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진의 차맥] <63> 조선 후기 선비 차인들 ⑬ 차향을 문향과 예향으로 옮긴 추사 김정희 관련이슈 : 박정진의 차맥
2014. 8. 26. 15:04ㆍ차 이야기
[박정진의 차맥] <63> 조선 후기 선비 차인들
⑬ 차향을 문향과 예향으로 옮긴 추사 김정희 관련이슈 : 박정진의 차맥
<자료출처 : 세계일보 7월 17일자 에서>
당대 최고의 차 전문가… 茶문화,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려
조선 후기 차 문화 중흥조 3인을 다시 세분하여 말하면 다산은 불가(佛家)에서 거의 끊어지다시피 한 차 문화를 다시 초의(草衣) 의순(意恂)을 통해 이어준 인물이라고 한다면, 초의는 구체적으로 차를 재배하고 법제하는 새로운 경지를 연 전다박사(煎茶博士)다. 그렇다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어떤 인물일까. 추사는 차를 둘러싼 문화와예술의 환경을 만들어냄으로써 차 문화를 더욱 멋스러운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초의 의순의 역할이 지대하다. 초의는 3인 중에서도 교량 역할을 한 인물이다.
다산이 조선 후기 차 문화 중흥의 뿌리라고 말한다면 초의는 가지, 추사는 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추사의 ‘명선(茗禪)’을 비롯하여 ‘죽로지실(竹爐之室)’, ‘다반향초(茶半香初)’ 등의 글귀는 이를 잘 말해준다.
추사와 초의는 동갑이다. 그래서 아마도 둘은 유가와 불가라는 가문의 차이에도 동갑내기로서 쉽게 통하는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추사가 초의를 첫 대면한 것은 1815년 초의가 서울로 첫 나들이를 하면서였다. 다산이 초의에게 운유사방(雲遊四方)을 주문했고, 이에 초의도 절집에 머무르지 않고 조선을 유람하게 되었다. 추사와 초의의 첫 만남은 그해 겨울 수락산 학림암에서였다. 초의는 운길산 수종사가 겨울을 나기에 추울 것을 염려한 다산의 아들 정학연(丁學淵·1783∼1859)의 주선으로 학림암에 있었다. 추사는 동생 김명희(金明喜)로부터 초의가 해붕선사를 모시고 동안거 결제 중임을 알고 암자를 찾았던 듯하다. 이때 초의는 스승이 추사를 재전(再傳) 제자로 인가하는 것을 확인하고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추사와 초의의 관계에서는 추사 쪽에서 만나고 싶어 안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둘의 만남은 번번이 어긋나기 일쑤였다. 차라리 초의는 동생 김명희와 자주 만나는 관계였다.
초의는 그동안 일지암을 지었고, 스승 완호 스님의 비문을 받기 위해 서울 나들이를 했지만 둘은 만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초의는 한양의 사대부들에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830년 우연히 초의의 차맛을 본 박영보(이산중에게 초의차를 얻음)가 ‘남차병서(南茶幷書)’를 짓자 박영보의 스승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45)가 이에 화운하여 ‘남차시병서(南茶詩幷序)’를 짓고 나중에 ‘전다박사’라는 칭호를 내리는 데서 비롯되었다.
추사는 여러 차례 걸명시를 초의에게 보냈고, 보내준 차에 대한 답례로 계절 부채나 글씨를 보내곤 했다. 저 유명한 ‘명선’도 초의의 구고단(救苦丹)을 받고서 답례로 보낸 글씨이다. 글씨를 보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초의가 자신이 만든 차를 부쳐 왔는데 몽정차나 노아차에 못지않았다. 이를 써서 보답한다.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의 필의로 병거사(病居士)가 예서로 쓴다.”
