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8. 26. 14:59ㆍ차 이야기
죽로차원고 - 2. 곡성의 죽로차 제다 문화사 2010/03/08 11:29 http://blog.naver.com/algacha/101543735 |
2. 곡성의 죽로차
전라남도 곡성은 사실 그동안 우리나라 차문화의 변방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초기(1392-1550 여기서 시대구분은 이현숙의 <조선시대 차산지 연구>를 따른다)와 중기(1551-1700)) 에는 곡성에서 차가 생산되지 않은 것으로 나오고 , 후기(1701-1863)에 비로소 차가 생산되는 것으로 나오는데, 곡성에서 차가 생산되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여지도서>이다. 물론 이 기록 속에 나오는 차는 ‘작설’이다.
그러나 <조선의 차와 선>에서는 1936년 당시 현대식 제다시설을 갖춘 광주의 생산량 8,000근, 전통사찰인 선암사와 송광사가 있는 순천의 1,270근에 이어, 곡성이 유정, 당동, 원달, 설산에서 800근이 생산되어 전라도 지역 차생산지 서열 3위에 올라있다. 과연 어떤 차밭이 있어 이것이 가능한 것이었을까? 그 차밭에서 생산되는 차는 누가 어떻게 마셨을까? 그 의문점을 풀어보면서 우리차의 가능성과
함께 곡성차의 특성을 타진해 보고자 한다.
1) 곡성현감 신순의 죽로차
예로부터 차는 맑은 선물이라 하여 청공(淸供)이라 한다.
차를 주고 받는 오랜 전통 속에서 차는 마음과 마음을, 사람과 자연을 이어주는 다리였다. 고려시대
송광화상에게 차를 선물받은 익제 이제현이 거침없이 붓을 휘둘렀던 것이 고려차문화의 살아있는 현장을 전해주는 것이었다면, 조선시대에 신순에게서 죽로차를 선물로 받은 자하 신위(申緯1769~1845)가 시와 그림을 보낸것은 새롭게 꿈틀거리는 조선차문화의 현장 속에서 피어난 이채로운 꽃이라 할 만하다. 먼저 자하가 남긴 죽로차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긴 제목의 시 한편을 살펴보자.
곡성 고을의 원님인 신희세순이 십년동안 보지 못했는데 이강주, 죽로차와 아울러버선감을 보내고서 나의 묵죽과 또 나의 자제시를 구하였다. 천리 밖에서 얼굴빛 바꾸는 뜻이 은근함으로 병중에 억지로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고 화제를 지은 다음, 이 시로 화운을 구한다.
穀城倅申羲世淳 不見且十年 送梨薑酒竹露茶兼送襪材 求余墨竹 又要自題詩
以爲千里替面意殷 勤 病中强筆且畵且此題以此詩求和
십년동안 신희세를 보지 못했는데
역원이 남쪽에 소식을 전해왔네
十年不見申羲世 驛使南來信息傳
그도 살쩍머리 아마도 나처럼 희어졌을 거이다
주문장이 왔는데 어떻게 현담이나 하고 있을까
鬢髮知應如我白 簿書何以坐談玄
이강주와 죽로차는 사람의 정을 취하게 하는데
그림과 시에서는 아직 들 된 맛이 나는 군
梨薑竹露醺情味 圖畵詩章嗅夙緣
모이고 흩어지고 슬퍼하고 기뻐하는 것이 세상사리
이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망연해질 수 밖에 없지
聚散悲歡人世事 不堪重理意茫然 ---<졸역>
이 작품이 쓰여진 것은 신축(1841)년, 죽로차가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비교적 빠른 시기의 기록이다. 어떤 영문인지 자하 신위는 이 시를 보내면서 스스로 지은 묵죽 오언 절구를 그것도 8편을 함께 보낸다. 그 속내를 어찌 알 수 있을까마는 이 사건의 후일담은 귤산 이유원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군 신순(申淳)이 양연(養硏) 신위(申緯)) 노인의 시를 가지고 애첩에게 자랑하기를, “이 시는
당세 무쌍이니, 한 글자의 값어치가 천금이라네.” 하니, 이 말을 들은 애첩은 기뻐하며 “그의 56자
시를 얻어 시장에 팔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누만금을 마련하여 일생을 풍족하게 지낼 수 있을
터인데.” 하였다.
사군이 보낸 편지에 그 뜻을 전달하고 화답시를 애써 구하므로,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편지를
보고 껄껄대며 웃었다. 그리고 ‘시에서 맞상대가 없다[詩無敵]’라 하였기 때문에 장난삼아 두보(杜
甫)의, “이태백은 시에서 맞수가 없다[白也詩無敵]”라는 것을 끌어다가 아래 구를 삼았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3권 화동옥삼편(華東玉糝編) -朝雲愛詩>한국고전번역원 역
여기서 자하 신위에게 죽로차를 선물한 신순은 고려신씨로 <일성록>에 따르면 1840년 곡성현감을 하였다. 신순이 선물한 죽로차가 곡성산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왜냐면 함께 선물한 이강주는 전주의 특산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로차는 어디서 난 것일까? 1830년 겨울의 한 일이 떠오른다. 초의선사((草衣意恂 1786-1866)가 스승인 완호윤우玩虎尹佑 1758~1826)의 삼여탑 비문을 청하던 모습이다.
그때 초의선사가 자하 신위에게 선물한 보림백모차가 겹쳐진다. 1872년 사시향관(四時향관)에서 귤산 이유원은 기억속의 차에 죽로차란 이름을 부쳤다. 그렇다면 우연인가? 초의선사가 다녀간지 10년뒤 자하 신위에게 죽로차가 선물된 것은? 어쩌면 다산과 초의의 제다법이 퍼져나가면서 죽로차가 확산되는 것은 아닐까? 아직 곡성의 죽로차에 대한 다른 자료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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