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전의 왕자. 전차의 역사(상)

2014. 8. 12. 22:43병법 이야기





       

지상전의 왕자. 전차의 역사(상)
맛있는 MEALitary
밀리터리 상식 (1)
기사입력 2014.08.05 10:24:23  |  최종수정 2014.08.05 10:28:13



전차의 첫 등장 

   1916년 9월 15일 아침, 프랑스 솜 지역의 참호에 배치되어 있던 독일군들은 전방에서 갑자기들려 오는 영국군의 함성에 놀라 참호 바닥에서 뛰쳐나와 망원경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통상 짧게는 30분, 길게는 며칠 동안 준비 포격을 한 뒤에 공격을 시작하던 당시의 상식에 반하는 영국군의 돌격함성 소리에 당황하던 독일군은 이내 공포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돌격하는 영국군 사이사이 굉음을 내며 전진해오는 쇳덩어리들을 처음으로 대면하게 된 것이다. 독일군이 기관총탄을 미친 듯이 쏴대도 모두 튕겨내며 천천히 전진하는, 포화를 뿜는 쇳덩어리의 모습은 영락없는 ‘지상의 전함’ 이었고, 이 괴물의 등장에 기겁한 독일군들이 패닉상태로 패주하기 시작하면서 독일군의 전선이 무너져 내렸다. 이날 영국군은 8km x 2km의 지역을 전진하였고, 이는 지상전의 왕자, 전차의 첫 데뷔전이 되었다. 

   소총은 18세기 이래 대부분의 유럽국가에서 병사들의 제식무기로 채택되었으며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왔다. 18~ 19세기 초반 대부분의 유럽국가에서 표준화기로 사용했던 전장식 머스켓 소총은 분당 사격횟수가 1발이 될까 말까 했었고 그나마 명중률마저 형편없는 관계로 병사들이 집단대형을 이루어 일제 사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교전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병사 개개인의 사격술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고, 수 십, 수 백 명이 대형을 이루어 동시에 사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훈련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19세기말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후장식 소총(드라이제 니들건)이 처음 등장 하면서 전장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보병은 분당 30발이 넘는 속도로 사격을 가할 수 있었으며 강선형 총열의 도입으로 명중률 및 유효사거리 역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탄띠로 이어져 분당 300발 이상의 고속사격이 가능하게 만들어진 기관총 역시 등장하면서 전투의 양상은 과거와는 판이하게 달라지게 되었다. 보병 밀집대형은 살아있는 이동표적에 불과하였고, 기관총으로 잘 방어된 적 진지로의 착검돌격은 더 이상 용기와 패기에 찬 행동이 아닌 집단 자살행위가 되어버렸다. 기관총 1~2정이 6~700 명 규모의 한 개 대대를 몰살시키는 일이 비일비재 하게 벌어지자 연합국과 추축국 모두는 대서양에서부터 스위스에 이르기까지 수 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철조망과 참호를 구축하고 그 안에 틀어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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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에서 경계중인 영국군 (사진=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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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화기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전과를 확대하기 위한 현실적인 수단은 결국 보병들의 돌격 외에는 딱히 방법이 없었던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었다. 

   당시 참호전의 양상은 마치 공식과도 같았다. 짧게는 수십분 길게는 며칠동안 지속되는 준비 포격이 끝나면 압도적인 숫자의 공격부대가 장교들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돌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잘 은엄폐된 방어진지의 병력들은 엄청난 포화에도 어떻게든 살아 남기 마련이었고 공격부대가 양측이 설치한 철조망 사이의 무인지대를 넘어서자 마자 기관총과 박격포를 총 동원해서 화력을 쏟아 부었다. 

