Ⅷ. 향토출신 의병의 공훈록 및 기념비명 / 향토 항일의병사

2014. 5. 14. 23:12나의 이야기






       


Ⅷ. 향토출신 의병의 공훈록 및 기념비명  향토 항일의병사 / 문경문화원 자료 

2012/02/28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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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촌문경 향토항일의병사 

 

 

 Ⅷ. 향토출신 의병의 공훈록 및 기념비명

 

 


  1. 이강년(李康秊) 1858~1909.10.13 호 운강(雲崗) 자(字) 낙인(樂人)

 

  이강년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문경군 가은면 도태리(현, 문경시 가은읍 상괴리)에서 이기태(李起台)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대로 벼슬하지 못한 한적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이강년은 1880년 무관에 급제하여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사과(折衝將軍 行 龍釀衛 副司果)로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올랐으나, 1884년 갑신정변 때 물러나 고향에 은거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에 투신하였다. 벼슬아치 출신으로서 동학운동에 참여한 예는 극히 드물지만 민족적 정의감이 그로 하여금 동학의 척왜(斥倭)운동에 참여하게 한 것이다. 그는 농민군을 거느리고 관군에 대항하고 탐관오리를 숙청하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이어서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의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이 노골화 되었다.

 

  1895년 명성왕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강년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일인들을 소탕하고자 결심하였다. 처음에 훈척(勳戚) 심상훈(沈相熏)을 찾아가 함께 거의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그가 응하지 않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제천의 유인석 의진이 형성되었다는 말을 듣고 1896년 1월 11일 출생지인 문경에서 봉기하였다. 그전에 그들의 기미를 알아채고 달아나는 안동관찰사 김석중, 순검 이호윤, 김인담 등 3인을 생포하여 농암시장에서 그들이 적의 앞잡이 노릇한 것을 규탄하고 효수(梟首)하였다.

 

  일련의 사건으로 소모한 의병을 거느리고 안동의 창의대장 권세연을 만나 군사상의 문제를 의논하였으며, 1월 15일 고모성에서 적병을 맞아 교전하였다. 1월 29일 제천으로 유인석을 찾아 보고 사제의 의를 맺었다. 이로써 유인석의 막하에서 유격장이 되었다. 이때 김상태, 민순호 등이 문경에서 거의하여 활동하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 이강년은 대체로 생장지인 충청도에서 활약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2월 1일 전군장 홍대석과 함께 6초(哨)의 군사를 거느리고 수안보의 병참을 공격하였으며, 2월 13일 9초를 거느리고 중군 윤기영과 함께 문경 평천으로 진군하였다. 4월 장기렴이 거느리고 관군에게 제천 의진이 패하자 유인석은 거수지계(去守之計)를 정하고 요동으로 건너갔다. 이때 이강년은 후군장(後軍將)을 맡아 유인석의 뒤를 쫓아 압록강을 거쳐 만주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영월에서 진로가 막혀 소백산맥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7월에 소백산에서 일단 의병을 해산하고 단양에 은신하였다.

 

  1897년 4월 요동으로 건너가 유인석을 만나고 7월에 다시 단양으로 돌아왔다. 을미의병 활동중에 유인석에게 깊은 감화를 받았으므로 그 이후 호남, 영남지방의 선비들을 만나 성리(性理), 전고(典故), 예악(禮樂) 등에 대한 토론을 통하여 자기 수양에 골몰하였다. 또한 1899년 충주에서 화서(華西)의 문집을 출간할 때 충주에까지 가서 편집.간행.배포에 앞장섰다.

 

  1907년 3월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 되므로 제천에서 재봉기하여 단양, 제천, 원주, 연풍, 영월, 횡성, 강릉, 청풍, 충주, 문경, 예천, 영주, 봉화, 안동 등 3도 14군을 휩쓸며 적과 대적하였다. 특히 1907년 7월 5일의 제천전투에서 500여명의 적을 토멸하여 사기가 충천하였고 이어서 경상, 강원, 충청 일대에서 이름을 드날렸다. 이때에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동료 진위대 군인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민긍호 의진과 연합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판서 심상훈이 원주 배양산으로 찾아와 노고를 치하하였다. 조정으로 돌아가 고종에게 그 전과를 아뢰었다. 고종은 이강년에게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제수하며 다음과 같은 밀조(密詔)를 내렸다.

 

  “아! 나의 죄가 크고 악이 충만하여 황천이 돌보지 않으시니, 이로 말미암아 강한 이웃이 틈을 엿보고 역적 신하가 권세를 농락하여 4천년을 내린 종묘사직과 3천리 넓은 강토가 하루 아침에 오랑캐의 지역이 되었도다. 생각하면 나의 실날같은 목숨이야 아까울 것이 없으나 종묘사직과 만백성을 생각하니 이것이 애통하다. 선전관 이강년으로 도체찰사를 삼아 지방 4도에 보내니 양가(良家)의 재주있는 자제들로 각각 의병을 일으키게 하여 소모장을 임명하되 인장과 병부(兵符)를 새겨서 쓰도록 하라. 만일 명을 쫓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와 수령들을 먼저 베이고 파직하여 내쫓을 것이며, 오직 경기 진영의 군사는 나와 함께 사직에 순절(殉節)할 것이다.”

 

  이때 주천에 40여 의진이 모여 이강년을 도창의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중군장 김상태, 우군장 이중봉, 우선봉장 백남규, 좌군장 이용로, 좌선봉장 하한서, 감군장 이세영, 전군장 윤기영 등의 편제를 갖추었다. 7월 15일 행군을 시작하여 문지동을 거쳐 마수막에 이르러 충주를 치고자 하여 산하의 의진을 풀어서 작전을 실시하였으나 각 의진이 시기를 지키지 않아 충주 진격은 수포로 돌아갔다. 불당곡의 이주승의 집에서 머물면서 「국수원류(國讐源流)」「군계」「12귀 통고문(通告文)」등을 지어 군율을 가다듬었다. 이어서 풍기 도촌에서 김기찬과 일진회 회원 김상호를 총살하여 친일행위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7월 30일 문경 주흘루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공격하였는데 적은 밤을 틈타 도망하였다. 원주에 묻어둔 탄환을 보충하여 전력을 보강시켰으며, 이 때 공을 세운 이만원을 도총독장, 권용일을 우군선봉장에 임명하였다. 청풍의 조동교, 여주의 김현규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합세하였다. 특히 김현규 의진에는 해산군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8월 2일 적군이 초곡에 이르러 대전하게 되자 조동교와 김현규가 군대를 이끌고 가버려 작전의 허가 드러나 모항령전투에서 32명의 인명피해를 보게 되었다.

 

  다음날 혜국사 승려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용기백배하여 갈평으로 진격하여 적을 쳐부수고 총과 탄환, 투구 등을 노획하였다. 이튿날(4일) 다시 갈평에 나가 순검 1명을 총살하고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괴성에서 적의 대장 과전삼태랑과 육군보병 대토촌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6일에는 대승사에서 적 5명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8일 후군장 신태원이 문경 적성에서 참패하여 아군 36명이 순국하였다. 이후 8월 중순에서 9월 중순까지 단양 유치, 영월 병두, 연풍 등지에서 적과 대치하였으나 전세는 다소 불리하였다.

 

  그리하여 9월 16일 제천 추치에서 대전하여 적 200명을 사로잡았고, 9월 27일 죽령에서 다시 적 200명을 사로잡았으며, 10월 5일 단양 고리평에서 적 80명을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해졌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지고 산중에서 눈보라를 헤치며 적과 대치하게 되자 전세는 불리해졌다. 10월 6일의 소백산정에서의 전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한 불리한 여건속에서도 10월 23일 풍기 백자동전투에서 다시 적 100명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서 이강년은 그간의 과로와 연이은 패전이 원인이 되어 득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1월 12일 풍기 복상동에서 적을 만나 대적하였으나 그 결과는 대패였다. 이때 이강년은 “내가 거의한지 12년에 이와 같이 패배한 때는 없도다” 하고 탄식하며 부하 장병들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1월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다음해 봄을 기약하고 의진을 해산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강년은 끝내 해산시키지 않았다. 11월 21일 전동 월계봉, 12월 3일 낭천 간척리, 그리고 12월 5일 경기도 건천에서 각각 대적하여 전투를 전개하였다.

