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출신 재상 최승로의 고려국 시무28조

2014. 9. 3. 00:40들꽃다회




      신라 출신 재상 최승로의 고려국 시무28조


      

★ 시무 28조는 982년 최승로가 당시 임금이었던 성종에게 올린 정치개혁안이며, 본래 28조였으나 지금까지는 22조만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 내려오면서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 내용은 불교의 폐단과 사회문제, 민생문제의 개선책을 제시하엿으며 군주의 도리를 강조하였습니다. 즉, 광종의 독재력의 한계성을 깨닫고, 독재력 대신 유교 정치 이념을 적용하고자 한 것이었다. 

-“중앙관 5품 이상은 모두 봉사(封事)를 올려 현재 정치의 옳고 그름에 대해 논하라”는 성종의 명령이 있자, 당시 최승로는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의 관직으로 인사권을 담당한 중견 관료로서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상소문의 내용은 크게 태조 이래 경종(5조)까지 고려 왕의 정치를 평가한 <오조치적평(五祖治績評)>과 <시무이십팔조>로 구분된다.



★ 시무 28조
1. 요지를 가려 국경을 정하고, 그 지방에서 활 잘쏘고 말 잘타는 사람을 골라 국방을 맡게 하소서
- 북방의 오랑캐에 대해서는 그들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사적으로 방비해야 함을 지적 

2. 불사를 많이 베풀어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일이 많고, 죄를 지은 자가 중으로 가장하고, 거지 무리들이 중들과 섞여 지내는 일이 많습니다. 원컨데 군왕으로서의 체통을 지켜 이로울 것이 없는 일은 하지 마소서
- 공덕제를 실시하기 위해 백성의 고혈을 짜냈다는 사실을 들어 이를 없애자고 건의한 것(불교비판)

3. 우리 왕조의 시위하는 병사는 태조 때엔 그 수효가 많지 않았으나 뒤에 광종이 풍채 좋은 자를 뽑아 그 수가 많아졌습니다. 태조 때의 법을 따라 날쌔고 용맹스러운 자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 보내 원망이 없도록 하소서
- 국왕권의 전제화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여 시위군의 숫자를 감소

4. 왕께서 미음과 술과 두부국으로 길가는 행인에게 시주하나 작은 은혜는 두루 베풀어지지 못합니다. 상벌을 밝혀 악을 징계하고 선을 권장하면 복을 오게 할 수 있을 것이니 작은 일은 임금의 체통이 아니오니 폐지하소서
- 과다한 보시 행위의 제한(불교비판)

5. 태조께서는 수년에 한번씩 사신을 보내어 사대의 예를 닦았는데, 지금은 사신뿐 아니라 무역으로 인해 사신의 왕래가 빈번하니 지금부턴 사신 편에 무역을 겸하고, 그 밖의 매매는 일체 금지하소서
- 중국 문물의 맹목적인 도입을 삼가고 우리 실정에 맞도록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

6. 불보의 돈과 곡식은 여러 절의 중들이 각기 사람을 시켜 관장하며 비싼 이자를 주어 백성을 괴롭히니 이를 모두 금지하소서
- 불보(佛寶)의 전곡(錢穀)을 고리대로 이용하는 것(불교의 사회적 폐단 비판)

7. 지방관을 두소서
- 지방관 파견

8. 중이 마음대로 궁궐에 출입하며 총애 받는 것을 금하소서
- 승려가 궁궐에 마음대로 출입하여 총애 얻는 것을 금지(불교비판)

9. 관료들이 조회할 때는 모두 중국 및 신라의 제도를 따라 공복을 입게 하고 높고 낮음을 구분하도록 하소서
- 복식 제도 정비 

10. 중이 객관이나 역사에 숙박하면서 행패부리는 것을 금하소서
- 승려가 객관(客館)이나 역사(驛舍)에 유숙하면서 행패부리는 것을 금지(불교의 사회적 폐단 비판)

11. 풍속은 각기 다른 것이므로 모든 것을 반드시 중국과 같게 할 필요는 업사옵니다
- 중국 문물의 맹목적인 도입을 삼가고 우리 실정에 맞도록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

