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3대 의서로 세계기록유산의 가치가 있는 "의방유취"의 재조명

2014. 7. 24. 14:49건강 이야기






       


조선 3대 의서로 세계기록유산의 가치가 있는 "의방유취"의 재조명  한국 한의학,한의대,한의사

2014/06/13 01:43

복사http://blog.naver.com/eomkidong/220028751553

전용뷰어 보기

조선 3대 의서로 세계기록유산 가치가 있는

"의방유취"의 재조명

 

 

"의방유취(醫方類聚)"를 통해 본 한의학(韓醫學) 전통지식(傳統知識)의

가치(價値)와 미래(未來)’를 주제로 한 한국의사학회 정기학술대회에서

안상우 한국한의학연구원(KIOM) 책임 연구원이 ‘의방유취(醫方類聚),

연구(硏究)의 필요성과 역사적 가치’로 기조(基調) 발표를 했다. 

 

◈「의방유취(醫方類聚)」는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동의보감(東醫寶鑑)」과 함께 ‘

조선(朝鮮)의 3대(大) 의서(醫書)’로 불리며 우리 민족의학(民族醫學)의

독자적(獨自的)인 흐름을 이어간 주요(主要)힌 의서이며 허준(許浚)

「동의보감」을 편찬(編纂)할 때 주요 참고문헌으로 활용됐다

 

안상우 책임연구원은 “의방유취(醫方類聚)는 분량만으로도 전대미문의

365권이라는 대형 의학백과 전서(全書)”라며 “현존하는 의서(醫書) 중에

가장 실질적인 내용(內用)을 담고 있는 건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과

의방유취(醫方類聚)라고 말할 수 있는 데,

 

특히 의방유취(醫方類聚)는 세종 때 향약(鄕藥) 개발 정책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단순히 의가들의 경험을 모은 것이 아닌 집현전(集賢殿)

최고 수준의 학자들이 모여서 학문적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자신만의 경험, 지식이나 술법이 아닌 논리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의학(醫學)을 체계적으로 교육(敎育)하고 보급(普及)하겠다는 생각에서

세종(世宗)시대에 시발점이 됐다는 점과 집현전에서 편찬(編纂)됐다는

사실이 의사학적(醫史學的)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여말선초(麗末鮮初= 고려말 과 조선초)의 낙백(落魄)한 문인 학자들이

왕조(王朝) 변천이라는 정치적인 격변기에 방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학자들을 실천적인 의학기술(醫學技術)을 정리하는데 투입함으로써

사회에 공헌(貢獻)할 수 있는 명분(名分)을 제공(提供)해준 셈이다.

 

또 젊은 신진(新進)사대부 (士大夫) 지식층을 의학 기술을 정리하는데

끌어들인 것이 굉장한 효과(效果)가 있었다.

 

그는 또 “동의보감(東醫寶鑑)이 정련된 의학이론의 체계를 구성했다면

그 원천과 데이터 베이스는 의방유취(醫方類聚)라고 할 수 있다”며

 

“의방유취(醫方類聚)는 현존(現存)하는 266권 모두가 구리활자로 되어

인쇄기술(印刷技術)이나 당대의 국력을 생각해보았을 때 심혈을 기울여

집중해서 만든 책이다”라고 밝혀 동의보감에 이어서 세계기록유산에

언젠가 등재(登載)하고 남을 가치(價値)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안상우 책임연구원은 “실록(實錄)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세종(世宗)이 '의방유취(醫方類聚)'를 편찬(編纂)하는 데 얼마나 애착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라며

 

“세조(世祖)가 등극(登極)한 후(後)에도 이 작업은 끊이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작업(作業)을 개시(開始)하는 전기(轉機)를 마련하면서 5년째에

전면개정(全面改訂)을 했다”고 발표(發表)했다. 

 

또 “눈길 가는 건 1445년에 편찬 완료했다는 기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조(世祖)는 의방유취(醫方類聚)를 다시 손을 댔으며 교정에 참여했던

학자 67명이 대거 해직(解職)이나, 파면(罷免)됐다는 점이다.

 

이유(理由)는 확실치 않지만 교정에 착오가 있지 않았나 추측한다”라며

“여러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1477년에 여러 임금이 바뀌고 나서야

비로소 활자(活字)로 가능하게 됐다”고 말했다. 

 

현재 의방유취(醫方類聚)는 국내(國內)에는 단 1책이 남아 있다.

대부분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일본(日本)으로 건너갔고 동의보감에

마지막으로 이용된 이후에 조선후기 의서(醫書)에는 사용되지 못했다.

 

안상우 책임연구원은

“의방유취(醫方類聚)가 임진왜란 이후 없어졌지만 근세(近世)에 들어서

대만(臺灣)에서도 간행됐고 한국에서도 동양의과대학 시절에 3000명의

필경사(筆耕士)를 동원해 일일이 붓으로 써서 간행한 적이 있다”라며

 

“한국의학(韓國醫學)의 자존심이라 생각해 여러차례 간행(刊行)됐으나

워낙 방대(厖大)하다보니 선배들도 그렇고 후배들도 참조를 잘 안하고

장서용(藏書用) 책으로 비치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는 “본격적인 연구는 이제부터 시작이라 하겠지만 많은 부분에 대해

발표자(發表者)가 선행(先行) 연구를 한 것을 시발점(始發點)으로 해서

새로 많이 부각(浮刻)되길 바란다”라며

 

“의방유취(醫方類聚)를 가지고 새로운 연구(硏究) 사업(事業)을 해야

한다는 분위기(雰圍氣)도 있고, 남북학술교류(南北學術交流)에도 좋은

계기(契機)가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덧붙여 “실제로 한의학연구원 직원 중 한명이 평양에 가서 학술교류를

할 때 북한(北韓) 학자가 의방유취(醫方類聚)에 대해 발표했다”라며

 

“1960년대 이후로 북한(北韓)에서는 의방유취(醫方類聚) 등 고유(固有)

한의학서(韓醫學書)를 중심(中心)으로 끊임없이 연구(硏究)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민족의학신문과 김춘호 기자님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이 정보에대한 궁금증은 하단에 있는 기자님의 메일주소로

직접 문의하시거나 또 다른 정보가 더 보고싶은 회원님은

민족의학신문 회사 로고를 클릭하세요.

 

민족의학신문 ; 김춘호 기자 ( what@mjmedi.com)

ⓒ 민족의학신문(http://www.mjmedi.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네이버 블로그 <의료인의 꿈을 현실로 안내하는 길잡이>  엄기동 님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