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전쟁] 1848년 혁명과 은행 산업 구제 프로젝트 / 화폐전쟁 제2부

2014. 6. 22. 18:46우리 이웃의 역사






       


[화폐전쟁] 1848년 혁명과 은행 산업 구제 프로젝트  화폐전쟁 제2부 

2013/06/02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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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0년 전후는 세계 근대사의 일대 전환점이 된 시기로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유럽 대륙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프랑스와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경제 발전은 이로 인해 완전히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

 

  산업화 진행과정은 광산, 방직, 기계, 철도, 기선 분야 등의 산업을 폭발적으로 발전시켰다. 이에 따라 대량의 산업자산 계급의 승자가 생겨났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더욱 많은 수의 패자들 역시 양산해냈다. 그들은 바로 토지상실로 인해 도시로 유입되었던 완전 빈털터리의 농민을 비롯해 극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해야 했던 노동자, 실업에 직면한 수공업자 및 도시빈민 계층들이었다. 이중 산업혁명의 승자들은 봉건 전제 역량이 날로 쇠약해지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권력이 날로 커져가는 경제적 권력에 상응하지 못하는 데에 불만이 높았다. 따라서 통치자들에게 보다 많은 권력을 요구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에 반해 산업혁명의 패배자들은 더욱 비참한 현실에 대한 원한을 키워만 갔다. 사실 이런 원한은 하루 이틀 사이에 쌓인 것이 아니었다. 지난 1,000여 년에 걸친 종교 및 사회적 멸시에 대한 유대인들의 저항은 특히 심했다. 강력하고도 선동적인 색채가 농후했던 이들은 급기야 몇몇 의제에서 완벽히 의견일치를 보았다. 완전히 평등한 공민 권력과 폭력 혁명에 대한 기대를 적극적으로 갖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번영을 향해 치닫는 산업화라는 상징 아래에서 갑작스런 폭풍의 도래가 점점 현실로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1845년부터 1847년까지 3년 동안 유럽의 수많은 국가에서 자연재해마저 발생했다. 거의 전 유럽에서 대기근이 일어났다. 흉작은 식량의 급속한 가격팽창으로 이어졌고 농산물판매는 자연스럽게 떨어져 농업신용규모의 축소를 야기하고 취업 기회마저 박탈했다.

 

   산업분야 역시 1840년부터 정체에 빠졌고, 특히 철도건설 분야는 성장동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산업신용 역시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두 방면의 힘이 위축되면서 결국 1848년 유럽 대부분 지역은 경제불황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이후 형성된 안정 국면은 경제 위축이라는 거대한 압력에 의해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게 되었다.

 


* 나폴레옹 전쟁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가 나폴레옹 1세의 지휘 하에 유럽의 여러 나라와 싸운 전쟁의 총칭

 

  유럽 각 지역의 자본 시장에 보편적으로 나타난 자금결핍 현상을 자세하게 관찰한 아브라함 오펜하임은 중대한 위기가 곧 도래할 것을 예감했다.

 

  1848년 2월, 프랑스 파리의 주식시장이 대폭락하면서 그동안 무르익어가던 혁명의 기운이 드디어 폭발했다. 평민들의 원한과 자산계급의 탈권(奪權)의 충동 역시 사회 곳곳에 쌓인 불만의 화산이 맹렬한 기세로 터지도록 자극했다. 2월 26일 프랑스의 풀드 가가 오펜하임 가에 보내온 소식에 따르면 혁명은 거의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다.

 

  제2공화국도 순조롭게 출범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전혀 새로운 소식이 오펜하임 가에 전해졌다. 상황이 완전히 변했을 뿐 아니라 변수가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3월에는 프랑스 혁명의 파도가 쾰른에도 충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혁명 세력들이 아브라함 오펜하임에게 자신들의 대표를 맡아 정부와 담판을 짓도록 요구했다. 아브라함은 생각할 것도 없이 즉각 거절했다. 사실 혁명 세력이 오펜하임 가에 이런 요구를 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혁명 세력과의 관계가 보통이 아니었던 탓이다. 관계의 끈을 긴밀하게 맺은 사람은 바로 아브라함의 셋째 동생인 다고베르트(Dagobert) 오펜하임이었다. 일찍이 그는 직접 혁명에 투신하여 자금을 대는 역할을 했다. 특히 그는 마르크스 대학을 졸업한 후인 1842년 여름에 자신이 자금을 댄 혁명 세력의 기관지인 〈라이니셔 자이퉁(Rheiniscer Zeitung)〉의 편집국장에 취임하고 프로이센 정부를 맹공격하기도 했다.

 

  쾰른의 상황은 풀드 가가 염려한 대로 급속도로 나빠졌다. 무엇보다 부동산 시장이 붕괴했다. 대표적으로 샤프하우젠 은행이 과도하게 부동산에 투자를 한 탓에 지불 위기를 겪게 됐다. 그나마 오펜하임 가는 부동산에 크게 투자를 하지 않았다. 국제 은행 가문의 전통으로 볼 때, 유동성에 문제가 있는 자산에 투자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기 때문에 부동산 투자에 나서지 않는 것을 거의 철칙으로 여겼다.

