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유명 부대 (3) - 창공의 울부짖는 독수리들(하)
2014. 8. 12. 22:34ㆍ병법 이야기
공수부대의 무덤, 마켓가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이어 카랭탕 점령작전을 성공리에 이끈 101공수사단은 짧은 휴식을 마치고 역사상 전무후무할 최대규모의 공수작전에 투입된다. 훗날 연합국 최대실수 중 하나로 기록될 마켓가든 작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1944년 8월. 서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 주력부대가 팔레즈 골짜기에서 괴멸된 후 연합국 수뇌부는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조직적인 저항이 종식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실제로 독일군은 매일 30km가 넘는 땅을 연합국에게 잃고 있었으며 서부전선에 배치된 수비병력도 2선급 부대가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합국 수뇌부는 기상천외(?)한 작전을 구상하게 되었는데 연합국이 보유한 대규모 공수부대를 한꺼번에 투입해 한번에 독일까지의 진격로를 확보 하고자 하였다. 작전의 개요는 이랬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이어 카랭탕 점령작전을 성공리에 이끈 101공수사단은 짧은 휴식을 마치고 역사상 전무후무할 최대규모의 공수작전에 투입된다. 훗날 연합국 최대실수 중 하나로 기록될 마켓가든 작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1944년 8월. 서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 주력부대가 팔레즈 골짜기에서 괴멸된 후 연합국 수뇌부는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조직적인 저항이 종식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실제로 독일군은 매일 30km가 넘는 땅을 연합국에게 잃고 있었으며 서부전선에 배치된 수비병력도 2선급 부대가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합국 수뇌부는 기상천외(?)한 작전을 구상하게 되었는데 연합국이 보유한 대규모 공수부대를 한꺼번에 투입해 한번에 독일까지의 진격로를 확보 하고자 하였다. 작전의 개요는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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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ay 투입직전의 101공수사단부대원 (출처=위키미디어)
영국 제1공수사단 (Reddevils)과 미국 제82공수사단(All Americans), 제101 공수사단(Screaming Eagles)을 투입하여 네덜란드 아른헴, 네마겐, 아인트호벤 지역에 놓인 7개의 철교를 확보하고 독일군에게 혼란을 주는 사이 기갑부대가 주축인 제30군단이 69번 고속도로를 돌파하여 3개 공수사단이 확보한 철교를 지나 곧장 독일내륙으로 진격한다.
이 작전에서 대규모 공수부대의 집중투입을 강력히 주장한 사람은 영국군 원수 버나드 몽고메리였는데 사막의 여우로 불리던 독일군의 명장 롬멜 장군을 북아프리카의 엘 알라메인에서 격파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인물이었다. 얼핏 보면 그럴 듯 해 보이는 이 시도가 성공할 경우 연합군은 1944년 크리스마스는 집에서 보낼 수 있을 것 이라며 낙관적인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작전의 성공에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했다.
첫째, 방어중인 독일군이 전원 보병부대로, 동시에 노약자 등으로 구성된 2선급 부대일 것
둘째, 작전에 투입된 공수부대들이 ‘모두’ 제 시간에 임무를 완수할 것
셋째, 공수부대가 교량을 확보한 뒤 독일군이 반격을 하기 전에 30군단이 전선을 돌파하고 3개 지역의 교량을 모두 접수 할 것.
그러나 작전 실행일이 다가올 수록 현지 레지스탕스 및 첩보요원들은 불길한 소식을 전해오기 시작했다. 작전지역 전역에서 독일군이 증강 배치되기 시작했으며 더욱 불길하게도 독일 무장친위기갑사단(☞ 참조: 독일 무장친위대 보러가기) 소속 전차들이 곳곳에서 목격되었다는 것 이었다. 독일군이 연합국의 작전을 간파했다기 보다는 동부전선에서 격전을 치른 부대들이 재정비를 목적으로 서부전선으로 재배치되었던 것이었지만 그 타이밍이 실로 절묘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연합국 사령부는 이러한 불길한 첩보를 애써 무시하고 작전을 강행한다. 1944년 9월 17일 낮에 3만에 이르는 연합국 공수부대원들이 작전지역 상공에서 강하를 시작하였다. 강하 초반에는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제101 공수사단은 아인트호벤의 다리를 점거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네마겐을 맡은 제82공수사단과 아른헴을 맡은 영국 제1공수사단은 사정이 영 여의치 않았다. 제82공수사단은 이내 독일군의 반격을 받고 교착상태에 돌입하였으며 영국 제1공수사단의 사정은 더욱 여의치 않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마켓가든 작전은 완전한 실패였으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 번째 실패 요인, 방어전의 귀재라고 불리던 발터 모델 원수가 지휘하는 독일 제9, 10무장친위기갑사단 소속 전차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영국 제1공수사단이 점거하기로 되어있던 아른헴 지역은 이내 독일군의 전차들로 둘러 싸여 버렸고 전투는 일방적인 학살극으로 변해 갔다. 변변한 중화기를 보유하지 못한 공수부대원들은 독일 전차들의 주포가 불을 뿜을 때마다 많게는 수십 명씩 피를 뿌리며 쓰러져 갔다.
