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후원 뇌다회(雷茶會) - 하나

2014. 5. 21. 21:30들꽃다회


창덕궁 후원 뇌다회(雷茶會) - 하나




   번개 모임(雷會) - 번개불에 콩볶아 먹듯이 모이는 모임. 

                          정보화사회에서 새로이 생긴 말......


   번개 모임에서 여는 차모임(茶會) ㅡ> 뇌다회(雷茶會)


   뇌다회(雷茶會) : 위키토피아에 없는 신조어임........



   - 20140516 : 516새벽한강도강(曉漢水越) 52주년 되는 날 오전 11시 모임......

                     53년 전 이 시간에 서울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창덕궁(昌德宮)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1405년(태종 5) 완공되었으며, 면적 43만 4877㎡이다.  

 

태종(太宗)이 즉위한 후 1404년(태종 4) 한성(漢城)의 향교동(鄕校洞)에  

이궁(離宮)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하고 창덕궁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계속 인정전(仁政殿)·선정전(宣政殿)·소덕전(昭德殿)·빈경당(賓慶堂) 

·여일전(麗日殿)·정월전(淨月殿)·옥화당(玉華堂) 등 많은 전당을 건립하였는데,  

1412년 돈화문(敦化門)을 건립하여 궁궐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궁전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1607년(선조 40)에 그 복구가 시작되어 1610년(광해군 2)에 중건이 거의 끝났으나,  

 

1623년 3월에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실화로

불탔으므로  1647년(인조 25)에야 그 복구가 완료되었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특히 1917년 대조전(大造殿)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소실되어  

 

그 복구를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交泰殿)을 비롯하여  

강녕전 동·서 행각 등의 많은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창덕궁은 많은 재앙을 입으면서도 여러 건물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왔는데,  

 

1912년부터는 후원인 금원(禁苑)과 아울러 인정전을

관람할 수 있게 하였고,  8·15광복 후에도 창덕궁과 금원을 공개하고 있다.  

 

창덕궁(昌德宮)은 금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 있어 가장 중요한 고궁의 하나이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자료출처:두산백과)






창덕궁 후원인 금원 禁苑에서.....





정조 때 지은 왕립도서관 격인 2층 누각인 주합루(宙合樓), 서향각(書香閣), 어수문(魚水門)


  주합루 宙合樓 : 단순하게 글자 뜻 그대로 직역하자면  책 많이 읽어서.....

즉 공부 열심히 해서 우주와 합일되는 사람이 되어라는 뜻이다.


나중에 동학에서 나온 인내천(人乃天) 사상도 원래부터 있던 말을 종교적으로 차용한 것이다.








눈길은 자연스럽게 색안경을 머리에 올려쓴 두 여인네에게 간다.....





주합루, 어수문과 영화당(暎花堂) ..... 그리고 부용지(芙蓉池)


- 어수문(魚水門) 좌우 화계에는 조릿대 생울타리로 만든 녹색병풍인 취병(翠屛)이....














부용정 남쪽 화계에 있는 괴석 받힘돌의 연꽃무늬와 구름무늬 - 괴석도 천상의 세계에서 논다.

괴석 받힘돌(石槨)을 괴는 북 모양으로 가공한 돌 네개에 눈길이 간다......


- 그럼 이 네개의 고임돌이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희랍 신화의 거인 타이탄의 어깨에 비유되는 것일까??








부용정 남쪽에 있는 음달의 화계에는 음지식물인 고사리들만......

처음에 연꽃을 의미하는 부용당(芙蓉堂)을 지었을 당시에도

이 화계에 고사리만 있었을까??


그렇다면 부용지에 비친 꽃 그림자를 보는 당우(堂宇)라는 

영화당의 이름이 무색하여 진다.







부용정, 연지 석가산인 봉래산, 주합루 일대


부용정은 연꽃을 의미하는 정자의 당호(堂號)이다.

여기서 연꽃은 진흙 속에서도 그 청정함을 잃지 않고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을 더해만 간다는  유교적 혹는 불교적인 의미로

 해석할 것인가 ??


봉래산(蓬萊山)이라는 이름은 중국에서 시작되어 왔다고 흔히들 알고 있는

중국의 도교(道敎)에서 따온 이름일까?