12. 공물과 요역을 공평하게 하소서
- 도서민에 대한 공역(貢役) 금지. 물건제공이나 노동력제공을 공평히 해달라는 내용
- 공물(貢物) : 중앙정부와 궁중(宮中)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지방에 부과하여 상납하게 한 물품으로 고려시대 이후에는 농산물 ·수산물 ·광산물 등 각종 토산물을 상공(常貢)과 별공(別貢)으로 구분하여 군현단위로 그 종류와 액수를 부과하였고, 각 군현에서는 다시 이것을 남자 장정수를 기준으로 하여 백성에게 분담시켰다. 
- 요역(沓役) : 국가가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징발하는 수취제도. 잡역(雜役) ·호역(戶役) ·부역(賦役) 등이라 하였다. 전통적 수취체제인 조(租) ·용(庸) ·조(調) 가운데 백성의 노동력을 징발하는 용에 해당된다. 고려시대에는 16~60세의 남자를 ‘정(丁)’이라 하여 그 의무를 지우고, 인정(人丁)의 수를 기준으로 한 호의 등급에 따라 노동력을 징발하였다. 그 형태는 궁궐을 조성하는 역이나 성을 쌓는 역과 같이 국가 차원에서 동원하는 것과, 조세나 공부(貢賦)를 마련하고 운반하기 위한 공역(貢役)처럼 군현(郡縣) 차원에서 동원하는 것이 있었다. 동원된 때에는 식사를 스스로 마련해야 했으며, 그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점심을 굶으며 노역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13. 연등과 팔관으로 백성들을 많이 동원하고 노역이 심하오니 원컨데 이를 감하여 백성이 힘펴게 하소서
- 토속신앙과 관련해서는 팔관회 ·연등회의 축소(유교사상에 반하여 비판)

14. 임금께서는 교만하지말고 아랫사람을 공손히 대하며, 죄지은 자는 법에 따라 벌하소서
- 국왕이 신하를 예로써 대우해야 함

15. 궁궐의 노예와 말의 숫자를 줄이소서
- 국왕권의 전제화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여 궁궐의 노비와 말의 숫자를 축소 

16. 중들이 다투어 절을 짓는데, 지방 수령들이 백성을 동원해 일을 시키니 백성들이 매우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를 엄히 금하소서
- 사찰의 남설(불교의 사회적 폐단 비판)

17. 근래에 사람들이 재력만 있으면 다투어 큰집을 지으니 그 폐단이 많습니다. 제도에 맞지 안는 것은 모두 헐어버리소서
- 토호의 가옥 규모를 제한

18. 신라가 말기에 불경과 불상을 만드는데 금은을 사용하여 사치가 지나쳤으니 마침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근래에도 그 풍습이 없어지지 안았으니 엄중이 금하소서
- 금 ·은을 사용하여 불상을 제작하는 행위를 비판(불교의 사회적 폐단 비판)

19. 공신의 등급에 따라 그 자손을 등용하여 업신여김을 받고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 삼한공신과 세가 자손의 예우를 주장

20. 불교를 행하는 것은 몸을 닦는 일이고,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니, 몸을 닦는다는 것은 다음 생을 위한 것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곧 오늘의 일이 옵니다. 오늘은 지극이 가깝고 다음 생은 지극이 먼 것이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일이 또한 그릇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 왕실의 지나친 숭불을 비판(불교비판)

21. 우리 왕조는 종묘 사직의 제사는 법대로 안 하면서 산악과 성수에 대한 제사는 많습니다. 그 제사들의 비용이 모두 백성들로부터 나오니 제사를 지내서는 안됩니다.
- 음사의 제한 등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유교사상에 입각하여 이를 제한

22. 광종이 노비를 안검하니 천한 노예들이 옛 주인을 해꼬지 하는 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런즉, 노비와 주인의 송사를 판결할 때는 분명히 하여 후회가 업도록 해야 할 것이오 
- 노비 문제에서 광종과 같은 급진적인 해결을 비판

23-28. 전하지 않는 6개조에는 아마도 외교정책 중앙관제 교육기관 및 교육정책 소목제도, 외척세력관계와 비빈(妃嬪)문제 상평창이나 토지제도 조세제도 등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 [ 분석 및 개요 ] 
최승로는 경주 출신으로 신라가 항복할 때 아버지와 함께 경순왕을 따라 고려에 귀순하여 일찍부터 고려에서 벼슬을 한 학자 출신의 중앙 관료였다. 최승로의 시무책은, 광종 사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새로운 정치 질서 수립의 필요성을 느낀 성종 때에 건의된다. 유교적 정치 이념의 구현을 목표로 했기에 많은 조목에서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고 있으며, 유교의 ‘민본 정치 구현’과 관련된 민생의 안정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호족 세력의 억제와 외관 파견의 주장 등으로 전국적 규모의 중앙 집권적 정치 형태를 구상하면서도 시위 군졸의 축소 등으로 왕권의 전제화를 견제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중앙 집권적 관료 사회에 애착을 가졌고, 귀족 관료들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사회적 재편성을 원했기 때문이다.