두 번째 실패 요인, 공수부대들과 랑데부하기로 되어 있었던 제30군단의 사정 역시 암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연합국의 기도를 완전히 파악한 독일군은 69번 고속도로인근에서 완강히 저항하였고 제30군단의 필사적인 공격도 계속 좌절되고 있었다. 랑데부 시간을 한참 지나서도 나타나기로 한 제30군단은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예정시간보다 36시간이나 늦게 네마겐에 도착 하였다.
세 번째 실패 요인, 제30군단은 결국 아른헴 대교 인근에서 공세종말점(攻勢終末點)에 도달하였고 미국 제82, 제101공수사단은 어렵게 확보한 다리를 뒤로 하고 철수를 시작했다. 하지만 아른헴 대교의 영국 제1공수사단은 퇴로를 뚫지 못하고 있었고 이들을 구하러 투입된 망명 폴란드 제1공수여단도 이들과 운명을 같이하였다.
작전개시 4일 째, 원래의 예상 작전 종료일로부터 하루 뒤인 9월21일. ‘우리가 보유한 마지막 탄약이 떨어졌다. 신이여 여왕을 보호하소서’라는 무전을 끝으로 영국 제1공수사단과 폴란드 제1공수여단은 문자 그대로 전멸하였고, 제82, 제101 공수사단 역시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작전개시 4일만에 투입병력 3만 5천 중 1만 8천여명이 전사, 행방불명, 포로 잡히면서 연합국은 공식적으로 마켓가든 작전의 종료를 선언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의 최대 실패로 기록되는 마켓가든 작전은 ‘실 하나로 구슬 7개를 단번에 꿰어야 하지만 조금만 늦거나 한 개만 실패해도 완전히 실패하는 작전’으로 평가될 만큼 무모한 작전 이었다. 제101공수사단은 지리상의 이점과 풍부한 실전 경험으로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였지만 결국은 몽고메리의 아집과 과욕의 실패작이었던 마켓가든 작전에 참가하여 큰 피해를 입는 불운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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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켓가든 작전 지역 지도 (출처=구글맵스)
NUTS!
마켓가든 작전 종료 이후 제101 공수사단은 전선에서 물러나 프랑스 인근의 지역에 배치되어 모처럼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 최후의 도박으로 일컬어 지던 이른바 발지전투가 개시되면서 아이러니하게 최전방에서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내게 된다. 히틀러는 독일의 모든 가용병력을 총동원하여 서부전선에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벌이기로 하고 독일본토 및 동부 전선에 배치된 병력을 싹싹 긁어 모아 서부전선에서의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독일 제9, 10 기갑사단이 주축이 된 이 대공세에서 별다른 경계없이 대치상대를 하고 있던 미군부대는 줄줄이 분쇄되었고 연합국의 수뇌부는 독일군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교통 요충지인 바스토뉴에 제101공수사단을 투입하여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낼 것을 지시했다.
1944년 12월 21일. 바스토뉴를 완전 포위한 독일군은 당시 제101공수사단장이었던 맥컬리프 준장에게 ‘귀관의 부대는 완전히 포위되었으니 명예롭게 항복하라’ 는 전문을 보냈다. 맥컬리프 준장은 이러한 독일군의 요구를 받고 <N U T S !! (엿이나 먹어라)> 라는 짧고 굵은 답신을 보내 101공수사단이 결코 호락호락한 부대가 아님을 과시 했다. 여담이지만 사단참모의 의견을 받아들여 알파벳 아래 밑줄까지 그어 정성스레(?) 답신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분노한 독일군 지휘관은 101공수사단을 괴멸시키기 위해 며칠 동안 박격포와 야포 공격을 퍼부으며 공격을 지속했지만 101공수 사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결국 바스토뉴를 사수. 한숨 돌린 연합군이 바스토뉴를 거점으로 독일군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는 숨통을 틔어주었다. 101공수사단의 분전으로 끝내 독일군은 바스토뉴를 점령하지 못했고, 흐렸던 날씨가 개자마자 압도적인 우위에 연합군 공군의 맹폭이 독일군의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독일군은 연합군을 네덜란드 방면으로 몰아붙이고 유리한 조건에서 강화를 맺겠다는 야무진(?) 꿈을 접어야만 했고, 모든 것을 걸었던 도박에서 패하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중심에는 바스토뉴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낸 미국 제 101공수사단이 있었다.
