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사 료 > Ⅲ. 삼국사기 / 사료와 전설로 보는 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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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사 료 > Ⅲ. 삼국사기  사료와 전설로 보는 견훤 / 문경문화원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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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후백제 연표사 료설 화유적과 지명문경지역의 유적문경지역의 지명그외지역 유적

  

 

 

  사료와 전설로 보는 견훤  

 

 

제1편 사  료 > Ⅲ. 삼국사기  

   1신라본기 11 진성왕조 6년
   2. 신라본기 12 효공왕조 4년,5년
   3. 신라본기 12 신덕왕조 5년
   4. 신라본기 12 경명왕조 4년
   5. 신라본기 12 경애왕조 2년,3년,4년
   6. 신라본기 12 경순왕조 2년,3년,4년,5년
   7. 열전 제10. 견훤

 

Ⅲ. 삼국사기(三國史記)

  1. 신라본기 11 진성왕조 6년

  6년에 완산(지금의 전주)의 적 견훤이 완산에 은거하여 후백제라 자칭하니 무주(지금의 광주) 동남쪽의 군현이 모두 이에 항속하였다.

  2. 신라본기 12 효공왕조

  4년 10월에 국원(충주)·청주(청주)·괴양(괴산)의 적수 청길·신훤 등이 성을 들어서 궁예에게 투항하였다. 5년에 궁예가 이윽고 왕이라 칭하였다. 8월에 후백제왕 견훤이 대야성(지금의 합천)을 치려다가 성이 항복치 아니하므로 군사를 금성(나주) 남쪽으로 옮겨 연변의 부락을 약탈하여 갔다.

  3. 신라본기 12 신덕왕

  5년 8월에 후백제주 견훤이 대야성(합천)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였다.

  4. 신라본기 12 경명왕

  4년 정월에 왕이 고려 태조와 사빙을 교하고 우호를 닦았다. 2월에 강주(진주) 장군 윤웅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10월에 후백제주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대야성을 공함하고 군사를 진례성(오례성)에 진군하니 왕은 아찬 김률을 고려에 보내어 태조에게 원조를 구하였다. 태조가 그의 부장에게 명하여 출사·구원하게 하니 견훤이 이를 듣고 철귀하였다.

  5. 신라본기 12 경애왕

  2년 10월에 고울부(지금의 영천시) 장군 능문이 태조에게 내투하였으나 태조는 그를 위유하여 보내니 그 성이 신라 왕도에 가까웠던 까닭이다. 11월에 후백제주 견훤이 그의 조카 진호를 고려에 볼모로 보내니 왕이 듣고 사람을 보내어 태조에게 말하기를 “견훤은 이랬다저랬다 하여 거짓이 많으니 화친하여서는 안됩니다”고 하였다. 태조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3년 4월에 진호가 갑자기 죽으니 견훤은 이를 고려인의 고의적 살해라 하고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웅진(공주)에 진군하였다. 태조가 여러 성에 명하여 벽을 굳게하고 오지 못하게 하였다. 왕이 사자를 고려에 보내어 말하기를 “견훤이 맹세를 어기고 거병하니 하늘이 반드시 돕지 아니할 것이다. 만일 대왕이 일고의 위를 떨치면 견훤은 반드시 자파될 것이다” 하였다. 태조는 사자에게 말하기를 “내가 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악이 가득 차서 저절로 쓰러지는 것을 기다릴 뿐이라”고 하였다. 

