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마니산 들꽃다회 - 셋

2014. 10. 13. 12:16들꽃다회








       강화 마니산 들꽃다회 - 셋

                    

                    /  20140927~28 토,일요일, 맑음 & 해무



마니산 참성단 

- 뒤로 조금씩 퇴물림기법으로 쌓은 제단 성벽 

돌틈에 자리한 식물들의 작은 우주.....


거미고사리,냉이, 제비꽃 종류







가래고사리







가는장구채- 익어가는 씨방







함허동천 쪽으로 가는 암릉길의 무명봉....

짙은 해무(海舞)의 춤사위....






마니산 정상에서 바라본

무명봉과 봉오리해변의 갯뻘




 


참성단에 오른 두분 스님과 함께 나눈 무애차(無碍茶)

 


- 무애차는 통일신라 초기에 원효대사께서 패망한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화정사상(和諍思想)과 무애사상으로 화합시켜서 통일신라의 기초를 닦는데

 

동참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창안하신 당시 흔하게 쓰이던 가루차다법을

 

응용한 새로운 농차법(濃茶法)이다.

 

 


당시 삼국의 일반적인 가루차다법은 요지음의 엷게 타서 저은 것처럼 박차(薄茶)로

 

차맷돌에서 간 잎차나 단차를 차솥에서 달이는 전다법(煎茶法)이였는데,

 

차모임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골고루 마시기에는 여러가지 제약이 따르므로

 

차솥에다 거친 가루차의 분량을 많이 넣어서 진하게 달여내서, 

 

처음 찻사발을 받은 사람이 마실만큼 마시고 옆사람에게 건네주어

 

찻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이 돌려가면서 한 사발의 가루차로도 모두 마음껏 마시게 하였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다법(茶法)이다.

 

농차법으로 저은 가루차는 많이 마시고 싶어도 농도가 진하기 때문에 많은 양을 마실 수 없어 

 

모임에 참석한  여러사람들이 양껏 마시고도 한바퀴를 돌려가며 마실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음용습관으로는 농삿일 등 두레작업에서 새참용 막걸리를 

 

커다란 바가지나 양푼에 따루어 양껏 마시고 남은 것을 

 

옆사람에게 주어 돌아가며 마시는 풍습이 아직까지 농촌에 남아 있다.

 


이러한 원효스님의 무애다법은 일본에 전하여져서 현존하는 다도종가 중에서

 

70~80%는 우려마시는 포다법(泡茶法 : 韓中에서는 沖泡法, 일본에서는 煎茶法라고 함)보다

 

가루차인 말차법(한국 중국은 末茶法,일본은 抹茶法으로 표기)을 주종으로 삼고 있으며,

 

가루차를 주종으로 하는 다도종가 중에서 70~80%는 박차법(薄茶法) 보다

 

무애차의 후신인 농차법(濃茶法)을 주종으로 삼고 있어서

 

다도종가의 절반 이상이 이 농차법(濃茶法)을 위주로 교육하고 있다.

 

 

**** 한국과 중국에서 전다법(煎茶法)은 차솥이나 차주전자를 화로 위에 올려 놓고

비교적 오래 달여서 마시는 다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각종 詩文에서 자주 나타난다.

 

반면에 일본에서 전다법(煎茶法)은 산차류를 한중(韓中)의 포다법과 같이

다관에 뜨거운 물을 부어 우려내어 마시고 있는 

- 현재 중국의 공부차나 한국의 작설차 등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포다법을 전다법이라 하고

옥로차와 같은 비발효 산차(散茶)인 녹차를 전차(煎茶)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 일본에서 비발효 산차의 제다공정은 찻잎을 수증기에 찌는

증차(蒸茶)과정을 통하여 찻잎에 들어있는 각종 미생물인 발효효소의

활동을 멈추는 공정을 이용하는 것이 대부분이나, 과거에는 우리의 작설차를 만드는

제다공정처럼 가마솥이나 솥뚜껑에서 덖어내는 과정을 거쳐서 만들었기 때문에,

 이러한 차를 덖는 과정을 거친 차를 전차(煎茶)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내노라 하는 다례사범들 중에서도 이를 아직도 혼동하고 있는 경우를

자주 접하고 있는 데, 참으로 애석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는 일본식 다도의 잔영(潺影)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중국 차상인들과 교류의 영향으로 오래 묵은 보이차의 선전과 자랑,

