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선, 점, 원으로 시작된 가장 아름다운 세계 <훈민정음체>와 <궁체>

2014. 9. 10. 14:02글씨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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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점, 원으로 시작된 가장 아름다운 세계 <훈민정음체>와 <궁체>  홍윤표의 한글 이야기 / 2013

2012/09/19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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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을 설명한 가장기본적인 서체 '훈민정음체'

 

   한글 서체에서 가장 기본적인 서체는 문자를 창제할 당시의 모습 을담은 <훈민정음> 해례본, 1446에 보이는 서체일 것입니다. 우리는그것을 '훈민정음체'라고 부릅니다. 정확히 말하면 '훈민정음 해례본체'입니다. <훈민정음>언해본은 <훈민정음>해례본과 마찬가지로 훈민정음을 설명한 책이어서 <훈민정음>이라고 하지만,그 서체는 해례본체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렇다고 '훈민정음해례본체'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만 유일하게 쓰이는 서체는 아닙니다. 사실은 <동국정운>1448에서도 동일한 서체를쓰고 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과 <동국정운>의 예를 보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훈민정음의 기본 서체를 '동국정운체'라고 하지 않고 '훈민정음체'라고하는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이 훈민정음을 설명한 기본적인 문헌이기 때문입니다.


   '훈민정음체'의 각 자모의 모습을 보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자음 글자

 



 

(2) 모음 글자

 

    



(3) 음절 글자

 

          

 

 <훈민정음> 해례본의 한글 서체의 특징을 들면 아래와 같습니다.

 

① 한글 자모는 모든 글자가 가로선, 세로선, 동그라미, 왼쪽 삐침, 오른쪽 삐침, 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한글 자모는 직선과 점과 원으로구성됩니다. ''은 가로선과 세로선으로 구성되어 있고, ''은 가로선과 왼쪽 삐침과 오른쪽 삐침으로, ''는 세로선과 점으로 되어 있습니다.

② 모든 자모와 자모 사이는 떨어져 있습니다.

③ 한 자모 안에 보이는 하나 이상의 선의 길이는 모두 동일하지만, , , , ㅈ 등처럼, ', , , , , , , '의 세로선의 길이는 가로선 길이의 반 정도로 짧아집니다.

④ 가획할 때는 선이 다른 선과 붙게 되지만, 조합할 경우에는 두 자모가 각각 독립하여 분리됩니다. 모음의 경우에모든 선과 점이 붙어 있지 않은 까닭은 가획이 아니라 조합이기 때문입니다.

⑤ 각자 병서의 경우는 가로선의 길이를 세로선의 반 정도로 줄입니다.

⑥ 연서의 경우는 아래에 이어 붙는 자모의 크기를 위의 글자의반 정도로 줄입니다.

⑦ 모음 글자에서 '' '' ''와 조합할 때 하나가 조합할 때는 선의 한가운데에 오며, , , ㅜ 등, 두 개와 조합될 때는'' ''의 각각 1/3 정도에위치시킵니다, , , ㅠ 등.

⑧ 음절 글자를 이룰 때는 자모에 변형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받침으로 쓰인 ''은원래의 정사각형에서 직사각형으로 바뀝니다. 이것은 한 음절 글자에서 각 자모가 차지하는 공간적 배치때문입니다.

⑨ 음절 글자와 음절 글자는 독립적으로 띄어져 있습니다.

⑩ 모든 음절 글자가 정사각형 안에 들어가고 각 자모들은 그 정사각형에서일정한 공간적 위치를 차지합니다.

 


⑪ 각자 병서나 합용 병서의 자음 아래에 놓이는 모음 글자는 항상모든 자음 글자에 걸치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로 쓰지'ㅅ그'로 쓰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자모와 음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훈민정음의 제자원리에 의한 것입니다.

  

 

 

 

한글 서체의 첫 단계변화

 

   훈민정음의 창제 당시에 글자는 각 자모의 변별력에 중점을 두고 만들어서, 각 자모들을 그려서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실용단계에서 글자를 붓으로 쓰게 되면서 한글 서체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붓으로 '그리기'에서  '쓰기'가 되면서 일어난 변화입니다.