그럼 주합루, 부용정의 당호와 봉래산,그리고 동학의 인내천 사상도 

불교적, 도교적, 유학적,

그리고 선도적(仙道的)인

이름의 융합사상인 흔히 말하는 유불선(儒佛仙)사상의 건축영조법(建築營造法)과

그 기본틀에서 나온 것일까??








영화당 동북방 산기슭에 있는 별무늬 꽃담(星紋花垣 성문화원)은 

과거시험장인 춘당대(春塘臺)를 지나

효명세자의 거처인 규모가 매우 작고 소박한 민가를 궐내에 지은 의두합(倚斗閤)으로 

발길을 자연스레 유도하는 지표(指標)가 된다.


의두합은 북두칠성에 의지하는 집이라는 의미의 당호이다.

북두칠성에 의지함은 병약한 세자가 북두칠성 바로 아래에 있는

노루발자욱 새개가 나란히 찍혀있는 삼태성(三台星)에 의지한다는 뜻이다.

이 삼태성은 사람의 생명의 탄생과 보전.... 그리고 건강한 생활을 주관하는 별자리이다.


삼태성은 상태 , 중태, 하태의 세쌍의 별 -  여섯개로 구성되는 데, 

문창성(文昌星)에 가까운 두 별을 상태(上台)라고 하는 데,사람의 생명을 주관하는 사명(司命)이다.

다음 두별은 중태(中台)로 종실의 일을 맡아보는 사중(司中)이라는 벼슬아치이다.

가장 동쪽에 있는 두별은 하태(下台)라고 하며, 사록(司祿)이라는 벼슬아치로서

군사에 대한 일과 임금의 덕을 널리 비추어 어김이 없도록 한다. *1


삼태는 사람들의 귀천을 따지는 품계로도 해석하였는 데,

상태는 상계(上階), 중태는 중계(中階), 하태는 하계(下階)로 여겼다.

각각 상계의 윗별과 아랫별은 왕과 왕비, 중계의 윗별은 제후와 삼공, 아랫별은 경(卿)과 대부,

하계의 윗별은 선비, 아랫별은 일반 백성(庶民)을  의미한다.**2 


[ *1, **2 :세종 때 관상감 이순지 李純之의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과 

<천문류초(天文類抄)> 참조]



서양천문학에서도 이 삼태성을 아프리카 영양인 가젤의 발자욱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동서양천문학에서도 고대 문명교류의 흔적이 깊게 배어 있다.



네차례의 왜란과 호란의 외침(外侵)에 대한 패전에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되찾기 위하여

정조 때부터 강화된 왕권확립 정책들은 순조가 그의 아들인 

효명태자에게 3년간 대리청정을 시킴으로써 조정 권신(權臣)들과

외척들에게 왕실로의 권력이동에 대한 강한 경고의 의미와 함께 순조의 

약관(弱冠:18~22살)의 효명태자를 앞세운 왕권강화에 대한 실행의지를 강력하게 표명하는

정치적인 행사 즉 일종의 왕권 퍼포먼스로 재해석하여야 한다.








 의두합 건너편 길에 창경궁으로 통하는 영춘문(永春門)

    -  잦은 외침(外侵)의 겨울에서 영원한 화평의 봄을 맞이 하고픈 바램과

       효명세자의 거처인 의두합에서 동쪽의 창경궁으로 드나들 수 있는 실용적인 기능성과 함께


       세자를 맞이한다는 - 가까운 장래에 강화된 왕권을 확립한 새로운 왕(新王)을 맞이한다는 소망을

       영춘문(永春門)이라는 문이름에 담았다.






의두합의 정문인 금마문(金馬門)


  -  후원의 대문 역할인 부용지를 지나 금마문이란 곳으로 들어가면, 엄마 치마폭 뒤에 숨은 아이 같은 작은 건물이 나온다. '금마'는 왕세자를 일컫는 중국의 고어이다. 그곳의 단아하고 겸허해 보이는 기와집은 기오헌과 의두합이다. 여염집 사랑채 같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사색하며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다. 이 집의 주인은 총명하고 개혁적이었으나 22세에 요절하였다.  해설사는 "만약에 이분이 왕이 되었다면 우리나라 역사가 달리 풀렸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고 말한다. 