짝퉁이 난무하는 중국 골동 자사호 등은 차애호가들이 

상업주의로 빠져드는 일부 몰지각한 차상인들이나 차호사가들의

악취미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십여년 전부터 자주 보이고 있어,

한국차계의 앞날에 다소 희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나

진정으로 차를 좋아하고 선조들의 차정신을 소리없이 갈고닦는

다인들이 적지 않음을 볼 때, 그리 걱정할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농차법이 일본에서 현재에도 성행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일본국민들이 전통문화의 보존과 전수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으나,

 

근세의 명치유신 전까지 쇼군 아래 유력무사들이 지방별 번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전란이 잦았고

 

최근까지도 일본은 세계2차대전에서 패전으로 인한 전쟁피해자들에 대한 위무와 

 

국민화합을 위한 찻자리라는 현실적인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장차 언젠가 통일을 앞두고 있는 우리나라의 분단현실에서 이 원효대사의 무애다법인

 

농차법이 장래 통일된 한국의 기틀을 쌓아가는데 꼭 필요한 화정(화쟁 和諍)의 수단이자, 

 

그동안 서로 다른 체제 속에서 살아온 남북한인들의 화합에 중요한 도구로 활용될 수 있기에

 

지금부터라도 이 무애다법을 널리 보급하여 통일에 대비하여야 할 것이다.
 

원효의 무애차가 일본으로 전해진 시기와 장소는 

 

원효대사가 무덤에서 물을 마시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한 661년 이후로,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후 백제부흥군이 활동하던 시기(660~664년)로 볼 수 있으며

 

무애다법의 농차법이 일본에 전해진 장소는

 

원효대사가 백제유민을 위무하려고 주석하셨던 부안군 변산반도의

 

능가산 개암사 일대라고 비정할 수 있다. 

 

이러한 연유로 한국의 다회가 선비 중심의 문인다회(文人茶會)임에 비하여

 

일본의 다도는 사무라이 중심의 무인다도(武人茶道) 형태로 전하여 온다.

 

 


개암사를 품고 있는 능가산(楞伽山 일명 변산 卞山)에는 원효대사가 개암사에 주석하셨을 때,

 

수도하셨던 암굴인 원효방과 작은 암자터, 백제부흥군의 지도자 복신(福信)이 머물렸던

 

복신굴이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백제부흥군들의 군복을 만들 베를 짯다는

 

베틀굴도 바로 인근에 있다.

 

 

 

 

백제부흥군은 의자왕의 아들인 백제왕자 풍(豊)이 

 

일본에서 귀국시 데려온 왜병 최소 2만7천여명이 주축이였으므로, 

 

(3~4 차례 파병으로 총 5~6만명이라는 열도부여의 왜병이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보임.

 

이는 백제 멸망시 신라군 8만여명, 당나라군 13만여명에 비하여 결코 적은 숫자의 병력이 아니라

 

열도부여인 왜에서 거의 전군을 동원하여 총력을 다하여 반도부여의 백제를 부흥하려고 파병함.)

 

이때 참전한 왜병이나 군승들을 통하여 무애다법이 일본으로 전하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이에 대한 확실한 1차사료나 문서상의 기록이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으나,

 

내전과 변란으로 소란하였던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면 <차 마시기> 같은 

 

일상적인 일은 1차사료나 문서로 기록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되나,

 

아직 나타나지 않은 서적이나 필사본 등이 장래에 발견되는 경우를 배제할 수 없다. 

 

다만 패전국인 백제의 기록은 거의 대부분 훼철 또는 망실되어 

 

오늘에 전하여지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여러가지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가루차인 박차(薄茶 왼쪽)와 농차(濃茶)


- 은다관에는 백선엽장군기념사업회에서 보내주었다는 작설차가

 

오동(烏銅)다관에는 중국의 고산오룡차가...

 



 



원효대사와 차(茶)


원효대사에 관한 것은

사포와의 일화 및 감천전설 등을 비롯하여 원효방 다론 등 많다.

    

정상구의 『한국다문화학』에서는

원효가 불교계의 해동보살일 뿐 아니라 우리의 다도정신

그의 自得道通한 견지에서 승화시키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논하고 있다.


  -  중략 -


원효

적지적(寂之寂)사상도 바로 노자의 그것과 상통한다고 본다.

  

적(寂)은 고요할 적, 바로 정야(諍也)다.

적을 강조하여 적지적이라 함은 바로 적의 근원인 정(諍), 바로 깨달음을 일컬음이라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원효의 불교사상은 바로 화정(和諍)이라 하겠고,

다선일체관(茶禪一體觀)을 가진 원효의 다도정신 역시 화정(和諍)이라 함이 옳을 것이다.