   '그리기'에서 '쓰기'로 이행하면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의 변화입니다. <동국정운> <용비어천가>의 두 문헌을 비교해 보면, <동국정운>에서 '' '' ''와 결합할 때에 둥근점으로 되어 있지만, <용비어천가>에서는 ''가 단독으로 사용될 때에만 동그란 점으로 남아 있고, '' 또는 ''와 결합할 때는 이미 선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래의 사진을 보고 글자를 비교해 보시지요.

 


 

   위의 변화를 보아서도 <동국정운> <용비어천가>보다 1년 뒤에 간행되었지만, <동국정운> <용비어천가>보다 먼저 계획된 문헌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1차적인 변화는 <월인천강지곡>1447 <석보상절>1447에서도 그대로 보입니다. 

 


 

 

''가동그란 점에서 아래로 내리찍은 점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월인석보>1459 때부터입니다.

 


'' 자의변화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동그란 점으로 쓰던 ''가 좌상左上에서 우하右下로 붓으로 찍어서 쓴 ''로 변화한 것입니다.

결국, 15세기에는 ''의 서체에 변화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가 단독으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 ''에 연결될 때에만 선으로 변화하게 되었고, 이것이 다시 단독으로 사용되던 ''조차도 변화하게 한 것입니다.

 

 

 

한글 서체의 두 번째 단계 변화 

 

   '훈민정음체'의두 번째 단계의 변화는 1464년에 필사된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五臺山上院寺重創勸善文>에서 나타납니다이것은 이때까지 목판본이나 활자본에서만 보이던 한글 서체가 최초로 필사본으로 보이면서 나타난 변화입니다.


    다음 그림은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의 한 부분입니다.

 




   그 변화 현상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이 서체의 변화는 특히 가로선에서 보입니다. 가로선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으면서 약간 비스듬히 위로 올라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에서 몇 가지 예들을 보도록 합니다.

 

 

'   '의 가로선과 '' '' 자의 가로선, ''  '' 자의 가로선, ''  '' 자의 가로선이 모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올라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붓으로 쓰면서 발생한 자연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은 원래 가운데 가로선이 세로선의 중앙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세로선의 중앙에 그어진 것입니다. 다음 글자의 모습을 보이면 그 현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③ 원래 '' ''에서 위의 가로선과아래의 가로선의 길이가 같았는데, 아래의 가로선이 조금 더 길어진 모습을 보입니다.

 

 

 '' ''에다 가로선을 가획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필사하면서 위의 가로선을 먼저 쓰고 ''을 씀으로써 위의 가로선이 길어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붓으로 한글을 자유롭게 쓰기 시작하면서 한글의 서체는 변화할수 있는 동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에는 두 가지 필체가 보입니다. 하나는 이전에 써 왔던 서체를 그대로 유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새로운 서체입니다. 한사람이 쓴 서체인지 두 사람이 쓴 서체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결국 활자본이나 목판본은 규범적인 성격을 띠지만, 필사본은 꼭 그럴 필요는 없기에 이러한 서체가 등장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6세기 이후의 한글 서체의 변화 

 

   한글 문헌이 지방에서 간행되기 시작하면서 한글 서체는 급격히 변화합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한글 문헌은 주로 중앙에서 간행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지방에서 간행된 것은 16세기 초입니다. 최초의 책은 1500연산6에 경상도 합천陜川 봉서사鳳栖寺에서 간행된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입니다. 물론 이 책은 중앙에서 간행한 책을 복각한 것이지만, 지방에서 한글책이 간행된 사실은 지방에서도 한글로 된 문헌을 해독할 줄 아는 사람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지방에서 간행된 문헌들은 중앙에서 간행된 문헌에 비해 정제되어 있지 않아서 한글 서체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특히 목판본이 그러한데, 그렇다고 한글서체의 변화가 일정한 방향으로 변화해 간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대체로 이 시기에는 세로 글씨의 중앙선이 맞지 않고 자유롭게 썼습니다. 아래의 화장사판은중경언해<華藏寺版恩重經諺解>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79년에 간행된 중간본<경민편警民編>은 경상남도 진주에서간행된 것인데 다음과 같은 서체의 변화가 보입니다.

        




    '' 2획으로도 나타납니다.

 

 


    ''의 오른쪽 삐침이 왼쪽 삐침의 가운데서 시작됩니다.

 


 

    ''의 맨 위에 가획한 세로선이 가로선의 가운데에 위치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이것은오늘날 북한의 '' 자 서체와 유사합니다.

