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사 료 > Ⅱ. 고려사실록 / 사료와 전설로 보는 견훤

2014. 5. 14. 21:09나의 이야기






       


제1편 사 료 > Ⅱ. 고려사실록  사료와 전설로 보는 견훤 / 문경문화원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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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후백제 연표사 료설 화유적과 지명문경지역의 유적문경지역의 지명그외지역 유적

  

 

 

  사료와 전설로 보는 견훤  

 

 

제1편 사  료 > Ⅱ. 고려사실록  

   1. 세가 제1
   2. 태조 무인 원년(918)
   3. 태조 갑신 7년(924)
   4. 태조 을유 8년(925)
   5. 태조 병술 9년(926)
   6. 태조 정해 10년(927)
   7. 태조 무자 11년(928)
   8. 태조 기축 12년(929)
   9. 태조 경인 13년(930)
   10. 태조 신묘 14년(931)
   11. 태조 임진 15년(932)
   12. 태조 계사 16년(933)
   13. 태조 갑오 17년(934)
   14. 태조 갑오 17년(934)
   15. 태조 병신 19년(936)
   16. 태조 정유 20년(937)
   17. 홍 유
   18. 유검필
   19. 박영규

 

Ⅱ. 고려사실록(高麗史實錄)

  1. 세가 제1 태조

  정헌대부 공조판서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신 정인지가 왕의 교서를 받들고 편수하였음.

   태조 1

  태조 응운, 원명, 광렬, 대정, 예덕, 장효, 위목, 신성 대왕의 성은 왕(王)씨요 이름은 건(建)이요 자는 약천이니 송악군 사람이다. 그는 세조의 맏아들이요 어머니는 위숙왕후 한씨이다. 당나라 건부 4년 정유(877) 정월 병술일에 송악 남쪽 저택에서 났다. 그때에 신기한 광채와 자줏빛 기운이 용과 같은 형상으로 되어 방을 비치고 뜰에 가득 차서 종일토록 서리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지혜가 있고 용의 얼굴에 이마의 뼈는 해와 같이 둥글며 턱은 모나고 낯은 넓적하였으며 기상이 탁월하고 음성이 웅장하였으며 세상을 건질 만한 도량이 있었다. 이때에 신라의 정치가 혼란하여 반란군이 각처에서 일어났다. 

  견훤은 반란을 일으키어 남쪽 땅에 웅거하고 나라 이름을 후백제라 하였으며 궁예는 고구려 옛 땅에 웅거하여 철원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태봉이라고 하였다. 세조(태조의 아버지 왕륭)는 그때에 송악군 사찬으로 있었는데 건녕(당나라 소종 연호) 3년 병진(896)에 자기 고을을 바치고 궁예의 부하로 되니 궁예가 크게 기뻐하여 그를 금성 태수로 삼았다. 세조가 궁예를 달래어 말하기를 대왕이 만일 조선, 숙신, 변한지역에서 왕노릇을 하려면 먼저 송악에 성을 쌓고 나의 맏아들을 그 성주로 삼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였다. 궁예가 그 말을 쫓아서 태조를 시켜 발어참성을 쌓게 하고 이어 그를 성주로 삼았으니 그때에 태조의 나이 20이었다.

  광화(중국 당나라 소종 연호) 원년 무오(898)에 궁예가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을 때에 태조가 와서 만나니 궁예가 정기대감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광화 3년 경신(900)에 궁예가 태조에게 명령하여 광주,충주,청주 등 3개 주와 당성(경기도 남양), 괴양(충청도 괴산) 등 군현을 정벌하게 하여 이를 다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하여 태조에게 아찬 벼슬을 주었다. 천복(중국 당나라 소종 연호) 3년 계해(903) 3월에 태조는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로부터 광주 지경에 이르러 금성군을 공격하여 이를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하여 태조에게 아찬 벼슬을 주었다. 천복(중국 당나라 소종 연호) 3년 계해(903) 3월에 태조는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로부터 광주 지경에 이르러 금성군을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키고, 10여 개의 군,현을 공격하여 이를 쟁취하였다. 이어 금성을 나주로 고치고 군사를 나누어 수비하게 한 후 개선하였다. 이 해에 양주(경남 양산) 장수 김인훈이 급히 구원을 청하여 오매 궁예가 태조에게 명령하여 그를 구원하게 하였다.

  태조가 돌아왔을 때에는 궁예는 변경 방비 사업에 대한 것을 물었다. 태조가 그때 변경을 안정시키고 국경을 개척할 방책에 대하여 진술하니 좌우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게 되었고 궁예도 역시 그를 기특하게 여겨 벼슬을 높이어 알찬으로 임명하였다. 천우(중국 당나라 애제의 연호) 2년 을축(905)에 궁예가 철원으로 환도하였다.

  동 3년 병인(906)에 궁예가 태조에게 명령하여 정기장군 금식 등과 함께 군사 3천을 거느리고 상주 사화진을 공격하게 하였던 바 태조는 여기서 견훤과 여러 번 싸워서 이겼다. 그때 궁예는 영토가 더욱 넓어지고 군대가 점점 강하여졌다 하여 신라를 병탄할 뜻을 품고 신라를 멸도라고 불렀으며 신라로부터 항복해 오는 자들을 다 죽이었다. 양나라 개평 3년 기사(909)에 태조는 궁예가 나날이 포학해지는 것을 보고 다시 지방 군무에 뜻을 두었었는데 마침 궁예가 나주 지방 방비 사업을 걱정하여 태조에게 나주로 가서 지킬 것을 명령하고 관등을 높여 한찬, 해군 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 태조는 성의껏 군사들을 무마하여 위엄과 은혜가 병행되니 사졸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용기를 내어 싸울 것을 생각하였고 적들은 그 기세에 위압되었다.

  태조는 수군을 거느리고 광주 염해현에 머물렀다가 오월국으로 들여보내는 견훤의 배를 노획하여 돌아오니 궁예가 매우 기뻐하여 특별히 표창을 하였다. 궁예는 또 태조에게 명령하여 정주(경기도 풍덕)에서 전함들을 수리한 후 알찬 종희·김언 등을 부장으로 하여 군사 2천5백을 거느리고 광주 진도군을 가서 치게 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다시 진격하여 고이도에 머무르니 성안 사람들이 이쪽 진용이 대단히 엄숙하고 씩씩한 것을 보고 싸우기도 전에 항복하였다. 다시 나주 포구에 이르렀을 때에는 견훤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전함들을 늘여 놓아 목포에서 덕진포에 이르기까지 머리와 꼬리를 서로 물고 수륙 종횡으로 군사 형세가 심히 성하였다.

  그것을 보고 우리 여러 장수들은 근심하는 빛이 있었다. 태조는 말하기를, “근심하지 말라.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군대의 의지가 통일되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지 그 수가 많고 적은 데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면서 곧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니 적선들이 조금 퇴각하였다. 이에 풍세를 타서 불을 놓으니 적들이 불에 타고 빠져죽는 자가 태반이었다. 여기서 적의 머리 5백여 급을 베었다. 견훤은 작을 배를 타고 도망하였다.

  처음에 나주 관내 여러 군들이 우리와 떨어져 있고 적병이 길을 막아 서로 응원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못 동요하고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견훤의 정예부대를 격파하니 군사들의 마음이 모두 안정되었다. 이리하여 삼한 전체 지역에서 궁예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태조는 다시 전함을 수리하고 군량을 준비하여 나주에 주둔하려고 하였다. 그때에 김언 등이 자기들의 공로는 많은데 상이 없다고 하여 해이하여졌다. 태조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부디 해이하지 말라! 오직 힘을 다하여 복무하고 마음을 먹지 말아야 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임금이 포학하여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며 아첨하는 자들이 득세하여 호상 음해를 일삼고 있다. 이리하여 중앙에 있는 자들은 자기 신변을 보전하지 못하는 형편이니 차라리 정벌에 종사하고 왕실을 위하여 진력함으로써 자기 몸을 보전하는 것이 더 낫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의 말을 그럴 듯이 여겼다. 태조는 드디어 광주 서남 지경 반남현 포구에 이르러 적의 경내에 첩보망을 늘여 놓았다. 그때에 압해현(나주 압해도) 반란군의 두령 능창이 섬에서 일어났는데 수전을 잘 하여 수달이라고 불리었다. 그는 망명한 자들을 끌어모으고 갈초도(전라도 영광지역)에 있는 소수의 반란군들과도 서로 연계를 맺어 태조가 오는 것을 기다려서 태조를 해치려고 하였다. 태조는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능창이 벌써 우리가 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반드시 섬의 도적들과 함께 사변을 일으킬 것이다. 도적의 무리는 비록 적으나 만일 세력을 규합하여 우리의 앞뒤를 막는다면 승부를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물에 익숙한 자 10여명으로 하여 금 갑옷을 입고 창을 들고 가벼운 배를 타고 밤에 갈초도 나룻가로 가서 음모하려고 왕래하는 자들을 사로잡아 그 계획을 좌절시키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러 장수들이 다 그 말을 쫓아서 과연 한 척의 작은 배를 잡으니 그것이 바로 능창이었다. 태조는 그를 잡아서 궁예에게 보냈더니 궁예가 크게 기뻐하고 능창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말하기를 “해적들이 다 너를 추대하여 두령으로 하였지만 지금은 나의 포로가 되었으니 어찌 나의 계책이 신기하지 않느냐.” 하고 곧 여러 사람들에게 선포한 다음 그를 죽이었다. 건화(중국 후량 태조의 연호) 3년 계유(913)에 궁예는 태조가 여러 번 변방에서 공적을 나타냈다 하여 관등을 많이 높여 파진찬으로 임명하고 시중을 겸하게 하여 소환하였다. 그리고 수군 사업은 전부 부장인 김언 등에게 맡겼으나 정벌에 관한 일들은 반드시 태조에게 품의하여 이를 실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태조의 지위가 백관의 우두머리로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 태조의 본의가 아니요 또 한편 참소를 두려워하여 그 지위에 있기를 즐겨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태조는 정부에 출입하고 국정을 논의할 때에는 언제나 오직 감정을 억누르고 조심하며 군중의 인심을 얻기에 힘쓰고 착한 이를 좋아하며 악한 자를 미워하였다. 또 누가 참소를 입는 것을 보면 반드시 그를 다 구출해 주었다. 그때에 청주사람 아지태라는 자가 있어 본래 아첨을 좋아하고 간사하였다. 그는 궁예가 아첨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같은 고을 사람인 입전,신방,관서 등을 참소하여 해당 관리가 이 사건을 심리하였는데 수년 동안이나 판결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태조는 당장에 그 흑백을 분간하여 판결을 내리니 여러 사람들이 그것을 유쾌하게 생각하였다. 이로부터 군문의 장교,종실,원훈들과 지혜있고 학식있는 무리들이 모두 태조에게로 쏠리어 그의 뒤를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태조는 화가 미치는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 외방 벼슬을 요구하였는데 건화 4년 갑술(914)에 궁예 역시 수군 장수의 지위가 낮아 적을 위압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태조의 시중 벼슬을 해임하고 다시 수군을 통솔하게 하였다.

  태조는 정주 포구로 가서 전함 70여 척을 수리하여 군사 2천명을 싣고 나주에 이르렀다. 백제 사람들과 해상의 좀도적들이 태조가 다시 온 것을 알고 다 두려워서 감히 준동하지 못하였다. 태조가 돌아와서 해상의 경제상 이익과 임기응변할 군사 방책들을 보고하니 궁예가 기뻐하여 좌우 신하들에게 “나의 여러 장수들 중에 누가 이 사람과 비길 만하겠는가?” 라고 하면서 칭찬하였다. 그때에 궁예는 반역이라는 죄명을 덮어씌워 하루에도 백여 명씩 죽이었다. 이리하여 장수나 정승으로서 해를 입는 자가 십상팔구에 이르렀다.

  궁예는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미륵 관심법을 체득하여 부녀들의 음행까지도 알아 낼 수 있다. 만일 나의 관심법에 걸리는 자가 있으면 곧 엄벌에 처하겠다.” 고 하였다. 그는 드디어 3척이나 되는 쇠방망이를 만들어 놓고 죽이고 싶은 자가 있으면 곧 그것을 달구어 여자의 음부를 찔러 연기가 입과 코로 나오게 하여 죽이었다. 이리하여 부녀들이 모두 벌벌 떨었으며 원망과 분한이 날로 심하여졌다. 하루는 궁예가 태조를 대궐 안으로 급히 불러들이었다. 그때에 궁예는 처형한 사람들로부터 몰수한 금은보물과 가재도구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는 성난 눈으로 한참이나 태조를 바라보고 있다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가 어젯밤에 사람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음모한 것은 웬일인가?” 태조는 얼굴빛을 조금도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궁예는 또 말하기를 “그대는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능히 관심을 하기 때문에 그것을 안다. 나는 지금 곧 입정을 하여 보고 나서 그 일을 이야기 하겠다.” 하고는 곧 눈을 감고 뒷짐을 지더니 한참이나 하늘을 향하여 고개를 젖히고 있었다. 