기오헌(奇傲軒)


  - 기오헌의 당우 이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倚南窓以寄傲      의남창이기오    
남쪽 창가에 기대어 마냥 의기 양양해하니
審容膝之易安      심용슬지이안    
무릎 하나 들일 만한 작은 집이지만 이 얼마나 편한가!!>

에서 따온 것이다.






歸去來辭 : 陶淵明
 
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旣自以心爲形役 奚惆悵而獨
悲悟已往之不諫 知來者之可追 實迷塗基未遠 覺今是而
昨非舟搖搖以輕 風飄飄而吹衣 問征夫以前路 恨晨光之熹微 
乃瞻衡宇 載欣在奔 僕歡迎 稚子候門 三徑就
荒 松菊猶存 携幼入室 有酒盈樽 引壺觴以自酌 眄庭柯以怡顔 
倚南 以寄傲 審容膝之安易 園日涉以成就 門雖
設而常關 策扶老以流憩 時矯首而游觀 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 景峠峠以將入 撫孤松而盤桓 歸去來兮
請息交以絶遊 世與我而相遺 復駕言兮焉求 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 農人告余以春及 將有事于西疇
或命巾車 惑棹孤酒 旣窈窕以尋壑 亦崎嶇而經丘 
木欣欣以向榮 泉涓涓而始流 善萬物之得時 感吾生之行休
已矣乎 寓形宇內復幾時 曷不委心任去留 胡爲乎遑遑欲何之 
富貴非吾願 帝鄕不可期 懷良辰以孤往
或植杖而耘 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 
聊乘化以歸盡 樂夫天命復奚疑