‘명선’은 차 전문 월간지 ‘차의 세계’(2007년 9월호)에 발행인 최석환이 중국 하북성 원씨현(元氏縣) 봉룡산(封龍山) 천불동(千佛洞) 옆 한비당(漢碑堂·한나라 때 비석을 모아둔 사당)에 보관된 백석신군비 원석을 찾아내서 ‘백선신군비 원석 발견으로 햇빛 본 추사의 명선’이라는 보도를 하자, 진위를 두고 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차의 세계는 집자한 ‘명선’을 내보내며 추사가 필의한 사실을 확인했다. 백석신군비는 그동안 국내에서는 직접 본 사람은 없었고, 모두 탁본을 보고 감탄한, 옹방강(翁方綱·1733∼1818)이 극찬한 한대(漢代)의 명비이다.
한양대 정민 교수와 강우방 선생 사이에 격론이 일었다. 정민은 진적이라고 하고, 강우방은 위작이라는 편에 서 있다. 강우방은 추사의 명선과 백석신군비를 비교해 본 뒤 “추사 글씨의 세부 획을 하나하나 대조하면서 뭉툭하고 옹색하기 짝이 없는 위작임이 분명하다”고 결론지었다. 정민은 “명선은 중국에서 구해온 최고급 화선지에, 초의의 귀한 차를 얻어 고마운 마음과 넘쳐나는 흥취를 주체하지 못해 작심하고 종이 위를 춤추듯 왔다갔다하며 쓴 신필(神筆)이다. 전체 작품이 뿜어내는 기운은 곧장 보는 이를 무찔러 들어온다”고 말했다.
추사가 초의에게 써준 ‘명선’은 백석신군비 탁본에서 ‘명선’을 조합해서 만든 글씨이다. 추사의 ‘명선’(57.8㎝×115.2㎝)은 대작이다. 백선신군비의 한 글자는 약 2㎝ 정도이다. 말하자면 명선은 백석신군비의 글자를 가로세로로 크게 늘린 것이고, 따라서 공간분할과 여백처리의 재조정도 필연적으로 따르게 마련이다.
추사는 만휴(卍休) 자흔(自欣·1804∼1875)과 초의의 제자인 취현(醉玄) 향훈(向薰·1801∼1885) 외에 쌍계사의 관화(貫華)와 만허(晩虛) 스님에게도 끊임없이 차를 구해 마셨다. 향훈은 차 만드는 데에 초의만큼이나 공력이 높았던 승려임이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추사는 향훈에게 ‘다선(茶禪)’이라는 칭호와 함께 글씨를 써서 다음 인편에 부쳐주겠다고 했으나 아직 발견되지는 않고 있다. 결국 초의에게 ‘명선’ 향훈에게 ‘다선’이라는 칭호를 준 셈이다.
추사가 쓴 ‘다반향초’는 차 문화의 깊이와 향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글씨이다. 다반향초는 작자 미상인데 중국에서도 더러 회자하였고, 추사에 의해 작품화되면서 조선에 널리 애송된 구절이다.
“고요히 앉은 곳(處) 차 마시다 향 사르고/ 묘한 작용이 일 때(時) 물 흐르고 꽃이 피네.”(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
이때의 향(香)은 한때 ‘차를 반쯤 마셔도 향기는 처음 그대로이네’의 뜻으로 새겨졌으나 최근 ‘차를 마시는 중에 향을 사르다’의 뜻으로 굳혀져 가고 있다. 말하자면 다반향초의 향이 차향이 아니라(정민 교수의 주장) 차를 마시면서 향을 사르는, 차 마시는 풍습을 전한 대목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장소로서의 처(處)와 시간으로서의 시(時)가 묘하게 동시성을 드러내고 있는 점이다. 차를 마시는 중에 물 흐르는 소리는 조용조용 있게 마련이고, 향은 꽃의 열림으로 승화된다. 다선일미(茶禪一味)뿐만 아니라 다시일미(茶詩一味)의 경지이다. 다반향초를 한양에 유행시킨 장본인은 추사와 신위이다. 1831년 그가 친필로 쓴 ‘초의시집’ 서문을 보면 “이 글을 북선원(北禪院)의 다반향초실에서 썼다”고 적고 있다.