 

  1908년에는 주로 경기도 지역에서 활약하였는데 용소동에서 적 100여명을 사로잡은 것을 비롯하여 대청리 갈기동에서 적과 교전하였다. 1908년에 이강년의진이 가장 빛나는 전과를 거둔 전투로는 3월 12일의 강원도 인제 백담사의 전투와 안동 서벽, 4월 6일 봉화 내성전투 그리고 4월 8일의 안동 재산의 전투를 들 수 있다. 1908년 3월 12일 백담사 전투에 대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12일 적이 많이 들어오므로 쳐서 무너뜨렸다. 이튿날 새벽에 파수병이 3번이나 급한 정세를 보고하기를 적 500여명이 북쪽에서 온다고 했다. 군중이 모두 나가 좌우로 독려하며 반날을 격전하니 적이 크게 무너지므로 추격하여 무찔렀는데 적의 죽은 자가 수백여명이며 우리 군사의 사상자도 수십여명이었다. 이날 간성 신흥사로 옮겨 주둔하고 군사를 교련시켰다. 다음날 다시 오세암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이들 이강년부대는 하루를 교전하고도 여력이 남아 있어 군대를 이끌고 설악산을 넘나들며 훈련하였으니 이들의 능란한 기동력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일대는 일찍이 관동 의진의 민긍호가 활약하던 지대로서 그가 체포된 후 곧 이어 이강년부대가 장악한 것이다. 이때 이강년은 이준명, 정원팔 등 260명의 대부대를 거느리고 산악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후 이강년은 강원도를 떠나 4월에 경북 일월산을 거점으로 삼고 산하 의병장인 변학기, 성익현, 김상태, 정경태, 백남규, 정연철 의진 4,000여명을 서벽에 주둔시켰다. 이에 대하여 일본군은 영천수비대를 파견하였으므로 이들과의 전투가 불가피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 수백명을 사로잡고 20여명을 사살하였다. 이때 적들은 내성으로 퇴군하였으며 의진 역시 내성쪽으로 행군하여 유진하고 있었는데 새벽에 적 수백명이 영천으로부터 온다고 파수병이 고하였다. 이강년은 먼저 복병을 설치하고 적을 맞이하여 싸웠다. 반나절 동안 전투하여 적을 물리쳤으며 이때 설치한 설복비계(設伏秘計)에 대하여 의진의 모든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의진이 안동 재산에 이르자 대구로부터 적의 내습이 있었다. 이강년은 이만원, 권용일을 동구에 매복시키고 하한서를 왼쪽에 성익현을 오른쪽에 매복시키고, 백남규는 분병(分兵)하여 양쪽에 매복하도록 한 후 이강년은 갑사(甲士)들을 거느리고 남산에 올라가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은 의병 복장으로 변장하고 의병기를 들고 달려왔다. 적이 깊숙히 들어올 때를 기다려 복병이 일제히 사격을 하고 이강년은 산 위에서 독전하였다. 탄환이 빗발처럼 쏟아지자 적은 놀라고 짓밟혀 죽은자가 과반이 되고 나머지는 사방으로 달아났다. 아군의 사망자는 10명, 부상자 8명이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이강년은 10여년간에 걸친 의병활동에서 비견될 바 없이 혁혁한 공로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능숙하고도 대담한 전술 때문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강년은 6월 4일 청풍 까치성전투에서 퇴로가 막혀 고전하던 끝에 적의 탄환이 복사뼈에 맞아 적에게 사로잡히게 되었으며 도선봉 하한서 및 7명이 전사하였다. 이들을 돌아보면서 마을사람들에게 “내가 잡힌 몸이 되었으니 별 수 없다. 전사한 사람들을 잘 매장하여 주기 바란다.” 고 부탁하고 제천으로 압송되었다. 처음에 일인들이 그의 부상을 치료하고자 하였으나 거절하고 일음일식(一飮一食)하였다. 그나마 일본인이 가져다 주는 것은 쳐다 보지도 않았다.

 

  그 후 그는 이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탄환의 무정함이여/ 발목을 다쳐 나아갈 수 없구나/ 차라리 심장에 맞았더라면/ 욕됨 없이 저 세상에 가는 것을/ (丸子太無情 과傷足不行 若中心腹裏 母辱到瑤京) 서울로 압송된 후 평리원에 이송되어 교수형을 선고받고 1908년 9월 19일 51세를 일기로 순국하였으니 그의 애국충정은 길이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독립유공자공훈록(국가보훈처 발행 1986년편 권1 p795~801)>

 

 

  2. 이인영(李麟榮) 1860.4.21~1909.9.20 이명 인영(寅榮)

 

  이인영은 경기도 여주출생이며 일찍이 학문이 높아 그 이름이 원근에 알려진 유학자로 많은 문인들이 추앙하여 마지 않았다. 후에 문경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발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통탄함을 금치못하고 의암 유인석, 운강 이강년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 500명을 영솔하여 춘천과 양구 사이에서 일군 80명과 격전하여 적 다수를 도륙하였으며 이때 아군 5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1896년 여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고종의 선유문을 받들어 의진을 해산하고 문경에서 은퇴생활을 하면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907년 8월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해산군들이 각지의 의병에 합세하여 의병운동의 양상이 변화하고 다양해지는 등 의병활동이 활발해졌다. 이에 1907년 9월 강원도 원주 등지에서 활약하고 있던 의병장 이은찬과 이구재가 해산병 80명이 포함된 500명의 의병을 소모한 후 이인영을 찾아와 의병대장이 되어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이인영은 “나도 창의의 뜻을 품은 지는 오래되나 부(父)가 병상에 누워 있어 기거를 사람에 의지해야 할 형편이므로 차마 가정을 떠나지 못할 정리라.” 고 말하였다. 

 

  이에 이은찬은 “이 천붕지복(天崩地覆)의 날을 당하여 국가의 일이 급하고 부자의 은(恩)이 경한데 어찌 사사로써 공사를 미루리오” 하면서 4일간 그곳에 머물면서 간곡히 권유하였다. 이인영은 더디어 이를 승낙한 후 강원도 원주로 출진하여 관동창의대장에 오른 후 사방에 격문을 발하여 의병을 소모하였다. 격문이 자자구구마다 비분강개에 차 원근으로부터 응모자가 날로 불어났다. 이때 소모의 방법은 사람을 시켜 마을마다 격문을 보내어 일반에게 알리고 응모자를 비밀리에 지정된 장소로 모이게 하는 것이었다.

 

  소모에 응한 의병이 수천명(그중에 해산병이 200명)에 달하자 우선 급한 것은 식량과 자금문제였다. 일부 무고한 양민의 미곡을 탈취하여 의병운동의 자금으로 유용하고자 하는 무리도 있었으나 이인영은 “가련한 창생에게 참화를 주어 기한에 떨 게 하는 것은 차마 우리들이 할 바가 아니오. 또 의병이 할 행위가 아니니, 우리는 오직 천의(天意)를 대신하여 그들 매국노 5간 7적(5奸 7賊) 및 신협약을 체결하는데 부화뇌동한 현 내각원 등의 불의의 재보를 빼앗아 군자를 도울 뿐이라” 하여 매국노들의 재산을 빼앗아 의병활동에 충당하기로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인영이 관동창의대장에 오르자 그의 공평한 인품을 흠모하여 원근에서 그를 따르는 자가 주야 부절로 모여들어 군세는 크게 떨치게 되었다. 이에 이인영은 원주를 떠나 횡성, 지평, 춘천을 횡행하며 8도의 의병 규합에 진력하면서 다음과 같은 격문을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발하여 1907년 11월에 각도의 의병부대를 양주로 집결하도록 하였다. 원주를 버리고 양주를 8도 의병의 집결처로 한 것은 원주땅은 교통이 불편하여 대사를 도모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용병(用兵)의 요결은 고독을 피하고 일치단결하는데 있는 즉 각도 의병을 통일하여 궤제지세(潰堤之勢)로 경기 땅을 쳐들어가면 온 천하는 모두 우리 것이 될 것이다.” 한 후에 전국 연합의병부대 편성에 착수하였다. 확정된 부서는 다음과 같다.