------------------------------------------------------------------------------------
-旣自以心爲形役: 이미 스스로 마음으로써 몸에 사역하다. 
-(추창): 슬퍼하고 근심하다
不諫: 고칠 수 없음
來者之可追: 장래의 일을 쫓아 바르게 행할 수 있다.
迷塗: 길을 미하다(잘못들다)
輕 (경양): 가볍게 날리다
征夫: 나그네
恨晨光之熹微: 새벽빛이 희미한 것이 한스럽다.(날이 활짝 밝으면 길을
서둘러 재촉하리라)
衡宇: 처마
眄庭柯以怡顔(면정가이이안): 정원의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얼굴에 기쁜
표정을 드러내다.
寄傲: 누구 두려울 것이 없이 태연한 자세로 있는 상태
審: 잘 알다
成就: 볼만한 전망을 이루고 있다.
策扶老以流憩: 지팡이로 늙은 몸을 붙들어 아무데서나 마음대로 쉬다.
岫(수): 산에 巖穴이 뚫려 있는 것
峠峠(예예): 저년 어스름
盤桓: 앞으로 전진하지 않고 한곳을 돌아다님
相遺: 서로 잊어버림
駕言: 수레에 말을 걸어서, 곧 수레를 타고
琴書: 군자의 좌우에 두어 즐기는 琴과 書
西疇(서주): 서쪽에 있는 밭
命巾車: 건으로 가린 수레를 타고
棹孤酒: 외로운 배를 젓다
窈窕: 구불구불 구부러져 속이 깊은 상태
經丘: 언덕을 지나다
木欣欣以向榮: 나무들은 흐드러지게 생기가 돋아 꽃이 피려하다.
涓涓: 샘이 솟아나는 모양
善: 즐기다
行休: 점점 갈수록 끝이 남음
已矣乎: 끝났구나
寓形宇內: 이 세상에 몸뚱이를 붙여두다
復幾時: 다시 몇 때나 되겠는가
委心任去留: 자신의 마음에 맡겨 가고 머무는 것을 세상에 순종함
<文選金賦>에 '委性命兮任去留'라 함. 去留는 死生과 成
敗, 興亡
胡爲乎遑遑欲何之: 어찌 황황히 어디를 가고자 하는가
帝鄕: 신선의 나라, 영원의 나라
期: 기약하다
懷良辰以孤往: 좋은 시절을 알아서 혼자서 가다.
耘 (운자): 밭에 김을 매고 흙을 북돋우다
舒嘯(서소): 천천히 숨을 내쉬고 소리를 길게 뽑아 노래하다
聊(료): 오로지
乘化以歸盡: 자연 현상의 변화에 맡겨 죽음으로 돌아감
樂夫天命復奚疑: 천명을 즐기면 그만이지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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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거래사(歸去來辭)
歸去來兮           귀거래혜     
, 돌아가자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旣自以心爲形役    기자이심위형역  
지금까지는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奚惆悵而獨悲        해추창이독비    
어찌 슬퍼하여 서러워만 할 것인가
悟已往之不諫       오이왕지불간   
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 없음을 깨달았다
知來者之可追       지래자지가추   
앞으로 바른 길을 좇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實迷塗其未遠       실미도기미원    
내가 인생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은 사실이나, 아직은 그리 멀지 않았다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이제는 깨달아 바른 길을 찾았고, 지난날의 벼슬살이가 그릇된 것이었음을 알았다
舟遙遙以輕        주요요이경양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흔들리고
風飄飄而吹衣       풍표표이취의    
바람은 한들한들 가볍게 흔들리고
問征夫以前路       문정부이전로  
길손에게 고향이 예서 얼마나 머냐 물어 보며
恨晨光之熹微       한신광지희미   
새벽빛이 희미한 것을 한스러워한다
乃瞻衡宇            내첨형우        
마침내 저 멀리 우리 집 대문과 처마가 보이자
載欣載奔            재흔재분        
기쁜 마음에 급히 뛰어갔다
僮僕歡迎            동복환영
머슴아이 길에 나와 나를 반기고       
稚子候門            치자후문   
어린 것들의 대문에서 손 흔들어 나를 맞는다    
三徑就荒            삼경취황        
뜰 안의 세 갈래 작은 길에는 잡초가 무성하지만
松菊猶存            송국유존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꿋꿋하다
携幼入室            휴유입실      
어린 놈 손 잡고 방에 들어오니
有酒盈樽            유주영준    
언제 빚었는지 항아리엔 향기로운 술이 가득
引壺觴以自酌      인호상이자작    
술단지 끌어당겨 나 스스로 잔에 따라 마시며
眄庭柯以怡顔      면정가이이안    
뜰의 나뭇가지 바라보며 웃음 짓는다
倚南窓以寄傲      의남창이기오    
남쪽 창가에 기대어 마냥 의기 양양해하니
審容膝之易安      심용슬지이안    
무릎 하나 들일 만한 작은 집이지만 이 얼마나 편한가
園日涉以成趣      원일섭이성취   
날마다 동산을 거닐며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門雖設而常關      문수설이상관    
문이야 달아 놓았지만 찾아오는 이 없어 항상 닫혀 있다
策扶老以流憩      책부노이류게    
지팡이에 늙은 몸 의지하며 발길 멎는 대로 쉬다가
時矯首而遐觀      시교수이하관    
때때로 머리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본다
雲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 나오고
鳥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날기에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올 줄 안다.
影翳翳以將入      영예예이장입    
저녁빛이 어두워지며 서산에 해가 지려 하는데
撫孤松而盤桓      무고송이반환    
나는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이고 있다
歸去來兮            귀거래혜        
돌아왔노라
請息交以絶遊      청식교이절유    
세상과 사귀지 않고 속세와 단절된 생활을 하겠다
世與我而相違      세여아이상위    
세상과 나는 서로 인연을 끊었으니
復駕言兮焉求      복가언혜언구   
다시 벼슬길에 올라 무엇을 구할 것이 있겠는가
悅親戚之情話      열친척지정화    
친척들과 정담을 나누며 즐거워하고
樂琴書以消憂      낙금서이소우    
거문고를 타고 책을 읽으며 시름을 달래련다
農人告余以春及   농인고여이춘급 
농부가 내게 찾아와 봄이 왔다고 일러 주니
將有事於西疇      장유사어서주   
앞으로는 서쪽 밭에 나가 밭을 갈련다
或命巾車            혹명건차       
혹은 장식한 수레를 부르고
或棹孤舟            혹도고주
혹은 한 척의 배를 저어   
旣窈窕以尋壑      기요조이심학  
깊은 골짜기의 시냇물을 찾아가고
亦崎嶇而經丘      역기구이경구
험한 산을 넘어 언덕을 지나가리라 
木欣欣以向榮      목흔흔이향영  
나무들은 즐거운 듯 생기있게 자라고
泉涓涓而始流      천연연이시류   
샘물은 졸졸 솟아 흐른다
善萬物之得時      선만물지득시   
만물이 때를 얻어 즐거워하는 것을 부러워하며
感吾生之行休      감오생지행휴   
나의 생이 머지 않았음을 느낀다
已矣乎               이의호      
아, 인제 모든 것이 끝이로다
寓形宇內復幾時    우형우내복기시 
이 몸이 세상에 남아 있을 날이 그 얼마이리
曷不委心任去留    갈불위심임거류 
어찌 마음을 대자연의 섭리에 맡기지 않으며
胡爲乎遑遑欲何之 호위호황황욕하지
이제 새삼 초조하고 황망스런 마음으로 무엇을 욕심낼 것인가
富貴非吾願          부귀비오원     
돈도 지위도 바라지 않고
帝鄕不可期          제향불가기     
죽어 신선이 사는 나라에 태어날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懷良辰以孤往       회양진이고왕  
좋은 때라 생각되면 혼자 거닐고
或植杖而耘耔       혹식장이운자
때로는 지팡이 세워 놓고 김을 매기도 한다
登東皐以舒嘯       등동고이서소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臨淸流而賦詩       임청류이부시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聊乘化以歸盡       요승화이귀진 
잠시 조화의 수레를 탔다가 이 생명 다하는 대로 돌아가니
樂夫天命復奚疑    낙부천명복해의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이랴