 

        - 중략 -


후일 고려왕조에서는

그의 위대한 화정사상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화정국사라는 칭호를 내리기까지 했다.

 

화정국사 원효

화정정신이 바로 한국다도정신의 근원이라고 하겠다.

  

원효대사에 얽힌 차얘기는

고려 이규보의 「남행월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튿날

   부령현재인 이군 및 다른 손님 6-7인과 원효방에 이르렀다.

  

   높이가 수십길의 나무 사다리가 있는데,

   발을 포개고 매우 조심하여 걸어서 도달하였더니,

   뜨락의 층계와 창문이 수풀 끝에 솟아 있었다.

  

   듣자니

   가끔 범과 표범이 있는데 아직은 당겨서 올라온 놈이 없다고 한다.

  

   곁에서 한 암자가 있는데,

   속말로 사포성인이 옛날에 살던 곳이라고 한다.

  

   원효가 와서 살았기에 사포 또한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서 효공에게 올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음을 근심하다가,

  

   그 물이 문득 바위 틈에서 솟아나고,

   맛이 매우 달고 젖과 같아서 점다를 시험하였다.

  

이 글에 나오는 원효방터

전북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개암사의 뒷산인 우금암 밑이었던 것으로 판단되고,

  

원효대사

그 곳에 주석하신 시기는 백제가 멸망한 뒤 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원효대사와 사포스님에 대한

설화는 『삼국유사』의 「말하지 않은 사복」 조에 적혀 있다.

  


       - 네이버 블로그 <살구에요..>  남살구 님의 글 

" 원효의 화정지화" 중에서 발췌 ....




 

*****  위의 인용문 고려 이규보의 <남행월일기>에서 

 

개암사 뒷산인 우금암에 있는 원효방터(원효굴)  이야기 중에 


 

 

 "그 물이 문득 바위 틈에서 솟아나고,

 

   맛이 매우 달고 젖과 같아서 점다를 시험하였다." 에서 


 점다(點茶)는 당나라 때 유행한 다법으로 녹차, 단차(團茶)나 떡차(餠茶) 류의

 

비~발효차를 화로불에 쬐어 말린 후, 차맷돌(다마 茶磨, 다연 茶硏)에 갈아

 

체로 쳐서 거친 가루차를 만든 다음 차솥(다당 茶鐺)의 끓는 물에 가루차를 넣고

 

다려마시는 전다법(煎茶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나,

 

고려 중기 이규보 당시에는 송대에 유행한 찻솔(茶筅)으로 저어 마시는

 

다법이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점다(點茶)라고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거친 쌀가루 크기의 찻가루들이 달일 때 찻물 표면에 거품이 엉겨붙어

 

마치 떡처럼 보이는 거품떡을 말발(沫餑 : 떡 餑자)이라 한다.

 

 

 

 

요지음 일본의 말차도(抹茶道)에서는 제다공장에서 만든 입자가 고운 가루차를

 

차솔(다선 茶筅)으로 저어(격불 擊拂)하여 마시기 때문에 원효의 무애차와는 차이가 있으나,

 

이는 송대 점다법의 도입과 제다공정의 발달에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



 


마니산 정상에서 바라본 참성단





 

여차리 해변의 갯뻘



 

1. 원효대사의 사상

    현존하는 그의 저술은 20부 22권이 있으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100여부 240권이나 된다.
특히, 그의 《대승기신론소》는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은 인도의 마명(馬鳴)·용수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명칭을 받은 저작으로서 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대저술이다.
그는 학승(學僧)으로서 높이 평가될 뿐만 아니라, 민중교화승으로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 종파주의적인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會通)시키려 하였는데 그것을 오늘날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라 부르며, 이것은 그의 일심사상(一心思想)·무애사상(無碍思想)과 함께 원효사상을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사상은 너무나 다양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나 항상 ‘하나’라는 구심점을 향하였고, 화쟁과 자유를 제창하였다.

 


① 일심사상 

   원효의 일심사상은 그의 저서 《금강삼매경론》·《대승기신론소》 등 그의 모든 저술에서 철저하게 천명되고 있다.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본각(本覺)으로 돌아가는 것, 즉 귀일심원(歸一心源 : 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만법귀일(萬法歸一)·만행귀진(萬行歸眞)을 굳게 믿고 사상과 생활을 이끌어갔다. 그리고 일심이야말로 만물의 주추(主樞)이며, 일심의 세계를 불국토(佛國土) 극락으로 보았고, 이것을 대승·불성(佛性)·열반이라고 불렀다.