★ 시무(時務)란?
그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 전반에 걸친 문제점이나 폐단이나 그 일이 발생하게되는 원인이나 이유를 밝히고, 이에 대한 해결 방법 등을 제시하는 일종의 개혁안이나
개혁론으로 언급하고 있는 시기의 상황이나 실상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료이기도 합니다.
- 신라 진성여왕 최치원이 제시한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
- 고려 성종 최승로(崔承老)가 제시한 [시무이십팔조(時務二十八條)]
- 조선 선조 우부승지(右副承旨) 이이(李珥)가 제시한 [만언봉사(萬言封事)]
- 조선 숙종 성균관제주(成均館祭主) 박세채가 제시한 [시무만언봉사(時務萬言封事)]
- 조선 정조 시기 수원유생 우하영(禹夏永)이 제시한 [시무책] 등이
유명합니다. 일종의 사회 개혁안 내지 국가 혁신안이 되겠지요.


★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 조선 문종 2년 2월에 완성되었으며, 50권으로 된 편년체 사서이다. 김종서가 편찬을 주관하였는데, 『고려사』보다 앞서 단종 원년 4월에 인출 배포되었다. 
『補閑集』: 최자(崔滋 : 1188 - 1260)의 문집이다. 내용은 시에 대한 평론이 주이며, 당시의 사실(史實), 부도(浮屠), 이항(俚巷)의 쇄언(鎖言) 등이 수독되어 있어 당시의 사회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金忠烈, 『高麗儒學史』, 1984, 고려대출판부 
李熙德, 『高麗儒敎政治思想의 硏究』, 1984, 일조각 
李基白·盧鏞弼 등, 『崔承老上書文硏究』, 1993, 一潮閣 
金哲埈, 「崔承老의 時務二十八條」『韓國古代社會硏究』, 1975, 지식산업사 
李基白, 「集權的 貴族政治의 理念」 『한국사』4, 1974, 국편위 
河炫綱, 「高麗初期 崔承老의 政治思想 硏究」 『梨大史苑』12, 1975


http://home.cein.or.kr/~younggnn/data/history/history3jungse/h3-3-2.htm




최승로의  시무28조의 의의

982년(성종 1)에 “중앙관 5품 이상은 모두 봉사(封事)를 올려 현재 정치의 옳고 그름에 대해 논하라”는 성종의 명령이 있자, 당시 최승로는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의 관직으로 인사권을 담당한 중견 관료로서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의 내용은 크게 태조 이래 경종까지 고려 왕의 정치를 평가한 <오조치적평(五祖治績評)>과 <시무이십팔조>로 구분된다. 그 중에서 <시무이십팔조>는 현재 22개조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없어졌다. 상소의 내용을 보면, 불교에 대한 비판이 매우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광종 때 공덕제를 실시하기 위해 백성의 고혈을 짜냈다는 사실을 들어 이를 없애자고 건의한 것(2)에서 시작하여, 과다한 보시 행위의 제한(4)과, 승려가 궁궐에 마음대로 출입하여 총애 얻는 것을 금지하고(8), 왕실의 지나친 숭불을 비판했으며(20), 불보(佛寶)의 전곡(錢穀)을 고리대로 이용하는 것(6)과, 승려가 객관(客館)이나 역사(驛舍)에 유숙하면서 행패부리는 것을 금지하고(10), 사찰의 남설(16)과 금 ·은을 사용하여 불상을 제작하는 행위를 비판하는 등 불교의 사회적 폐단을 지적하였다. 물론 이는 6두품 출신의 유학자로서 유교정치사상에 입각한 정치형태를 추구한 최승로의 입장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불교의 폐단을 비판했을 뿐이지 불교 자체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불교를 믿는 것은 몸을 닦는 근본이요,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라 하여 불교의 개인 종교적 차원을 인정하였다. 반면에 토속신앙과 관련해서는 팔관회 ·연등회의 축소(13)와 음사의 제한 등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유교사상에 입각하여 이를 제한하려는 입장을 보였다(21).

다음으로 지방관을 파견하고(7), 토호의 가옥 규모를 제한하거나(17), 신민(臣民)의 공복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와 귀족 중심의 신분질서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다만 국왕권의 전제화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여 시위군의 숫자를 감소하거나(3), 궁궐의 노비와 말의 숫자를 축소하고자 했으며(15), 국왕이 신하를 예로써 대우해야 함(14)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점은 삼한공신과 세가 자손의 예우를 주장하고(19), 노비 문제에서 광종과 같은 급진적인 해결을 비판한 점(22)에서도 잘 나타난다. 

한편, 최승로는 유학자이기는 했지만 중국 문물의 맹목적인 도입을 삼가고 우리 실정에 맞도록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5,11). 이는 광종 때의 지나친 모화(慕華) 태도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나온 것이지만 고려 초기 유학자에게 자주적인 의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북방의 오랑캐에 대해서는 그들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사적으로 방비해야 함을 지적하는 안목을 지니기도 하였다(1). 결국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통해 유교사상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를 지향하였고, 그것이 성종에 의해 수용되어 고려 전기 사회를 정비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이 점이 <시무이십팔조>가 갖는 역사적 의의라고 할 수 있다.
2004-10-15 12:56 | 출처 : naver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