마켓가든 작전 종료 이후 제101 공수사단은 전선에서 물러나 프랑스 인근의 지역에 배치되어 모처럼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 최후의 도박으로 일컬어 지던 이른바 발지전투가 개시되면서 아이러니하게 최전방에서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내게 된다. 히틀러는 독일의 모든 가용병력을 총동원하여 서부전선에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벌이기로 하고 독일본토 및 동부 전선에 배치된 병력을 싹싹 긁어 모아 서부전선에서의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독일 제9, 10 기갑사단이 주축이 된 이 대공세에서 별다른 경계없이 대치상대를 하고 있던 미군부대는 줄줄이 분쇄되었고 연합국의 수뇌부는 독일군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교통 요충지인 바스토뉴에 제101공수사단을 투입하여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낼 것을 지시했다.
1944년 12월 21일. 바스토뉴를 완전 포위한 독일군은 당시 제101공수사단장이었던 맥컬리프 준장에게 ‘귀관의 부대는 완전히 포위되었으니 명예롭게 항복하라’ 는 전문을 보냈다. 맥컬리프 준장은 이러한 독일군의 요구를 받고 <N U T S !! (엿이나 먹어라)> 라는 짧고 굵은 답신을 보내 101공수사단이 결코 호락호락한 부대가 아님을 과시 했다. 여담이지만 사단참모의 의견을 받아들여 알파벳 아래 밑줄까지 그어 정성스레(?) 답신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분노한 독일군 지휘관은 101공수사단을 괴멸시키기 위해 며칠 동안 박격포와 야포 공격을 퍼부으며 공격을 지속했지만 101공수 사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결국 바스토뉴를 사수. 한숨 돌린 연합군이 바스토뉴를 거점으로 독일군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는 숨통을 틔어주었다. 101공수사단의 분전으로 끝내 독일군은 바스토뉴를 점령하지 못했고, 흐렸던 날씨가 개자마자 압도적인 우위에 연합군 공군의 맹폭이 독일군의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독일군은 연합군을 네덜란드 방면으로 몰아붙이고 유리한 조건에서 강화를 맺겠다는 야무진(?) 꿈을 접어야만 했고, 모든 것을 걸었던 도박에서 패하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중심에는 바스토뉴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낸 미국 제 101공수사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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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토뉴에서 공중보급을 받고 있는 미군 (출처=위키미디어)
공수사단에서 공중강습사단으로의 변화
발지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101공수사단은 이후 후방으로 돌려져 잠깐의 휴식을 취한 뒤 태평양 전역으로 투입될 예정이었으나,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 본국으로 귀환하게 된다. 101공수사단은 2차대전 기간 중 서부전선의 가장 치열한 전투에 투입되어 총 1,766명이 전사하였으며 6,388명이 부상을 입을 정도로 용맹한 활약을 펼쳤다.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미국은 대대적인 감군을 실시하였는데 101공수사단 역시 1045년 11월 30일 해체되었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재창설되었다. 이후 미국이 개입한 각종 국제 분쟁지역에 투입되며 유명세를 떨쳤다. 특히 베트남 전에서 이들의 활약상을 담은 영화인 「햄버거 힐」 (Hamburger Hill, 1987)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다시 한번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다.