 


② 화쟁사상 


    원효는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화엄경》·《반야경》·《열반경》·《해심밀경 海深密經》·《아미타경》 등 대승불교 경전 전체를 섭렵하고 통효(通曉)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전체 불교를 하나의 진리에 귀납하고 종합 정리하여 자기 분열이 없는 보다 높은 입장에서 불교의 사상체계를 세웠다. 이러한 그의 조화사상을 화쟁사상이라고 한다. 《십문화쟁론 十門和諍論》은 바로 이러한 화쟁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핵심적인 저술이다. 그는 여러 이설(異說)을 십문으로 모아 정리하고 회통함으로써 일승불교(一乘佛敎)의 건설을 위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그의 이와같은 통불교적 귀일사상은 한국불교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③ 무애사상 

    원효의 무애사상은 그의 사생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한 자유인이었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라고 한 그의 말을 보더라도 그의 무애사상은 짐작된다.
그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무릇 중생의 마음은 원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오히려 바다와 같으므로 평등하여 차별상(差別相)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철저한 자유가 중생심(衆生心)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고, 스스로도 철저한 자유인이 될 수 있었으며, 그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승과 일심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밖에도 원효는 여래장사상 등 불교의 모든 사상에 대하여서도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2. 원효대사의 생애 및 배울점

       원효(617 ~ 686년)는 속성은 설(薛)이고, 법명은 원효이며 아명 서당(誓幢) ·신당(新幢). 압량(押梁:慶山郡) 출신이고 설총의 아버지이다. 648년(진덕여왕2) 황룡사에서 승려가 되어 수도에 정진하였다. 가산을 불문에 희사하고, 초개사(草開寺)를 세우고 자기가 태어난 집터에는 사라사를 세웠다. 650년(진덕여왕 4)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는데, 중도에 고구려 순찰대에 붙잡혀 실패하였다. 661년 의상과 다시 유학길을 떠나 당항성에 이르러 한 고총(무덤)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마신 물이, 날이 새어서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음을 깨닫고 그냥 돌아왔다. 그 후 분황사에서 독자적으로 통불교를 제창,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하루는 거리에 나가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 라고 노래한 것이 태종무열왕에게 전해져 요석공주와 잠자리를 같이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설총이 태어났다. 이 사실을 스스로 파계로 단정하고,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복성거사라 자칭하였으며, 《무애가》를 지어 부르며 군중 속에 퍼뜨리자 불교가 민중 속에 파고들었다. 또 당나라에서 들여온 《금강삼매경》을 왕과 고승들 앞에서 강론하여 존경을 받았다. 그 후 참선과 저술로 만년을 보내다가 70세에 혈사에서 입적하였다. 뒤에 고려 숙종이 대성화정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불교사상의 융합과 그 실천에 힘쓴 정토교의 선구자이며, 한국의 불교사상 큰 발자취를 남긴, 가장 위대한 고승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다.


2005.12.26 11:56|신고


- 디음 Tip 답변 중에서.....


 


옅은 해무가 피어 오르고....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이 복신을 죽인 능가산

복신굴에 관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기록 

   부여풍을 호위하는 일본의 함대가 170척의 규모에 달했다. 일본은 부여풍을 호송한 후 천황의 칙서를 선포했다. 복신도 천황으로부터 작록을 받았다. 그 때 복신과 부여풍은 이마가 닿도록 천황을 향해 절을 했다. 이를 본 백제사람들이 모욕감이 들었는지는 몰라도 눈물을 흘렸다. 663년 6월에 일본의 장군 上毛野君稚子등이 신라의 沙龜岐奴江에 있는 2성을 함락시켰다. 일본을 출발한 함대가 주류성에 가까워지면서 복신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졌을 수도 있다. 사실 일본군도 당군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이 승리한다면 점령군으로 돌변할 것이고, 부여풍이 괴뢰왕이 된다. 본래 국제정치란 도와주는 것이 없지 않는가. 복신은 자리에 누었고, 부여풍이 찾아왔다.
 
   복신의 피살은 부여풍이 요청한 일본의 대규모 원군이 도착하는 시점에서 일어났다. 『삼국사기』권28 의자왕조를 보자.
 
   복신은 병을 핑계로 하여 굴속 방에 누어 (부여)풍이 문병 오는 것을 기다려 잡아 죽이려고 하였다. 풍이 이것을 알고 친하고 믿을만한 자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엄습하여 죽이고 사신을 고구려와 왜국에 보내 군사를 청하여 당나라 군사를 막았다.

