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화정지화

2014. 10. 13. 23:28들꽃다회






       

원효의 화정지화  좋은글 

2013/12/28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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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 화정지화

     

신라에 있어

茶와 佛敎와는 끊을 수 없는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은

  

충담사와 기파랑월명대사, 혜소, 진감국사

등의 고승이 있었으며 이들과 다에 관한 이야기도 많다.

  

그러나

그중 가장 크게 불교계 영향을 미친 것은 원효대사이다.

  

원효대사와 에 관한 것은

사포와의 일화 및 감천전설 등을 비롯하여 원효방 다론 등 많다.

    

정상구의 『한국다문화학』에서는

원효가 불교계의 해동보살일 뿐 아니라 우리의 다도정신

그의 自得道通한 견지에서 승화시키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논하고 있다.

  

신라통일 초를 전후하여 많은 고승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대부분 당나라 유학을 갔다와 당나라 불교의 영향을 받았거나,

  

아니면

당나라 영향을 받은 스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당나라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았던 원효는 스승없이 자득달통한 사람이다.

  

이에 관해

삼국유사는 「원효는 일정한 스승이 없이 스스로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다.」라고 했다.

  

또 고려의

대표적인 고승인 의천대각국사는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불교를 생각하여 선대 선지식들의 학덕을

    두루 배우고 익혀 관찰해 왔으나 원효성사위에 지나가는 이는 없다.」

  

라고 하여

원효를 聖師라 칭했으며 또 海東菩薩이라고 칭했다.

  

이런 점에서

더욱 와 불교와의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다도정신에 있어 화합은 막연한 화합 정신에만 그치지 않고

원효의 위대한 和諍사상과 자연 결합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원효의 화정사상

백가이쟁(百家異諍)의 실마리를 풀어서 진리의 바다에 되돌려 보냄으로 하여

  

한국적 화정사상

곧 원융회득하는 정신을 이룩했다.

  

즉, 화는 원효

반야경종요서(般若經宗要序)에 나오는

화정지화사상은 다음 구절에서 엿볼 수 있다.

  

   백가의 서로 다른 다툼을 회통시켜서

   드디어 요란한 四生의 중생들로 하여금 둘도 없는 참다운 본성에 들어가게 하여

   

   꿈꾸는 생사의 긴 잠을 깨워서

   큰 깨달음의 지극한 果에 이르게 하며 지극한 과의 큰 깨달음을 이르게 한다.

  

그리고 정(諍)사상

원효의 해동기신론별기의 다음 구절에서 엿볼 수 있다. 즉,

  

「불도가 진리의 길이 되는 것은

   텅 비고 고요하고 말숙하면서 깊고도 그윽하기 때문이다.

 

   그윽하고 그윽하지만 만가지 형상밖에 벗어나지 않으며

   고요하고 고요하지만 오히려 백가의 이론속에 있도다. 」

  

여기에서

원효가 제일 중요시하는 사상은 「적지적(寂之寂)」사상이다.

  

적지적사상이란 무엇인가.

적(寂)은 고요할 적 즉, 정야(諍也)안야(安也)가 주격이다.

  

적지적사상

즉 극적(極寂)을 말함으로 극적이란 적의 근원에 돌아감을 말함인데

  

적의 근원은 바로 청적(淸寂) 즉 정(諍)이다.

이는 노자의 도덕경의 다음 구절에서도 엿볼 수 있다. 
  

   대체 모든 물은 운운하지만

   각각 그 근원에돌아가는 것을 정이라 한다.

  

노자는 여기에서 무위자연 곧 적지적함을 두텁게 지키면

천지만물이 모두 일어나는데 그것이 諍에 돌아간다는 것을 말함이다.

  

이와같이

근본 뿌리에 돌아가는 것을 즉, 諍이라 한다는 것이다.

  

노자의

이치를 통해 볼 때 寂의 본질은 諍인 것이다.

  

원효

적지적사상도 바로 노자의 그것과 상통한다고 본다.

  

적(寂)은 고요할 적, 바로 정야(諍也)다.

적을 강조하여 적지적이라 함은 바로 적의 근원인 諍, 바로 깨달음을 일컬음이라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원효의 불교사상은 바로 화정(和諍)이라 하겠고,

다선일체관(茶禪一體觀)을 가진 원효의 다도정신 역시 화정(和諍)이라 함이 옳을 것이다.