 

  13도 창의총대장 : 이인영, 전라유진소 전라창의대장 : 문태수, 호서유진소 호서창의대장 : 이강년, 교남유진소 교남창의대장 : 신돌석, 진동유진소 진동창의대장 : 허위(아장 박정빈), 관동유진소 관동창의대장 : 민긍호, 관서유진소 관서창의대장 : 방인관, 관북유진소 관북창의대장 : 정봉준

 

  이렇게 구성된 13도 연합의병부대의 총수는 약 1만명(혹은 8천명)이었고, 그 가운데 정예군이라 할 수 있는 근대적 무기 즉 양총을 가진 과거의 진위대 병사들 및 기타 훈련받은 군인이 약 3천명이 있었다. 즉 문경으로부터 이은찬과 이구재가 거느리고 온 80명, 강원도의 민긍호의 부하가 약 800명, 강화, 청주의 해산병, 기타 경기 각지의 해산병, 기타의 훈련을 받은 구 군인이 양주 집합시 약 3천명이나 되었다. 이는 해산병과 그 이전의 군인이었던 자를 합한 숫자였다.

 

  그러나 그 이후 의진의 개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수부 13도 총대장 : 이인영, 군사장 : 허 위, 관동의병장 : 민긍호, 호서의병대장 : 이강년, 교남의병대장 : 박정빈, 진동의병대장(경기, 황해) : 권중회, 관서의병대장 : 방인관, 관북의병대장 : 정봉준, 호남의병대장 : 문태수

 

  이같은 개편 과정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신출귀몰의 비호 용장으로 알려진 교남의병장 신돌석의 배제이다. 개편후의 의병장들은 모두 양반출신의 유생 의병장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서민출신의 의병장 신돌석의 존재는 양반 의병장 측에서 볼 때 전통적인 봉건사회의 전통적 신분질서를 문란시키는 요인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압도적인 적군과 대결함에 있어서 서민출신의 용장이 배제되고 홍범도, 김수민과 같은 평민출신 용장들을 연합전선에 참가시키지 못한 것은 국민적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폭넓은 전선이 이룩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이후의 연합의진의 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13도 연합의진은 서울공략을 목표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11월부터 서울로 진격하여 동대문 밖 30리에서 일군과 싸워 퇴군하던 1908년 2월초순(음력 1907년 12월말)까지 서울근교에서 의병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당시 의진의 모습에 대하여 「기려수필(騎驢隨筆)」에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서로 연락하여 그 성원을 받아 각도에 격문을 전하고 고기(鼓起)로써 하니 원근응모자가 주야부절로 모인자가 만여인이었다. 이에 있어서 서울로 진군하여 통감부를 격파하고 협약을 취소시키고 국권을 회복코자 하여…” 군사는 그 군여(軍旅)를 정돈하고 진발(進發)을 준비하였다. 이에 이인영은 각도 의려로 하여금 일제 진군을 재촉하고 몸소 300명을 이끌고 먼저 동대문 밖 30리에 이르렀다.

 

  그러나 각 군이 이르지 않았는데 일병이 먼저 쳐들어와 서로 분전하였으나 적에게 대적할 수 없어 퇴군하였다. 본래 연합부대의 계획은 동대문 밖에서 전군이 집합하여 대오를 정비한 후 음력 정월을 기하여 서울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이러한 중대한 시기에 즉 1908년 1월 28일(음력 12월 25일) 의병 총대장 이인영은 부친 사망의 부고를 받게 되었다. 당시 경기도 양주군에 있던 이인영은 부음을 듣고 곧 후사를 군사장 허위에게 맡기고 자신은 즉시로 문경으로 향하였다.

 

  그래서 군사장인 허위가 친히 300의 정예를 거느리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이르렀으나 집합하기로 약속한 각지 의병부대와 연락이 끊어지게 되고 이 기미를 알게된 일본군에게 각처로부터 닥쳐오는 의병부대가 개별적으로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연합의진의 서울탈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의병투쟁이 전국적으로 앙양되어가는 가운데 단행된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1908년 2월(양력) 이후 서울 근교에서의 의병들의 활약기사가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이인영의 하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후 부친의 장례를 마친 이인영에게 많은 의병들이 다시 거의를 권하였으나 그는 나라에 불충한 자는 어버이에게 불효요, 어버이에게 불효한 자는 나라에 불충이니, 효이니 충이니 하는 것은 그 도가 하나요 둘이 아니라고 하면서 국풍을 지켜 3년 종상의 효도를 다한 후 재기하여 13도 창의군을 일으켜 권토중래(捲土重來)의 세력으로 일인을 소탕하겠노라고 말하면서 유생의 입장에서 그들의 권고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후 이인영은 노모와 슬하의 두 아들을 데리고 상주군에 잠유하였다가 다시 충북 황간군 금계동에 이거하여 살던중 1909년 6월 7일 일군 헌병에게 체포되어 동년 9월 20일 경성 감옥에서 형을 받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조. 독립유공자공훈록(국가보훈처 발행 1986년도 편 권1 p845~850)>

 

 

  3. 신태식(申泰植) 1864.11.12~1932.1.15 이명 철회(哲會)

 

  신태식은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다. 1902년 내부주사 통훈대부 중추원 의관을 역임하였다. 1895년에 거의하여 밀정혐의가 있는 가은면의 김골패와 상주에 사는 강용이 등을 농암장터에서 총살하였다. 1907년 8월 3일 단양에서 의병 수백명을 모집하여 도대장에 취임하여 울진, 영해, 영양, 영월, 산동, 제천, 원주, 홍천, 철원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의 휘하 장졸로서는 도선봉 김세영, 좌선봉에 강창근, 중군에 유제칠, 참모에 엄해윤, 영솔에 조수안, 별포에 김운선 등이 있었다. 작전을 전개함에 있어서 이강년의 의진과 합세하여 소모후군장의 소임을 담당하였다.

 

  1907년 9월 1일 신태식이 의거하였음을 알고 일제는 그의 본가에 불을 질러 보복하였다. 1908년 홍주전투에서 물러나 횡성으로 퇴각할 때 적탄에 맞아 어깨에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주, 산안전투에 참전하여 왜장 장삼랑을 사로잡아 총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2월 14일 영평, 이동전투에서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역부족으로 적에게 잡혔다. 1909년 12월 16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상고하여 1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이는 영평 면민들이 입비송덕(立碑頌德)한 사실을 들어 진정하였기 때문에 무기형으로 감형되었다가 재차 진정하여 10년형으로 확정된 것이다.

 

  1918년 1월 19일 경성감옥에서 10년의 옥고를 치르고 출감하였다. 곧 이어서 3.1만세운동이 발발하자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경상도 방면에서 조선독립 후원의용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즉 그는 김찬규, 이응수, 김돈희, 김동진 등 경상북도 지방의 지사들을 규합하여 1920년 가을에 서로군정서와 연락해 가면서 국내에서 독립군 활동에 호응, 협조를 목적으로 하는 의용단을 조직하고 김찬규가 경상남도 단장에, 신태식이 경상북도 단장에 선임되었다. 

 

  이들은 동지규합 및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듬해 겨울에 일본경찰에 기밀이 탐지되었다. 이로써 대부분의 간부진이 검속되어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지만 지방의 신망있는 인물들로 조직되었던 이 의용단이 일반 민심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그는 1922년 12월 28일 대구감옥에 수감되었으며 1923년 12월 22일 대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 받았다. 1924년 6월 5일 출옥한 뒤에도 계속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32년 1월 15일 향년 69세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참조.독립유공자공훈록(국가보훈처 발행 1986년판 권1 p688~689)>

 

 

  4. 신경희(申景熙) 1849.3.5~1907.7.12

 

  신경희는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다. 1896년 을미의병운동에 참가하고 의병대장 이강년 의진에 참여하여 참모관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 이강년의 재의거 소식을 접하고 다시 참가하여 충청북도 단양에서 적과 교전하던중 오른쪽 어깨에 적탄을 맞고 생포되었다. 그러나 압송도중 도주하여 산중에서 은신생활을 하면서 치료도중에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조.독립유공자공훈록(보훈처) 권1 p673)>

 

 

  5. 이승재(李承宰) 1873.6.16~1917.6.4 호(號) 창주(倉洲) 자(字) 좌경(佐傾)

 

  이승재는 경상북도 문경 출신으로 의병장 운강 이강년의 장자이다. 1895년 12월 부친이 을미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참가하여 서상업과 더불어 부친을 보좌하면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10월 부친 운강과 서상업 그리고 한양이와 함께 재차 거의하여 활약하던중 그들의 소식을 접하고 충청북도 배양산의 의진을 방문한 김상태, 지판서 등의 고무 격려를 받았다.