  그때에 장주(벼슬 이름) 최응이 옆에 있다가 짐짓 붓을 떨어뜨리고 뜰로 내려와 그것을 줍는 척하고 태조의 곁으로 달음질하여 지나가면서 귓속말로 “왕의 말대로 복종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고 하였다. 태조는 그제야 깨닫고 “사실은 제가 모반하였으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궁예는 껄껄 웃고 나서 “그대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라고 하면서 곧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굴레를 주었다. 궁예는 또 말하기를, “그대가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말라”고 하였다. 궁예는 드디어 보병 장군 강선힐,흑상,김재원 등을 태조의 부장으로 삼았다.

  태조는 전함 백여 척을 더 건조하였는데 그 중 큰 배 10여 척을 각각 사방이 16보요 그 위에 다락을 세웠고 거기서 말을 달릴 만하였다. 태조는 군사 3천여 명을 거느리고 군량을 싣고 나주로 갔다. 이 해에 남방에 기근이 들어 각지에 도적이 일어나고 위수 병졸들은 다 나물에 콩을 반쯤 섞어 먹으면서 겨우 지냈다. 태조는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구원하였는데 그 덕으로 다 살 수가 있었다. 처음 태조의 나이 30세 때에 꿈에 9층 금탑이 해 중에서 서 있는데 자기가 그 위에 올라가 보였다. 정명(후량 말제의 연호) 4년(918) 3월에는 중국 상인 왕창근이 저자 가운데서 갑자기 웬 사람을 만났다. 그는 얼굴이 이상하고 수염과 머리가 희며 옛날 관을 쓰고 거사가 입는 옷을 입었으며 왼손에는 도마 세 개를 들고 오른손에는 옛날 거울 한 개를 들었는데 거울은 사방이 1척 가량이었다.

  그 사람은 창근을 보고 자기 거울을 사겠느냐고 하였다. 창근은 쌀 두 말을 주고 그것을 샀다. 거울 주인은 그 쌀을 길가 거지들에게 다 나눠주고 가 버렸는데 그 빠르기가 선풍과도 같았다. 창근이 저자 담벽에 걸어 놓으니 일광이 옆으로 비쳐 그 속에 있는, 가늘게 쓴 글이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은은히 보이었다. 그 글에는 “삼수중과 사유(동서남북) 아래, 옥황상제가 ‘진마’에 아들을 내려보냈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칠 것인 바 이를 일러 운수가 일삼갑에 찼다고 하는 것이다.

  밤이면 하늘에 오르고 낮이면 세상을 다스려 자년이 되면 중흥 위업을 이룩하리. 종적과 성명을 감추거니 혼돈 속에서 누가 ‘신’과 ‘성’을 알리요. 부처남 뇌성이 진동하고 신령한 번개가 번쩍이며 사년에 두 용이 나타나서 그 하나는 ‘청목’ 속에 몸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 동쪽에 형적을 드러내리. 지혜로운 자는 이것을 보고 우매한 자는 보지 못하나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따르면서 사람들을 데리고 정벌을 한다. 때로는 성하고 때로는 쇠하기도 하나니 이렇게 하는 것은 악독한 잔재를 없애기 위함이다. 이 용의 아들 서넛이 여섯 갑자에 대를 바꾸어 가면서 계승하리. 이 사유(동서남북)에서 기필코 ‘축’을 멸하리니 바다 건너 오는 때는 ‘유’를 기다려라. 

  이 글을 만일 현명한 임금에게 보이면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고 임금은 길이 행복하리. 나의 기록은 전부가 1백47자이다.” 라고 적혀 있었다. 창근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줄 몰랐는데 나중에 그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궁예에게 바쳤다. 궁예는 창근으로 하여금 거울 판 사람을 찾게 하였으나 달이 차도록 찾지 못하였다. 오직 동주(철원) 발삽사의 치성광여래 불상 앞에 토성을 맡은 신의 옛날 소상이 있는데 그것이 거울 주인의 상과 같고 그 좌우 손에는 역시 도마와 거울을 들고 있었다. 창근이 기뻐하여 그 사실을 자세히 써서 올리니 궁예는 경탄하고 이상히 여겨 글을 잘 아는 송사홍,백탁,허원 등에게 그 글을 해석하게 하였다.

  사홍 등이 서로 말하기를 ‘삼수중과 사유 아래 옥황상제가 진마에 아들을 내려보냈다’는 것은 진한,마한이라는 뜻이요 ‘사년에 두 용이 나타나서 그 하나는 청목 속에 몸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 동쪽에 형적을 드러내리’ 라는 것은 ‘청목’은 소나무늬 송악군 사람으로서 ‘용’으로 이름을 삼은 사람의 자손이 임금이 되리라는 말이다. 왕시중(왕건)은 왕으로 될 기상이 있는데 아마 그를 두고 이른 말일 것이다. 흑금이라는 것은 철인데 그것은 지금 국도 철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 궁예왕이 처음 여기서 일어났는데 결국 여기서 멸망한다는 말일 것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칠 것’ 이라는 왕시중이 임금이 된 후 먼저 계림(신라)을 점령하고 다음에 압록강 강안까지 회복하리라는 뜻이다.” 라고 하였다. 세 사람은 서로 의논하기를 “왕은 시기가 많아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니 만일 이 글을 사실대로 고한다면 왕시중이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요 우리도 역시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하고 거짓말을 꾸며서 궁예에게 보고하였다. 그해 6월 을묘에 기병 장군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 등이 비밀히 짜고 밤중에 태조의 저택으로 가서 그를 왕으로 추대할 뜻을 함께 말하였다.

  태조는 굳이 거절하여 허락하지 않았으나 부인 유씨가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입히니 여러 장수들이 옹위하고 나오면서 사람을 놓아 말을 달리며 외치기를, “왕공이 벌써 의기를 들었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분주히 달려와서 함께 참가한 자들이 이루 헤일 수가 없었고 먼저 궁문으로 와서 북을 치고 떠들면서 기다리는 자도 만여 명이나 되었다. 궁예가 이 소문을 듣고 깜짝 놀래어 말하기를, “왕공이 벌써 승리를 얻었으니 내 일은 다 글렀다.” 하고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리하여 그는 변복을 하고 북문으로부터 도망쳐 나가니 궁녀들이 궁안을 깨끗이 하고 태조를 맞아들였다. 궁예는 산골로 도망하였으나 이틀 밤을 지난 후에는 배가 몹시 고파서 보리 이삭을 잘라 훔쳐 먹었다. 그 후 곧 부양(강원도 평강) 백성에게 살해되었다.

  #高麗史1卷-世家1-太祖1 : <내용생략>

 

  2. 태조 무인 원년(918)

  여름 6월 병진일에 포정전(布政殿)에서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로 고쳤다. 정사일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이전 임금(궁예)은 우리 나라 정세가 혼란할 때에 도적들을 평정하고 점차 영토를 개척하였으나, 전국을 통일하기도 전에 대번 혹독한 폭력으로 하부 사람을 대하며 간사한 것을 높은 도덕으로 생각하고 위압과 모멸로써 요긴한 술책을 삼았었다.

  부역이 번거롭고 과세가 과중하여 인구는 줄어들고 국토는 황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전은 굉장히 크게 지어 제도를 위반하고 이에 따르는 고역은 한이 없어서 드디어 백성들의 원망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형편에 함부로 연호를 만들고 왕으로 자칭하였으며 처자를 살육하는 등 천지에 용납할 수 없는 죄를 지어 죽은 사람에게나 살아 있는 사람에게 다 원한을 맺었으며 결국은 정권을 전복당하였으니 어찌 경계할 바가 아니랴. 내가 여러 신하들의 추대에 의하여 왕위에 올라 모든 풍속을 변혁하고 다함께 새롭게 나아가려 하노니 마땅히 새 규율을 세우고 이전 일을 심각한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임금과 신하는 고기와 물처럼 서로 화합할 것이며 이 나라 강산들도 편안하고 밝아지는 경사를 맞이할 것이니 내외의 모든 신하와 백성들은 마땅히 나의 뜻을 알지어다!” 

  여러 신하들이 절을 하면서 감사의 말을 올렸다. “저희들은 이전 임금이 선량한 사람들을 해치고 싸여 있던 그러한 세상에서 살아오다가 다행히 지금 생명을 유지하여 현명한 임금의 세상을 만났으니 감히 자기 힘을 다하여 국은에 보답하도록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무오일에 왕이 한찬 총일(聰逸)에게 다음과 같이 타일렀다. “이전 임금이 참소하는 말을 믿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였다. 그대의 고향인 청주는 토지가 비옥하고 호걸이 많아 이들이 사변을 일으킬까 두려워서 장차 청주 사람을 모조리 섬멸해 버릴 목적으로 군인 윤전, 애견 등 80여 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불렀던 것이다. 지금 그들이 포박된 채 오는 도중에 있으니 그대는 빨리 가서 이 사람들을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라!” 경신일에 마군 장군 환선길이 역모를 꾸미다가 잡혀 죽었다. 

  신유일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관제를 설정하고 직무를 분담시키는 데는 유능한 사람을 임명하는 길이 있는 것이요, 풍속을 시정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데는 현명한 사람을 선발하는 문제가 급한 것이다. 진실로 관리들이 자기 직무에 태만하지 않는다면 어찌 정치가 문란하여지겠는가, 내가 과람하게도 천명을 받아 거창한 사업을 실시하려고 하는 바 높은 자리에 앉아 안일해서는 안되며 용렬하고 허무한 정치가 무섭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오직 사람을 앎이 밝지 못하며 관리들을 살핌에 실수가 많음으로써 어진 사람이 등용되지 못하였다는 탄식을 일으키게 하며 인재를 얻는 도리에 크게 어그러질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자나깨나 간절한 생각은 오직 이것뿐이로다. 만일 내외 백관들이 다 자기 직무를 충실히 이행한다면 다만 현재 정치가 잘 될 뿐 아니라 족히 후대에까지 일일이 시험하되 모쪼록 인재를 잘 선택하여 다 각기 직무에 맞도록 하고 내외의 모든 사람들이 다 나의 뜻을 알게 하라!” 하고 드디어 한찬 김행도를 광평시중으로 임명하고 한찬 금강을 내봉령으로, 한찬 임명필을 순군부령으로, 파진찬 임희를 병부령으로, 소판, 진원을 창부령으로, 한찬 염장을 의형대령으로, 한찬 귀평을 도항사으로, 한찬 손형을 물장성령으로, 소판 진경을 내천부령으로, 파진찬 진정을 진각성령으로 각각 임명하였으니 이들은 다 성품이 단정하고 사무 처리가 공평 정당하며 모두가 왕조 창업 당시 처음부터 좌명(왕명을 돕는다는 뜻)의 공훈을 세운 사람들이었다.

  알찬 임적여를 광평시랑으로, 이전 수순군부령 능준과 창부경 권식을 다 내봉경으로, 알찬 김인과 영준을 다 병부경으로, 알찬 최문과 견술을 다 창부경으로, 일길찬 박인원과 김언규를 다 백서성경으로, 임상난을 도항사경으로, 요인휘와 향남을 다 물장경으로, 능혜와 희필을 다 내군경으로 각각 임명하였으니 이들은 다 사무에 능숙할 뿐 아니라 청렴하고 조심성이 있으며 공무에 태만하지 않고 일을 처리함에 민활하여 군중의 신임이 두터운 사람들이었다. 

  이전 광평낭중 강윤행을 내봉감으로, 이전 순군부랑중, 한찬 신일과 임식을 다 광평사로, 국현을 원외랑으로, 이전 광평사 예언을 내봉 이결로, 내봉사 곡긍회를 평찰로, 이전 내봉사 유길권을 순군 낭중으로 각각 임명하고 그 나머지 여러 사와 성들에도 각각 낭과 사로 정원을 채워 하나도 결원이 없도록 하였으니 대개 이것은 개국 초에 인재를 선발하여 서무를 분담하게 한 조치였다.

  임술일에 한찬 박질영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소판 종간은 어려서부터 중이 되어 간사한 일을 하기에 힘쓰고 내군 장군 적부는 어려서부터 남의 집 하인으로서 간사한 말로 아첨을 잘 함으로써 다 궁예에게 총애를 받았으며 참소하기를 좋아하여 선량한 사람들을 모해한 것이 많기 때문에 이들을 처형하였다.  계해일에 은사 박유가 왕을 뵈러 왔다. 그에게 관과 허리띠를 주었다. 을축일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마땅히 절약에 힘써야 할 것이다. 백성이 부유하고 창고가 충실하면 비록 수재, 한재, 기근이 있더라도 근심이 없을 것이다. 모든 국고와 동궁 식읍에 저축한 곡식들이 해가 오래 되면 반드시 썩어서 손실이 많을 것이니 내봉랑중 능범을 심곡사로 임명하여 이를 조사케 하라!” 내봉 원외랑 윤행을 내봉랑중으로, 내봉사 이긍희를 내봉 원외랑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무진일에 백서성 공목(벼슬이름), 직성을 백서랑중으로, 순군낭중 민강을 내군장군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이날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내가 듣건대 기회를 타서 제도를 개혁함에는 옳고 그른 것을 상세히 하여야 하며 풍속을 지도하고 백성을 훈계함에는 호령을 반드시 삼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전 임금(궁예)이 신라의 품계, 관직, 군현 명칭들은 다 비속하다 하여 새 제도들을 만들었었는데 여러 해를 통용하였으나 백성들이 잘 알지 못하였고 혼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제 이런 것들만은 새 제도를 좇아도 될 것이다.” 기사일에 마군 대장군 이흔암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저자에서 처단되었다.

