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13. 23:03ㆍ들꽃다회
한국사이야기 - 원효의 사상과 업적에서 배울점이 무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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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1. 원효대사의 사상
현존하는 그의 저술은 20부 22권이 있으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100여부 240권이나 된다.
특히, 그의 《대승기신론소》는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은 인도의 마명(馬鳴)·용수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명칭을 받은 저작으로서 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대저술이다.
그는 학승(學僧)으로서 높이 평가될 뿐만 아니라, 민중교화승으로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 종파주의적인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會通)시키려 하였는데 그것을 오늘날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라 부르며, 이것은 그의 일심사상(一心思想)·무애사상(無#애14思想)과 함께 원효사상을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사상은 너무나 다양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나 항상 ‘하나’라는 구심점을 향하였고, 화쟁과 자유를 제창하였다.
① 일심사상
원효의 일심사상은 그의 저서 《금강삼매경론》·《대승기신론소》 등 그의 모든 저술에서 철저하게 천명되고 있다.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본각(本覺)으로 돌아가는 것, 즉 귀일심원(歸一心源 : 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만법귀일(萬法歸一)·만행귀진(萬行歸眞)을 굳게 믿고 사상과 생활을 이끌어갔다. 그리고 일심이야말로 만물의 주추(主樞)이며, 일심의 세계를 불국토(佛國土) 극락으로 보았고, 이것을 대승·불성(佛性)·열반이라고 불렀다.
② 화쟁사상
원효는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화엄경》·《반야경》·《열반경》·《해심밀경 海深密經》·《아미타경》 등 대승불교 경전 전체를 섭렵하고 통효(通曉)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전체 불교를 하나의 진리에 귀납하고 종합 정리하여 자기 분열이 없는 보다 높은 입장에서 불교의 사상체계를 세웠다. 이러한 그의 조화사상을 화쟁사상이라고 한다. 《십문화쟁론 十門和諍論》은 바로 이러한 화쟁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핵심적인 저술이다. 그는 여러 이설(異說)을 십문으로 모아 정리하고 회통함으로써 일승불교(一乘佛敎)의 건설을 위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그의 이와같은 통불교적 귀일사상은 한국불교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③ 무애사상
원효의 무애사상은 그의 사생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한 자유인이었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애14人 一道出生死).”라고 한 그의 말을 보더라도 그의 무애사상은 짐작된다.
그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무릇 중생의 마음은 원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오히려 바다와 같으므로 평등하여 차별상(差別相)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철저한 자유가 중생심(衆生心)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고, 스스로도 철저한 자유인이 될 수 있었으며, 그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승과 일심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밖에도 원효는 여래장사상 등 불교의 모든 사상에 대하여서도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2. 원효대사의 생애 및 배울점- 원효(617 ~ 686년)는 속성은 설(薛)이고, 법명은 원효이며 아명 서당(誓幢) ·신당(新幢). 압량(押梁:慶山郡)이고 설총의 아버지이다. 648년(진덕여왕2) 황룡사에서 승려가 되어 수도에 정진하였다. 가산을 불문에 희사하고, 초개사를 세우고 자기가 태어난 집터에는 사라사를 세웠다. 650년(진덕여왕 4)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는데, 중도에 고구려 순찰대에 붙잡혀 실패하였다. 661년 의상과 다시 유학길을 떠나 당항성에 이르러 한 고총(무덤)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마신 물이, 날이 새어서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음을 깨닫고 그냥 돌아왔다. 그 후 분황사에서 독자적으로 통불교를 제창,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하루는 거리에 나가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 라고 노래한 것이 태종무열왕에게 전해져 요석공주와 잠자리를 같이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설총이 태어났다. 이 사실을 스스로 파계로 단정하고,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복성거사라 자칭하였으며, 《무애가》를 지어 부르며 군중 속에 퍼뜨리자 불교가 민중 속에 파고들었다. 또 당나라에서 들여온 《금강삼매경》을 왕과 고승들 앞에서 강론하여 존경을 받았다. 그 후 참선과 저술로 만년을 보내다가 70세에 혈사에서 입적하였다. 뒤에 고려 숙종이 대성화정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불교사상의 융합과 그 실천에 힘쓴 정토교의 선구자이며, 한국의 불교사상 큰 발자취를 남긴, 가장 위대한 고승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다.
- 원효의 대중불교
당시 귀족중심이었던 불교를 모든 대중이 다 접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지금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예전처럼 신분제도가 엄격한 사회에서 이러한 일은
아주 혁명적인 일이었겠죠. 사람의 고하없이 모두에게
사람을 베푸는 정신을 배워야겠죠.- 다음 Tip자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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