 

  1907년 10월에는 김상한과 기타 100여명을 의병으로 소모하여 김상한을 별진장으로 임명하도록 운강에게 상고하였다. 11월 피하리 전투에서는 적과 접전하던중 부상한 동지 이도악을 데리고 절벽을 올라가 무사히 적의 포위망을 벗어난 일도 있었다. 1908년 5월 청풍 작성전투에서 의진이 적에게 크게 패배하고 그 접전중에 의병장 운강이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 당하자 아우 긍재와 함께 부친이 유치된 감옥의 문을 부수며 절치 부심하다가 체포되었으나 이튿날 풀려나왔다.

 

  9월 19일 운강이 순국하자 의병장 김상태, 한양이 등과 함께 8도를 두루 다니면서 결사대를 조직하여 이또오를 암살하려고 계획하였으나 발각당하여 다시 투옥되었다. 그러나 옥중에서 수인(囚人)들의 도움을 받아 탈옥에 성공하였다. 겨우 몸을 피하여 북녘지역으로 피해가서 1년 이상을 지냈으나 나라를 잃고 원수도 갚지 못하는 분함을 참지 못하고 토혈하고 병이나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조.독립유공자공훈록(보훈처) 권1 p834>

 

 

  6. 이긍재(李兢宰) 1888.6.16~1951.1.20 호(號) 창해(倉海)

 

  이긍재는 경상북도 문경 출신으로 의병장 이강년의 차자이다. 1907년 7월 부친 이강년 의진에 입진하여 종사관에 임명되었으며, 단양, 제천, 문경 등지에서 대소의 전투에 수십차례 참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나 1908년 6월 부친이 적에게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진을 해산하였다. 곧 형 승재와 함께 상경하여 형제가 옥문을 지키며 절치부심하였으나 결국 부친의 순국소식에 접하게 되었고 형 승재 또한 객사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조.독립유공자공훈록(보훈처) 권1 p807>

 

 

  7. 유문년(柳文年) 1887~1907.4.20 이명 수연(壽年)

 

  유문연은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다. 1905년 같은 고향 출신 의병장 이강년 의진에 입대하여 종사가 되어 각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강릉에서 적과 교전하던 중에 체포되어 강릉 감옥에서 일본인의 회유전략에 응하지 않고 적을 꾸짖으며 버티다가 옥사하였다. 그가 순국하였다는 말을 듣고 그의 부인도 물에 빠져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조.독립유공자공훈록(보훈처) 권1 p757>

 

 

  8. 민순호(閔舜鎬) 1880~1965.11.18 호(號) 우초(愚樵) 자(字) 봉래(鳳來)

 

  민순호는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제의 사주에 의해서 발생되었으며, 11월에 일제의 간섭에 의하여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에 전국은 의병운동으로서 일제에 대처하였다. 민순호는 1896년 1월 11일 이강년을 따라 문경에서 거의하고 전재산을 기울여 군자금으로 삼고 의병을 모아 규합하였다. 

 

  이어서 일제의 앞잡이었던 안동관찰사 김석중, 순검 이치윤, 김인담을 생포하고 백성들 앞에서 그들의 죄상을 치죄하고 농암시장에서 목을 베어 효수하였다. 그후 마성면 고모성에서 적과 종일토록 교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한편 제천 의진의 안승우 등이 연합의진을 계획하고 의암 유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사방의 의병을 불러 모으자 이에 호응하여 이강년은 의진을 이끌고 가서 의암의 휘하에서 돌격장에 임명되었다.

 

  민순호는 종사가 되어 서상열의 진과 합세하여 조령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제천의진의 주요 의병장 대부분이 전사하자 제천의진은 해산을 강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이강년 의진도 해산되고 단양 산중으로 피신하여 재기할 것을 계획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이강년과 재기하여 원주, 영풍, 영주, 강릉, 봉화, 충주, 안동, 문경 등 14개 면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07년 7월 제천에서 적 500여명을 무찌르니 이강년 의진은 충청도, 강원도 일대에서 명성을 드날리게 되었다.

 

  그러한 공로로 이강년은 도체찰사의 명을 받아 도창의대장으로 추대되고 민순호는 후군소모장으로 이명되어 각지를 전전하면서 적 수백명을 살해했다. 1908년 의병장 이강년이 체포되자 중군장 김상태와 태백산 일대에서 3년여 간을 계속 대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일제에 의해 가옥과 가재를 소각 당하는 고통을 감수하고 단양 산중에 은신하여 재기를 꾀하기도 하였다. 한편 운강선생창의일록을 간행하는 편찬사업에 간여하여 의병의 활동기록을 남기는데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조.독립운동자공훈록(보훈처) 권1 p606~607>

 

 

  9. 한양이(韓良履) 1883.1.16~1946.2.16 호(號) 석초(石樵) 자(字) 여경(女敬)

 

  한양이는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미의병 출신으로 문경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재개하였다. 이에 한양이는 이강년 의진에 참가하고 농토 6,700여평을 매각하여 군자금으로 희사하였다고 한다. 이강년 의진이 의병활동을 본격화시키자 그 종사관이 되어 소모활동을 전개하면서 원주, 단양, 제천, 문경, 안동, 내성, 재산 그리고 경기도 관악산 등의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8년 청풍 까치성(鵲城) 전투에서 의진이 크게 패하고 의병장 이강년이 체포되어 의진이 해산되자 이또우를 암살하고자 이강년의 장남 이승재와 함께 전국을 돌며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에 이기하 등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경성으로 잠입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이일이 적에게 탐지되어 은신하였다가 예천군 용궁에서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2년 출옥후에는 문경군 가은에서 사숙을 열고 문인을 모아 배일사상을 고취시키는 한편 동지를 규합하였다고 한다. 1919년 동지 이응수, 서상업, 김찬규 등과 거사할 것을 상의하고 이듬해 4월 의용단을 조직하였다. 한편 해외의 길림군정서 및 흥업단과 연락 제휴하고 군정서로부터 군자금모집사서, 권총, 폭탄, 암호문, 독립신문 등의 지원을 받고 의용단 경북간사에 임명되어 무장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1922년 동지 이응수, 이대기 등과 함께 대구 계림여관에 비밀 사무소를 열어 연락서신을 작성하던 중 적의 밀정에게 탐지되어 50여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4년 출옥한 후에는 신태식, 김찬규, 서상업 등과 다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다가 옥고의 여독이 재발하여 1939년까지 입산하여 정양하였다고 한다. 1940년에 예천군 유천면에 사숙을 열고 문인을 모아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운강문집을 정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조.독립유공자공훈록(보훈처) 권1 p961>

 

 

  10. 심거벽(沈巨擘) 1855.9.15~1896.1.15 이명(異名) 상진(相震) 의섭(義燮)

 

  심거벽은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다. 1896년에 명성황후가 일제의 사주에 의하여 시해되었을 뿐 아니라 한걸음 나아가 일본의 내정간섭의 일환으로 단발령이 내려지자 국모의 원수를 갚고 국권을 옹호하고자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동지를 규합하던 중 운강 이강년과 신경희가 고향에서 거의하자 이에 가담하여 혈맹단을 조직하였다. 이때 의병에 몰려 도망가던 안동관찰사 김석중과 순검 이호윤, 김인담 등을 추격하여 생포하였다.

 

  그날이 마침 장이 서는 날이라 시장에 많은 군중이 모여 있으므로 그들을 군중 앞에 내세우고 그들의 친일 행각을 매도하여 민중에게 항일투쟁을 위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후 효수하였다. 이어서 문경 의진은 문경의 마성에서 적과 접전하여 전투를 전개하였는데 이 작전수행 중에 아깝게도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조.독립유공자공훈록(보훈처) 권1 p690~691>

 

 

  11. 김철상(金哲尙) 1878.11.23~1966.1.26 이명(異名) 철상(喆相)

 

  김철상은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다. 의병장 이강년이 문경에서 기치를 올리자 좌종사로서 종군하였다. 이들은 제일 먼저 양민을 토색질하던 김석중, 순검 이호윤, 김인담 등 3명을 생포하여 농암시장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이들의 반역행위와 토색질한 죄상을 폭로하고 목을 베어 효수하였다. 그후 무기를 만들고 군자금을 모아서 마성면 고모성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나 실패하고 안동의 권세연, 제천의 유인석 의진과 합세를 꾀하기도 하였다.