   동굴 그곳은 부여풍의 입장에서 복신의 진영 중심이었다. 그럼에도 부여풍은 자신의 사람들을 이끌고 가서 복신을 엄습했고, 그를 포박할 수 있었다.『 일본서기』권27 천지천황 원년 5월조를 보면 “백제의 왕 풍장은 복신이 모반의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은가 의심하여 손바닥에 구멍을 뚫고 가죽끈으로 복신을 결박했다.”라고 하고 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백제부흥군 내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부흥군이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수세에 놓이면서 복신에 대한 충성심도 엷어져 갔고, 부여풍을 옹립한 일본군이 오면서 복신의 진영에서 배신자가 속출한 느낌이 강하다. 복신이 피살된 663년 6월 일본군이 한반도에 도착하여 신라의 성을 공격한 시점에 주도권이 일본의 손에 넘어갔다.
 
(663) 가을 8월 壬午朔甲午(13일)에 신라는 백제왕(부여풍)이 스스로 良將을 참하였다는 것을 알고 즉시 백제에 침입하여 먼저 州柔를 함락시키려고 하였다. 백제왕은 적의 계략을 察知하고 장군들에게, “大日本國의 구원군 장군 盧原君臣이 1만여의 군사를 이끌고 오라. 원컨대 장군들은 미리 계략을 세워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 白村까지 가서 그곳에서 구원군을 영접할 것이다.”고 말했다[日本書紀 권27 천지천황 2년(663) 8월 조].


   부여풍은 백제부흥을 일본의 군사력에 의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복신의 죽음은 일본의 입장에서도 “양장의 죽음”이라 표현되고 있다. 복신의 제거는 백제부흥군의 총체적인 부도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은 신라도 당도 잘 알고 있었다. 나당연합군이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공격하려 하였다.

 
 출 처: 百濟文化史大系硏究叢書 제6권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 중에서 발췌 ....

 

함허동천과 정수사로 가는 암릉길





 

산허리를 지나가는 짙은 해무




 

       원효대사는 <판비량론>에서 당나라 최고지성인 삼장법사 현장스님의

인도 불교 논리학인 인명학(因明學)을 소개한 오류를 지적하면서 얻은 동력으로

주창한 불이문(不二門) 사상은 불교내의 각 종파간의 화합을 다지는 화정론(和諍論)으로 

발달하여, 불교 내부의 화합과 통합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몸소 각 교파의 화합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보현행(普賢行)을 하셨다. 


   이 화정론은 당시 백제부흥운동(661~664년)의 소멸, 당의 웅진도호부 설치, 그 이후에 신라군과

연합한 당의 군사작전으로 인한 고구려 멸망(668년) 등등의 변란과 잦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의 수습에도 크게 활용되었다.

여기에 원효대사님께서 보현행을 하신 큰 뜻이 담겨져 있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능가산 개암사 울음바위에 원효방과 조그만 암자를 짓고

이곳에 주석하신 연유도 복신굴과 우금산성 일대에서 민간설화에서 전하는 역사적인

백제부흥군의 비극과 이로 인하여 흉흉해진 민심을 교화, 수습하시려는 보현행이다.

불교와 잦은 전란과 백제해상대제국의 멸망, 부여국의 분국(分國)이였던 왜의 잔류병들과 

이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열도부여(왜)에서 파병된 지원군(왜구)의 잦은 침략 등등으로 

백제의 고토에는 바람 잘 날이 없었던 때에 원효, 의상 두 스님께서 지금 변산(卞山)으로 

부르는 능가산에 주석하셨다.

 

    원효의 화정사상은 패망한 백제인과 고구려인들의 정신적인 위무와 화합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후에 통일신라을 이룩하는 데 큰 기틀로 활용되었다.


 

   - 저의 블로그 < 능가산 개암사 들꽃다회(2) -20130929 셋 >에서 발췌 ....

 



 

흥왕리와 여차리 해변은 해무가 겉히고







능선상에 자연적으로 고인돌 모양으로 형성된 돌





아래 5장의 사진들은 사무실에서 찍은 참고사진임. 

 

 

 

 

원효 선사가 창안하신 무애차(無碍茶)

- 진한 가루차 (농차 濃茶)

 

원효스님께서는 거리나 들녘에서 만행시,

다완을 쓰기 어려울 때에는 다완 대용으로 민간에 흔하던

바가지를 사용하기도 하셨다.

이를 무애박이라고 부른다.