 ‘은일함의 큰 스승(千古隱逸之宗)’ 도연명(陶淵明)


    술을 즐겼던, 그리고 세속을 멀리하는 청류(淸流)와 전원(田園)의 

시풍(詩風)으로 유명했던 도연명(陶淵明)






의두합(倚斗閤)


-  작은 것은 큰 것을 품을 수 있다. 

아주 작기에 큰 것들을 품을 수 있다.***3

서산 간척지 옆의 조만 암자인 천장암(天藏庵)은

하늘이 열서너평되어 보일까말까 하는 제비집 형국이다.


여기 요사채에 반평짜리 선방(禪房)이 동쪽으로 문을 내고 있다.

앉을뱅이 경상(經床) 네 발 아래로 다리를 집어 넣으면

겨우 머리를 방바닥에 누일 수 있다.


조선조 말 충남 일대를 휩쓰고 간 전염병 때문에

온 동네에 개짓는 소리 조차 들리지 아니한 시골 마을에

까까머리의 청년 납자(納子)가 조용히 염(殮)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찾아온 곳이 이 제비바위 옆의 천장암 반평 선방(禪房).

이곳에서 그는 하늘을 감추는(天藏) 방도를 찾은 것이 아니라

하늘을 품는 방법을 깨쳤다.....

이 눈 푸른이는 경허선사(鏡虛禪師 ****4)라 이름한다.


빈거울이면 어떻고 꽉찬 거울이면 어떠랴??

그저 법호(法號)란 부르기 쉬우면 될 터인데.....

그의 제자 이월일공(二月一空) 세달(三月)도 이 반평 짜리 방에서

파안대소하며 웃고 나오셨다.

해월(慧月),수월(水月), 만공(滿空)대사를 이름함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이 작은 집의 아름다움은 왕실 주변의 이미 아름다운 것들에게

지극한 아름다움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장악원의 궁중음악에서 당악(唐樂)의 잔재를 정리하였고

궁중무용인 정재(呈才)들을 집대성하여 재편성하였다.



나중에 청일의 간섭 속에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는

이 용상에 앉아 보지도 못하고 2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효명태자에게 문조효명익황제(文祖曉明翼皇帝)라는 

제후국을 거느리는 황제 칭호의 시작을 추증하였다.

작은 집 의두합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 3. 아주 작기에  큰 것들을 품을 수 있다.