  4월 정월에 고려 태조가 친히 백제를 치니 신라왕은 군사를 내어 도왔다. 2월에 병부시랑 장분 등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니 당이 장분(정사)에게 검교공부상성, 부사 병부낭중 박술홍에게 겸어사중승, 판관창부원외랑 이충식에게 겸시어사를 주었다. 3월에 황룡사탑(9층탑)이 요동하여 북쪽으로 기울었다. 태조가 친히 근암성(지금의 문경시 산양면)을 깨뜨렸다. 후당 명종이 권지강주사 왕봉규로 회화대장군을 삼았다. 4월에 권지강주사 왕봉규가 임언을 사신으로 당에 보내 조공하니 명종이 중흥전에서 불러보고 물을 내렸다. 강주소관의 돌산 등 4향이 태조에게 귀부하였다. 9월에 후백제주 견훤이 고울부(지금의 영천시)에서 우리 군사를 침범하므로 왕이 구원을 고려 태조에게 청하니 태조는 부장으로 하여금 정병 1만 명을 출동하여 가서 구원케 하였다. 11월에 갑자기 왕경(경주)에 쳐들어왔다. 마침 왕은 비빈과 종척으로 더불어 포석정(경주 남산 서록)에 가서 잔치하며 즐겁게 놀던 때라 적병이 닥침을 알지 못하였다. 창졸이 어찌할 바를 몰라 왕은 비와 함께 후궁으로 달려 들어가고 종척·공경대부·사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적병에게 사로잡힌 자는 귀인·천인 할 것 없이 다 해한(놀라고 두려워) 포복(엉금엉금 기는 것)하여 노복이 되기를 애걸하였으나 해를 면치 못하였다. 견훤은 또 그 군사를 놓아 자유로 공사의 재물을 기의 다 노략케하고 자기는 대궐에 들어가 거처하며 좌우로 하여금 신라왕을 찾아내게 하였다. 왕은 비첩 몇사람과 함께 후궁에 숨어 있다가 군중으로 잡혀 갔는데 훤은 왕을 핍박하여 자진(자살)하게 하고 왕비를 강음하고 부하로 그 비첩들을 난통케 하고 왕의 족제(김부)를 세워 국사를 권지(대리)케 하니 이가 곧 경순왕이었다.

  6.신라본기 12 경순왕

  경순왕이 즉위하니 휘는 부이고, 문성대왕의 후손이요 효종 이찬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계아태후다. 왕은 견훤의 소거로 즉위하였거니와 전왕의 시체를 서당에 모시고 군신과 함께 통곡한 후 시호를 올려 경애라 하고 남산 해목령에 장사하였다. 고려 태조가 사신을 보내어 전왕을 조제하였다. 원년 11월에 왕의 아버지(효종)를 추존하여 신흥대왕이라 하고 어머니를 왕태후라 하였다. 12월에 견훤이 대목군(칠곡군 약목면)에 침입하여 전야의 적취(곡물)을 모두 불태웠다.
  2년 정월에 고려의 장 김상이 초팔성(경남 합천군 초계면)의 적 흥종과 싸워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5월에 강주 장군 유문이 견훤에게 귀부하였다. 6월에 지진이 있었다. 8월에 견훤이 장군 관흔에게 명하여 양산에 성을 쌓으니 태조는 명지성의 장군 왕충에게 명하여 솔병격주케 하였다. 견훤(실상은 관흔의 군)이 대야성(합천) 아래에 진둔하고 군사를 분견하여 대목군의 화곡을 빼앗아갔다. 10월에 견훤이 무곡성(군위군 악계면)을 공함하였다.

  3년 6월에 천축국(인도)의 삼장(법사) 마후라가 고려에 왔다. 7월에 견훤이 의성부성(지금의 의성군)을 치니 고려 장군(의성 성주) 홍술이 나가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순주(본 하지성, 안동 풍산) 장군 원봉이 견훤에게 항부하니 태조가 듣고 노하였으나 원봉의 전공을 생각하여 용서하고 단지 순주를 고쳐 현을 삼았다. 10월에 견훤이 가은현(지금의 문경시 가은읍)을 공위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4년 정월에 재암성(지금의 청송군 진보면) 장군 선필이 고려에 아부하니 태조는 후례로 대우하여 상부라 칭하였다. 처음 태조가 신라와 우호를 통하려 할 때에 선필이 인도하였고, 이 때 귀부하게 되자 태조는 그 유공함과 연로함을 생각하여 총우한 것이었다. 태조가 견훤과 고창군(지금의 안동시) 병산(군북 10리)에서 싸워 크게 이기니 적병의 사자와 포로가 매우 많았고, 그 소속의 영안(안동시 풍산읍), 하곡(안동시 임하면), 직명(안동시 일직면), 송생(청송군 청송읍) 등 30여 군현이 상차하여 태조에게 강부하였다.