 

 

 

 

 

17세기 이후의 한글 서체의 변화 

 

   17세기에 들어와서 가장 많은 한글 서체의 변화를 보이는 문헌은 1612년 함경도 함흥에서 간행된 목판본

<연병지남練兵指南>입니다.

 

    이 문헌에 보이는 한글 서체의 특징적인 변화를 보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 2획으로도 나타납니다.

 


    ',  ' 등에서 ''의 세로선이 왼쪽으로 기울여집니다.

 


 

    ''의 오른쪽 삐침이 왼쪽 삐침의 가운데에서 시작됩니다.

 


 

   언뜻 보기에 모음 글자만 현대와 형태가 다를 뿐이고, 자음 글자는 오늘날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면 오늘날 쓰고 있는 자모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글 자형의 변화는 주로 필사본과 지방에서 간행된 문헌에서 비롯된 것이 특징입니다. 관아에서 간행된 문헌은 어느 정도 표준적인 자형을 보이지만, 지방에서 간행된 문헌은 변화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펜과 연필이 나오기 전에는 필기도구가 모두 붓이었기 때문에 붓으로 직선을 긋거나 점을 찍거나 원을 그리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붓은 곡선을 그리는데 유리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한글의 자형이나 서체는 직선을 곡선으로,점을 짧은 선으로, 그리고 원을 꼭지가 있는 원으로 바꾸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아마도 직선을 최대한 곡선화하고 점을 선으로, 원을 꼭지가 있는원으로 바꾼 서체가 '궁체'일 것입니다.  

 

 

 

 

직선을 가장 아름다운곡선으로 변화시킨 한글 서체 '궁체' 

 



(1) '한글 궁체'의 탄생 배경

 

   서체의 변화나 새로운 서체의 창조는 글씨의 형태를 변화시키거나 창조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글씨는 선또는 획과 점의 배열로 이루어지며, 구조적이고 예술적인 구도로 되어있기 때문에 서체의 변화와 창조는 선과 점뿐만 아니라 배열원칙과 구도까지 바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글의 경우는 한글을 구성하는 자모의 선과 점, 구도가 매우 단순하여 변화를 시도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입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한글서체의 변화 과정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직선의 곡선화' '자모조합 구도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글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면, 한글 자형들은 이러한 선형에 철저했습니다.  

 

   한글은 필자가 누누이 지적한 바와 같이 ', , , , , ' 여섯 가지로 구성됩니다. 한글이 다른 외국어 문자들에 비해 선형線形이 단순하다는 점은 알파벳이나 한자, 일본의 가나글자 등과 비교해 보면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단순한 선을 가진 것이 한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글을 익히는 사람에게는 기억을 매우 쉽게 해준다는 엄청난 장점이 있지만, 예술성이 있는 선으로 승화시키려는 서예가들에게는 대단한 고뇌를 안겨 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서예가들은 선의 굵기를 달리하거나 직선을 곡선화하는 방향으로 한글 서체를 변형시켜 왔습니다.  

 

 

   한글 서체 변형의 극치는 바로 '궁체'라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도 '흘림체'가 더욱 그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글 서예에 관심을 둔 사람들의 눈에 가장 먼저 띄는 것은 '궁체'일 것입니다. 그것은 '궁체'가 아름다운 서체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원래 한글의 선과점에 가장 많은 변화를 준 것이기에 더욱 그러했던 것으로도 해석됩니다. 결국 '궁체'는 직선을 가장 아름다운 곡선으로 변화시킨 한글 서체입니다. 이것은 붓으로 글씨를 쓰면서 이루어진 자연발생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문자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인 변별력에 중점을 두었다면, '궁체'는 문자를 아름답게 표현하여 정서적 가치까지 표현하려고 한 것입니다. 다시말해 개념적 의미를 전달하는 한글에서 정서적 의미까지 전달하는 한글로 변화를 시도한 것입니다. 

 

 

 

(2) '궁체'란 명칭의 유래 

 

 

   '궁체'란 명칭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한자 서체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죽천竹泉 이덕형李德泂,1566∼1645의 수필집인 필사본 <죽창한화竹窓閑話>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전합니다.  