 

  3월 29일, 샤프하우젠 은행은 170개의 거래처와 4만여 명의 노동자 고객들에 대한 지불 정지를 단행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조치에 놀란 고객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돈을 찾으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샤프하우젠 은행은 도무지 지불할 방법이 없어 생존 위기에 내몰렸다. 그러나 샤프하우젠은 망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이른바 대마불사의 은행이었다. 만약 샤프하우젠이 무너진다면 라인 주 전체의 은행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경우 샤프하우젠 은행과 긴밀한 거래 관계에 있던 오펜하임 가 역시 안전을 장담하기 어려웠다. 특히 오펜하임 가가 자금을 댄 쾰른 - 뮌덴(Munden) 철도는 당장 50만 탈러의 현금이 필요했고, 샤프하우젠 은행 역시 갑작스레 닥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비슷한 금액의 자금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오펜하임 가의 철도 사업을 총괄하던 아브라함의 동생 시몬은 당시의 상황을 4월 3일 형에게 편지로 알렸다.

 

 “나는 형님의 능력을 하늘처럼 믿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정부 측으로부터 최소한 50만 탈러를 융자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한은 1년이나 그 이상으로 길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건 약과였다. 편지를 보낸 3일 후 시몬은 더욱 좋지 않은 소식을 아브라함에게 전했다.

 

  “친애하는 아브라함 형님, 오늘 쾰른 - 뮌덴 철도는 다시 3,000탈러를 낭비했습니다. 다고베르트 쪽 사람들은 내일은 보다 많은 돈을 써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몬은 4월 10일까지 형 아브라함으로부터 기다리던 소식을 듣지 못하자 급해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상황은 아주 특수합니다. 한스만(프로이센의 재무장관)으로부터 반드시 양보를 받아내야 합니다. 우리는 라인 주 최대의 은행입니다. 아직까지 영업을 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은행입니다. (우리를 구제하는 것은) 정부의 이익에도 부합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 같은 은행을 보호하는 데 동의한다면 그건 대단히 현명한 선택입니다.”

 

  4월 11일 시몬은 다시 재촉하는 편지를 보냈다.

 

  “전능하신 주께서 우리들을 보우하사 우리가 희망했던 결과가 어제 이미 나왔으리라 기대합니다. 한스만이 우리에게 50만 탈러를 제공하는 결정을 이미 내렸을 것이라고 희망하는 바입니다. 친애하는 아브라함 형님, 매일 저녁 편안하게 주무시려면 우리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돈을 반드시 얻어야 합니다.”

 

  아브라함 역시 몸이 달 대로 단 시몬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생의 편지를 받기 전인 4월 1일에 직접 베를린으로 달려가 친구인 한스만에게 50만 탈러의 정부 신용 자금을 샤프하우젠 은행에 제공하도록 요청하는 신속함을 보였다. 그는 이때 자신들의 부동산과 주식을 담보로 제공했다. 샤프하우젠을 지원하는 것이 자신들을 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이는 당연한 조치였다.

 

  반복 협상의 결과는 2주 후에 나왔다. 다행히 한스만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채권자 측과 은행 간의 타협이 필요하다는 결정을 최종적으로 내렸다. 그는 즉각 베를린 정부에 구제 금융 지급을 요구했다. 그러나 베를린 정부는 한스만의 생각과 달리 가능하면 구제 금융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아브라함으로서는 이때 배수의 진을 치고 베를린 정부를 협박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은행을 구제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절대로 개별 은행의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간단한 게 아니라 혁명을 저지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달린 중대한 문제입니다. 프로이센 정부의 생사 존망과 관련된 중요한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만약 은행 신용이 회복되지 않으면 현재의 사회 질서는 붕괴하고 말 것입니다.”

 

  프로이센 정부는 그의 말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즉각 위기협조위원회를 설립하고 샤프하우젠 은행을 살릴 수 있는 방안을 공동으로 논의하는 행보에 나섰다. 베를린 정부에서는 한스만, 금융계 쪽에서는 아브라함이 나서 이 위원회를 주도했다. 양측은 곧 샤프하우젠 은행을 주식제 형태의 은행으로 전환시키는 합의에 도달했다. 이렇게 해서 프로이센 역사상 최초로 주식제 형태의 은행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 자유파와 아브라함이 1830년부터 계속 정부에게 실시하도록 요구한 금융 개혁 정책의 일부분이었다.

 

  아브라함은 정부에 대한 압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적시에 금융 위기를 구제하지 않을 경우 라인 주가 프로이센을 탈퇴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거론하며 협박하는 강경함까지 보였다. 한마디로 은행에 대한 구제는 국가 주권과 관련한 일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강조한 것이다. 그의 이 전략은 사회적 혼란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려고 했던 프로이센 정부에게 치명적인 한 방을 먹였다. 결국 그와 한스만 등이 견지한 ‘정치 안정의 전제는 금융 안정’ 이라는 전략적 관점은 확실하게 우위를 점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아브라함과 한스만 등이 오래전부터 견지해온 전략이기도 했다. 그들의 목표는 다름 아닌 금융과 정치 영역에서의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다. 그들은 꿈에도 그리던 이 목표를 사회 동요와 정치 혼란을 빌려 드디어 실현했다.

 

  5월 초 오펜하임 가는 프로이센 정부로부터 50만 탈러의 구제 금융을 받았다. 프로이센의 금융 시스템은 바로 이때부터 중대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이 역사를 요즘 발생한 금융 위기 및 미국 정부의 구제 금융 조치 등과 대비해 살펴볼 수 있다. 이 경우 시대와 명칭만 조금 바꾸면 〈월스트리트 저널〉의 헤드라인 기사를 작성할 수 있다. 제목은 바로 ‘은행 구제와 금융 개혁 : 재무장관과 은행가, 일치된 목표를 달성하다’ 가 되지 않을까.

 

  인성은 역사에서 계속 되풀이되고 반복되는 법이다. 이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 출처 : 화폐전쟁 2 : 금권천하(랜덤하우스코리아), 쑹홍빙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