 

  그후 전세가 불리해져 유인석이 만주로 망명하자 문경 의진은 각지를 전전하다가 훗일을 기약하고 태백산에서 의병 해산을 단행하였다. 1907년 7월 정미7조약이 체결되자 김철상을 다시 재기한 이강년의 의진에 참가하여 문경 전투시에 군량 및 군수품을 조달하는데 공을 세우면서 1908년까지 군수지원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청풍, 황강, 문경 갈평, 제천 신림, 죽령, 영춘, 가평, 광악산, 인제 백담사, 간성, 안동 서벽, 봉화 내성, 재산, 청풍 작성, 금수산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대체로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일대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였는데 그것은 김철상 등의 군수조달에 힘을 입은 바 컸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수산 전투에서 주장인 이강년이 생포되어 형장에서 순국하고 일제의 식민지화는 본격화 되어 갔다. 김철상은 시대를 비관하다가 1909년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변성명하고 문경 산중으로 피하여 화전생활로 연명하면서 끝내 세상에 다시 나오지 않았다 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조.독립유공자공훈록(보훈처) 권1 p563~564>

 

 

  12. 박윤중(朴潤中) 1876.7.17~1907.6.23(음) 이명(異名) 용래(用來)

 

  박윤중은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다. 1907년 대한제국군 시위대 참교(參校)로 근무하였다. 그해 8월 1일을 기하여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군대 해산을 당하자 이에 분격하여 군 동료들과 함께 군대해산과 무기접수를 위하여 파견된 일군에 대항하여 접전하였다. 그러나 세부득이 하여 아군의 열세가 확정되자 만세를 삼창하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전사후 칙령에 의하여 장충단에 그의 기명(記名)이 하사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조.독립유공자공훈록(보훈처) 권1 p635>

 

 

  13. 최욱영(崔旭永) 1854.10.7~1919.8 호(號) 청계(淸溪) 자(字) 송산(松山) 이명(權泰俊)

 

  최욱영은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유학을 수학하였으며, 장성하여서는 국운이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비분함을 금치 못하던 터에 1907년 원주의 의병대장 민긍호로부터 총기를 받아 신림 안강리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고 한다. 그후 제천, 단양, 영월 등 10여개 군에서 적과 접전을 벌여 많은 공을 세웠으나 횡성에서 교전중 진두지휘하다가 적의 유탄에 적중되어 대퇴부 상단에 총상을 입었다고 한다. 1907년 8월(음) 의병장 운강 이강년 의진에 입대하여 군사장에 임명되어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중과부적이다.

 

  1908년 귀향하여 이름을 권태준(權泰俊)이라 변성명하여 은신하였다. 1913년 2월 중순 의병 김재성으로부터 고종황제의 밀서를 받았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군자금을 모금할 것을 계획하고 부하들로 하여금 그 일을 분장하도록 지시하였다. 1914년 10월부터 안동, 제천 등지에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군자금 모집과 동지 규합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그간의 행적이 드러나 체포되었다.

 

  1915년 6월 1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교사죄목으로 징역 15년형을 받았으며, 7월 16일 경성복심병원에서 공소기각되어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19년 음력 8월 1일 오랜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참조.독립유공자공훈록(보훈처) 권1 p947~948>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군내에서 의병에 참가한 근 100여명의 의병중에서 국가로부터 서훈이 된 사람은 불과 14인이다. 이것은 그 자손들이나 향토의병 현창에 뜻있는 인사들의 노력이 미흡한 때문이라 생각된다. 앞으로 의진에 참가하여 많은 공적을 세운 분들의 공적기록을 추적 발굴하여 그 공적에 상응하는 서훈이 따라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14. 이원규(李源圭) 1874.1.20~1907.11.5

 

  이원규는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팔령리 117번지 출신이다. 1896년 운강 이강년 거의시에 약관 23세의 나이로 의거에 참가하여 문경, 제천, 단양 등지에서 활약하고, 1907년 도창의대장 이강년의 제2차 거의시에는 종사부 종사로 참가하여 충주, 단양, 원주, 영월, 제천 등지 모든 전투에서 활약하던 중 1907년 11월 5일 도솔봉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나라에서는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조.독립유공자공훈록(보훈처발행),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집 p299, 전주이씨 선성군파보 p1346>

 

 

  15. 천보락(千普洛) 1852. 9.15~1908

 

  천보락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출신이다. 8척 장신으로 용력이 절륜했다. 1896년 제1차 거의시에 유인석 의진의 유격장인 이강년 의진의 선봉좌익장으로 참가하여 수안보, 새재의 왜적을 무찌르고 1905년 제2차 거의시에는 도창의대장 이강년 휘하의 우선봉장으로 문경, 예천, 단양, 제천, 죽령, 영평, 가평, 인제, 양양, 강릉, 삼척, 서벽 등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왜적과의 싸움에서는 항시 제일 앞에 서서 대원을 지휘하고 용감히 싸워서 의진의 사기가 충천토록 하였으나 애석하게도 1908년 양양전투에서 역전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나라에서는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조.독립유공자공훈록(국가보훈처발행), 독립운동사(1) p550, 독립운동사자료(1) p230, 234, 296, 운강선생창의록 p90,98>

 

 

  16. 권응정(權應靖) 1863.1.4~1937.9.7

 

  권응정은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191번지 출신이다. 호는 백졸(百拙)이며 다른 이름은 권오주(權五주)라 한다. 명망 높은 유학자로서 1905년 운강 이강년 의진의 좌종사로 임명되어 충청, 강원, 경상 등 3개도의 각처에서 왜군과 교전하고, 1908년 이강년대장이 순국한 뒤에는 이강년 의진의 중군장이던 김상태 등과 재거의 하여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했다. <참조.독립유공자공훈록(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1) p302, 운강창의록 좌종사부조>

 

 

  17. 이동하(李東下) 1856~1919.6.1

 

  이동하(일명 淨來)는 경북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 출신이다. 전통적인 유학자로서 참봉을 역임한 선비이다. 1896년 제1차 거의시에 운강 이강년 의진의 종사로 참가하여 1908년 6월 청풍 작성전투까지 경상, 충청, 강원, 경기도 등 4개도 20여군을 돌면서 많은 왜적을 토벌하였으며, 1907년 재봉기시에는 도창의대장 이강년 휘하의 참모장과 군자장으로 활약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8년 6월 청풍 작성전투에서 총대장 이강년선생이 부상을 당하고 적에게 잡히고 의진이 무너지자 동지를 규합하여 만주로 건너가 무장항쟁을 계속하다가 1914년 9월에 군자금모집의 사명을 띠고 고향에 잠입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후에 과거의 의병동지와 김락문, 이식재 등과 민단조합을 창시하고 활동중 1916년 일본경찰에 잡히어 청주감옥에 수감되자 단식으로 항거한지 17일만에 의식불명상태로 석방되어 귀가하는 도중에 죽었다. 나라에서는 198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조.국가보훈처발행 독립유공자공훈록, 독립운동사자료(1) p213,214, 운강창의록 종사부>

 

 

  18. 유 준(柳준) 1862~1937.2.1

 

  유준은 경북 문경시 문경읍 평천리 770번지 출신이다. 1896년 운강 이강년의 제1차 거의에 참가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1896년 정월 29일 평천, 관음, 개음리 전투에 참가하여 활약하였다. 1906년 제2차 거의시에는 도창의대장 이강년 휘하의 좌종사로 참가하여 문경, 제천, 단양, 영월, 죽령, 강릉, 서벽 등 전투에서 활약하다가 1908년 6월 청풍 작성전투에서 도창의대장 이강년이 부상으로 적에게 잡히어 경성감옥에서 순국하니 김상태 등과 잔여의병으로 항전을 계속하였다. 나라에서는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조.독립운동사자료집(1) p305, 운강창의록 p15>

 

 

  19. 이명재(李明宰) 1889.12.5~1947.1.5

 

  이명재는 경북 문경시 가은읍 출신이며 항일의병 도창의대장 이강년선생의 아들이다. 1905년 아버지 이강년선생이 재거의 하자 일제의 감시와 사가에 대한 방화로 인하여 형 승재와 같이 아버지 의진에 입진하여 단양, 제천, 연풍, 영월, 강릉, 청풍, 문경 등지의 전투에 종군하여 활동하였다. 1908년 6월 4일 청풍 작성전투에서 아버지 이강년 의병대장이 부상을 당하여 왜군에게 잡히어 같은해 9월 19일 경성감옥에서 순국하니 형 승재, 경재와 함께 아버지의 유해를 수렴하여 안장하였다. 나라에서는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조.한국독립운동사(김승학 편) p345>

 

 

  20. 최 찬(崔瓚) 1856.12.8~1928.10.20

 