 

 

 

 

 

 

고려상감청자 연화당초문 5첩대발우 부분

- 일본에서 소장중이던 문화재를 몇년 전에 회수하였다고 함.

 

   당시 싯가 7억원 가량으로 구매의사를 밝혔으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구입예산을 확보하지 못하여 

최순우 관장이 소장을 탐내다가 구입하지 못하였다고 함.

 

 

  

 

- 발우를 바로 놓았을 때, 꽃송이가 위, 아래 양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국문(大菊紋)인지 연화문(蓮雲紋)인지 확실치 않다.

 

지배영역이 페르시아, 러시아, 동유럽, 인도, 중국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징기스탄의 후예들이 분할통치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페르시아나 아열대 지방 등의 이국(異國)의 덩굴성식물을 새기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는 원나라와 혼인동맹을 맺었던 시기인  고려시대에

오히려 조선조 보다 한반도가 더욱 국제화되었기 때문이다.

 

 

 

 

5첩대발우 마다 그릇 안쪽에 국화흑백상감문이 있음.

 

- 국화문의 형상을 조금씩 달리하여

무애농차(無碍濃茶) 등을 여럿이 돌려 마실 때에

군신, 사제, 장졸,조손 간에 입이 닿는 곳의 구별을 쉽게 할 수 있게 함.

 

 

 

이 대발우(茶碗으로도 사용)로 임금과 신하, 스승과 제자, 장군과 병사, 할아버지와 손자가

한 그릇의 차를 돌려 나누어 마심으로서 한 솥밥을 먹는

한 식구라는 공동체 의식이 함양된다.

 

이 공동의식의 고취를 위하여 삼국통일시 패망한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과

승리한 신라인들을 화합시키 위하여 만드신 원효대사의 화정(和諍)사상이

오롯이 이 무애농차에 담겨져 있다.

 

이 때까지의 다법은 단차(團茶)와 떡차(餠茶)류를 화로에 잠시 구운 다음

찻맷돌(茶硏, 茶磨)에 갈아 채로 친 비교적 입자가 거친 가루차를

차솥(다당 茶鐺)의 끓는 물에 넣고 달여서 솥에 뜬 거품떡(말발 沫餑)과

잘 달여진 찻물을 다완에 나누어 마시는 성당(盛唐)시대에 유행하였던

다경(茶經)을 지은 육우의 전다법(煎茶法)이 통용되고 있었으나,

원효스님께서 여럿 함께 돌려가며 나누어 마실 수 있도록

가루차의 양을 넉넉히 넣어 진한 가루차(濃茶)인 무애차라는

새로운 다법을 만드셨고, 이것이 백제부흥군의 주축인 왜병들에게 전파되어

사무라이 중심의 무인차(武人茶)로 계승되어,오늘날의 일본다도의 주류가 농차가 되었다.

 

오늘날의 일본 다도의 주류인 말차도(抹茶道)는 육우 당시의 달여 마시는 가루차와

비교하여 볼 때, 제다공장에서 생산된 고운 입자의 가루차를 사용하기에

화로에 굽고, 찻맷돌에 가는 과정이 생략되었고, 차솥에서 달여 마시기 보다

뜨거운 물을 부어 차솔(茶筅)로 격불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위에서 설명한 육우(陸羽)의 다법과 원효스님의 무애차 다법의 차이점은

육홍점(陸鴻漸)의 다법은 차솥에서 달인 가루차를 거품떡인 말발(沫餑)과 함께

4~5개의 다완에 골고루 나누어서 다회에 참석한 각자가 하나의 다완을 가지고 마시는 것에 비하여,

원효의 무애차(茶)는 아래 사진의 고려상감청자 연화당초문 5첩대발우와

같은 큰 다완에다 진하게 달인 차를 따른 다음,차객이 마음껏 마시고 옆사람에게 돌려주어

다회에 참석한 사람 모두를 화정(화쟁 和諍)사상으로

말없이 보이지 않게 일체감과 동질성을 갖게하는 평화와 화합의 다법임이 차이가 있다.

 

이렇듯이 형식에 억매이지 않고 수류화개(水流花開) - 물 흐르는 듯,

꽃이 피어나 듯 거침없고 지극히 자유자재한 행다법(行茶法)이

바로 요동과 요서지방 그리고 한반도, 일본열도에 걸쳐 넓은 영역을

지배하고 있었던 우리 선조들의 다례 전통으로 굳어졌다.