  가을 7월 임신일에 광평랑 능식을 순군낭중으로 임명하였다. 계사일에 광평 시랑 순필이 병으로 해임되고 병부경 얼평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병신일에 청주 영군장군 견금이와 뵈었다. 이전 병부경 직예를 태평시랑으로 임명하였다. 8월 기유일에 여러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타일렀다. “각 지방의 도적들이 내가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혹 변방에서 화변을 일으킬 것이 염려되니 전권 사절들을 파견하여 선물을 많이 주고 말을 겸손하게 하여 조정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이렇게 실행하였더니 귀순하는 자가 과연 많았다.

  그러나 오직 견훤만은 서로 내왕하려고 하지 않았다. 경술일에 북방 골암성 성주 윤선이 귀순하였다. 신해일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이전 임금(궁예)이 백성을 보기를 초개와 같이 하면서 오직 자기의 욕심만 채우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허무한 도참설(예언)을 믿어 갑자기 송악 도읍을 버리고 철원으로 돌아가 궁전들을 지으니 백성들은 토목 공사에 시달리고 농사철을 빼앗겼었다. 게다가 또 기근이 거듭 들고 역질이 계속 유행하여 가정을 버리고 길에서 굶어 죽는 자가 허다하였다.

  곡식 값이 폭등하여 세포(가는 마포) 한 필 값이 겨우 쌀 5승밖에 못되어 백성들은 자기 몸과 처자를 팔아 남의 노비로 되는 자가 많았다. 나는 이를 심히 불쌍히 여기노니 이들을 다 그 현재 있는 곳에서 등록하여 나에게 보고하라!” 이에 이렇게 노비로 된 사람들 1천여 명을 조사하여 국고하여 국고에 있는 포백으로 그들의 몸값을 물어 주어 본가로 돌려 보냈다. 

  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신하로서 제왕의 창업을 도와 특출한 책략으로 세상에 드문, 높은 공훈을 세운 자에 대하여 봉토(영지)를 나누고 높은 품계와 벼슬을 주어 그를 표창하는 것은 백대의 떳떳한 법이요, 천고의 훌륭한 규례이다. 내가 미천한 출신으로서 재주와 식견이 용령하나 실로 여러 훌륭한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이 중대한 지위에 서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포학한 임금(궁예)을 폐위할 때에 충신의 절개를 다한 자들에 대하여 마땅히 상을 주어 그 공훈을 표창하여야 할 것이다.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을 제1등으로 하여 금은 그릇과 비단 침구와 능라, 포백 등을 차등 있게 주라. 견권 능식, 권신, 염상, 김락, 연주, 마난 등은 제 2등으로 하여 금은 그릇과 비단 침구와 능, 백 등을 차등 있게 주라. 그리고 제3등 2천여 명에게는 각각 용, 백, 곡식들을 차등 있게 주라! 내가 그대들과 함께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끝까지 신하의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이것을 도리어 공로로 여기게 되니 어찌 부끄러운 생각이 없으랴. 그러나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지 않으면 장래 사람들을 고무할 도리가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 이러한 상을 주는 것이니 그대들은 나의 뜻을 잘 알지어다.” 견훤이 일길찬 민합을 보내 왕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광평시랑 한신일 등에게 명령하여 감미현(경기도 안성 지방)에 가서 그를 맞게 하고 민합이 온후에는 환대를 하여 보내었다.

  갑인일에 병부경 훤식을 내봉경으로 임명하였다. 계해일에 웅주(충청도 공주), 운주(충청도 홍주) 등 10여 주현이 모반하여 백제로 가 붙었다. 이전 시중 김행도를 동남도 초토사, 지아주 제군사로 임명하였다. 병인일에 창부랑중 유문율을 광평낭중으로 임명하였다. 9월 을유일에 순군리 이춘길 등이 모반하다가 잡혀 죽었다.

  경인일에 순군낭중 현율을 병부낭중으로 임명하였다. 계사일에 이전 시중 구진을 나주도 대행대 시중으로 임명하니 진이 이전 임금(궁예) 때에 오랫동안 지방에서 수고를 하였다는 핑계로써 잘 가려고 하지 않았다. 왕이 불쾌히 여겨 유권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전에 나도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지마는 한번도 수고했다는 핑계를 하지 못한 것은 실로 임금의 위엄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진이 굳이 사양하여 가려고 하지 않으니 그것을 옳다고 하겠는가.” 권열이 대답하기를 “상으로써 착한 자를 고무하고 벌로써 악한 자를 징계하는 것이니 마땅히 엄격한 형벌을 실시하여 다른 사람들을 징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겼더니 진이 두려워서 사죄를 하고 드디어 나주도로 갔다.

  갑오일에 상주 반란군의 두령 아자개가 사절을 시켜 귀순하여 왔으므로 왕이 의례를 갖추어 그 사절을 맞이하도록 명령하였다. 구정에서 의례를 연습하기 위하여 문무관들이 다 나와서 늘어섰는데 광평낭중 유문율과 직성관 주선길이 여기서 서는 자리 순서를 다투었다. 왕이 이들을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사양은 예의의 으뜸이요, 공경은 바로 덕행의 근본이다. 지금 손님을 예의로써 영접하는 것은 장차 훗일의 성과를 보려는 것인데 유문율과 주선길이 서는 자리 순서를 다투었으니 어찌 공경하며 근심하는 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다 변방으로 귀양 보내 그 죄상을 폭로하여야 할 것이다.” 유문율을 대신하여 순군낭중 경훈을 광평낭중으로 임명하였다.

  병신일에 여러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타일렀다. “평양 옛도읍이 황폐된 지는 비록 오래나 고적은 아직 남아 있다. 그런데 가시넝쿨이 무성하여 번인(여진인)들이 거기서 수렵을 하고 있으며 또 수렵을 계기로 변방 고을들을 침략하여 피해가 크다. 마땅히 백성들을 옮겨 거기서 살게 함으로써 국가의 변방을 공고히 하여 백세의 이익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평양을 대도호부로 하고 당제(사촌 동생) 식렴과 광평시랑 열평을 보내 평양을 수비하게 하였다.

  정유일에 진각성경 유척량이 혁명(왕조 교체) 당시에 여러 동료들은 당황하여 뿔뿔이 도망하였으나 그는 홀로 본 성을 떠나지 않았고 맡은 바 창고는 조그만 손실도 없었다 하여 특별히 광평시랑 벼슬을 주었다. 겨울 10월 경신일에 수 의형대경 능률을 광평시랑으로, 광평시랑 직예를 내시 서기로 각각 임명하였다. 신유일에 청주 두령 파진찬 진선이 그 아우 선장과 함께 반란을 도모하다가 잡혀 죽었다. 11월에 왕이 처음으로 팔관회를 열고 의봉루에 나가서 이를 관람하였다. 이때부터 해마다 경상적으로 이 행사를 실시하였다.

  # 고려사 1권 - 세가1 - 태조1 - 01 - 01- 0918 : 생략

 

  3. 태조 갑신 7년(924)

  가을 7월에 견훤이 아들 수미강, 양검 등을 보내 고려의 조물군을 공격하므로 왕이 장군 애선, 왕충 등에게 명령하여 이를 구원하게 하였다. 애선은 전사하였으나 고을 사람들이 굳이 지키니 수미강 등이 손해를 입고 돌아갔다. 8월에 견훤이 사절을 파견하여 절영도의 옥색말 한 필을 헌납하였다. 9월에 신라 왕 승영(경명왕)이 죽고 그 아우 위응(경애왕)이 왕위에 올랐다. 신라에서 국상을 알려왔으므로 왕이 애도하는 의례를 거행하고 재를 베풀어 명복을 빌었으며 사절을 파견하여 그를 조문하였다. 이해에 외제석원, 구요당, 신중원 등 사원을 창건하였다.

 

  4. 태조 을유 8년(925)

  봄 3월에 왕이 서경에 갔다. 가을 9월 병신일에 발해의 장군 신덕 등 5백 명이 귀순하여 왔다. 경자일에 발해의 예부경 대화균, 균료사정 대원균, 공부경 대복모, 좌우위 장군 대심리 등이 백성 1백 호와 함께 귀순하여 왔다. 발해는 원래 속말말갈족이었다. 당나라 무후 때에 고구려 사람 대조영이 요동지방을 점유하였던 바 그 후 당나라 예종이 그를 발해군왕으로 책봉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하여 대조영은 자기 나라를 발해국으로 자칭하고 부여, 숙신 등 10여 국을 병합하게 되었다. 발해국에는 문자, 예악, 관청 등 제도가 있었으며 5경 15부 62주에 영토의 넓이는 5천여 이 평방이요 군사가 수십만이나 되었다. 우리나라 국경과 인접해 있으며 거란과는 대대로 원수를 맺고 있었다.

  이때에 와서 거란 임금이 그 신하들에게 “대대의 원수를 갚지 않고서 어찌 편안히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군사를 크게 일으켜 발해국의 대인선을 공격하여 그 수도 홀한성을 포위하니 국왕 대인선이 패배를 당하여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거란은 결국 발해를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발해국 사람으러서 우리 나라에 귀순하는 사람이 계속 부절하였다. 갑인일에 매조성 장군 능현이 사절을 파견하여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겨울 10월 기사일에 신라 고을부(경북 영천) 장군 능문이 군사들을 데리고 와서 투항하였다. 그 성이 신라 수도에 가까우므로 신라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그들을 위로하여 돌려보내고 다만 그 부하들인 시랑 배근과 대감 명재, 상술, 궁식 등만을 남겨 두었다. 정서 대장군 유금필을 파견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을해일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조물군에서 견훤과 교전하였는데 유금필이 자기 군사를 끌고 와서 응원하였다. 견훤이 겁이 나서 화친하기를 청하고 사위 진호를 인질로 보내왔으므로 왕도 자기의 사촌 동생인 원윤 왕신을 인질로 보냈다.

  왕은 견훤의 나이가 자기보다 10년 맏이라 하여 상부라고 불렀다. 신라왕이 이 소식을 듣고 사절을 파견하여 말하기를 견훤은 “이랬다 저랬다 협잡이 많아 화친할 사람이 못된다”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그럴 듯이 여겼다. 11월 기축일에 탐라가 토산물을 공납하여 왔다. 12월 무자일에 발해 좌수위 소장 모두간과 검교 개국남 박어 등이 백성 1천 호와 함께 귀순하였다.

 

  5. 태조 병술 9년(926)

  여름 4월 경진일에 견훤이 보낸 인질 진호가 병으로 죽었다. 왕이 시랑 익훤을 시켜 그 시체를 보내 주었더니 견훤은 우리가 그를 죽인 것으로 생각하여 우리가 보낸 인질 왕신을 죽이고 웅진 방면으로 진격하여 왔다. 왕은 여러 성들에 명령하여 성을 고수하고 나와 싸우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에 신라 왕이 사절을 파견하여 말하기를, “견훤이 맹약을 위반하고 고려에 출병하였으니 하늘이 반드시 그를 돕지 않을 것이다. 만일 대왕이 그를 한 번 반격하면 훤은 반드시 스스로 패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사절에게 말하기를 “내가 견훤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죄악이 가득 차서 스스로 넘어질 것을 기다릴 뿐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견훤은 절영도의 명마(좋은 말)가 고려로 가면 백제가 멸망한다”고 하는 도참(예언)을 들었었는데 이때에 와서 전일 고려에 말을 선사한 것이 후회되어 사람을 시켜 그 말을 돌려보내 줄 것을 청하였다. 왕이 웃으면서 그것을 허락하였다. 겨울 12월 계미일에 왕이 서경으로 가서 친히 재제(齋祭)를 치르고 각 주군과 진(鎭)들을 순행하였다. 이해에 장빈을 당나라에 사절로 파견하였다.

 

  6. 태조 정해 10년(927)

  봄 정월 을묘일에 왕이 친히 백제 용주(경북 용궁)를 쳐서 항복을 받았다. 이때에 견훤이 맹약을 위반하고 누차 출병하여 우리 변강을 침범하였으나 왕은 오랫동안 참아 왔다. 그러나 훤의 죄악이 점점 더하여 자못 우리를 병탄하려는 의도가 있으므로 왕이 이를 쳤던 것이다. 신라 왕이 출병하여 우리를 방조하였다.

  을축일에 견훤이 왕신의 시체를 보내왔으므로 신의 아우 육(育)을 시켜 그 시체를 접수하게 하였다. 3월 갑인일에 발해 공부경 오흥 등 50명과 승려 재웅 등 60명이 귀순하였다. 신유일에 왕이 운주(충남 홍천)로 쳐들어가 성주 긍준을 성 밑에서 격파하였다. 갑자일에 근품성(경북 상주지방)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여름 4월 임술일에 해군 장군 영창, 능식 등을 시켜 수군을 거느리고 가서 강주(진주)를 공격하게 하였다. 원정군은 전이산(경남 남해), 노포평, 서산, 돌산(전남 순천) 등 4개 향을 함락시키고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왔다.