북선원의 자리는 자신이 거처였던 관악산 자락의 자하산장(紫霞山莊, 현 서울대 인문대학 아래 紫霞淵 자리) 근처의 금선암(金仙菴)이었음이 정민 교수에 의해 밝혀졌다. 다반향초를 노래한 한시들은 많다. 말하자면 차가 완전히 문화로서 자리 잡은 것을 말한다. 다산의 애제자인 황상은 초의를 만나자마자 추사의 글씨를 보여줄 것을 청한다. 아마도 추사의 글씨가 초의에게 많음이 당시 차 애호가 그룹에 잘 알려진 듯하다. 황상의 요청에 의해 초의가 보여준 글씨는 ‘명선’과 ‘죽로지실’ 외에도 여러 점이었다. 황상은 마른 글씨체인 ‘죽로지실’을 조비연에 견주고, 살점이 두툼한 ‘명선’을 양귀비에 비유했다.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여러 편의 시를 보면, 그가 얼마나 초의와 차를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다음은 ‘고요함에 대한 게송, 초의 스님에게 드림(靜偈贈草衣師)’이라는 제목의 시이다.
“네 마음 고요할 땐/ 저자라도 산이지만/ 네 마음 들뜰 때면 산이라도 저자이리/ 오로지 마음에서/ 저자와 산 저절로 나뉜다/ 물병 가고 바늘 옴이/ 어이 이리 분분한가/ 고요함 네 구할 때/ 네 마음 이미 소란하다/ 현묘한 깨달음은/ 산(山) 잊고 도(道)에 목숨 검이다/ 저잣거리가 산속만 못하다고 너 말하려느냐/ 산중마저 들뜰 때는/ 장차 어디로 가려느냐/ 네가 저차에 처해도 산중에서 보는 듯하면/ 푸른 솔은 왼편에 있고/ 흰 구름은 앞에서 일어나리.”
다음은 추사가 초의에게 걸명한 시 ‘(아침에 한 사람에게 곤욕을 치르고, 저녁에도 한 사람에게 곤욕을 치렀다. 마치 학질을 앓고 난 것 같다.) 장난 삼아 초의 상인에게 주다(戱贈草衣上人)’이다. 차를 고통을 구해 줄 단약이라고 한 것에서 차의 용도에서 차약의 비중이 큼을 알 수 있다.
“하루 걸러 앓으나 학질로 괴로우니/ 아침엔 더웠다가 저녁엔 오한 드네/ 산 스님 아무래도 의왕(醫王) 솜씨 아끼는 듯/ 관음보살 구고단(救苦丹)을 빌려주지 않누나.”
추사는 관화 스님에게도 차시를 주었다. 다음은 ‘증관화(贈貫華)’이다.
“한 스님 천산에서 구해온 것 얻으니/ 사나운 용 턱밑에서 우레 칠 때 딴 것일세/ 솔 소리 센 바람이 큰 허공에 서렸기에/ 화엄의 법계로 고이 돌려보내노라.”
“쌍계사의 봄빛에 차 인연은 길고 길어/ 육조(六祖) 고탑 광휘 아래 으뜸가는 두강차라/ 욕심 많은 늙은이 곳곳마다 욕심 부려/ 먹을거리로 향기로운 김을 또 약속했네.”
추사는 만허 스님에게도 차시를 주었다. 다음은 ‘장난 삼아 만허에게 주다(戱贈晩虛)’이다.
“열반이란 마설(魔說)로 나 귀 해를 다 보내니/ 스님에게 귀한 건 장법안(正法眼)의 선(禪)이라네/ 찻잎에다 다시금 참학(參學) 일을 겸하여서/ 사람마다 육조탑의 둥근 빛을 먹게 하네.”