  최찬은 경북 문경군 호서남면 간신리 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유학을 전공하여 역학, 병서, 의서에 정통하였다. 1896년 1월 운강 이강년선생이 인근인 가은에서 거의함에 적극 참여하여 마성 고모산성에서 왜적과 격전하고 2월에는 수안보, 조령에서 왜적과 싸웠다. 1907년 운강 이강년의 재의거시에는 좌종사관으로 임명되어 단양, 제천, 영월, 강릉, 문경, 예천, 영주, 봉화 안동 등지에서 대소 수십회의 전투에 참가하여 왜적을 토벌하고 특히 의약과 치료에 정통하여 종군의로서의 활약을 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1908년 6월 청풍 작성전투에서 도창의대장 이강년이 부상을 입고 왜적에게 잡히어 순국하니 의진이 무너졌다. 그뒤로 산중에 은거하여 두문불출로 세상을 마쳤다. 나라에서는 1990년 8월 15일 광복 45주년을 맞아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조.독립운동사자료(1) p303, 향토항일의병사(문경문화원발행) p24>

 

 

  21. 해동의사운강이선생강년지비(海東義士 雲崗 李先生 康秊之碑) - 소재지 : 운강 기념관내

 

  선비의 매서운 절개(節介)가 서슬을 떨치메 민족의 잠자던 대의가 어둠속에 홀연히 빛을 나타내니 선비는 진실로 천지의 정기요 나라의 기강이기 때문이다. 간악한 무리가 국정을 잡아 도적에게 나라를 팔고 거짓 벼슬에 눈이 멀었던 세월에 초야에서 몸을 일으켜 원통한 백성을 이끌고 원수를 무찌르다가 충의의 푸른 피를 천추에 뿌린 이가 계시니 이는 운강 이강년선생이시다.

 

  선생은 근세 조선의 국운이 이미 기울기 시작하던 철종 무오 12월 30일 문경군 도태리 향제에 나시어 쉰한 살에 순국하시기까지 일생 행적이 구국의 대의로 시종하신 분이다. 선생이 왜적의 침략에 항거하여 처음 의병을 일으킨 것은 (高宗) 병신 11월 11일이요, 무너지는 사직을 붙들고 조국의 마지막 명맥을 지키다가 마침내 순의하신 것은 순종(純宗) 무신 9월 19일이니 이 열세해동안의 선생의 자취는 장렬하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을사조약(乙巳條約)과 정미조약(丁未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어 우리나라의 외교권과 군사권이 차례로 왜적에게 앗기게 되자 땅을 치며  통곡하고 일어나 다시 창의의 횃불을 들었을 때 선생은 이미 한몸을 국운만회의 제단에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순종 정미 7월에 원주대장 민긍호를 비롯하여 김상태 등 40여진이 제천에 모여 선생을 도창의대장에 추대하고 그 휘하에 뭉치니 선생의 탁월한 통솔과 군략으로 가는 곳마다 무수한 적을 무찌르고 무기와 군마를 노획하여 사기와 군성이 전국을 진동하고 국민들은 선생의 손으로 국란이 극복될 것을 기원하였다. 그러나 하늘은 끝내 우리의 강토와 겨레를 버리고 말았다. 순종 무신 6월 4일 충청도 청풍전투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선봉장 하한서 등 7인이 전사하고 남은 사졸이 잇따라 쓰러지메 처절한 싸움끝에 선생도 총상을 입고 무정한 총알이 가슴을 뚫지 않음을 한탄하는 시를 읊으시면서 적에게 잡힌 바 되었다.

 

  선생이 서울로 잡혀 오시던 날은 온 장안이 철시하고 남녀노소가 목을 놓아 울었으며 선생은 옥중에서 위의도 늠름하게 적을 꾸짖다가 그해 가을에 처형되어 순국의 의렬이 되셨다. 선생은 구국의 큰 뜻을 중도에 꺾이운 채 추적의 흉검에 쓰러졌을지라도 선생이 계심으로써 겨레의 참뜻이 서슬을 떨쳤고 반만년 이어온 굳센 핏줄이 아주 끊기지 않았음을 천하에 밝혀 보였다. 이 고장은 선생이 나서 자라신 곳이요, 창의의 깃발을 처음 세우시던 땅이니 당년의 감계가 아직도 백성의 마음속에 생생히 살아있는 터전이다.

 

  이제 뜻있는 사람들이 성력을 모아 비를 세우고 선생의 의로운 사적을 새기는 것은 살신성인의 그 높은 가르침을 길이 만대에 전하고자 함이라 이한 조각 돌이사 비바람에 깍일지라도 임의 꽃다운 이름은 잊을날이 없으리라. 단기 4294년 신축 11월  일. 한양 조지훈(漢陽 趙芝熏) 비문을 짓고, 안동 김충호(安東 金忠鎬) 비문을 씀. 여흥 민순호(驪興 閔舜鎬)는 찬명을 짓고 운강선생기념사업회의 주관 아래 우봉 이동녕(牛峰 李東寧)의 성금으로 삼가 이 비를 세우다.

 

  찬명 天降偉人(천강위인)   하늘은 위대한 사람을 내리어

         盖世勁氣(개세경기)   굳센 기운 세상을 덮었도다.

         爲國丹忠(위국단충)   나라 위한 붉은 충성

         千秋義理(천추의리)   천추의 의리로다.

         生此東方(생차동방)   이곳 동방에 나시어

         疾惡剛腸(질악강장)   불의를 미워하는 굳세고 곧은 마음이었네.

         日月爭光(일월쟁광)   해와 달과 빛을 다투니

         萬古綱常(만고강상)   만고의 강상입니다.

 

 

  22. 의병대장도암신태식선생기념비(義兵大將島庵申泰植先生記念碑) - 소재지 : 시민운동장 옆

 

  1864년 11월 22일 이 고을 가은읍 민지리 섬안마을에서 태어나니 본명은 철회(哲會)로 호는 도암(島庵)이며 자는 열경(悅傾)이라 고려 충신 장절공의 후예로 명하(命夏)님의 맏이다. 슬기롭고 곧은 성품은 일찍부터 기림을 받았으며 글을 익혀 나라일을 맡으니 통훈대부 중추원 의관이라. 때에 섬나라 적이 삼천리를 누르고 겨레를 짓밟으려 하니 분연히 붓을 던져 칼을 들고 일어섰도다. 1907년 8월 3일 의분의 횃불을 드니 적과 싸워 피맺힌 나달이여 25년이라. 이강년 진과 합세하여 갈벌에서 적을 치고 단양에서 깃발을 정돈할 제 도선봉에 김세영(金世榮), 좌선봉에 강창근(姜昌根), 중군에 유제칠(柳濟七), 참모에 엄해윤(嚴海潤), 영솔에 조수안(趙守安)이라. 남으로 울진 평해에서 북으로 희천, 강계까지 산과 물이 수천리 의로운 깃발은 일곱 도를 휘닫고 마흔 고을을 누비었다. 충청도 탄금대에서 강원도 양양, 화천에서 경기도 포천, 영평에서 가는 곳마다 적을 물리치고 백성을 보살폈다.

 

  1908년 겨울 양평에서 흉탄을 맞고 적에게 잡히니 고을 사람들이 선생의 덕을 우러러 비를 세우고 관가에 진정하여 감형을 받았다. 옥살이 10년에 품은 서슬 한결 푸르러 옥을 나오자 의용단을 이끌어 해외 독립군을 후원하였으니 1922년 12월에 다시 갇혀 5년이라. 왜정의 모진 손톱에 젊음을 앗기고 빼골도 지쳤다. 1932년 1월 15일 고향 본댁에서 깊이 잠드니 한많은 임의 삶이 예순 아홉 살이다.

 

  푸르런 동해 물결 임의 뜻이요
  유유한 낙동가람 임의 넋이니
  받들고 우러러 겨레 위에 빛날 이름
  천추만대 아들딸이 등불삼아 모시리니
  임은 길이 길이 여기에 계시어
  백성을 이끄시고 바른 길을 밝히여
  한결같이 이 나라를 지켜 오리다.
  서라벌 푸른 별을 가슴에 안고
  태백의 매운기상 등에 업고서
  이곳에 임의 뜻을 높이 새긴다.
  붓을 들어 선비요 칼을 들어 장군이라
 

 

                                        서기 1968년 10월 1일
                                              정휘창 글을 짓고
                                              이범석 앞을 쓰고
                                              송석희 뒤를 쓰고
  정부의 보조와 일반의 성금으로 신태식선생 기념사업회에서 세우다.
 