하늘은 북극성인 구진대성(句陳大星)을 중심으 하늘궁전인 자미원(紫微垣), 

하늘의 정부종합청사격 태미원(太微垣), 

하늘의 백성들이 살고 생산활동을 하는 천시원(天市垣 : 87星과 19座) 등으로 나누어진다.

별자리를 연결하는 긴 담(垣)으로 그 경계가 구분된다.

하늘궁전인 자미원(164星과 39座)과 하늘의 정부종합청사격으로 하늘의 제후들과 삼공(三公), 

상장군(上將軍)들이 모여서 하늘나라 국정회의를 주관하는 태미원(78星과 20座)에도 

작을 미(微)자가 들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오늘날 경제제일주의, 국부(國富) 제일주의의 자본주의의 기치 아래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이 작음(微)의 의미를 되새겨 보지 않으면 세상을 뛰어넘어 다닌다고 허세를 부리다가

 바닷물에 수장된 세월호(世越號)의 잘못을 바로잡기 어렵다.



******* 구진대성(句陳大星) : 지구 자전축인 북반구에서 보는 지금의 북극성을 의미하나

지구의 25,800년 주기의 세차운동으로 인한 영향으로 매 수100년 정도 단위로 

중심축에 해당하는 별이 바뀌어지나 동양천문학에서는 자전중심축에 해당되는

별을 그 시대에 맞추어 구진대성이라고 불러왔다.


구진대성(句陳大星)은 글자 그대로 갈구리 모양을 의미하는 북두칠성 옆에 있는

북극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高麗)의 진()의 줄임말이다. 

북방유목민들은 총령(蔥嶺: 파 蔥, 고개의 옛말 = 미르 : 파미르)고원에서

시작하여 기후변동으로 인한 사막화와 인구의 증가로 유목생활이 힘들어지자

동서남북 사방으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그중 동쪽으로 이동하던 부족들과 

북쪽으로 이동하다가  동장군의 맹위로 고위도 지방에서 동류(東流)하던 부족들은

나침반이 없었던 시절에 별자리를 기준으로 드넓은 초원과 사막들을 가로 질러

이동하였기 때문에 고래로 북방유목민들인 동이족(東夷族)들에게는

천문학이 발달하였다. 반면에 남쪽의 농경지대에 정착한 농사를 주로 하는

부족들에게는 농경에 필요한 기상학(氣象學)이 발달되었다.


농경 위주의 화하족(華河族)들이 세운 고대 중국의 각국에서는 그들의 부족한

천문지식을 보충하기 위하여 북방유목민인 동이족 출신의 관상감들을 아웃소오싱으로

기용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지구 자전의 중심축의 연장선 상에 있는 천구(天球)의

별을 구진대성으로 불려왔던 까닭이 있다. 

물론 동이족 출신의 부족들이 중국대륙을 지배한 기간이 

화하족(漢族)들이 중국대륙을 지배한 기간 보다 역사적으로 보면 훨씬 장기간이라는 점도 

무시 못할 정도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늘의 중심에는 고구려의 군사진영이 있으니, 

" 너그들 중국 민족들이 함부로 날뛰다가는 어찌 되는지 알지??" 

하는 무언의 동양천문학상 압력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옛땅의 회복이라는 다물정신(多勿精神)과 

한자말인 복본사상(復本思想)이 이미 중국황권의 상징이라는 옥황상제님이 사시는

하늘궁전인 자미원(紫微垣)의 중심인 북극성의 이름으로 대신하여 구진대성으로 대대로 전하여진다.


이를 모르고 있는 - 서양천문학 중심 교육만을 받은 세대들이 

이를 믿고 받아드리는 데에 다소간의 정신적인 혼란이 없었으면 좋겠다.





하늘 궁전의 중심인 자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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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경허(鏡虛, 1849년~1912년)대사 :

 

   경허스님은 빈 거울이라는 법호의 경허와 성우라는 법명이다.

 한국 근현대 불교를 개창했다는 대선사이다.

1849년 전주 자동리에서 태어났고, 9세 때, 경기도 과천 청계산 에 있는 청계사로 출가하였다. 속가의 이름은 송동욱(東旭)이고, 아버지는 송두옥(斗玉)이다. 어머니는 박씨이다.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이다.