   결국 공격부대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패주하기 마련이었고 그러면 이번에는 방어하던 측에서 다시 역습을 가하고 역시 공격이 실패하기를 반복 하였다. 이러한 전투 양상때문에 불과 2~3km를 전진하는데 수 만~ 수 십만의 병사들이 죽어 나갔다. 혹자는 이를 두고 공격이 성공해봐야 확보한 땅에 전사자를 묻기도 모자라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이러한 무의미한 비극이 1차 대전 기간 내내 지속되었고, 결국 도저히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것을 연합국과 추축국 지휘부가 깨닫게 되는 데는 2년이라는 시간과 3백 만명의 희생이 필요했다. 


야심찬 결전병기의 암호명은 수세식 변기(?) 

   이러한 지루한 참호전을 타개할 묘안을 강구한 것은 영국의 종군기자인 어네스트 스윈튼 소령이었다. 농촌에서 흔히 쓰던 트랙터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은 스윈튼은 무한궤도를 장착하고 포로 무장한 장갑차를 고안했으나, 과거 나폴레옹 시대의 보병 돌격전만을 고집하던 육군수뇌부에서는 애들 장난감으로 치부하고 이 제안을 무시했다. 하지만 당시 해군성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이 장갑차량의 실전 투입이 결정 되었다. 당시 극비리에 진행되었던 이 병기의 암호명은 물탱크(W.C, Water Carrier)였다. 

   하지만 약자인 W.C가 수세식 변기라는 중의적인 의미도 있었던 관계로 최전선에 갑자기 수십대의 수세식변기가 공수된다면 오히려 의심을 살 우려가 있다는 의견 때문에 암호명은 그냥 물탱크(Tank)로 명명하기로 결정했다고 전해진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 솜 지역 전선에 첫 투입된 49량의‘물탱크’가 기관총탄을 튕겨내면서 독일군의 철조망을 짓밟는 모습이 주는 공포감은 대단했지만, 처음으로 실전 투입된 실험적 병기의 기계적 신뢰도는 기대 이하였다. 

   투입된 49량의 전차 중 전선 돌파에 성공한 전차는 불과 23대였으며, 이날 무사히 귀환한 전차의 숫자는 9대였다. 이 때문에 전차 무용론까지 대두되었으나 전차의 잠재력을 꿰뚫어본 영국군 사령관인 헤이그 장군의 적극적인 지지로 결국 전차의 대량 생산이 결정되었고 이듬해 캉브레 전투에서 400량이 넘는 전차가 처음으로 집중 운용되어 전과를 올리면서 전장에서 전차의 가치를 증명해 보였다. 영국군의 전차에 대항하기 위해 독일군도 1918년 A7V 전차를 개발하여 영국군의 Mk.4 전차와 교전을 벌이기도 했으나 이미 독일의 패색이 짙어진 대전 말기에 접어든 관계로 당초 계획처럼 대량 생산을 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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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초의 전차인 영국군의 MK.1 전차 (사진=위키미디어)



전차의 춘추전국시대 : 제2차 세계대전 

   제1차세계대전 당시 보병을 보조하여 지루한 참호전을 타개할 수단으로 전차가 등장했다면 제2차세계대전 때부터는 전차 자체가 전장의 흐름을 주도하는 기동 병기로써 자리매김하게 된다. 제2차세계대전은 육,해,공 전분야에서 수많은 전술적 시도가 이루어진 실험장이었는데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전차의 사용목적이나 크기 별로 수십~ 수 백 가지의 전차들이 등장하여 전장을 누볐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일반적인 전차의 구분은 다음과 같았다. 


■ 경전차 (輕戰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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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2mm 기관총 2정으로 무장한 독일군의 1호전차 Pz.kpfw.1 (사진=위키미디어)
CC BY-SA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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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10톤 내외의 가벼운 차체를 가지고 있으며 무장은 기관총이나 기관포 1~2정으로 무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면적인 기갑전투보다는 빠른 수색과 정찰, 보병 제압용으로 제한적으로 운용되었으며 대전말기에 이르러서는 대부분 1선에서 제외되어 후방 지역의 치안 유지용으로 사용 되었다. 