베트남전 이후 101공수사단은 중대한 변화를 맞게 되는데 공중강습사단으로의 개편이 바로 그것이다. 본 글 전편에서 공수부대 (☞ 참조: 창공의 울부짖는 독수리들 (상) 편 보러가기)에 대해 잠시 언급한 대로 공수부대는 전술, 전략적 타격을 가하기 위해 적진 깊숙이 투입되는 부대로 작전지역의 특성상 막대한 희생이 강요되는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였다. 하지만 대규모 병력의 투입과 이에 따른 회전(會戰)이 특징적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소수 정예부대의 핀 포인트 (Pin-point) 타격 위주로 바뀌어 가면서 과거처럼 대규모 공수작전의 필요성이 점차 감소되었고, 이에 따라 미국은 기존방식의 공수부대 대신 기동타격이 가능한 공중강습부대의 필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헬리본 (Heliborne) 혹은 공중강습 (Air-assualt) 라고도 불리는 이 방식은 낙하산 대신에 헬리콥터라는 장비를 이용해 적진을 타격하는 방식으로, 중무장한 건-쉽(gun-ship)의 지원을 받는 대규모 수송헬기들에 병력을 탑승시키고 임무지역에 투입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아파치 헬기등 강력한 공격헬기의 압도적인 엄호사격 하에 완편된 상태로 적진에 투입되어 실시간으로 작전에 투입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은 걸프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공 작전 등의 실전을 겪으며 이러한 부대편제 방식이 주효하였음을 입증하였다.
앞서 서술한대로 장차전(將次戰)역시 국가간 대규모 전면전 보다는 소수 정예부대들 간의 국지전의 방식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일반 보병부대들의 숫자 보다는 소수 정예화된 전략기동부대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들도 이런 추세에 발맞추어 기동화된 부대의 육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제는 명실상부한 공중강습사단으로 다시 태어난 101사단 역시 미 육군의 주요 기동부대로써 그 소임을 다해 나갈 것이다.
세계의 유명 부대 시리즈
▶ 용서받지 못한 자들, 나치 친위대
▶ 상남자중의 상남자들, 프랑스 외인부대 (상)
▶ 상남자중의 상남자들, 프랑스 외인부대 (하)
▶ 창공의 울부짖는 독수리들(상)
[장효준]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발지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101공수사단은 이후 후방으로 돌려져 잠깐의 휴식을 취한 뒤 태평양 전역으로 투입될 예정이었으나,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 본국으로 귀환하게 된다. 101공수사단은 2차대전 기간 중 서부전선의 가장 치열한 전투에 투입되어 총 1,766명이 전사하였으며 6,388명이 부상을 입을 정도로 용맹한 활약을 펼쳤다.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미국은 대대적인 감군을 실시하였는데 101공수사단 역시 1045년 11월 30일 해체되었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재창설되었다. 이후 미국이 개입한 각종 국제 분쟁지역에 투입되며 유명세를 떨쳤다. 특히 베트남 전에서 이들의 활약상을 담은 영화인 「햄버거 힐」 (Hamburger Hill, 1987)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다시 한번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다.
베트남전 이후 101공수사단은 중대한 변화를 맞게 되는데 공중강습사단으로의 개편이 바로 그것이다. 본 글 전편에서 공수부대 (☞ 참조: 창공의 울부짖는 독수리들 (상) 편 보러가기)에 대해 잠시 언급한 대로 공수부대는 전술, 전략적 타격을 가하기 위해 적진 깊숙이 투입되는 부대로 작전지역의 특성상 막대한 희생이 강요되는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였다. 하지만 대규모 병력의 투입과 이에 따른 회전(會戰)이 특징적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소수 정예부대의 핀 포인트 (Pin-point) 타격 위주로 바뀌어 가면서 과거처럼 대규모 공수작전의 필요성이 점차 감소되었고, 이에 따라 미국은 기존방식의 공수부대 대신 기동타격이 가능한 공중강습부대의 필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헬리본 (Heliborne) 혹은 공중강습 (Air-assualt) 라고도 불리는 이 방식은 낙하산 대신에 헬리콥터라는 장비를 이용해 적진을 타격하는 방식으로, 중무장한 건-쉽(gun-ship)의 지원을 받는 대규모 수송헬기들에 병력을 탑승시키고 임무지역에 투입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아파치 헬기등 강력한 공격헬기의 압도적인 엄호사격 하에 완편된 상태로 적진에 투입되어 실시간으로 작전에 투입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은 걸프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공 작전 등의 실전을 겪으며 이러한 부대편제 방식이 주효하였음을 입증하였다.
앞서 서술한대로 장차전(將次戰)역시 국가간 대규모 전면전 보다는 소수 정예부대들 간의 국지전의 방식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일반 보병부대들의 숫자 보다는 소수 정예화된 전략기동부대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들도 이런 추세에 발맞추어 기동화된 부대의 육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제는 명실상부한 공중강습사단으로 다시 태어난 101사단 역시 미 육군의 주요 기동부대로써 그 소임을 다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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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서받지 못한 자들, 나치 친위대
▶ 상남자중의 상남자들, 프랑스 외인부대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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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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