추사가 ‘다선’이라고 칭한 향훈에게 준 게송은 참으로 애틋하다. ‘견향게를 향훈 스님에게 주다(見香偈贈香薰衲)’이다. 추사는 향훈(向薰)을 즐겨 향훈(香薰)으로 썼다.
“망망한 대지에/ 비리고 탁한 내음 코 찌른다/ 눈 속의 묘한 향기/ 그 신비를 뉘 발할까?/ 목서(木犀)는 숨김 없고/ 천화(天花)는 내 맘 같네/ 빛과 소리 서로 쓰니/ 문수(文殊)의 불이(不二)로다.”
이는 크게 깨우쳐서 천화(天花)의 향기를 마음대로 맡아 광음(光音)을 초월하여 문수사리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성취하기 바란다는 뜻으로 한 축원이었다. 말하자면 추사는 당대 최고의 차 마니아였다. 추사의 차 욕심은 대단하였다. 역관으로 있던 제자 이상적(李尙迪·1804∼1865)과 오경석(吳慶錫·1831∼1879)에게도 중국차를 구해 마셨다.
추사는 거의 매일 차와 더불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추사가 이상적에게 보낸 편지 중 차와 관련된 대목을 보자.
“지금쯤은 손님을 보내고 한가롭겠네 그려. 일체 바깥과 교섭이 없고 보니 이 마음이 쏠리는 것은 날마다 그대의 곁이라네. 녹음은 하마 눈에 가득한데 두루 잘 지내시는가? 내 모습을 보면 줄곧 침울하기만 하이. 계수의 상례도 어느새 끝나고 보니 구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네. 늙은 홀아비의 형편이 갈수록 걱정되나 어쩌겠는가? 먹던 차가 다 떨어졌는데, 달리 청할 곳이 없네그려. 게다가 만나는 사람마다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내 생각에 자네의 묵은 주머니 속에도 필시 남지 않았을 텐데. 미생고(微生高)의 식초가 비록 성인께서 나무라신 바이나. 있든 없든 서로 도운 것을 또한 그의 부득이함 때문이었을 게요. 이에 번거로움을 무릅쓰니, 살펴주시기 바라네. 이만 줄이네. 병완(病阮) 씀.”
다음은 ‘이상적에게 주다’ 네 번째 편지이다.
“그대는 그사이 잘 돌아왔는가? 탕(湯)과 고(顧)는 둘 다 잘 지내며, 능히 노인이 금비(金?)를 만나 거의 죽을 나이에 마침내 아침에 도를 듣는 소원을 이루었다던가? 근래 들어 마음이 점점 더 조급해지니 가련할 뿐이라네. 마침 남쪽 차를 얻어 또 이번에 맛을 나누려 하네. 앞서 것보다 맛이 더욱 나은 것 같구려. 그대의 주머니 속에도 능히 이 같은 것을 가져왔겠지. 그대의 편지에는 내 생각에 들을 만한 내용이 있을 텐데 과연 어떨지 모르겠네. 얻은 것이 몹시 적확하던가? 궁금증을 깨뜨려 주었으면 좋겠소. 황하는 여전히 맑아 남쪽 상인은 구애됨이 없다는데, 황하의 남북으로 그 피가 검붉다니 이것은 또 어찌 된 셈인가, 촉 땅 전제가 아미 북방의 소유가 아니라 하던데 그러한가? 잠시 미뤄두고 이만 줄이네.”
추사가 중국 벗들의 안부를 묻긴 하지만 속셈은 이상적이 연행 길에서 가져 왔음직한 중국차에 관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추사는 귀한 용정차(龍井茶)를 보내온 오경석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부쳐준 가품의 용정차는 따로 마음을 쓰지 않았다면 어찌 이를 마련했겠는가? 고맙고 고맙네. 종이부채는 즉시 써서 부치려 했네만, 심부름 온 하인이 곧장 돌아가는지라 오래 붙들 수가 없어 모두 미뤄 두었네. 이만 줄이네. 답장.”