 

宣廟朝 余聘君申公湛 以副學入侍 經筵講畢 上回論歷代名筆曰 近觀雪庵兵衛森筆㳒㝡勁 雪菴未知何許人 或以僧 對聘 雪庵李溥光之別號也 與趙孟頫一時元朝人 上又問宮體何義 左右皆不知 聘君又對曰 陳后主時 江總作文華美 宮中效之 故曰宮體 梁之徐樆亦爲宮體 聘君歸語子弟曰 今之文官 皆不讀書 不知宮體良可歎也 <죽창한화> 20a

 

선묘조宣廟朝에 우리 장인인 신공申公 이 부제학으로서 경연에 입시했는데, 강이 끝나자 상은 역대의 명필名筆들을 논하다가 이르기를


"요새 보니 설암雪菴 병위삼兵衛森의 필법이 가장 힘찬데 설암은 어떤 사람인가?"라고 했다. 좌우 신하들은 혹 중이라고 대답했으나 장인은 말하기를

"설암은 이부광李溥光의 별호別號로 조맹부趙孟頫와 한 시대 사람으로 원나라 사람입니다"라고 답했다.


상은 또

"궁체宮體란 무슨 뜻인가?" 하니, 장인이 또 대답하기를,

"나라 후주后主 때 강총江總이란 사람이 글씨를 화려하고 아름답게 써서, 이것을 궁중에서 본받아 썼기 때문에 궁체라고 하옵니다. 그리고 양나라 서이도 역시 궁체를 썼습니다"라고 하였다. 장인은 집에 돌아가서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지금 문관들이 모두 글을 읽지 않아서 심지어 궁체도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 책의 저자인 이덕형은 16세기에서 17세기까지 산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글에 나오는 장인 신담申湛, 1519∼1595이 홍문관 부제학으로있었던 때가 1591년 이전이므로, 이덕형의 증언은 16세기 말의 역사적 사실입니다. 신담의 이야기가 수필이라고 하여도, 이덕형이 '궁체宮體'를 언급한 것을 보면 17세기초에 이미 '궁체'란 단어가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대담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문관이 '궁체'를 모르는 데도 불구하고 선조가 '궁체'를 알고 있었던 것은 '서예'에 대한 선조의 남다른 관심과 이해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문관들이 '궁체'를 몰랐다고 하니, '궁체'란 단어가 이 당시에는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덕형이 언급한 '궁체'는 한글서체가 아니라 한자서체를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한글궁체가 이 당시에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한자의 궁체가 들어오기 전이었기 때문에 한글 궁체는 아직 없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글 궁체가 먼저 발생했는지, 한자궁체가 먼저 발생했는지, 아니면 한글궁체는 한자궁체와 상관없이 발생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더 논의해야겠지만 우리나라 서체의 역사를 보면 한글궁체도 한자궁체와 연관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17세기초까지의 판본이나 필사본 중에서 궁체로 쓰인 한글을 발견할 수 없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위의 글에서 보이는 '서이' '서이의 음와淫哇'라는 말로 더 널리 알려진 사람입니다. 중국 남조 때 양나라 사람 서이는 사수士秀가 신기한 문장을 만들었는데, 이 신기한 문장이 곧 염문체艶文體입니다. 

그 문체를 이른바 '궁체宮體'라고 했는데, 보통은 이 문체가 애정의 시문詩文에 쓰였기 때문에 '음와'라고 한 것입니다. 결국 '궁체'는 본래 서체가 아닌 문체의 명칭이었던 것입니다.  

 

 

 

轉家令兼管記 尋帶領置 摛文體旣別 春坊盡學之 宮體之號 自斯而始 <南史, 摛傳> 

서이의 문체는 이전의 문체와는 달랐는데, 춘방에서 이를 열심히 배워서 궁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로부터궁체라는 이름이 시작되었다.

 

 

 

   '궁체'는원래 문체의 한 종류로 중국에서 널리 알려졌었습니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역대시체변증설歷代詩體辨證說' '시체詩體' 분류해 놓은 것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중에 '궁체'가 문체의 하나로 들어 있고, 그 설명이 함께 쓰여 있습니다.  

 

 

 

  결국 '궁체'란 중국의 한문 문체와 한자 서체로부터 온 말인데 이 문체가 화려하고 아름다워서 궁중에서 이를 본받아 썼기 때문에 '궁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이 용어가 한글 서체에도 그대로 적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한글 궁체도 화려하고 아름다워서 궁중에서 쓰기시작했던 것입니다. 