  을축일에 왕이 웅주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가을 7월 무오일에 원보 재충, 김락 등을 보내 대량성(경남 합천)을 격파하고 장군 추허조 등 30여 명을 포로로 하였다. 8월 병술일에 왕이 강주를 순행하였다. 고사갈이성(경북 문경) 성주 흥달은 왕이 자기 성을 지나는 기회를 타서 귀순하여 왔다. 이에 백제 여러 성 성주들이 전부 투항하였다. 9월에 견훤이 근품성을 공격하여 소각하고 나아가 신라 고울부를 습격하였으며 신라 서울 가까이까지 육박하였다. 신라 왕이 연식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왕이 시중 공훤, 대상 손행, 정조 연주 등에게 말하기를 신라가 우리와 친선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 지금 신라가 위급한 지경에 처하였으니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공훤 등에게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이들이 채 도착하기 전에 견훤이 신라 서울로 불의에 쳐들어갔다. 그때에 신라 왕은 왕비, 궁녀, 종실들과 함께 포석정에 나가 연회를 차려 즐겁게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적병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창졸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은 부인과 함께 달아나서 성 남쪽 별궁에 숨어 있었다. 시종 한 신하들과 악공(악사)들과 궁녀들은 다 붙들였다.

  견훤은 군사들을 놓아서 약탈을 마음대로 하게 하고 자신은 왕궁에 들어앉아서 측근자들로 하여금 왕을 찾아서 군사들 가운데서 협박하여 자살하게 하였으며 자기는 왕비를 강간하고 그 부하들을 시켜서 궁녀들을 간음하게 하였다. 그리고 신라 왕의 외종제 김부를 왕으로 세우고 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 등을 포로로 잡아 자녀들과 각종 장인들과 병기, 보배들을 모조리 약취하여 가지고 돌아갔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사절을 시켜 조문과 제사를 차리게 하고 친히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공산 동수(대구지방)에서 훤을 맞아 큰 싸움을 진행하였는데 형세가 불리하게 되었다. 훤의 군사가 왕을 포위하여 사태가 매우 위급하였다. 고려 대장 신숭겸과 김락이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희생되고 각 부대들은 패배를 당하였으며 왕은 겨우 몸만 피하였다. 견훤은 승리한 기세를 타서 대목군(경북 안동지방)을 탈취하고 전야에 쌓인 곡식들을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

  겨울 10월에 견훤이 장수를 파견하여 우리 벽진군(성주)을 침략하고 대목,소목(인동지방) 두 군의 곡식을 베어 갔다. 11월에 견훤이 벽진군의 벼 곡식을 불살랐으며 고려의 정조 색상이 여기서 전사하였다. 12월에 견훤이 왕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었다. “지난날 신라 국왕 김웅렴 등이 당신을 신라 서울로 불러들이려고 하였는 바 이것은 마치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응하며, 종달새가 새매의 날개를 부축하려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국토를 폐허로 만드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선수를 써서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를 정벌하였다. 그때에 나는 백관들에게는 해를 가리켜 맹세하고 6부(신라)에는 정의로운 풍습을 지키도록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뜻밖에 간신들이 도망을 치고 신라 임금은 자결하는 사변이 일어났다. 나는 드디어 경명왕의 외종제요 헌강왕의 외손인 사람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도록 권하여 위태로운 나라를 다시 붙들어 주었으니 없어졌던 임금을 다시 들여 세운 공로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나의 충고를 듣지 않고 다만 유언비어에 귀를 기울이어 백방으로 우리를 엿보고 침략하였다. 그러나 당신의 군대는 나의 말 대가리를 보가나 소 털을 뽑기도 전에 초겨울에는 벌써 고려의 도두(都頭) 색상이 성산진 아래서 속수무책으로 패배하였고 같은 달에 좌상 김락이 미리사 앞에서 해골을 버리었다. 우리가 죽이고 노획한 것도 많았으며 추격하여 사로잡은 것도 적지 않았다. 강약의 역량은 이와 같으며 승패의 형편은 알 만한 일이다. 기도하는 바는 나의 활을 평양의 다락 위에 걸며 나의 말에 패강(대동강)의 물을 먹이는데 있다.

  그런데 전달 7일에 오월국 왕의 사절 반 상서가 우리 나라에 와서 왕의 조서를 전하고 갔는데 그 사연은 이러하였다. ‘백제 왕 당신과 고려는 오래 전부터 친선관계를 가져 함께 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근자에 양쪽 인질이 다 죽은 것을 계기로 하여 드디어 친선의 옛호의를 잃어 버리고 서로 강토를 침범하여 전쟁을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이제 일부러 당신의 나라에 나의 사신을 파견하고 또 고려에도 편지를 보내노니 두 나라는 마땅히 서로 친선하고 영구히 평화를 보전하라.’ 나는 원래 신라를 존중히 여기는 의리에 충실하고 큰 나라에 대한 정의가 깊은 터이므로 오월국 왕의 조서를 듣고 즉시 그 뜻을 받들고자 한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당신이 종래의 미련에 끌리어 싸움을 그만두려고 하여도 그만두지 못하고 곤경에 빠져서도 그냥 싸우려는 것이다. 지금 조서를 복사하여 보내노니 청컨대 유의하여 자세히 읽으라. 또한 구멍에 든 토끼와 사냥개가 다투다가 서로 피곤하여지면 마침내 반드시 남의 조롱을 받는 것이요 조개와 황새가 서로 버티는 것은 역시 웃음거리로 되는 것이니 마땅히 미욱한 고집을 경계할 것이요, 스스로 후회를 남기지 말도록 하라.” 이해에 임언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7. 태조 무자 11년(928)

  봄 정월 임신일에 명주 장군 순식이 조현하러 왔다. 을해일에 원윤 김상, 정조 직량 등이 강주를 구원하러 가는 길에 초팔성(경남 초계)을 통과하다가 그 성주 흥종에게서 공격을 받아 패배하고 김상은 전사하였다. 이달에 왕이 견훤에게 답장을 보냈는데 그 사연은 아래와 같다. “오월국 통화사 반상서가 전한 조서 한 통을 받고 겸하여 당신이 보낸 장문 편지를 받았다. 그런데 오월국의 조서와 당신의 편지에 대하여 말한다면 전자는 비록 감격을 느꼈으나 후자는 혐의쩍은 생각을 금할 수 없기에 지금 사신의 돌아가는 편에 이 글을 부쳐 제때에 옳고 그름을 밝히노라.

  나는 위로는 하늘의 명령을 받들고 밑으로는 여러 사람들의 추대에 못이겨 외람하게도 두령의 권한을 가지고 정치 무대에 나서게 되었다. 근년에 삼한이 액운을 만나고 전국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대부분이 폭동에 가담하였고 전야는 적토로 아니된 곳이 없었다. 나는 이 전란을 평정하고 국가의 재변을 구원하려고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이웃 나라들과 선린 정책으로 우호관계를 맺은 때로부터는 과연 수천리 국토에 백성들이 농업에 힘을 쓰고 7~8년간에 군사들은 편안한 휴식을 누리었는데 을유년 10월에 와서 갑자기 사단이 일어나 전쟁에까지 이르렀다. 

  처음에 당신이 상대방을 경시하고 돌진하였으니 이것은 마치 미얀마재비가 수레바퀴를 막아서는 것과 같았으며 마침내 적수가 만만치 않음을 알고 용맹이 풀렸으니 그것은 원래 모기가 산을 지려는 격이었다. 그리하여 손길을 맞잡아 사과를 하고 하늘을 두고 맹세하기를 ‘오늘부터 영구히 친선할 것이며 만일 맹세를 저버리는 날에는 신이 나를 죽이리라고 하였었다. 그때에 나도 역시 휴전하자는 것을 찬성하고 사람을 죽이지 않기 위하여 드디어 여러 겹으로 둘러쌌던 포위를 풀어 피곤한 사졸들을 휴식하게 하였으며 인질을 교환하자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다만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는 일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상의 모든 조치로 보아 내가 남쪽 사람들에게 큰 은덕을 베푼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런데 뜻밖에 맹세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흉포한 행위가 다시 시작되어 벌과 독사 같은 해독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이리와 승냥이 같은 행패가 경기를 소란케 하였다. 금성 서울은 곤경에 빠지고 신라대왕은 크게 놀래었다. 이때에 정의에 입각하여 신라왕실을 높이는 일에 과연 누가 제환, 진문의 패업을 이루었는가? 기회를 타서 나라를 뒤엎으려는 당신의 간계는 왕망, 동탁의 행동을 본받아 지극히 높은 신라 왕으로 하여금 억울하게도 당신에게 아들이라고 청하게까지 하였으니 높고 낮은 것은 차례를  잃었고 위와 아래의 모든 사람들은 다 근심에 싸였었다. 그때에 나는 생각하였다. 충성한 원로가 없으면 어찌 국가를 다시 편안케 할 수 있으랴. 나의 마음은 미운 것을 참고 용서하여 두지 않으며 뜻이 존왕 대의에 간절하기 때문에 장차 조정을 구원하고 국가의 위기를 붙들려고 하였다.

  그런데 당신은 털끝만한 작은 이해에 눈이 어두워 천지와 같은 두터운 은혜를 잊어 버렸다. 군왕을 죽이고 궁궐을 불태웠으며 재상과 관리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백성들을 무찔러 없앴다. 궁녀들은 약취하여 수레에 태워 갔으며 진귀한 보물들을 약탈하여 짐짝으로 실어갔다. 당신의 죄악은 걸, 주보다 더하며 잔인하기란 맹수보다 심하다.

  나의 지극한 원한은 신라 왕실이 무너진 데 맺혔고 깊은 성의는 백성의 원수를 물리치는데 간절하였다. 그래서 역적을 처단하는데 힘을 다함으로써 미미한 충성을 표시하기로 결심하고 다시 무기를 든 후 두 번이나 해가 바뀌었다. 육전에서는 우레와 같이 달리고 번개와 같이 쳤으며 수전에서는 범과 같이 때리고 용과 같이 뛰었다. 움직일 때마다 반드시 성공하였으며 일을 시작해서 허탕을 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윤빈을 해안 전장에서 쫓으니 쌓인 갑옷이 산더미와 같았고 추조(鄒祖)를 변방성에서 사로잡으니 넘어진 송장은 들을 덮었다. 연산군(燕山郡-충북도) 지경에서는 길환을 군중에서 목베었으며 마리성(馬利城-경남 안음) 부근에서는 수오를 대장기 밑에서 죽였다. 임존성(충남 대흥)을 함락시키던 날에는 형적 등 수백 명의 몸뚱이가 없어졌고 청주성(충북 청주)을 격파하던 날에는 직심 등 4~5명이 머리를 내놓았다.

  동수의 군사는 우리의 군기를 바라보기만 하고도 도망하였으며 경산(경북 성주)의 군사는 보배를 가지고 와서 투항하였다. 강주는 남쪽으로부터 귀순하였고 나주는 서쪽으로부터 귀속되었다. 전쟁의 형편이 이와 같으니 국토를 회복할 날이 그리 멀겠는가. 나의 기도하는 바는 지수의 군영에서 장이의 천고 원한을 씻고 오강의 역정 위에서 한왕이 최후의 일전을 성공한 것처럼 마침내 풍랑을 종식시키고 영구히 전국을 맑게 하는데 있다. 하늘이 나를 돕는 터에 천명이 장차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알 만한 일이로다. 하물며, 오월 왕 전하의 큰 덕은 외국에까지 미치고 작은 나라를 동정하는 마음으로 특별한 서한을 보내 동방에서 전쟁을 중지하라고 권고하였다. 기왕 권고를 받았으니 어찌 이를 접수하지 않으리요. 만일 당신이 공손히 이 권고를 받들어 흉악한 틀을 다 집어치운다면 그것은 다만 오월국의 선의를 보답하는 것으로 될 뿐 아니라 또한 신라의 끊어진 전통을 다시 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난 만일 죄과를 범하고도 능히 고치지 못한다면 그때에는 후회하여도 수습하지 못할 것이다.”

  3월 무신일에 발해 사람 김신 등 60호가 귀순하여 왔다. 여름 4월 경자일에 왕이 탕정군(충남 온양)에 갔다. 5월 경신일에 강주 원보, 진경 등이 고자군에 양곡을 운반하러 간 사이에 견훤이 가만히 군사를 보내 강주를 습격하였다. 진경 등이 돌아와서 싸웠으나 패배하여 죽은 자가 3백여 명이나 되고 장군 유문은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6월 갑술일에 벽진군에 지진이 있었다. 계사일에 이찬 진경이 죽었다. 그에게 대광 벼슬을 추증하였다. 가을 7월 신해일에 발해 사람 대유범이 백성들을 데리고 귀순하여 왔다. 병진일에 왕이 친히 삼년산성(충북 보은)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드디어 청주로 갔다.