추사는 얼마나 차 마니아였는지, 훗날 제주도 귀양가 있을 때는 차를 구할 수 없게 되자, 그곳에서 빈랑 잎을 가공해서 황차를 만들어 마시기도 했다. 멀리 북청 유배지까지 차를 부쳐주는 초의와 소치의 정성도 지극했다. 저 유명한 추사의 그림 ‘세한도(歲寒圖)’도 제주도 귀양살이 시절, 먼길을 찾아온 이상적에게 그려준 것이다. 추사로 인해 조선 후기의 차 문화는 한층 격조를 더해갔다. 추사가 써준 글씨 편액들은 오늘날 차인이면 누구나 한두 점쯤 모조나 목각으로 걸어두고 있다. 위의 소개된 글씨 외에도 ‘전다삼매(煎茶三昧)’ 등 추사의 글씨는 우리의 차문화를 풍성하게 했다. 추사 김정희는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대왕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한 것을 비롯하여 외가는 노론계 명문으로 친가 외가가 명문 거족이었다. 학문적으로도 북학파를 이끌었으며,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또 추사체라는 서체를 개발한 동아시아의 대서예가였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순탄치는 않았다. 제주도·함경도 북청 등 두 차례의 유배시절을 보냈으나 수많은 서예작품을 남겨 불세출의 서예가가 되었으며, 차 마니아로서도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객원논설위원·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소치 허련이 그린 ‘완당선생해천일립상’.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공 |
추사와 초의는 동갑이다. 그래서 아마도 둘은 유가와 불가라는 가문의 차이에도 동갑내기로서 쉽게 통하는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추사가 초의를 첫 대면한 것은 1815년 초의가 서울로 첫 나들이를 하면서였다. 다산이 초의에게 운유사방(雲遊四方)을 주문했고, 이에 초의도 절집에 머무르지 않고 조선을 유람하게 되었다. 추사와 초의의 첫 만남은 그해 겨울 수락산 학림암에서였다. 초의는 운길산 수종사가 겨울을 나기에 추울 것을 염려한 다산의 아들 정학연(丁學淵·1783∼1859)의 주선으로 학림암에 있었다. 추사는 동생 김명희(金明喜)로부터 초의가 해붕선사를 모시고 동안거 결제 중임을 알고 암자를 찾았던 듯하다. 이때 초의는 스승이 추사를 재전(再傳) 제자로 인가하는 것을 확인하고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추사와 초의의 관계에서는 추사 쪽에서 만나고 싶어 안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둘의 만남은 번번이 어긋나기 일쑤였다. 차라리 초의는 동생 김명희와 자주 만나는 관계였다.
초의는 그동안 일지암을 지었고, 스승 완호 스님의 비문을 받기 위해 서울 나들이를 했지만 둘은 만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초의는 한양의 사대부들에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830년 우연히 초의의 차맛을 본 박영보(이산중에게 초의차를 얻음)가 ‘남차병서(南茶幷書)’를 짓자 박영보의 스승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45)가 이에 화운하여 ‘남차시병서(南茶詩幷序)’를 짓고 나중에 ‘전다박사’라는 칭호를 내리는 데서 비롯되었다.
추사는 여러 차례 걸명시를 초의에게 보냈고, 보내준 차에 대한 답례로 계절 부채나 글씨를 보내곤 했다. 저 유명한 ‘명선’도 초의의 구고단(救苦丹)을 받고서 답례로 보낸 글씨이다. 글씨를 보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초의가 자신이 만든 차를 부쳐 왔는데 몽정차나 노아차에 못지않았다. 이를 써서 보답한다.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의 필의로 병거사(病居士)가 예서로 쓴다.”