 

 

  23. 의병대장 운강 이강년선생 기념비

  세상에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생명이로되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도 아낌없이 바치는 것이니 선비의 길이요, 우리 겨레의 빛나는 전통이다. 여기 조국을 위해 정의의 피를 뿌린 이가 계시니 그가 바로 효령대군 18대손 운강 이강년선생으로 부친은 기태공, 모친은 의령남씨며 술년 1858년 12월 30일 문경군 가은면 도태리에서 태어났고 용력이 절륜했으며 유학과 병서 등 문무를 겸전했다.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선생은 고향 문경에서 의거의 깃발을 높이 들고서 가산을 흩어 의병 수백명을 모으니 38세이었다. 이듬해 봄 의암 유인석대장 아래서 유격장이 되어 수안보의 왜적을 치고 조령에서도 적을 무찌르더니 형세가 불리하여 의암의 진이 요동으로 건너가므로 선생도 군사를 풀고 잠시 요동으로 나갔다 돌아와 영호남 지사들과 의리를 토론하며 때를 기다렸었다.

  그뒤 을사조약으로 국운이 기울어지자 다시 일어나 김상태, 백남규 등과 함께 청풍, 단양에서 항전했었고 정미년에 군대가 해산되자 40여진이 제천에 모여 도창의대장에 추대되고 도체찰사의 밀지도 내렸으며 탁월한 전술로 갈평, 죽령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무신년 2월 민긍호대장이 체포되자 강원도로 나가 백담사, 강릉, 양양 등 영동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안동, 내성 등지의 전투에서 용맹이 전국에 떨치더니 6월 4일 청풍, 작성전투에서 왼발 복사뼈를 상해 사로잡혀 서울의 옥중에서도 추상같이 적을 꾸짖고 의병항쟁 13년만인 무신 1908년 9월 19일 교수형으로 큰 별이 떨어지니 향년 51세이었고 해방후 우리 정부에서는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추서하고 박정희대통령 특별분부로 승전한 유적지를 정화하여 선생의 의혼을 위로하고 높으신 공로를 표창하였다.

 

  열세 해 일편단심 나라 구하려 싸우셨고
  마지막 조국의 제단에 피를 뿌리신 이여
  그 정신 겨레의 가슴마다 깊이 새기오리다

       1979년 3.1독립선언 60돌에

       노산 이은상 글, 우송 이상복 씀 

 

  24. 義士李東下先生紀念碑

  1856년 10월 4일 동로면 명전리에서 태어나니 본이름은 淨來요, 자는 景天이라. 대대로 명망높은 인물을 배출한 경주이씨 광성군 극심의 후손이요, 선비인 병일의 아들로서 뒤에 삼종숙 병0에게 출계하였다. 총명하고 곧은 성품과 자질은 어릴 때부터 출중하여 모든 이의 촉망을 받았으며 글을 익혀 벼슬에 나아가니 참봉이라. 때에 간악한 무리가 국정을 농단하여 도적에게 나라를 팔고 벼슬에 눈이 멀었던 세월에 초야에서 떨쳐 일어나 적과 싸우다가 나라 위해 죽은 이가 있으니 운강 이강년 의진의 참모장이요, 군자장이며 항일결사 민단조합의 창시자인 선생이시다.

  선비의 한조각 붉은 마음이 기우는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붓 대신 칼을 잡고 의로운 깃발을 높이 세우니 때는 1896년 1월 농암장터였다. 그날부터 12년을 강원, 경상, 충청, 경기의 20개군 산하를 누비면서 무수한 적의 무리를 무찔렀으니 운강 의진의 빛나는 전과들은 선생의 주도면밀한 설복비계에 있었다. 1908년 6월 4일 청풍 작성전투에서 패하여 주장은 총상으로 적에게 잡히고 의진이 무너짐에 선생은 동지를 규합하여 만주땅 간도로 망명, 그곳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다가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띠고 1914년 9월에 고향으로 잠입, 과거의 의병전우와 동지를 모아 민단조합을 창시하고 활약타가 1916년 일경에게 잡히어 청주감옥에 수감당하니 뼈가 부서지는 고문에도 오직 한마디 백성된 도리를 했다는 대답이 전부였으며, 적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단식으로 항거한 지 17일만에 의식불명 상태가 되므로 적들은 부득이 석방하였다. 들것에 실려 고향으로 오는 길에 옛집을 바라보는 소구리재에서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한 한을 안은 채 눈을 감았으니 1919년 6월 1일이었다.

 

  선비의 매운마음 충의에 죽으니
  마침내 조국은 광복을 찾았네.
  죽고 삶을 오직 나라 위해 받쳤으니
  하늘과 땅 사이에 부끄럼 없도다.
  이 한 조각 돌이야 비바람에 깎일지라도
  임의 장하신 자취는 영원하리라
   

 

                                                            서기 1989년 6월 1일
                                                    東陽 申東澈 삼가 글을 짓고
                                                 安東 金晋東 삼가 글씨를 쓰고
                                           이동하선생기념사업회에서 세우다.
 

 

 

  25. 義兵左翼將穎陽千普洛紀績碑銘幷序(의병좌익장영양천보락기적비명병서)

  나라가 어려우면 나무 아래서 글 읽던 선비가 붓을 던지고 창을 잡아 의를 받들고 적을 토벌하여 위급한 날에 종사를 구하고저 끓는 물, 타는 불속에라도 뛰어들어 그 한몸을 돌보지 않는 이의 수가 하나가 아니로되 穎陽千公이 그 중의 한분이다. 살펴보건데 공의 이름은 보락이요, 자는 선경(善慶)이며 음직으로 참봉을 하였으니 화산군(花山君) 이름 만리(萬里)의 12세손이다.

  철종임자(哲宗壬子:1852) 9월 15일에 관음리 집에서 출생하니 자질이 영특하고 센 힘은 사람들을 능가하였다. 을미(乙未:1895)년 운강선생(雲崗先生) 이공(李公) 강년(康秊)이 농암에서 창의를 함에 그 의군에 같이 참가하여 고모산성에서 적을 쳤으나 불리함에 운강옹을 따라 제천으로 가서 의암선생유공의 막하에 선봉장이 되어 새재에서 적을 막다가 몇 달 뒤에 의병이 흩어지고 병신(丙申:1896)에 유옹(柳翁)은 서쪽으로 만주땅에 들어가고 공은 산중에 숨어서 적의 정세를 살피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 12년 뒤인 정미(丁未:1907)년에 운강선생이 다시 의로운 군사를 제천에서 일으킴에 좌익장이 되어 남쪽을 치고 북쪽을 토벌할 때에 수십차례의 전투에서 베고 얻음이 헤아릴 수 없었으며 패배한 일 또한 많았다. 무신(戊申:1908) 6월에 청풍 백석동에 이르러 운강옹이 탄환을 맞고 잡히어 9월에 경성감옥에서 순국하고 큰아들 승재도 또한 길 위에서 짐살 당하니 철천의 한을 머금고 행장을 꾸려 만주땅으로 건너간 다음해에 나라도 따라서 망했도다.

  아아… 슬프구나, 36년만인 을유(乙酉:1945) 7월에 광복이 되고 그 뒤 45년만인 경오(庚午:1990) 8월에 보훈처로부터 선열을 포상하니 건국훈장애국장이 주어졌다. 재종손 한봉(漢鳳)이 일가들과 수의하여 기적비를 고향마을 길위에 세우기로 하고 종증손 기성, 기원이 나를 집으로 찾아와 새길 글을 청하니 정성스러움에 감동하여 늙었다고 거절치 못하고 전후실적을 간략하게 쓰고 이어서 써 새겨 이르나니,

 

 선비의 원기는 인륜과 강상에 독실함이다.
 어진 조정이 배양하여 예의 바른 동쪽나라인데
 나라 운수가 비색하니 섬 오랑캐가 침략하여
 대궐에 들어와 황후를 시해하고 황제를 협박하여 조약을 이루니
 산과 물에는 비바람이 치고 피는 팔도를 물들였다.
 운강옹과 의지하여 의를 집고 격문을 띠우고
 단을 모아 모여서 맹세하니 여러 군사가 춤추며 뛰어올 때
 공께서도 그 의려에 참가하여 좌익장이 되어
 죽음을 맹서하고 앞으로 몰아 달려 남쪽을 치고 북쪽을 토벌할적에
 비는 옷 갓을 적시고 산골짜기에서 이슬 맞으며 잦도다.
 외로운 군사는 목숨을 다해 베이고 잡은 것은 많기도 하였다.
 운수인 것을 어찌하리 별은 경성감옥에 떨어졌다.
 한을 머금고 만주땅에 건너가니 마침내 사옥에 이르렀다.
 선열로 포상받아 비를 세워 기적하니
 갈평의 양지요 대미산의 기슭이다.
 영결한 이름 세상에 남아 있으니 돌은 더불어 갈라지지 못하리라.