  8월에 왕이 충주로 갔다. 그때에 견훤이 장군 관흔을 시켜 양산에 성을 쌓았기 때문에 왕은 명지성(경기도 포천) 원보 왕충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쳐서 패주케 하였다. 관흔은 퇴각하여 대량성을 확보하고 군사를 나누어 주둔하니 죽령 길이 막히었다. 왕이 왕충 등에게 명령하여 조물성에 가서 형세를 정찰하게 하였다. 신라의 중 홍경이 당나라 민부로부터 대장경 1부를 배에 싣고 예성강으로 들어왔으므로 왕이 친히 그를 영접하였고 대장경은 제석원에 보관하였다. 9월 정축일에 대상 권신이 죽었다. 그는 일찍이 황산군을 격파한 공로로 중아찬의 품계를 받았었다.

  정유일에 발해 사람 은계종 등이 귀화하여 천덕전에서 왕을 뵈었다. 그는 왕에게 세 번 절하였는 바 사람들이 그것을 실례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상 함흥은 말하기를 패망한 나라 사람은 세 번 절하는 것이 예의하고 하였다. 겨울 11월에 견훤이 정병을 선발하여 오어곡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거기 주둔하였던 우리 병졸 1천 명을 죽였다. 장군 양지,명식 등 6명이 탈출하여 적에게 항복하였다. 왕이 명령하여 군사들을 구정에 모아 놓고 6명의 처자들을 그 앞에서 조리를 돌리고 저자에서 사형을 처하였다. 이해에 왕이 북쪽 변방을 순행하였다.

 

  8. 태조 기축 12년(929)

  여름 4월 을사일에 왕이 서경으로 가서 각 주 진들을 순행하였다. 6월 임인일에 원보 장필을 대상으로 임명하였다. 계축일에 천축국 삼장법사 마후라가 왔으므로 왕이 의례를 갖추어 그를 맞이하였다. 마후라는 이듬해에 구산사에서 죽었다. 경신일에 발해 사람 홍견 등이 배 20척에 사람과 재물을 싣고 귀순하여 왔다. 가을 7월 기묘일에 왕이 기주(경북 풍기)로 가서 각 주 진들을 순행하였다. 신사일에 견훤이 군사 5천으로 의성부를 침범하였다. 성주 장군 홍술이 여기서 전사하였다.

  왕이 매우 슬피 울고 말하기를 내가 좌우 손을 잃어 버렸다고 하였다. 견훤이 또 순주(경북 순흥)를 침범하니 장군 원봉이 도망쳤다. 9월 을해일에 왕이 강주(경북 영주)로 갔다. 병자일에 발해 사람 정근 등 3백여 명이 귀순하여 왔다. 겨울 10월 병신일에 백제 일길간 염흔이 귀순하여 왔다. 견훤이 가은현(경북 문경)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12월에 견훤이 고창군(경북 안동)을 포위하므로 왕이 친히 가서 구원하였다.

 

  9. 태조 경인 13년(930)

  봄 정월 정묘일에 재암성(경북 진보) 장군 선필이 귀순하여 왔다. 병술일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고창군 병산에 주둔하였으며 견훤은 석산에 주둔하니 양군의 거리가 5백 보쯤 되었었다. 드디어 접전하여 저물 때까지 계속하였는데 견훤이 패배하여 달아났다. 백제 시랑 김악이 포로가 되고 전사자가 8천여 명에 달하였다. 이날에 고창군에서 아뢰기를 견훤이 장수를 보내 순주를 공격 함락하고 민가들을 약탈하여 갔다고 하였다.

  왕이 곧 순주로 가서 그 성을 수리하고 장군 원봉에게 책벌을 주었다. 경인일에 고창군 성주 김선평을 대광으로 임명하고 권행, 장길을 대상으로 임명하였다. 이때에 영안(경북 안동지방), 하곡(경남 울산), 직명, 송생(경북 청송) 등 30여 군현이 서로 잇대어 항복하여 왔다. 2월 을미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창군의 첩보를 알리니 신라 왕이 사신을 시켜 답례 방문을 하고 편지를 보내 서로 만나기를 청하였다. 이때에 신라의 동쪽 연해 주군과 부락들이 다 와서 항복하니 명주(강릉)로부터 흥례부(경남 울산)에 이르기까지 항복한 성이 총계 1백 10여 성이었다. 경자일에 왕이 니어진(경주지방)으로 갔다. 북미질부성(경북 흥해) 성주 훤달이 남미질부성 성주 북미질부성(경북 흥해) 성주 훤달이 남미질부성 성주와 함께 와서 항복하였다.

  3월 무진일에 백서성 낭중 행순과 영식을 모두 내의사인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5월 임진일에 왕이 서경에 갔다. 6월 경자일에 왕이 서경으로부터 돌아왔다. 가을 8월에 안화선원을 창설하여 대광 왕신의 원당으로 삼았다. 을해일에 왕이 대목군(경북 인동)으로 가서 대승 제궁을 천안 도독부사로, 원보 엄식을 부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계묘일에 왕이 청주로 갔다. 병오일에 우릉도에서 백길과 토두를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백길에서 정위, 토두에게 정조 품계를 각각 주었다. 9월 정묘일에 개지변(경남 울산)에서 최환을 보내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겨울 12월 경인일에 왕이 서경에 가서 학교를 창설하였다.

 

  10. 태조 신묘 14년(931)

  봄 2월 정유일에 신라 왕이 태수 겸용을 보내 다시 왕과 만나기를 청하였다. 신해일에 왕이 신라로 갔다. 이날 5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신라 서울 경내에 이르러 장군 선필을 먼저 보내 신라 왕의 안부를 물었다. 신라 왕이 명령을 내려 백관들은 교외에서 왕을 영접하고 자기 사촌 동생인 상국 김유렴은 성문 밖에서 왕을 영접하게 하였으며 신라 왕 자신은 정문 밖에 나오아서 왕을 맞으면서 절을 하였다. 왕은 그에게 답배하였다. 신라 왕은 왼쪽으로, 왕은 오른쪽으로 궁전에 오르면서 서로 앞서기를 사양하였다. 왕이 수원으로 온 여러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신라 왕에게 절을 하게 하였다. 이때 회견 석상에는 정분과 예절이 극진하였었다.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술이 거나하게 취하였을 때에 신라 왕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운수가 불길하여 견훤에게서 심중한 침해를 받고 있으니 이 통분한 사정을 어찌하겠소?” 하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니 좌우 신하들이 모두 슬피 울었다. 왕도 역시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을 위로하였다.

  여름 5월 정축일에 왕이 신라 왕, 그의 태후, 죽방부인, 상국 김유렴, 잡간 예문, 파진찬 책궁, 윤유, 한찬 책직, 흔직, 의경, 양여, 관봉, 함의 희길 등에게 물품을 차등 있게 주었다. 계미일에 왕이 돌아오는데 신라 왕이 혈성까지 나와서 전송하고 김유렴을 인질로 삼아 왕을 수종케 하였다. 신라 서울 사람들이 감격하여 울면서 서로 치하하기를 전일 “견씨(견훤)가 왔을 때에는 승냥이나 범을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왕공(왕건)의 오심에는 부모를 뵈나 다름없다.”고 하였다. 

  가을 8월 계축일에 보윤, 선규 등을 보내 신라 왕에게 안장 갖춘 말과 능, 나, 채, 금을 주고 백관들에게는 채,백을, 군민들에게는 차와 복두를, 승려들에게는 차와 향을 각각 차등 있게 주었다. 겨울 11월 신해일에 서경에 가서 재제를 치르고 주진들을 순찰하였다. 이 해에 관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북번 사람들은 사람의 탈을 쓰고도 짐승의 심리를 가진 자들로서 주리면 오고 배부르면 가며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염치를 잊어 버리나니 지금은 비록 우리에게 복종하고 있으나 복종과 배반이 대중없다. 그들이 지나다니는 주진들에서는 성 바깥에 여관을 지어 놓고 접대하게 할 것이다.”

 

  11. 태조 임진 15년(932)

  여름 5월 갑신일에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타일렀다. “근자에 서경을 복구하고 백성을 옮겨 거기를 충실히 한 것은 그 지방 역량에 의거하여 삼한을 평정하고 장차 거기에 수도를 정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민가의 암탉이 수탉으로 변화하고 큰 바람이 불어서 관가집이 무너졌으니 대체 무슨 재변이 이처럼 심한가! 옛날 진나라에 간신이 음모를 품고 있었는데 그 집 암탉이 수탉으로 변화하였었다. 점쟁이가 말하기를 이는 사람이 분에 넘치는 딴 뜻을 품었다하여 하늘이 경고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나 그 간신이 자기의 죄과를 고치지 않고 있다가 결국 목을 잘리고 가문의 전멸을 당했으며 오왕 유비 때에 큰 바람이 문을 넘어뜨리고 나무 뿌리를 뽑은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한 점쾌도 진나라 때의 그것과 같았는데 유비가 조심할 줄 모르고 있다가 역시 멸망하고 말았다.

  또 상서지에 이르기를 부역이 공평하지 못하고 공납이 과중하여 아래 백성들이 왕을 원망하면 이러한 징조가 나타난다고 하였다. 옛날 사실을 가지고 지금 일을 대조하여 본다면 어찌 이렇게 된 원인이 없겠는가. 지금 사방에 고된 역사가 계속되고 백성의 부담이 많은데다가 공납이 면제되지 않고 있으니 나는 이것으로 하여 엄중한 화변을 초래할 듯하여 자나깨나 근심스럽고 두려워서 감히 편안히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 형편으로 국가의 공납을 감면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걱정되는 것은 여러 신하들이 직무를 공정하게 실행하지 못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원망하게 하며 혹 분에 넘치는 딴 마음을 먹기 때문에 이러한 재변을 자아낸 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사람들은 각각 자기 마음을 고쳐 먹고 화가 미치지 않도록 하라!” 

  6월 병인일에 백제 장군 공직이 투항하여 왔다. 가을 7월 신묘일에 왕이 일모산성(충북 문의)를 친히 정벌하였다. 태자 무를 보내 북쪽 변경을 순찰하게 하였다. 9월에 견훤이 일길찬 상귀를 시켜 수군을 거느리고 예성강으로 쳐들어와서 염주,백주,정주 등 세 고을의 배 1백 척을 불사르고 저산도 목장에 있는 말 3백 필을 약탈하여 갔다. 겨울 10월에 견훤의 해군 장군 상애 등이 대우도(평북 용천)를 침략하였다. 왕이 대광 만세 등을 보내 대우도를 구원하였으나 이롭지 못하였다. 11월 기축일에 이전 내봉경 최응이 죽었다. 이 해에 대상 왕중유를 당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선사하였다. 다시 일모산성을 공격하여 이를 격파하였다.

 

  12. 태조 계사 16년(933)

  봄 3월 신사일에 당나라에서 왕경, 양소업 등을 보내 왕을 책봉하였다. 책봉 조서는 이러하였다. “제왕이란 하늘의 이치를 본받아 모든 백성을 양육하며 땅의 도를 체현하여 천하를 편안케 한다. 진실로 어느 한 곳에도 치우치지 않으므로 그 덕화가 미치지 않는 데가 없는 것이다. 북두성과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으면 뭇별들이 모두 그쪽으로 향하며 명해와 발해가 넓어서 모든 물들이 다 그를 조종으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천지간에 사는 모든 인류와 일월이 비치는 모든 지역에 자기의 도를 넓히고 덕화를 입히며 자신을 삼가고 허심한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진심으로 복종하는 자는 황제의 신하로 돌보아 주며 지도에 순응하는 자는 교화를 입게 된다. 

  이리하여 황제는 그들에게 책봉의 명령을 시행하고 표창의 글을 의논하는 것이니 이런 특전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라 어찌 감히 폐지할 것인가. 고려 왕은 때에 알맞게 국토를 평정하였고 군사상 주도권을 잡은데다가 재능도 겸비하였다. 5족의 강한 씨족들을 통합하고 삼한의 본토를 장악하여 혼란한 판국을 안정시키는데 힘을 쓰고 간악한 역도를 성토하는 데 뜻을 두었다. 이에 떳떳한 전례에 의하여 특권을 주려 한다. 아아! 권지 고려국왕사 건은 용맹스러운 자질에 지혜가 특출하며 변방에서 으뜸가는 장한 포부를 품고 일어섰다. 하늘이 산하를 주었고 국토가 광할하다. 주몽의 건국한 전통을 계승하여 그곳의 임금으로 되었으며 기자가 번신으로 있던 옛사실을 본받아 나의 교화를 넓히고 있다. 풍속이 순후하고 글을 아는지라 능히 예의로써 지도할 수 있으며 성질이 효용하고 무술을 숭상하는지라 능히 위엄을 떨칠 수 있다. 

  여기서 봉토를 가지고 행복을 누리며 백성을 안정시키고 재부를 축적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와의 관계는 순치와 같이 이해가 일치하고 피모처럼 정분이 긴밀하다. 간사한 오랑캐가 말썽을 부리는 것을 분개하게 생각하고 이웃 나라를 동정하여 어려운 환날을 구원하여 주었고 특히 우리 나라를 성심성의로 대하고 있다. 또한 우리 백성들이 편안히 살고 시절이 무사하여 요순적 정치가 보장되고 있는 것을 부럽게 생각하여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 공물을 보내며 자기 사업을 보고하는 절차를 이행함으로써 선린 정책에 훌륭한 공적을 나타내고 있다.

