치고, 부처의 위력과 하늘의 힘으로 나라를 지켜 달라는 기원문을 손수 지어 바치고 동왕(同王) 23년(940)에 창건한 절의 터이다. 당시 절 안에는 고려 태조의 영정이 있어 나라에 전쟁의 기미가 있으면 그 영정앞에 기원문을 올려 나라가 태평하기를 빌었다고 한다. 그후 이 절은 고려말기에 이르러 왜구의 빈번한 약탈에 의해 사세가 차츰 기운 것으로 보인다.
  현 개태사 경내에는 보물 제219호인 개태사지 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고 이 외에도 석탑과 쇠솥이 있다. 원래의 절터인 동북쪽에는 건물자리와 주춧돌, 석조(石槽), 불대좌(佛臺座), 축대 등이 8개가 남아 있다. 또 상방산의 한 암자에도 이 절터에 있었던 석조불좌상 1구가 안치 되었고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제 반자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5. 임휴사(臨休寺 : 대구)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에 있는 대구시 전통사찰 제6호(88. 7. 28)이다. 동화사의 말사이고 921년(경명왕 5년) 영조대사가 창건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이 팔공산 동수대전에서 견훤과 싸우다가 대패하고 견훤의 추격을 피하여 반야월과 안일사를 거쳐 이곳에 와서 기도를 드리고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찾아 쉬어갔다 하여 절 이름을 임휴사라 한다.

  26. 은적사(대구)  

  대구시 남구 봉덕산 앞산공원 안에 있는 사찰로서 동화사의 말사이다. 926년(경애왕 3년)에 영조대사가 창건하였으며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의 격전에서 대패하여 단신으로 견훤군의 추격을 피해 몸을 숨긴 곳이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신라말 후삼국 때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였다. 나라가 위태롭게 된 신라는 고려 왕건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이에 왕건은 신라를 돕고자 군사를 이끌고 적과 맞섰으나 의외로 대패하고 은적사에 몸을 숨겼다. 왕건이 굴에 숨자 왕거미가 출입구에 거미줄을 쳐 견훤의 추격병들로부터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 굴에서 3일간 머물고 현재 안일암이 있는 곳에서 3개월을 쉰 왕건은 김천 황악산을 경유해 철원으로 회군했다. 그 뒤 왕위에 오른 왕건은 자신이 숨어 3일간 보낸 굴이 있는 곳에다 절을 짓게 하여 은적사라 불렀다 한다.

  27. 안일사(대구)  

  대구시 남구 대명동 앞산 안지랭이 골에 있는 사찰이다. 동화사의 말사이고 927년(경순왕 1)에 영조대사가 창건하였다. 안일사(安逸寺) 또는 왕건이 싸움터에서 지친 몸을 풀어 편안히 쉴 수 있었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됐는데 절집 인근에는 돌로 된 굴이 하나 있어 왕건이 여기에 몸을 피했다고 전해온다. 그 굴이 바로 지금도 안지랑골 등산객들이 촛불을 켜고 치성을 드리는 왕궁(王窟)이다.

 

.................................................................................................................................................................................... 

Ⅲ. 그 외 지역의 지명

  1. 파군치(破軍峙)

  대구 동화사와 파계사로 갈라지는 길목의 재 이름인데, 공산전투에서 견훤군이 고려군을 격파했다고 해서 붙인 전투관련 지명 이름이다.

  2. 살  내

  전탄(箭灘)과 지묘동 살내는 현재 대구시 서변천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공산전투에서 견훤군과 고려군이 격전을 치룰 때 화살이 쌓여 강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인 전투관련 지명 이름이다. 이 살내를 중심으로 양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고려의 장군인 신숭겸과 김락이 이끄는 증원병이 합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일시 원기를 회복하여 전열을 정비한 고려군이 후백제군을 밀어붙이면서 진출한 곳이 미리사(美利寺) 앞이었다. 현재 미리사터로 추정되는 곳은 파군재에서 동화사로 올라가는 길과 파계사로 올라가는 길 사이에 위치한 지묘동에 왕산(王山) 아래 산기슭으로서, 현재 신숭겸 장군의 순절단과 신숭겸장군이 순절한 곳을 의미하는 내용이 담긴 비각이 있는 표충단이 서 있으며, 그 뒷산을 왕산이라 한다.
  미리사가 위치해 있었던 왕산 아래서 전개된 전투는 현재 동화사와 파계사로 올라가는 갈림길이 시작되는 파군재라는 곳에서 고려군의 참담한 패배로 결말이 났다. 참패를 한 왕건은 그 병력의 대부분을 상실한 것으로 자료는 전하고 있으며, 왕건 자신도 신숭겸과 김락 등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다. 즉 전하는 바로는 신숭겸이 후백제군의 눈에 잘 드러나는 왕건의 전복(戰服)을 자신의 전복과 바꾸어 입고 후백제군을 자신에게로 유인함으로서 왕건의 위기를 구했다는 것이다. 현재 이 지역의 명칭이 지묘동(智妙洞)으로 전해지게 된 원인도 왕건을 구한 그 지혜가 교묘하였다는데서 연유한다.

  3. 반야월(半夜月)

  공산전투에서 왕건이 밤에 견훤군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칠 때 한밤중에 새벽달이 떠 있었기에 붙인 전투관련 지명 이름이다.