                                             광복후 45년 경오 4월 하한
                                                         진성 이원영 근찬
                                                         평산 신   강 근서
                                                                신동철 번역

        <p> </p>

  26. 愛國志士海州崔公追慕碑銘幷序

  공의 휘는 ( )이요, 자는 진옥이며 호는 춘해요, 본관은 해주니 고려태사 문헌공 최충선생의 28세손이다. 철종 병진(1856) 12월 8일 문경 호서남면 영신리에서 운포 택헌의 장남으로 탄생하니 신체가 건장하고 성품이 강직하며 지모가 뛰어났다. 어릴 때부터 한학을 열심히 공부하여 효제사상이 특출하였고 역학과 병서에도 조예가 깊어서 세상에서 우러럼을 받았다.

  대한제국의 말엽에 열강의 세력다툼으로 국정이 문란하여 고종은 친일파의 갑신(1884)정변 뒤에 왜적의 위협을 받아 종사의 운명이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을미년(1895)에 왜적이 조선침략의 야욕으로 친일파들과 음모하여 국권을 농락하면서 배일친로의 이유를 붙여 국모를 시해하므로서 전국민이 분노하는 가운데 병신년(1896) 정월에 운강 이강년선생이 항일의 의병을 일으키니 공이 분연히 일어나 운강과 내통하여 동지의 의를 맺고 왜적토멸에 적극 가담하여 의병모집 활동에 큰 공을 세웠다. 그로부터 이강년 병영에서 적을 치는데 앞장서서 고모산성에서 접전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산중으로 한때 피신하였다.

  그 뒤에 왜적들은 노일전쟁의 승리로 더욱 오만해져 고종을사(1905)에 왜적의 괴수 이등방문이 매국오역과 합세하여 고종을 협박해서 5조약을 이루어 병영을 해산하고 국권을 약탈하니 전국민의 분노는 폭발충천하였고, 혹은 절사하고 혹은 도해결사하여 역신암살과 국권회복에 활동하게 되었다. 이때에 단양산중에서 은밀히 활약하던 이운강대장은 왜적을 토벌할 계획을 세우고 흩어진 의병을 다시 규합하니 공은 신속히 운강을 도와 종사가 되어 영남, 영북, 영동, 영서 등지에서 대소접전 수십여차례에 혈전고투하면서 많은 왜적을 섬멸하였다.

  무신(1908) 6월 4일 운강은 적탄에 부상되어 왜놈에게 생포되니 의병의 사기는 떨어져서 각자가 피신하니 공은 비분의 한을 안고서 단신으로 충주 신당리에 은거하여 활동하던 중 그해 9월 19일 운강이 처형당했다는 비보를 듣고 비통함을 금할 수 없어 원수를 갚고 나라를 구하는데 더욱 몰두하면서 운강의 아들 승재, 긍재와 연락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에 승재마저 독살당하니 공은 천추의 한을 품고 고향에 돌아와 서당의 훈장으로 근근히 연명하였다. 경술년(1910) 8월에 한일합방이 되자 두문불출하였으며 그뒤에 고종이 죽자 음식을 전폐하고 통곡 3일 하였다. 특사를 감상하여 구국일념으로 초지일관하게 진력하다가 무진(1928) 10월 20일에 세상을 떠나셨다. 광복후 경오년(1990)에 보훈처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포상하니 증손 도식이 공의 약사를 가지고 비문을 청탁하니 그 의리에 감동되어 노폐를 불구하고 사행을 기록한 다음 이어서 명(銘)하여 이르니,

 

 한제국의 말엽에
 왜놈들이 나라를 도둑질할 때에
 대궐에 들어와 황후를 죽이니
 그밖에 재앙은 측량치 못할러라.
 선비는 나라의 기운이기에
 책을 덮고 창을 잡았다.
 의를 같이하여 도적을 칠 때에
 운강옹의 장막에 들렸네.
 역신과 왜놈들이 임금을 협박하여
 을사년에 조약을 이루웠으니
 병영의 전문에는 군사가 흩어지고
 대궐에는 달빛마저 검었도다.
 나라 구하기를 죽기로 맹서하고
 많은 힘을 도왔도다.
 남쪽으로 몰고 북쪽으로 치달여
 정찰하며 연락했다.
 대운이 기울어져
 별이 경성감옥에 떨어지니
 한을 머금고
 기산 영수의 한구비에 은거하였네.
 원수 갚을 한결같은 마음은
 죽음에 이르러도록 굽히지 못하였네.
 건국훈장 애족장 훈장을
 포상 받았도다.
 말씀을 새겨 돌을 세우니
 앙 정 앞 산기슭이로다.
 밝고 시원한 좌우에
 공경히 지난일을 고합니다

                             歲辛未(1991) 3월  일

                                  진성 이원영 근찬
                                    번역(명) 신동철
 

 

운강 창의일록 공백기간의 활동상

  운강선생의 창의일록은 1895년(乙未)부터 1899년(己亥)까지 적고, 다시 1907년(丁未)부터 1908년(戊申) 순국까지만 적고 있다. 그렇다면 운강 이강년선생은 8년이란 세월을 단양 산중에서만 허송했는지 그렇지 않으면 나라를 위하여 어떻게 활동을 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난 1986년 김의환 교수(일본 구주대학원 강사)가 일본의 고서점에서 찾아낸 운강 이강년대장이 다른 의병이나 애국적인 사족(士族)과 주고 받은 서한문은 37통에서 창의일록 공백기의 활동상이 나타났다.

  이 서한문은 세로 25㎝, 가로 20~50㎝의 한지에 붓글씨로 쓴 것이다. 김교수가 1986년 일본의 한 고서점에서 찾아내 내용분석을 끝내고 내용을 공개한 이 서한들은 이강년선생이 1902년 고종을 비밀리에 배알하고 친일파를 배척하도록 건의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의병모집 방법과 군마를 모집하는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02년 8월 15일자의 한 편지에서는 이강년선생이 대내(大內:대궐)에 들어가 고종을 배알한 자리에서 “친일무뢰배가 국가예산 3,000냥을 낭비한데 대하여 소관부서인 내부(內部)로 하여금 혁파토록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편지의 내용을 볼 때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하기 시작될 무렵에 이강년선생은 고관들과 접촉하여 왕을 배알할 수 있었고, 악질적이고 친일적인 관료들의 부정행위를 제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7통의 서한중 국한문이 혼용돼 있는 서신이 한 통 있는데 이것은 이강년 선생이 단양 산중에 은거하면서 일제의 노골화된 침략야욕을 보고 재거의를 하기 위한 준비단계의 의병모집과 관련된 내용이어서 주목된다. 이 서한의 내용중에 「춘천 교중에서 통문을 가지고 2인이 왔사옵기로 신병도 있고 못가니…」로 시작되는 부분인데 이는 의병을 초모(招募)할 때 지방사족들의 동태를 잘 파악하고 있는 향교를 많이 이용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의병장의 창의소의 이름으로 의병을 시켜 향교에 통문을 내면 향교제임이 초모나온 의병을 안내해 대상 사족의 집을 찾아가 통문을 보이고 해당자를 지정된 장소로 모이게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불응하면 처단을 받게 된다.

  37통의 편지에는 홍종범, 김영옥, 윤원순, 김봉태, 장성진, 이정옥 등 20여명의 수신자 혹은 발신자의 이름을 보이고 이중에는 두세 번 편지를 교환한 사람도 있다. 이들 서한문이 일본으로 가게된 동기는 명확치 않으나 1908년 6월 4일 이강년선생이 청풍 작성전투에서 부상당하고 일본군에 체포될 때 일괄 압수된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이강년선생 자신의 서한문은 다른 소지자로부터 압수된 것으로 보이며 결국 이들 37통의 편지는 이강년선생이 재판을 받을 때 증거물로 제시돼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후에 재판에 관계했던 일본인 관리가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보여진다. 이들 서한은 1900년(庚子)부터 1903년(癸卯)에 걸친 것인데 운강 이강년선생의 창의일록의 공백을 메우는 중요한 자료이기에 여기에 수록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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