  대체로 지극한 정성에 비추어 훌륭한 갚음을 받는 것은 도리상 떳떳한 일이요, 실지 봉작을 주어 인방을 찬양하는 것은 예절상 중대한 것이다. 공로가 극진한 사람에게 내 무엇을 아끼겠는가. 이제 사신으로서 태복경 왕경과 부사로서 대부소경 겸 통사사인 양소업을 보내 신인장과 예절을 갖추어 당신을 고려국 왕으로 책봉한다. 아아! 착한 일을 하면 하늘이 경사를 내리는 것이요, 바른 도리를 지키면 신명이 복을 주는 것이다. 무기는 위급할 때에 조심하여 쓰고 문교는 원대한 장래를 위한 것이다. 영원히 우리의 인방으로서 대대로 위업을 누리며 모든 일에 삼가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조서는 다음과 같다. “당신은 빛나는 가문에 태어나서 존귀하게 될 징조가 보였으며 동방에 나라를 가져 해외 열국의 으뜸으로 되었다. 장병들은 모두 무마하는 데 감격되고 백성들은 다같이 태평을 노래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 나라를 대하는 성의가 진실하고 이웃 나라를 돌보는 데 뜻을 두고 있다. 군사를 정예하게 하여 견훤의 세력을 좌절하였고 용도를 절약하여 홀한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또한 매양 바다를 건너 글월과 공물을 보내 오고 있다. 금석 같이 굳은 성의는 해를 꿰뚫을 만하고 풍운과 같은 기개는 창공을 찌를 듯 하다. 훌륭한 이름을 한 시대에 떨치고 아름다운 덕화는 사방에 미쳤도다. 당신의 정성이 그와 같으니 어찌 표창이 없을 수 있으랴. 특별히 책봉할 것을 의논하여 높은 지위에 올리기로 하였다. 책서를 띄워 보내니 동방길이 아득하고 원수를 쳐서 공을 이루었으니 나의 마음도 기쁘다. 이 특별한 대우를 고려하여 숭고한 업적을 길이 보전할 것이다.

  이제 당신에게 특진 검교태보 사지절 현토주 도독 상주국 충 대의군사 벼슬을 주고 고려국 왕으로 책봉한다. 지금 사신인 태복경 왕경과 부사인 대부소경 양소업 등을 보내 예를 갖추어 책명을 전하게 하고 겸하여 국서(국가의 공식 편지)와 은 그릇, 비단들을 별지 목록과 같이 보내 도착 되는대로 받을 것이다.” 또 다른 조서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당신은 동방의 대족이요 해외의 강국으로서 문무의 재주를 가지고 그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충효의 미풍을 가지고도 우리의 문화를 섭취하고 있다. 아름다운 정성은 이미 기발에 전서로 새겼으며 영예로운 대우 절차는 문건에 밝혀져 있다. 조서에는 벌써 친선의 정이 표시되었고 가정이 화목하니 백성의 모범으로 될 만하다.

  식읍을 나누어 당신의 부인을 경사롭게 하려는 것이니 그로 하여금 내조의 공을 빛내게 하여 이 특별한 대우에 어긋나지 않게 할 것이다. 당신의 성의를 아는 바이니 나의 은혜를 짐작하리라. 이제 부인 유씨를 하동군부인으로 책봉한다.” 또 삼군 장병들에게 주는 조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생각하건대 왕건은 성운의 아름다운 정기를 타고 났으며 금석을 뚫을 만한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그의 신의는 이웃 나라들과 화목한데서 나타나고 있으며 충효는 큰 나라를 대하는 태도에서 볼 수 있다. 삼한의 아름다운 강토를 가지고 매양 중국의 정삭을 시행하며 머나먼 창해를 건너서 항상 공물을 보내 오고 있다. 공훈과 명성은 이미 현저한데 작위가 아직 높지 못하니 마땅히 책서를 주어 실지 봉작을 높여야 할 것이다. 이제 그를 고려국왕으로 봉하기 위하여 사신으로 하여금 예를 갖추어 책명을 전하게 하는 동시에 그를 위로케 하노니 모두들 그렇게 알라!” 당나라에서 또한 자기들의 역서를 보내 왔다. 이 때로부터 고려의 천수 연호 대신에 후당 연호를 사용하였다.

 

  13. 태조 갑오 17년(934)

  봄 정월 갑진일에 왕이 서경으로 가서 북방의 진들을 두루 순찰하였다. 여름 5월 을사일에 왕이 예산진에 가서 조서를 내렸다. “지난날 신라의 정치가 혼란하여 뭇도적이 사방에서 일어 나고 백성들은 유리 분산하여 그들의 백골이 거친 들판에 널렸었다. 전 임금(궁예)이 온갖 분쟁을 평정하고 국가 기초를 닦았으나 말년에 와서는 무고한 백성들에게 해독이 미쳤으며 사직이 전복되었다. 내가 그 위급한 뒤 끝을 이어 새 나라를 창건하였는데 도탄 속에서 신음하여 온 백성들에게 고된 노역을 시키는 것이 어찌 나의 본의이겠는가. 다만 만사를 초창하는 때라 일이 부득이 하여 그런 것이다. 내가 비바람을 무릅쓰고 주,진들을 돌아 다니면서 성책을 수리하는 것은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도적들의 난을 면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리하여 남자는 전부 군대로 나가게 되고 여자들까지도 부역에 동원되었다. 그들은 고통을 참지 못하여 혹은 산중으로 도망하고 혹은 관청에 와서 호소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왕실의 친척들과 권세 있는 자들 중에서 횡포하게 약한 자를 멸시하여 우리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자들이 어찌 전연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한 몸으로써 어찌 집집마다 친히 가서 그들을 보살피겠는가. 하부 백성들이 호소할 길 없어서 하늘을 부르짖고 우는 것은 바로 이 까닭이다. 너희들 공경 장상으로서 나라의 녹봉을 먹는 자들은 마땅히 백성들을 자기 자식과 같이 사랑하는 나의 뜻을 충분히 체득하고 자기의 녹읍 백성들을 사랑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무지한 부하 사람들을 녹읍에 파견한다면 오직 긁어 들이기에 치중하여 착취를 함부로 할 것이니 너희들인들 어찌 다 알겠는가. 또 혹 안다고 하더라도 역시 금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백성들이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는 자가 있어도 관리들이 정실 관계에 끌리어 이들의 죄과를 숨기고 있으니 백성들의 원망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이 까닭이다. 내가 일찍이 이 일에 관하여 훈계한 적이있거니와 그 사실을 아는 자는 더욱더 노력하고 모르는 자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쳐 고치기를 바란다. 근자에 특별히 염권을 발행하였는데 그래도 남의 과오를 숨겨 주는 것을 현명한 것으로 생각하여 위에 보고를 하지 않으니 선악에 대한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이렇게 되면 절개를 지키고 허물을 고치는 사람이 있겠는가. 너희들은 나의 훈계를 준수하고 나의 상벌에 복종하라. 죄가 있는 자는 귀천을 물론하고 자손에게까지 책벌이 미칠 것이요, 공이 많고 죄가 적은 자는 그 대로 짐작하여 상벌을 시행할 것이다. 만일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1년간 혹은 2~3년 내지 5~6년간에 걸쳐 그 녹봉을 추징할 것이며 심한 경우에는 종신토록 등용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국가사업에 뜻이 충실하고 시종 일관 허물이 없다면 살아서 영화와 녹봉을 누릴 것이요, 죽어서는 명문 대가로 불리우고 자손에게까지 국가에서 그들을 우대하여 표창과 상을 줄 것이다. 이것은 다만 현재 뿐 아니라 천추 만대를 내려가면서 좋은 모범으로 될 것이다. 만일 남의 고소를 받은 자가 관가에서 불러도 오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재차 소환장을 보내 우선 곤장 열 개를 쳐서 명령 위반죄를 다스린 다음에 그가 범한 원 죄상을 논할 것이며 만일 관리들이 고의로 사건처리를 지연시켰을 때에는 지연된 날자를 계산하여 그에 해당한 책벌을 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자기 세력을 믿고 법령을 시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자가 있거든 그 이름을 적어 올려라!”

  가을 7월에 발해국 세자 대광현이 민중 수만 명을 데리고 와서 귀화하였다. 그에게 “왕계”라는 성명을 주어 왕실 족보에 등록하고 특히 원보의 품계를 주어 백주 고을 일을 맡아 보게 하고 거기서 자기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그의 관료들에게는 작위를, 군사들에게는 토지와 주택을 각각 차등 있게 주었다. 9월 정사일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운주(충남 홍주)를 정벌하였다. 여기서 견훤과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백제의 웅진 이북 30여 성이 이 소식을 듣고 제풀에 항복하여 왔다. 겨울 12월에 발해의 진림 등 1백60명이 귀순하여 왔다. 이 해에 서경에는 한재와 충재가 있었다.

 

  14. 태조 을미 18년(935)

  을미 18년 봄 3월에 견훤의 아들 신검이 자기 아버지는 금산사에 감금하고 아우 금강은 죽여 버렸다. 처음에 견훤의 첩들이 많아 아들 10여 명을 두었는데 그중에서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았으므로 훤이 특히 그를 사랑하여 자기 자리를 그에게 전하려고 하였었다. 형들인 신검,양검,용검 등이 그 눈치를 알고 고민에 싸여 있었다. 이 때에 양검과 용검은 외방에 나가 군무에 종사하였고 신검이 호을로 자기 아버지의 곁에 있었는데 이찬 능환이 사람을 시켜 양검,용검과 음모를 꾸며 신검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사촉한 것이었다.

  여름 6월에 견훤이 막내 아들 능예, 딸 애복, 애첩 고비 등을 데리고 나주로 달려와서 고려 정부로 들어 오기를 청하였다. 왕이 장군 유금필, 대광 만세, 원보 향우, 오담, 능선, 충질 등을 시켜 군함 40척을 가지고 바다길로 가서 견훤을 맞게 하였다. 견훤이 들어오자 왕은 다시 그를 상부라고 불렀으며 남궁을 사관으로 지정해 주었다. 그리고 견훤의 품계는 백관의 위에 있게 하고 양주를 식읍으로 주는 동시에 금과 비단을 주고 노와 비 각각 40명과 말 열 필을 주었으며 그보다 먼저 항복하여 온 신강을 그의 아관으로 삼았다.

  가을 9월 갑오일에 왕이 서경으로 가서 황주와 해주를 두루 순찰하였다. 겨울 10월 임술일에 신라왕 김부가 시랑 김봉휴를 보내 고려 정부로 들어 오기를 청하였다. 왕이 섭시중 왕철과 시랑 한헌옹을 신라에 파견하여 신라왕의 요청에 동의하는 뜻을 알렸다. 11월 갑오일에 신라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왕도를 출발하였는데 인민들이 다 그를 따라 나섰다. 이 때에 향나무로 꾸민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리에 뻗쳐 길이 메었고 구경군들이 담벽처럼 늘어서쑈으며 연도 주 현들에서의 공궤가 매우 성대하였다. 왕이 사절을 파견하여 그 일행을 위로하였다. 

  계묘일에 신라왕이 왕철 등과 함께 개경으로 들어왔다. 왕이 의장병을 갖추고 교외로 나가서 그를 영접하였으며 태자에게 명령하여 여러 대신들과 함께 그들을 호위하여 유화궁으로 들어와서 사관을 정하게 하였다. 계축일에 왕이 정전에 나와서 백관을 모아놓고 의례를 갖추어 왕의 맏딸 낙랑공주를 신라왕의 아내로 삼았다. 기미일에 신라왕이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본국이 오래 동안 위기를 겪고 운수가 벌써 다 전해서 다시 왕실을 보전할 희망이 없으니 신하의 예절로써 뵈옵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신유일에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없으며 나라에는 두 임금이 없는 법이니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다면 백성들이 어떻게 견디어 내겠습니까? 원컨대 신라왕의 요청을 허락하소서!” 라고 하였다. 임신일에 왕이 천덕전에 나와서 백관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내가 신라와 더불어 정중한 맹약을 체결하여 양국의 우호관계를 영구히 하고 각각 자기의 사직을 보전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런데 지금 신라왕이 신하노릇을 하겠다고 굳이 청하고 경들도 그것을 가타고 하니 비록 나의 마음은 부끄러우나 여러 사람들의 뜻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뜰에서 드리는 신라왕의 배례를 받았다. 여러 신하들의 축하하는 소리가 온 궁중을 뒤흔들었다. 이에 김부를 정승으로 임명하여 품위가 태자 이상으로 되게하고 1년 녹봉을 천 석씩 주었으며 신란궁을 지어 주고 그 시종자들을 전부 등록하여 토지와 녹봉을 넉넉히 주었으며 신라국은 폐지하여 경주로 고치고 그 지역을 김부에게 주어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이 해에 예빈경 형순 등을 당나라에 파견하였다.