 

 

 

(3) 한글 궁체의 유래 


   그렇다면 오늘날 말하는 한글의 '궁체'라는 말은 언제부터 쓰였을까요?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 10호 1907 425일자  '서후죽기사西湖竹技詞'라는 기사 제목과 함께 다음 글이 실려 있습니다.  

 

雅調 完山 李鈺  山雲

郎執木雕鴈 妾奉合乾雉 雉嗚鴈飛高 兩情猶未已

福手紅絲盃 勸郎合歡酒 一杯生三子 三杯九十壽

阿姑賜禮物 雙玉童子 未敢顯言佩 繫在流蘇裏

早學宮體書 異凝微有角 舅姑見之喜 諺文女提學

四更起梳頭 五更候公姥 願言歸母家 不食眠日午

屢洗如玉手 微減似花粧 舅家忌日近 簿言解紅裳

人皆輕錦繡 儂重步兵衣 汗田農夫鋤 貧家織女機

               <이하 생략>

 

 

   이 한시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郎執木雕鴈 妾奉合乾雉 雉嗚鴈飛高 兩情猶未已    서방님은 나무기러기를 잡고 나는 말린 꿩고기를 바쳤지요그 꿩이 울고 그 오리 높이 날도록 두 사람 사랑이 끝이없을 지어다.

福手紅絲盃 勸郎合歡酒 一杯生三子 三杯九十壽   다홍실맨 술잔을 들어 신랑에게 합환주를 권했지요. 한 잔 술에 아들 셋 낳고 석 잔 술에 아흔을 산다고 했지요.

阿姑賜禮物 雙玉童子 未敢顯言佩 繫在流蘇裏    시어머님께서주신 예물은 옥동자 노리개 한 쌍이었지요. 드러내 놓고 달기가 부끄러워 술 속에다 매어 달았지요.

早學宮體書 異凝微有角 舅姑見之喜 諺文女提學  내 어려서부터 궁체 쓰기를 익혀 이응 자 양옆에 뾰족이 모가졌지요. 시부모님도 내 글씨 보시고 기뻐하시며 언문 여제학이라고 칭찬하셨지요.

四更起梳頭 五更候公姥 願言歸母家 不食眠日午   사경에 일어나 머리 빗고 오경에 시부모님께 문후 드리네. 이다음 친정에 가기만 해 봐라. 먹지도 않고 한낮토록 잠만 자리라.

屢洗如玉手 微減似花粧 舅家忌日近 簿言解紅裳   자주 씻어 옥같은 손으로 분을 조금 덜어서 꽃처럼 단장했네. 시댁 제삿날이 가까워지면 한동안 다홍치마를 벗고 지냈네.

人皆輕錦繡 儂重步兵衣 汗田農夫鋤 貧家織女機   남들 은비단옷도 가볍게 여겼지만 나는 허드레옷도 소중히 여겼지. 가문 밭에서 농부가 호미질하고 가난한 집 여인네가 베를 짜기 때문이지.

 

 

 

 

 

   이 글은 이옥李鈺의 글인데, '早學宮體書 異凝微有角   내어려서부터 궁체 쓰기를 익혀 이응 자 양옆에 뾰족이 모가 졌지요'에   '궁체宮體'라는 말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이미 이 말이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응 자를 쓸 때에 그냥 동그랗게 쓰지 않고 꼭지에 점을 찍었던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문무자文無子, 매사梅史, 매암梅庵, 경금자絅錦子, 화석자花石子, 청화외사靑華外史, 매화외사梅花外史, 도화유수관주인桃花流水館主人 등으로 불리던 이옥李鈺 1760년 영조36에서 1812년 순조12까지 생존했던 인물입니다. 이옥의 글을 통해 우리는 18세기 말이나 19세기초 한글 서예에 이미 '궁체'라는 단어가 널리 쓰이고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는 궁체가 널리 유행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 기록이 없어도 당시에 궁체가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지만, 한글서체에 대한 이러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입니다. 

 

 

   한참 후인 1931 2 28일 자 <동아일보> '졸업긔 마지한 재원들을 차저서 가는 곳은 어대? 「궁체」에 특재 잇는 옥가튼 쌍둥형제 이각경 양李珏卿孃과 이철경 양李喆卿孃 배화여자고보培花女子高普[]'란 기록도 보입니다. 