    1879년 11월 15일[모호한 표현], 동학사 밑에 살고 있던 진사인, 이처사(李處士)의 한 마디,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 이 한마디를 전해듣고는, 바로 깨달았다. 콧구멍 없는 소(牛無鼻孔處: 우무비공처)는 중국 법안종의 종주 법안(法眼)선사의 어록에 실려 있는 선어다. 당시 경허의 시봉을 받들던 사미승 원규는 경허의 사제인 학명의 제자였고, 이처사는 사미승 원규의 속가 아버지였다.


   1880년 어머니와 속가 형님인 스님이 주지로 있던 연암산 천장암으로 거쳐를 옮긴다. 경허는 연암산 천장암의 작은 방에서 1년 반동안 치열한 참선을 한 끝에 확철대오하게 되고 "사방을 둘러 보아도 사람이 없구나"라고 시작하는 오도송을 짓는다. 천장암에서 경허의 '삼월(三月)'로 불리는 수월스님과 혜월스님과 만공스님이 출가하여 함께 수행하게 된다. 제자들과 함께 천장암에서 지내다가 개심사 부석사 간월암 등지를 다녀오기도 하였는 데 이 때 경허스님과 제자들 간의 많은 일화가 전한다.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保任)을 마치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


   한동안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돌연 환속하여 박난주(朴蘭州)라고 개명하였고,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함경도 갑산(甲山)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임종게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나이 64세, 법랍 56세이다. 저서에는 《경허집》이 있다.


   경허의 수제자로 흔히 '삼월(三月)'로 불리는 혜월(慧月, 1861년 - 1937년), 수월(水月, 1855년 - 1928년)·만공(滿空, 1871년 - 1946년) 선사가 있다. 경허는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고 했다. 삼월인 제자들도 모두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이들 역시 근현대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승들이다.




  (천장암 전경)


   현재, '북송담 남진제'의 두 큰스님의 경우에, 송담스님은 경허(75대)-만공(76대)-전강(77대)-송담(78대)의 계보이고, 진제스님은 경허(75대)-혜월(76대)-운봉(77대)-향곡(78대)-진제(79대)의 계보이다.



경허가 장좌불와했던 한 평 남짓 작은 방 원성문(圓成門)이 그대로 남아 있고,

 원성문 앞에 2012년 경허 입멸 100주기를 맞아 경허탑이 조성되었다.

 (경허선사 열반 100주년기념탑)

 

 

무애(無碍)의 깨달음을 한 경허스님이 연암산 아랫길을 돌아 천장암 원성문에서 마침내 법을 이루었으리라. 

원성문 옆방에는 수월, 혜월, 만공 스님이 경허 선사를 시봉하며 머물렀던 방이 보였다.

 ( 경허스님이 머물렀던 반평 짜리 선방 禪房 )

                       

             - 사진 제공 : 충남도청 블로그 <동행> 도민리포터 자유새 님의 글 중에서




*******경허 문하의 세달 - 삼월(三月)은 위에서와 같이 수월(水月), 혜월(慧月), 

그리고 보름달을 뜻하는 만공(滿空)이다. 

   만공은 만주으로 가신 두 사형(師兄)들의 뒷바라지 위하여 스스로 산수갑산으로 들어가  

비승비속(非僧非俗)으로 사실 만큼 이 세달(三月)의 사형제 간의 우애는 각별하였다.




운경거(韻磬居)로 추정되는 한평반 집.....

남쪽인 의두합 쪽으로 사분합 문을 내고, 동쪽으로는 이분합 문을....

아래 부분에 두개의 통풍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작은 우물마루(차 등을 준비하는 용도)를 

들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마루와 방은 약간의 높이상 단차를 두어 격을 달리했을 듯....


북쪽의 연경당 쪽에 있는 이분합 창문(문 아래에 있는 머름대로 문과 창문을 구분함)

아래에도 3개의 통풍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우물마루를 들인 듯 하다....

겨울에도 추운 곳에서 공부를 하여야 잠을 쫒을 수 있을 듯....

난방기구는 방안에 들여놓는 화로 정도로 보인다.













                  의두합 권역의 경내에서.....












                   한돌로 만들어진 불로문(不老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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