  4. 둔산동, 불로동, 지묘동

  대구 동구의 오랜 역사는 마을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다. 팔공산 기슭에는 고려 태조 왕건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후백제의 견훤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주둔한 둔산(屯山)동, 공산싸움에서 패하여 파군재를 넘어 도망갈 때 젊은 사람이 많아보여 붙였다는 불로(不老)동, 왕건을 탈출시키는 꾀를 짜낸 지묘(智妙)동 등.

  5. 서괘진(西掛津)

  오늘날의 대구시 대명 9동의 옛 이름은 서괘진이라고 한다. 괘진이란 지명은 이곳을 세거지(世居地)로 정한 두사충이 이곳이 강가는 아니지만 모양이 흡사 강의 흐름과 같고 나룻배가 닿는 곳과 같다고 해서 괘진(掛津)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서괘진과 동괘진의 분기점은 현 앞산공원으로 올라가는 현충로를 기점으로 서편이 서괘진이요, 동편이 동괘진에 해당하는 곳이다. 서괘진은 옛날 아지랑골 또는 안지랑이로 불리는 곳이었으며,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에게 패한 후 이골짜기에 안심하고 숨어 지내다가 갔다는 데서 고려 때부터 안지랑이골로 불리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 옛날의 서괘진인 이곳은 앞산의 울창한 숲과 맑은 공기를 품고 있어서 대구 시민들의 휴시처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6. 몽  탄

  몽탄강은 부안군과 나주군 동강면 사이를 흐르는 영산강의 하류이다. 무안 몽탄에는 왕건의 전설이 남아 있다. 몽탄은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 싸울 때 꿈에 신령이 나타나 강을 건너라고 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7. 한탄강

  한탄강은 궁예가 후백제와 전쟁을 치르고 돌아가던 중「운명이 다했다」며 한탄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전설이 있다.

  8. 여  진

  지금의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일대의 낙동강 나루로 왕건이 “저 나루는 모두 나의 나루이니라”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9. 발갱이 들(발검들)

  지금의 구미시 고아읍 송림리 및 대구시 수성구 지산동 앞들로 신검이 고려군에 피해 항복한 곳.

  10. 어갱이 들(어검들)

  지금의 구미시 고아읍 관심리 앞들 이름으로 견훤과 왕건간의 전투와 관련된 지명이다.

  11. 점갱이 들(점검들)

  지금의 구미시 고아읍 괴평리 앞들로 고려군이 신검의 진지를 점령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2. 안  심

  태조 왕건이 신라를 도우려고 군사를 이끌고 팔공산 자락까지 와서 후백제 견훤과 싸우다가 대패하여 정신없이 달아나게 되었는데 뒤돌아 보니 추격하는 후백제군이 더 따라오지 않아 “이제 안심(安心)했다”라고 한 말에서 “안심”이라는 유래가 있다고 한다.

  13. 팔공산(八公山)

  경상북도의 웅산으로 대구직할시와 달성군, 영천군, 칠곡군 경계에 있는 팔공산(1,192m)은 산역면적 12,208㏊로 1980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태백산맥의 남단에 자리하고 주봉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봉과 서봉을 거느리고 있으며,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편 것처럼 뼏쳐있다. 정상의 남쪽으로는 염불봉, 태실봉, 인동, 노족봉, 관봉 등이 연봉을 이루고 서쪽으로는 톱날바위, 파계봉, 파계재를 넘어 다시 북쪽으로 꺾어져 멀리 가산을 거쳐 다부원의 소아현에 이르고 있다. 
  신라 때는 부악이라 불렀다가 나라 중앙에 있다하여 중악이라고도 하였고, 나라의 중요 의식을 거행하는 제천단을 설치하게 되어 송산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고 그후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이곳에서 싸울 때 왕건이 포위당해 죽게 되었을 당시 여덟신하가 장렬한 전사를 하면서 왕건을 구했다고 하여 팔공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14. 왕산봉과 수기석(竪旗石)

  왕산봉은 칠곡군 지천면 송정리 뒷산으로 낙화1리와 경계하고 있다. 서기 928년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팔공산에서 격전 중 전세가 불리하자 대장 신숭겸과 갑옷을 바꾸어 입고 달아나 왕산봉에서 전열을 재정비 승전하였다 한다. 왕건 태조가 유진한 곳이라 하여 왕건봉이라고도 하며 깃발을 꽂은 돌을 수기석, 그 골짜기를 끼봉골이라 한다.

  15. 명성산(鳴聲山)

  명성산은 철원군 갈말읍과 경기도 포천군 영북면, 이동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명성산, 즉 울음산은 궁예가 자신의 부하였던 고려 태조 왕건에게 패한 후 이곳으로 쫓겨와 크게 울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신라의 마지막 세자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통한의 눈물을 뿌림에 산천도 울었다 하여 비롯된 이름이라고도 한다.

  16. 단발령(斷髮嶺)

  단발령은 강원도에 소재하며 신라의 마지막 태자 마의태자가 금강산이 바라다 보이는 고갯마루에 올라 비운의 철천지한을 씻고자 수도승이 되기 위해 삭발을 했다고 하여 붙여진 고개이름이라고 한다. 

 

 

 

목차후백제 연표사 료설 화유적과 지명문경지역의 유적문경지역의 지명그외지역 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