     

 

   또한 1932 9 1일에 간행된 잡지 <별건곤> 55호에 '학창야화學窓夜話, 가련문假戀文이 끼친 상처傷處, 시럽슨 작난마라'라는제목 아래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그 편지의 뜻을 요약해 말하면 첫머리가 모르는 분에게 편지해서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말로 비롯하야 지난 겨울 스케이팅 대회에서 당신이 1등한 것을 보고 아직도 기억에 나마잇단 말과 동모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드러 당신의 성함을 알게 되엿다는 말, 그 후 거리에서도 종종 맛낫다는 말과 도모지 이처지지 안는다는 말. 나는 모 녀고보 재학생으로 기숙사에 잇스며 한 번 맛나 인사할 때까지 학교 일홈을 명시할 수 업다는 말로 끗을 매진 것이다. 연분홍과 옥색 편지지 일곱 장에 깨알가티 잘고도 곱게 궁체로 썻스되, 사랑이란 문꾸는 비칠 듯 말듯하고 편지 피봉은 중도 개방을 두려워한다는 듯이 갑싼 하드롱 봉투에 너어 활달한 글씨로 수신인의 학교 학년까지 쓰고 일홈자는 한자만 틀리게 하고 음이 가튼 다른 자를 썻든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1907년당시에 이미 '궁체'란 말이 흔히 사용되었고, 1930년대에는 각종 기사에 쓰일 만큼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궁체의 확산 

 

   위의 여러 기록으로 보아 '궁체'란 한문의 문체로부터 시작해서 한자의 서체로 발전하여 우리나라에 수입되었고, 이것이 우리나라 한글서체의 명칭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에 수입되었다는 사실은 선조와 신담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궁체'란 문체가 주로 염문체로 쓰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궁체로 쓰인 문헌들을 검토해 보면 대부분 소설, 즉 이야기가 있는 글에 주로 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편 고소설이 대부분 이러한 염정소설이라는 점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글 서체로서의 '궁체'가 이러한 염정 소설의 서체로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보관되어 있는 구 장서각 소장본들을 살펴보면 주로 장편 고소설이 궁체로 필사되었지만, 궁체로 필사된다른 문헌들도 많이 전합니다.  예를들어 <경세문답언해經世問答諺解>1761, <경세문답속록언해經世問答續錄諺解>1763, <어제자성면칙윤음>, <조야첨재朝野僉載>, <령뉴>골패책, <곤범>18세기후반~19세기 초 여성 교훈서, <임신평난록> 등이 궁체로 필사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다량의 궁체 필사가 이루어진 시기는 대략 1750년 이후로 보입니다. 이 당시에 간인刊印된 한문본 책의 언해본이 궁체로 필사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1746년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어제자성편언해>는 궁체가 아닌데, 1761년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어제경세문답언해>나 1763년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어제경세문답속록언해> 등은 궁체로 필사되었습니다. 그 이후의 문헌에서는 궁체가 많이발견됩니다. 

 

 

    다음에 서영書影을 보도록 합니다. 



 

  이러한 궁체가 구 장서각 문헌에 많이 남아 있는 이유는 아마도 궁녀가 상주하면서 필사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언해와 필사가 각각 다른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언해와 필사가 동시에 이루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의 발문을 보면 언해자와 필사자가 동일 인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는데, 방대한 대하소설을 언해하고 다시 필사하는 과정을 겪은 것은 비경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궁체로 쓴 문헌에는 대하소설, 특히 번안소설이 많은데 이 소설들이 왜 궁중에서 쓰였는지, 읽는 이가 누구였는지 등은 궁체 연구에서 매우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왜 20세기에 와서 궁체로 쓴 글은 일정한 정서적 가치를 가지는 문장에서만 쓰이게 되었는지에 대한 연구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궁체로 쓰는 글은 일반 문장이라고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컨대신문 기사나 교훈 시를 궁체로 쓰거나 <훈민정음> 언해문을궁체로 쓰는 것은 궁체에 걸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필자 개인만의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남녀 모두 궁체에 대해 관심을 두고 쓰지만, 역사적으로는 궁체를 읽고 쓰는 계층이 한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궁체로 작성된 문헌은 주로 궁녀들에 의해 쓰였지만, 후에는 한글편지에 쓰였고, 주로 여성들에 의해 쓰인 것으로 보입니다.  