  5년 2월에 고려 태조가 50여 기병을 거느리고 신라 경기에 이르러 면회를 통하니 왕이 백관으로 더불어 교외까지 출영하여 함께 궁으로 들어와 서로 대면하고 정례를 곡진히 하고 임해전에 잔치를 베풀어 주연이 한창 난만하자 왕이 말하기를 나는 하늘이 도움을 입지 못하여 화란을 발생케 하고 견훤이 불의를 자행하여 우리국가를 침해하니 얼마나 통분한 일인지 모르겠다” 하고 인하여 현연히 죽죽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좌우의 신하들이 누구나 목메어 울지 않는 이가 없고 태조도 또한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고 인하여 수십 일 동안 머물다가 종제 유렴으로 볼모를 삼아 여태조 거가에 수종케 하였다. 태조 휘하의 군사가 나경에 있을 때 정숙하여 추호도 범치 아니하였으므로 서울(경주)의 사녀들이 서로 기뻐하며 말하기를 “전일 견씨(훤)가 왔을 때는 시호를 만난 것같더니 지금 왕공(여태조)이 오자 부모를 대한 것 같다”고 하였다. 8월에 태조가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왕에게 금채·안마를 보내고 또 신라의 군관과 장사에게 차등을 두어 포백을 선물하였다.

  7. 열전 제10<견훤>

  견훤은 상주 가은현(지금 문경시 가은읍) 사람으로 본성은 이인데 후에 견으로 성씨를 삼았다. 아버지는 아자개이니 농사로 자활하다가 후에 기가하여 장군이 되었다. 처음에 훤이 태어나서 아직 강보(포대기)에 싸여 있을 때 아버지가 들에 나가 밭을 갈고 어머니는 식사를 가져다 주려하여 어린애를 수림 아래에 두니 범이 와서 젖을 먹였으므로 마을에서 듣는 이들이 신이하게 생각하였다. 견훤이 장성하여서는 체모가 웅대기이하고 지기가 활달하고 비범하였다. 종군하여 서울에 들어왔다가 서남해의 방수에 부임하여 창을 베개로 삼고 적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용기가 항상 병사들에게 앞장섰으며 공로로 해서 비장(보좌관)이 되었다. 당소종 경복 원년은 신라 진성왕 재위 6년인데 아첨하는 소인(폐견)들이 왕의 곁에 있어 정권을 농간하니 기강은 문란하여 해이해지고 기근이 겹쳐 백성들이 유리하고 도적들이 벌떼같이 일어났다.

  이에 훤은 은근히 반심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울 서남쪽의 주현들을 진격하니 가는 곳마다 메아리쳐 호응하여 그 무리가 달포 사이에 5,000여 명에 달하였다. 드디어 무진주(주치는 지금 광주시)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지만 감히 공공연히 왕을 일컫지 않고 자서(자칭)하여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 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 식읍은 2,000호라고 하였다. 이 때 북원(원주)의 적 양길이 강성하자 궁예가 자진 투신하여 그 휘하가 되니 훤이 듣고 멀리 있는 양길에게 관직을 제수하여 비장으로 하였다. 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전주)에 이르니 주민들이 맞이하여 위로(환영)하였다. 훤이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여 좌우에게 이르기를 “내가 삼국의 기원을 상고해 보면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세(혁거세)가 발흥하였으므로 진한·변한이 따라 일어났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에서 개국하여 [역사의 착각] 600여년이 지났는데 총장 연간에 당고종이 신라의 청원을 받아들여 장군 소정방을 보내어 선병 13만 명으로써 바다를 건너게 하고 신라의 김유신도 황산을 거쳐 사비(부여읍)에 이르기까지 휩쓸어 당군과 합세하고 백제를 공멸하였다. 지금 내가 도읍을 완산(전주)에 정하고 어찌 감히 의자왕의 숙분을 씻지 아니하랴”하고 드디어 후백제왕이라 자칭하고 관부를 설치하여 직책을 나누니 이것이 당의 광화 3년이요, 신라 효공왕 4년(경신)이었다. 사신을 보내어 오월에 입조하니 오월왕이 보빙하면서 이어 훤에게 검교대보를 가하고 다른 것(직)은 전대로 하였다. 천복(당소종 연호) 원년 효공왕 5년(서기 901년)에 훤이 대야성(합천)을 쳤으나 항복받지 못하였다. 개평(후양 태조의 연호) 4년(효공왕 14년)에 훤은 금성(나주)이 궁예에게 항복(투항)한 것을 분히 여겨 보기병 3,000명으로써 공격하여 열흘이 지나도록 풀지 아니하였다. 건화(후량 태조 연호) 2년(신덕왕 원년)에는 훤이 궁예로 더불어 덕진포(지금 대덕군 회덕면)에서 싸웠다.