 

 15. 태조 병신 19년(936)

  2월에 견훤의 사위인 장군 박영규가 귀순하기를 청하였다. 여름 6월에 견훤이 왕에게 청하기를 “이 늙은 몸이 멀리 창파를 건너서 대왕에게로 온 것은 대왕의 위력을 벌어서 나의 못된 자식을 처단하려는 것 뿐이었다고 하였다.” 왕이 처음에는 때를 기다려서 군사 행동을 취하려 했으나 견훤의 간절한 요청을 가엽게 생각하여 그의 의견을 쫓았다. 우선 정윤(태자) 무와 장군 희술을 시켜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천안부로 가게 하였다. 가을 9월에 왕이 삼군을 거느리고 천안부에 가서 병력을 합세하여 일선군(경북 선산)으로 나아가니 신검이 무력으로써 이에 대항하였다.

  갑오일에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양군이 진을 쳤다. 왕은 견훤과 함께 군사를 사열하였다. 왕이 견훤을 비롯하여 대상 견권, 희술, 황보 금산, 원윤 강유영 등은 기병 1만을 거느리게 하고 지천군 대장군 원윤 능달, 기언, 한순명, 흔악, 정조 영직, 광세 등은 보병 1만을 거느리게 하여 좌악을 삼았으며 대상 김철, 홍유, 박수경, 원보 연주, 원윤 훤량 등은 기병 1만을 거느리게 하고 보천군 대장군 원윤삼순, 준량, 정조 영유, 길강충, 흔계 등은 보병 1만을 거느리게 하여 우익을 삼았으며 명주 대광 왕순식, 대상 긍준, 왕렴, 왕예, 원보 인일 등은 기병 2만을 거느리게 하고 대상 유금필, 원윤 관무, 관헌 등은 흑수, 달고, 철륵 등 외족들의 정예 기병 9천 5백을 거느리게 하고 우천군 대장군 원윤 정순, 정조 애진 등은 보병 1천을 거느리게 하고 천무군 대장군 원윤 종희, 정조 견훤 등은 보병 1천을 거느리게 하고 간천군 대장군 김극종, 원보 조간 등은 보병 1천을 거느리게 하여 중군을 삼았으며 대장군 대상 공훤, 원윤 능필, 장군 김사윤 등은 기병 3백과 여러 성들에서 온 군사 1만 4천을 거느리게 하여 삼군의 원병을 삼았다.

  이와 같이 군사를 정비하여 북을 울리면서 전진하였다. 이 때에 갑자기 창검 형상으로 된 흰 구름이 우리 군사가 있는 상공에서 일어 나 적진 쪽으로 떠갔다. 백제 좌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 등 4명이 우리의 병세가 굉장한 것을 보더니 투구를 벗고 창을 던져 버린 다음 견훤이 타고 섰던 말 앞에 와서 항복하였다. 이에 적측의 사기가 저상되어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왕이 효봉 등을 위로하고 신검의 있는 곳을 물었다. 효봉 등이 말하기를 “신검이 중군에 있으니 좌우로 들이치면 반드시 격파할 수 있다.”고 하였다. 왕이 대장군 공훤에게 명령하여 곧추 적측의 중군을 향하여 삼군과 함께 일제히 나가면서 맹렬하게 공격하니 적병이 크게 패하였다. 

  그리하여 적장 흔강, 견달, 은술, 금식, 우봉 등을 비롯하여 3천 2백명을 사로잡고 5천 7백명의 목을 베었다. 적들은 창끝을 돌려 저희들끼리 서로 공격하였다. 우리 군사가 적을 추격하여 황산군까지 이르렀다가 탄령을 넘어 마성에 주둔하였다. 신검이 자기 아우들인 청주(경남 진주) 성주 양검, 광주 성주 용검과 문무 관료들을 데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해당 관리에게 명령하여 포로한 백제 장병 3천 2백명은 전부 제 고향으로 돌려 보내고 흔강, 부달, 우봉, 견달 등 40명만은 그들의 처자와 함께 서울로 데려 왔다. 왕이 친히 능환을 불러 꾸짖기를 “처음부터 양검 등과 공모하여 임금을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운 것은 너의 짓이니 남의 신하된 도리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라고 하니 능환은 고개를 숙이고 감히 입을 떼지 못하였다. 왕은 드디어 명령을 내려 능환을 처단하게 하고 양검, 용검은 진주로 귀양을 보냈다가 얼마 후에 죽였다. 신검은 그가 아비의 자리를 참람하게 차지한 것이 남의 위협에 의한 것으로서 죄가 두 아우보다는 경할뿐더러 항복하여 왔다 하여 특별히 죽이지 않고 벼슬을 주었다. 이에 견훤은 근심과 번민으로 동창이 나서 수일 만에 황산 절간에서 죽었다.

  왕이 백제 서울에 들어가서 명령하기를 “적의 큰 죄수들은 이미 항복하였으니 죄 없는 백성들을 건드리지 말라!” 고 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재능에 따라 등용하였으며 군령이 엄격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추호도 침범하지 않으니 각 주현이 편안하였다. 늙은이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 만세를 부르면서 서로 경축하기를 진정한 임금이 오셨으니 우리들이 살고 났다.” 고 하였다. 이 달에 왕이 백제로부터 돌아와서 위봉루에 앉아 문무 백관과 백성들의 축하를 받았다. 왕이 삼한을 다 평정하고 나서 남의 신하된 자들이 예절에 밝도록 하기 위하여 드디어 친히 “정계” 1권과 백관에게 훈계하는 글 8편을 저술하여 국내에 반포하였다. 겨울 12월 정유일에 대광 배현경이 죽었다. 이 해에 광흥사, 현성사, 미륵사, 사천왕사 등을 창건하고 또 개태사를 연산에 세웠다.

 

  16. 태조 정유 20년(937)

  여름 5월 계축일에 김부가 금으로 새기고 옥으로 장식하여 모나게 만든 허리띠를 바쳤는데 그 띠의 길이는 열 발이요 띠돈(띠의 장식품)이 62개였다. 이 띠는 신라에서 보물로 보관하여 온 지기 거의 4백년이었는데 세상에서는 그것을 “성제대(聖帝帶)”라고 불러 왔던 것이다. 왕이 그 띠를 받아서 원윤 익훤을 시켜 물장고에 보관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신라 사신 김률이 왔을 때에 왕이 묻기를 “내 들으니 신라에 세 가지 보물 즉 장륙금불상, 9층 탑 및 성제대가 있는데 이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나라도 망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중 탑과 불상은 아직 있다는 것을 알고 있거니와 성제대도 그대로 있는가?” 라고 하니 율이 대답하기를 “저는 성제대에 대하여 들은 적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가 신라의 고관으로서 어찌 국가의 큰 보물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가” 김률은 부끄럽게 생각하고 돌아가서 신라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신라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능히 그것을 아는 자가 없었는데 그 때에 황룡사에 나이가 90이 넘은 늙은 중이 있어 말하기를 “내가 듣건데 성제대는 바로 진평대왕이 띠던 것으로서 역대로 전해와서 지금 남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신라왕이 드디어 그 창고를 여니 풍우가 갑자기 일어나고 대낮이 캄캄하여져서 찾아 낼 수가 없었다. 이에 날짜를 가리어 재계를 하고 제사를 지낸 다음에야 그것이 발견되었다. 신라 사람들이 진평왕은 성골출신이라 하여 그 띠를 성제대라고 하는 것이었다. 왕규와 형순을 진나라에 보내 그 나라의 건국을 축하하였다.

 

  17. 홍  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의 전기가 포함됨] 홍유의 처음 이름은 홍술이니 의성부 사람이다. 궁예 말기에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과 함께 기병대장으로 되었는데 이들이 밀모하고 밤에 태조(왕건)의 집으로 찾아가서 말하기를 “삼한이 분열되고 뭇 도적이 봉기하였을 때 지금 임금이 용기를 분발하고 크게 호통치므로써 그만 도적들을 쳐 없애고 요좌지방의 3분의 1에서 그 절반 이상을 점유한 후 나라를 건설하고 도읍을 정한 지도 이미 2기(12년)가 넘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끝을 잘 맺지 못하고 포악한 행위가 태심하여 형벌을 남용하여 처자를 살육하고 관리들을 죽여 없애니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임금을 원수같이 여기게 되었는 바 걸이나 주의 죄악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폭군을 폐위하고 현명한 사람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대의이니 청컨대 공은 은과 주의 옛일을 본받아 실행하셔야 하겠습니다.” 라고 하니 태조는 안색을 변하며 거절하는 말이 “나는 충의를 신조로 삼고 있으니 왕이 비록 난폭할지라도 어찌 감히 두 마음을 가지겠는가? 신하로서 임금을 정벌하는 것을 혁명이라고 하는데 나는 실로 박덕한 몸인데 어찌 감히 성탕과 무왕의 옛 일을 본받을 수 있겠는가? 후세의 난신들의 구실로 삼을 것을 두려워하는 바이다.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루라도 임금으로 삼았으면 종신토록 주상으로 섬긴다.’ 고 하였으며 황차 계찰같은 사람은 말하기를 ‘나라를 영유하는 것은 나의 절조가 아니다.’ 라고 하면서 피해 가서 농사를 지었는데 내가 어떻게 계찰의 절조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라고 하니 홍유 등이 또 말하기를 “시기란 만나기 어렵고 알고도 놓치기 쉬운 것인데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 법입니다. 해독을 입은 온나라 백성들이 밤낮으로 그를 전복할 것을 생각하고 있으며 또 지위 높고 권세 있는 자들도 모두 학살당하여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은 자로서 당신의 위에 설 만한 사람은 없는 까닭에 모든 사람들의 뜻이 당신에게 희망을 가지고 있는 형편인데 만약 당신이 수락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물며 왕창근의 거울에 나타난 글도 그와 같이 예고하고 있으니 어찌 하늘의 뜻을 위반하고 폭군의 손에 죽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여러 장수들이 그(왕건)를 부축하고 나가 동틀 무렵에 노적가리 위에 앉게 하고 군신의 예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급히 외치기를 “왕공이 이미 정의의 깃발을 들었다.” 라고 하였다. 궁예는 이 소식을 듣고 놀라서 도망갔다. 태조가 즉위하자 조서를 내려 그 추대한 공로자들을 표창하되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을 모두 1등으로 하고 금은제 그릇, 비단 옷과 비단, 이부자리, 비단천 등을 주었다. 태조는 청주가 배반할 것을 우려하고 최유와 유검필에게 군대 1,500명을 인솔시켜 진주에 주둔하여 반란을 방비하게 하였으므로 청주는 배반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공으로 그를 대상으로 승진시켰다. 2년에 오산성을 예산현으로 개칭하고 최유와 대상 애선안을 파견하여 유랑민 500여 호를 모아 들였다. 19년에 그는 태조를 따라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가 죽으니 시호를 충렬이라고 하였다.

  배현경의 처음 이름은 백오삼이니 경주사람이다. 담력이 보통 사람보다 특출하였으며 병졸 출신으로 누차 승진하여 대광으로 임명하였다. 태조가 청주 사람 현률을 순군 낭중으로 임명하려고 하니 배현경과 신숭겸이 반대하여 말하기를 “지난날에 임춘길이 순군리로 있으면서 반란을 음모하다가 누설되어 사형을 당한 일이 있었는 바 이것은 병권을 잡은 데다가 자기 고향인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또 현률을 순군 낭중으로 임명하시려는 데 대하여 저희들은 저으기 의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하니 태조도 이 의견을 옳게 여기고 현률을 병부 낭중으로 고쳐 임명하였다. 태조가 사방을 정벌하는데 있어서 배현경의 공로가 가장 많았다. 19년에 병이 위독하니 태조가 그의 집으로 가서 손을 잡고 “아! 천명이로구나! 그대의 자손이 있으니 내 어찌 감히 잊겠느냐!” 라고 말한 후 태조가 문을 나가자마자 배현경이 운명하였다. 그래서 왕은 행차를 멈추고 관비로써 장사를 치를 것을 명령한 후에 환궁하였다. 시호는 무열이요 아들은 배은우이다.

  신숭겸의 처음 이름은 능산이니 광해주 사람이다. 체격이 장대하고 용맹이 있었다. 10년에 태조가 공산 동수에서 견훤과 싸우다가 불리하게 되어 견훤의 군대가 태조를 포위하였는데 형세가 심히 위급하였다. 이때 신숭겸이 대장으로 있었는데 원보 김락과 더불어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태조가 그의 전사를 매우 슬퍼하였으며 시호를 장절이라 하고 그의 동생 신능길, 아들 신보락 및 동생 신철을 모두 원윤으로 등용하고 지묘사를 창건하여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복지겸의 처음 이름은 복사괴이다. 환선길, 임춘길이 반란을 일으키려 할 때에 모두 복지겸이 밀고하여 그들을 처단하였다. 죽으니 시호를 무공이라고 하였다. 성종 13년에 이 네 사람에게 모두 다 태사 벼슬을 추증하고 태조 묘정에 배향하였다.