■ 중전차 (中戰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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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당시 북한군도 사용했던 소련군의 주력 중(中)전차 T-34 (사진=위키미디어, Antonov14)
CC-BY-SA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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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톤 내외의 중량을 지니고 있으며 본격적으로 ‘포(砲)’가 탑재되는 전차이다. 35mm 이상 구경의 포를 탑재하고 있으며, 40km/h 내외의 속도를 낼 수 있는 기동성을 갖춘 전차로 전차전과 보병화력지원 모두를 가능하게 만들어진 다목적 전차로써 대전 기간 중 가장 많은 수가 생산 되었다. 



■ 중전차 (重戰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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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기갑부대의 영원한 상징 타이거(Tiger) 중(重) 전차 (사진=위키미디어)
CC-BY-SA-3.0-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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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톤 이상의 중량을 가지고 있으며 75 mm 이상의 구경포를 탑재한 전차로써 육중한 중장갑과 강한 펀치력을 지닌 전차로써 전차끼리의 교전시 그 진가를 발휘하는 전차이다. 하지만 시대적 한계로 인해 육중한 차체에 비해 내연기관의 발달이 그에 못 미쳐서 기동성은 매우 떨어졌다. 



■ 구축전차 (驅逐戰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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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 중인 미국 구축전차의 대명사 M10 울버린 (사진=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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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축은 ‘무엇인가를 내치다’라는 일본식 한자 표기이며, 영문표기는 Tank-Destroyer 이다. 말 그대로 ‘전차파괴 전용전차’를 의미하는데 일반적으로 전차가 기동성, 화력, 방어력의 삼박자를 갖추고 있다면, 구축전차는 오로지 대전차 공격력 강화에만 특화된 전차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대전차포를 무한궤도에 올려 놓는 형식으로 제작 되었으나 승무원들의 생존성이 너무 떨어진다는 의견 때문에 최소한의 방어력을 확보하기 위해 장갑을 덧씌우는 형태가 보편화되었다. 이 때문에 얼핏 보면 외관이 일반 전차들과 유사한 경우가 많지만 방어력은 일반 전차들에 비해 거의 없거나 미미한 수준인 경우가 대부분 이었다. 

   이외에도 프랑스나 영국의 경우 기동성을 극단적으로 희생시키고 (평균속도 10 km이하) 방어력을 증가시켜 보병의 화력지원 전용으로 만든 보병전차, 방어력과 공격력을 감소시키고 기동석을 증가시킨 순항전차 등을 별도로 구분하여 운용하였다. 하지만 이는 전차를 보병의 지원용으로 한정시키거나 전술적 기습시 조공(助攻)의 역할로만 용도를 한정시킨 까닭에 나온 분류 법이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개전됨과 동시에 전 유럽을 전광석화처럼 석권한 독일군의 저력은 바로 기갑부대의 집중운용을 통한 적의 전선 돌파 및 전과 확대에 있었다 당시 영국, 프랑스 지휘관들은 부대의 이동속도를 보병의 행군 속도인 시속 4km에 맞춰 계산하여 독일군의 공세에 대한 반격 계획을 수립하곤 했지만 기갑사단 위주로 구성된 독일군의 주공은 번번히 연합군의 예측을 벗어나며 방어선을 돌파하기 일쑤였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장장 4년 간의 밀고 밀리는 소모전을 감내하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승전국이자 200만 대군을 자랑하던 전통의 군사강국 이었지만, 기갑부대를 내세운 독일군의 공격 개시 후 단 7주만에 파리를 함락 당했다. 결국 기갑부대의 효용성과 이해도의 차이가 독일군의 이와 같은 눈부신 성공을 만들어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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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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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효준
장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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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권사 기획팀에 근무중인 밀리터리 매니아. 알아두면 뼈가되고 살이되는 스토리 중심의 밀리터리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