  정명(후량 태조 연호) 4년(신라 경명왕 2년, 서기 918)에 철원경의 민심이 급변하여 아태조(왕건)를 추대하여 즉위케 하였다. 훤이 듣고 8월에 일길찬 민극을 보내어 치하하면서 공작선과 지리산 죽선을 바쳤다. 또 사신을 보내어 오월에 들어가 말을 증여하니 오월왕이 보빙하고 중대부를 더 제수하며, 다른 것(직)은 전대로 하였다. 6년 정명에 훤이 보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 함락하고 군사를 진례성(지금 청도)으로 옮기니 신라왕이 아찬 김진을 보내어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므로 태조가 군사를 출동하니 훤이 듣고 인퇴하였다. 훤은 아태조와 겉으로 화친하는 체하고 속으로는 상극이었다.

  동광(후당 장종 연호) 2년(신라 경애왕 원년, 서기 924년) 7월에 아들 수미강을 보내어 대야·문소(지금의 의성) 두 성의 군사를 일으켜 조물성(안동과 상주 사이 ?)을 공격하였는데, 성중 사람들이 태조를 위하여 굳게 지키고 또 싸우니 수미강이 이를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8월에 사신을 보내어 준마를 태조에게 바쳤다. 3년[동광] 10월에 훤이 기병 3,000명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이르니 태조도 정병을 거느리고 대전하였다. 이 때 훤의 군사가 너무도 날래어 승부를 결하지 못하였다. 태조는 잠시 권도로 화친하니 그 군사들을 피로케 하고자 서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고 당제 왕신을 볼모로 삼으니 훤도 외생 진호로써 교질하였다.
  12월에 훤이 신라의 거창 등 20여 성을 공취하고 사신을 후당에 보내어 번신이라 일컬으니 당에서 검교대위겸시중판백제군사를 제수하고 전대로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 전주자사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백제왕 식읍 2,500호로 하였다. 4년[동광]에 진호가 갑자기 죽으니 훤이 듣고 고려에서 고의로 죽인 줄로 의심하여 곧 왕신을 옥중에 가두고 또 사람을 시켜 전녀에 보낸 준마를 돌려보내기를 청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돌려주었다.

  천성(후당 명종 연호) 2년 신라 경애왕 4년 서기 927년 9월에 훤이 근품성을 공취하여 불태우고 나아가 신라의 고울부(지금 영천)를 습격하고서 신라 서울 근처로 육박하니 신라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10월에 태조가 장차 출병하여 구원하려 하는 중에 훤이 갑자기 신라 서울(왕도)로 쳐들어갔다. 이 때 왕(경애)은 비빈과 함께 포석정에 놀이나가 주연을 베풀고 한창 즐기는 판이었다. 적이 쳐들어오자 왕은 낭패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부인과 함께 성남 이궁으로 돌아갔는데 여러 시종·신료 및 관녀·영관(주락관)들은 모두 난병에게 함몰되었다. 훤이 이 군사를 놓아 크게 약탈하고 사람을 시켜 왕을 잡아오게 하여 앞에서 죽이고 곧 궁중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왕의 부인을 강제로 끌어다 난행하며 왕의 족제 김부로써 왕위를 계승하게 한 후 왕제 효렴과 재상 영경을 포로로 하고 또 국고의 재화· 진보와 병장, 자녀와 백공 중의 기교자를 취하여 자신이 데리고 돌아갔다. 태조가 정기병 5,000명을 거느리고 훤을 공산(지금 달성군 팔공산)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크게 싸우니 태조의 장수 김락과 신숭겸은 죽고 여러 군사가 패하니 태조는 겨우 몸만 빠져 나가니 훤은 승세를 몰아 대목군(지금 약목)을 취하였다. 거란의 사자 사고·마돌 등을 반송하였는데 항해 북행하다가 풍랑을 만나 당의 등주(산동성 봉래현)에 이르러 모두 살육되었다.