 

 

 

 

 

 

 

이 글에 고려상감청자 연화당초문 5첩대발우의 사진을 게재하는 연유는

 

한동안 이 대발우의 사용용도를 궁금해 하다가 원효스님의 무애차를

 

마니산 참성단에서 저어 마시면서 불현듯이 이 대발우 - 이 큰다완의

 

용도가 떠올랐기에 몇해 전에 찍은 사진을 덧붙인다.

 

 

함께 찻자리를 나누신 분들 중에 사형제 간으로 보이는 두분의 비구니, 비구스님이

 

계셨는 데, 속세를 떠나 불문에 드셨어도 남녀는 유별(有別)한지라,

 

옻칠나무다완에다 무애농차를 타서 드리자 사제인 비구스님께서

 

한 다완의 차를 사형인 비구니스님이 계신 탓에 일행 여럿이서 돌려마시기 거북하셨는지

 

조그만 찻잔에 나누어 마시는 것을 보고 나서 다완에 입닿는 곳을 구분하는 무늬가 있었다면

 

이러한 번거로움이 없지 않았을까 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 ,

 

이 5첩대발우 안쪽에 흑백상감된 국화문이 뇌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고려 중기에 만든 담담한 비취색의 이 대발우로 무애차를 마시던 우리 선조들은

 

일본에서 국보로 여기고 있는 이도다완(井戶茶碗)을 막사발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었음에

 

생각이 미치자 갑지기 큰 웃움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기 어려웠다.

 

 

 

 

 

고려상감청자 연화당초문 5첩대발우(大鉢盂)

 

 

 

 

 

 

 

황화소심(黃花素心)

- 동양란과 서양란의 교잡원예종임.

동서양 문화교류의 결과물들은 이렇게 소박하게도 화려합니다.

 

 

 

 

 


 

자연암반을 이용한 참성단 중수비





 

참성단중수비 안내판

 


 



    원효가 보여준 무애는 해탈한 자의 소박한 모습이었으며,

소유와 집착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의 모습이었다.

어떠한 명예나 계율이나 지식이나 권위로부터도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는 무애행을 통해 일심과 화쟁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그 모습은 한 없이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무애를 통해 모든 욕망을 버리고 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고영섭, 1997). 


   그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무릇 중생의 마음은 원융(圓融)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바다와 같이 평등하여 차별상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철저한 자유가 중생심(衆生心) 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고,

 스스로도 철저한 자유인이 될 수 있었으며,

그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승과 일심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밖에도 원효는 여래장사상 등 불교의 모든 사상에 대하여서도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논문] 무애차(無碍茶)의 현대적 행다법 - 김정신, 전재분 중에서 인용 ....

 

 

 


자연적으로 형성된 고인돌 모양의 암괴

 



 

 

강화도는 원래 여러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려 고종19년(1232년) 몽골군이 쳐들어 오자 고려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30년동안 웅거한다.

이 때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갯벌을 메꾸고,

 섬과 섬 사이를 연결하여 간척지를 만들시작했다.

간척은  20세기까지 꾸준히 지속되어 마침내 오늘날의 강화도 모습이 되었다.



정상 부근에만 해무에 쌓인 진강산(441m)

마니산 북쪽의 화도면 , 진강산 남쪽의 양도면 일대

중앙부가 가릉포 평야...


 

 

 

함허동천 가는 능선상의 암릉



 


흥왕리 해변에도 짙은 해무가 드리우기 시작하고...




 

언제 그랬냐는듯이 해무가 걷히기도 한다.

바위 뒤 작은 능선 너머가 고려이궁지

 




 

암능길에 핀 구절초



 


시간은 흘러  여차리 해변에는 짙은 해무로 낙조가 내려앉은 듯....

들꽃촬영과 찻자리 등으로 보통 4시간 정도 걸리는 산행이

정수사 앞에 까지 대략 8시간 정도 걸렸다.

약 두배 가량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고려이궁지와 낮은 능선 너머 여차리 해변...

밧줄난간 너머 사진 오른쪽 봉우리가 지나온 참성단과 마니산 정상(471.2m)

 


 

육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시안 시에 있는 육우의 조각상

 

 

   육우(陸羽, 733년 ~ 804년)는 중국 당나라의 문인이며, 홍점(鴻漸), 상저옹(桑苧翁)이다. 를 만들고 마시는 것에 관한 지식을 정리한 《다경》(茶經) 3권 등을 저술하였으며, 중국의 차 문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생애[편집]

    육우는 복주(復州) 경릉군(竟陵郡, 현재의 후베이 성 톈먼 시) 출신이며, 3살 때 호숫가에 버려졌다. 용개사(龍盖寺)의 주지인 지적선사(智積禪師)가 그를 거두어들였으며, 후에 성은 주지의 성을 따 '육(陸)'으로, 이름은 점을 쳐 점괘에 따라 '우(羽)'로 하였다. 그는 말더듬이었지만, 웅변에 능하였다. 육우가 어렸을 때, 지적선사는 육우가 불경을 읽으며 승려가 되기를 기대했지만, 육우는 유교를 배우려고 하였다. 이에 지적선사는 육우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육우에게 매우 힘든 일을 하게 했지만, 육우는 대나무 가지로 가축의 등에 글씨를 몰래 연습하였다.