 

  18. 유검필

  유검필은 평주 사람이니 태조를 섬겨 마군 장군으로 되었으며 누차 승진하여 대광으로 되었다. 태조는 북방 국경에 있는 골암진이 누차 북방 미개인의 침공을 당하므로 여러 장군들을 모아 놓고 의논하기를 “지금 남쪽의 흉적들을 박멸하지 못하였는데 북방의 미개인도 우려할 바 있으므로 나는 오매불망 근심하고 있다. 유검필을 파견하여 진수하는 것이 어떠한가?” 라고 하니 모두들 좋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유검필에게 명령을 내리니 유검필은 그날로 개정 군대 3천명을 인솔하고 출발하여 골암에 도착한 후 동산에 큰 성을 축성하고 그곳에 거처하였다. 그는 북방 종족들의 추장 3백여 명을 소집하여 성대한 주연을 베풀어 주식을 많이 먹이고 그들이 추한 때를 포착하여 위협하니 추장들이 모두 복종하였다. 드디어 사람들을 여러 부락에 파견하여 전달하기를 “이미 너희들의 추장이 복종했으니 너희들도 와서 복종하라.” 고 하였더니 여러 부락에서 서로 이끌고 와서 귀순한 자가 1천 5백여 명이나 되었으며 또 포로되었던 고려 사람 3천여 명을 돌려보내 왔다. 이때로부터 북방이 평안하게 되었으므로 태조는 그에게 특별한 표창을 주었다.

  8년에 저서 대장군으로 임명되어 백제 연산진을 공격하여 장군 기로한을 죽였으며 또 임존군을 공격하여 3천여 명을 살상 포로하였다. 태조가 견훤과 조물군에서 전투할 때 견훤의 군대가 매우 정예로워서 좀처럼 승부를 결정하지 못하였다. 태조는 지구전으로 적군의 피로를 기다리려고 하였는데 유검필이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합쳤으므로 군대의 기세가 크게 떨쳤다. 견훤이 겁이 나서 화친을 청하니 태조가 그것을 허락하고 견훤을 병영으로 불러다가 일을 의논하려고 하니 유검필이 간하기를 “사람의 마음이란 알기 어려운데 어찌 경솔히 적과 접근하겠습니까?” 라고 하니 태조는 금나 두었으며 인하여 말하기를 “그대가 연산과 임존을 격파한 전공이 적지 않으니 국가가 안정될 때를 기다려 응당 그대의 공을 표창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11년에 왕의 명령으로 탕정군 남산에 올라가 앉아서 졸고 있었는데 꿈에 어떤 큰 사람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내일 서원에 반드시 변고가 있을 터이니 빨리 가라” 고 하였다. 유검필은 놀라 깬 후 그 길로 청주로 가서 적군과 싸워 격파하고 독기진까지 추격하였는데 살상 포로가 3백여 명이었다. 중원부에 달려가서 태조를 보고 전투 정형을 자세히 보고하였더니 태조가 말하기를 “동수 싸움에서 신숭겸과 김락 두 명장이 전사하였으므로 국가를 위하여 깊이 근심하였더니 지금 그대의 말을 듣고 나의 마음이 저으기 안심되었다.” 라고 하였다. 12년에 견훤이 고창군을 포위하였으므로 유검필이 태조를 따라 가서 구원하였는데 예안진에 이르러 태조가 여러 장군들과 의논하기를 “싸움이 만일 불리하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하니 대상 공훤과 홍유가 대답하기를 “만약 불리하게 되면 죽령길로 돌아 올 수 없게 될 것이니 빠져 나갈 길을 사전에 수리하여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니 유검필이 말하기를 “제가 들으니 ‘무기는 흉악한 도구요 전투는 위험한 일이라 죽자는 결심을 가지고 살려는 계책을 생각하지 않은 연후에 비로소 결승할 수 있다’고 하는데 지금 적과 대치하고 있으면서 싸우기도 전에 먼저 패배할 것을 생각하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이요? 만약 급히 구원하지 않으면 고창의 3천여 명을 고스란히 적에게 주는 것이니 어찌 절통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니 태조가 그이 의견을 쫓았다. 그래서 유검필이 저수봉으로부터 내려 닥치며 분투하여 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태조가 고창군에 들어가서 유검필에게 말하기를 “오늘의 승전은 그대의 힘이다.” 라고 하였다. 14년에 참소를 당하여 곡도로 귀양갔다.

  이듬해에 견훤의 해군 장군 상애 등이 대우도를 공격 약탈하므로 태조가 대광 만세 등을 파견하여 구원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으므로 태조가 근심하고 있었는데 유검필이 글을 올려 고하기를 “저는 비록 죄를 짓고 귀양살이는 하고 있지만 백제가 우리의 해변 지방을 침략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이미 곡도와 포을도의 장정들을 선발하여 군대를 편성하고 또 전함도 수리하여 방어하게끔 되었으니 주상께서는 염려하지 마옵소서.” 라고 하였다. 태조가 편지를 보고 울면서 말하기를 “참소하는 말만 믿고 어진 사람을 내쫓는 것은 나의 불찰이다” 라고 하면서 사신을 보내 그를 소환하고 위로하는 말이 “그대는 실로 죄 없이 귀양을 살 게 되었건만 일찍이 원한하거나 울분하지 않고 오직 나라를 도울 일만 생각하였으니 내가 심히 부끄럽고 후회된다. 나의 소망은 장차 자손들에게까지 연장하여 상 주어 그대의 충절을 보답하려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이듬해에 정남 대장군으로 임명되어 의성부를 지켰는데 태조가 사람을 보내 이르기를 “나는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 받을까 염려하여 일찍이 대광 능장영, 주열, 궁총희들을 파견하여 진수하게 하였는데 이제 듣건대 백제 군대가 벌써 혜산성, 아불진 등지에 이르러 사람과 재물을 겁탈한다 하니 신라 서울에까지 침범될까 우려된다. 그대는 마땅히 가서 구원하라.” 고 하였다. 

  유검필이 장사 80명을 선발 인솔하고 갔다. 사탄에 이르렀을 때 병사들에게 이르기를 “만약 여기서 적을 만나면 나는 필연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인데 다만 그대들이 같이 희생당할 것이 염려되니 그대들은 각자가 살 도리를 강구하라” 고 하였다. 병사들은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모두 죽으면 죽었지 어찌 장군만을 홀로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그리고 오직 한 마음으로 적을 공격할 것을 서로 맹세하였다. 사탄을 건넌 다음 백제의 통군 신검 등과 맞딱뜨렸다. 유검필 등은 싸우려 하였으나 백제 군대는 유검필 군의 대오가 정예로운 것을 보고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흩어져 도망쳤다. 유검필이 신라에 도착하니 늙은이와 어린이들까지 모두 성밖에 나와서 영접하며 절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뜻밖에 오늘 대광을 뵈옵게 됩니다. 대광이 아니시면 우리들은 백제 군에게 살육당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유검필이 7일간 머물러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 신검 등을 자도에서 만나 싸웠는데 크게 승리하였으며 적장 금달, 환궁 등 7명을 생포하였으며 적을 살상 포로한 것이 심히 많았다. 승전보고를 받아 본 태조는 일변 놀라고 일변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장군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고 유검필이 돌아오니 태조는 궁전에서 내려가서 맞이하면서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그대같은 공훈은 옛날에도 드문 일이니 내가 이것을 마음에 새겨 두고 잊지 않겠다.” 라고 하니 유검필이 사례하며 말하기를 “국난을 당하여 자기 일신을 생각지 않으며 위급에 직면하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신하된 자의 직분이거늘 성상께서 왜 이 지경까지 하십니까?” 라고 하니 태조는 더욱 그를 소중하게 여겼다. 

  17년에 태조가 장차 운주를 친히 정벌하려고 유검필을 우장군으로 임명하였더니 견훤이 소문을 듣고 갑사 5천 명을 선발하여 거느리고 와서 말하기를 “양군이 서로 싸우면 양편이 다 온전하지 못할 형세이니 무지한 병졸들만 많이 살상될 것이 우려된다. 화친을 맹약하고 각자의 영토를 보전하는 것이 마땅하겠소” 라고 하였으므로 태조가 여러 장군들을 모아 의논하였다. 유검필이 발언하기를 “오늘의 정세는 싸우지 않을 수 없으니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염려마시고 저희들이 적을 격파하는 것이나 보십시오!” 라고 한 다음 드디어 견훤이 아직 대오를 포치하지 못한 그 틈을 타서 용감한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적병 3천여 명의 머리를 베고 술사 종훈, 의사 훈겸, 용장 상달, 최필을 생포하니 웅진 이북 30여 성이 소문을 듣고 자진하여 항복하였다. 

  18년에 태조가 여러 장군들에게 이르기를 “나주지방 40여 군은 우리의 울타리로 되어 오랜 기간 교화에 복종하였다. 일찍이 대상 견서, 권직, 인일 등을 파견하여 안무하였는데 근자에는 백제에게 약탈당하므로 6년간에 바닷길도 통하지 않으니 누가 나를 위하여 안무하려 가려 하는가?” 라고 하였다. 홍유, 박술희 등이 말하기를 “제가 비록 용맹하지는 못하나 장수의 한 사람으로 보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대체로 장수로 되려면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귀중하다” 라고 하였다. 공훤, 대광 제공 등이 아뢰기를 “유검필이 적임자입니다” 라고 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나 역시 벌써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근자에 신라의 길이 막혔을 때 유검필이 가서 그것을 열었는데 나는 그 수고를 생각하고 감히 다시 명령하지 못하고 있다.” 라고 하였다. 이때 유검필이 아뢰기를 “저는 나이는 이미 늙었으나 이것은 국사 대사인데 감히 있는 힘을 다바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니 태조가 기뻐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만일 이 명령을 받는다면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유검필을 도통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예성강까지 가서 송별하였으며 어선을 주어서 보냈다. 왕은 3일간 그대로 체류하면서 유검필이 바다에 나갈 때까지 기다려서 환궁하였다. 유검필이 나주에 가서 정벌하고 돌아올 때에도 태조는 또 예성강까지 나가 맞이하고 위로하였다. 19년에 태조를 따라 가서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며 24년에 죽었다. 유검필은 장령으로서의 전략을 가졌으며 병사들에게서 신망을 얻었었다. 출정할 때마다 명령을 받으면 즉시 출발하였으며 집에 들려서 자고 간 적이 없었다. 개선할 때면 태조는 반드시 마중나가 위로하여 주었으며 시종일관 다른 장군들이 받지 못하는 총애와 대우를 받았다. 시호를 충절이라 하였으며 성종 13년에 태사 벼슬을 추증하고 태조 묘정에 배향하였다. 아들은 유긍, 유관유, 유경이다.

 

  19. 박영규

  박영규는 승주사람이니 견훤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견훤의 장군으로 되었다. 신검이 반역을 일으키자 견훤이 귀순하여 왔다. 박영규는 자기 처에게 밀담하기를 “대왕께서 40여년 간의 근고로써 공훈과 업적이 거진 이루어지고 있다가 일조에 집안 사람의 화로 인하여 국토를 잃고 고려에 투항하시었소.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인데 만약 우리 임금을 버리고 역적을 섬긴다면 무슨 면목으로 천하의 의로운 사람들을 만나보겠소. 황차 듣건대 고려의 왕공은 인후하고 근검하여 민심을 얻고 있다 하니 이것은 아마도 하늘의 계시로다. 반드시 삼한의 군주로 될터이니 어찌 편지를 보내서 우리 왕을 위문하고 겸하여 고려의 왕공에게 우리의 은근한 성의를 알려두어 장래의 행복을 도모하지 아니하리오?”라고 하니 그의 처는 대답하기를 “당신의 말한 것이 바로 나의 뜻에 맞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조 19년 2월에 박영규는 드디어 사람을 파견하여 귀순할 뜻을 표시하고 또 말하기를 “만약 외로운 군대를 이곳에 보내시면 제가 내응하여 관군(王師)을 영접하겠습니다.””라고 하였더니 태조가 크게 기뻐하여 그의 보낸 사람을 후하게 상주고 돌아가서 박영규에게 다음과 같이 전달하라고 말하였다. “만약 당신의 혜택을 입어 길이 막히지 않고 가게 되면 먼저 장군을 방문할 것이요 댁에 가서 부인에게 배례하되 형수처럼 섬기고 누님처럼 존경하겠고 반드시 끝까지 후한 보답을 하겠소. 천지 구신들은 모두 나의 이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9월에 태조가 신검을 토벌하고 백제를 멸망시키고 나서 박영규에게 말하기를 “견훤이 나라를 잃어 버리고 멀리 와서 있는데 그의 신하들이 한 사람도 그를 위자하지 않았다. 그런데 홀로 그대 부부가 천리 밖에서 소식을 전하여 성의를 표하였고 겸하여 나에게 귀순할 뜻을 표시하였으니 이 의리를 잊을 수 없는 일이다.” 라고 하면서 좌승으로 임명하고 전답 1천 경을 주고 역마 35필로써 그의 가족들을 맞아 오게 하였으며 그의 두 아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박영규는 후일에 벼슬이 3중 대광에 이르렀다.

 

 

목차후백제 연표사 료설 화유적과 지명문경지역의 유적문경지역의 지명그외지역 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