  이 때 신라의 군신은 쇠세를 당하여 부흥키 어려우므로 우리 태조를 꾀어 결호하고 후원을 삼으니 견훤은 혼자서 나라(신라)를 도둑질할 마음을 가지고 태조가 혹시 먼저 갈까 두려워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왕도(신라 서울)에 들어가 행악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경순왕 원년 12월 모일에 글월을 태조에게 보내어 이렇게 말하였다. 전번에 신라 국상 김웅렴 등이 장차 족하를 서울로 불러들이게 하였으니 이는 마치 작은 자라(고려에 비유) 소리에 응하고 종달새(고려와 신라에 비유)가 새매(후백제에 비유)의 날개를 헤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반드시 생령을 도탄에 빠뜨리고 종사를 폐허(구허)로 만들 게 하는 것이오. 이러므로 내가 먼저 조편을 잡고 홀로 한월을 휘둘러 백료에게 백일을 가리키며 맹세하고 6부를 설유하되 의풍으로써 하였더니 뜻밖에 간신이 도망가고 국군이 훙변을 당하였으므로 마침내 경명왕의 표제(외종제)요, 헌강왕의 외손(김부)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도록 권고하여 위태로운 나라를 재건하고 임금을 잃었으나 뒤를 잇는 새 임금이 섰소. 그런데 족하는 충고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한갖 유언을 들어 백계로 신라의 왕위를 엿보고 다방으로 침노하였으나 오히려 나의 말머리를 보거나 나의 쇠털을 뽑지 못하였소. 겨울 초에 도두 색상(여장)이 성산진 아래에서 손이 묶였고 월내에 좌장 김락은 미리사(달성군) 앞에 해골을 드러냈으며, 그밖에 살획이 많고 추후 사로잡은 것도 적지 않으니 강약이 이와 같아 승패를 가히 알 수 있을 것이오, 나의 기약하는 바는 활을 평양문루에 걸고 나의 말에게 패강(대동강)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이오.

  그러나 전월 7일에 오월국사  반상서가 와서 왕의 조서를 전하기를 경이 고려와 더불어 오랫동안 화호를 통하고 서로 인맹을 맺었다는 것을 들었는데 근래 볼모 둘이 다 죽음으로 해서 드디어 화친의 구호를 잃고 서로 지경을 침략하여 전쟁을 그치지 아니하므로 지금 일부러 사신을 보내어 경의 본도(본토)로 가게 하고 또 고려에도 보내니 각기 서로 친목하여 길이 복을 누리게 하라” 하였다. 나는 존왕의 의를 두터이하고 사대의 정을 깊이 하였으므로 지금 오월의 조유를 듣고 그대로 따르려 하나 항상 족하가 전쟁을 파하려 하면서도 못하고 곤하면서도 오히려 싸우려고 함을 내가 염려하여 지금 그 조서를 등사하여 보내니 유의하여 상실하기 바란다. 또 토끼와 날랜 개가 서로 지칠대로 지치면 마침내 반드시 비웃음을 남길 것이요, 큰 조개와 황새가 서로 버티면 역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미복을 경계로 하여 후회를 스스로 끼침이 없게 하라.”

  천성 3년(경순왕 2년) 정월에 태조가 회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월국 통화사 반상서가 전한 조서 일통을 받들고 겸하여 족하가 보내준 장서의 사연을 받아 보았소. 화려한 수레를 타고 온 대사가 제서(오월의 서)를 가져오고 척소(편지) 호음(좋은 소식)과 겸하여 교회를 배승하였소. 화함(지검)을 받들어 비록 감격은 하였지만, 귀서를 펴보니 혐의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돌아가는 사절 편에 부탁을 하여 나의 심중을 피로하려고 하였소. 나는 위로 천명을 받들고 아래로 인민의 추대에 못이겨 외람되이 장수의 권한을 가지고 경륜의 기회를 얻었던 것이오. 전번에는 삼한의 액운으로 구토(구주)가 흉황하여 많은 인민이 황산적에 속하고 전야는 적토가 되지 아니한 데가 없었오. 여기서 혹시라도 풍진의 소요함을 그치게 하고 나라의 재앙을 구하려 하여 선린의 우호를 맺음으로부터는 과연 수천리가 농상을 즐겨 업으로 하여 7, 8년간이나 사졸들이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오. 그런데 유년 양월(10월)에 홀연히 사태가 발생하여 교전을 하게 되었오. 족하가 처음에는 적을 가벼이 여기어 마치 당랑이 수레바퀴를 막는 것같이 곧장 달려들다가 마침내 어려움을 알고 용퇴한 것은 모기가 산을 등에 진 것과 같았소. 공손히 사과하고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오늘부터는 영구히 화목하여 조금이라도 맹세를 어기면 신이 벌할 것이오, 나 역시 지과의 무를 숭상하고 불살의 인을 기하려 하여 마침내 중위를 풀고 피로한 사졸을 쉬게 하고, 볼모도 거절치 않고 다만 백성만을 편안케 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내가 남쪽 사람들에게 큰 은덕을 베푼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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