그 뒤, 육우는 절에서 도망하여 극단에 들어가 배우로 활약했으며, 천보년간(天寶年間)에 경릉태수(竟陵太守) 이제물(李齊物)의 눈에 들어 그의 추천으로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이후, 경릉의 사마(司馬)인 최국보(崔國輔)를 만나 그와 어울렸으며, '정행검덕(精行儉德)의 정신'을 이상으로 삼게 되었다.

 

   지덕(至德) 원년 (756년), 육우는 안사의 난을 피하기 위해 강남(江南)으로 피신하였고, 상원년간(上元年間)에 오흥(吳興, 현재의 저장성 우싱 구)에 암자를 만들고 은거하면서 호를 '상저옹(桑苧翁)'으로 하고, 저서를 집필하였다. 그곳에서 육우는 그곳의 승려인 교연(皎然)과 친분을 쌓게 되었고, 여러 차 산지를 돌아다니며 차에 대해 연구하였다. 육우가 은거하는 동인 조정에서 그를 태자문학(太子文學)이나 태상시태축(太常寺太祝)에 임명하였으나, 그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10년 후인 건중(建中) 원년 (780년)에 14년 동안의 차 연구를 정리하여 《다경》 3권을 저술하였다.

   대력년간(大曆年間)에 육우는 호주자사(湖州刺使) 안진경(顔眞卿)과 교제하였으며, 그가 《운해경원》(韻海鏡源)을 저술할 때 편집에 참여하였다. 어사대부(御史大夫) 이계향(李季鄕)과의 일화로 〈훼다론〉(毁茶論)을 쓰기도 했다.



능선상에는 이미 가을빛이 찾아오고...




 

햇님은 짙은 해무와 숨바꼭질을 한다.



 


가는장구채가 마치 등골나물 처럼 소복한 취산화서를 보여준다.

 


 

산부추 꽃도 능선상에서 자외선을 많이 쬐어

꽃자주색이 진하다.

미개화주는 구절초




 

참성단(정상에 소사나무가 한그루 있다)과 마니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암릉길




 

참성단과 여차리 해변



 


반대편에 있는 저 봉우리를 넘어가야

함허동천이나 정수사로 내려가는 삼거리 갈림길이 나타난다.


 


흥왕리 해변 풍경



 





 

거북바위라고 하나 자라바위라고 하나??

 




 




 


 

흥왕리 해변과 나지막한 구릉 끝에 있는 미루지돈대

구릉 끝에서  바다에 놓인 미루지선착장



 


흰구름버섯 어린 개체

 

- 목재를 해면상으로 썩게 만드는 이러한 부후성버섯에서도

인류나 동물들을 질병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약성 동물실험을 하고 있다니

병과 약을 모두 마련해 놓으신 조화옹의 크신 배려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효능 : 거풍제습(祛風除濕), 윤폐지해(潤肺止咳), 화농생기(化膿生肌)

肌: 살 기

약리작용 : 항종양( Sarcoma 180/마우스, 억제율 65~90% ,

Ehrlich 복수암/ 마우스 , 억제율 80% )

암에 걸린 동물의 생명 연장

적응증 : 풍습성 관절염, 천식, 기침, 폐질환 , 외상 감염

 




 

노을진 것 처럼 짙으진 해무



 


참성단마니산 정상에도 해무의 장삼(長衫) 자락이 휘감겨져 있고...



 


잠시 만에 묵향짙은 수묵화를 그려낸다.




 




 



 


분오리돈대와 동막해변



 

해무의 춤사위는 끝나지 아니하고...

 

 

저 봉우리를 넘으면 정수사(淨水寺)로 하산한다.



 

구절초




 


구절초와 꽃며느리밥풀꽃이 너른 바위평상 위에

마치 누가 찻자리 다화(茶花)장식을 해놓은 것 처럼 

함초롬히 피어 있으나 너무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한꺼번에 사진찍기는 어려웠다.




 

꽃며느리밥풀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