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8. 26. 14:55ㆍ차 이야기
2) 죽로차의 역사적 정의
조선의 차문화는 작설차로 시작하여 죽로차로 대단원을 맺는다. 작설차가 찻잎의 외형에 따라 붙은 이름이라면 죽로차는 차가 자라는 환경에 따라 붙은 이름이다. 또한 작설차가 중국의 영향 속에서 조선 600년을 넘어 지금까지 주인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름이라면, 죽로차는 순수한 우리의 땀과 숨결로 지어진 이름이다. 작설차로 굳어진 이름 속에 숨어있던 조선차의 힘이 죽로차란 이름으로 재탄생되면서 우리는 다산을 만나게 되고 초의를 만나게 된다.
이보다 앞섰지만 기록되는 시점이 뒤처지는 죽로차에 대한 기록은 우리나라 차나무 기원을 죽로차에서 비롯한 것으로 나타나있다. 1918년 간행된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痛史>에서 이능화는 “김해 백월산에는 죽로차가 있다. 세상에서는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라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화엄사 주지를 지낸 만우 정병헌이 1936년에 남긴 ‘해동호남도 지리 대화엄사적’의 기록 에도 ‘신라의 차는 지리산에서 비롯된다. 연기조사가 진흥왕 때 지리산의 양지쪽 이마에 화엄사를 세우니 , 이것이 지리산에 절이 있게된 시초다. 연기는 차씨를 가지고 와서 절을 지은 것과 동시에 부근에 심었다. 이곳이 뒷날의 장죽전이며, 흥덕왕도 역시 이곳에 심도록 명령했다. 이로 말미암아 장죽전의 죽로차가 나라 안에 이름이 나게 되었다”라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2개의 기록에서 하나의 공통된 의문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왜 갑자기 죽로차란 이름이 드러나면서 조선의 차, 아니 우리 민족의 차문화의 뿌리라는 것으로 확대되어 지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나는 이 글에서 차시배지 논란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기록을 인정하더라도 길게도 2,000년-짧게는 1,50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차문화의 현장 속에서 이와 유사한 그 어떤 언급을 아직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보다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차시배지 논란을 떠나서 죽로차란 명칭의 성립과 배경 그리고 죽로차의 특성을 몇 회에 걸쳐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한다. 19세기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죽로차는 나름대로의 전승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 기록의 발신자 그룹의 중심에 자하 신위, 귤산 이유원, 우선 이상적 등이 있고, 이 기록의 내용의 생산자 중심에 역시 다산과 초의가 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죽로차와 관련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지역은 곡성, 강진, 장흥, 장성, 구례, 김해 등지이다. 1973년 권태원 교수가 조사한 <차고사의 고찰과 현황> 중에서, 16개의 사찰을 답사하여 작성한 산사다적지(山寺茶蹟地)는 죽로차란 명칭이 현재까지 전승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주용한 자료이다. 이 기록에서 보이는 죽로차 또는 죽전차가 생산되는 지역은 천은사/죽전차, 백양사/죽로차, 송광사/죽로차가 있다. 여기서 우리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화엄사에서는 자급용으로 사용하여 이름이 없다는 기록과 함께 죽로차의 메카라고 할 보림사에서 작설차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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