 

   궁체는 직선과 원, 점으로만 되어 있는 한글의 모든 형태를 최대한 곡선화한 것입니다. 필사본은 붓이라는 도구에 의해 궁체를 쓸 수있었지만, 목판본이나 활자본은 궁체를 새기는 데 어려움이 많아서 궁체로 된 판본이 출판된 적은 많지않습니다. 궁체로 된 판본이 등장한 시기는 대개 18세기중기 이후부터 19세기 말까지였습니다. 대표적인 문헌으로는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佛說大報父母恩重經諺解>1796년 용주사판, <태상감응편도설언해太上感應篇圖說諺解>1852, <경석자지문敬惜字紙文>1882, <이언언해易言諺解>1883, <송설당집松雪堂集>1922 등이 있으며, 연활자鉛活字본은 대개 19세기기독교 서적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음에 몇 가지 서영書影을 보이도록 합니다. 

 

 

    모두 19세기 중기부터 20세기 초기에 만들어진 책이어서, 이 시기가 궁체의 전성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시기 궁체의 특징은 고소설이 아닌 글에도 사용됐다는 점, 궁체를 체본으로 출판하여 보급했다는 점 등입니다. 

 

 

(5) 궁체의 성행 

 

    궁체가 궁중을 뛰쳐나와 서민들에게까지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부터였습니다. 그러므로 궁체로 찍어 낸 한글 문헌들은 대개 19세기에 간행된 것들입니다. 궁체가 가장 융성한 때는 19세기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에서 간행한 한글 문헌에서 일반화되기 시작했고, 20세기 초에는 지방으로 확산됩니다. 전주에서 간행된 완판본 중에도 궁체와 유사한 서체로 쓰인 문헌이 보이기도 합니다. 20세기 초에는 척독尺牘, 그중에서도 언간諺簡 쓰는 방식이 유행하는데, 이것을 붓으로 쓰는 방식을 소개한 문헌들은 예외 없이 궁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언간의 형식은 소위 민체를 사용했지만, 이것을 붓으로 써서 전달하는 글씨체는 궁체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결과 필사본은 편지, 가사, 고소설의 구분 없이 모두 궁체로쓰는 궁체의 대유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궁체를 체본으로 만든 책이 <언문체첩>1917입니다. 그 서영을 보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6) 궁체의 연구

 

   궁체를 체계적으로 보급하고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로 보입니다. 그러나 주로 궁체를 썼을 뿐이지, 본격적으로 궁체를 연구하기 시작한것은 역사가 오래지 않습니다. 궁체의 서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도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궁체는 일반적으로 정자체, 반흘림체, 진흘림체로 구분합니다. 필자도 여기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자, 반흘림, 진흘림을 구분하는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감각적으로 구분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그 예를 들어 보지요. 

 

 

 

   궁체를 정자체, 반흘림체, 진흘림체로 분류하지만 정자체만 보아도 굉장히 다양합니다. 몇 개의예를 들어 보이도록 합니다.활자본과 목판본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지요.  

 

 

 

() 활자본의  정자체 

 

 

위의 <이언언해> <경석자지문> 참조 

 

 

() 목판본및 석판본의 정자체 

 


   흘림체는 더 다양할 것입니다. 그런데금속활자본에는 궁체 흘림체가 보이지 않고, 목판본과 석판본에서만 나타납니다. 

 

 

 

() 목판본과 석인본의 흘림체 

 

 

 

() 목판본 고소설의 흘림체 

 

 

   위에 든 예들은 고소설을 제외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궁체에 관한 것은 대부분 필사본을 중심으로 자료를 찾고, 그서체를 이용하여 창작 활동을 해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목판본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목판본으로 출간할 정도면 어느 정도 작품화되어 있는 서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호감을 얻은 서체라는 의미도 될 것입니다. 

 

다음에 경판본 궁체 고소설의 서체들을 보이도록 합니다. 