‘차의 세계’(2007년 9월호)에 실린 중국 하북성 원씨현 봉룡산 천불동 옆 한비당에 보관된 백석신군비. |
한양대 정민 교수와 강우방 선생 사이에 격론이 일었다. 정민은 진적이라고 하고, 강우방은 위작이라는 편에 서 있다. 강우방은 추사의 명선과 백석신군비를 비교해 본 뒤 “추사 글씨의 세부 획을 하나하나 대조하면서 뭉툭하고 옹색하기 짝이 없는 위작임이 분명하다”고 결론지었다. 정민은 “명선은 중국에서 구해온 최고급 화선지에, 초의의 귀한 차를 얻어 고마운 마음과 넘쳐나는 흥취를 주체하지 못해 작심하고 종이 위를 춤추듯 왔다갔다하며 쓴 신필(神筆)이다. 전체 작품이 뿜어내는 기운은 곧장 보는 이를 무찔러 들어온다”고 말했다.
추사가 초의에게 써준 ‘명선’은 백석신군비 탁본에서 ‘명선’을 조합해서 만든 글씨이다. 추사의 ‘명선’(57.8㎝×115.2㎝)은 대작이다. 백선신군비의 한 글자는 약 2㎝ 정도이다. 말하자면 명선은 백석신군비의 글자를 가로세로로 크게 늘린 것이고, 따라서 공간분할과 여백처리의 재조정도 필연적으로 따르게 마련이다.
추사는 만휴(卍休) 자흔(自欣·1804∼1875)과 초의의 제자인 취현(醉玄) 향훈(向薰·1801∼1885) 외에 쌍계사의 관화(貫華)와 만허(晩虛) 스님에게도 끊임없이 차를 구해 마셨다. 향훈은 차 만드는 데에 초의만큼이나 공력이 높았던 승려임이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추사는 향훈에게 ‘다선(茶禪)’이라는 칭호와 함께 글씨를 써서 다음 인편에 부쳐주겠다고 했으나 아직 발견되지는 않고 있다. 결국 초의에게 ‘명선’ 향훈에게 ‘다선’이라는 칭호를 준 셈이다.
추사가 쓴 ‘다반향초’는 차 문화의 깊이와 향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글씨이다. 다반향초는 작자 미상인데 중국에서도 더러 회자하였고, 추사에 의해 작품화되면서 조선에 널리 애송된 구절이다.
“고요히 앉은 곳(處) 차 마시다 향 사르고/ 묘한 작용이 일 때(時) 물 흐르고 꽃이 피네.”(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
이때의 향(香)은 한때 ‘차를 반쯤 마셔도 향기는 처음 그대로이네’의 뜻으로 새겨졌으나 최근 ‘차를 마시는 중에 향을 사르다’의 뜻으로 굳혀져 가고 있다. 말하자면 다반향초의 향이 차향이 아니라(정민 교수의 주장) 차를 마시면서 향을 사르는, 차 마시는 풍습을 전한 대목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장소로서의 처(處)와 시간으로서의 시(時)가 묘하게 동시성을 드러내고 있는 점이다. 차를 마시는 중에 물 흐르는 소리는 조용조용 있게 마련이고, 향은 꽃의 열림으로 승화된다. 다선일미(茶禪一味)뿐만 아니라 다시일미(茶詩一味)의 경지이다. 다반향초를 한양에 유행시킨 장본인은 추사와 신위이다. 1831년 그가 친필로 쓴 ‘초의시집’ 서문을 보면 “이 글을 북선원(北禪院)의 다반향초실에서 썼다”고 적고 있다.