  

원효에 있어

차를 마시는 경지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원효가 불법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 때

당정산 고총에서 어느날 밤에 해골에 담긴 물을 먹고 그 맛이

감로수 같았던 것이 날이 밝아 보니 해골에 담긴 물이라 구토를 느꼈다.

  

여기에서

그는 깨달음을 가져 왔다.

  

다 같은 물인데

어느 때는 감로수 같고

어느때는 구토를 느끼고

  

그는 삼계(三界)

모두 허위이며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진리를 깨우쳤다.

  

「마음 그것은 내가 없는 무아경에 이를 때

   眞性이며 陽을 나타날 때 和가 된다. 고로 화는 교의 근본이다.」

  

라고

그는 교의를 세웠으리라.

 

이상과 같이 원효

그 누구에게도 배운 바 없이 스스로 인심자득(因心自得)하여

  

후일 고려왕조에서는

그의 위대한 화정사상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화정국사라는 칭호를 내리기까지 했다.

 

화정국사 원효

화정정신이 바로 한국다도정신의 근원이라고 하겠다.

  

원효대사에 얽힌 차얘기는

고려 이규보의 「남행월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튿날

   부령현재인 이군 및 다른 손님 6-7인과 원효방에 이르렀다.

  

   높이가 수십길의 나무 사다리가 있는데,

   발을 포개고 매우 조심하여 걸어서 도달하였더니,

   뜨락의 층계와 창문이 수풀 끝에 솟아 있었다.

  

   듣자니

   가끔 범과 표범이 있는데 아직은 당겨서 올라온 놈이 없다고 한다.

  

   곁에서 한 암자가 있는데,

   속말로 사포성인이 옛날에 살던 곳이라고 한다.

  

   원효가 와서 살았기에 사포 또한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서 효공에게 올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음을 근심하다가,

  

   그 물이 문득 바위 틈에서 솟아나고,

   맛이 매우 달고 젖과 같아서 점다를 시험하였다.

  

이 글에 나오는 원효방터

전북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개암사의 뒷산인 우금암 밑이었던 것으로 판단되고,

  

원효대사

그 곳에 간 시기는 백제가 멸망한 뒤 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원효대사와 사포스님에 대한

설화는 『삼국유사』의 「말하지 않은 사복」 조에 적혀 있다.

  

참고로 석용운의 「한국다예」에 나오는

원효성사의 행다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먼저 다실 밖에서 탕관에 물을 끓일 준비를 한다.

       불을 피울 숯이나 마른 나무를 가져 온다.

   

   ② 다실 밖에서 불을 피워

       찻물을 끓일 차비를 해 놓고 샘에서 물을 길어 온다.

   

   ③ 화로에 차솥을 올려 놓고 물을 끓인다.

       물 끓이는 일은 밖에서 한다.

   

   ④ 차 달일 다구를 챙겨서

       다실로 가지고 들어가 배열을 마친다.

  

   ⑤ 밖에서 물이 다 끓으면

       삼발이나 화로를 준비해서 차솥을 가지고 들어와 다실에 놓는 다.

  

   ⑥ 떡차를 다연에 넣고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놓는다.

       가루차는 거친 가루이다.

  

   ⑦ 차솥의 탕수를 한 바가지 떠서 잔을 데운다.

       그리고 가루차를 차솥에 넣는다.

  

   ⑧ 또는 가루차를 찻잔에 넣고

       탕수를 한 바가지 떠서 그 위에 붓는다.

    

   ⑨ 차솥에 넣은 차는

       잘 끓여진 후에 찻잔에 떠내서 따로 만나지만

      

   ⑩ 찻잔에 가루차를 넣고

       그 위에 탕수를 부어서 만든 차는 다선으로 저어서 거품을 낸다.

  

   ⑪ 적당하게 물과 차가 섞여지고

       거품이 나면 찻잔을 찻상으로 옮긴다.

  

   ⑫ 찻상에 받들어 가지고 가서 원효대사께 드린다.

       차를 다 마시면 찻잔을 물린다.

  

   ⑬ 찻상에 찻잔을 받아 가지고

       물러나 다구를 챙겨서 치운다.



       - 네이버 블로그 <살구에요..>  남살구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출처] 원효의 화정지화|작성자 남살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