 


 

   위의 사진만 보아도 동일한 출판사에서 간행한 문헌인데도 궁체 서체가 조금씩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유동신간의 문헌들인<사씨남정기> <월봉기>, <금향정기>는 동일한 서체이지만 <숙향전>은 다른 서체입니다. '홍수동판'의 서체도 <월봉기> <제마무전>은 유사한 서체지만, <조웅전>은 조금 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다른 출판사지만 서체가 동일한 것들도 있습니다. 경판본이라고하지만 각각 쓰던 서체에 조금씩 차이가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궁체 목판본들도 대체로 반흘림체를 사용하되 어느 것은 더 심한 흘림체<울지경덕전>, <금향정기>를 사용하고, 어느 것은 정자체와 반흘림체의 중간 정도의 서체<홍길동전> 를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비전공자는어느 정도까지를 정자체, 반흘림체, 진흘림체라고 규정하여야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한글 서예계에서도 주장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정자체는 글자와 글자 사이에 연결성이 없다는 의미인데, 일반적으로 글자와 글자 사이에 붓길에 따른 연결성이 없다는 뜻으로 보입니다.그러나 목판본에서는 정자체도 연결성이 있어서 이 정의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획이 축약되어 변형되는 것을 '흘림'이라 하고, 마치 암호처럼 사용된 것이 '진흘림'이라고 했는데, 이 또한 명쾌한 구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음의 '서기 이씨 글씨'를 궁체 진흘림이라고 하는데, '배덕전홍윤표소장의 글씨는 정자체인지, 흘림체인지, 진흘림체인지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7) 궁체의 표준 

 

    다음 문헌들은 필자가 보기에 궁체 정자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느 것이 가장 기본적인 궁체 정자체인지를 결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서예가들이 판단하여 결정할 일이지만, 그것도 보는 사람마다 감각적으로 판단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궁체 정자체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표준을 결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궁체 정자체, 궁체 반흘림체, 궁체 진흘림체의 기본 문헌이 무엇인지를 정해 두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은 다른 모든 한글 서체에도 적용시켜야 합니다.

 

 

 

 

 

'훈민정음체'에서 '궁체'까지 

 

   훈민정음 창제 시 만들어진 한글 자형이나 서체는 각 한글 자모의 변별력이나 조합, 각 자모의 공간 배정 등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글자를 쓰고 읽는 데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면, 자연히그 자형이나 서체에 변화가 생깁니다.

 

 

   훈민정음이 창제될 때 문자를 쓰는 도구는 붓이 유일했습니다. 그런데 훈민정음은 '직선, , '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고, 주로 직선이 중요한 변별 기능을 했습니다. 하지만 붓은 직선을 쓰는 데는 마땅한 도구가 아니기 때문에 자연히 붓으로 쓰기 좋은 자형이나 서체로 변화하게 됩니다. 그래서 첫번째로 자형과 서체가 바뀐 것은 동그란 점으로 되어 있는 ''자입니다. 먼저 다른 가로선이나 세로선과 조합할 때 짧은 선으로 바뀌었고, 단독으로 쓰일 때만 동그란 점을 유지하다가 그 마저도 좌상左上에서 우하右下로 찍어서 쓰는 ''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뿐만 아니라 ''이나 '' 등의 두 선이만나는 곳도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러한 모든 변화가 붓의 기능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것이 직선입니다. 직선을 최대한 곡선화하여 화려하고 아름다운 서체로 만들어 낸 것이 궁체입니다.궁체는 '훈민정음체'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서체라고할 수 있습니다. 

 

   궁체도 여러 단계를 거쳐 오늘날의 궁체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궁체가 정착하는 과정을 대략적으로 살펴보았지만 앞으로 더 정밀하게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자는 의사만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글 속에 내재되어 있는 감정도 전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글서체를 계속 개발하고 발전시켜야만 합니다. 우리 선조들이 한글 서체를 어떻게 유용하게 활용해 왔는지에 대한 폭넓고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연구는 단지 한글 서예가의 임무만은 아닙니다. 한글 문헌자료를 잘 알고 있는 국어국문학자들과 한글 서예가들이 함께 모여 살펴본다면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 학문 분야에서 융합적 연구가 강조되고 있는 것처럼 한글 서예가와 국어국문학자들간에도 함께 연구하려는 노력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_홍윤표

 

홍윤표

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어학회 회장, 국어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겨레말큰사전 남측 편찬위원장을 지냈다.동숭학술연구상, 옥조근정훈장 등을 받았으며 <근대국어연구>, <17세기 국어사전>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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