북선원의 자리는 자신이 거처였던 관악산 자락의 자하산장(紫霞山莊, 현 서울대 인문대학 아래 紫霞淵 자리) 근처의 금선암(金仙菴)이었음이 정민 교수에 의해 밝혀졌다. 다반향초를 노래한 한시들은 많다. 말하자면 차가 완전히 문화로서 자리 잡은 것을 말한다. 다산의 애제자인 황상은 초의를 만나자마자 추사의 글씨를 보여줄 것을 청한다. 아마도 추사의 글씨가 초의에게 많음이 당시 차 애호가 그룹에 잘 알려진 듯하다. 황상의 요청에 의해 초의가 보여준 글씨는 ‘명선’과 ‘죽로지실’ 외에도 여러 점이었다. 황상은 마른 글씨체인 ‘죽로지실’을 조비연에 견주고, 살점이 두툼한 ‘명선’을 양귀비에 비유했다.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여러 편의 시를 보면, 그가 얼마나 초의와 차를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다음은 ‘고요함에 대한 게송, 초의 스님에게 드림(靜偈贈草衣師)’이라는 제목의 시이다.
“네 마음 고요할 땐/ 저자라도 산이지만/ 네 마음 들뜰 때면 산이라도 저자이리/ 오로지 마음에서/ 저자와 산 저절로 나뉜다/ 물병 가고 바늘 옴이/ 어이 이리 분분한가/ 고요함 네 구할 때/ 네 마음 이미 소란하다/ 현묘한 깨달음은/ 산(山) 잊고 도(道)에 목숨 검이다/ 저잣거리가 산속만 못하다고 너 말하려느냐/ 산중마저 들뜰 때는/ 장차 어디로 가려느냐/ 네가 저차에 처해도 산중에서 보는 듯하면/ 푸른 솔은 왼편에 있고/ 흰 구름은 앞에서 일어나리.”
다음은 추사가 초의에게 걸명한 시 ‘(아침에 한 사람에게 곤욕을 치르고, 저녁에도 한 사람에게 곤욕을 치렀다. 마치 학질을 앓고 난 것 같다.) 장난 삼아 초의 상인에게 주다(戱贈草衣上人)’이다. 차를 고통을 구해 줄 단약이라고 한 것에서 차의 용도에서 차약의 비중이 큼을 알 수 있다.
“하루 걸러 앓으나 학질로 괴로우니/ 아침엔 더웠다가 저녁엔 오한 드네/ 산 스님 아무래도 의왕(醫王) 솜씨 아끼는 듯/ 관음보살 구고단(救苦丹)을 빌려주지 않누나.”
추사는 관화 스님에게도 차시를 주었다. 다음은 ‘증관화(贈貫華)’이다.
“한 스님 천산에서 구해온 것 얻으니/ 사나운 용 턱밑에서 우레 칠 때 딴 것일세/ 솔 소리 센 바람이 큰 허공에 서렸기에/ 화엄의 법계로 고이 돌려보내노라.”
“쌍계사의 봄빛에 차 인연은 길고 길어/ 육조(六祖) 고탑 광휘 아래 으뜸가는 두강차라/ 욕심 많은 늙은이 곳곳마다 욕심 부려/ 먹을거리로 향기로운 김을 또 약속했네.”
추사는 만허 스님에게도 차시를 주었다. 다음은 ‘장난 삼아 만허에게 주다(戱贈晩虛)’이다.
“열반이란 마설(魔說)로 나 귀 해를 다 보내니/ 스님에게 귀한 건 장법안(正法眼)의 선(禪)이라네/ 찻잎에다 다시금 참학(參學) 일을 겸하여서/ 사람마다 육조탑의 둥근 빛을 먹게 하네.”
추사가 ‘다선’이라고 칭한 향훈에게 준 게송은 참으로 애틋하다. ‘견향게를 향훈 스님에게 주다(見香偈贈香薰衲)’이다. 추사는 향훈(向薰)을 즐겨 향훈(香薰)으로 썼다.
“망망한 대지에/ 비리고 탁한 내음 코 찌른다/ 눈 속의 묘한 향기/ 그 신비를 뉘 발할까?/ 목서(木犀)는 숨김 없고/ 천화(天花)는 내 맘 같네/ 빛과 소리 서로 쓰니/ 문수(文殊)의 불이(不二)로다.”
이는 크게 깨우쳐서 천화(天花)의 향기를 마음대로 맡아 광음(光音)을 초월하여 문수사리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성취하기 바란다는 뜻으로 한 축원이었다. 말하자면 추사는 당대 최고의 차 마니아였다. 추사의 차 욕심은 대단하였다. 역관으로 있던 제자 이상적(李尙迪·1804∼1865)과 오경석(吳慶錫·1831∼1879)에게도 중국차를 구해 마셨다.
추사는 거의 매일 차와 더불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추사가 이상적에게 보낸 편지 중 차와 관련된 대목을 보자.
“지금쯤은 손님을 보내고 한가롭겠네 그려. 일체 바깥과 교섭이 없고 보니 이 마음이 쏠리는 것은 날마다 그대의 곁이라네. 녹음은 하마 눈에 가득한데 두루 잘 지내시는가? 내 모습을 보면 줄곧 침울하기만 하이. 계수의 상례도 어느새 끝나고 보니 구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네. 늙은 홀아비의 형편이 갈수록 걱정되나 어쩌겠는가? 먹던 차가 다 떨어졌는데, 달리 청할 곳이 없네그려. 게다가 만나는 사람마다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내 생각에 자네의 묵은 주머니 속에도 필시 남지 않았을 텐데. 미생고(微生高)의 식초가 비록 성인께서 나무라신 바이나. 있든 없든 서로 도운 것을 또한 그의 부득이함 때문이었을 게요. 이에 번거로움을 무릅쓰니, 살펴주시기 바라네. 이만 줄이네. 병완(病阮) 씀.”
다음은 ‘이상적에게 주다’ 네 번째 편지이다.
추사의 ‘명선’과 백석신군비에서 집자한 ‘명선’. ‘차의 세계’ 제공. |
추사가 중국 벗들의 안부를 묻긴 하지만 속셈은 이상적이 연행 길에서 가져 왔음직한 중국차에 관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추사는 귀한 용정차(龍井茶)를 보내온 오경석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부쳐준 가품의 용정차는 따로 마음을 쓰지 않았다면 어찌 이를 마련했겠는가? 고맙고 고맙네. 종이부채는 즉시 써서 부치려 했네만, 심부름 온 하인이 곧장 돌아가는지라 오래 붙들 수가 없어 모두 미뤄 두었네. 이만 줄이네. 답장.”
추사는 얼마나 차 마니아였는지, 훗날 제주도 귀양가 있을 때는 차를 구할 수 없게 되자, 그곳에서 빈랑 잎을 가공해서 황차를 만들어 마시기도 했다. 멀리 북청 유배지까지 차를 부쳐주는 초의와 소치의 정성도 지극했다. 저 유명한 추사의 그림 ‘세한도(歲寒圖)’도 제주도 귀양살이 시절, 먼길을 찾아온 이상적에게 그려준 것이다. 추사로 인해 조선 후기의 차 문화는 한층 격조를 더해갔다. 추사가 써준 글씨 편액들은 오늘날 차인이면 누구나 한두 점쯤 모조나 목각으로 걸어두고 있다. 위의 소개된 글씨 외에도 ‘전다삼매(煎茶三昧)’ 등 추사의 글씨는 우리의 차문화를 풍성하게 했다. 추사 김정희는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대왕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한 것을 비롯하여 외가는 노론계 명문으로 친가 외가가 명문 거족이었다. 학문적으로도 북학파를 이끌었으며,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또 추사체라는 서체를 개발한 동아시아의 대서예가였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순탄치는 않았다. 제주도·함경도 북청 등 두 차례의 유배시절을 보냈으나 수많은 서예작품을 남겨 불세출의 서예가가 되었으며, 차 마니아로서도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객원논설위원·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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